이향군고거진열관((李香君故居陳列館)


이향군(李香君 1624년 ~ 1653 추정)


소주(蘇州) 창문(閶門) 풍교(楓橋) 사람으로 본래 성은 오(吳)씨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의 명기(名妓)로, 부친은 본래 무관(武官)인데

동림당(東林黨) 성원으로 위충현(魏忠賢) 일파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 몰락되었다.


이향군은 8세에 양모(養母) 이정려(李貞麗)를 따라 성을 이씨(李氏)로 바꾸고,

남경(南京) 말릉교방(秣陵教坊)의 명기로 활동했고다.


뒤에 난징의 문학결사 복사(複社) 운동의 우두머리였던 후방역(侯方域)의 첩(妾)이 되었다.

그녀는 유여시(柳如是), 마상란(馬湘蘭), 변옥경(卞玉京), 동소완(董小宛), 고횡파(顧橫波),

구백문(寇白門), 진원원(陳圓圓) 등과 더불어 명말청초 남경 진회 일대를 풍미했던 8명의 기녀와 함께

진회팔염(秦淮八豔)으로 일컬어진다.


진회팔염(秦淮八艳)


진회팔염(秦淮八艳)이란 명말 청초(明末 清初) 남경 진회하(南京 秦淮河)에 살던 

여덟 명의 이름난 명기(名妓)를 말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금릉팔염(金陵八艳)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유신 여담심재의 "판교잡기(板桥杂记)"라는 기록에 따르면

처음 기록에는 고횡파(顾横波)、마상란(马湘兰)、구백문(寇白门)、변옥경(卞玉京)、이향군(李香君)、동소완(董小宛) 등

여섯 명이었는데 후인들이 유여시(柳如是), 진원원(陈圆圆)을 새로 추가하여 팔염이 되었다고 한다.


일흔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있다.

그의 생일잔치를 차려준 이는 한때 난징에서 이름을 날린 명기 마상란(馬湘蘭, 1548~1604).


마상란은 스물넷에 왕치등을 만난 뒤 삼십여 년을 그만 바라봤다.

난초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결함’을 꿈꾸었던 마상란은 왕치등이

자신을 아내로 맞아주길 바라고 바랐지만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치등의 일흔 생일잔치를 치러주고 몇 달 뒤 마상란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예교와 명분과 명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상란보다 70년 늦게 태어난 유여시(柳如是, 1618~1664),

그녀는 스물이 갓 지났을 때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났고 삼년 뒤(1641) 그에게 시집갔다.


본부인의 반대, 36살의 나이 차,

뭇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전겸익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 유여시를 맞이했다.


누가 알았으랴. 전겸익이 명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맞이했던 기생 유여시의 덕을 보게 될 줄이야.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고 숭정제는 목을 매 죽는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 유신들은 난징에서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을 세운다.

홍광제 주유숭이 제위에 오른 이듬해(1645), 청나라 군대가 난징으로 쳐들어온다.


이때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순국하자고 했다.

호수로 간 두 사람, 몸을 던지기 직전 전겸익은 망설인다.


“물이 너무 차구려. 들어갈 수가 없소.”

유여시는 끝까지 몸을 던지려 했지만 전겸익이 저지했다.


당시 전겸익의 벗들은 청나라를 섬기지 않기 위해 곡기를 끊고 죽기까지 했다.

그런데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전겸익은 청나라 조정의 예부시랑이 된다.


유여시는 그를 따라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난징에 남는다.

전겸익은 반년 만에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지만 곧 감옥에 갇힌다.


유여시가 백방으로 노력한 덕에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전겸익은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강희 3년(1664), 여든셋의 전겸익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유여시도 자결한다.

유여시는 전겸익을 감옥에서 빼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반청 세력과 연합하도록 고무했다.


유여시가 아니었다면 전겸익은 변절자의 낙인을 조금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가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가 바로 <유여시 별전(別傳)>이다.


천인커는 유여시를 이렇게 평가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운명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십리진회’ 양쪽 기슭으로 펼쳐진 난징의 번화가에서 지냈던 여인들의 삶은 많이 닮아 있다.

마상란과 유여시, 그리고 다음의 여섯 여인(고미생·변옥경·진원원·동소완·구백문·이향군)은

소위 ‘진회팔염(秦淮八艶)’으로 통칭된다.

진회팔염, 진회하 일대의 여덟 미인은 모두 기생이었다.


유여시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고미생(顧眉生, 1619~1664),

그녀 역시 당시 문단에 이름을 날리던 공정자에게 시집갔다.


불과 몇 년 뒤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한다.

이때 두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으려 했지만 결국 죽지 않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고미생은 공정자와 죽으려 했으나 공정자가 죽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고,

우물로 뛰어들었지만 구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공정자가 이렇게 변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나는 죽으려 했지만 소첩이 싫다고 하니 어찌하오?”


그가 정말 소첩 즉 고미생 때문에 죽지 못한 것일까?

아무튼 공정자는 이자성에게 귀순했고, 뒤이어 청나라의 품안에 들어갔다.


훗날 고미생은 일품부인(一品夫人)에 봉해진다.

기녀 출신으로, 조정으로부터 정식 봉호까지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일까.


고미생은 마흔이 넘어 겨우 딸을 낳지만 몇 달 만에 딸이 죽고 만다.

이에 병이 깊어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전겸익·공정자와 더불어 ‘강좌(江左) 삼대가’로 불리는 오위업 역시 진회의 명기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변옥경(卞玉京, 1623~1665).


변옥경은 오위업에게 시집가길 바랐지만 오위업은 모른 척 외면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난 때는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오위업은 남명 왕조에 잠시 몸담지만 곧 실망하고 조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능하고 조정은 부패하고 당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오위업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생(生)’과 ‘의(義)’의 양자택일을 회피하는 방법이었다.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불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난징에 남았더라면 유약한 그의 성격상 전겸익처럼 청나라의 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터.

몇 년이 지난 뒤 오위업은 변옥경과 재회한다.


황색 도포를 걸친 변옥경은 스스로를 ‘옥경 도인’이라고 칭했다.

그녀 역시 난세에서 ‘생’과 ‘의’ 사이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리라.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변옥경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동안, 오위업은 청 조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삼 년 남짓 벼슬을 지낸다.


오위업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통탄스럽게 여긴 시간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변옥경은 세상을 떠난다.

삼 년 뒤 변옥경의 무덤을 찾은 예순의 오위업은 그녀를 기리는 시(過錦村林玉京道人墓竝序)를 바친다.


오위업은 진원원(陳圓圓, 1623~1695)의 사연을 노래한

‘원원곡(圓圓曲)’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머리털이 관을 찌를 듯 격노한 것은 홍안 때문이라네(衝冠一怒, 爲紅顔)”라는 구절에서,

미녀를 의미하는 홍안은 진원원을 가리킨다.


진원원은 오삼계 때문에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오삼계가 진원원을 알게 된 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바로 전해였다.


어쩌면 진원원은 숭정제의 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와 인연이 닿지 않은 그녀는 결국 황제가 총애하던 전귀비의 아버지 전홍우의 가기(家妓)가 되고,

전홍우는 그녀를 오삼계에게 넘긴다.


진원원과 오삼계는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했다.

오삼계가 명나라 최후의 보루인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러 떠났기 때문이다.


곧이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결한다.

오삼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청나라 군대를 막아야 하는가, 이자성의 군대를 무찔러야 하는가?

외적과 역적을 동시에 상대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그는 역적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외적에게 도움을 청한다.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을 넘어와 이자성 군대를 무찌르고 자금성을 접수했다.


오삼계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만약 이자성의 편에 섰더라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으리라.


오삼계가 이자성을 향해 창끝을 겨누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진원원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진원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삼계가 격분한 나머지

결국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는다.

역사를 뒤흔든 뜨거운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무상하다.


청나라의 공신이 된 오삼계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원원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내 식었다. 진원원은 결국 오삼계를 떠나 부처에 귀의한다.


사실 진원원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숭정 14년(1641) 봄날, 진원원은 모벽강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혼인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진원원이 강제로 베이징 궁전으로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난다.


바로 이때 모벽강의 삶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 있으니 동소완(董小宛, 1624~1651)이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정을 추구한 여인이다.


요샛말로 스토커라고 할 정도로, 동소완은 모벽강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와 함께하게 된다. 동소완은 모벽강을 많이도 좋아했나 보다.


모벽강이 등에 종기가 나서 똑바로 누울 수 없을 때,

동소완은 그가 편히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려고 자신은 꼬박 100일을 앉은 채 잤다고 한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중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원래 몸도 약한 데다 모벽강의 병시중을 자주 들어야 했고 생활까지 궁핍했던 게 그녀의 수명을 재촉했다.


동소완은 모벽강과 9년을 함께하고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비익(比翼)’과 ‘연리(連理)’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 쌍의 팔찌.


어느 칠석날, 모벽강이 새겨준 것이다.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암수가 함께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결이 통해서 하나의 가지가 된 연리지,

동소완은 그렇게 비익조와 연리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기녀의 운명
동소완 같은 여자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남자, 가장 혐오할 남자가 바로 주국필일 것이다.


주국필과 인연을 맺은 비운의 여인은 구백문(寇白門, 1624~?).

그녀가 시집간 지 3년이 지났을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주국필은 명나라 공신의 집안 출신임에도 바로 청나라에 투항했다.

베이징으로 잡혀간 주국필은 집안의 모든 여인을 팔아서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려 했다.


구백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대신 다시 진회하의 기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대신 한 달 안에 그의 몸값을 마련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결국 구백문은 다시 기녀가 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주국필의 몸값을 치러주었다.

일찍이 난징이 떠나가라 호화로웠던 혼인날은 아득한 꿈이었던 듯, 구백문은 주국필을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주국필은 다시 구백문을 찾지만 그녀는 단호히 인연을 끊는다.

“당신이 돈을 써서 나를 기루에서 빼냈고 나는 당신의 몸값을 치러줬으니, 이제 서로 빚진 게 없지요.”

이후 구백문이 진정한 사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들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의 주인공 이향군(李香君, 1624~1653) 역시 그랬다.

이팔청춘 열여섯의 이향군이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복사(復社) 4공자(公子)’ 중 한 명인 후방역이다.


복사는 명나라 말 강남 지역에서 결성된 문학단체로, 비판적 정치성향이 강했다.

후방역이 이향군을 처음 만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그 돈을 지원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의 출처가 후방역이 그토록 경멸하는 엄당의 완대성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안 이향군은 돈을 마련해 후방역에게 주면서 완대성에게 돌려주게 한다.


이 일로 후방역은 앙심을 품게 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이 세워진 뒤 완대성이 실권을 갖게 되자, 후방역은 난징을 떠나 피신한다.


완대성은 남명 왕조의 실력자 전앙을 부추겨서 이향군을 첩으로 들이게 한다.

이향군은 이를 거부하며 난간에 머리를 부딪친다.


이때 튄 피가 부채를 물들인다.

후방역이 정표로 주었던 부채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부채에 그림을 그려 그 핏자국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향군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향군의 상처가 낫자 완대성은 그녀를 입궁하게 한다.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향군이 입궁한 지 얼마 뒤, 청나라 군대가 난징을 공격하고 그 틈에 그녀는 도망친다.


이후 이향군과 후방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향군이 후방역을 다시 만나 함께 지내게 되지만 시댁에서 그녀의 기생 신분을 알게 되어 쫓겨났다는 설도 있고,

이향군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방역은 복사 4공자의 나머지 셋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진정혜와 모벽강은 끝까지 청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방이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지만,

후방역은 과거에 응시해 청나라 조정에 몸담는다.


훗날 그는 젊은 날을 후회하며 자신의 서재를 ‘장회당(壯悔堂)’이라고 명명했다.

‘장년의 후회’를 담은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향군이 죽기 전 후방역에게 당부하길

 “절개를 지키고 이민족을 섬기지 말라” 했다고 한다.


‘진회팔염’이라는 여덟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사랑했던 여덟 명의 남자.


진회하는 이들 만남의 증인이다.

진회하를 사이에 두고 강남공원(貢院)과 이향군 고거(故居)가 마주하고 있다.


강남공원의 수많은 과거 응시자들, 진회하에 늘어선 기루의 여인들,

얼마나 많은 이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랴.


기녀지만 사랑에 진실했던 여인도 있었을 터이고,

그런 여인을 그저 전리품이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을 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진회하의 술집을 보며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묵으면서)에서

“술파는 여인은 망국의 한을 모른 채 강 건너 편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를 부르네” 라고 한탄했다.


‘후정화(後庭花)’는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후주(後主)가 지었다는 노래다.

두목은 진회하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환락에 빠져 지내다가 수나라에 멸망당한 진나라의 전철을 당나라가 밟게 될까 저어한 것이리라.


하지만 두목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노랫가락의 주인공인 ‘그녀’가 ‘그’와 ‘조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글 :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향루(媚香樓)








▲ 이곳은 이향군과 복사문인들이 자주 만나던 곳이며 이향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이향군의 침실

이향군과 후방역(侯方域 1618 ~ 1654년)은 이곳에서 신혼의 밤을 지냈고

후방역이 피난하여 떠나기 전에 이향군이 <비파>곡을 부르면서 부두까지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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