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의항(烏衣巷)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남부에 있는 부자묘(夫子廟) 정문에서 나와 진회하(秦淮河)를 끼고

오른쪽 즉 서쪽으로 조금 가다가 문덕교(文德橋)라는 작은 다리를 통해 진회하를 건너면

하얀 석회벽에 ‘오의항(烏衣巷)’이라는 녹색 글자가 새겨진 좁다란 골목이 하나 나온다.


이른바 현학(玄學)을 즐기는 강남의 귀족들이 검은 옷(烏衣)를 입고 사는 거리라는 뜻이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오른쪽에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紀念館)이 있고 왼쪽에 빛바랜 민가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가 바로 중당(中唐)의 대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시상을 자극한 역사적인 골목이다.


오의항(烏衣巷) / 유우석(劉禹錫)


朱雀橋邊野草花(주작교변야초화) 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烏衣巷口夕陽斜(오의항구석양사) 오의항구에는 석양이 진다

舊時王謝堂前燕(구시왕사당전연)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앞 제비가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오의항(烏衣巷) :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동남쪽의 거리.

오(吳)나라 때 석두성(石頭城)을 호위하던 병영이 이곳에 있었는데,

당시 병사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동진(東晋)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등의 귀족들이 이 골목에 많아 살았다
주작교(朱雀橋) : 진회하(秦淮河)에 있는 다리 이름.

지금의 南京市 취보문(聚寶門) 안에 있는 진회교(秦淮橋)가 바로 그 유적이다. 이 다리는 오의항(烏衣巷)에 있다
작(雀) : 참새 작
왕사(王謝) : 동진(東晋)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양대 부호 귀족을 가르킨다.
심상(尋常) : 普通(보통),평상시(平常時)의 준말. 항상(恒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例事)로움. 흔하고 평범하다


남경은 삼국시대의 오(吳, 222-280) 나라가 도읍으로 삼은 이후

40년 뒤에 동진(東晋, 317-420)이 또 도읍으로 삼고, 뒤이어 이른바 남조(南朝)라고 불리는

송(宋, 420-479) · 제(齊, 479-502) · 양(梁, 502-557) · 진(陳, 557-589)이 연달아 도읍으로 삼은 유서 깊은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남경에 도읍을 정한 이들 여섯 나라를 통틀어 육조(六朝)라고 부른다.

이들 여섯 나라 가운데 존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나라가 동진인데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 집안이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을 대표로 하는 왕씨 집안과 사씨 집안이었다.


오의항은 바로 이 왕씨와 사씨의 집단 거주지였다.

오의항이라는 지명도 당시 왕씨와 사씨의 자제들이 까마귀처럼

까만 옷을 입고 다녔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진이 망하고 4백 년쯤 지난 어느 날 이 유서 깊은 고을에 들른 시인 유우석은

진회하를 따라서 주작교를 지나 오의항으로 들어갔다.


때는 바야흐로 초목들이 저마다 생기를 되찾고 있는 이른 봄날의 황혼녘이었다.

강가에 각종 야생화들이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화사한 꽃잎이 발간 석양까지 받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한때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던 최고의 권세가들이 살던 곳을 한번 구경한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푼 채 오의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제비들이 삼삼오오 둥지를 찾아드는데 눈으로 뒤를 쫓아가 보니

그것들이 둥지를 튼 곳은 작고 꾀죄죄한 보통 백성들의 집이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유우석의 상상 속 으리으리한 기와집 같은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거기가 바로 그 옛날 왕씨 집안과 사씨 집안이 세도를 떨치며 살았다는 오의항임에 틀림없는데

이제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백성들의 마을로 변해 있었다.


따져보면 강산이 변해도 수십 번은 변했을 긴 세월이 지났으니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권력이 너무 허망하고 인생이 정말 덧없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제비는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지난해에 둥지를 틀었던 집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다.


그러기에 흥부가 다리를 고쳐 준 제비가 이듬해에 돌아와서 놀부 집으로 가지 않고

작년에 둥지를 틀었던 흥부 집으로 가서 다시 둥지를 트는 것이다.


제비에게 이런 습성이 없었다면 다리는 흥부가 고쳐 주고

박씨는 놀부가 받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을 게 아닌가.


이 시는 제비의 이러한 습성을 잘 아는 시인이 자연의 일부인 제비는

변함없이 똑같은 옛집으로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사실을

재치있게 묘사함으로써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감회를 해학적 필치로 노래한 것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한때는 번성을 구가하던 나라나 도시가 몰락하여 한벽한 궁촌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누추하고 별 볼일 없던 지역이 번창하기도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오의항은 4세기 동진(東晉)의 수도였던 금릉(현재 난징)에 귀족들이 살던 동네 이름이다.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다투어 자태를 뽐내던 주작교 주변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고

고대광실(高臺廣室)이 즐비하던 오의항에는 해가 기울어 더욱 쓸쓸하다.


그 옛날 세도가의 집에서 살던 제비들이 오늘날은 무지렁이 백성들 집에도 예사롭게 날아든다.

여기에서 귀족들의 시대는 가고 만 백성들을 위하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심정을 제비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오의항은 지금의 남경 부근으로 진회하(秦淮河)는 그 남쪽에 있으며, 주작교와 가까이 있다.

그 옛날 호사함을 구가하던 동진(東晉)의 왕도(王導), 사안(謝安) 등 구택(舊宅)에는

지금 잡초만 무성하고 이름모를 들풀만이 자라고 있다.


여기에서 제비와 주인의 변환(變換)을 통해 상전벽해(桑田碧海)에 대한 감회를

시로 표현하는 방법이 아주 탁월하다.


한유(韓愈, 768~824) · 유종원(柳宗元, 773~819) 등과 동시대 인물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유우석은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개혁정치를 펼치던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투주사호참군( 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앞에 <유우석(劉禹錫)과 누실공원(陋室公園)>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시 <누실명(陋室銘)>은 바로 이 당시 지은 작품이다.


여기에서 시련에도 끄떡하지 않은 그의 기개가 느껴진다.

10년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가 도교의 사원인 현도관 도화(桃花)를 보고 지은 시에

"거리는 온통 붉은 색, 홍진이 얼굴을 스치는데, 복숭아꽃 보러 돌아오겠다 말하지 않는 사람 하나 없네.

현도관 안에는 복숭아나무 천 그루가 있지만, 모두 유랑(劉郞)이 떠난 후 심은 것이네"라고 한,

마지막 두 구절은 자신이 좌천된 후 권문세족들이 심어놓은 대신들을 풍자한 말이라고 하여,

다시 먼 변방 파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때 함께 좌천된 유종원이, 유우석은 노모가 있기에 대신 파주로 가게 해 달라고 상소하고자 했는데,

재상이었던 배도가 이같은 사실을 알고, 조정에 간청해 유우석의 임지가 연주로 바뀌었다 한다.


같은 해 두 사람은 동시에 장안을 떠나 남쪽으로 가다 형양에서 헤어졌는데,

그때 유종원이 <형양여몽득분로증별(衡陽與夢得分路贈別)>에

"10년 만에 초췌해져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도리어 5영 밖 멀리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하여,

그때의 심정을 남기기도 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발전하는 것인가?

긴 시간의 연장선에서 수많은 왕조가 성쇠를 거듭해왔고 지금의 우리들도 그 역사의 연장선에 서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도 그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하였다.

개혁을 시도하다 시련을 겪은 유우석의 한시를 감상해 본다.


강소성 남경은 수십 개의 나라가 일어났다가 망한 곳이다.

삼국(위·오·촉)시대 때 오나라 손권이 여기 군대를 주둔 시키면서

그 군사들에게 검은 옷을 입혔다는 설 때문에 동네 이름을 '오의항(烏衣巷)'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진(東晋) 때에는 이곳 진회가 귀족 동네였기에 그때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검은 옷을 즐겨 입혔다고 해서

오의항, 곧 검은 옷을 입은 마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옛날 화려했던 시절에는 주작교 근처에 잡초가 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황폐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주작교 넘어 오의항 마을이 황량하게 조락해가는 모습을 석양에 비유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증인인 제비가, 이제는 그 화려했던 명문거족의 집이 아닌

일반 백성의 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역사의 무상감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구를 "王謝堂爲百姓家(왕사당위백성가, 왕사의 집이 일반 백성의 집이 되었다.)"로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로 표현함으로써 만고천하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제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곳을 드나들고 있는데, 그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치개혁을 시도했던 유우석의 눈에 비친 진회는 역사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역사는 돌고 돌기 때문이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로 새긴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  오의항 문루 서쪽 담벼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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