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 321~379)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태생인데 강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선인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법을 연구 · 창조함으로써

서예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서성(書聖)’이라 불리고 있다.


글씨를 처음 배울 때 그의 글씨는 또래들과 비교하여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한다. 

하지만 글씨에 열중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태도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왕희지가 글씨에 열중할 때는 그야말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다른 학문을 공부할 때, 식사할 때, 길을 거닐 때, 하루 24시간 내내

글씨체의 대소, 구조, 운필(運筆)에 대하여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으로 옷이나 방바닥에 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옷이란 옷은 모두 달아서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글씨에 몰두하고 있어 가족이 밥상을 차려들고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런데 서재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희지는 글씨에 정신이 팔렸음인지 자신의 옷자락을 먹에 묻혀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가족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밥상을 가지고 왔음을 의식했을 무렵

왕희지의 입안은 온통 먹투성이가 된채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곧잘 연못 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의 물로 벼루를 씻었는데

얼마 후에는 그 연못의 물이 온통 검게 흐려져 그 연못을 ‘묵지(墨池)’라 부르게 되었다.


왕희지는 이러한 끈질기고 꾸준한 정신으로 수십 년 간의 노고 끝에

마침내 서예의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서예계의 정상에 올랐다.


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묵보(墨寶)’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 · 임천대수(臨川大守) · 강주자사(江州刺史) · 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 · 행(行) · 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

〈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여 진열되어 있다.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계제사(禊祭祀 )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그의 동산첩(東山帖)도 진열되어 있다.


왕희지에 얽힌 일화들


왕희지는 어느 날 회계 산음서 부채를 파는 노파를 만났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너무 허술하였기 때문에 부채를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노파를 가엾게 여긴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6자씩 써넣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채를 망쳐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왕희지는 그 노파에게 "왕희지 글씨 부채"라 외치라고 하였다.
“이 부채에는 왕희지의 친필이 씌어져 있어서 1백 전(錢) 이하로는 절대 팔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오.”


당시 부채값의 몇 십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왕희지의 친필이 담겨진 부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며칠 후 노파는 또 왕희지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희지는 이미 장강 이남에서는 명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글씨 또한 당대에서조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희지의 친구 중 한 사람이 양고기를 좋아했는데, 형편이 가난하여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그는 양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왕희지에게 편지를 썼고, 답장이 오면 내용을 읽은 후

그 편지를 <왕희지 글씨>라고 수집가에게 팔아서 그 돈으로 양고기를 사 먹었다.


왕희지는 친구가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는 것인데,

때로는 이런 황새를 흉내내려는 풍류가가 등장한다.


동파 소식의 문명이 한창 드높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가져온 하인의 말인즉  <친필로> 답장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왕희지의 양고기 좋아하는 친구 일화를 떠올린 소동파는 하인에게 농담삼아 일렀다.

"너희 주인 어른에게 가서, 오늘은 푸줏간이 문을 닫았다고 말씀드려라."


물론 이런 고상한(?) 농담이 하인에게 통할 리 없으니,

그의 생뚱맞은 말에 하인은 "오늘 푸줏간 영업합니다, 나으리." 하고 진지하게 반박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계 땅에 의지할 곳 없는 어느 노파가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거위의 울음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희지가 제자로 하여금 그 거위를 사려 하였으나 노파는 팔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왕희지는 그 거위를 가지지는 못할망정 한번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친척과 벗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왕희지가 친히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자기 집을 찾아온 명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거위를 잡아 대접하기로 하였다.


왕희지는 한번 구경삼아 찾아왔을 뿐인데 문제의 거위가 냄비 속에서 요리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을 두고 애석해했다고 한다.


산음 땅의 어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는 열렬한 애호가였으나

그 글씨를 손에 넣기가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우선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몹시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도사가 기르는 거위는 그 색깔이 희고 살집도 좋았다.


이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배를 타고 도사의 집을 찾아가 그 거위를 흥정하였다.

도사가 말하였다.


“이 거위는 내게 너무 소중하고 귀한 것이어서 팔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하시다면 그냥 선물로 드리겠으니 경전 한편을 베껴 주시겠는지요...”


거위를 몹시 좋아했던 왕희지는 대뜸 승낙하고 흔연히 붓을 들어 즉석에서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답례로 거위 한 쌍을 받았다.


여기에서 환아(換鵝)라는 말이 생겼다.

청나라 궐람(闕嵐, 1758~1844)이 그린 작품 화제(畵題)를 보면 뚜렷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書錄黃庭墨生彩(서록황정묵생채) 잘 쓴 황정경의 먹빛은 광채가 나고
逸少妙筆換白鵝(일소묘필환백아) 일소의 신묘한 운필은 흰 거위와 바꿨느니라


왕희지의 글씨는 수없이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난정서(蘭亭序)>다.

난정은 회계 산음에 있는 유서 깊은 명소로 산수가 아름답고 대나무 숲이 유명하였다.


특히 난정 부근에는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흘러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구력 3월 3일은 이 지방 고유의 명절이었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등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대하여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는 향연을 벌였다.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시냇물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내려 보내면 각기 냇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술잔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술잔이 자기 앞에 닿으면 즉흥시 한 수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기로 하였다.


그날 따라 시냇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술잔이 하나 둘 띄워져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술잔이 와 닿기를 기다리던 명사들은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자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이내 시 한 수를 지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모두가 당세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벌주를 마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40여 편의 시가 한꺼번에 완성되었다.


이 40여 편의 시를 한 책에 모으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이것을 <난정서>

또는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라고도 한다.


이 서문은 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뜻하고 매끈한 흘림체로 되어 있고

자체가 유려하여 중국 행서(行書)의 절품(絶品)으로 꼽히고 있다.


후세에 이르러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되어 왕희지의 후손으로부터

<난정서>의 필첩(筆帖)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 서예가 조모(趙模), 풍승소(馮承素) 등으로 하여금

난정서를 여러 책 베끼게 하여 친족과 측근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일생동안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여러 차례 제사(題詞)를 쓰고,

또 사후에는 부장품으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후 태종의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난정서> 진필은 유실되고 말았다.

왕희지의 행서의 대표적 작품은 이렇게 유실되었지만,

태종의 생존시에 왕희지의 글씨를 베끼는 일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강 이남에서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1천여 년에 걸쳐 왕희지의 글씨는 서체(書體)의 정통(正統)으로서 중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의 글씨는 주로 종이와 비단에 씌어졌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동안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나

청나라 건륭(乾隆, 1662~ 1795) 시대에 이르러 동진 때의 왕희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왕순(王恂)의 필첩이 발견되었다.


왕희지의 필첩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필첩은 〈중추접(中秋帖)〉,

왕순의 필첩은 〈백원첩(伯遠帖)〉이라 불렸다.


이 세 필첩은 희대의 진품으로 지정되어 내부(內府)에 특별 전시실을 설치하고 보존하였으며,

그 전시실을 ‘삼희당(三希堂)’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은 관광의 명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난정 곁을 흐르는 시냇물과 묵지 연못의 물에는 지금도 그 옛날의 서성 왕희지의 체취가 담겨 있는 듯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기념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당시의 실제 유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당시의 토기 몇 점과 남경박물관에 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새긴 벽돌 모사품,

그리고 북경박물관에 있는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 모사품이 눈에 띄었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년~263년), 혜강(223년~262년), 산도(205년~283년),

유영(연대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년~305년)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선망하는 대상이 된 것은 틀림없다.



낙신부도(洛神賦圖)


낙신부(洛神賦)는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이며 건안칠자(建安七子)라는 그 시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조식(曹植)이 낙양(洛陽)의 낙수(洛水)에서 신녀의 환영을 보고 읊은 장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시는 형인 문제 조비(文帝 曹丕)의 견황후(甄皇后),

즉 형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녀는 원래 조조에게 패한 원소(袁紹)의 며느리로 당대의 절색미인이라서

조씨 삼부자가 일종의 전리품으로 강탈하여 마지막에는 맏아들인 조비가 차지했다.

그러고보면 조식의 시가 아름답다고 말하긴 좀 껄끄럽다.


낙신부도(洛神賦圖)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년 ~ 406년 경)가 그린 그림이다. 

자(字)는 장강(長康), 호두(虎頭)이다.


강남 명문호족 출신으로 그림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와 서법(書法)에도 능했으며 박학 다식했다.

성격이 솔직하고 소탈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화절(畵絶), 재절(才絶), 치절(癡絶)을 갖춘 삼절(三絶)이라 칭했다.


특히, 인물화,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인물을 그리면서 몇년이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정신을 비추어 내는 곳이 바로 눈동자이다." 라고 했다.


그는 기존의 형사(形似) 위주의 화풍과는 달리 신사(神似)를 중시하여 인물화에서 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본은 복경박물관에 있고 여기에 있는 그림은 모사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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