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국자학(大明國子學) 명덕당(明德堂) 입구 문루


최고 학부인 국자감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국자학은 명대(明代) 학궁이다. 반궁(泮宮)이라고도 한다.


반궁은 학궁과 문묘(文廟)의 총칭으로 국학(國學)을 뜻한다.

 “학교를 지어 육예(六藝)를 키우자.”는 승상 왕도의 건의에 따라 동진 함강(咸康)3년(337년),

진회하 남쪽에 태학이 세워졌고, 남당(南唐)시기에 학궁이 만들어졌다.


북송 경우원년(1034년) 학궁과 공묘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소흥9년(1139년)에는 건강부학(健康府學)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나라 때는 집경로학, 명 초에는 국자학, 응천부학으로 불렸다.

청 순치7년(1650년)부터 상원현(上元縣)과 강녕현(康寧縣)의 현학으로 쓰이다가,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명덕당(明德堂) ㅡ 학궁의 중심건물


명덕당(明德堂), 존경각(尊經閣), 청운루(青雲樓), 숭성사(崇聖祠)를 포함하여 학궁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명덕당과 존경각만 남아있다.


과거에 생원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이곳에 모여 강의를 들었다.

중국의 학궁은 모두 명륜당(明倫堂)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명륜당(明倫堂)이라고 하지만

부자묘의 학궁만 유일하게 명덕당(明德堂)이라고 한다.

이것은 송나라 때의 이름높은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쓴 명덕당(明德堂) 편액 때문이라 한다.



금성옥진(金聲玉振)


금(金)은 종(鐘)이고, 옥(玉)은 경(磬)으로,

음악에서 팔음(八音)을 합주(合奏)할 때 먼저 종(鐘)을 쳐서 그 소리를 베풀고,

마지막에 경(磬)을 쳐서 그 운(韻)을 거두어 주악(奏樂)을 끝내는 것을 말하는데,

음악이나 문장 등의 시작과 끝이 조리가 있게 연결되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지(智)와 덕(德)이 갖추어 있음을 비유하기도 하고,

전(轉)하여 사물을 집대성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회인불권(誨人不倦)  사람을 가르침에 조금도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음. 주자의 글씨.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자왈: "묵이지지, 학이불염, 회인불권, 하유어아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묵묵히 외는 것과, 배움에 임하여 싫증을 내지 않는 것과,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지치지 않는 것,

이 가운데 무엇이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가?" 공자의 겸허한 교학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습례(習禮) 예운종(禮運鐘)이 있는 종루


예운종은 1999년에 제작된 동종이다.

높이는 2.55m, 무게는 4톤으로 공자의 탄생 255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 졌다.


종을 한 번 치는데(一擊 일타) 인민폐 2원이란다.

한 번 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세 번 치는 것은 장원을 알림이며,

아홉 번 치면 승승장구 관직이 올라간다고 한다.

많이 치면 건강에 좋고, 많은 복도 받는다고 적어 놓았다.


앙성(仰聖) 성음고(聲音鼓)가 있는 고루


고루와 종루에 있는 북과 동종이다.

성음고 역시 1999년 호북 숭양(崇陽)에서 출토된 상(商)대의 청동북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북이다.


2000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아 북의 높이는 2m, 그 무게는 1000kg으로 제작되었다.

청동북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하는데, 실물은 전시되어 있지 않다.

성음고와 예운종이라는 이름은 공자의 77대 손녀인 공덕무(孔德懋)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옥토천(玉兎川)


송나라 충신 악비를 무고죄로 죽인 중국 10대 간신의 한 명인 진회(秦檜)가 판 우물이다.

<지정금릉신지(至正金陵新志)>에 따르면 부자묘 학궁에서 공부를 하던 진회는

우연히 토끼가 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진회는 사람을 시켜 토끼가 사라진 땅을 파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샘이 발견되었다.

그 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그는 샘이 발견된 것을 길하게 여겨 우물을 만들고

직접 “옥토천(玉兎川)” 세 글자를 써 넣었다.


1984년 부자묘 복원공사 중에 미처 복원하지 못했던 것을,

공자탄생 2560주년을 기념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존경각(尊經閣)


명덕당 뒤에 있다.

명 가정(1522 ~ 1566년)시기에 건설되었으며, 원래는 2층 5칸의 건물이었다.


청 가경(1796 ~ 1820년)시기 이후에 존경서원(尊經書院)을 증설하였고,

2층에는 책을 보관하고, 1층은 강연장으로 사용하였다.


1987년 3층, 18.7m로 재건한 것이며, 1층은 폭 5칸, 2층과 3층은 각각 3칸으로 되어있다.

1층은 극장인 부자묘민간예술대관원, 2층은 문물을 전시한 진회문물고적진열실(秦淮文物古跡陳列室),

3층은 찻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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