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진회하(秦淮河) 선착장은 부자묘 앞의 천하문추(天下文樞) 패방과 닿아 있다.



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주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12 중 열 한 번째인 진회하(秦淮河)는

육조의 도읍이었던 고도 남경(南京, Nanjing)의 젖줄(母親河)이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성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연안에 부자묘(夫子廟), 첨원(瞻園) 등 고적들이 많아서 남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夜泊秦淮(야박진회)   




泊秦淮 (박진회, 진회에 배를 대고)  / 두목(杜牧)


烟籠寒水月籠沙  (연롱한수월롱사)   안개는 차가운 물결을 감싸고 달빛은 모래밭을 덮는데
夜泊秦淮近酒家  (야박진회근주가)   오늘밤 진회에 배를 대니 술집이 가깝네  
商女不知亡國恨  (상녀부지망국한)   기녀들은 망국의 비애를 알지 못하고
隔江猶唱後庭花  (격강유창후정화)   강 건너에서는 오히려 후정화 노래를 부르네


롱(籠) : "휩싸이다. 둘러싸이다."
후정화(後庭花) : 후정화는 가곡의 이름으로 진숙보(陳叔寶)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가리킨다.

진숙보가 진(陳 )나라의 後主로 재위시 황음무도하고 향락에 젖어 조정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후에 진후주의 "옥수후정화"는 망국의 음악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인다.  


-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 남북조 시대에 陳(진)나라의 마지막 왕 후주가 사치하고 놀기를 좋아 하여

항상 연회를 베풀고 빈객을 청하여 주색에 빠져 불렀던 음란한 노래를 말한다.

진(陳)나라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악학궤범에 후전(後殿) · 후정화(後庭花), 북전(北殿)이라하여

고려 충혜왕(忠惠王)이 뒤뜰에서 여자들과 어울려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세종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어 성종 때 성현(成俔)이 왕명에 의하여 악가(樂歌)를 개산(改刪)할 때, 조선창업을 송축한 가사로 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향악공(鄕樂工)을 뽑을 때 시험곡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 진 · 후주(陳·後主) : 이름은 숙보(叔寶),자는 원수 선제의 아들이다. 황음무도하여 수(隋)나라에  망했다.

수의 대군이 이르렀을 때에도 궁중에 주악을 울리고 무녀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한다.

그에게는 원래 기녀출신인 장려화(張麗華)란 후궁 장귀비가 있는데 키가 7척이고 아름다운 미모와 요염한 모습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 조회 때에도 후주와 함께 정사를 논했다고 하며, 정궁인 광조전(光照殿) 이외에도

임춘(臨春), 결기(結綺), 망선(望仙)에게 누각(樓閣)을 지어 회랑으로 연결하여 서로 통하게 하고

건물의 높이는 구름을 꿰뚫을만큼 높았고 그 화려함이 마치 선경에 들어온 듯 했다고 한다.

진후주 자신은 임춘각(臨春閣)에, 장려화(張麗華)는 결기각(結綺閣)에 그리고 망선각(望仙閣)에는

공.공.(龔.孔) 2 귀비의 거처로 삼았다고 하며 그밖에 왕(王). 이(李) 두 미인、장(張). 소(薛) 등 2숙원(二淑媛)、

원소의(袁昭儀)、하첩여(何婕妤)、강수용(江修容) 등 천하일색의 미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 

남북조 때 진(陳)나라 후주(後主)는 문집을 39권이나 남겼다고 할만큼 글을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작사한 가곡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임춘악(臨春樂) 등이 남아 있다. 

주색에 빠져 주야로 음탕하게 놀다가 나라를 망쳤을 그 때 부른 음란한 곡조가

악부오성가곡(樂府吳聲歌曲)인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혹은 玉樹曲(옥수곡)이라고도 한다.


시인 두목(杜牧)은 진후주(陳後主)의 고도(故都)를 지나다가 이와같은 역사를 떠올리면서

"상녀불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 :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 노래를 부른다"

고 하는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배를 대고)를 지었다고 한다.


진(陳)나라 마지막 임금 숙보(叔寶)는 수(隋)나라 군대가 왕궁을 공격하는데도 평소처럼

성 안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노래하기에 여념이 없다가 결국 포로가 되었다.

그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ㅡ 뒤뜰의 꽃 후정화(後庭花)라는 노래를 짓고

후궁의 미녀들에게 이를 익혀 노래하게 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망국의 노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두목(杜牧, 803~852)

중국 당나라 말기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두보(杜甫)에 상대하여 소두(小杜)라 부르며, 시풍은 호방하면서도 청신(淸新)하고 특히 칠언절구에 뛰어났다.

828년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박진회(泊秦淮) · 산행(山行) · 강남춘절구(江南春絶句) · 아방궁부(阿房宮賦)와 같은 소시(小詩)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즐겨 읊어왔다.


두목은 대화(大和) 7년(833), 개성(开成) 2년(837), 대중(大中) 2년(848) 세 차례에 걸쳐

배를 타고 금능에 와서 진회하 선착장 주변을 구경하고 진회를 노래하는 작품들을 후세에 남겼다.


그의 시는 청신하고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글이다. '박진회(泊秦淮)'는 진회의 아름다운 경치를 주제로

남조 멸망의 소리를 빌어 취생몽사하는 당조말기 통치자들을 풍자하여

“연기는 찬물을 뒤덥고 달은 휘장에 가리웠도다,

야박진회에 술집이 가깝더라.

장사꾼 여자는 나라를 잃은 원수를 잊었는가,

강을 마주하고 울안의 꽃을 노래하는구나.”

라고 읊었다.


두목의 진회를 노래하는 명작 '강남춘(江南春)', '청명' 등은 사람들이 널리 흥얼거리며 읊었고

또 진회의 역사와 경치를 찾는 까닭이 되기도 했다.


'박진회(泊秦淮)'는 중국 한시 전체를 망라해서도 몇 편 찾기 어려운 절창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번역을 하기보다는 입안에서 굴려서 마치 영롱 월롱들이 구슬 구르듯 입안에서 저절로 놀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어야 비로소 그 음률과 주옥같은 글 한자 한자들의 맛이 살아 난다.


무심코 배를 댄 진회의 주가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이는 망국의 노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가 아닌가 

어찌 술 따르는 주점의 여인이 망국의 한을 알리오... 

나그네 마음만 쓸쓸하다...


진회하(秦淮河) 선착장 주변에 부자묘(夫子廟)라는 공자(孔子)의 사당이 있다.

이곳은 수많은 남경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자묘 맨 뒤편에 있는 존경각(尊經閣)이

무료 민간예술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주변에 상가도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남경 부자묘는 남경을 찾는 외지인들이나 외국인들도 많이 들를만큼 널리 알려진 곳이다.

부자묘 정문에서 진회하(秦淮河)를 따라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진회(古秦淮)’라는 초서체의 현판이 걸린 높다란 일주문이 하나 나온다.


그 앞으로 흐르는 진회하가 바로 이 시의 창작 현장이다.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날 저녁 이곳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 요량으로 강가에 배를 댔다.

강물은 뿌옇게 안개에 덮여 있고 모래밭은 하얗게 달빛에 싸여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진회하의 야경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니 부근에 있는 술집에서 기녀가 <옥수후정화>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그 노래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다.
남경을 도읍으로 삼은 진(陳)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후주(後主, 582-589년 재위)는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궁녀들을 데리고 음주가무나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북쪽에서 수(隋)나라 군사가 진나라를 치러 내려오고 있었지만 후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도 후주는 손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노래를 지어

귀비 장려화(張麗華)에게 건네주며 불러 보라고 했다.


그때 수나라 장수 한금호(韓擒虎)가 쳐들어 왔다.

후주는 다급한 김에 장려화와 함께 연지정(臙脂井)이라는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후주는 이내 수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고 이로써 진나라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치욕적 사건이 있은 뒤로 연지정은 욕정(辱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남경 사람들이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하여 현무호(玄武湖) 남쪽의 계명사(鷄鳴寺)라는 절 안에 이 우물을 복원해 놓았다.


<옥수후정화>는 이처럼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은 망국의 노래였다.

그런데 진나라의 도성이었던 금릉(金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 땅의 기녀가 아직도 생각 없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시인은 심경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정사에 힘쓰지 않고 환락이나 추구하는, 그래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군신들이 한탄스러웠으리라.


아니 어쩌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그래서 오히려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기녀들이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진나라 후주는 일반적으로 정사는 돌보지 않고 가무음곡에만 도취하여 취생몽사한 무능한 군주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만약 <옥수후정화>를 짓지 않았다면

과연 2백 몇 십 년이 지난 두목의 시대에 이르도록 여전히 민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가 만약 예사 군주들처럼 근실하게 정사를 돌보는 범상한 군주로 살았다면

중국 역대 왕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왕처럼 일찌감치 민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가 정치적으로는 비록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예술적으로는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시를 지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무능한 군주였다고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군주의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자신도 지키고 나라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능력도 없는 사람이 군주가 된 것이 문제였다.


능력이 없으면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이

구성원들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구성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공공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무능도 큰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무능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는가?

아니, 나는 과연 ‘무능의 죄’를 범하지 않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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