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 싸움과 외세 의존 등 악습, 깊은 인생관ㆍ높은 세계관 부족 때문

각성하고 백성이 '씨알' 되어 평화 일궈야


                지금 청소년층은 함석헌의 이름 석 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사십년 전만해도 그의 명성은 세계적이었다.


그에 관한 세평이 크게 엇갈렸던 것도 사실이다.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적 폭과 깊이에 경외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지만, 그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었다.

함석헌은 스스로를 평해 ‘약한 사람’이라 했다. 내 눈에 비친 함석헌은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한 미래지향적 평화주의자였다. 함석헌(1901~1989)은 많은 글을 남겼고, 그 가운데는 명문도 많다. 요즘 내가 다시 읽은 것은, 1958년 8월 ‘사상계’에 실린 칼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였다. 최근에 일어난 ‘목침지뢰사건’과 ‘건국절’에 관한 설왕설래를 접하며, 나는 그 글에 빨려 들어갔다.

칼럼에서 함석헌은 1950년대 한국사회의 부조리, 집권층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문제 삼았다. 이승만 정권은 심기가 불편했던지 1958년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씌워 그를 구속했다. 사건을 담당한 20대의 젊은 형사가 예순 살에 가까운 함석헌의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아댔다. 그것은 필화였다. 집권층의 비위를 거스르기만 하면 일단 잡아넣고 보는 경찰의 과잉충성이 그때도 대단하였다. 그러자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함석헌은 석방되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의 칼럼에는 그만의 독특한 역사관이 서려 있다. 그는 한국인의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는 민족” 또는 “철학하는 백성”이 되는 데서 찾았다.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며, 그는 깊은 성찰을 주문했다. 이 말을 가지고 그가 특정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는 도리어 종교적 맹신을 경계하였다. 함석헌이 강조한 것은, 민족적 자아의 각성이었다. 이것이 “생각하는 백성”의 실체였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고달팠다. 19세기말부터 이 땅은 제국주의세력의 각축장이었고, 결국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의 고뇌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본디 역사학도였던 함석헌은 젊은 시절부터 “우리역사”의 의미를 천착하였다.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그 주연”이라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나중에 이런 생각을 정리한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사상계’의 칼럼에서 그는 평소의 지론을 또 이야기했다.

함석헌은 우리역사의 고난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수백 년 동안 “당파 싸움”의 악습에 젖었다고 말했다. 둘째, 외세에 의존하는 폐단의 뿌리가 깊다고 했다. 셋째, 이 두 가지 문제점은 결국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의 결여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자신의 해석이었다. 그것도 20세기 한국사회가 겪은 고난에서 비롯된 함석헌의 주관적 평가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함석헌의 변(辯)이다.

그는 6ㆍ25전쟁의 근본 원인을 알기 위해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하여 후대가 고구려의 상무적인 전통을 망각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했다. 7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의 지도층이 외세 굴종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득세한 고려 후기의 역사도 잘못이지만, 친명파가 주도한 조선왕조의 건국은 애초부터 잘못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적 관점은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런데 6ㆍ25전쟁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렇게 먼 세월을 소급해야 하는 것일까? 또, 한국사의 근본 성격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그의 역사주의적 관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함부로 비판할 수도 없는 처지다. 함석헌의 역사적 사유, 그 저변을 20세기 한국의 슬픔과 눈물이 적시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뒤집는” 강대국들의 “고래 싸움”이 한반도라는 “가엾은 새우등을” 터뜨린 까닭을 알아내려고 그는 괴로워하였다. 결국 그는 이 민족을 “역사의 한길에 앉는 고난의 여왕”이라 정의했다. 자학적 표현 같지만, 우리는 함석헌의 깊은 시름을 통감한다.

우리 힘 약해 “참 해방” 얻지 못해

함석헌은 한국현대사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보았다. 첫째, 1945년의 해방은 “참 해방”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국과 소련 두 세력이 압박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라 했다.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해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 내부의 뿌리 깊은 갈등이 분단의 심층적 원인이라 말한다. 함석헌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쉬운 말로, 만만한데 말뚝질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감히 말뚝을 내 등에 꽂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약소민족이라서 외세에 휘둘리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어떻든 분단의 결과는 혹독한 현실로 이어졌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우리는 꼭두각시요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승만 정권을 분노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이것이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을까.

근자에도 남북대화에는 평소 무관심한 최고위층이 중국과 통일문제를 상의하겠다고 말해, 뜻있는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또, 보수 세력은 ‘건국절’이니 ‘이승만 국부’론을 들먹이며 분단국가의 탄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형편이다. 한 국가가 일어난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제한적이었다. 나로서는 적어도 분단 문제가 평화적으로 극복될 때까지는 그 평가를 유보하겠다.

피, 땀으로 회개하고 새 출발하자

함석헌이 제기한 둘째 문제는 정권의 도덕성이었다. “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말 권세욕이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면, 같은 전쟁에도 좀 더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남북한은 상대를 헐뜯고 비난하는데 익숙하였다. “내 잘못”으로 전쟁이 터졌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제 정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했다. 때문에 많은 이은 6ㆍ25전쟁을 “정권 쥔 자들의 일로 알았지 국민의 일로 알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빨갱이”로 몰아댔다. 그 한심한 빨갱이 노름이 아직도 계속된다. 저들은 늘 분단 상황을 빌미로 삼았다. 이를 보다 못해 함석헌은 분단을 “목구멍에 걸려있는 불덩이”라 했고, 그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없다”고 탄식했다. 문제는 그 분단이 흉악한 몰골 그대로 남아, 아직도 지뢰와 총성을 터뜨린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는 종교기관의 허위와 부패를 말하였다.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시킨다면 제 교도만 하려 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쓰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 늘이려고나 하고, 그리고는 정부와 군대가 하는 일은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였다. 본연의 사명은 실종되고, 세상 욕심에 눈먼 사람들이 종교기관을 장악해 외세와 정권에 아부하는 추태가 연출되었다는 지적이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이에 함석헌은 새 출발을 촉구했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였다. 그의 말대로 생각하는 백성 ‘씨알’이 되어 평화의 새 땅을 일구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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