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최대과거고시장 강남공원(江南貢院)의 명원루(明遠樓)


부자묘(夫子庙) ㅡ 진회(秦淮) 풍경구에 중국 고대 최대 과거고시장이었던 강남공원(江南貢院)이 있다.

중국을 지배해온 과거 시스템의 역사는 질기고 길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 31년(1905)에 폐지령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1300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생이 과거에 웃고 울었을까.

그들 중 상당수가 거쳐 갔을 과거시험장이 바로 난징에 있다.


난징의 ‘강남공원(江南貢院)’은 최대 규모의 과거시험장이었다.

무려 2만 명이 동시에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규모다.


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 명의 장원과 10만여 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과거 수험생은 거지에서 비둘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강남공원의 수험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는 103세였다고 한다.

믿기 힘들긴 하지만, 아무튼 과거의 개방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 소모성의 끝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복장에 대한 설명


중국역대장원명록

이태백, 소동파 3부자, 두보, 백거이, 원목, 이홍장, 증국번, 문천상, 오경신 등의 이름이 보인다.


과거시험과 합격자에 대한 급수와 명칭이 나와 있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일등이 장원(狀元)이다.


청대 지역별 합격자 통계표


호사(號舍)  과거시험장  칸막이가 있고 한 사람씩 이 공간 안에서 시험을 본다.


공원, 즉 과거시험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일종의 개인 시험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사(號舍)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명원루(明遠樓) 양쪽으로 1인 1칸의 호사가 마치 마구간이 늘어서 있듯 연이어 있었다.


폭이 1.5m도 되지 않는 호사는 수험생이 아흐레 동안 숙식하며 시험을 치르는 곳이었다.

물론 방의 문은 없었다.


양쪽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판 두 개 가운데 위판은 책상, 아래판은 걸상의 용도였다.

밤이면 위판을 꺼내고 아래판에서 잤다.


당연히 다리를 펴고 자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공간에서 과거를 치른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상한 음식을 먹고 죽거나 독사에 물려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시험감독관 임칙서(林則徐)


감독관이 답안 작성하는 유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칙서는 청말 아편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흑차대신의 자격으로 광주로 내려가

불법거래로 적발된 아편을 모아서 불을 질러버렸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루게된다.

이 일로 임칙서는 우루무치로 좌천되었다.



협대(夾帶)  과거시험에 등장했던 각종 컨닝페이퍼. 깨알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컨닝에 사용하던 기이한 서적 확대본


과거시험에서 컨닝하는데 쓰였던 기이한 서적


공원방벽도.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발표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오의(烏衣)


중국 관복 중에는 검은색이 있는데 오의(烏衣)라고 한다.

부자묘의 거리를 걷다보면 검은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골목을 만날 수도 있는데

오의항(烏衣巷)이라고 한다.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홍모(紅帽)


일품 무관(一品 武官)의 복장


장원급제하면 거리에 말을 타고 나가서 행사를 치루었다.

우리나라에선 장원에 급제하면 모자에다 어사화를 꼽고 말을 타고서  거리를 돌았다.


문천상(文天祥) 장원급제자 중 이름을 떨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홍장(李鴻章)을 소개하고 있다.


증국번(曾國藩)


임칙서(林则徐)


과거제도를 폐기한 인물


청 광서제 1905년 7월 과거제도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폐지되다.

이로써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시행해 왔던 과거제도가 중국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오경재(吳敬梓) 기념관


 오경재(吳敬梓, 1701~1754)는 서른셋에 고향 안후이 취안자오(全椒)를 떠나 난징으로 왔다.

그는 일찍이 열셋에 어머니를 여의고 스물셋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유산을 둘러싸고 친척들과 다툼까지 있었던 고향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난징으로 이사한 몇 년 뒤(1736) 추천을 받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당뇨병이 심해져서 결국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형식적인 팔고문 중심의 과거제도를 혐오했기에 자발적으로 시험을 거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부귀공명의 루트는 ‘과거’였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절대제도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오경재는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 그렇게 일그러진 괴물을 양산해내는 과거제도,

 ‘유림’의 심장부를 풍자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를 통해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유림외사란 ‘유가 지식인 사회의 야사’라는 의미다.

부귀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과거제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당시 지식인은 과거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부귀공명을 골간으로 한다.

부귀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에 비열한 작자에게도 알랑거리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의지해 거드름을 피우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 고결하게 굴다가 남에게 간파되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도 있다.

부귀공명을 끝까지 마다하며 최상의 품격에 도달한 이는 황허의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한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


부귀공명을 뼈대로 삼았노라고 서문에서 말하면서

<유림외사>는 그렇게 예속화된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연 오경재는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랬다면 <유림외사>는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공모자가 아니었기에 그 부조리를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그 시스템의 공모자였다는 게 시대의 비극이다.


오경재는 청나라가 번영을 구가하던 강희·옹정·건륭 시기에 살았다.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라는 당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옥(文字獄)이 자행되었다.


문자옥은 한족 지식인을 옭아매는 수단이었다.

말과 글로 인해 죄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지식인은 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팔고문을 익혀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인에게 정해진 루트였다.

‘권력-지식’을 구현한 이 루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외와 배고픔을 의미했다.


<유림외사>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두소경(杜少卿)이 바로 오경재 자신을 비유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조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초(不肖)’한 자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인 두소경은 돈을 하찮게 여기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세도가를 경시했다.


가산을 탕진한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늘 즐겁게 살았다.

오경재의 삶은 바로 두소경과 같았다.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오경재의 만년은 매우 빈곤했다.

글을 팔아 살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겨울날 저녁이면 그는 친구와 함께 성밖을 돌면서 노래했다.

오경재는 이를 난족(暖足), 즉 ‘발을 덥힌다’고 했는데, 난방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거지 · 죄인 · 벌 · 새 · 원숭이 · 파리 · 비둘기, 다름 아닌 과거 수험생의 7가지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이 재미난 비유는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온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은 여러 번 낙방한 뒤 과거에 마음을 접고 <요재지이> 창작에 몰두했다.

과거가 사람을 어떻게 쥐락펴락했는지, 앞의 7가지 비유를 통해 알아보자.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맨발에 대바구니를 든 ‘거지꼴’이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지참물은 대바구니에 넣은 채 신발까지 벗고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호통 치면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죄수’ 같다.

문이 없는 호사에 들어가 시험을 치를 때면 얼굴과 발이 드러나니, 늦가을 추위에 떠는 ‘벌’과 같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 정신이 어지럽고 하늘과 땅의 색깔마저 달리 보이니, 마치 새장에서 나온 병든 ‘새’와 같다.

시험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합격과 불합격의 길몽과 악몽에서 헤맨다.


고대광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홀연 백골로 변한 느낌이 든다.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마치 줄에 묶인 ‘원숭이’ 같다.


드디어 발표일,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걸 알게 되는 순간 얼굴이 샛노래지고

죽은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독약을 먹은 ‘파리’처럼 건드려도 감각이 없다.


처음엔 실망과 분노에 차서 과거 따위는 다시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기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가라앉고 다시 과거를 치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알을 깨버린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틀고 다시 알을 품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포송령은 이렇게 말한다.

“당사자는 목메어 울면서 죽고 싶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이보다 더 우스운 게 없다.”


과거제 폐지와 더불어 강남공원 역시 용도 폐기된다.

민국 7년(1918)에 강남공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명원루 · 지공당 · 형감당 및 호사(號舍) 일부만 남겨졌다.


난징국민정부가 수립(1927)된 뒤 명원루는 시정부 대문의 역할을 했고,

강남공원의 옛 건물들은 정부 각국(各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행정원과 최고법원이 이곳에 들어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난징시 중의원(中醫院)이 이곳을 사용했다.


강남공원이 유적지로서 보호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다.

2014년 8월 11에 개관한 ‘중국과거박물관’은 바로 강남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옆으로는 진회하(秦淮河)가 흐르고 있다.


강남공원(江南貢院) 출구로 나오면 바로 진회하



강남공원 옆 진회하 위에 있는 이 다리는 급제한 유생들만이 다시 건너올 수 있었고 낙방한 고시생들은 다시 건너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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