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군(李香君)과 도화선(桃花扇) 


명말, 위충현(魏忠賢)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결성한 동림당(東林黨)이라고 있었다.


위충현을 탄핵한 동림당은 그 후유증으로 수 많은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폄직 및 귀양을 가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만주에서 흥기한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자

명나라의 잔존세력은 남쪽으로 도망쳐 금릉 즉 남경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역사상 이를 남명왕조라라고 한다.

금릉에 남명왕조가 세워지자 장강 이남에 거주하던 동림당에 속했던 인사들이 모여들어

당을 만들었는데 이를 복사당(復社黨)이라고 했다.


후방역(侯方域)은 동림당 소속의 저명한 인사였던 조부와 부친의 후광으로 복사당의 영수가 되었다.

그때 남명정권의 실세는 위충현(魏忠賢)이 이끌던 엄당(閹黨)의 잔당인 완대성(阮大鋮)과 그 일당이었다.


당연히 엄당의 잔당들과 복사당은 대립했다.

복사당의 영수였던 후방역(侯方域)은 진회(秦淮)의 가기(歌妓) 이향군(李香君)과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후방역은 서력 1618년에 태어나서 1655년에 죽은 명말청초의 3대 산문(散文)의 대가이다.

자는 조종(朝宗)이고 명조의 귀덕부(歸德府:今河南商丘) 출신이다.


후방역은 명조의 호부상서를 지낸 후순(侯恂)의 아들이고 조부 역시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서

명망있었던 동림당의 일원이었다가 모두 환관일당을 지창하는 엄당에 의해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후방역은 이향군에게 부채에 시를 한 수 써서 비녀 한 개와 함께 보냈다.

다른 한편 완대성도 역시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시켜 많은 혼수를 보내

이향군을 농락하려고 했으나 이향군이 알고 단호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완대성이 마음속에 깊은 한을 품게 되었다.

남명의 황제로 새로 즉위한 홍광(弘光) 황제에 의해 기용된 완대성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후방역을 모함했다.


후방역이 화를 피해 사가법(史可法)이란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달아나자

완대성은 이향군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이향군이 결연히 완대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머리에서 난 피가 후방역에게서 정표로 받은 부채를 적셨다.


이때 후방역의 친구 양용우(楊龍友)란 사람이 재빨리 부채에 떨어진 피를 이용하여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렸다.


이윽고 남명이 멸망하자 이향군은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계속해서 청나라에 의해 양주(揚州)가 함락되자 후방역은 도망쳐 이향군을 찾았으나

그도 결국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공상임(孔尚任)의 도화선(桃花扇)이라는 희곡은 청왕조 시대 때의 최고의 걸작이다.

공상임은 도화선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10여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공자의 64대 손인 그가 도화선을 출간하자 북경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관람을 먼저 보기 위해 다투었으며 낙양의 지가를 폭등시켰다.


도화선이라는 희곡의 내용은 바로 이향군과 후방역의 사랑 이야기다.

공상임은 작품 속 여기저기에 춘추필법을 발휘하여 세태를 풍자했는데

‘ 연인들의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을 빌려 나라의 흥망에 대한 감상을 그려냈다. ’고 했다.

도화선을 출간한 공상임은 강희제(康熙帝)에 의해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향군은 명나라 말 남경의 진회(秦淮) 구역 출신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그녀는 남명정권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낭만성을 지닌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다.


이향군의 종적에서 축소된 남명의 비극적인 운명이 조명된다.

이향군은 어려서부터 예인(藝人)들을 따라다니며

기예, 음률, 시사, 죽사(竹絲) 및 비파 등의 악기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특히 남곡(南曲)에 정통하여 그 목소리가 감미롭기 그지없어

천하 사방의 선비들이 사모하여 찾아왔다.


후방역은 원래 하남(河南) 출신으로 강남의 풍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릉(金陵)으로 들어와 직업을 구했다.


풍류남아의 신분으로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기개가 높은 후방역은

재주가 넘쳐 이내 복사당(復社黨)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금릉의 진회(秦淮) 강변에 살고 있던 모벽강(冒辟疆)、진정혜(陳貞慧)、방이지(方以智) 등과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사공자(四公子)라고 칭했다.


그들은 온 종일 진회의 기루에 앉아서 시사(詩詞)를 논하고

기녀들을 희롱하며 노래를 즐겼다.


오경재(吳敬梓)는 일찍이 자신이 진회지간의 기루에서 방탕한 생활에 대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노래한 바가 있다.


迩来愤激恣豪侈(이래분격자호치)  
얼마 전 격한 마음으로 달려와 맘껏 호사를 부리며  
千金一擲買醉回(천금일척매취회)  
천금을 던져 마신 술에 정신을 잃었다.  


老伶小蠻共臥起(노령소만공와기)  
자령과 소만을 옆에 끼고 딩굴다가  
放達不羈如癡憨(방달불기여의감)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미친사람과 같았다.  


싯귀만으로도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방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공자는 당시 진희의 홍등가에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와중에 후방역을 한 번 보게 된 이향군은 그 즉시 마음이 끌렸고,

후방역 역시 이향군의 재주와 미모에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방역의 집은 가난해서 많은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 후방역을 향해 이향군은 오히려 위로하며 말했다.


“ 도포가 없어도, 가난해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비록 포의를 걸쳤지만 이름에 향기가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것은 이향군이 고매한 인격과 절개를 갖춘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상임의 도화선은 이향군을 일개 기녀로 대한 당시의 남명 학사들이나 문인들을

오히려 비속한 영혼을 갖고 있는 부류로 묘사했다. 


대명강산에 비바람이 몰아쳐올 때, 후방역은 반청운동에 투신하여 투쟁하고 있었다.

그때 봉양(鳳陽) 독무(督撫) 마사영(馬士英)은 복사당과의 원한으로 인하여

후방역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양용우(楊龍友)가 달려와 소식을 전해 후방역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하자

이향군은 눈물을 흘리며 금릉을 떠나는 후방역을 전송했다.


후방역은 그때 자신의 시를 쓴 부채를 맹세의 징표로 주었다.

부채에 쓰여진 후방역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夾道朱樓一径斜(겹도주로일경사) 
좁은 골목 경사길 옆 붉은 누각을 향해 
王孫初禦富平車(왕손초어부평거) 
부평거(富平車)를 타고 나타난 왕손을 처음 보았다. 


春溪盡是莘夷樹(춘계진시신이수) 
봄날 개울물은 모두 신이수(莘夷樹)에 빨리고 
不及東風桃李花(불급동풍도리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도리화에 이르지 못했네 


공상임의 도화선은 바로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공상임은 도화선에서 차용하여 전조(前朝) 즉 명나라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도화선을 집필하던 공상임은 몇 번이나 양주(揚州)를 들려 양주의 매화령(梅花嶺)에서

남명정권의 항청명장 사가법(史可法)의 묘 주위를 배회하며 도화선의 혼백을 찾으려고 했다.


도화선은 원래 명나라의 낭만적인 일을 그리려고 한 것이나

공상임의 필력으로 부채를 강조하다보니 명나라가 다소 쓸쓸하게 묘사되고 말았다.


'적막한 옛 릉 앞에서 이름 없는 신하는 눈물을 흘리고,

가을바람은 까닭 없이 옥하(玉河)의 강물을 출렁이게 하누나!'

라고 읊은 시구는 한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왕조에 대한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후방역이 금릉(金陵)을 떠난 후,

이향군은 두문불출하여 일편단심으로 후병역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양용우(楊龍友)는 마사영(馬士英)의 천거로 남명왕조에서 예부주사(禮部主事)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영은 오히려 양용우를 박해하고 마씨들의 친척인 전앙(田仰)을 앞세워

이향군과 연분을 맺으려고 했다.


이향군이 한사코 거절하자 이향군을 직접 찾아간 마사영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이향군을 위협하여 굴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향군은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스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새빨간 핏방울이 후방역이 주고 간 부채 위에 방울져 떨어졌다.


마치 낭군에게 바치는 한 곡의 순결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 같았다.

이향군의 강고한 절개에 감동한 양용우가 갑자기 영감을 얻어 붓을 들고

부채위의 핏방울을 이용하여 의연한 복숭아나무로 만들고 싯귀를 적어 넣었다. 


濺血點作桃花扇(천혈점작도화선) 

흩뿌려진 핏방울로 도화선을 만드니

比作枝頭分外鮮(비작지두분외선) 

나뭇가지와 사람머리가 구분되어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나


그러나 후방역은 후에 남명왕조를 배반하고 청나라가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이에 대단히 실망한 이향군은 강산은 이미 청나라 세상으로 바뀌어 나라가 이미 없어진 세태를 비관하여

후방역과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도화선을 찢어버리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러나 공상임은 그의 회곡 작품에서 후방역의 배신행위를 언급하지 않고

희극과 비극의 교차를 강렬하게 묘사하지 않았으며 이향군 역할 역시

그녀의 개성이나 인격을 제고시켜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다. 


지금도 남경의 진회(秦淮) 강변의 미향루(媚香樓)가 다시 지어졌고

금릉(金陵)의 서하산 꼭대기에는 도화선정(桃花扇亭)이 있어 매년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도화꽃이 찬란하게 휘날리는 봄날 바람에 머금은 이향군의 미소를 기리고 있다. 



진회하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


진회하 강변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桃花扇>  西园刻本,康熙、雍正年间据康熙重刻本再刻,另有多种覆刻本


작가 공상임(孔尙任·1648~1718)


공상임(1648-1718)은 청초(淸初)의 시인이자 희곡작가다.

자는 빙지(聘之) 또는 계중(季重), 호는 동당(東塘)․ 안당(岸堂) 또는 운정산인(雲亭山人)으로

곡부(曲阜 오늘의 산동성에 속함) 사람이다.


공자의 64대손이다.

아버지 공정번(孔貞璠)은 숭정 6년(1633)에 거인이 되었는데 박학하고 다재다능했지만

절개를 중시하여 평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생애와 문학
 

공상임은 공자의 후예로서 유가의 사상적 전통과 학문을 계승하여

어릴 때부터 예‧악‧병‧농(禮樂兵農) 등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또한 악률(樂律)을 연구하여

나중에 희곡을 창작할 때 필요했던 기본적인 음악 지식을 갖추었다.


 20살을 전후하여 현부학(縣府學)의 생원이 되고

뒤에 세고(歲考)에 참가했지만 녹취(錄取)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관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전답을 팔아서 예감(例監, 국자생 國子生)이 되었다.


31살 때 그는 현 북쪽에 있는 석문산(石門山)에 가서 독서와 저술로 소일하면서 고금의 득실을 논하였다.

소년 시절과 석문산 독서 시절 때부터 그는 이미 남송이 멸망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친구들로부터 이런 저런 소문을 수집하고 여러 사람들의 저작을 읽어

사실을 검증하면서 남송의 흥망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전기(傳奇)를 쓸 준비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도화선(桃花扇)의 창작이 온축되던 시기였다.


 강희 21년(1682) 그의 나이 35살 때 연성공(衍聖公) 공소기(孔毓圻)의 권유에 응해서 산을 나와

가보(家譜)와 궐리지(闕里志)를 편찬하고 자제들에게 예악을 가르치면서 악사(樂師)를 방문하고

제기 제조를 감독하면서 강희제(康熙帝)의 제1차 남순제공(南巡祭孔)을 준비했다.


다음 해 강희제는 몸소 곡부에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청나라가 중국을 제패한 뒤 최초로 세인의 큰 주목을 받으면서 열었던 존공대례(尊孔大禮)였다.


공상임은 어전강경인원(御前講經人員)으로 선출되어 유가 경전을 정리하는 한편

강희제에게 대학을 강독하면서 강희제를 공림(孔林)의 성적(聖跡)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강경과 도람(導覽)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결과

강희제는 그를 파격적으로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로 승진시켰다.


뜻밖의 은총에 감격한 그는 청나라 통치자들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고,

일면 크나큰 은혜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는 위치의 부침(浮沈)과 지우(知遇) 여부에 따라

통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유생(儒生)들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강희 24년(1685) 초 공상임은 북경에 와서 정식으로 관료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유학적 경륜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때인 7월 초에 그는 칙명을 받아

공부시랑(工部侍郞) 손재풍(孫在豊)과 함께 회양(淮揚)에 가서

황하가 바다와 대면하는 지역의 준설 작업을 도왔다.


그의 본래 목적은 조정의 관리가 되어 “지체 높은 요직에 있고자(淸華要津 청화요진)”하였지만

한적한 바닷가에서 격에 맞지 않은 일을 하게 되자 크게 실망하였다.


회양에서 머문 4년 동안 그는 객지를 떠돌면서

처량한 신세가 된 자신에 대해 울적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직접 하정(河政)의 험난함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민중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시로 작품화하였다.


이 기간에 쓰여진 630여 편의 작품은 호해집(湖海集)으로 편집되었다.

이들 작품은 초기 궁사(宮詞)나 응수(應酬)․송성(頌聖)을 일삼았던 문학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달라진 인식을 비교적 심각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회양 일대는 명청 교체기에 정치․군사적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명(南明)의 강북 하방(河防) 땅에 머물고 있었다.


양주(揚州)의 매화령(梅花嶺)에 올라 사가법의관총(史可法衣冠塚)에 참배(拜禮)하고,

남경에서는 명나라 고궁을 지나면서 명효릉(明孝陵)을 참배한 뒤

진회하(秦淮河)를 노닐다가 연자기(燕子磯)에 올랐다.


그는 특별히 서하산(栖霞山) 백운암(白雲庵)에 가서

나중에 도화선을 지어 선사했던 장요성(張瑤星) 도사를 방문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상임이 도화선의 창작을 위해

실지 지형에 대한 고찰을 적극적이고 엄밀하게 진행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는 이 지방에 모여 살던 명나라 유민들과 사귀었는데,

그들 중에는 명말의 정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인물이나 청나라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모양(冒襄), 황운(黃雲), 등한의(鄧漢儀), 허승흠(許承欽), 공현(龔賢), 석도(石濤) 등과

옛 일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토론하면서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그는 때로 “이야기한 내용을 아침에 모두 바꾸거나(所話朝皆換)”

비밀로 삼아 “외부인에게 말하지(門外人道)” 않았다.


회양에서의 4년간은 공상임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시기일 뿐만 아니라

도화선을 창작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상과 소재를 준비한 시기이기도 하다.


 강희 29년(1690) 공상임은 북경으로 돌아와 10년간 경관(京官)으로 생애를 보내기 시작했다.

5년 동안은 국자감박사를 지냈고, 강희 34년(1695) 가을에 승진해서

호부주사(戶部主事)로 있으면서 보천국(寶泉局)에서 동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강희 39년(1700) 3월 호부광동사원외랑(戶部廣東司員外郞)이 되자 같은 달 벼슬을 그만 두었다.

이 시기는 비록 호기에 찬 삶을 보내긴 했지만 시종 냉대를 받아

그가 자부했던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10년 동안 그는 안당고(岸堂稿)와 장류집(長留集, 유정기 劉廷璣와의 공저) 등의 시문집을 썼는데,

때로 영락한 자신을 보며 느꼈던 근심과 아무런 성과도 없는 현실에 대한 탄식을 담았다.


“꼽아보니 십년 동안 관직은 초라하여, 짚신 신고 거리를 오가고 있구나 (彈指十年官尙冷 踏穿門巷是芒鞋)”

라고 한 시구는 바로 그가 10년을 관리로 있으면서 가졌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고민은 의심할 바 없이 한 개인이 벼슬길에 나서서 겪는 부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몇몇 시편에서는 사상적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군왕의 조명(造命)을 부정한다든가 관료들 사이의 알력을 폭로하고

성세(盛世)를 탁세(濁世)로 지적하는 등과 같은 행동을 통해,

강희제에게 입은 은덕에 대한 고마움과 험악하고 풍파 많은 관료 생활,

어둡고 혼탁한 현실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청신하고 각성된 인식을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동로광생(東魯狂生)이라 부르면서

“서울 시장거리에서 칼을 두드리고(齊나라 풍환:馮驩의 고사),

홀로 노래하여 쫓으며 개처럼 짖지는 않는다(彈鋏燕市中 獨歌不逐吠)”

고 하여 억제할 수 없는 격분을 표출하였던 것이다.


공상임은 유가의 정통적 입장과 사상적 경향을 갖춘 사인(士人)이었다.

그는 통치 계급에 의지해야 할 필요와 강희제에게 한 차례 강렬한 감격의 정을 느끼긴 했지만,

관료로서 뜻을 얻지 못하자 그는 청나라 조정에서 권력을 쥔 일파들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강희제의 지우(知遇)에 대해서도 조금씩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 쓰여져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관료로서 경제를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혼탁한 관료 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조(情操)를 지키면서 역사와 현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졌다.


그는 때로 새 왕조를 찬양하다가도 고국 명 왕조를 추억했으며,

때로 권력가들에게 아부하다가도 명의 유민과 고로(古老)들과도 막역한 친분을 유지했다.


청초의 복잡한 민족적 모순과 계급간의 갈등, 통치 계급 사이의 모순은

그를 복잡하게 변화된 사상적 입장에 서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공상임이 희곡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 30년(1691) 공상임은 당대(唐代) 궁정에서 유명했던 악기인 소홀뢰(小忽雷)를 구입하였다.

33년(1694)에는 고채(顧彩)와 함께 그의 첫번째 전기(傳奇)인 「소홀뢰」를 완성했다.


작품은 양후본(梁厚本)이 소홀뢰를 구입하자 정영영(鄭盈盈)이 이를 연주하면서 마침내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는데, 문인의 불평(不平)한 심정을 표현하고

정영영이 부귀를 추종하지 않고 폭력에도 굽히지 않으면서 정절을 굳게 지킨 반항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작품은 제왕의 어리석음,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권신, 환관들의 전횡과 알력을 거듭 묘사해서

당대 원화(元和 806-820)에서 개성(開成 836-840) 연간까지의 조정의 부패상을 반영하였다.


사료의 취사에 있어서도 극본은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중시해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철저하게 고증(斑斑可考)”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인물(양후본과 정영영 등)들의 관계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는 대담하게 허구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도화선을 창작하기 이전의 탐색적인 시도로서 이루어진 성과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도화선을 창작하는 데 긴요한 예술적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10여 년의 고심과 세 번에 걸친 수정을 거쳐 강희 38년(1699) 6월

공상임은 그의 전기 소설의 최대 걸작인 도화선을 완성하였다.


한 때 이 작품은 “이름난 지식인이면 누구나 빌려 베꼈고(王公薦神 莫不借鈔)”

무대에서 연출되어 “하루도 거른 날이 없을(歲無虛日)”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이 작품의 출현은 탕현조(湯顯祖 1550-1616) 이후 중국 희곡 문학의 발전에 일대 새로운 영역을 형성하였다.

그와 홍승(洪昇 1645-1704)은 모두 청대에 있어서 가장 명성을 떨친 희곡 작가가 되었다.


2. 도화선의 내용 및 사상적 의의 


도화선은 명말(明末) 복사(復社)의 문인인 후방역(侯方域)이 난리를 피해 남경으로 갔다가

진회(秦淮)의 유명한 기생인 이향군(李香君)과 알게 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다음날 사랑을 확인한 뒤,

이향군은 결혼 비용 일체를 위충현(魏忠賢)과 완대성(阮大鋮)에게서 나오게 했는데,

그것은 후방역을 받아들여 악명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향군은 교태를 잔뜩 부리고는 목적을 이루자 화장기를 씻어내고는 돌아와 버렸다.

이에 원한을 품은 완대성은 좌량옥(左良玉)이 남경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때를 타서

방역이 좌량옥과 내통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방역은 회남(淮南)으로 달아나

사가법(史可法 1602-1645)에게 투항해서 참찬군무(參贊軍務)가 되었다.


갑신년 3월 이자성(李自成)이 입성하자 숭정제(崇禎帝)는 자결하고,

간신 마사영(馬士英)과 완대성은 곧 남경에서 복왕(福王)을 세워 남명(南明) 조정을 세웠다.


어리석은 왕과 간신들은 조정은 돌보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환락의 극을 달렸다.

마사영과 완대성은 이향군(李香君)을 위협했지만 그녀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궁궐로 데려와 연금시켰다.


후방역은 남경으로 돌아와 복사의 문인들과 함께 완대성을 체포하려다가 오히려 잡혀 옥에 갇혔다.

얼마 후 청나라 군대가 남하하자 홍광(弘光)과 마‧완은 감옥을 탈출해 달아났다.


방역도 옥에서 나와 장요성(張瑤星)을 따라 서하산(栖霞山)으로 갔다.

이향군 역시 와중에 궁궐을 빠져 나와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두 사람은 제단에서 상봉하고 장도사가 국한(國恨)․가한(家恨)의 이야기로

그들을 설득하자, 두 사람은 함께 입도(入道)하게 된다.

작품은 한 줄기 비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말을 맺는다.


도화선의 사상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 공상임은 희곡의 형식으로 명말의 복잡한 사회적 모순과

민족간의 갈등을 표현하고 남명의 역사를 평가했는데, 일단의 역사적 교훈을 예술적으로 총괄한 것이다.


그러나 공상임은 자신의 계급적 입장과 청나라 정부의 전제 통치에 이끌려

농민 혁명과 명 왕조의 모순을 왜곡시켰고, 청나라 군사들이 침입하면서 자행한 만행은 외면했으며,

때로는 청나라 통치자들을 미화하여 작품의 정확성과 심각성에 손해를 끼쳤다.


그러나 작품은 남명 조정의 부패와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상층 통치 집단과 병권을 쥔 장군들간의 첨예한 모순을 보여 주었다.


또한 마사영․완대성 일파들이 청의파(淸議派)와 무고한 백성들을 수탈한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에게 투항해 버리는 기회주의적 본질에 대해 매서운 채찍을 가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을 표현할 때에도 공상임은 민족 영웅인 사가법의 항전의 결심을 묘사해서,

그가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江山換主)”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영웅적 기개를 부각시켰다.


작자는 이향군이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고 사악한 권력자들을 거부한 지조를 찬양했으며,

민간의 예인(藝人)들인 유경정(柳敬亭), 소곤생(蘇昆生) 등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힘쓴 사실과 기타 가기(歌妓)․ 예인․ 서상(書商) 등 하층 민중들이

권신들을 반대하고 국가를 걱정하며 적군에 순종하지 않는 정의감과 민족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부정적인 인물들과의 대비를 통해, 독자가 명나라 왕조

“삼백년의 기틀이 누구에 의해 무너졌으며 어떤 일로 붕괴했고 어느 해에 사라졌으며 어느 곳에서 끝났는지

(三百年之基業 墮于何人 敗于何事 消于何年 歇于何地)” (「도화선소인 桃花扇小引」)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한 편의 역사 비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잠재적인 민족 의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3. 도화선의 예술적 성과 


도화선은 여러 방면에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희곡 구성상에 있어서, 공상임은 인생을 개괄하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독창성으로

후방역․이향군 두 사람의 애정의 우여곡절을 통해, 또한 그들의 애정 운명을 부채로 상징함으로써

남명 흥망사라는 방대한 내용을 담은 희곡의 구성을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부채를 주어 애정의 징표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애정은 명말의

청의당과 엄당(閹黨) 사이에 전개되었던 치열한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따라서 이야기는 후방역과 이향군 두 사람과 연관된 두 가지 이야기로 전개된다.


방역이 소속된 조종(朝宗) 네 군데의 부산한 상황이 한 단락으로 전개되면서,

남명 초창기와 사진(四鎭)의 내분과 같은 중대한 사건과 모순이 묘사된다.


이향군이 온갖 기만과 능멸을 감수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한 단락에서는,

홍광과 마사영․완대성의 무리들이 반역을 자행하고 안락에 탐닉한 부패한 모습이 묘사된다.


이 두 방향의 이야기 전개는

“다툼을 벌이면 조종(후방역)이 그 근심을 나누게 되고, 쾌락에 빠지면 향군이 그 고통을 받게 되는데,

한 생애든 하루 아침이든 전체적인 강령이 되는 것은 남조의 정치가 보여주는 잘잘못과 연관이 있다

(爭鬪則朝宗分其憂 宴遊則香君罹其苦 一生一旦 爲全體綱領 而南朝之治亂系焉)”

는 것이다. 이는 곧 남명 조정의 넓고 다양한 역사적 국면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끝으로 작자는 이전의 문학에서 대단원을 맺으면서 쓰는 구투에서 벗어나, 장도사가 부채를 꺾고

두 사람은 입도하게 되는 애정상의 비극으로서 끝막음하여 나라는 무너지고 가정은 파괴된 엄연한 현실을 제시하였다.


작자는 “이별과 재회의 정을 빌려 흥망의 감정을 묘사한(借離合之情 寫興亡之感)”독특한 방식으로

명대 이후 꾸준히 발전한 애정극과 시사극(時事劇)의 흐름에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또한 애정 묘사와 정치 투쟁 사이의 관련을 성공적으로 긴밀하게 결합시켜, 희곡의 구성을 세밀하고 웅장하며

독창성이 풍부한 특징을 갖추게 만들어 전통적인 애정극과 시사극의 수준을 모두 새롭게 향상시켰다.


공상임은 인물 형상을 창출하는 데에도 뛰어난 희곡가였다.

그는 중대한 현실적 모순 속에서 전제되는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했고,

자그마한 움직임이나 얼굴 표정 같은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는 또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인물의 다른 태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의 미세한 변화까지 표현했으며,

붓끝에서 옮겨지는 묘사의 다양함으로도 예술 형상을 훌륭하게 구현하기도 했다.


도화선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은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절개를 중시하고

민첩한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향군이나 국가를 염려하고 의협심이 굉장한 유경정,

비분강개한 기상으로 몸을 던진 사가법, 초연히 풍류를 즐기고 연약한 성격에 타협적인 후방역,

붙임성이 좋고 세상사에 능란한 양용우(楊龍友) 등, 그들은 각기 다른 내면 세계와 외모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특히 독자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작자는 단지 각기 다른 유형의 인물 성격을 창조해 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유형의 다른 인물일지라도 분위기에 걸맞는 독특한 개성과 복잡한 성격도 잘 묘사하였다.


같은 기생이지만 이향군은 이정려(李貞麗)나 변옥경(卞玉京)과는 다르며,

같은 예인이라 해도 유경정은 소곤생이나 정계지(丁繼之)와는 다르다.


같은 무장(武將)일지라도 좌량옥은 고걸(高杰)이나 공득공(貢得功)과 다르고,

같은 간신이지만 완대성은 마사영과는 다르다.


작자는 후방역․양룡우 등과 같은 복잡한 인물 형상을 지닌 인물을 성공적으로 창조해서 인물의 개성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복잡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에도 공상임은 그 인물의 역사적 의의와 자신의 가치 평가를 일관성 있게 추적하였다.

등장 인물들의 각기 다른 태도를 통해 작자는 자신의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같은 선명한 경향성(傾向性)과 표현 수법의 다양성, 그 위치에 어울리는 적절한 묘사는

도화선에서 그려진 인물 형상의 현저한 특색을 형성하였다.


도화선은 일종의 역사극으로서 작자는 오랜 기간 동안의 꾸준한 모색을 통해 역사 속의 진실을 찾아

“조정의 득실과 문인들의 이합집산에 대해 모두 분명하게 때와 장소를 고찰해서

남의 의견이나 판단을 빌리지 않았을 (朝廷得失 文人聚散 皆確考時地 全無假借)” 정도에 이르러,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한 편의 “믿을 만한 자료(信史)”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역사극은 우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도화선은 단순한 역사 교과서는 아니며, 참된 가치는 작자가 희곡 예술이 요구하는 원칙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성과 예술적 진실성을 훌륭하게 통일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史實)은 예술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골격이며,

적절한 예술적 가공은 역사의 본질을 심각하고 분명하게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향군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작자는 천선(濺扇)․염선(染扇)․매연(罵筵)․입궁(入宮) 등과 같은

중요한 부분은 허구화시켜 인물의 형상을 풍만하게 확장하고 아울러 민중들의 희망을 반영하였다.


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된 비극을 보여주기 위해 공상임은 후방역으로 하여금

양조(兩朝)의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 뒤 결국 출가해서 입산하게 꾸몄는데, 비록 후방역의 행동에는

가식된 부분도 적진 않지만 명말청초 때의 일부 지식인들이 밟았던 보편적인 행적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작자는 사실의 가공과 허구화에 있어 대개는 그 내용에 맞는 적절한 변개를 가했고,

인물들도 전형성(典型性)을 가지게 되어 희극의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도화선의 언어도 희곡이 공연물이라는 성격에 맞게

풍부한 문체적 수식을 도모해서 희극성과 문학성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작자는 곳곳에 강렬한 서정과 개성적인 곡사(曲辭)를 구사하고 대사 또한 엄숙하고 적절하게 수용했는데,

이는 고대의 전기(傳奇)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이 도화선을 명청대 전기 희곡의 최고 걸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도화선이 탈고된 지 9개월 뒤인 강희 39년(1700) 3월

공상임은 의안(疑案)에 걸려 파직되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미상이다.


작자가 「방가증유우봉(放歌贈劉雨峰)」에서

“운명이 박복해서 문자의 미움을 받아, 입다물고 쇠사람처럼 비방을 듣는다(命薄忽遭文字憎 緘口金人受謗誹)”

고 한 시구와 친구들이 보낸 시로 추측컨대 파직된 이유가 도화선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추론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도화선의 공연이 중단되지도 않았고 출간이 금지되지도 않은 사실을 들어

이 주장에 회의를 가져 의안과 도화선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좀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 이 의문은 해결될 것이다.


강희 41년(1702) 말 공상임은 비분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적막하고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산서성 평양(平陽)과 하남성 대량(大梁), 호북성 무창(武昌) 등지를

잠시 유람하거나 막료로 있다가 곡부(曲阜)에서 별세했다.


​4.저작의 판본과 주석본 


  공상임의 저서 가운데 궁사(宮詞)와 노언(魯諺) ‧ 율려관견(律呂管見) ‧ 전당집(鱣堂集) ‧

개안당집(介安堂集) ‧ 안당문집(岸堂文集) ‧ 작약사(綽約詞) ‧ 절서동풍록(節序同風錄) ‧ 조정신기(祖庭新記)

등이 있지만 모두 없어지고, 안당시집(岸堂詩集)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현전하는 시문집에는 석문산집(石門山集)과 호해집(湖海集) ‧ 장류집(長留集 ‧ 향금부(享金簿) ‧

인서록(人瑞錄) 등이 있는데, 근래에 공상임시문집(孔尙任詩文集)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희곡 작품은 모두 남아 있어, 도화선은 강희각본(康熙刻本)과 난설당본(蘭雪堂本), 서원본(西園本),

난홍실본(暖紅室本), 양계초주본(梁啓超注本) 등이 있다.

근래에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왕계사(王季思)와 소환중(蘇寰中)이 합주본(合注本)을 냈다.

<이상 중국인명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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