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군고거진열관((李香君故居陳列館)


이향군(李香君 1624년 ~ 1653 추정)


소주(蘇州) 창문(閶門) 풍교(楓橋) 사람으로 본래 성은 오(吳)씨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의 명기(名妓)로, 부친은 본래 무관(武官)인데

동림당(東林黨) 성원으로 위충현(魏忠賢) 일파에 의해서 모함을 받아 몰락되었다.


이향군은 8세에 양모(養母) 이정려(李貞麗)를 따라 성을 이씨(李氏)로 바꾸고,

남경(南京) 말릉교방(秣陵教坊)의 명기로 활동했고다.


뒤에 난징의 문학결사 복사(複社) 운동의 우두머리였던 후방역(侯方域)의 첩(妾)이 되었다.

그녀는 유여시(柳如是), 마상란(馬湘蘭), 변옥경(卞玉京), 동소완(董小宛), 고횡파(顧橫波),

구백문(寇白門), 진원원(陳圓圓) 등과 더불어 명말청초 남경 진회 일대를 풍미했던 8명의 기녀와 함께

진회팔염(秦淮八豔)으로 일컬어진다.


진회팔염(秦淮八艳)


진회팔염(秦淮八艳)이란 명말 청초(明末 清初) 남경 진회하(南京 秦淮河)에 살던 

여덟 명의 이름난 명기(名妓)를 말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 금릉팔염(金陵八艳)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유신 여담심재의 "판교잡기(板桥杂记)"라는 기록에 따르면

처음 기록에는 고횡파(顾横波)、마상란(马湘兰)、구백문(寇白门)、변옥경(卞玉京)、이향군(李香君)、동소완(董小宛) 등

여섯 명이었는데 후인들이 유여시(柳如是), 진원원(陈圆圆)을 새로 추가하여 팔염이 되었다고 한다.


일흔 생일을 맞은 남자가 있다.

그의 생일잔치를 차려준 이는 한때 난징에서 이름을 날린 명기 마상란(馬湘蘭, 1548~1604).


마상란은 스물넷에 왕치등을 만난 뒤 삼십여 년을 그만 바라봤다.

난초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고결함’을 꿈꾸었던 마상란은 왕치등이

자신을 아내로 맞아주길 바라고 바랐지만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왕치등의 일흔 생일잔치를 치러주고 몇 달 뒤 마상란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예교와 명분과 명리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상란보다 70년 늦게 태어난 유여시(柳如是, 1618~1664),

그녀는 스물이 갓 지났을 때 문단의 거두 전겸익을 만났고 삼년 뒤(1641) 그에게 시집갔다.


본부인의 반대, 36살의 나이 차,

뭇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전겸익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 유여시를 맞이했다.


누가 알았으랴. 전겸익이 명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맞이했던 기생 유여시의 덕을 보게 될 줄이야.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고 숭정제는 목을 매 죽는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 유신들은 난징에서 주유숭을 황제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을 세운다.

홍광제 주유숭이 제위에 오른 이듬해(1645), 청나라 군대가 난징으로 쳐들어온다.


이때 유여시는 전겸익에게 순국하자고 했다.

호수로 간 두 사람, 몸을 던지기 직전 전겸익은 망설인다.


“물이 너무 차구려. 들어갈 수가 없소.”

유여시는 끝까지 몸을 던지려 했지만 전겸익이 저지했다.


당시 전겸익의 벗들은 청나라를 섬기지 않기 위해 곡기를 끊고 죽기까지 했다.

그런데 천하에 명성을 떨치던 전겸익은 청나라 조정의 예부시랑이 된다.


유여시는 그를 따라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난징에 남는다.

전겸익은 반년 만에 병을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지만 곧 감옥에 갇힌다.


유여시가 백방으로 노력한 덕에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전겸익은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강희 3년(1664), 여든셋의 전겸익이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유여시도 자결한다.

유여시는 전겸익을 감옥에서 빼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반청 세력과 연합하도록 고무했다.


유여시가 아니었다면 전겸익은 변절자의 낙인을 조금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가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가 바로 <유여시 별전(別傳)>이다.


천인커는 유여시를 이렇게 평가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운명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십리진회’ 양쪽 기슭으로 펼쳐진 난징의 번화가에서 지냈던 여인들의 삶은 많이 닮아 있다.

마상란과 유여시, 그리고 다음의 여섯 여인(고미생·변옥경·진원원·동소완·구백문·이향군)은

소위 ‘진회팔염(秦淮八艶)’으로 통칭된다.

진회팔염, 진회하 일대의 여덟 미인은 모두 기생이었다.


유여시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고미생(顧眉生, 1619~1664),

그녀 역시 당시 문단에 이름을 날리던 공정자에게 시집갔다.


불과 몇 년 뒤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한다.

이때 두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으려 했지만 결국 죽지 않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고미생은 공정자와 죽으려 했으나 공정자가 죽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고,

우물로 뛰어들었지만 구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공정자가 이렇게 변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나는 죽으려 했지만 소첩이 싫다고 하니 어찌하오?”


그가 정말 소첩 즉 고미생 때문에 죽지 못한 것일까?

아무튼 공정자는 이자성에게 귀순했고, 뒤이어 청나라의 품안에 들어갔다.


훗날 고미생은 일품부인(一品夫人)에 봉해진다.

기녀 출신으로, 조정으로부터 정식 봉호까지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일까.


고미생은 마흔이 넘어 겨우 딸을 낳지만 몇 달 만에 딸이 죽고 만다.

이에 병이 깊어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전겸익·공정자와 더불어 ‘강좌(江左) 삼대가’로 불리는 오위업 역시 진회의 명기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변옥경(卞玉京, 1623~1665).


변옥경은 오위업에게 시집가길 바랐지만 오위업은 모른 척 외면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난 때는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오위업은 남명 왕조에 잠시 몸담지만 곧 실망하고 조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능하고 조정은 부패하고 당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오위업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생(生)’과 ‘의(義)’의 양자택일을 회피하는 방법이었다.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불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난징에 남았더라면 유약한 그의 성격상 전겸익처럼 청나라의 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터.

몇 년이 지난 뒤 오위업은 변옥경과 재회한다.


황색 도포를 걸친 변옥경은 스스로를 ‘옥경 도인’이라고 칭했다.

그녀 역시 난세에서 ‘생’과 ‘의’ 사이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리라.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변옥경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동안, 오위업은 청 조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삼 년 남짓 벼슬을 지낸다.


오위업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통탄스럽게 여긴 시간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변옥경은 세상을 떠난다.

삼 년 뒤 변옥경의 무덤을 찾은 예순의 오위업은 그녀를 기리는 시(過錦村林玉京道人墓竝序)를 바친다.


오위업은 진원원(陳圓圓, 1623~1695)의 사연을 노래한

‘원원곡(圓圓曲)’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머리털이 관을 찌를 듯 격노한 것은 홍안 때문이라네(衝冠一怒, 爲紅顔)”라는 구절에서,

미녀를 의미하는 홍안은 진원원을 가리킨다.


진원원은 오삼계 때문에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오삼계가 진원원을 알게 된 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바로 전해였다.


어쩌면 진원원은 숭정제의 여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제와 인연이 닿지 않은 그녀는 결국 황제가 총애하던 전귀비의 아버지 전홍우의 가기(家妓)가 되고,

전홍우는 그녀를 오삼계에게 넘긴다.


진원원과 오삼계는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했다.

오삼계가 명나라 최후의 보루인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러 떠났기 때문이다.


곧이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결한다.

오삼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청나라 군대를 막아야 하는가, 이자성의 군대를 무찔러야 하는가?

외적과 역적을 동시에 상대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그는 역적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외적에게 도움을 청한다.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을 넘어와 이자성 군대를 무찌르고 자금성을 접수했다.


오삼계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만약 이자성의 편에 섰더라면 또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으리라.


오삼계가 이자성을 향해 창끝을 겨누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진원원 때문이라고 한다.

이자성의 부하 유종민이 진원원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삼계가 격분한 나머지

결국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삼계는 진원원을 되찾는다.

역사를 뒤흔든 뜨거운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무상하다.


청나라의 공신이 된 오삼계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원원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내 식었다. 진원원은 결국 오삼계를 떠나 부처에 귀의한다.


사실 진원원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숭정 14년(1641) 봄날, 진원원은 모벽강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혼인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진원원이 강제로 베이징 궁전으로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난다.


바로 이때 모벽강의 삶 속으로 들어온 여인이 있으니 동소완(董小宛, 1624~1651)이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정을 추구한 여인이다.


요샛말로 스토커라고 할 정도로, 동소완은 모벽강을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그와 함께하게 된다. 동소완은 모벽강을 많이도 좋아했나 보다.


모벽강이 등에 종기가 나서 똑바로 누울 수 없을 때,

동소완은 그가 편히 기대어 잘 수 있게 해주려고 자신은 꼬박 100일을 앉은 채 잤다고 한다.


동소완은 진회팔염 중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원래 몸도 약한 데다 모벽강의 병시중을 자주 들어야 했고 생활까지 궁핍했던 게 그녀의 수명을 재촉했다.


동소완은 모벽강과 9년을 함께하고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비익(比翼)’과 ‘연리(連理)’라는 글자가 새겨진 한 쌍의 팔찌.


어느 칠석날, 모벽강이 새겨준 것이다.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암수가 함께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결이 통해서 하나의 가지가 된 연리지,

동소완은 그렇게 비익조와 연리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기녀의 운명
동소완 같은 여자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남자, 가장 혐오할 남자가 바로 주국필일 것이다.


주국필과 인연을 맺은 비운의 여인은 구백문(寇白門, 1624~?).

그녀가 시집간 지 3년이 지났을 때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주국필은 명나라 공신의 집안 출신임에도 바로 청나라에 투항했다.

베이징으로 잡혀간 주국필은 집안의 모든 여인을 팔아서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려 했다.


구백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대신 다시 진회하의 기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다.

대신 한 달 안에 그의 몸값을 마련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결국 구백문은 다시 기녀가 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주국필의 몸값을 치러주었다.

일찍이 난징이 떠나가라 호화로웠던 혼인날은 아득한 꿈이었던 듯, 구백문은 주국필을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주국필은 다시 구백문을 찾지만 그녀는 단호히 인연을 끊는다.

“당신이 돈을 써서 나를 기루에서 빼냈고 나는 당신의 몸값을 치러줬으니, 이제 서로 빚진 게 없지요.”

이후 구백문이 진정한 사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해도 그저 여러 첩들 중 하나일 뿐이고 여의치 않으면 내쳐질 수도 있는 존재,

그게 바로 기녀의 운명이었다.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의 주인공 이향군(李香君, 1624~1653) 역시 그랬다.

이팔청춘 열여섯의 이향군이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복사(復社) 4공자(公子)’ 중 한 명인 후방역이다.


복사는 명나라 말 강남 지역에서 결성된 문학단체로, 비판적 정치성향이 강했다.

후방역이 이향군을 처음 만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그 돈을 지원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의 출처가 후방역이 그토록 경멸하는 엄당의 완대성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안 이향군은 돈을 마련해 후방역에게 주면서 완대성에게 돌려주게 한다.


이 일로 후방역은 앙심을 품게 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이 세워진 뒤 완대성이 실권을 갖게 되자, 후방역은 난징을 떠나 피신한다.


완대성은 남명 왕조의 실력자 전앙을 부추겨서 이향군을 첩으로 들이게 한다.

이향군은 이를 거부하며 난간에 머리를 부딪친다.


이때 튄 피가 부채를 물들인다.

후방역이 정표로 주었던 부채다.

후방역의 벗 양용우가 부채에 그림을 그려 그 핏자국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향군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향군의 상처가 낫자 완대성은 그녀를 입궁하게 한다.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향군이 입궁한 지 얼마 뒤, 청나라 군대가 난징을 공격하고 그 틈에 그녀는 도망친다.


이후 이향군과 후방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향군이 후방역을 다시 만나 함께 지내게 되지만 시댁에서 그녀의 기생 신분을 알게 되어 쫓겨났다는 설도 있고,

이향군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방역은 복사 4공자의 나머지 셋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진정혜와 모벽강은 끝까지 청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방이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지만,

후방역은 과거에 응시해 청나라 조정에 몸담는다.


훗날 그는 젊은 날을 후회하며 자신의 서재를 ‘장회당(壯悔堂)’이라고 명명했다.

‘장년의 후회’를 담은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향군이 죽기 전 후방역에게 당부하길

 “절개를 지키고 이민족을 섬기지 말라” 했다고 한다.


‘진회팔염’이라는 여덟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사랑했던 여덟 명의 남자.


진회하는 이들 만남의 증인이다.

진회하를 사이에 두고 강남공원(貢院)과 이향군 고거(故居)가 마주하고 있다.


강남공원의 수많은 과거 응시자들, 진회하에 늘어선 기루의 여인들,

얼마나 많은 이들 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랴.


기녀지만 사랑에 진실했던 여인도 있었을 터이고,

그런 여인을 그저 전리품이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을 터.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진회하의 술집을 보며 박진회(泊秦淮 진회에 묵으면서)에서

“술파는 여인은 망국의 한을 모른 채 강 건너 편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를 부르네” 라고 한탄했다.


‘후정화(後庭花)’는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후주(後主)가 지었다는 노래다.

두목은 진회하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환락에 빠져 지내다가 수나라에 멸망당한 진나라의 전철을 당나라가 밟게 될까 저어한 것이리라.


하지만 두목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노랫가락의 주인공인 ‘그녀’가 ‘그’와 ‘조국’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글 :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향루(媚香樓)








▲ 이곳은 이향군과 복사문인들이 자주 만나던 곳이며 이향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이향군의 침실

이향군과 후방역(侯方域 1618 ~ 1654년)은 이곳에서 신혼의 밤을 지냈고

후방역이 피난하여 떠나기 전에 이향군이 <비파>곡을 부르면서 부두까지 보내주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 · 강택민)과 같은 시기 국무원 총리 리펑(李鵬 · 이붕)의 글씨


십리진회(十里秦淮) - 십리(十里)에 걸쳐 진회 물결과 같이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해서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 불린다.


'十'이라는 숫자는 중국 사람들에게 완전과 원만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숫자다.

그래서 '십전십미(十全十美)'는 가장 완전하고 무결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한약에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이 있는데 보약의 재료가 완벽하고 약효가 뛰어나 건강에 매우 좋다는 의미이다.

또한 북경에 '십리장안(十里長安), 남경에는 '십리진회(十里秦淮)', 상해에 '십리양장(十里洋場)'이라 하여

중국에서 대표적으로 유명한 거리를 일컷는 지명으로 삼고 있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이 모택동의 글씨로 수채구멍 위 벽에 새겨져 있다.


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毛澤東

주작교변야초화  오의항구석양사  구시왕사당전연  비입심상백성가  모택동
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 오의항구에는 석양이 지네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앞 제비가 /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곡수유상(曲水流觴)


곡수유상(曲水流觴)은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삼월 삼일 삼짇날,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유상곡수(流觴曲水) · 곡수지유(曲水之遊) · 곡수연(曲水宴) · 곡강연(曲江宴)이라고도 한다.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흘려보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유상곡수 행사는 이를테면 물길 따라 위에서 술잔을 띄워 아래로 내려 보내서

그 술잔이 물에 따라 내려가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그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 일이다.


음력 삼월 첫 사일(巳日:뱀날)을 보통 상사일(上巳日)이라고 한다.

유상곡수를 행하는 날이 원래 상사일이었으나 중국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조(曹)나라 진(晋)나라 때 와서는 음력 3월 3일(삼월 삼짓날)로 굳어졌다고 한다.


중국 동진시대 유면한 서예가 왕희지가 우군장군 겸 회계 내사 벼슬을 할 당시

353년(영화 9년) 늦봄에 회계 땅에서 유상곡수 연회를 열었던 일이 있었다.

353년 늦봄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삼월 삼짓날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행해졌다.

통일신라시대 인공적으로 포석정을 만들어 술잔이 한바퀴 빙 돌아가게 만들어 음주하고 노는 풍류가 있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정읍 태인에서 태산태수로 부임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칠보 시산리에 유상곡수를 축조하여

이른바 유상대(流觴臺)를 만들어 촌로와 문인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대체로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음력 3월 3일이었다.

이 때가 되면 백성들이 액막이(수계:修禊)라 하여 물가로 모여드는 데,

이 때 유상곡수하여 술을 마시는 일이 행해진다.


유상곡수를 하는 날은 대부분 홀수 날이며 그 중에서도 홀수의 배가 되는 날에 행해진다.

곧, 1월 1일(설날), 3월 3일(삼월 삼짓날), 5월 5일(단오날), 7월 7일(칠석날), 9월 9일(중구일)이 바로 그런 일을 행하는 날이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

한국의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는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포석정(鮑石亭)

경주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수지전(淝水之战)


오호십육국 시대인 서기 383년 북방의 전진(前秦)이 남방의 동진(东晋)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가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寿县, 수현) 동남방 화이하(淮河) 지류인 비수(淝水)에서

80여만의 전진(前秦)이 동진(东晋)의 사현(謝玄)이 이끈 8만의 군사에 대패한 전투.


화베이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전진(前秦)이 점차 성장하여

화베이의 패권을 차지하였으며 부견(苻坚)은 357년 제위를 탈취하여 3대 황제가 되어 한인 왕맹(王猛)을 중용하고

국력이 강대해져 단기간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과 익(益) 2개 주(州)를 획득하였으며

북쪽으로 선비(鲜卑) 탁발씨(拔拓氏)의 대(代), 서쪽으로 전량(前凉)을 점령하고

서역(西域)까지 정벌하며 376년 화베이의 통일을 이루었다.


왕맹(王猛)은 죽기직전 부견의 남진정책을 반대하였으나 부견은 조기에 중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왕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의 사후 바로 동진(东晋)의 공격에 나섰다.


동진은 전진의 남침에 대비하여 376년 태원(太元) 원년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马矅)가 친정(亲政)을 시작하고

사안(谢安)을 중서감(中书监), 록상서사(录尚书事)로 승진시켜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사안은 조카 사현(謝玄)을 연주자사(兖州刺史)로 임명하여 광릉(广陵)에 배치하며

사안이 관할하던 양주(扬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青州)의 5개 주(州)의 군을 통솔하며

창강(长江, 장강)하류 강북일선의 방위를 총괄토록 하였다.


사현은 광릉(广陵)에 머물며 훌륭한 장수와 정예병을 양성하여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군대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북부병(北府兵)으로 칭해졌다.


378년 4월 전진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将军) 부비(苻丕)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7만을 이끌고

양양(襄阳)을 공격하게 하였고 부견은 별도로 10만여 군대를 3개로 나누어 함께 양양을 포위하여

총 17만 병력으로 공격하여 1년여 만인 태원(太元) 4년(379) 2월 이를 함락시켰다.


부견은 이어 팽성(彭城)을 공격하였고 양측 간의 회남지전(淮南之战)에서 사안(谢安)은 건강(建康)에서 수비하며

사현에게 5만의 북부병을 광릉에서 출병토록 하여 사현이 4전4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县公), 사현은 동흥현후(东兴县侯)에 봉해졌다.


태원 8년(383) 5월 동진은 먼저 한충경(桓冲倾)에게 10만의 형주(荆州) 병력을 동원하여 진(秦)을 공격하여

진군(秦军)을 견제토록 하자 부견은 부예(苻睿), 모용수(慕容垂), 요장(姚苌) 및 모용위(慕容暐) 등으로 전투에 임하게 하고

자신이 친히 60만 병력을 인솔하여 기병 27만을 동생 부융(苻融)으로 선봉을 삼아 8월 대거 남침을 시도하였다.


이에 사안은 사석(谢石)을 전선대도독(前线大都督)으로 삼고 사현을 선봉으로 하여

8만 병마를 3개로 나누어 진군(秦军)을 맞아 출병시켰다.


11월 사현은 유뇌지(刘牢之)로 하여금 5천의 정병으로 기습하여

진군(秦军) 10여 장수를 죽이고 5만 주력을 격파시켰다.


12월 쌍방은 비수에서 결전하기에 이르렀다.

사현, 사담(谢琰) 및 환이(桓伊)는 진군(晋军) 7만을 이끌고

부견과 부융이 통솔하는 전진의 15만 대군에 전승하며 부융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부견은 혈혈단신으로 도망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 분립의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黄河) 이남의 옛 영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하였으며,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부견은 385년 치앙족(羌族, 강족) 요장(姚苌)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며 살해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모용수(慕容垂)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의 함락을 도모하였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치앙족(羌族,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화베이는은 혼란 속에 빠져들어 전후 10개국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국(代國)이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베이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희지(王羲之, 321~379)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태생인데 강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선인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법을 연구 · 창조함으로써

서예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서성(書聖)’이라 불리고 있다.


글씨를 처음 배울 때 그의 글씨는 또래들과 비교하여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한다. 

하지만 글씨에 열중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태도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왕희지가 글씨에 열중할 때는 그야말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다른 학문을 공부할 때, 식사할 때, 길을 거닐 때, 하루 24시간 내내

글씨체의 대소, 구조, 운필(運筆)에 대하여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으로 옷이나 방바닥에 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옷이란 옷은 모두 달아서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글씨에 몰두하고 있어 가족이 밥상을 차려들고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런데 서재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희지는 글씨에 정신이 팔렸음인지 자신의 옷자락을 먹에 묻혀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가족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밥상을 가지고 왔음을 의식했을 무렵

왕희지의 입안은 온통 먹투성이가 된채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곧잘 연못 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의 물로 벼루를 씻었는데

얼마 후에는 그 연못의 물이 온통 검게 흐려져 그 연못을 ‘묵지(墨池)’라 부르게 되었다.


왕희지는 이러한 끈질기고 꾸준한 정신으로 수십 년 간의 노고 끝에

마침내 서예의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서예계의 정상에 올랐다.


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묵보(墨寶)’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 · 임천대수(臨川大守) · 강주자사(江州刺史) · 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 · 행(行) · 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

〈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여 진열되어 있다.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계제사(禊祭祀 )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그의 동산첩(東山帖)도 진열되어 있다.


왕희지에 얽힌 일화들


왕희지는 어느 날 회계 산음서 부채를 파는 노파를 만났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너무 허술하였기 때문에 부채를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노파를 가엾게 여긴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6자씩 써넣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채를 망쳐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왕희지는 그 노파에게 "왕희지 글씨 부채"라 외치라고 하였다.
“이 부채에는 왕희지의 친필이 씌어져 있어서 1백 전(錢) 이하로는 절대 팔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오.”


당시 부채값의 몇 십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왕희지의 친필이 담겨진 부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며칠 후 노파는 또 왕희지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희지는 이미 장강 이남에서는 명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글씨 또한 당대에서조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왕희지의 친구 중 한 사람이 양고기를 좋아했는데, 형편이 가난하여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그는 양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왕희지에게 편지를 썼고, 답장이 오면 내용을 읽은 후

그 편지를 <왕희지 글씨>라고 수집가에게 팔아서 그 돈으로 양고기를 사 먹었다.


왕희지는 친구가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는 것인데,

때로는 이런 황새를 흉내내려는 풍류가가 등장한다.


동파 소식의 문명이 한창 드높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가져온 하인의 말인즉  <친필로> 답장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왕희지의 양고기 좋아하는 친구 일화를 떠올린 소동파는 하인에게 농담삼아 일렀다.

"너희 주인 어른에게 가서, 오늘은 푸줏간이 문을 닫았다고 말씀드려라."


물론 이런 고상한(?) 농담이 하인에게 통할 리 없으니,

그의 생뚱맞은 말에 하인은 "오늘 푸줏간 영업합니다, 나으리." 하고 진지하게 반박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계 땅에 의지할 곳 없는 어느 노파가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거위의 울음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희지가 제자로 하여금 그 거위를 사려 하였으나 노파는 팔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왕희지는 그 거위를 가지지는 못할망정 한번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친척과 벗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왕희지가 친히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자기 집을 찾아온 명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거위를 잡아 대접하기로 하였다.


왕희지는 한번 구경삼아 찾아왔을 뿐인데 문제의 거위가 냄비 속에서 요리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을 두고 애석해했다고 한다.


산음 땅의 어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는 열렬한 애호가였으나

그 글씨를 손에 넣기가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우선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몹시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도사가 기르는 거위는 그 색깔이 희고 살집도 좋았다.


이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배를 타고 도사의 집을 찾아가 그 거위를 흥정하였다.

도사가 말하였다.


“이 거위는 내게 너무 소중하고 귀한 것이어서 팔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하시다면 그냥 선물로 드리겠으니 경전 한편을 베껴 주시겠는지요...”


거위를 몹시 좋아했던 왕희지는 대뜸 승낙하고 흔연히 붓을 들어 즉석에서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답례로 거위 한 쌍을 받았다.


여기에서 환아(換鵝)라는 말이 생겼다.

청나라 궐람(闕嵐, 1758~1844)이 그린 작품 화제(畵題)를 보면 뚜렷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書錄黃庭墨生彩(서록황정묵생채) 잘 쓴 황정경의 먹빛은 광채가 나고
逸少妙筆換白鵝(일소묘필환백아) 일소의 신묘한 운필은 흰 거위와 바꿨느니라


왕희지의 글씨는 수없이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난정서(蘭亭序)>다.

난정은 회계 산음에 있는 유서 깊은 명소로 산수가 아름답고 대나무 숲이 유명하였다.


특히 난정 부근에는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흘러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구력 3월 3일은 이 지방 고유의 명절이었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등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대하여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는 향연을 벌였다.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시냇물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내려 보내면 각기 냇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술잔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술잔이 자기 앞에 닿으면 즉흥시 한 수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기로 하였다.


그날 따라 시냇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술잔이 하나 둘 띄워져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술잔이 와 닿기를 기다리던 명사들은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자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이내 시 한 수를 지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모두가 당세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벌주를 마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40여 편의 시가 한꺼번에 완성되었다.


이 40여 편의 시를 한 책에 모으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이것을 <난정서>

또는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라고도 한다.


이 서문은 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뜻하고 매끈한 흘림체로 되어 있고

자체가 유려하여 중국 행서(行書)의 절품(絶品)으로 꼽히고 있다.


후세에 이르러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되어 왕희지의 후손으로부터

<난정서>의 필첩(筆帖)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 서예가 조모(趙模), 풍승소(馮承素) 등으로 하여금

난정서를 여러 책 베끼게 하여 친족과 측근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일생동안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여러 차례 제사(題詞)를 쓰고,

또 사후에는 부장품으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후 태종의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난정서> 진필은 유실되고 말았다.

왕희지의 행서의 대표적 작품은 이렇게 유실되었지만,

태종의 생존시에 왕희지의 글씨를 베끼는 일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강 이남에서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1천여 년에 걸쳐 왕희지의 글씨는 서체(書體)의 정통(正統)으로서 중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의 글씨는 주로 종이와 비단에 씌어졌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동안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나

청나라 건륭(乾隆, 1662~ 1795) 시대에 이르러 동진 때의 왕희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왕순(王恂)의 필첩이 발견되었다.


왕희지의 필첩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필첩은 〈중추접(中秋帖)〉,

왕순의 필첩은 〈백원첩(伯遠帖)〉이라 불렸다.


이 세 필첩은 희대의 진품으로 지정되어 내부(內府)에 특별 전시실을 설치하고 보존하였으며,

그 전시실을 ‘삼희당(三希堂)’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은 관광의 명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난정 곁을 흐르는 시냇물과 묵지 연못의 물에는 지금도 그 옛날의 서성 왕희지의 체취가 담겨 있는 듯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기념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당시의 실제 유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당시의 토기 몇 점과 남경박물관에 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새긴 벽돌 모사품,

그리고 북경박물관에 있는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 모사품이 눈에 띄었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년~263년), 혜강(223년~262년), 산도(205년~283년),

유영(연대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년~305년)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선망하는 대상이 된 것은 틀림없다.



낙신부도(洛神賦圖)


낙신부(洛神賦)는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들이며 건안칠자(建安七子)라는 그 시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조식(曹植)이 낙양(洛陽)의 낙수(洛水)에서 신녀의 환영을 보고 읊은 장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시는 형인 문제 조비(文帝 曹丕)의 견황후(甄皇后),

즉 형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녀는 원래 조조에게 패한 원소(袁紹)의 며느리로 당대의 절색미인이라서

조씨 삼부자가 일종의 전리품으로 강탈하여 마지막에는 맏아들인 조비가 차지했다.

그러고보면 조식의 시가 아름답다고 말하긴 좀 껄끄럽다.


낙신부도(洛神賦圖)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 344년 ~ 406년 경)가 그린 그림이다. 

자(字)는 장강(長康), 호두(虎頭)이다.


강남 명문호족 출신으로 그림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와 서법(書法)에도 능했으며 박학 다식했다.

성격이 솔직하고 소탈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화절(畵絶), 재절(才絶), 치절(癡絶)을 갖춘 삼절(三絶)이라 칭했다.


특히, 인물화,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인물을 그리면서 몇년이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정신을 비추어 내는 곳이 바로 눈동자이다." 라고 했다.


그는 기존의 형사(形似) 위주의 화풍과는 달리 신사(神似)를 중시하여 인물화에서 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본은 복경박물관에 있고 여기에 있는 그림은 모사품이다.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


오의항(烏衣巷)의 중심은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이다.

하지만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고택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어진지 오래이고 지금은 그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입구에 위진유풍(魏晉遺風)이라 쓰인 현판 밑에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이 각종 서체로 판각되어 전시되고 있다.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은 육조(六朝 : 東吳, 東晉, 宋, 濟, 梁, 陳)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귀족 정치인이다.

유명한 서예가 왕휘지(王羲之)와 시인 사령운(謝靈運)도 그들의 집안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독점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귀족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북방의 전진(前秦) 80만 대군을 불과 8만의 동진 군대로 패퇴시킨 유명한 비수지전(淝水之戰)의 영웅,

사현(謝玄)도 그들 집안이다.


조카 사현의 승전보에도 삼촌인 사안은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고,

“어린 녀석들이 적을 격파했군” 하고 조용히 중얼대고, 두던 바둑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열중했다고 한다.

 

그런 냉담과 오만이 귀족정치의 특성이고, 현학인가 보다.

물론 그 직후 손님이 가고 혼자 있자 너무 기뻐서 폴짝폴짝 뛰다가 나막신 굽이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이가 부러졌지만 모르고 계속 기뻐했다는 불각극치지절(不覺屐齒之折)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곽말약(郭沫若, 궈모러)의 기념사도 문 옆에 세워 놓았다.


왕도(王導, 276년 ~ 339년)


중국의 5호 16국 시대의 정치가. 자는 무홍(茂弘).

서진과 동진을 섬겨 그의 활약에 의해서 낭야 왕씨는 육조 시대의 남조를 대표하는 명문 귀족이 되었다.


아들 왕열(王悦), 왕습(王洽) 등이 있고,

동진의 대장군 왕돈(王敦)은 사촌형, 서가의 왕희지(王羲之)는 종조카에 해당한다.


서진 시대에는 낭야왕 사마예(司馬睿)를 섬겨서 가까운 장래에 진이 멸망할 것을 예측하고,

도읍을 낙양에서 건강(建康, 건업)으로 옮기도록 진언해, 307년에 건강으로 옮겼다.


308년에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어, 서진은 유연(劉淵)이 세운 한에 의해서 공격을 받는다.

유연의 뒤를 이은 유총은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회제(懐帝)는 붙잡혀 진의 황족 대부분이 살해당한다.


313년에 회제가 살해당하자, 무사히 장안으로 탈출한 사마업(司馬鄴)이 즉위하지만

유요에게 공격받아 316년에 붙잡혀 다음 해에 일족과 함께 살해당한다.


그 때 강남으로 피했기에 이런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황족인 사마예는,

317년에 왕도의 후견으로 원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동진의 시작이다.


왕도는 동진의 재상으로서 고영(顧栄)、하순、기첨(紀瞻)、유량(庾亮)、변호(卞壺)、

제갈회(諸葛恢, 제갈탄의 손자, 제갈정의 아들)、간보(干宝)、곽박(郭璞) 등의 인재를 원제에게 추천했다.


백육연(百六掾)이라고 불리는 이들 백여(중국 전토)의 하급 관리들은,

화북으로부터 피해 온 귀족과 강남의 호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왕도는 이런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부하로 모으는 것으로 그들의 대립을 정리하고

이를 이용해 동진의 정권 기반을 안정시키려고 생각했다.


한편, 사촌의 왕돈에게 군사를 주어 장강 중류 유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원제는 정치·군사의 양면에서, 낭야 왕씨의 존재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게 되어,

유외(劉隗) · 조협(刁協) 등을 중용하고, 왕도의 정치력을 배제하려고 했다.


322년, 대장군이 되었던 왕돈은 원제의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가져,

유외·조협의 타도를 명목으로 무창에서 거병했다(왕돈의 난).


이 때 수도 건강에 있던 왕도는, 유외에 의해 반란자의 일족으로 처형될 뻔 하지만,

주의(周顗)의 중재에 의해 무사할 수 있었다.


동년, 원제는 사망하여 명제가 즉위했고, 324년, 소준(蘇峻) 등에 의해 왕돈의 반란은 진압되지만,

왕도는 실각하는 일 없이 정치를 계속 맡았다.


325년, 명제가 사망하고 성제가 즉위하자, 왕도는 사도로서 중서령 유량(庾亮)과 함께 정치를 맡게 되었다.

성제의 외척이었던 유량은, 당시 왕도를 능가하는 권세를 자랑해,

북쪽 이래의 귀족과 강남 토착의 호족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왕도의 정치 방침을 바꿔,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해서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생각하지만,

327년, 소준이 유량 타도를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를 낳았다(소준의 난).

329년에도 도간(陶侃), 치감(郗鑒) 등에 의해서 반란이 진압되자,

유량은 중서령을 물러나 지방에 진주했으므로, 다시 왕도가 단독으로 정치를 맡게 되었다.


후에 유량은 왕도의 시정이 너무 관대하다고 하여, 거병해 왕도를 저지하려고 생각했지만,

치감의 찬동을 얻지 못하고 거병을 단념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왕도에게 전했지만, 왕도는

"자신과 유량은, 국가를 위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만약 그가 자신을 불의불충한 사람으로서 공격해 온다면,

나는 깨끗히 관직을 물러나 은거하겠다.

아무것도 무서워할 것은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339년에 64세로 사망해, 승상이 추증되었다.


사안(謝安 320 ~ 385)


동진(東晉)의 문인, 저명한 정치가, 자는 안석(安石).

명문가에서 태어난 데다가 인격이 고매하고 기품이 청아하며

아량(雅量: 담대한 기질을 가리켰는데 당시엔 매우 높게 평가되던 덕목이었음)까지 있어서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어 강주자사인 유빙(庾빙)이 여러 차례 출사를 권고했는데도

병을 핑계대고 번번히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한번은 더 사양하기 어려워 마지못해 부임했으나 한 달여 만에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출사를 명하는 조칙이 있었지만 듣지 않고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서예가인 왕희지 · 승려인 지도림(支道林: 석지둔(釋支遁)) · 문인인 손작(孫綽) · 허순(許詢) 이충(李充) 등과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고 바둑을 두며 기생들과 노닐기만 할 뿐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뒤에 결국 출사하여 사마를 거쳐 이부상서에 오르고 제위를 빼앗으려는 환온의 야망을 저지,

또 전진왕 부견이 백 만 대군을 이끌고 진을 침공하자 정토대도독이 되어 소수의 병력으로 이들을 격파, 국난을 면케했다.


중국역사상 가장 풍류적인 재상(宰相)


중국역사상 유명한 재상들은 각자 독특한 점들이 있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있다.


"국궁진췌(鞠躬盡瘁)"라면 누가 제갈량(諸葛亮)을 따라올 것인가?;

"예의개혁(銳意改革)"이라면 왕안석(王安石)만한 사람이 없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면 왕도(王導)를 꼽아야 할 것이고

"돈적거기(囤積居奇)"라면 여불위(呂不韋)를 말해야 하며

"구밀복검(口蜜腹劍)"은 이임보(李林甫)를 따를 자가 없다....


트레이드마크는 각양각색이고, 그 중 아무나 한 사람을 고르더라도,

그 인생의 오묘함을 연구하려면 몇 년은 최소한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혹은 IQ가 아주 뛰어나고, 혹은 흉금이 남달리 넓은 엘리트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명상(名相)은 트레이드마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많이 사는데,

그는 바로 "풍류(風流)"라는 두 글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이다.


"풍류"라는 단어는 고대에는 보통 단어가 아니었다.

풍우란(馮友蘭) 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풍류라 함은 인격의 지극한 아름다움(至美)이고,

그것은 일종의 지고(至高)한 인생의 경지이다.


사안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커다란 공명을 당대에 거두면서도

자신의 진실한 성정(性情)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국의 수천 년 동안 문인들의 마음 속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단지 이런 인생을 몇 사람이나 살았는가? 바로 사안은 그들의 꿈을 이룩한 사람이다.


과연, 이태백이 사안이라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일생동안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소동파, 육우, 왕안석 등등도 그들의 시사에서 사안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전에는 이중천(易中天) 선생이 삼국지를 감상한 후 글을 써서

"오로지 사안만이 진짜 천인(天人)이로다"라고 감탄한 바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안은 동진왕조의 거목이다.

앞에는 "좌우봉원"의 왕도가 있고, 뒤에는 "풍류소쇄(風流瀟灑)"의 사안이 있다.

그리하여 백년왕조가 지탱하였던 것이다.


"소쇄"라는 두 글 자는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가 사안에 대하여 한 찬사에 나오는 말이다.

'당신은 원래 가장 소쇄로운 사람이다.' 아마도 소쇄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가 아닐까?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휘황한 두 번의 시기가 있다.

환온(桓溫)의 반역음모를 담담하게 저지한 것과, 진나라의 백만대군을 웃으면서 격퇴한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어서 후세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칭송하는 것이 되었다.


373년, 동진천하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은 대사마 환온은 병력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와서 성밖에 홍문연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온 것은 바로 "왕사(王謝)를 주살하고, 진정(晋鼎)을 옮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바로 사안과 또 다른 중신 왕탄지(王坦之)를 죽여버리고, 진나라로부터 나라를 빼앗겠다는 말이다.

그를 영접하러 갔던 대신들을 혼내서 쫓아보내니, 모두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왕탄지도 등에 식은 땀을 줄줄 흘렸고,

내용을 기록하기 위하여 손에 들고 있던 수판(手版)을 거꾸로 들기까지 하였다.


오로지 사안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앞으로 걸어나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환온에게 물었다.

"환공! 내가 듣기로 도리를 아는 제후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사방을 지켜야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병사를 장막의 뒤에 두었는가?"


환온은 졸지에 멍해졌다.

원래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제압했다고 생각했고,

황제가 최소한 그를 섭정왕에 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안이 이렇게 나오자 그의 원래 속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안의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자,

그는 한참을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마침내, 환온은 웃음띤 얼굴을 하고는 사안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그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진의 한바탕 위기는 이렇게 넘어갔다.

만일 이번에 사안이 통상적인 문인의 담량과 풍류로 동진을 구했다고 말한다면,

10년후의 비수지전(淝水之戰)은 그가 구해낸 것은 단순한 동진왕조가 아니라 전체 천하였다.

심지어 수천년의 중국문화라고 할 수 있다.


383년, 전진의 천왕 부견이 친히 90만 대군을 이끌고, 몇 개 방향으로 나누어 장강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진에서는 위로는 황제에서, 아래로는 문무대신에 이르기까지, 졸지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투항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사안은 바로 대권을 손에 움켜쥐고 있던 재상이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 난국을 수습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안은 이전처럼 담담했다.

뭐 무서울 것이 있는가? 그는 바로 응전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여기에서 끝장내버리겠다"

그 후에 다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신들은 신경쓰지도 않고,

친구들을 이끌고 함께 별장으로 가서 바둑을 둔다.


사람들이 모두 안정되자, 사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장수를 지명하고, 전략적인 배치를 한다.

비수지전이 진행되는 1달 여 동안 사안은 "진지이정(鎭之以靜)"의 책략하에

전체 동진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평안했고, 백성들도 모두 안심하고 지냈다.

전혀 큰 전쟁을 치르는 나라같지 않았다.


금방 비수대첩의 소식이 전해진다.

사안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동진의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북부병(北府兵)"을 이끌고

회하전선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 것이다.


일거에 부견의 대군은 궤멸한다.

이때의 사안은 여전히 집안에서 손님들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아보고는 가볍게 한켠에 밀어놓고, 다시 바둑에 집중한다.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손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선의 소식입니까?" 사안은 그제서야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이미 적군을 대파했다는군요..."

어쨌든 사안도 신선은 아니니까, 이때의 심정은 아마도 기뻐서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마음 속의 기쁨을 누르고, 방으로 돌아갔다.

발에 신고있던 나막신이 문턱에 부딛쳐서 부서졌는데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두 번의 역사적인 휘황함은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다.

다만, 역사상 유일한 "풍류재상"인 사안에 대하여 후세인들이 가장 감탄하는 점은

이같은 불세출의 공적을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초연물외(超然物外)한 심정과 성정이

바로 후세에 1쳔여 년 간이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사안은 일찌감치 소쇄한 풍도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근 20년이나 은거한 후에 관직에 나섰다.


이 이십년동안, 관료사회가 어떻게 억지로 그를 끌어들이려 하거나 유혹하더라도

그는 못들은 것처럼 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인생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족의 책임을 부담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서게 된다.

사안이 관직을 맡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불세출의 공적은 원래 그가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동진천하를 떠받쳤고, 그는 관직에서도

시원시원하게 있으면서 아주 허약한 나라를 잘 버티게 해왔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가 개세의 공적을 세우고, 사마씨 왕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는 대권을 손에쥐고, 병력을 움켜쥔 상황 하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모든 대권을 버려버린다.


황제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시원스럽게 경성을 떠난다.
이렇게 태산보다 큰 권력을 그는 왜 버릴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의 심경은 원래 훨씬 더 크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자연"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인물에게는 모든 외물은 작게 보인다.


그래서 가족이든 국가이든 이런 중대한 책임이 항상 사안의 머리를 짓눌렀지만,

사람들은 그가 비분강개하거나 놀라고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본 것은 항상 시원스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안은 항상 자아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은거하고 있을 때, 그는 하고싶은대로 나날을 보냈다.

아마도 은거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청빈의 대명사이겠지만,

사안에게 있어서는 "은(隱)"이라는 것이 소쇄한 것이다.


소쇄할 뿐아니라, 화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좋아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약간의 가기(歌妓)들을 길렀고, 자주 그녀들과 손을 잡고 숲으로 샘으로 놀러가거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조정에 관직을 맡은 후에도 집안에는 여전히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와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도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관리들의 의론이 분분했다. 모두 그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손가락질했다.

사안은 그들과 다투지 않았고, 아예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가 커다란 공을 세우자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왕망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매일 여전히 성대한 연회를 집안에서 베풀었다.

매번 바깥나들이할 때면, 가마는 화려하고 헌앙했다.


그가 보기에 조건이 허락하는 하에서 그는 최대한 자신의 심령의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자 한 것이다.

원래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 생활한 것이다.


민녀 축영태가 회계 양산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안은 감동했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축영태에게 "의부(義婦)"라는 칭호를 내리게 하고,

그후에 친히 글을 써서 그녀의 묘를 "의부총(義婦塚)"이라고 하였다.


그녀를 천하 여자의 모범이 되도록 했다.

양산백,축영태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천고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사안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의부"를 보자.

딸이었을 때 남장을 하고 돌아다녔고, 부모가 그녀에게 짝지어준 혼인을 마다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그후 사랑하는 낭군이 죽자, 그녀는 명분도 버리고 신분도 버리고, 함께 한 곳에 묻힌다...

이것이 고대에 떠받들던 "정결열녀(貞潔烈女)"인가?


오히려, 완전히 봉건적인 예교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사안은 이런 여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사실 그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眞)". 사안의 마음 속에 이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안과 왕도를 나란히 놓고 얘기하기를 즐겼다.

그들은 강좌의 두 "풍류재상"이다.


그러나, 남조에 이르러, 왕도승상의 후대인 상서복야 왕검(王儉)은 이렇게 말한다.

"강좌의 풍류재상은 오로지 사안 한 사람뿐이다."


사실 전체 중국역사에서 재상에게 "풍류"를 얘기하자면 사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풍류"를 마음 속으로 가져간 사람이다.

그의 "풍류"는 바깥의 외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글 : 유아여(劉雅茹)


내연당(來燕堂)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記念館)의 주 건물


내연당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안(謝安)은 평소 산수 간에 유람하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사연이 간신히 나뭇조각에 의지해서 육지에 다다르니

검은 옷[烏衣]을 입은 노인이 그를 맞아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의식이 풍족한 오의국(烏衣國)이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노인의 딸과 정분을 맺어 혼인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 대들보 위에 한 쌍의 제비가 집을 지은 것을 보고 불렀더니

그의 어깨 위에 날아와 앉았다.


두고 온 오의국의 부인에게 간절한 사연을 적은 편지를 제비 발에 매어 보냈더니

이듬해 봄에 제비가 답신을 가지고 날아왔다.


그래서 사안은 해마다 제비가 답신을 가지고 날아오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아서

거처하는 집에 내연(來燕, 제비가 돌아오다)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유우석의 시 <오의항>은 이 전설과 무관하게 읽어도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만

내연당의 제비 전설과 교묘하게 엮여서 더욱 재미있게 다가온다. (송재소, 중국인문기행, p 418~419)





오의항(烏衣巷)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남부에 있는 부자묘(夫子廟) 정문에서 나와 진회하(秦淮河)를 끼고

오른쪽 즉 서쪽으로 조금 가다가 문덕교(文德橋)라는 작은 다리를 통해 진회하를 건너면

하얀 석회벽에 ‘오의항(烏衣巷)’이라는 녹색 글자가 새겨진 좁다란 골목이 하나 나온다.


이른바 현학(玄學)을 즐기는 강남의 귀족들이 검은 옷(烏衣)를 입고 사는 거리라는 뜻이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오른쪽에 왕도사안기념관(王導謝安紀念館)이 있고 왼쪽에 빛바랜 민가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가 바로 중당(中唐)의 대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시상을 자극한 역사적인 골목이다.


오의항(烏衣巷) / 유우석(劉禹錫)


朱雀橋邊野草花(주작교변야초화) 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烏衣巷口夕陽斜(오의항구석양사) 오의항구에는 석양이 진다

舊時王謝堂前燕(구시왕사당전연)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앞 제비가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오의항(烏衣巷) :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동남쪽의 거리.

오(吳)나라 때 석두성(石頭城)을 호위하던 병영이 이곳에 있었는데,

당시 병사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동진(東晋)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등의 귀족들이 이 골목에 많아 살았다
주작교(朱雀橋) : 진회하(秦淮河)에 있는 다리 이름.

지금의 南京市 취보문(聚寶門) 안에 있는 진회교(秦淮橋)가 바로 그 유적이다. 이 다리는 오의항(烏衣巷)에 있다
작(雀) : 참새 작
왕사(王謝) : 동진(東晋)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양대 부호 귀족을 가르킨다.
심상(尋常) : 普通(보통),평상시(平常時)의 준말. 항상(恒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例事)로움. 흔하고 평범하다


남경은 삼국시대의 오(吳, 222-280) 나라가 도읍으로 삼은 이후

40년 뒤에 동진(東晋, 317-420)이 또 도읍으로 삼고, 뒤이어 이른바 남조(南朝)라고 불리는

송(宋, 420-479) · 제(齊, 479-502) · 양(梁, 502-557) · 진(陳, 557-589)이 연달아 도읍으로 삼은 유서 깊은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남경에 도읍을 정한 이들 여섯 나라를 통틀어 육조(六朝)라고 부른다.

이들 여섯 나라 가운데 존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나라가 동진인데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 집안이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을 대표로 하는 왕씨 집안과 사씨 집안이었다.


오의항은 바로 이 왕씨와 사씨의 집단 거주지였다.

오의항이라는 지명도 당시 왕씨와 사씨의 자제들이 까마귀처럼

까만 옷을 입고 다녔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진이 망하고 4백 년쯤 지난 어느 날 이 유서 깊은 고을에 들른 시인 유우석은

진회하를 따라서 주작교를 지나 오의항으로 들어갔다.


때는 바야흐로 초목들이 저마다 생기를 되찾고 있는 이른 봄날의 황혼녘이었다.

강가에 각종 야생화들이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화사한 꽃잎이 발간 석양까지 받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한때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던 최고의 권세가들이 살던 곳을 한번 구경한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푼 채 오의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제비들이 삼삼오오 둥지를 찾아드는데 눈으로 뒤를 쫓아가 보니

그것들이 둥지를 튼 곳은 작고 꾀죄죄한 보통 백성들의 집이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유우석의 상상 속 으리으리한 기와집 같은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거기가 바로 그 옛날 왕씨 집안과 사씨 집안이 세도를 떨치며 살았다는 오의항임에 틀림없는데

이제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백성들의 마을로 변해 있었다.


따져보면 강산이 변해도 수십 번은 변했을 긴 세월이 지났으니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권력이 너무 허망하고 인생이 정말 덧없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제비는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지난해에 둥지를 틀었던 집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다.


그러기에 흥부가 다리를 고쳐 준 제비가 이듬해에 돌아와서 놀부 집으로 가지 않고

작년에 둥지를 틀었던 흥부 집으로 가서 다시 둥지를 트는 것이다.


제비에게 이런 습성이 없었다면 다리는 흥부가 고쳐 주고

박씨는 놀부가 받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을 게 아닌가.


이 시는 제비의 이러한 습성을 잘 아는 시인이 자연의 일부인 제비는

변함없이 똑같은 옛집으로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사실을

재치있게 묘사함으로써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감회를 해학적 필치로 노래한 것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한때는 번성을 구가하던 나라나 도시가 몰락하여 한벽한 궁촌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누추하고 별 볼일 없던 지역이 번창하기도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오의항은 4세기 동진(東晉)의 수도였던 금릉(현재 난징)에 귀족들이 살던 동네 이름이다.

기화요초(奇花瑤草)가 다투어 자태를 뽐내던 주작교 주변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고

고대광실(高臺廣室)이 즐비하던 오의항에는 해가 기울어 더욱 쓸쓸하다.


그 옛날 세도가의 집에서 살던 제비들이 오늘날은 무지렁이 백성들 집에도 예사롭게 날아든다.

여기에서 귀족들의 시대는 가고 만 백성들을 위하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심정을 제비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오의항은 지금의 남경 부근으로 진회하(秦淮河)는 그 남쪽에 있으며, 주작교와 가까이 있다.

그 옛날 호사함을 구가하던 동진(東晉)의 왕도(王導), 사안(謝安) 등 구택(舊宅)에는

지금 잡초만 무성하고 이름모를 들풀만이 자라고 있다.


여기에서 제비와 주인의 변환(變換)을 통해 상전벽해(桑田碧海)에 대한 감회를

시로 표현하는 방법이 아주 탁월하다.


한유(韓愈, 768~824) · 유종원(柳宗元, 773~819) 등과 동시대 인물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유우석은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개혁정치를 펼치던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투주사호참군( 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앞에 <유우석(劉禹錫)과 누실공원(陋室公園)>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시 <누실명(陋室銘)>은 바로 이 당시 지은 작품이다.


여기에서 시련에도 끄떡하지 않은 그의 기개가 느껴진다.

10년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가 도교의 사원인 현도관 도화(桃花)를 보고 지은 시에

"거리는 온통 붉은 색, 홍진이 얼굴을 스치는데, 복숭아꽃 보러 돌아오겠다 말하지 않는 사람 하나 없네.

현도관 안에는 복숭아나무 천 그루가 있지만, 모두 유랑(劉郞)이 떠난 후 심은 것이네"라고 한,

마지막 두 구절은 자신이 좌천된 후 권문세족들이 심어놓은 대신들을 풍자한 말이라고 하여,

다시 먼 변방 파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때 함께 좌천된 유종원이, 유우석은 노모가 있기에 대신 파주로 가게 해 달라고 상소하고자 했는데,

재상이었던 배도가 이같은 사실을 알고, 조정에 간청해 유우석의 임지가 연주로 바뀌었다 한다.


같은 해 두 사람은 동시에 장안을 떠나 남쪽으로 가다 형양에서 헤어졌는데,

그때 유종원이 <형양여몽득분로증별(衡陽與夢得分路贈別)>에

"10년 만에 초췌해져 장안으로 돌아왔는데, 도리어 5영 밖 멀리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하여,

그때의 심정을 남기기도 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발전하는 것인가?

긴 시간의 연장선에서 수많은 왕조가 성쇠를 거듭해왔고 지금의 우리들도 그 역사의 연장선에 서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도 그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하였다.

개혁을 시도하다 시련을 겪은 유우석의 한시를 감상해 본다.


강소성 남경은 수십 개의 나라가 일어났다가 망한 곳이다.

삼국(위·오·촉)시대 때 오나라 손권이 여기 군대를 주둔 시키면서

그 군사들에게 검은 옷을 입혔다는 설 때문에 동네 이름을 '오의항(烏衣巷)'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진(東晋) 때에는 이곳 진회가 귀족 동네였기에 그때 귀족들의 자제들에게 검은 옷을 즐겨 입혔다고 해서

오의항, 곧 검은 옷을 입은 마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옛날 화려했던 시절에는 주작교 근처에 잡초가 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황폐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주작교 넘어 오의항 마을이 황량하게 조락해가는 모습을 석양에 비유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증인인 제비가, 이제는 그 화려했던 명문거족의 집이 아닌

일반 백성의 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역사의 무상감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구를 "王謝堂爲百姓家(왕사당위백성가, 왕사의 집이 일반 백성의 집이 되었다.)"로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로 표현함으로써 만고천하의 절창(絶唱)이 되었다.


제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곳을 드나들고 있는데, 그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치개혁을 시도했던 유우석의 눈에 비친 진회는 역사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역사는 돌고 돌기 때문이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로 새긴 유우석의 시 오의항(烏衣巷)  오의항 문루 서쪽 담벼락에 있다.





남경 부자묘 가이드 보기


천하문추(天下文樞) 패방


부자묘(夫子庙) 앞 광장에 진회하(秦淮河)로 조성한 반지(泮池)를 사이에 두고 

용으로 장식된 조벽(照壁)과 마주하고 있다.



영성문(靈星門)


3좌의 문이 있는 석재패방이다.

문들 사이에는 두 곳의 담장이 있는데, 그 위에는 모란모양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중간 석방 위에는 전서로 영성문(欞星門)이라 쓰여 있으며,

기둥 위에는 구름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다.


반지 앞의 천하문추(天下文樞)패방과 대응을 이루고 있다.

영성문은 천하문추 패방과 함께 제왕들이 공자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문이었다.

가운데 문은 황제 전용이었고, 좌우의 문은 친왕(親王)들과 군왕(郡王)들이 사용했다.


일반 관원들과 백성들은 원칙적으로 영성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자 평소에는 영성문을 나무로 막아두었다고 한다.

영성문은 묘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식용 건축물이다.



부자묘(夫子庙 푸쯔먀오)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의 친화이허풍치지구[秦淮河风景区]에 위치한 사당이다.

부자묘는 공자묘 또는 문선왕묘라고 하여 고대 공자(551-479 B. C.)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푸쯔먀오[夫子庙]. 현지인들은 쿵먀오[孔庙]라고도 한다.

중국 역사상 북경과 남경에서 과거를 보았고 또 유학의 중심지가 있었으므로

이 곳은 명실공히 남방유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 부자묘는 송나라 인종 원년 즉 1034년에 지어졌으나, 청 말에 화재를 당하여 1869년 다시 지었고,

일본과의 전쟁 중 불탔던 것을 1984년, 시 구 인민정부가 고도(古都)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역사 전문가들을 재건 작업에 참여시켜 다시 지었으니 오늘의 부자묘는 새로운 모습이다.


이후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바 있다.


고대에 학당을 지으려면 반드시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래서 각지의 공자사당은 국가 제례의 일부로 종속되고는 했다.


사당은 학궁(學宮)의 앞이나 옆에 위치했다.

남경 부자묘는 사당이 앞에 있고, 학당이 뒤에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남경의 부자묘는 공묘, 학궁, 공원(貢院 : 고사실)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 공묘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격식이었다고 한다.


부자묘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난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부자묘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해 언제든지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조박초(趙樸初 : 자오푸추 1907~2000)


'부자묘(夫子庙)' 글씨를 쓴 조박초(趙樸初 )는 중국불교협회회장이면서,

동시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정치적 거물이었다.


더구나 최근 눈부신 발전 가도에 있는 대륙의 불교 현황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조망하는데

조박초의 역할이 기초가 될 것이다.


격동의 시대, 특히 종교는 아편이라고 외치는 공산당이 통치하던 중국 대륙에서

전전긍긍하던 불교의 불씨를 보존하여 오늘날 화려한 불교의 부활로 이끌어 주었던 인물이 바로 조박초였다.


조박초는 9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니, 중국 역사에 있어 청(淸)나라,

격동의 중화민국, 현재의 중국이라는 격동의 3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석사자가 지키는 대성문(大成門)


명, 청시기에 대성문은 모두 다섯 칸이었다.

좌우에는 이방(耳房 : 정전 옆의 부속건물)이 있어 일꾼들의 책임자가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가운데 문 안쪽에는 극(戟 : 창), 북(鼓), 경(磬 : 쇠종)을 두었고,

제사를 지내는 인원들과 현의 관원들은 가운데 문을 사용했고, 선비들과 일꾼들은 그 옆의 문을 사용했다.


명, 청시기에 만들어진 대성문은 일본군에게 파괴되었고,

지금의 것은 1986년 3칸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문 내부의 정중앙에는 한백옥으로 만든 병풍이 있고, 그 위에는 부자묘를 수리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공자문례도비(孔子問禮圖碑)를 비롯한 네 개의 비석이 있다.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대성문(大成門)을 들어서자마자 대성전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조벽(照壁)


예(禮)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왼쪽


인(仁)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오른쪽



대성전(大成殿)


부자묘(夫子庙)의 핵심 명소이다.

중국 고대 저명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孔子)를 모시는 묘당으로, 전면에 절이 있고 뒤편에 쉐궁[学宫]이 위치한다.


대성전 앞 중앙에 공자의 동상이 있고, 그 옆으로 한백옥으로 만든 12제자상들이 있다.

공자상은 1993년 1월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4.18m, 무게는 2.5톤으로 전국 공묘에 있는 공자상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건물 앞에는 널찍한 노대(露台)가 있고, 노대 주위로는 돌로 된 난간이 있다.

노대는 고대에 제사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대성전 양 측에는 30여 개의 비석이 있는 비랑(碑廊)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6.5m로 전국에서 최대 규모인 공자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양쪽에는 한백옥(汉白玉)으로 제작된 쓰야성옌후이[四亚圣颜回], 증삼(曾参), 공급(孔伋, 공자의 손자),

맹가(孟軻, 맹자(孟子)의 본명)의 조상(雕像)이 있다.

주변의 벽 위에는 공자 생전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38폭의 벽화가 걸려 있다.


대성전(大成殿) 앞 공자(孔子)상



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 초상화


공자 초상화 중에서는 전국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부자묘의 주체 건축물이다.


청 동치8년 (1869년)에 건설되었으나, 1937년 일본군의 남경 침략 때 파괴되었고,

1984년이 되어 최초 제작 당시의 설계도에 따라 다시 복원한 것이다.


재건 시 뒤쪽의 벽을 허물어 학궁과 하나로 병합하였다.

기좌의 높이는 1.5m이고, 건물 자체의 높이는 16.22m, 넓이는 28.1m이다.


7칸으로 되어 있고, 헐산식(歇山式) 지붕을 얹었다.

“대성지성선사공자의신위(大成至聖先師孔子之神位)”라 쓰여진 공자의 위패와 네 제자들의 위패가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큰 공자의 초상화가 전 중앙에 걸려있다.


그 크기는 높이가 6.5m이고, 넓이가 3.15m이다.

전 내부의 벽면에는 돌로 만든 38폭의 <공자성적도(孔子聖跡圖)>가 있다.

옥석과 계혈동(鷄血凍), 수산석(壽山石) 등 진귀한 석재와 금, 보석들을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중화위육(中和位育)

중화를 지극하게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생육된다. <중용(中庸)>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


부자묘가 처음부터 공자사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동진(東晉)의 학궁(學宮)이었던 것을 확장해서 공묘로 만든 것이다.


사마예(司馬睿)는 서진(西晉)말기,

세 명의 황제를 보필한 바 있는 대신 왕도(王導)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진(東晉)을 세웠다.


제위에 오른 사마예는 무신인 대막(戴邈)의 상소를 받아들여 태학(太學)을 세웠는데,

이것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사마예는 인재육성에 뜻을 두어 곧 왕도에게 명하여 진회하 부근에 태학을 세우게 하였고,

이 태학을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이라 불렀다.


동남제일학은 원나라 때는 집경노학(集慶路學), 명대에는 응천부학(應天府學)이었고,

청대에는 두 현(縣)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부학(將府學)이었다.

당나라 이후부터는 태학을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렀다.









고진회(古秦淮)


고진회가(古秦淮街)는 진회하와 부자묘(夫子庙)로 연결되는 옛길이다.

진회는 옛부터 남경문화의 근원지로 4.2km의 강 양 편에는 6조(六朝) 시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자연히 상업이 발달하였고,

문인들과 학자들이 모여들어 “육조금분(六朝金粉)”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00여 미터 들어가면 좌측에 부자묘, 우측에 진회하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부자묘의 명성은 지금도 그 맥을 잇고 있고,

주변의 상점과 식당들은 매일같이 문전성시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정부 추산 매일 10 ~ 30만 명의 관광객이 부자묘 일대를 다녀간다고 한다.



길가에 늘어선 다양한 식당들 상점들.




용으로 장식된 조벽(照壁)과 반지(泮池)


조벽(照壁)은 중국에서 문 앞 또는 문 안에 설치하는 고정된 가리개 또는 칸막이를 말한다. 

영벽(影壁)이라고도 한다.


흔히 벽돌로 쌓거나 흙으로 쌓은 것인데 판자로 된 것도 있다.

벽사(辟邪, 악귀를 쫓음)와 가리개를 겸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기원은 주대(周代) 초기이며 옛날에는 ‘수(樹)’라고 불렀고

유지(遺址)는 주원(周原)의 궁전터에서 확인되었다.


궁전 · 묘우(廟宇)등 큰 건축 앞의 조벽은 3필, 5필, 9필 등

용의 부조도판(浮彫陶板)으로 장식하였다.


진회하에 설치된 이 조벽(照壁)은 명 만력 3년(1575년)에 건설되었는데,

길이 110m, 높이 20m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벽이라고 한다.


광장 양 끝에는 원래 도관고금(道冠古今), 덕배천지(德配天地)라 쓰인 패방이 각각 한 곳씩 있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시기에 훼손되어 없어져 버렸다.


부자묘(夫子庙) 입구 천하문추 패방과 조벽 사이에 있는 진회하에는 별도의 명칭이 있다.

반원형으로 생긴 이 연못은 반지(泮池)라고 하는데

반지는 공묘가 갖추어야 할 특수한 형식으로 <주례(周禮)>에 따라 만든 것이다.


보통의 공자묘들은 작은 연못을 만들 뿐이지만

강줄기를 끌어다가 반지를 만든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특색 있는 것이다.


영성문(欞星門)뒤쪽으로는 대성문(大成門), 대성전(大成殿), 명덕당(明德堂), 존경각(尊經閣)이 배열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공자상을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중심건물이다.




 첨원(瞻園) 부자묘(夫子庙)로 향해 가는 길에  금릉제일원 첨원(瞻園)이 있다.


국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동남쪽에 있는 명나라 때의 원림(園林).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9 중 다섯번째인 남경 (南京) 첨원(瞻園)은 하늘을 우러르는 고도의 정원이다. 


첨원(瞻園)


6백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첨원은 최초에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왕부였는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나서 개국공신이며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진 서달(徐達)에게 하사한 관저 화원이다.


청나라가 들어선 뒤 속국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바뀌었다가

건륭제(乾隆帝)가 남순(南巡)할 때 잔위안[瞻園]으로 명칭도 바꾸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양수청(楊秀淸)의 관부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잔위안은 1960년 중국의 현대 건축가 류둔전[劉敦楨]이 주관하여 재건한 것으로,

청대(淸代)의 풍격을 기본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산과 돌로 주요 풍경을 이루고 물로써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도록 조성한 정원으로서

중국 고전원림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면적은 5280㎡이며, 주 건물은 정묘당(静妙堂)이다.

정묘당 남북으로 조성한 호수에는 각각 태호석(太湖石)으로 가산(假山)을 축조하였다.


남쪽의 가산은 새로 축조하였고, 북쪽의 가산은 명나라 때부터 있던 것을 토대로 보존한 것이다.

정원의 서쪽에는 흙산이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 정자와 부채꼴 정자가 있다.


정원의 동쪽에 있는 구불구불한 복도는 남북을 관통하는데,

북쪽 끝의 호수와 맞닿는 물가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묘당 동쪽의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는 오래된 등나무가 있는데,

10여m까지 드리우는 나무그늘로 잔위안의 명소가 되었다.


이밖에 잔위안 동남쪽에 화축청(花竺廳)과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새로 조성한 풍경지구(風景地區)가 있다.




서달(徐達 1332~ 1385)  글 : 명사((明史) 권 125 ㅡ 열전(列傳) 제13 서달(徐達)


서달(徐達)은 자가 천덕(天德)이요, 호(濠)주 사람인데, 대대로 농사를 지어 살았다.

달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고, 키가 크고 광대뼈가 높으며, 뜻이 굳세고 무용(武勇)이 있었다.


태조가 곽자흥(郭子興)의 부수(部帥)가 되었을 때, 이 때 서달의 나이 22세였는데,

그에게로 가서 따르니 한번 만나보고 서로 말이 합치되었다.


태조가 남쪽으로 정원(定遠)을 공략할 때, 24명을 거느리고 갔는데,

서달이 앞장서서 함께 갔다.


얼마후 따라가 저주(滁州) 사이에서 원병을 파하고, 종군하여 화주(和州)를 취하니,

곽자흥이 서달에게 진무(鎮撫)를 제수하였다.


곽자흥이 손덕애(孫德崖)를 붙잡았는데, 손덕애의 군대 또한 태조를 붙잡으니,

서달이 자신이 앞장서 손덕애 군대로 가서 태조를 대신할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에 돌아올 수 있었고, 서달 또한 붙잡힘을 면하게 되었다.


장강을 건널 때 따라가서, 채석(采石)을 함락하고 태평(太平)을 취하니,

상우춘(常遇春)과 함께 같이 군봉관(軍鋒冠)이 되었다.


종군하여 원의 장수 진야선(陳埜先)을 격파하여 사로잡고, 따로 병사를 거느리고,

율양(溧陽)과 율수(溧水)를 취하고, 집경(集慶)을 함락시키는데 따라갔다.


태조 자신이 거수(居守)하면서, 서달에게 명하여 대장으로 삼아,

제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진강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영을 내리는 것이 분명하고 엄숙하니, 성중이 안정되었다.

회흥익통군원수(淮興翼統軍元帥)를 제수하였다.


이 때 장사성(張士誠)이 이미 상주(常州)를 점거하고서는,
강동(江東)의 반장(叛將) 진보이(陳保二)를 끼고서 수군(舟師)으로 진강을 공격해왔다.

서달이 용담(龍潭)에서 이를 패배시키고, 마침내 군대를 더 줄 것을 청하여 상주를 포위했다.
장사성이 장수를 파견해 와서 구원했다.

서달은 적군이 교활한데다 예봉이라, 쉽게 힘으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성을 떠나 두군데 복병을 두고 기다리면서,
따로 장수 왕균용(王均用)을 보내 이를 기병(奇兵)으로 삼고, 자신은 군대를 독전했다.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다 복병을 만나니, 대패하였고,
장(張)과 탕(湯)의 두 장수를 붙잡고 진격하여 상주를 포위했다. 다음해 이를 함락시켰다.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로 승진했다.
이어 영국(寧國)을 함락하고 의흥(宜興)을 복종시켰고,
전봉(前鋒) 조덕승(趙德勝)을 시켜 상숙(常熟)을 함락시켜 장사성의 아우 장사덕(士德)을 사로잡았다.

다음해 다시 의흥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태조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婺州)를 공격했는데, 서달에게 명하여 응천(應天)에 남아 수비하게 하면서,
따로 병사를 보내 천완(天完 = 수휘(壽輝)가 기수(蘄水)에 세운 나라)의 장수인 조보승(趙普勝)을 기습하여 격파하였다.

지주(池州)를 회복하였다.
승진하여 봉국상장군(奉國上將軍),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진격하여 안경(安慶)을 공격하였는데, 스스로 뭍으로는 행군하지 않고, 밤에 산채(山寨)로 떠서 엄습하니,
조보승의 부장(部將)을 청산(青山)에서 파하고, 마침내 잠산(潛山)을 항복시켰다.

돌아오며서 지주를 진무하면서 상우춘과 함께 복병을 두어, 진우량의 군대를 구화산(九華山) 아래에서 패배시키니,
목을 벤 것이 1만 명이요 사로잡은 자가 3천 명이었다.

상우춘이 말하길 "이들은 강한 군대라서,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 했다.
서달은 불가하다고 하여, 이에 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상우춘이 먼저 밤에 묻어 죽인 것이 반수를 넘었으나, 태조가 좋아하지 않으니,
마침내 그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비로소 서달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다 감호하도록 하였다.
진우량이 용강(龍江)을 침범하였는데, 서달은 남문 밖에 진치고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과 힘을 다해 싸워
적군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자호(慈湖)까지 이르러, 그들의 군선을 불태웠다.

다음해 종군하여 한(漢)을 정벌하고 강주(江州)를 취하였다.
진우량이 무창(武昌)으로 달아나니, 서달이 그를 추격하였다.

진우량이 면양(沔陽)에 전함을 내어 출전하니, 서달은 한양(漢陽)의 둔구(沌口)에 군영을 두고 이를 저지하였다.
중서우승(中書右丞)으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 태조가 남창(南昌)을 평정하였는데, 항복한 장수인 축종(祝宗), 강태(康泰)가 반(叛)하였다.
서달이 둔구의 병력으로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종군하여 안풍(安豐)을 구원하고, 오(吳)의 장수인 여진(呂珍)을 격파하여 마침내 노주(廬州)를 포위하였다.

한(漢)인들이 남창을 노략질하자, 태조가 서달을 불러 노주로부터 가면서 군사를 집결시키게 하였는데,
파양호(鄱陽湖)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진우량의 군대가 매우 성세하였는데, 서달이 몸도 여러 장수들에 앞서 힘써 싸워,
그 선봉을 패배시고 1천5백명을 죽이고, 큰 함선을 한척을 노획했다.

태조가 적을 가히 깰 수 있음을 알고서는, 장사성이 내부를 침범하리라 생각하여, 바로 밤에 서달을 보내 돌아가
응천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격렬하게 싸우니, 마침내 진우량을 죽게 하였다.

다음해 태조가 오왕(吳王)을 칭하고, 서달을 좌상국(左相國)으로 삼았다.
다시 병사를 이끌고 노주를 포휘하여 그 성을 함락시켰다.

강릉(江陵), 진주(辰州), 위주(衡州), 보경(寶慶)의 여러 로(路)와 호상평(湖湘平)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소환되어, 상우춘 등을 거느리고 회동(淮東)을 돌며 태주(泰州)를 함락시켰다.
오나라 사람들이 의흥을 함락시키자, 서달이 다시 이를 구원하여 회복시켰다.

다시 병력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가, 고우(高郵)를 함락시키고, 오의 장수와 군사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상우춘을 만나 회안(淮安)을 공격하여, 마라항(馬騾港)에서 오군을 파하니,
수장(守將) 매사조(梅思祖)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격하여 안풍(安豐)을 공격하여 원의 장수 흔도(忻都)를 사로잡고,
좌군필(左君弼)을 패주시켜서, 그들의 운송선박을 모두 다 얻었다.

원의 병사들이 서주(徐州)를 침고하미 맞서 싸워 이를 대파하여,
붙잡거나 참수한 것이 만 단위로 헤아렸다. 회남과 회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군대가 귀환하자, 태조는 오(吳)를 정벌하는 일을 의논했다.
우상국(右相國) 이선장(李善長)은 이를 늦추자고 청하였다.

이달이 말하길 "장씨는 사치한데다 가혹하고, 대장인 이백승(李伯昇)의 무리들은 자녀와 옥백을 끼고 있으니,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부리는 자들은 황(黃), 채(蔡), 섭(葉) 3명의 참군(參軍)인데, 이들은 서생이라 대계(大計)를 모릅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서달을 대장군으로 배하고, 평장(平章) 상우춘을 부장군(副將軍)으로 삼아,
수군 20만명을 건리고 호주(湖州)에 로 나갔다.

적이 세 길로 출전하니, 서달 또한 3군으로 나눠 대응케 하면서, 따로 병사를 보내 그 귀로(歸路)를 장악하게 했다.
적들이 전투에 패배하여 돌이켜 달아났지만, 성을 들어갈 수 없었다.

아와 싸워, 이들을 대파하고, 장수와 관리 2백인을 붙잡고 그 성을 포위했다.
장사성이 여진(呂珍) 등을 보내 병사 6만명으로 달려가 구원케 하여,
옛 관아에 주둔하며 다섯 군데 목책을 쌓아 스스로 굳건하게 했다.

서달은 상우춘 등을 시켜 10개의 보루를 쌓아 이를 막게 했다.
장사성이 직접 정병을 거느리고 내원하여 오니, 조림(皂林)에서 이를 대파했다.

장사성은 달아나니. 마침내 승산(昇山)의 수륙채(水陸寨)를 모두 파했다.
다섯 태자와 주섬(朱暹), 여진(呂珍) 등이 모두 항복하여, 성 아래에서 복종하니, 호주가 항복하였다.

마침내 오의 강주(江州)를 함락하고, 태호로부터 진격하여 평강(平江)을 포위했다.
서달은 봉문(葑門)에 진치고,상우춘은 호구(虎丘), 곽자흥은 누문(婁門), 화운룡(華雲龍) 서문(胥門),
탕화(湯和)는 창문(閶門), 왕필(王弼)은 반문(盤門), 장온(張溫)은 서문(西門), 강무재(康茂才)는 북문(北門),
경병문(耿炳文)은 성의 동북, 구성(仇成)은 성의 서남에, 하문휘(何文輝)는 성의 서북에 진치며,
긴 포위망을 쌓아 적을 곤궁케하였다.

목탑(木塔)을 성중의 부도(浮屠) 등과 함께 얽어 매었다.
따로 누대를 3군데 쌓아 완성하여, 성중을 감시하면서, 궁노(弓弩)과 화통(火筒)을 두었다.

대(臺) 위에는 또한 큰 석포(巨礮)를 두어, 공격할 때마다 번번이 부수었다.
성중이 크게 놀라니, 서달이 사신을 보내 일의 처리에 관하여 청하자, 태조가 칙하여 위로하길
"장군의 지모와 용맹은 절륜(絕倫)하여 능히 난리와 약탈을 막고, 군웅들을 없앨 수 있소.
지금의 일에 꼭 명을 받을려고 하는 것은, 이는 장군의 충성심 때문이니, 내가 무척 기쁘오.
그러나 장차 외부의 일에 관해서는, 내가 제어하지 않으리다.
군중의 완급(緩急)은 장군이 편의대로 행하지, 나는 관여하여 제어하지 않겠소." 라 했다.

평강이 파해지고 나서, 장사성을 사로잡아 이를 응천을 보내고, 뛰어난 병사 25만명을 얻었다.
성이 장차 파해지려 할 때, 서달이 상우춘과 함께 약속하길
"군대가 입성하면, 나는 왼편에 군영을 둘테니, 공은 우편에 두시오"라 했다.

또 장사(將士)들에게 영을 내리길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백성들의 집를 훼손하는 자 또한 사형에 처하며, 군영에서 20리를 벗어나는 자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이윽고 입성하니, 오의 백성들은 예전처럼 편안하였다. 군대가 돌아오자, 그를 신국공(信國公)에 봉한다.

얼마후 서달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에 배하고 상우춘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25만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취하게 하고, 태조는 친히 용강(龍江)에서 마제(禡祭)를 지냈다.

이 때 명장이라 칭하면 반드시 서달과 상우춘을 추천하였다.
두 사람은 재주와 용맹이 서로 비슷해, 모두 태조가 빼어나고 중하게 여겼다.

상우춘은 빠르고 신속하여 과감히 깊숙히 들어가고, 서달은 또한 모략에 뛰어났다.
상우춘은 성읍을 함락시키면 능히 주륙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서달은 가는 곳마다 동요지 않고,
장사(壯士)를 붙잡으면 편안케 해주어 은의(恩義)로 맺으니, 자기를 위해 기용했다.

이 때문에, 많은 자들이 즐거이 대장군에 귀부하였다.
이에 이르러,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유시함에 군대를 거느릴 때는 기율을 중하게 중요하게 지니고
전투에 이겨 공취(攻取)하는 것은 장수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되, 대장군인 서달처럼 하라고 했다.

또한 서달에게 이르길 진군하여 경략함에 산동(山東)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좋을 것이라 했다.
군대가 행군하자, 기주(沂州)를 함락하고, 수비장인 왕선(王宣)을 항복시켰다.

진격하여 역주(嶧州)를 함락했는데, 왕선(王宣)이 다시 반(叛)하자, 그를 쳐서 참하였다.
거(莒)주, 밀주(密), 해주(海)의 여러 주들이 모두 항복했다.

이에 한정(韓政)을 시켜 군대를 나눠 하수를 장악하게 하고, 장흥조(張興祖)에겐 동평(東平), 제녕(濟寧)을 취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익도(益都)을 함락하고, 유(濰), 교(膠)의 여러 주현을 순행하며 항복시켰다.
제남(濟南)이 항복하자, 병사를 나눠 등주(登), 내주(萊)를 취하였다. 제나라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태조가 제위에 오르고, 서달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았다.
황태자를 책립(冊立)함에, 서달에게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하게 했다.

부장군(副將軍) 상우춘이 동창(東昌)을 함락하니, 제남(濟南)에서 군대를 집결하여,
낙안(樂安)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쳐서 참수했다.

돌아와 제녕(濟寧)이 진치면서, 수군을 끌고 하수를 거슬러 올라, 변량(汴梁)을 급히 가니
수비장인 이극이(李克彝)가 달아나고, 좌군필(左君弼), 죽정(竹貞) 등은 항복했다.

마침내 호로관(虎牢關)에서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원의 장수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와
낙수(洛水) 북쪽에서 크게 싸우다 이를 파하고 패주시켰다.

양왕(梁王) 아로온(阿魯溫)이 하남을 들어 항복하니, 숭(嵩)주, 섬(陝)주, 진(陳)주, 여(汝)주의 여러 주를 공략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동관(潼關)에 모였다. 이사제(李思齊)가 봉상(鳳翔)으로 달아나고, 장사도(張思道)는 부성(鄜城)으로 달아나니,
마침내 입관(入關)하여 서쪽으로 화주(華州)에 이르렀다.

승첩을 보고하니, 태조가 변량으로 행차해서, 서달을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여,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면서 또한 북벌을 모의하였다.

서달이 말하길 "대군이 제와 노를 평정하고, 하수와 낙수를 쓸었는데, 왕보보(王保保)는 우물쭈물 멈칫하여 관망하고 있습니다.
동관은 이미 함락하였고, 이사제의 무리들은 낭패하여 서쪽으로 달았났습니다.
원의 응원군이 이미 끊어졌으니, 지금 승세를 타고 바로 원의 도성을 치다면 가히 싸우지 않고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황제가 "좋다"라 했다.
서달이 다시 진언하길 "원의 도성이 함락되고, 그 주인이 북으로 달아나면, 장차 늦추지 않고 끝까지 추격해야 합니까?" 라 물었다.

황제가 "원의 천운이 쇠락하였고, 그 운행이 절로 소멸하니, 번거롭게 끝까지 추격할 필요없소.
변새 밖으로 나간 이후로는, 굳건히 강역을 수비하여, 그 침범이 있는가 정도만 방비하면 되오"라 했다.

서달이 머리를 조아리면 황명을 받았다.
마침내 부장군의 하음(河陰)에서 군대를 합치고, 비장(裨將)을 보내 길을 나눠 하북의 땅을 순행하게 하니,
연달아 위휘(衞輝), 창덕(彰德), 광평(廣平)을 항복시켰다.

군대가 임청(臨清)에 머물면서, 부우덕(傅友德)을 시켜 육로(陸道)를 열어 보병과 기병을 통하게 하고,
고시(顧時)에겐 하수를 준설하여 수군을 통하게 하면서,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상우춘은 이미 덕주(德州)을 함락하고, 병사를 합쳐 장로(長蘆)를 취하고 직고(直沽)를 장악하고는,
부교를 만들어 군대를 건너게 했다.

수륙으로 병진하여, 하서무(河西務)에서 원군을 대패시키고, 진격하여 통주(通州)를 함락했다.
원나라 순제(順帝)는 후비와 태자를 거느리고 북으로 갔다.

날이 지나자, 서달은 병사를 제화문(齊化門)에 진치고, 해자를 메워 성에 올랐다.
감국(監國) 유왕(淮王) 첨목아불화(帖木兒不花), 좌승상 경동(慶童), 평장(平章), 일아필실(迭兒必失),
박새인불화(朴賽因不花)  우승(右丞) 장강백(張康伯), 어사중승(御史中丞) 만천(滿川) 등은 항복하지 않으니, 참수했고,
그 나머지 한명도 살륙하지 않았다.

부고(府庫)를 봉하며, 도서와 보물을 문서에 기록하고, 지휘(指揮) 장승(張勝)에게 영을 내려
병사 1천명으로 궁의 전문(殿門)을 지키게 하였다. 

환자(宦者)에겐 여러 궁인과 비(妃) 주(主)를 감호하여 살피게 하였고, 사졸들에게 침범하여 난폭한 일이 없도록 금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은 편하게 지내었고, 시장에서는 함부로 제멋대로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승첩을 보고하자, 조를 내려 원의 도읍을 북평부(北平府)로 삼고, 육위(六衞)를 두며,
손흥조(孫興祖) 등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면서, 서달과 상우춘에게는 진격하여 서산(山西)을 취하도록 명을 내렸다.

승세를 타고 상우춘이 먼저 보정(保定), 중산(中山), 진정(真定)을 평정하고, 탕화(湯和)는 회경(懷慶)을 항복시키고,
태항(太行)을 지나 택(澤)과 로(潞)를 취하였고, 서달은 대군으로 이를 뒤이었다.

이때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 = 코케 케무르)가 병사를 이끌고 안문(雁門)을 넘었고,
장차 거용(居庸)으로부터 북평을 공격하려 하였다.

서달이 이를 듣고 여러 장수들과 모의하길
"확곽은 멀리서부터 나왔으니, 태원(太原)이 필히 비어있을 것이다.
북평에는 손도독이 있어, 족히 막아낼 수 있다.
지금 적들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바로 태원을 치면, 진격하여도 싸울 수 없고 물러나도 지킬 바가 없게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이 소위 (손빈이 말한) 비항도허(批亢擣虛) 인 것이다.
저들이 만약 서쪽으로 돌아와 자신을 구원코자 할 때면, 이 때 사로잡힌 신세가 될 뿐이다." 라 했다.

제장들이 모두 "좋습니다" 라 했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태원을 달려갔다.

확곽은 보안(保安)에 이르러서 과연 돌아와 구원하였다.
서달은 정병을 선발해 밤에 그 군영을 기습하였다.

확곽은 18기만 거느리고 달아났다.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키고, 마침내 태원을 함락했다.

승세를 타고 대동(大同)을 거둬 들였으며, 병사를 나눠 아직 항복하지 않은 주현을 순행하니,
서산이 모두 평정되었다.

홍무 2년,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하수를 건넜다. 녹
대(鹿臺)에 이르자, 장사도(張思道)는 달아나니, 마침내 봉원(奉元)을 함락했다.

이 때 상우춘은 봉상(鳳翔)을 함락했는데, 이사제(李思齊)는 임조(臨洮)로 달아나니,
서달은 제장들을 모아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모두 말하길 "장사도는 재주가 이사제만 못하고, 경양(慶陽)은 임조보다는 쉬우니,
청컨대 경양을 먼저 하십시오"라 했다.

서달이 말하길 "그렇지 않소. 경양성은 험하고 병사들은 정예이니, 갑작스레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임조는 북으로 하수, 황(湟)과 접경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강족과 융족에 제어하고 있어,
이들을 얻으면, 그 사람들이 족히 전투에 대비할 수 있고, 물산은 군대를 돕기에 풍족하오.
대병으로 쫓는다면, 이사제는 달아나지 않고 자기 손을 묶어 포박될 것이오.
임조가 함락되고 나면, 그 주변 군현이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소."했다.

마침내 농(隴)을 건너, 진주(秦州)를 함락하고, 복강(伏羌), 영원(寧遠)을 항복시키고, 공창(鞏昌)에 입성했다.
우부장(右副將) 풍승(馮勝)을 보내 진치면서 임조(臨洮)를 압박하게 하니, 이사제가 과연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병사를 나눠 난주(蘭州)를 함락하고, 예왕(豫王)을 습격해 패주시켰고, 그 부락의 군수물자는 모두 거두어 들였다.
돌아와 소관(蕭關)을 나와, 평량(平涼)을 함락시켰다.

장사도는 영하(寧夏)로 달아나다 확곽에게 붙잡혔고, 그의 아우인 양신(良臣)이 경하를 들어 항복했다.
서달은 설현(薛顯)을 보내 항복을 받도록 하였다.

양신(良臣)이 다시 반(叛)하여, 밤에 병사를 내어 설현을 기습해 부상을 입혔다.
서달이 군대를 독려하며 적을 포위했다. 확곽(擴廓)이 장수를 보내 내원(來援)하였지만,
도리어 공격하여 패주시켰고, 마침내 경양을 함락시켰다.

양신의 부자는 우물에 몸을 던지니, 우물 밖으로 꺼내서 참수했다.
섬서(陝西) 지역을 모두 평정하고 하였다.
조를 내려 서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하고, 백금과 비단(文綺)을 매우 후하게 하사했다.

장차 논공하여 크게 봉하려 할 때, 확곽이 마침 난주를 공격하여, 지휘사(指揮使)를 죽였고,
부장군 상우춘은 이미 죽었는지라, 홍무 3년 봄 황제가 다시 서달을 대장군으로,
평장 이문충(李文忠)은 부장군으로 삼아, 길을 나눠 출병케 하였다.

서달은 동관으로부터 서쪽 길로 나가 서쪽을 쳐서 평정하고, 확곽을 잡았다.
이문충은 거용(居庸)으로부터 동쪽 길로 나가 대막(大漠)을 끊고, 원의 사주(嗣主)를 추격했다.

서달이 정서(定西)에 이르자, 확곽은 퇴각하여 침아곡(沈兒峪) 주둔하여 조금 진군하였다.
해자와 보루를 사이에 두고 수일간 교전했다.

확곽이 정병을 보내 사잇길로 동남쪽 보루를 겁박하니,
좌승(左丞) 호덕제(胡德濟)가 창졸간에 실수를 저질러 군대가 놀라 요동하니, 서달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를 쳐서 퇴각시켰다.

호덕제는 대해(大海)의 아들인데, 서달은 그가 공신의 아들이라 해서, 계구를 채워 경사로 보내고,
그 휘하의 지휘(指揮) 등 여러명은 참수하여 이를 돌렸다.

다음날, 정병이 해자를 빼았고 죽을 각오로 싸워 확곽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담왕(郯王), 문제왕(文濟王) 및 국공(國公), 평장(平章) 이하의 문무 속료(僚屬) 1,860명,
장수와 군사 84,500여명을 사로잡았고, 말과 낙타, 기타 가축은 거만(巨萬)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확곽은 겨우 처자 수명을 끼고 화림(和林)으로 달았나다 호덕제가 경사에 이르자,
황제가 그를 풀어주었고, 서신을 써써 서달을 칙유하길
 "장군은 위청(衞青)이 소건(蘇建)을 베어 죽이지 않을 것을 본받았을 뿐, 사마양저(穰苴)가 장가(莊賈)를 기다린 것은 보지 못했소?
장군이 이 자를 주살했다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오. 지금 조정의 논의에 내려 보냈으나, 나는 또한 그의 신주(信州)와
그가 여지껏 세운 공을 생각하면 차마 죽일 수 없소. 지금 이후로 계속해서 장군은 고식책(姑息)을 섬기지 마시오."

서달이 이미 확곽을 파하고 나서, 곧 군대를 거느리고 휘주(徽州) 남쪽에서부터 108번 건너 약양(略陽)에 이르렀는데,
면주(沔州)를 함락하고, 연운잔(連雲棧)으로 들어가 흥원(興元)을 공격하여 이를 취했다.

부장군 이문충 또한 응창을 함락하고, 원나라의 적손(嫡孫)의 비주(妃主)와 장상(將相)을 붙잡았다.
이를 전후로 승전보를 보고하니, (황제가) 조하여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로 돌아오게 하였다.

황제가 용강에까지 나가 영접하고 위로했다. 이에 조를 내려 공신을 크게 봉하였는데,
서달에게 개국보운추성선무공신(開國輔運推誠宣力武臣), 특진광록대부(特進光祿大夫), 좌주국(左柱國),
태부(太傅), 중서우승상참군국사(中書右丞相參軍國事)를 제수하고 위국공(魏國公)으로 고쳐 봉하고,
세록(歲祿)을 5천석으로 하고, 세권(世券)을 주었다.

다음해 성희(盛熙) 등을 거느리고 북평으로 가서 군마를 조련하고, 성과 해자를 수리하며,
254둔(屯)을 두고 밭 1,300여경을 개간했다. 겨울이 되자 소환하였다. 

홍무 5년 다시 크게 군대를 내어 확곽을 정벌했다.
서달은 정로대장군으로 중도(中道)로 나아가고, 좌부장군(左副將軍) 이문충은 동도로
정서장군(征西將軍) 풍승(馮勝)을 서도(潟)로 나아가면서 각기 5만 기명을 거느리고 변새를 넘었다.

서달이 도독 남옥(藍玉)을 보내 토라하(土剌河)에서 확곽을 쳐서 패배시켰다.
확곽이 하종철(賀宗哲)과 병력을 합래 힘꺼 대항하니, 서달이 싸웠지만 불리하여, 죽은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황제는 서달의 공이 크다고 하여 불문에 부쳤다.
이 떄 이문충의 군대 또한 불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직 풍승이 서량(西涼)까지 이르러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나, 낙타와 말을 은닉한데 연좌되어,
상은 행해지지 않았으니, 이에 관한 사정이 이문충전과 풍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해, 서달이 다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변방을 행군하며, 답라해(答剌海)에서 적을 격파하고,
돌아와 북평에 진치며, 3년간 머문 후에 돌아갔다.

14년, 다시 탕화 등을 거느리고 내아불화(乃兒不花)를 토벌하였다.
토벌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 진수했다.

매해 봄이 되면 출정하고, 겨울이며 불러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돌아오면 번번이 장군의 인을 바치니, 휴가를 주어 쉬게 하고, 연회에 나와 기뻐하며 술마시니,
포의 시절 처럼 형제라 칭했지만, 서달은 더욱 공손하고 삼가하였다.

황제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길 "서형이 큰 공을 세웠는데, 평안한 거처가 아직 없으니, 구저(舊邸)를 내려주리다"라 했다.
저란 태조가 오왕 시절 거처하던 곳이다.

서달은 간고히 사양하였다.
황제가 서달의 집에 갔는데, 센 술을 마시고 취하여 이불을 덮고 정침(正寢)에 올라 잤다.

서달이 술이 깨서 놀라 계단 아래로 내려와, 부복하며 죽을 죄를 졌다고 외쳤다.
황제가 이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구저의 앞쪽을 좋은 저택(甲第)로 수리하고, 그
 방(坊)을 표하여 "대공(大功)"이라 하였다.

호유용(胡惟庸)이 승상(丞相)이 되어서는 서달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서달은 그의 인품을 박하게 보아 대답하지 않으니, 서달 집의 문지기(閽者)인 복수(福壽)에게 뇌물을 주어 서달을 도모하게 하였다.

복수가 발각되었지만, 서달은 또한 문초하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황제를 위해 말하기 호유용은 재상을 맡길 만한 자가 아니라고 했다.
에 과연 패망하게 되니, 황제가 더욱 서달을 중하게 여겼다.

홍무 17년, 달(太陰=)이 상장(上將) 자리를 범하니, 황제가 마음속으로 이를 싫어했다.
서달이 북평에 있을 때, 등창의 병이 생겼는데, 더욱 심해지니, 황제가 서달의 장자 서휘조(輝祖)를 보내
지난 노고를 위로하는 칙서를 주고, 얼마 후 불러들였다.  

다음 해 3월, 병이 위독해져, 마침내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황제가 조회를 폐하고, 상에 임하여 비통해 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중산왕(中山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며, 3대에게 모두 왕작(王爵)을 주었다.
종산(鍾山)의 음택을 하사해 장사지내게 하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직접 지었다.
태묘에 배향하고, 공신묘에 초상을 두되 그 위치를 모두 제1로 하였다.

서달은 말이 간략하되 생각은 정밀하였다.
군대에 있을 때는, 영을 내려도 서로 다르지 않았다.

제장들이 봉지(奉持)할 때는 늠름하여도 황제 앞에서는 공손하고 삼가하여 능히 말을 못하는 것 같았다.
부하를 어루만지고 위무하길 잘하여, 부하들과 감고(甘苦)를 같이 하니, 
사졸들은 은혜에 감동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향하는 곳마다 이기게 되었다.

또한 부대를 엄정히 단속하여, 평정한 큰 도읍(大都)이 둘이요, 성의 도읍(省會)가 셋이요, 
군읍(郡邑)은 수백이나 되었지만, 백성들은 여항(閭井)은 편안하여 백성들이 군대를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 돌아가는 날은, 한대의 수레에 타고 관사로 가고,
조정에서는 유생들을 예로 대하여 담소하고 의논하기를 종일하였으니, 화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황제가 일찍이 그를 칭찬하며 말하길 "명을 받들어 나가고, 공을 이뤄 돌아오는데,
자랑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不矜不伐), 부녀를 사랑한 바도 없고, 재보를 취하는 바도 없으니,
중정(中正)함에 허물이 없어 해와 달보다 밝고 분명한 것은 대장군 한사람 뿐이다"라 했다.

아들은 넷이다. 휘조(輝祖), 첨복(添福), 응서(膺緒), 증수(增壽)
(이 뒤로 서달의 장자 서휘조의 열전이 있지만, 이건 생략)
장녀는 문황제후(文皇帝后)가 되었고, 차녀는 대왕비(代王妃), 차차녀는 안왕비(安王妃)이다.


御製 中山徐武寧王神道碑 / 황제 주원장이 서달을 위해서 직접 지은 신도비문

大眀中山武寧王姓徐氏諱達鳯陽府鳯陽縣人家世農業王年二十有二值元末兵興嵗癸巳朕集義旅王來麾下朕視其所以周旋幾二年動靜語黙悉超羣英於是命為帥首凡有微征以代朕行又幾一載眀年乙未朕被敵所執敵之帥首亦為我軍所執明日王來以身代朕歸朕歸縱敵帥首易王還已而從朕渡江下採石定太平時機務浩繁姑孰之郡密邇大江況元帥首曼濟哈雅率舟師以拒江面為朕肘腋之患不暇率兵四征乃命王為將擇精兵數千東取溧水溧陽王兵至守者不戰民庶咸安眀年丙申春二月敗元舟師於採石王檣溧水三月召王從征建業越十日庚寅師入建業越七日丁酉命為大將浮江而下水陸並進東取京口大破元師京口巳定東探浙右時張士誠擅稱名號遣將巳據毗陵旌旗相望其守者潛遣間諜誘我斥堠王察知遣使歸告請勒兵以討朕許之王將三萬人逼近其壘復遣使歸告賊勢少窘益兵可下朕遣戰將千餘員甲十三萬師會合圍毗陵張士誠自姑蘇發其弟張九六將兵數萬來援王遣兵逆戰不移時破之生擒張九六城守猶堅朕復益新附二萬合勢共圍守者窘甚計出多方誘我新附者二萬新附帥首宻從傾營入城助彼來戰初我軍環其城而營之因新附者叛四方去其三獨王固守其南開平王猶營東南外一舍之餘扼彼援兵尚未驚移聞新附者叛冦迫王營王拒守且戰開平自外來援內外夾攻大敗其衆擒其守將張徳餘軍敗入其城王復還而困之士誠自姑蘇遣將呂珍寅夜入城督兵以守與王相抗初彼軍雖少糧且足用戰守益堅及誘降入軍多糧少戰且狐疑丁酉春守將呂珍潛遁城下師旋復遣征寧國城圍援至王發兵扼要而戰援者敗俘斬者衆旬日城降宣城亦附凱旋時四方羣雄甚多朕固守江東數郡命王秣馬厲兵以觀四方之勢又眀年戊戌命王點兵固守建業朕親下浙東金華既平六月師還未幾遣王西征皖城水陸並進微北秋命王西征池州師抵而平陳友諒遣兵來救斬首萬級生獲三千餘時張士誠發兵來冦宜興城陷遣王將兵復取師抵城下不旬日城復生獲三千餘皆戰死其年惟揚元義兵盡歸壬寅秋王従朕下潯陽陳友諒敗潰時張士誠發兵攻長興留王守潯陽未幾召歸師次中塗令復守潯陽比至陳兵巳入城守王遣兵與戰陳兵復潰俘斬數千獲其眷屬戰騎彼時潯陽之境空荒棄而弗守師旋建業癸夘春正月取豫章城降命王西取武昌不克班師中塗豫章內變王復討平張士誠北冦夀春朕親往援王為前部張兵敗北旋師金斗周圍其城戰間陳友諒大率兵冦豫章詔王罷金斗之圍歸整舟師解豫章之難秋七月師次彭蠡陳友諒罷圍逆戰王身先諸將敗陳一巨艘死者千五百人自是彼軍勢弱我軍威振由王身先癸夘嵗留王守京朕西征武昌甲辰武昌下克陳之後其年大會兵於京師乙巳嵗命王取淮東淮陰諸州仲夏師旋嵗丙午命率甲士二十萬東取吳越鏖戰於吳興皂林之野生擒張兵六萬不戮一卒盡赴京師冬十有一月師抵姑蘇明年丁未秋九月姑蘇下兼浙左之大半詔班師命王西畧蒼梧九溪率服還軍京師洪武元年戊申春正月朕即大位二月命王為征北大將軍銀青榮祿大夫上柱國錄軍國重事中書右丞相兼太子少傅信國公命率甲士二十五萬北定中原抵齊魯而民安所過輯兵守禦規畫足食兵不民擾所得壯士帥而徂征不煩朕念北齊既平命河南兵至大梁父老壺漿以迎西下洛陽長驅崤函直抵潼闗守者拒戰王命宋國公馮勝抜之朕命據闗而守諭歸大梁北下河內由鄴下趨趙州抵臨清其年八月三日辛未北入燕都捷奏平敵復命西下晉冀如命井陘長驅晉冀以平二年春正月召渡河西兵入闗中守者皆棄全有闗內之地召歸天下太平三年冬十有一月論功行賞命王為開國輔運推誠宣力武臣特進光祿大夫左柱國太傅中書右丞相征北大將軍改封魏國公五年夏五月衆議北入沙漠王至嶺北兵疲而還勑命沿邊輯守嵗鎮於燕口外餘民自是收盡海內無虞十七年甲子太陰數犯上將朕惡之召罷北鎮勞勞於家是年臘月二十有一日染疾朕恐之星馳四召名醫咸至疾終弗瘳眀年乙丑二月二十七日己未薨特封中山王諡武寧享年五十有四爰以是年四月十八日己酉塟於鍾山之陰生男四人世子允恭襲封魏國公女四人長女燕王妃王平昔言簡慮精當提兵之時令出不二諸將敬若神眀所至之處攻城不屠與人不戱凡受命而出及功成而旋每不自矜至於封姑蘇之府庫置元宮之美人財寶無所取婦女無所愛忠志無疵昭明乎日月既薨朕恐嵗月幽遐磨迷偉績朕特親筆生前張我武威偃兵息民混一區夏奠安人神之勞以示子孫耿光萬世勒諸堅石樹當神道歌曰
景命昌兮天彰錫我英俊兮忠良幽韜祕畧兮神機黙溫溫兮兼剛秉旄鉞而徂征兮既出幡幢繚繞兮雄氣軒昻戰騎靈兮蹄疾旌旗烈烈兮前行六軍濟濟兮甲冑礪矛燦爛兮精鋩舍之兮周廬星列屬櫜兮比比懸傍刁斗聲頻兮令宻山川妖魅兮奚蔵彎弧力勁兮射欃槍幾披星月兮秋霜奮忠海內兮孰前當摧堅撫順兮我武惟揚


서달(徐達)의 딸들 ㅡ 글 : 상전(商傳)

 영락제의 애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영락제의 일생에 있어서 영향이 가장 컸던 여자를 따지자면 서황후(徐皇后)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명성이 자자한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딸이다.
이 서황후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사서에 따르면, "어려서 정정(貞靜)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여자수재라고 불렀다"
이렇게 재주가 있는 여자이다보니 당연히 주원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하루는 주원장이 서달을 찾아간다.
"너와 나는 포의 시절의 친구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이는 현재의 군신관계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물며 자고이래로, 군신이 서로 가까우면 서로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너의 장녀를 나의 넷째에게 주면 어떻겠는가?"

주원장과 서달을 어려서 같이 소를 기르던 친구이다.
나중에 함께 천하를 얻었고, 서달은 최고의 개국공신이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들의 관계는 어려서부터 함께한 친구이다. 그
러나, 이때는 이미 두 사람의 신분이 달라져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고, 하나는 비록 전공이 혁혁하지만 여전히 신하였다.
주원장이 황제인데, 스스로 찾아와서 자식의 혼사를 요청하니, 그의 말이 곧 성지이다.

신하인 서달로서야 어길 수가 없다.
물론, 그로서도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혼사는 이렇게 결정된다.

이해에 영락제 주체는 16살이었고, 서씨는 그보다 2살이 어려서 14살이었다.
서달의 딸은 장수집안의 여인이지만, 글을 읽고, 예절을 배워서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홍무9년에 연왕비(燕王妃)에 봉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고황후의 총애를 받는다.

이 서왕비의 몸 속에는 대장군 서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어쨌든 장수집안의 딸이다.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는 이경륭(李景隆)을 파견하여 북경을 공격하게 했다.
런데, 이때 주체는 영왕 주권에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상태였다.

북경성은 비어있었으니,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서왕비는 갑옷을 입고 나서서, 북경을 구해낸다.

당시 이경륭의 군대는 10만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가 북경성을 밤낮으로 공격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북경은 원나라의 수도로, 성벽이 높고, 호성하가 넓으면서도 깊었다.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이다.
그리하여 이경륭은 군대에 북경의 9개 성문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정남방의 여정문은 바로 지금의 정양문(속칭 전문)이다. 이 곳이 공격의 핵심이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완강히 버티면서, 서왕비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서왕비는 성안의 남자들이 모두 전투에 참가하여 더 이상 남은 남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친히 성안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성벽에 올라가서 전투를 도운다.

그녀가 성벽에 올라오자, 수비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즉시 조정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사기를 눌렀다.

북경 서쪽의 부성문도 조정군대가 공격하는 중요대상이었다.
일부 조정군대는 한때 구능 부자의 지휘하에 성문을 돌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륭은 그들이 최고의 전공을 차지할 것이 두려워서 대군이 도착하면 함께 공격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체의 병사들이 밤중에 성벽에 물을 뿌려서, 성벽에 얼음이 얼어버렸다.

그리하여 다음날 전투를 개시하자 성벽을 기어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명이 지키는 북경성이 십만명의 밤낮없는 공격을 견뎌낸다.

나중에 영락제가 황제에 오른 후, 서왕비도 자연스럽게 서황후가 된다.
서황후는 글도 썼다.

<여헌>, <여계>를 참고하여 <내훈>24편을 쓰고,
고대인들의 선행과 좋은 말을 모아서, <권선서>를 써서 간행한다.

그녀는 46세때 병으로 사망한다.
영락제는 애통해하며 그녀에게 인효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락제의 생명에서 또 하나의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는 바로 그의 처제인 서묘금(徐妙錦)이다.
이 여인은 서달의 작은 딸이다.
서황후가 사망한 후, 영락제는 그녀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서달의 두 아들과 두 딸은 아주 재미있다.
장남 서휘조(徐輝祖)는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고, 사남 서증수(徐增壽)는 연왕 주체를 지지했다.

큰 딸은 연왕 주체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다.
서달의 작은 딸 서묘금은 건국영웅의 기백이 있었다.

주체는 그녀를 그리워했으나, 그녀는 주체의 반대편에 섰다.
나중에 주체가 황위를 빼앗고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그녀는 결연코 그에 따르지 않는다.

주체가, "네가 나에게 시집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시집가는지 보겠다."고 하자,
서묘금은 아예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주체가 남경을 공격했을 때, 서묘금은 주윤문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어디도 가지 말고, 이 황궁대전에서 주체를 기다려라. 그가 너를 어떻게 하는지 봐라."

그러나 주윤문에게는 그런 담량이 없었다.
영락제가 가장 총애한 권비(權妃)는 주체가 원정을 나갈 때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를 보면 그녀를 아주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권비가 사망했을 때, 주체는 상심하여, 그녀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여기고, 후궁을 대거 죽여버린다.

이 권비는 서묘금과 닮았다고 한다.
한왕 주고후의 말에 따르면, "권낭낭은 (주체)의 처제와 칠푼(七分) 닮았다."

주체는 잔혹했지만 그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주체가 서묘금에게 정중하게 청혼했을 때, 그녀가 이를 거절하며 쓴 <답영락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정원의 예쁜 도화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하기 보다는, 산 속의 작은 풀이 되어 혼자서 피고 지겠다.
이제부터 패엽포단, 청등고불을 벗삼아, 청정한 여생을 지낼 것이다."

서묘금은 개성이 대단한 여인이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시집가지도 않았으니, 정말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홍수전(洪秀全, 1814~1864)과 태평천국


첨원은 태평천국 시기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의 왕부가 되기도 했고,

민국시기에는 여러 정부기관이 이곳에 자리했다.


1958년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1961년에 태평천국 기념관은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으로 개칭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에는 태평천국과 관련된 문물 2800여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문헌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홍수전은 어려서부터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꿈꿨다.

열넷에 첫 과거에서 낙방한 그는, 결국 네 번째 과거에서 낙방한 서른부터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포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지향점을 찾은 것이다.

그 계기는 7년 전(1836) 과거시험장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나눠준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이었다.


당시 홍수전은 그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해를 연달아 부시(府試)에서 낙방한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극한의 상태로 치달은 그는 수십일 동안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천상으로 올라간 홍수전은 금빛 수염을 기른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그에게 사악한 것을 퇴치하라고 하면서 칼과 황금 인장을 건네주었다.


홍수전은 어떤 남자와 함께 요괴를 쫓아냈다. 이 꿈의 의미를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른 그는 다시 과거를 준비했다.


그리고 네 번째 낙방! 이때 홍수전의 친척이 놀러 왔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권세양언>을 빌려갔다.

<권세양언>은 중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양발(梁發)이 성경을 발췌해 만든 것이다.


홍수전의 친척은 무척 흥미진진하게 그 책을 읽었고 홍수전에게도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하느님 · 천지창조 · 천국 · 악마 · 심판 등의 내용이 담긴 <권세양언>을 읽고 홍수전은 깨닫는다.

그 옛날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꿈이 바로 계시였음을!


노인은 하느님이고, 자신과 함께 요괴를 쫓아낸 남자는 예수다.

홍수전은 자신이 누군지 깨달았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홍수전에게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유교 사당을 파괴하고, 상제를 섬기는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했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1851년에 마침내 태평천국을 세우게 된다.

태평천국의 천왕(天王)임을 선언한 홍수전은 만주족 정부를 악마로 규정하고 성전을 선포했다.


태평천국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남부를 점령했고, 1853년에는 난징을 함락했다.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로서, 태평천국이 멸망한 1864년까지 천경(天京)이라 불렸다.


“논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쓴다.”

평등한 지상낙원, 이것이 태평천국의 원칙이자 이상이었다.


착취와 차별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들은 태평천국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청나라 조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일등공신인 증국번은 한족 출신의 유가 관료였다.

증국번은 공자의 위패와 사당을 부숴버린 홍수전을 중국의 파괴자라고 생각했다.


한족 지식인에게는 만주족과 한족이라는 민족의 경계보다는

‘공자’라는 부호가 ‘중국’의 정체성으로서 훨씬 더 유의미했던 것이다.


천경이 함락되기 한 달 전 홍수전은 세상을 떠났다.

증국번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2년 뒤(1866), 홍수전의 고향 광둥에서 쑨원이 태어났다.

“제2의 홍수전이 되겠다”고 어릴 적부터 다짐하던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주인공이 된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를 타도한 배만(排滿)혁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쑨원은 과거에 뜻을 둔 적이 없다.


과거제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던 1905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석두성(石頭城)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중산문(中山門) 밖 청량산(淸凉山). 석성(石城)이라고도 한다.

건안(建安) 16년(211) 건업(建業)으로 천도한 손권은 다음 해에 청량산에 있는 초(楚)나라 금릉읍(金陵邑) 옛터에 석두성을 쌓았다.


산을 등진 그 성은 둘레가 3km나 되었다.

성 남쪽에는 두 개, 동쪽에는 한 개의 문을 달았다.


그러나 서북쪽에는 대강(大江)과 가까이 접해 있어서 문을 달지 않았다.

석두성은 지세가 험요하여 도성을 보위하는 중요한 성곽이었기 때문에 동오의 수군 본부가 되었고

성안에는 병기와 군량을 저장하는 석두창(石頭倉) · 석두고(石頭庫) 등이 있었다.


성 위 가장 높은 곳에는 봉화대를 쌓았는데

동오 봉화의 총지휘부인 이 봉화에 한번 불을 붙이면 반나절 안에 온 장강 연안에 전달되었다.


석두성은 장강 최대의 항구여서 항상 1,000여 척의 배들이 정박했다.

280년 서진(西晉)의 대장 왕준의 전선이 석두성 아래 이르자, 동오의 손호가 투항했다.


후에 강의 물길이 10km가량 서쪽으로 이동되는 바람에 석두성은 군사적 가치를 상실해 폐기되고 말았다.

 현재는 높이 1m에서 17m나 되는 돌담들이 남아 있다.


청량산공원(淸凉山公園)으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淸凉寺) · 숭정서원(崇正書院) · 소엽루(掃葉樓) 등 명 · 청대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두성(石頭城) / 유우석(劉禹錫)


山圍故國周遭在(산위고국주조재)
산은 (삼국시대 오나라 이래) 옛 성을 감싸고 주변은 그대로인데
潮打空城寂莫回(조타공성적막회)
조수(양즈강 조수)는 빈(인기척 없는) 성을 때리고 적막하게 되돌아온다.

淮水東邊舊時月(회수동변구시월)
회수의 동쪽 강변에는 옛(옛날 그대로) 달이 떠오르고
夜深還過女牆來(야심환과여장래)
밤이 깊어지자 다시 낮은 담장을 넘어오는구나


故國 : 옛 서울. 金陵

周遭 : 순회함

女牆 : 얕은 울타리

'石頭城'은 삼국시대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축성한 성으로서 남경성(南京城) 근방, 양즈강 강변에 있다.

이 시도 회고의 작품. 백락천(白樂天)은 이 시를 일컬어 "후대의 시인은 더 붓을 댈 데가 없다"고 격찬하였다.


劉禹錫(유우석, 772~842)


자는 몽득(夢得)이고 팽성(彭城, 江蘇省 徐州) 사람이다.

그는 정원(貞元) 9년에 유종원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유종원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정치개혁에 참가하였으나 왕숙문이 실각하자 좌천되었다.

후에 연주(連州)와 화주(和州)의 자사를 지냈고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까지 올랐다.


전기에는 유종원과 가까이 지냈고, 또 만년에는 낙야(洛陽)에서 백거이와 친하게 지내며 시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는 풍격이 통속하면서도 청신하고 민가(民歌)의 정조(情調)와 언어를 잘 이용하였다.


 유우석이 활동했던 8세기 당대는 귀족정치의 절정의 시기였다.

유우석은 반대파의 배척으로 계속 지방으로 좌천되어 뜻을 펼치지 못하다가

연주(連州), 기주(夔州), 화주(和州) 자사를 거쳐 23년간에 걸친 귀양에서 풀려난다.


826년 55세 때 화주 자사를 끝으로 낙양에 가는 중 금릉(金陵)을 유람하고 나서 ‘금릉오제(金陵五題)’를 썼다.

유우석은 귀양지에서 시를 창작할 수 있는 많은 여가와 환경이 주어진 덕분에 풍자시와 산수시, 회고시를 많이 써냈다.


‘오의항(烏衣巷)’ 은 금릉의 화려했던 시절 귀족들이 모여 살던 오의항을 그리며

귀족 집에 깃들어 살던 제비조차도 귀족의 자취를 잃어 일반 민가에 날아들어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오의항은 오나라 손권의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주둔 했던 곳이라

동진시대 귀족들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자제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검은 옷을 의미하는 오의(烏衣)는 특수층의 자제임을 알리는 것이다. 항(巷)은 골목의 의미를 지닌다.




1975년 4월 23일 중국을 방문 중인 김일성이 등소평 등과 함께 석두성을 관람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봉황각(鳳凰閣)





봉황대(鳳凰臺)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서조(瑞鳥)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용의 몸, 기린의 날개, 물고기 꼬리 모양을 하고,

찬란한 5색 빛에 오음(五音)의 소리를 내는데 수컷이 봉(鳳)이요 암컷이 황(凰).


오동나무에 살면서 태평할 때에만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 예천(醴川:甘泉)을 마시며

천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올라 / 이백(李白)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옛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거늘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이제 봉황은 가고 대는 비어 강물만 흐른다.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오솔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나라 고관대작들도 오래된 무덤으로 남았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금릉 삼산은 푸른 하늘에 반 토막쯤만 드러내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진회 두 물줄기는 백로주를 휘돌아 흐르는구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햇빛은 온통 뜬구름에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내마음이 슬프도다.


어구(語句)
金陵 : 지금의 南京(남경). 삼국시대 손권(孫權)이 오(吳)나라를 세우고 금릉을 처음 도읍으로 정했다.
鳳凰臺 : 남경에 있는 대(臺). 南朝宋(남조 송)의 王顗(왕의)란 사람이 봉황(鳳凰)이 떼를 지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대를 창건했다.
吳宮 : 삼국 시대 때의 오나라 孫權(손권)의 궁전.
幽徑 : 그윽한 오솔길.
晉代 : 晉 나라 시대(265~420). 서울이 洛陽(낙양)이었다가 東晉(동진) 때(317~420) 서울을 建業(건업) 곧 지금의 남경으로 옮겼음.
衣冠 : 옷과 갓. 예의바르게 옷차림을 한 公卿大夫, 貴人(공경대부, 귀인) 들.
古丘 : 오래된 언덕.
三山 : 금릉의 서남쪽에 세 봉우리가 잇달아 있는 산.
半落 : 반쯤 떨어짐. 구름에 산의 반이 가리어 있음.
二水 : 秦水(진수)와 淮水(회수). 秦淮. 江蘇省 江寧縣(강소성 강녕현)의 두 강으로 이 주변이 六朝(육조) 때 陳(진)의 도읍지였음.
白鷺洲 : 진수와 회수가 돌아 이룬 섬. 두 강은 중도에서 합류하다가 하류에서 갈라져 한 줄기는 성 안으로 들고

한 갈래는 성 밖을 돌아 흐르는데, 그 중간에 백로주 섬이 생겨났다고 함.
長安 : 옛 중국의 前漢(전한), 隋(수), 唐(당) 등의 서울. 지금의 陝西省 西安, 長安(섬서성 서안, 장안) 일대.

여기서는 현종 임금을 말함.


수련(首聯, 기起 1~2구)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다가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 봉황 떠나니 누대는 비어있고 강물만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봉황대 위에는 그 옛날 봉황새가 날아와 놀았다.

그런데 지금은 봉황새는 날아가고 봉황대는 비어 있고 장강의 물만 유유히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만물(萬物)이 유전(流轉)함과 역사(歷史)의 흘러감을 옛날과 지금의 상황을 대조(對照)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릉 봉황산 위에 지은 누대에 봉황새들이 날아와 놀았다.


봉황새는 상서로움을 전한다는 전설의 새로서, 이는 흔히 왕조가 흥성(興盛)할 것임을 상징한다.

즉 봉황대를 지은 송나라가 자신의 왕조의 흥성을 기원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현실은 봉황새는 떠나가고 봉황대에는 오갔을 수많은 당대의 귀족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강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흘러내린다.


상구(上句)에서의 기대와 환희, 낙관과 축복이 하구(下句)에서는 실망과 비애, 비관과 애수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즉 상구는 하구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감개(感慨)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함련(頷聯, 승承 3~4구)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 잔나라 고관들은 낡은 무덤 다 되었네


산문적 의미는, “먼 과거를 생각해보면, 화려했던 오나라 궁궐(吳宮), 그 궁궐 속의 꽃과 풀(花草) 같았던 궁녀들은

이미 한 줌 흙이 되어 잡풀 우거진 작은 오솔길(幽俓)에 묻혀버려(埋)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나라 시대(晉代)의 화려한 의상(衣冠)을 입었던 부자(富者)와 귀족(貴族)들도

이제는 모두 다 죽어서 오래된 무덤(古丘)의 주인 신세가 되고(成) 말았다. ”이다.


여기서는, 봉황대와 관련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여 수련의 시상을 확대하고 있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나라 궁궐의 “아름다운 궁녀”를 비유한다.


그윽한 좁은 길(幽俓)은 횡폐화 된 궁궐 터의 “풀에 묻혀버린 좁은 길”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화려함이 지금은 모두 풀섶 길에 묻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진대의관(晉代衣冠)은 오궁화초(吳宮花草)와 대를 이룬다.

따라서 진대의관은 “진나라 시대의 고관”을 비유한다.


고구(古丘)는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으로, 작가의 시대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무덤이라는 뜻이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공명(功名)도 지금은 모두 죽어 헛되이 사라지고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구에서는 궁녀, 하구에서는 고관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사실을 들어 인생살이의 무상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경련(頸聯, 전轉 5~6구)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 삼산의 봉우리 푸른 산 밖으로 반쯤 솟아있고
二水中分自鷺洲(이수중분자로주) : 두 강물은 나뉘어 백로주로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이제 이러한 시름에서 벗어나기나고 싶어 먼 곳을 보니, 삼산이 푸른 하늘 밖으로 솟아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너무나 높고 또 아득히 멀리 있어, 산 아래로 안개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고 윗 부분만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기둥이 떨어진 듯 솟아 있다.

그리고 산 아래로는 두 물줄기가 노주에서 가운데로 나누어져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봉황대를 둘러싼 보다 큰 자연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삼산과 이수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웅대하고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산수자연과

왜소하고 변하는 인간의 군상을 은연중 대비시키고 있다.


삼산(三山)은 남경 서쪽에 잇달은 세 봉우리를 뜻한다.

반락(半落)은 산의 모습이 아래 절반은 보이지 않고, 윗 절반만 보이는 상황을 뜻한다.


아래 절반은 연무에 싸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천외(靑天外)는 산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서는 삼산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수(二水)는 진수(秦水)와 회수(淮水)를 뜻한다.

백로주(白鷺洲)는 이수의 한 갈래가 이룬 삼각섬이다.


중분(中分)은 가운데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봉황대를 둘러싼 이수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 )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해를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 서울 장안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 근심 이네


산문적 의미는, “모두가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지만,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에 잠기게 하는구나.”이다.


여기서는, 떠도는 구름이 해를 가리어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 현상을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자신이 서울로 불려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상구(上句)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은

하구(下句) 長安不見(장안이 보이지 않은)의 까닭을 설명하는 시구이다.


총위(總爲)는 “모두-때문이다”의 뜻이다.

부운(浮雲)은 “뜬 구름”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키면 “조정의 간신”을 비유한다.


폐일(蔽日)은 “해를 가리다”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켜보면 “일(日)”은 임금을 뜻한다.

부운능폐일(浮雲能蔽日)은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는 뜻이 된다.


長安不見(장안불견)은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 의미와

“서울로 다시 불리워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 의미를 갖는다.


使人愁(사인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스럽게 한다.

” 여기서 사람은 내면적으로 “작가 자신”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권력의 지전투구에 쫓겨난 작가가

봉황대에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변화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유구하기만 하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지금의 장안 권력자들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간신배에 의해 작자 자신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봉황대의 전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현재의 눈앞의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부질없는 권력의 역사가 되풀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자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작가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원망과 슬픔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이백은 율시를 잘 짓지 않았으나 이 작품만큼은 당대의 율시 중에서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시를 지은 동기와 유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내려 오고 있다.
이백이 당 현종(玄宗) 임금 때 조정에서 버림을 받아 武昌(무창)의 黃鶴樓(황학루)에 가서 유랑하던 중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 704~754)의 시 <황학루(黃鶴樓)>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시에 그만 감탄한 나머지

최호(崔颢)의 경지와 견줄만한 시를 지을 수 없음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 남경시)의 봉황대에서 칠언율시로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를 지어

최호의 시‘黃鶴樓'와 비견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시는 착상(着想)이 비슷하고 운자(韻字)도 같아 이 시 또한 명작으로 꼽힌다.
최호 시의 끝구가 ‘연파강상사인수(煙波江上使人愁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이니

이 시의 끝구‘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이 보이지 않아 나는 슬프도다)’와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경관을 풍류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사회를 개탄했음이 최호의 시와 다르다고들 평하니,

尾聯(미련, 結 7~8구)에서 “뜬 구름이 해를 가리듯 간사한 신하들이 천자의 총명을 가려,

비록 객지를 떠도는 처지이기는 하나 현종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몸”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 그것이다.


한편 다른 설이 있다.

이백이 말년에 유배되어 야량(夜郞)에 가던 도중 풀려나와 동남부를 유랑할 때 쓴 시라고 보는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말년의 작품이 아니고 쓰인 시기를 중년으로 보아

장안에서 간신배의 모함에 걸려 현종에게 쫓겨나 강호 지역을 유랑하면서 금릉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봉황대에 올라 당시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시는 어지러운 국가의 장래를 근심하는 작품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 옛날 오나라 진나라 화려했던 궁궐도 잡풀에 묻히고 황폐한 먼지에 싸여 잊혀져 가는 게 인간 세상이라지만

강물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기만 한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고 했던가.

세상 만사가 원래 그런 것이라 달관하면 그만인가 싶더니 끝내 그는 권력 다툼에 시달리다

산천을 떠돌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모두가 저 간신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탓이라 한탄한다.


세상 일이란게 본디 다 그런것을...

하지만 그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깨 위에 그림자처럼 짙게 얹혀 있다.


이 시에서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二水分中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란 구절은 유명하다.

보통시인 같으면 삼산은 하늘 끝에 반쯤 솟아 있고 라고 표현했을 법한데

이백은 반쯤 떨어져있다고 표현하는 '반락'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위 구절이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민요중에 '양산도'라는 노래에서는 이 시를 본따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 이수분중하니 능라도라....."하여 靑天外 대신에 평양의 모란봉을 집어넣고

白鷺洲 대신에 대동강변 능라도를 넣어서 작사해 불렀으니

이백이 지은 이 시가 우리 백성에게 끼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고심하다가 누각에 씌어 있는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를 보고

자기는 그만한 시를 지을 자신이 없다고 한탄하며 붓을 놓고 만 일은

두고두고 천재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언젠가는 최호의 시에 버금가는 멋진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뒤 이백은 황제에게 글을 지어 바치는 관직인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되어

약 3년 동안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西安)에 머물다가 천보 3년(744)에 그 자리에서 쫓겨나 도성을 떠났다.


이백이 조정에서 쫓겨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의 모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은 당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세력과 외척세력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력사의 질시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저녁에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흥경궁(興慶宮) 안에 있는 침향정(沈香亭)으로 행차했다.

당나라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모란씨를 보냈다는 일화도 있듯이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는 모란을 매우 숭상한지라 침향정 주위에도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란꽃을 보고 현종이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라고 했다.

그때 이백은 이미 퇴청하여 장안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


끌려가다시피 침향정으로 간 그는 얼굴에 찬물 세례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좀 차렸다.

그리고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고력사의 부축을 받으며 현종 앞으로 나아가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던 양귀비가 먹을 갈아 받쳐 들고 있는 가운데

일필휘지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이 시에서 이백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해 가며

양귀비의 미모를 극구 칭송했는데 평소 이백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던 고력사가

양귀비를 꾀어 함께 이백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조비연은 본래 기녀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얼마 동안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를 모시는 궁녀로 있다가 결국 평민의 신세로 전락하여 여기저기 떠돌다 죽었기 때문에

양귀비를 조비연에 비유한 것은 이백이 넌지시 양귀비를 모욕한 것이라는 것이 고력사가 양귀비를 꾄 논리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장안을 떠난 이백은 어느 날 금릉(金陵, 지금의 강소성 南京)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갔다.

봉황대는 옛날에 봉황이 내려와서 노닌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누대였다.


눈앞에 갖가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 부근에 있는 삼산은 마치 대지 바깥으로 미끄러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지구에 매달려 있고

먼 길을 달려온 진회하(秦淮河)는 백로주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황궁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온통 잡초에 뒤덮여 있고,

동진 때에 세도를 떨치던 고관대작들은 덩그런 무덤만 하나씩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눈을 들어 장안이 있는 서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황학루에서 있었던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붓을 들었다.


이처럼 최호와의 경쟁의식 속에 지어진 이 시는, 봉황대 일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나아가 조정이 충신을 포용하지 못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자신의 깊은 우국충정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원스러운 풍경과 개인의 향수를 노래하는 데에서 그친 최호의 시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관점도 있고 최호의 시가 더 낫다는 관점도 있다.


어쨌거나 이백은 이 시 덕분에 남경 사람들의 추앙을 많이 받고 있다.

백로주공원 정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이 시 제5·6구가 씌어 있으며,

백로주공원에서 평강부로(平康府路)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간 곳의 진회하에 놓여 있는 평강교 밑에는

이백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뒤의 벽에 초서체로 쓴 이 시가 새겨져 있다.


백로주공원 안에 있는 작은 다리들 가운데 ‘이수교’라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시의 성가를 말해 주는 예증이다.



봉황대(鳳凰臺)에서 바라본 봉황각


봉황대 옆 진회하(秦淮河)


황학루(黄鹤楼)  ㅡ 검색 자료


호북성의 성도(省都)인 무한(武漢)은 장강(長江) 남쪽의 무창(武昌) 지역과

장강 북쪽의 한양(漢陽)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 도시다.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강의 남쪽, 정확히 말하면 무한장강대교의 남쪽에

황학산 · 황곡산(黃鵠山) · 사산(蛇山)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 꼭대기에 가면 황학루라는 누각이 하나 있다.


서기 223년에 창건되어 근 1,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누각은 중국 4대 누각의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천하강산제일루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기도 한데 이 누각의 창건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신씨(辛氏)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우람한 사나이가 하나 와서 술을 한 잔 달라고 했다.


차림새로 보아 술값 낼 돈이 없어 보였지만 두말없이 한 잔 주었다.

그 뒤로 사나이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공짜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사나이가 그 동안에 진 빚을 갚겠다며 귤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는 노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한 마리 그렸다. 황학이었다.

그림이 참으로 정교하여 술집에 있던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학이 박수 소리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 뒤로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황학의 춤을 보기 위해

이 술집에 들르는 바람에 신씨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10년쯤 지난 뒤에 그 동안 어딘가로 사라졌던 사나이가 갑자기 돌아와

벽에 있는 학을 불러내어서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씨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했다.

최호의 이 시는 황학루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방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향생각이 간절해져서 지은 것이다.


남송 시인 엄우(嚴羽)가 “당나라 사람들의 칠언율시는 당연히 최호(崔颢)의 <황학루>를 최고로 쳐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 시는 천재 시인 이백(李白)마저도 감탄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이 황학루에 올라 눈앞에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어 보려는데

좀처럼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고개를 들어보니 최호의 이 시가 누각에 씌어 있었다.

이백은 이 시를 보고 나서 “눈앞의 경치를 표현하지 못하는데, 최호가 시를 지어 누각에 써 놓았네”라고 탄복하면서

시 짓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황학루가 있는 황학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내려간 곳에 각필정(擱筆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으니

 ‘붓을 놓은 정자’라는 뜻의 이 정자 이름이 바로 이와 같은 일화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학루 안에 진열되어 있는 역대 황학루의 모형을 보면 당나라 때의 황학루는 2층짜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5층이나 되는 고층 누각인 데다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내리기에는 편리하지만 예스러운 맛이 없어서 많이 아쉽다.


다만 누각 앞에 황학 두 마리를 조각한 황동상을 세우고 황학귀래상(黃鶴歸來像)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한다.

누각의 고층화로 인해 잃어버린 운치를 다소나마 만회해 주는 셈이다. (이상 검색 자료)


황학루(黄鹤楼) / 최호(崔颢 704~754)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나버려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 그대로 유유히 떠도네.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내 건너 한양의 나무숲 뚜렷하고
芳草萋萋鸚鵡洲 (방초처처앵무주) 꽃다운 풀 앵무주에 더부룩 자랐구나.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멘고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


어구(語句)
黃鶴樓 : 호북성 武漢市(무한시)에 있는 누각. 양자강과 南湖(남호)에 임했고 蜀(촉)의 費褘(비위)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 하여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하고〈寰宇記〉, 辛氏(신씨) 술집에 온 사람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그림 학이 날아가 버려 신씨가 누각을 세워 항학루라 했다고도 하며〈武昌誌〉,

仙人(선인) 子安(자안)이 황학을 타고 여기를 지났다고도 함〈齊諧志>
昔人 : 옛날 사람. 古人(고인).
空 : 헛되이. 부질없이.
悠悠 : 여유있고 한가함.
歷歷 : 하나하나 그 자취가 뚜렷함.
漢陽 : 무한시 서쪽에 있던 지명. 漢陽縣(한양현)이었고 晴川閣(청천각)이 있다고 함.
萋萋 : 초목이 우거져 무성함.
鸚鵡洲 : 무한시의 남쪽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섬. 後漢(후한)의 江夏太守 黃祖(강하태수 황조)가 禰衡(이형)을 죽인 곳으로,

이형은 문인으로 단숨에 글을 잘 짓는 재주로 독수리에 비기기도 했고, 曹操(조조)를 모욕하다가 쫓겨나 황조에게 의지해

 ‘鸚鵡賦(앵무부)’를 지어 칭찬을 받기도 했으나 황조의 비위를 거슬려 피살당하니,

앵무주는 그의 ‘앵무부’에서 따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앵무새를 바친 사람이 있어 이름 삼았다는 異說(이설)도 있음.
鄕關 : 고향.
煙波 : 아지랑이나 안개가 낀 水面(수면).
江上 : ① 강가의 언덕. ② 강물 위. 여기서는 ①임.
使 : 하여금.


감상(鑑賞)


황학루(黄鹤楼)는 북송 시대부터 20 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교의 명산성지로 이용되었으며

최호(崔颢, 704~754), 이백(李白) 뿐만 아니라, 역대의 저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 가도(贾岛, 779~843),

육유(陆游, 1125~1210), 양신(杨慎, 1488~1559), 장거정(张居正) 등의 작품으로 인해 천하절경으로 알려져 왔다.


이 시는 당시(唐詩)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최고작으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작품이다.


일설에 따르면 천보(天宝) 3년에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황학루(黄鹤楼)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최호(崔颢)의 시를 발견하고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함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의 봉황대로 가서 칠언율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를 지으니,

착상과 운자가 최호의 황학루와 같아 이 또한 명작으로 이름이 높다. 


이 시 황학루(黄鹤楼)에서 수련(首聯, 기起 1~2구)은 전설상의 선인(仙人)에 대한 동경의 염(念)을 담았고,

함련(頷聯, 승承 3~4구)에서는 그 동경이 헛된 것임을 흰구름에 의탁해 시상을 이었는데,

이 두 연은 회고(懷古)의 정을 담았다 하겠다.


경련(頸聯, 전轉 5~6구)은 눈앞에 펼쳐지는 뛰어난 경치를 그린 서경(敍景, 사경寫景)으로 멋지게 시상을 전환했다.

물론 함련과 경련은 시작법(詩作法)대로 대구(對句)로 구성되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은 나그네의 처지가 된 자신의 시름과 망향(望鄕)의 정을 읊어 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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