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 수도 난징시를 점령한 일본군
남경성 위에 일장기를 세우고 남경입성식을 거행하는 장면 (일본 아사히신문 선전홍보 영상)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그 연대기는 길고도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난징대학살에 
비견될 만한 정도와 규모를 지닌 사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중에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남경 대학살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어
여기서는 남경 전투에 대해서만 알아본다.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937년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시민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난징을 포기하고
무방비 도시로 남겨둔채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까닭은
흐트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되지 못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 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 속에 빠져 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 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다.

 



해자 역할을 하는 진회하(秦淮河)와 남경성, 그리고 주변 남경 시가지







▲ 중화민국 장군 탕셩즈. 난징 전투 당시 중국군 지휘관이었다.


탕셩즈 장군은 난징을 지키겠다고 큰소리 친후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군들은 계절이 겨울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군복을 여름 하복 복장을 하고 있었고
병력 또한 중국군이 많았으므로 그가 수십 만의 중국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항전을 했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일본 국왕의 사촌인 황족으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가 난징 대학살의 최고 책임자 였으며 실제로 1937년 12월 13일 학살 명령서에 최종 사인을 했지만 ,
종전 후 전범 재판에서 왕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는 아무런 혐의도 받지 않은채 석방되고 대신 마쓰이 이와네가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이 함락될 당시에는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그는 12월 7일 병가를 내고 전선을 이탈 하였으며
아사카 야스히코가 대학살을 명령한 12월 13일 이후인 12월17일 요양 후 전선으로 가서
사실 남경 대학살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미국 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상하이 방면에서 남경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남경 부근에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의 공격 명령



방어하는 중국군



상하이에서 퇴각한 부대도 남경 방어전에 합류



 




방어 준비중인 중국군








남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전투 부대






남경을 함락한 일본군






일본군 환영행사에 설탕및 담배를 받고 동원중인 중국인들


일본군이 배포한 남경 주민들의 환영행사


 




일본군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


일본군 수뇌부



남경의 국민당 본부를 점령한 후 일본군 본부를 설치하고 들어가는 장면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 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된 기사이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 중이다.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의 총살 후 장면








적루유지(镝楼遗址)

"본래는 한 채의 세 개 처마로 된 헐산식 적루가 있어 요망대로 사용하였는데 청조 가경년에 무너져 내려

강령현에서 다시 재건할 때 규모를 축소하였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할 때 파괴되었다."



임시로 복원한 성루(城楼)의 모습


중국에서 꼭 봐야 할 4대 역사 명승지로 만리장성과 북경의 자금성, 서안의 병마용,

그리고 남경의 중화문을 꼽을 정도로 중화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南京明城墙全景圖(남경명성벽전경도)


1366년 주원장은 지리조건이 좋은 남경에 마음을 두고 옛 성을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성(宮城),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곽(外郭)의 4중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것들을 총칭하여 남경성으로 불렀다.


하지만 현재는 내성만을 가리켜 남경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성의 성벽은 동쪽으로는 종산(鍾山)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석두성(石頭城),

남쪽으로는 진회하(秦淮河), 북쪽으로는 후호(後湖)에 걸친 지역에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총 35.267km로 도시에 건설된 고대의 성벽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며,

중국에서도 보존상태가 좋은,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이 끊어진 상태이며, 현존하면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23.399km에 불과하여

서안성(西安城)이나 개봉성(開封城)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

남경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대 건축물이다.  


내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를 하고 있다.

벽돌을 쌓고, 그 속을 흙으로 채워 만들었다.


내성은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성들과는 달리 방(方)형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성으로서는 혁신적인 모습을 한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은 남쪽에 정양문을 정문으로 3곳, 서쪽에 5곳, 동쪽에 1곳, 북쪽에 4곳, 총 13곳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의 이름은 각각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통제문(通濟門),

취보문(聚寶門, 중화민국시기 中華門으로 개명),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旱西門 또는 한서문漢西門), 청량문(清涼門), 정회문(定淮門),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 종부문(鍾阜門), 금천문(金川門), 신책문(神策門),

태평문(太平門),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中山門)으로,

이들 성문과 외곽의 성문들을 합하여 “내십삼, 외십팔(裏十三,外十八)”이라 하였다.


13개의 성문 위에는 성루(城樓)를 지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지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 중 취보문(聚寶門), 통제문(通濟門), 삼산문(三山門)은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매 문마다 모두 옹성을 건설하여 방어에 힘썼다.


성벽위에는 군사들이 머무르며 보초를 섰던 와포방(窩鋪房)이 200곳 있었으며,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13,000여 개 있었다.


와포방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성가퀴는 일부만 남아 있다.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 내외에 주둔했던 군사는 약 20만 명이었다.


황궁과 강을 지켰던 일부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가 성내의 서북지역에 주둔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병영과 식량창고, 병기창이 있는 일종의 군사구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벽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행상의 필요에 따라 성문의 개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1908년 초장문(草場門)이 생겼고, 1909년에는 지금의 현무문(玄武門)인 풍윤문(豐潤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3년 지금의 읍강문(挹江門)에 해당하는 해릉문(海陵門)이 생겼으며,

1929년 무정문(武定門), 1931년 한중문(漢中門), 중앙문(中央門), 소북문(小北門),

1934년 신민문(新民門), 1935년 우화문(雨花門) 등이 건설되었다.


1930년대 이미 남경성의 성문은 24곳에 달했으며

 1952년에는 다시 해방문(解放門)이 생겨났고, 1992년에는 집경문(集慶門)이 추가되었다. 


내성은 1950년대까지도 대체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원형의 60%정도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내성의 최초 13개 성문 중에서 취보문, 석성문, 신책문, 청량문만이 명나라 때 건설된 성문이며,

나머지 것들은 전쟁에 파괴되어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책문도 성문자체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성루는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난징성은 전체적으로 "ㅏ" 자 모양이다.


성의 서북쪽(난징성의 최북단)은 양쯔강에 면해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중산릉과 명효릉이 위치한 자금산에 닿아있다.


자금산 서쪽에는 인공 호수 현무호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월아호(月牙湖)에 이어 호성하(護城河)가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역할을 했다.


남쪽부터 서쪽에 이르는 긴 구역은 친후와이허가 해자 기능을 담당했다.

진짜 강줄기인 친후와이허는 난징성의 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다 양쯔강에 합류한다.


난징성의 최남단부터 양쯔강 합류 지점 중간쯤에

친후와이허를 바라보며 한중문(漢中門)과 청량문(淸凉門)이 있다.

진회하(秦淮河)


옛날 해자 역할을 하던 강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진회하는 총 길이 110 Km되는 남경의 주요 강으로 시 동남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든다.


중화문은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의봉문(儀鳳門) 남경성 북쪽에 있는 문.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으로 바뀜








적루유지(镝楼遗址)

"본래는 한 채의 세 개 처마로 된 헐산식 적루가 있어 요망대로 사용하였는데 청조 가경년에 무너져 내려 강령현에서 다시 재건할 때 규모를 축소하였고, 1937년 겨울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할 때 파괴되었다."


파손되기 전 성루(城楼)의 모습

중국에서 꼭 봐야 할 4대 역사 명승지로 만리장성과 북경의 자금성, 서안의 병마용, 그리고 남경의 중화문을 꼽을 정도로 중화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성루(城楼) 모형도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南京明城墙全景圖(남경명성벽전경도)


1366년 주원장은 지리조건이 좋은 남경에 마음을 두고 옛 성을 확장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성(宮城),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곽(外郭)의 4중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것들을 총칭하여 남경성으로 불렀다. 하지만 현재는 내성만을 가리켜 남경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성의 성벽은 동쪽으로는 종산(鍾山)에 닿아있고, 서쪽으로는 석두성(石頭城), 남쪽으로는 진회하(秦淮河), 북쪽으로는 후호(後湖)에 걸친 지역에 건설되었다. 외곽성까지 모두 완공된 건 1393년으로, 처음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1366)로부터 무려 28년이 걸렸다. 명나라 성벽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 “두 사람이 각각 말을 타고서 성벽의 반대 방향으로 하루 종일 가야만 만날 수 있다.” 16세기 중엽에 난징에 세 번이나 왔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마테오 리치 중국 찰기(札記)>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명나라 성벽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외곽성이 60㎞, 경성이 총 35.267km로 도시에 건설된 고대의 성벽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며, 중국에서도 보존상태가 좋은,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이다. 하지만 일부 구간이 끊어진 상태이며, 현존하면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구간이 23.399km에 불과하여 서안성(西安城)이나 개봉성(開封城)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고 있다. 남경에서는 가장 거대한 고대 건축물이다.  
내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형태를 하고 있다. 벽돌을 쌓고, 그 속을 흙으로 채워 만들었다. 내성은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성들과는 달리 방(方)형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의 성으로서는 혁신적인 모습을 한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성은 남쪽에 정양문을 정문으로 3곳, 서쪽에 5곳, 동쪽에 1곳, 북쪽에 4곳, 총 13곳의 성문이 있었다. 성문의 이름은 각각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통제문(通濟門), 취보문(聚寶門, 중화민국시기 中華門으로 개명),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旱西門 또는 한서문漢西門), 청량문(清涼門), 정회문(定淮門),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 종부문(鍾阜門), 금천문(金川門), 신책문(神策門), 태평문(太平門),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中山門)으로, 이들 성문과 외곽의 성문들을 합하여 “내십삼, 외십팔(裏十三,外十八)”이라 하였다.
13개의 성문 위에는 성루(城樓)를 지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甕城)을 지어 공격에 대비했다. 그 중 취보문(聚寶門), 통제문(通濟門), 삼산문(三山門)은 수륙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매 문마다 모두 옹성을 건설하여 방어에 힘썼다. 성벽위에는 군사들이 머무르며 보초를 섰던 와포방(窩鋪房)이 200곳 있었으며,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13,000여개 있었다. 와포방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성가퀴는 일부만 남아있다.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 내외에 주둔했던 군사는 약 20만 명이었다. 황궁과 강을 지켰던 일부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사가 성내의 서북지역에 주둔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대규모의 병영과 식량창고, 병기창이 있는 일종의 군사구역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3개의 성문 중에서 사연 많기로는 신책문(神策門)과 태평문(太平門)을 능가할 게 없을 것이다. 먼저 신책문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남명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했을 때 난징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1만여명에 불과했다. 청나라의 양강 총독은 신책문을 굳게 닫고 지연작전을 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워서 큰 승리를 거둔다. 순치제는 이를 기념해서 신책문을 ‘득승문(得勝門)’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내내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곳도 바로 신책문이다. 결국 신책문도 태평천국도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신책문의 ‘화평문(和平門)’이라는 글씨는, 민국시기에 화평문으로 개칭되면서 새겨진 것이다. 당시 화평문 안에는 아시아 석유회사(Asiatic Petroleum Company)의 유류창고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도 이곳에 유류창고를 두었다. 화평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내내 유류창고의 기능을 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화평문이 군에서 인민정부로 넘어오고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비로소 평화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태평문이야말로 그 이름과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성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의 최후 보루였던 태평문과 주변 성벽이 20여 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태평천국 진압에 나선 상군(湘軍)이 성벽 아래 매설한 600여 포대의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조열문(趙烈文)의 <능정거사(能靜居士) 일기>에서는 난징이 함락된 이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이 함락된 날 전군이 성을 약탈했다.” “사흘 동안 10여만명을 죽였고 진회하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마흔 이하로는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고 노인은 부상당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칼에 십여 번 혹은 수십 번을 찔렸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멀리 퍼졌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태평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1937년 11월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난징을 향했다. 12월 8일, 장제스는 비행기로 난징을 떠났다. 난징 사수를 강력히 주장했던 탕성즈(唐生智) 역시 퇴각 명령을 받고서 12월 12일에 배를 타고 난징에서 빠져나갔다. 이튿날, 태평문 부근에서 무려 1300여명이 학살된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과 시민을 이곳에 모아 놓고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이들의 발아래는 일본군이 매설해 둔 지뢰가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고 철조망 안에 갇힌 이들은 굉음과 함께 폭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일본군은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70년이 지난 2007년 12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던 태평문 근방에는 이날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날의 학살에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을 증언한 이는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본 병사다. 인터뷰 당시(1999) 그는 이미 여든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성벽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통행상의 필요에 따라 성문의 개수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1908년 초장문(草場門)이 생겼고, 1909년에는 지금의 현무문(玄武門)인 풍윤문(豐潤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3년 지금의 읍강문(挹江門)에 해당하는 해릉문(海陵門)이 생겼으며, 1929년 무정문(武定門), 1931년 한중문(漢中門), 중앙문(中央門), 소북문(小北門), 1934년 신민문(新民門), 1935년 우화문(雨花門) 등이 건설되었다. 1930년대 이미 남경성의 성문은 24곳에 달했으며 1952년에는 다시 해방문(解放門)이 생겨났고, 1992년에는 집경문(集慶門)이 추가 되었다. 
내성은 1950년대까지도 대체로 완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원형의 60%정도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내성의 최초 13개 성문 중에서 취보문, 석성문, 신책문, 청량문만이 명나라 때 건설된 성문이며, 나머지 것들은 전쟁에 파괴되어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책문도 성문자체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성루는 파괴되어 재건하였다.
난징성은 전체적으로 "ㅏ" 자 모양이다. 성의 서북쪽(난징성의 최북단)은 양쯔강에 면해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중산릉과 명효릉이 위치한 자금산에 닿아있다. 자금산 서쪽에는 인공 호수 현무호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월아호(月牙湖)에 이어 호성하(護城河)가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역할을 했다. 남쪽부터 서쪽에 이르는 긴 구역은 친후와이허가 해자 기능을 담당했다. 진짜 강줄기인 친후와이허는 난징성의 남쪽으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다 양쯔강에 합류한다. 난징성의 최남단부터 양쯔강 합류 지점 중간쯤에 친후와이허를 바라보며 한중문(漢中門)과 청량문(淸凉門)이 있다.


진회하(秦淮河)

옛날 해자 역할을 하던 강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진회하는 총 길이 110 Km되는 남경의 주요 강으로 시 동남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흘러든다. 중화문은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진회하의 옛 이름은 "회수(淮水)"였고, "용장포(龍藏浦)"라고도 했다. 원류는  동쪽으로 구용현(句容縣) 보화산(寶華山), 남쪽으로 율수현(溧水縣) 동려산(東廬山)이다. 두 물줄기가 강녕현(江寧縣) 방산태(方山埭)에서 만나서 남경성 동쪽 수문으로 흘러 들어와 성을 관통하여 서쪽 수문으로 빠져나가 장강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전체 길이는 약 110Km이다. 성밖의 물줄기는 외진회(外秦淮)라고 하고, 성내 물줄기는 내진회(內秦淮)라고 하는데, 내진회의 길이는 약 5Km이다. 전해지기로 진시황제가 이곳으로 순행 왔을 때 방산(方山)을 파고 장롱(長隴)을 잘라 금릉(현재의 남경)의 왕기(王氣)를 없앴던 연고로 진회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의봉문(儀鳳門) 남경성 북쪽에 있는 문. 중화민국 때 흥중문(興中門)으로 바뀜





마도(馬道)
"성으로 오르는 비스듬한 말길은 전쟁 당시에 군수물자를 성에 나르는 쾌속도였으며

장군들이 직접 말채찍을 휘두르며 성 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위에서 내려다 본 마도(馬道)



성문 위의 넓은 광장. 성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문 위에 비치된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써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을 올려놓고 멀리 던져 공격하던 기구



明代大炮(명대대포) 당시에 공격 무기로 사용하던 대포



명대 중형 공격 전차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공격형 무기





성벽(城墙) 건설에 쓰인 벽돌의 책임실명제


난징 성벽을 쌓는 데 쓰인 벽돌에는 관리부터 인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벽돌의 제조와 관련된 이들의 이름이 선명히 찍혀 있다.


검사에 불합격하면 관련자는 처벌을 받았다.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벽의 벽돌조차 책임자를 찾아 문책했던 엄격한 ‘품질보증제’ 덕분에 난징의 성벽이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고,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제조지역,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된 벽돌


벽돌의 탁본



南京明代城墙(남경명대성벽)


남경성(南京城) 주위를 해자가 감싸고 있다.

동쪽 주황색으로 표시된 곳이 황제가 살던 궁이고, 중화문(中華門)은 남쪽 큰 탑 앞에 있는 문이다.


북동쪽으로 현무호와 자금산이 보인다.

서쪽 성 안의 산이 청량산이다.


주원장이 어렸을 적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이어진 메뚜기 피해와 돌림병. 반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까지 모두 잃은 이 가련한 소년,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어 낡은 옷으로 유해를 수습해 이웃집 땅에다 안장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고 갈 곳은 절밖에 없었다.


얼마 뒤 절에서도 식량이 동났다. 소

년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탁발승 노릇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가 다시 절로 돌아온 게 1348년.

스무 해가 지난 1368년, 그는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그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바로 주원장(1328~1398)이다.

주중팔은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 곽자흥(郭子興)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朱)는 주살의 주(誅)를 의미하고, 원(元)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옥으로 만든 홀(笏)인 장(璋)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인재’였다.

그는 원나라 군대를 거듭 격파했다.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


355년에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 뒤를 이은 주원장은 강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한족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원나라와 대적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주원장,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주원장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은 것은 책사 풍국용(馮國用)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승(朱升)이라는 책사는 “성벽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저장하고, 왕위에는 천천히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주원장은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반란군의 지도자 진우량이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장사성이 오왕(吳王)을 자칭할 때도,

주원장은 왕위에 오르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계속 받들면서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1366년, 홍건군의 기반인 백련교의 지도자 한림아는 난징으로 가던 길에 배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만다.


아마도 그의 죽음은 주원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오왕을 자칭했던 마지막 라이벌인 장사성도 죽였다.


그리고 1368년, 주원장은 황제가 된다.

국호는 대명(大明), 소명왕 한림아를 계승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일찍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일어났던 홍건군은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강생하고 명왕(明王)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결


과적으로 보자면, 대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예언의 명왕이었던 셈이다.

“성벽을 높이 쌓으라”는 주승의 권고는 난징에서 착실히 이행되었다.



심만삼(沈萬三)


난징의 성문은 마치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끝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난징의 13개 성문은 하늘의 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난징을 둘러싼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 의봉문(儀鳳門, 중화민국 때 흥중문 興中門)과

동남쪽 귀퉁이 통제문(通濟門)에 각각 점을 찍은 뒤 두 점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취보문(聚寶門) · 삼산문(三山門 속칭 수서문水西門) · 석성문(石城門, 속칭 한서문 旱西門 또는 한서문 漢西門) ·

청량문(清涼門) · 정회문(定淮門) · 의봉문은 ‘남두육성(南斗六星)’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제문 · 정양문(正陽門 : 한때 광화문이라 불렸으나 없어짐) · 조양문(朝陽門, 중화민국 때 중산문 中山門) ·

태평문(太平門) · 신책문(神策門) · 금천문(金川門) · 종부문(鍾阜門)은 ‘북두칠성’에 해당한다.


난징의 성벽을 만든 주원장의 효릉(孝陵)은 북두칠성 영역에 자리한다.

게다가 황릉의 신도는 모두 직선 형태인데, 효릉의 신도는 북두칠성 형태로 굽어 있다.


예로부터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믿어졌다.

난징의 13개 성문에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수도에 우주를 구현하고자 했던 주원장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또한 북두칠성 형태의 신도는 그가 우주의 중심 북두칠성에 묻힘으로써

영원을 기약하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주원장은 엄청난 축성 자금을 어떻게 조달한 것일까?

명사(明史)에 따르면, 강남의 부자 심만삼(沈萬三)이 난징 성의 3분의 1을 쌓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심만삼(沈萬三 1330년 ~ 1379년)은 원나라 말기의 강남의 거부였다.

자는 중영(仲榮)이며 절강(浙江) 오흥(吳興)(현재 湖州)출신이다.


1368년 ~ 1911년에 이르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저우장의 심청(沈廳)의 60% 이상이 건축되었다.

저우장이 발전된 것은 명나라 때 유명한 거부 심만삼(沈萬三) 때부터이다.


명사에는 주원장이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심만삼은 개인 출자로 난징 성벽을 쌓고, 게다가 그는 군대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금까지 내놓겠노라고 했다.


일개 필부가 천자의 군대를 위로하겠다니! 주원장은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마(馬)황후가 이렇게 말하며 주원장을 말린다.


“법률이란 불법을 저지른 자를 죽이기 위함이지, 불길한 자를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라에 대적할 정도로 부유한 자는 불길하고, 불길한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니 폐하께서 그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심만삼을 죽이는 대신 윈난(雲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명나라 초에 강남 일대의 부자는 모두 주원장의 고향인 펑양(鳳陽 봉양)으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이는 한나라 고조가 부자를 죄다 관중(關中)으로 이주시킨 사례를 따른 것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을 수도로 삼고자 14만 호에 달하는 강남 백성을 펑양으로 이주시켰다.


결국 펑양으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거니와, 그곳은 자신뿐 아니라 개국공신들의 고향인지라 권력의 누수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게 일인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주원장은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다.

그런 그가 심만삼과 같은 이를 그냥 두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심만삼은 일찍이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을 도운 전력까지 있다.

장사성을 도운 부자가 어디 심만삼뿐이랴.


장사성이 세력을 발휘할 때 누구든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게,

주원장이 황제가 된 상황에서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일 따름이다.


주원장은 이 부자들을 죄다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경계와 의심을 해소했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분풀이까지 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13개의 성문 중에서 ‘취보문(聚寶門)’에는 심만삼과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보문을 세울 때 계속해서 지반이 무너져서 점을 봤더니, 성문 아래에 취보분(聚寶盆)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보분은 재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일종의 화수분이다.

주원장은 심만삼이 가지고 있던 취보분을 가져다 성문 아래에 묻게 한다.


그랬더니 더 이상 지반이 무너지지 않았고 성문을 세울 수 있었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이지만, 취보분의 소유자로 말해질 정도로 심만삼이 부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를 주원장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취보문은 ‘천하제일의 옹성(甕城)’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1931년 국민정부에 의해 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주원장의 지나친 경계와 의심이 도리어 그의 의도와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있다.

황태자 주표가 한창 나이에 죽자 주표의 장자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단행한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인 예다.


주윤문이 숙청의 이유를 묻자 주원장은 그에게 가시가 가득한 나뭇가지를 쥐어보라고 한다.

머뭇거리는 주윤문에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 가시 돋친 나뭇가지를 쥐지 못하니, 내가 너를 위해 가시를 죄다 없애주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렇듯 손자를 위해 가시를 없애주고자 했으나,

능력 있는 이들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도리어 손자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1399)에 넷째아들 연왕(燕王) 주체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킨다.

1402년, 주체의 군대가 난징에 이르자 주혜와 이경륭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난징은 함락되고 건문제(주윤문)의 행방은 미궁에 빠진 채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한다.

주체의 군대가 들어왔던 성문이 바로 ‘금천문(金川門)’이다.


일찍이 주원장이 잔인한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 중 목숨 걸고 금천문을 지켰을 사람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홍무통보(洪武通寶)


중국 명대(明代:1368∼1644)에 주조된 화폐.

태조(太祖) 때의 홍무통보(洪武通寶), 성조(成祖)의 영락(永樂)통보, 선종(宣宗)의 선덕(宣德)통보 등이 있다.


그 후 세종(世宗)의 가정(嘉靖)에 이르기까지, 효종(孝宗)의 홍치(弘治) 때 이외에는 주전(鑄錢)이 시행되지 않았으며,

가정 이후부터 다시 대대로 그 연호의 돈을 주조하였다.

원료는 처음에는 구리에 납과 주석을 더한 것이었으며, 가정 연대 이후에는 아연을 섞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성루에 마련된 터널식 공간으로 평소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전시에는 병사들을 숨겨두는 장소나 숙소로 이용되었다.


작은 쪽문을 통해 들어가면 길다란 통로가 나오고 통로 끝에 넓은 공간이 나온다.

성루에는 병사를 숨겨두었던 장병동(藏兵洞)이 200곳 있었다.


장병동(藏兵洞)

"장병동"은 우리나라 고대 성문옹성 가운데의 독특한 건축이다.

고대 전쟁에서 물자의 저장과 병원의 매복 등 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옹성에 건설된 장병동(藏兵洞)


성벽은 장방형의 돌을 바닥에 깔아 기초를 다지고, 돌을 깔아 다진 바닥 위에 흙으로 토성을 쌓고,

그 겉면에는 벽돌을 쌓아 성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벽돌을 절약하면서도 충분히 강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성벽은 대부분 이 같은 방법으로 건설되었다.

다만 남경성 황궁의 경우에는 동쪽과 북쪽의 성벽은 전부 벽돌로 건설되었다.


성벽의 평균높이는 12m정도이며, 그 위에는 활을 쏘도록 고안된 타구(垛口)가 있다.

타구는 총 13,616곳이 있었으며, 벽돌의 기본 크기는 10cm X 20cm X 40cm으로

무게는 30 ~ 40근이었고, 재질은 두 가지였다.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강소(江蘇)성, 안휘(安徽)성, 강서(江西)성,

호남(湖南)성, 호북(湖北)성의 28개 부(府), 152개 현에서 제작되었다.


벽돌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벽돌의 측면에는 “OO府 OO州 OO縣”이라고 제조지가 기재되었고,

제작자와 품질관리 관원, 그리고 감독자의 성명이 표기되었다.


이것으로 벽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할 수 있었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벽돌에 써넣는 정보는 대게 70여자였으며, 정보를 넣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벽돌에 글자를 찍어 넣는 방법이 있었고,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며, 직접 써넣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글자의 형태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위서(魏書), 해서(楷書), 행서(行書)가 사용되었으며

일부 간략화 된 필기체도 발견되었다.

약 10억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장병동(藏兵洞) 내부


장병동(藏兵洞) 내부


뢰석(礌石)

"뢰석은 명조시기에 성문을 방비하는 주요한 병장기였는데 청석으로 쫗아 만든 크고 작은 원형의 돌멩이 이다."



뢰석(礌石)


뢰석(礌石)은 돌을 쪼아 만든 볼링공 형태의 병기이다.

명나라 시기의 주요 방성(防城)도구로 성벽을 오르는 적병에게 던져서 상해를 입혔다.

가장 큰 것은 무게가 200근에 달한다.


뢰석(礌石) 저장고 내부






주원장(朱元璋)과 주승(朱升)


몽골족인 원조(元朝)의 통치는 매우 참혹했다.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몽골인(蒙古人),색목인(色目人), 한인(汉人),남인(南人) 등 4개 급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특히 원조 말년 원 순제(顺帝) 재위 기간, 전례없이 참혹했고 정치는 부패하기 그지없었다.


몽골통치자들은 백성들의 목숨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특히 한인과 남인들에게는 소나 말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다.


궁지에 몰린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켜 원조 통치자의 폭정에 반항했고

백성들의 연이은 봉기는 원조의 반동통치를 급속도로 와해시켰다.


기원 1353년, 봉기군의 수령 장사성(张士诚)이 고우(高邮)지역을 점령하고

장강을 넘어 상숙(常熟),호주(湖州),송강(松江),상주(常州) 에 수도를 세우고 왕으로 자처했다.


기원 1357년, 호북인 진우량(陈友谅)이 평장(平章)이라 자칭하고

강서(江西), 복건(福建)을 점령하고 구강(九江)을 수도로 정해 한왕(漢王)이라 자칭했다.

이와 동시에 절강사람인 방국진(方國珍) 역시 기회를 이용해 병사를 일으켜 점동(渐東)을 차지했다.


봉기군 가운데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주원장(朱元璋)은 기원 1356년에

집경(集庆—오늘의 남경)을 점령하고 오국공(吴国公)이라 자칭했다.


주원장은 상당히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일정하게 승리도 거둔 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대권은 눈앞에 왔으나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이때 주원장에게 주승(朱升)이라는 사람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는 자가 있었다.


주승(朱升)은 세상의 욕망이 뿜어내는 속진(俗塵)을 피해

산간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원장은 주승을 찾아가

천하의 대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방략(方略)을 주승에게 물었다.


몇 가지 대담을 주고받았을 터이지만,

지금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주승이 주원장에게 전한 말은 아주 간단하게만 남아 있다.

“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많이 모으고, 선포식을 늦추라”는 말이었다.


한자(漢字)로 적으면 아홉 글자다.

 ‘高築墻(고축장), 廣積糧(광적량), 緩稱王(완칭왕)’이다.


대세(大勢)를 형성했으나 아직 지방 군벌(軍閥)이 남아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

그래서 명분보다는 실질에 주목하며 더 힘을 길러야 하는 상황.


명나라 건국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했던

주원장의 그런 처지를 꿰뚫어 본 가르침이었다.


주승이 알려준 비결을 듣고난 주원장은 바로 주승의 말을 따랐다.

군량과 마초를 사들이고 병마를 훈련시키며 군웅(群雄)들을 제거하고 화하(华夏)를 통일할 준비를 했다.


자신의 군대가 머무는 곳의 축성(築城)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 등 기초적인 부분을 더욱 보강했다.


아울러 섣부른 ‘창업 선포식’을 뒤로 미루고

형세(形勢)를 치밀하게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주원장의 행동을 살피던 장사성(张士诚)과 진우량(陈友谅)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주원장을 없애버리려 계획했다.


하지만 주원장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대장인 화운(华云)을 장사성의 아들로 변장시켜

진우량의 군에 파견해 군사계획을 상의하게 했다.


하지만 진우량측의 대장인 장정변(张定边)에 의해 발각되었다.

장정변은 몇번이나 진우량에게 충고했으나

진우량은 장정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김에 장정변의 군권마저 박탈했다.


주원장과 끝을 보려고 작심한 진우량은 전투를 벌였고

결국 진우량의 수십만 대군은 주원장 부대에 의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진우량 역시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따라서 진우량의 아들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주원장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팔면위풍(八面威風)  위풍이 당당하다


큰 승리를 거둔 주원장 부대는 구강구(九江口)에서 술을 마시며 경축했다.

병사들이 마음껏 술판을 즐기게 하려고 주원장은 대장 서달(徐达)과 함께 조용히 그 장소를 나왔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달밝은 밤길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강가에서 한쌍의 노 부부가 배를 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서달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그 부부에게 강을 건너줄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노 부부는 흔쾌히 승낙하고 그들을 태웠다.


배가 강심에까지 도착했을 때 배를 젓던 노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대장군은 팔방에 위풍이 당당(八面威風 팔면위풍) 하다네… "


주원장과 서달은 소리내어 기분좋게 웃었다.

그후, 주원장은 마침내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힘의 구축에 성공하고

대륙의 풍운(風雲)을 질타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명나라의 개국황제가 된 후 

그때 강가에서 만났던 노부부를 찾아 상을 내리고

그때 탔던 배에는 특별히 빨간 칠을 하여 기념으로 남겼다 한다.

팔면위풍(八面威風)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성구이다.


주원장(朱元璋)


주승(朱升)





유구한 역사 문화의 도시 난징(南京)


난징(南京)은 중국에서 3,000 여 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이어져 온 대표적인 도시다.

삼국시대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은 229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수도 허창(許昌)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서진(西晉)시대 279년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가 서진(西晉)을 정복하자 

이 소식을 서진(西晉)의 황족 사마예(司馬睿)가 이곳 건업(建業)에서 전해듣고,

사마예(司馬睿)는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동진(東晉)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 이름의 끝자 '업(鄴)'이

이곳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282년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이라 고쳤다. 


그 후 진(晋) · 송(宋) · 양(梁) · 진(陳)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당(唐)나라 시대에는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이 시기 난징은 중국 전체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원(元)나라 시대 몽고인들은 중국 남쪽 지방을 천대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로인해 금릉이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금릉(金陵) 백성들은 몽고인들에게 많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죽어나간 이들이 많았다.


이 시기 몽고인들은 이곳을 집경(集慶)으로 불렀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난징 시민들은 몽고인들에 대하여 강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몽고인들과는 교류도 일절 하지 않는 편이다.


다행히도 1356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로는

백성들을 편히 쉬게 하면서 일에 제대로 종사할 수 있도록 각별하게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쳤다.


주원장은 1328년 10월, 중국의 남동부 남경(南京) 인근에 위치한 호주(濠州)에서 태어났다.

호주는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이다.


명(明)나라가 건국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주원장은 이곳을 응천부에서 다시 남경(南京)으로 고쳤고,

1378년 정월 정식으로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경사(京師)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그 이후, 주원장이 사망하고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몽고를 정복할 목적으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하면서

영락 원년에 다시 남경(南京,중국어 병음: Nánjīng)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후로도 난징(南京)의 이름은 여러번에 걸쳐 바뀌었다.

청나라 말기였던 1868~1905년 사이, 태평천국 운동을 주도한 홍수전은 이곳 명칭을 천경(天京)으로 바꾸었다.


천경(天京)이란 하늘의 수도라는 뜻으로

태평 천국이 하느님의 복음으로 발전할 도시이자 수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이곳은 동양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가장 크게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기존 청나라 정부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중국의 황조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인류 평등과 사회 개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911년 중국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인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중화민국을 세우고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고부터 난징(南京)은 당시 중국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잘 사는 도시로 발전한다.


중화민국은 동양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자유와 혁명의 도시로 거듭난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반일 시위인 5·4 운동이 베이징(北京 북경)에서 일어나고

당시 난징 시민들도 상점과 학교 등을 휴업하고 일제히 시위에 동참하였다.


그 후 난징은 1928년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30만 명이 살해되는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 이후 난징 시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절대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3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충칭으로 후퇴하고

난징은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친일정부를 조직하여

괴뢰정권의 주석으로 취임한 후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후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는 왕징웨이 정권으로부터 수도 난징을 다시 수복하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서, 난징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추방되거나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심하게는 이곳 난징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가 크게 불에 타서 없어지거나

친일파들과 일본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공산당은 이 도시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여파로 난징은 중국 국민당의 중심인 국민정부 수도였던 시절에 비해서

너무나도 초라한 도시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난징은 찬란한 대도시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이름에 걸맞지 않은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고

1953년 장쑤성(江蘇省 강소성)의 성립과 함께 그 성도가 되었다.  


타이완 섬에 있는 중화민국 정부는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난징의 지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은

중화민국의 국민들을 크게 화나게 할 일이라고 경고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난징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덩샤오핑(鄧小平 )이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예전 못지않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정부는 난징을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농업과 공업과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개혁 개방의 영향을 받아서 난징은 1994년 부성급시로 승격되었다.

'오경(吳京)'은 지금도 난징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난징이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난징(南京)은 말 그대로 '남쪽의 수도' 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 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베이징(北京, 북경)은 북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북경'(베이징)과 '남경'(난징), '장안-서경'(시안)은

중국 내륙에 있는 낙양(洛陽 뤄양)을 중심으로 방향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삼국 시대이래로 난징은 전략적으로 지리적인 위치와 편리한 교통 때문에

방직과 조폐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나라 때 난징은 산업이 더욱 확장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방직과 조폐, 인쇄와 조선 등 많은 다른 산업들은

난징을 극동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업무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20세기의 첫 50년간 난징이 잠시 동안 중국의 정치 중심지의 지위를 회복하자

부유층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을 생산 중심에서 대량 소비도시로 점차 변모시켰다.

중양상창(中央商場)과 같은 거대한 백화점이 많이 생겨났고

중국 전역의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1933년에는 식품과 오락 산업에서 발생한 세입이 농업과 제조업에서의 산출량 합계를 초과하였다.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였고

마약과 도박과 살인 등의 불법 행위도 또한 크게 성행하였다.


195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빠른 산업화를 위한 국가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소유의 중공업을 세우기 위해 난징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전기, 기계, 화학, 철강 공장 및 회사 본사들이 연이어 세워졌고

동아시아 중공업 생산 기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산업 도시를 건설하려는 난징 지도자들의 지나친 열정은

석탄이 없는 광산에 수백만 위안을 투자하는 등의 재앙적인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난징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다행히도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 개방의 영향을 크게 받아 난징은 거대한 도시로 다시 발전하고 있다.


도시 지역의 현재 산업은 1960년대의 특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전력 산업이 5개의 기둥 산업을 이룬다.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으로 판다 전자, 진청 자동차, 난징 철강이 있다.

난징은 양쯔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웃 도시들과 외국인 투자를 놓고 경쟁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폭스바겐, 이베코, A.O 스미스, 샤프와 같은

수많은 유명 다국적 기업들의 지부들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로 이곳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과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600 여만 명이지만 점차 많아지고 있고

난징 종합대개발의 목표는 2000만 명으로 잡고 있다.


중화문(中華門 종후아먼)


중화문(中華門)은 난징시에 있는 거대한 성문이자, 문화 유산이다.

명대(明代)에 있었던 13개의 성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이다.


문의 길이가 남북으로 128m, 동서폭이 118.5m, 총면적이 15,168㎡ 에 달한다.

외진회하(外秦淮河)와 내진회하(內秦淮河)의 사이에 있다.


중국 대륙에서 현존하는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성보식(城堡式 : 작은성) 옹성(甕城)이며, 세계적으로도 구조가 가장 복잡한 옹성(甕城)이다.


중화문(中華門)은 명나라 때 취보문(聚寶門)이라 불렸다. 

명나라 홍무 2년부터 8년(1369~1375)까지 축성되었고, 1931년 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체 성벽은 136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1386년 완성된 총 길이 33,676m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중화문(中華門)은 고대에 방어를 위한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인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걸맞게 3중의 옹성(甕城)이 있고 4개의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높이는 21.45m이며 성루 옆으로 말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마도(馬道)가 마련되어 있다.  

또 문마다 양 쪽으로 여닫는 목조성문과 상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폐쇄(閉鎖)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이다.


성문 옹성에는 상, 하 총 27개의 장병동(藏兵洞)이 있다.

평소에는 식량을 저장했고,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제작하거나, 병사를 숨기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중화문의 장병동은 창이 없는 터널식으로 그 깊이가 상당하다.

3,000명의 병사가 숨을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이디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군의 최대 5배 되는 적군을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난징성에는 13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淸凉門), 화평문 네 개 뿐이다.


중화문 안쪽에는 내진회하(內秦淮河)를 가로지르는 진회교(鎮淮橋)가 있는데,

이 다리는 남당(南唐)이래 1000년 동안 가장 번화했던 중화로(中華路)로 연결되며,

중화문 밖에는 장간교(長幹橋)가 있어 우화로(雨花路)로 연결된다.


중화문은 남당의 도성 남문유적에 다시 지은 성문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성문 아래에 강남 최고 부호였던 심만삼(沈萬三)의 취보분(聚寶盆)을 묻어

취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중화문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931년에 얻은 것이다.


중화문(中華門)의 모형도


종후와먼(中華門)은 4중의 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도시 방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벽이었고,

성벽 중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옹성을 쌓는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종후와먼(中華門)의 4중 성문 체계는 그 중 가장 뛰어난 편일 것 같다.

설사 적군이 가장 바깥의 성문을 파괴하고 내부로 진입한다 해도,

여전히 부숴야할 성문 3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문에는 천근갑(千斤閘)이라는 철문이 내려와 퇴로를 봉쇄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성문 지하에는 기습부대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성문 곳곳에 기습부대가 튀어나올 수 있는 문이 있었다.

5배의 적군도 거뜬히 방어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중화문(中華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글씨


옹성(甕城)


중화문은 처음에는 취보문이라고 불렀는데

모양새가 도자기 단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옹성이라고도 불렀다.


세 개의 옹성에다 네 개의 권문이 관통하고 있었다.

기묘한 설계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군사적 고려 때문이라고 한다.


적이 바깥쪽 문을 뚫고 들어오면 문과 문 사이에 있는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천근 갑문을 내려

27개 장병동에 숨어 있던 삼천여 명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적군을 섬멸했다고 한다.


옛날 전쟁의 승패는 성벽과 성문을 얼마나 잘 방어하는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천근 갑문은 없어졌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원래 13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화문 한서문 청량문 화평문 등 4개가 남아 있다.

철옹성(鐵甕城) 천근갑(千斤閘) 문의 흔적


천근갑(千斤閘) 문이 끼어 있던 흔적(사진 왼쪽)만 깊게 패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마다 상하로 열 수 있는 천근갑(千斤閘) 문이 달려 있어 완전히 닫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즉 적이 성문을 파괴하고 진입해도 천근갑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닫히면 

적을 가두고 퇴로를 차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천근갑은 명나라 초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방성기구이다.

나무로 만든 문에 철판을 덧대어 만드는데 무게가 천근이라고 하여 천근갑이라 부른다.


중화문의 천근갑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근갑을 고정했던 홈의 크기로 옛 모습을 추정해볼 따름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천근갑은 북경 정양문(正陽門) 전루(箭樓)에 있는 것으로,

폭 6m, 높이 6.5m, 두께 6Cm로 그 무게는 1990kg이다.


천근갑은 그 이름과 무게 때문에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수당연의(隨唐演義)>를 보면 양림(楊林 : 수나라 개국공신)이 성문을 닫고

성안에 갇힌 군사들을 태워 죽이려 했을 때 대역사 웅활해(雄阔海)가 천근갑을 들어 올려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비록 웅활해 자신은 힘이 빠져 천근갑에 깔려죽었지만,

천근갑 덕에 웅활해는 더욱 유명해졌고, 천근갑은 ‘어려움’, ‘고난’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기도 했다.


 “천근갑과 마주치다(遭遇千斤閘)”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뜻이며,

“개갑(開閘)”은 난제를 해결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


천근갑(千斤閘)이 설치되었던 홈에 천정



쑨원(孫文;손문 1866~1925)의 일생


쑨원은 오늘날의 중국 남부 광둥성 출신으로 홍콩에서 서의서원이라는 의학교에서 줄곧 수석을 했다고 전해지는 당대 수재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당시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한 사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중국인으로부터 친일파로 매도되지는 않았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보다도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중국어 정체: 孫德明, 병음: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중국어 정체: 孫帝象, 병음: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중국어 정체: 載之, 병음: Zàizhī, 자이즈)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중국어: 日新, 병음: Rìxīn, 르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이라는 또다른 자(字)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Yat-sen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 여 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袁世凱:원세계)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 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 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고,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 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당소의(唐紹儀, táng shào yí), 오정방(伍廷芳, wǔ tíng fāng) , 당계요(唐繼堯;탕지야오)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 성 군벌 진형명(陳炯明, chén jiǒng míng)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 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을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 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Voitinsky)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 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양쯔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 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 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 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 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 · 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馮玉祥:풍옥상, 1882~1948), 돤치루이,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대계도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 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민중에 호소해 궐시키기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해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는 아직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동지들은 필히 내가 쓴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따라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달라. ”


이는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1883~1944)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宋慶齡 송미령)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쑹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 ”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쑨원은 청년 시절부터 쑹자수(宋嘉樹), 여우례(尤列), 양허링(楊鶴齡), 루하오둥(陸皓東),

관징량(關景良), 천사오보(陳少白)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친구이자 흥중회 동지인 루하오둥은 1895년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집행되었고

친구이자 장인인 쑹자수는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되었는데 쑨원이 쑹자수의 차녀인 쑹칭링과 재혼하였기 때문에

쑹자수가 쑨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옛 일본인 첩실 오쓰키 가오루(大月 薰)의 딸 미야가와 후미코(宮川 富美子)에게는 친아버지가 되나

생전에 쑨원이 친권을 포기하였고 후미코가 나중에 일본을 떠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이미 죽은 쑨원과 그가 남긴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며 쑨원을 정신적 지주로 섬겼다.


명효릉에서 이런 차를 타고 중산릉으로 이동


박애(博愛)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중산릉(中山陵)


쑨원이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 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능문(陵門)과 천하위공(天下爲公)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陵門)


천하위공(天下爲公)


손문이 직접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네 글자가 현판에 쓰여 있다.

서양식 디자인이 가미된 문루 위에는 푸른색 유리기와가 얹혀 있다.

푸른색은 창천(蒼天)을 상징하며 푸른색 기와는 “천하위공(天下爲公 : 조금도 사적인 것이 없다.)”을 뜻한다고 한다.


비정(碑亭)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넓이 12m, 높이 17m의 방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높이 8.1m, 폭 4m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당시의 국민당정부 주석이자 국민당 4대 명필의 한 사람이었던 단연개(譚延闓)선생이

“중국국민당 총리 손선생 여기에 묻히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라고 쓴 비문이 적혀있다.


손문이 사망할 당시 그는 대총통의 지위를 원세개에게 양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총통’이 아닌 ‘손선생’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


후에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축출하고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 주관으로 세운 이런 기념비를 그대로 남기고 기리는 것은 승자가 가지는 아량의 표현일 것.


한편 쑨원 선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을 뛰어 넘을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계단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祭堂)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글씨를 쓴 이는 당시 국민당 원로였던 장정강이라고 한다.


천지정기(天地正氣) 쑨원의 친필


쑨원의 좌상


쑨원의 관


제당(祭堂)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墓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蔣介石 ; 장개석)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 송경령)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그녀의 친동생이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 송미령)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났던 것이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2016년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손문의 좌상은 프랑스 조각가인 폴 랜도우스키(Paul Randowsky) 의 작품.


한백옥(漢白玉)이라는 돌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백옥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고급 옥돌인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지에서 수입한 최고급 대리석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쑨원 (孫文 손문 1866~1925)


 쑨원의 부인 쑹칭링 (宋慶齡 송경령 1892~1981)


장제스 (蔣介石 장개석 1887~1975)


쑨원의 처제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宋美齡 송미령 1897~2003)


제당 양쪽으로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돌기둥 2개가 대칭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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