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부자묘 가이드 보기


천하문추(天下文樞) 패방


부자묘(夫子庙) 앞 광장에 진회하(秦淮河)로 조성한 반지(泮池)를 사이에 두고 

용으로 장식된 조벽(照壁)과 마주하고 있다.



영성문(靈星門)


3좌의 문이 있는 석재패방이다.

문들 사이에는 두 곳의 담장이 있는데, 그 위에는 모란모양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중간 석방 위에는 전서로 영성문(欞星門)이라 쓰여 있으며,

기둥 위에는 구름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다.


반지 앞의 천하문추(天下文樞)패방과 대응을 이루고 있다.

영성문은 천하문추 패방과 함께 제왕들이 공자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문이었다.

가운데 문은 황제 전용이었고, 좌우의 문은 친왕(親王)들과 군왕(郡王)들이 사용했다.


일반 관원들과 백성들은 원칙적으로 영성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자 평소에는 영성문을 나무로 막아두었다고 한다.

영성문은 묘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식용 건축물이다.



부자묘(夫子庙 푸쯔먀오)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의 친화이허풍치지구[秦淮河风景区]에 위치한 사당이다.

부자묘는 공자묘 또는 문선왕묘라고 하여 고대 공자(551-479 B. C.)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푸쯔먀오[夫子庙]. 현지인들은 쿵먀오[孔庙]라고도 한다.

중국 역사상 북경과 남경에서 과거를 보았고 또 유학의 중심지가 있었으므로

이 곳은 명실공히 남방유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 부자묘는 송나라 인종 원년 즉 1034년에 지어졌으나, 청 말에 화재를 당하여 1869년 다시 지었고,

일본과의 전쟁 중 불탔던 것을 1984년, 시 구 인민정부가 고도(古都)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역사 전문가들을 재건 작업에 참여시켜 다시 지었으니 오늘의 부자묘는 새로운 모습이다.


이후 현재까지 약 8,0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1991년 중국 40대 여행 성지 중 하나로 지정된 바 있다.


고대에 학당을 지으려면 반드시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래서 각지의 공자사당은 국가 제례의 일부로 종속되고는 했다.


사당은 학궁(學宮)의 앞이나 옆에 위치했다.

남경 부자묘는 사당이 앞에 있고, 학당이 뒤에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남경의 부자묘는 공묘, 학궁, 공원(貢院 : 고사실)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 공묘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격식이었다고 한다.


부자묘 주변 지역은 모든 건물이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난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앞을 흐르는 진회하(秦淮河)와 야시장이 그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음력 5월 초에는 보름에 걸쳐 ‘금릉등회’라는 행사가 열려 거리가 등불로 장식되고,

시민들은 금릉서화와 무술기공, 민간공예, 전통 풍속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한다.

부자묘 주변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해 언제든지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조박초(趙樸初 : 자오푸추 1907~2000)


'부자묘(夫子庙)' 글씨를 쓴 조박초(趙樸初 )는 중국불교협회회장이면서,

동시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정치적 거물이었다.


더구나 최근 눈부신 발전 가도에 있는 대륙의 불교 현황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조망하는데

조박초의 역할이 기초가 될 것이다.


격동의 시대, 특히 종교는 아편이라고 외치는 공산당이 통치하던 중국 대륙에서

전전긍긍하던 불교의 불씨를 보존하여 오늘날 화려한 불교의 부활로 이끌어 주었던 인물이 바로 조박초였다.


조박초는 9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니, 중국 역사에 있어 청(淸)나라,

격동의 중화민국, 현재의 중국이라는 격동의 3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석사자가 지키는 대성문(大成門)


명, 청시기에 대성문은 모두 다섯 칸이었다.

좌우에는 이방(耳房 : 정전 옆의 부속건물)이 있어 일꾼들의 책임자가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가운데 문 안쪽에는 극(戟 : 창), 북(鼓), 경(磬 : 쇠종)을 두었고,

제사를 지내는 인원들과 현의 관원들은 가운데 문을 사용했고, 선비들과 일꾼들은 그 옆의 문을 사용했다.


명, 청시기에 만들어진 대성문은 일본군에게 파괴되었고,

지금의 것은 1986년 3칸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문 내부의 정중앙에는 한백옥으로 만든 병풍이 있고, 그 위에는 부자묘를 수리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공자문례도비(孔子問禮圖碑)를 비롯한 네 개의 비석이 있다.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대성문(大成門)을 들어서자마자 대성전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조벽(照壁)


예(禮)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왼쪽


인(仁)  남경부자묘(南京夫子庙) 조벽(照壁) 오른쪽



대성전(大成殿)


부자묘(夫子庙)의 핵심 명소이다.

중국 고대 저명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孔子)를 모시는 묘당으로, 전면에 절이 있고 뒤편에 쉐궁[学宫]이 위치한다.


대성전 앞 중앙에 공자의 동상이 있고, 그 옆으로 한백옥으로 만든 12제자상들이 있다.

공자상은 1993년 1월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4.18m, 무게는 2.5톤으로 전국 공묘에 있는 공자상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건물 앞에는 널찍한 노대(露台)가 있고, 노대 주위로는 돌로 된 난간이 있다.

노대는 고대에 제사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대성전 양 측에는 30여 개의 비석이 있는 비랑(碑廊)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6.5m로 전국에서 최대 규모인 공자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양쪽에는 한백옥(汉白玉)으로 제작된 쓰야성옌후이[四亚圣颜回], 증삼(曾参), 공급(孔伋, 공자의 손자),

맹가(孟軻, 맹자(孟子)의 본명)의 조상(雕像)이 있다.

주변의 벽 위에는 공자 생전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38폭의 벽화가 걸려 있다.


대성전(大成殿) 앞 공자(孔子)상



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 초상화


공자 초상화 중에서는 전국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부자묘의 주체 건축물이다.


청 동치8년 (1869년)에 건설되었으나, 1937년 일본군의 남경 침략 때 파괴되었고,

1984년이 되어 최초 제작 당시의 설계도에 따라 다시 복원한 것이다.


재건 시 뒤쪽의 벽을 허물어 학궁과 하나로 병합하였다.

기좌의 높이는 1.5m이고, 건물 자체의 높이는 16.22m, 넓이는 28.1m이다.


7칸으로 되어 있고, 헐산식(歇山式) 지붕을 얹었다.

“대성지성선사공자의신위(大成至聖先師孔子之神位)”라 쓰여진 공자의 위패와 네 제자들의 위패가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큰 공자의 초상화가 전 중앙에 걸려있다.


그 크기는 높이가 6.5m이고, 넓이가 3.15m이다.

전 내부의 벽면에는 돌로 만든 38폭의 <공자성적도(孔子聖跡圖)>가 있다.

옥석과 계혈동(鷄血凍), 수산석(壽山石) 등 진귀한 석재와 금, 보석들을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중화위육(中和位育)

중화를 지극하게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생육된다. <중용(中庸)>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


부자묘가 처음부터 공자사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동진(東晉)의 학궁(學宮)이었던 것을 확장해서 공묘로 만든 것이다.


사마예(司馬睿)는 서진(西晉)말기,

세 명의 황제를 보필한 바 있는 대신 왕도(王導)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진(東晉)을 세웠다.


제위에 오른 사마예는 무신인 대막(戴邈)의 상소를 받아들여 태학(太學)을 세웠는데,

이것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사마예는 인재육성에 뜻을 두어 곧 왕도에게 명하여 진회하 부근에 태학을 세우게 하였고,

이 태학을 “동남제일학(東南第一學)”이라 불렀다.


동남제일학은 원나라 때는 집경노학(集慶路學), 명대에는 응천부학(應天府學)이었고,

청대에는 두 현(縣)의 교육을 담당하는 장부학(將府學)이었다.

당나라 이후부터는 태학을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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