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성(石頭城)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중산문(中山門) 밖 청량산(淸凉山). 석성(石城)이라고도 한다.

건안(建安) 16년(211) 건업(建業)으로 천도한 손권은 다음 해에 청량산에 있는 초(楚)나라 금릉읍(金陵邑) 옛터에 석두성을 쌓았다.


산을 등진 그 성은 둘레가 3km나 되었다.

성 남쪽에는 두 개, 동쪽에는 한 개의 문을 달았다.


그러나 서북쪽에는 대강(大江)과 가까이 접해 있어서 문을 달지 않았다.

석두성은 지세가 험요하여 도성을 보위하는 중요한 성곽이었기 때문에 동오의 수군 본부가 되었고

성안에는 병기와 군량을 저장하는 석두창(石頭倉) · 석두고(石頭庫) 등이 있었다.


성 위 가장 높은 곳에는 봉화대를 쌓았는데

동오 봉화의 총지휘부인 이 봉화에 한번 불을 붙이면 반나절 안에 온 장강 연안에 전달되었다.


석두성은 장강 최대의 항구여서 항상 1,000여 척의 배들이 정박했다.

280년 서진(西晉)의 대장 왕준의 전선이 석두성 아래 이르자, 동오의 손호가 투항했다.


후에 강의 물길이 10km가량 서쪽으로 이동되는 바람에 석두성은 군사적 가치를 상실해 폐기되고 말았다.

 현재는 높이 1m에서 17m나 되는 돌담들이 남아 있다.


청량산공원(淸凉山公園)으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淸凉寺) · 숭정서원(崇正書院) · 소엽루(掃葉樓) 등 명 · 청대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두성(石頭城) / 유우석(劉禹錫)


山圍故國周遭在(산위고국주조재)
산은 (삼국시대 오나라 이래) 옛 성을 감싸고 주변은 그대로인데
潮打空城寂莫回(조타공성적막회)
조수(양즈강 조수)는 빈(인기척 없는) 성을 때리고 적막하게 되돌아온다.

淮水東邊舊時月(회수동변구시월)
회수의 동쪽 강변에는 옛(옛날 그대로) 달이 떠오르고
夜深還過女牆來(야심환과여장래)
밤이 깊어지자 다시 낮은 담장을 넘어오는구나


故國 : 옛 서울. 金陵

周遭 : 순회함

女牆 : 얕은 울타리

'石頭城'은 삼국시대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축성한 성으로서 남경성(南京城) 근방, 양즈강 강변에 있다.

이 시도 회고의 작품. 백락천(白樂天)은 이 시를 일컬어 "후대의 시인은 더 붓을 댈 데가 없다"고 격찬하였다.


劉禹錫(유우석, 772~842)


자는 몽득(夢得)이고 팽성(彭城, 江蘇省 徐州) 사람이다.

그는 정원(貞元) 9년에 유종원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유종원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정치개혁에 참가하였으나 왕숙문이 실각하자 좌천되었다.

후에 연주(連州)와 화주(和州)의 자사를 지냈고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까지 올랐다.


전기에는 유종원과 가까이 지냈고, 또 만년에는 낙야(洛陽)에서 백거이와 친하게 지내며 시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는 풍격이 통속하면서도 청신하고 민가(民歌)의 정조(情調)와 언어를 잘 이용하였다.


 유우석이 활동했던 8세기 당대는 귀족정치의 절정의 시기였다.

유우석은 반대파의 배척으로 계속 지방으로 좌천되어 뜻을 펼치지 못하다가

연주(連州), 기주(夔州), 화주(和州) 자사를 거쳐 23년간에 걸친 귀양에서 풀려난다.


826년 55세 때 화주 자사를 끝으로 낙양에 가는 중 금릉(金陵)을 유람하고 나서 ‘금릉오제(金陵五題)’를 썼다.

유우석은 귀양지에서 시를 창작할 수 있는 많은 여가와 환경이 주어진 덕분에 풍자시와 산수시, 회고시를 많이 써냈다.


‘오의항(烏衣巷)’ 은 금릉의 화려했던 시절 귀족들이 모여 살던 오의항을 그리며

귀족 집에 깃들어 살던 제비조차도 귀족의 자취를 잃어 일반 민가에 날아들어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오의항은 오나라 손권의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주둔 했던 곳이라

동진시대 귀족들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자제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검은 옷을 의미하는 오의(烏衣)는 특수층의 자제임을 알리는 것이다. 항(巷)은 골목의 의미를 지닌다.




1975년 4월 23일 중국을 방문 중인 김일성이 등소평 등과 함께 석두성을 관람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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