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원(瞻園) 부자묘(夫子庙)로 향해 가는 길에  금릉제일원 첨원(瞻園)이 있다.


국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동남쪽에 있는 명나라 때의 원림(園林).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9 중 다섯번째인 남경 (南京) 첨원(瞻園)은 하늘을 우러르는 고도의 정원이다. 


첨원(瞻園)


6백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첨원은 최초에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왕부였는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나서 개국공신이며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진 서달(徐達)에게 하사한 관저 화원이다.


청나라가 들어선 뒤 속국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바뀌었다가

건륭제(乾隆帝)가 남순(南巡)할 때 잔위안[瞻園]으로 명칭도 바꾸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양수청(楊秀淸)의 관부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잔위안은 1960년 중국의 현대 건축가 류둔전[劉敦楨]이 주관하여 재건한 것으로,

청대(淸代)의 풍격을 기본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산과 돌로 주요 풍경을 이루고 물로써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도록 조성한 정원으로서

중국 고전원림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면적은 5280㎡이며, 주 건물은 정묘당(静妙堂)이다.

정묘당 남북으로 조성한 호수에는 각각 태호석(太湖石)으로 가산(假山)을 축조하였다.


남쪽의 가산은 새로 축조하였고, 북쪽의 가산은 명나라 때부터 있던 것을 토대로 보존한 것이다.

정원의 서쪽에는 흙산이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 정자와 부채꼴 정자가 있다.


정원의 동쪽에 있는 구불구불한 복도는 남북을 관통하는데,

북쪽 끝의 호수와 맞닿는 물가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묘당 동쪽의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는 오래된 등나무가 있는데,

10여m까지 드리우는 나무그늘로 잔위안의 명소가 되었다.


이밖에 잔위안 동남쪽에 화축청(花竺廳)과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새로 조성한 풍경지구(風景地區)가 있다.




서달(徐達 1332~ 1385)  글 : 명사((明史) 권 125 ㅡ 열전(列傳) 제13 서달(徐達)


서달(徐達)은 자가 천덕(天德)이요, 호(濠)주 사람인데, 대대로 농사를 지어 살았다.

달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고, 키가 크고 광대뼈가 높으며, 뜻이 굳세고 무용(武勇)이 있었다.


태조가 곽자흥(郭子興)의 부수(部帥)가 되었을 때, 이 때 서달의 나이 22세였는데,

그에게로 가서 따르니 한번 만나보고 서로 말이 합치되었다.


태조가 남쪽으로 정원(定遠)을 공략할 때, 24명을 거느리고 갔는데,

서달이 앞장서서 함께 갔다.


얼마후 따라가 저주(滁州) 사이에서 원병을 파하고, 종군하여 화주(和州)를 취하니,

곽자흥이 서달에게 진무(鎮撫)를 제수하였다.


곽자흥이 손덕애(孫德崖)를 붙잡았는데, 손덕애의 군대 또한 태조를 붙잡으니,

서달이 자신이 앞장서 손덕애 군대로 가서 태조를 대신할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에 돌아올 수 있었고, 서달 또한 붙잡힘을 면하게 되었다.


장강을 건널 때 따라가서, 채석(采石)을 함락하고 태평(太平)을 취하니,

상우춘(常遇春)과 함께 같이 군봉관(軍鋒冠)이 되었다.


종군하여 원의 장수 진야선(陳埜先)을 격파하여 사로잡고, 따로 병사를 거느리고,

율양(溧陽)과 율수(溧水)를 취하고, 집경(集慶)을 함락시키는데 따라갔다.


태조 자신이 거수(居守)하면서, 서달에게 명하여 대장으로 삼아,

제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진강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영을 내리는 것이 분명하고 엄숙하니, 성중이 안정되었다.

회흥익통군원수(淮興翼統軍元帥)를 제수하였다.


이 때 장사성(張士誠)이 이미 상주(常州)를 점거하고서는,
강동(江東)의 반장(叛將) 진보이(陳保二)를 끼고서 수군(舟師)으로 진강을 공격해왔다.

서달이 용담(龍潭)에서 이를 패배시키고, 마침내 군대를 더 줄 것을 청하여 상주를 포위했다.
장사성이 장수를 파견해 와서 구원했다.

서달은 적군이 교활한데다 예봉이라, 쉽게 힘으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성을 떠나 두군데 복병을 두고 기다리면서,
따로 장수 왕균용(王均用)을 보내 이를 기병(奇兵)으로 삼고, 자신은 군대를 독전했다.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다 복병을 만나니, 대패하였고,
장(張)과 탕(湯)의 두 장수를 붙잡고 진격하여 상주를 포위했다. 다음해 이를 함락시켰다.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로 승진했다.
이어 영국(寧國)을 함락하고 의흥(宜興)을 복종시켰고,
전봉(前鋒) 조덕승(趙德勝)을 시켜 상숙(常熟)을 함락시켜 장사성의 아우 장사덕(士德)을 사로잡았다.

다음해 다시 의흥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태조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婺州)를 공격했는데, 서달에게 명하여 응천(應天)에 남아 수비하게 하면서,
따로 병사를 보내 천완(天完 = 수휘(壽輝)가 기수(蘄水)에 세운 나라)의 장수인 조보승(趙普勝)을 기습하여 격파하였다.

지주(池州)를 회복하였다.
승진하여 봉국상장군(奉國上將軍),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진격하여 안경(安慶)을 공격하였는데, 스스로 뭍으로는 행군하지 않고, 밤에 산채(山寨)로 떠서 엄습하니,
조보승의 부장(部將)을 청산(青山)에서 파하고, 마침내 잠산(潛山)을 항복시켰다.

돌아오며서 지주를 진무하면서 상우춘과 함께 복병을 두어, 진우량의 군대를 구화산(九華山) 아래에서 패배시키니,
목을 벤 것이 1만 명이요 사로잡은 자가 3천 명이었다.

상우춘이 말하길 "이들은 강한 군대라서,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 했다.
서달은 불가하다고 하여, 이에 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상우춘이 먼저 밤에 묻어 죽인 것이 반수를 넘었으나, 태조가 좋아하지 않으니,
마침내 그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비로소 서달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다 감호하도록 하였다.
진우량이 용강(龍江)을 침범하였는데, 서달은 남문 밖에 진치고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과 힘을 다해 싸워
적군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자호(慈湖)까지 이르러, 그들의 군선을 불태웠다.

다음해 종군하여 한(漢)을 정벌하고 강주(江州)를 취하였다.
진우량이 무창(武昌)으로 달아나니, 서달이 그를 추격하였다.

진우량이 면양(沔陽)에 전함을 내어 출전하니, 서달은 한양(漢陽)의 둔구(沌口)에 군영을 두고 이를 저지하였다.
중서우승(中書右丞)으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 태조가 남창(南昌)을 평정하였는데, 항복한 장수인 축종(祝宗), 강태(康泰)가 반(叛)하였다.
서달이 둔구의 병력으로 이들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종군하여 안풍(安豐)을 구원하고, 오(吳)의 장수인 여진(呂珍)을 격파하여 마침내 노주(廬州)를 포위하였다.

한(漢)인들이 남창을 노략질하자, 태조가 서달을 불러 노주로부터 가면서 군사를 집결시키게 하였는데,
파양호(鄱陽湖)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진우량의 군대가 매우 성세하였는데, 서달이 몸도 여러 장수들에 앞서 힘써 싸워,
그 선봉을 패배시고 1천5백명을 죽이고, 큰 함선을 한척을 노획했다.

태조가 적을 가히 깰 수 있음을 알고서는, 장사성이 내부를 침범하리라 생각하여, 바로 밤에 서달을 보내 돌아가
응천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격렬하게 싸우니, 마침내 진우량을 죽게 하였다.

다음해 태조가 오왕(吳王)을 칭하고, 서달을 좌상국(左相國)으로 삼았다.
다시 병사를 이끌고 노주를 포휘하여 그 성을 함락시켰다.

강릉(江陵), 진주(辰州), 위주(衡州), 보경(寶慶)의 여러 로(路)와 호상평(湖湘平)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소환되어, 상우춘 등을 거느리고 회동(淮東)을 돌며 태주(泰州)를 함락시켰다.
오나라 사람들이 의흥을 함락시키자, 서달이 다시 이를 구원하여 회복시켰다.

다시 병력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가, 고우(高郵)를 함락시키고, 오의 장수와 군사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상우춘을 만나 회안(淮安)을 공격하여, 마라항(馬騾港)에서 오군을 파하니,
수장(守將) 매사조(梅思祖)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격하여 안풍(安豐)을 공격하여 원의 장수 흔도(忻都)를 사로잡고,
좌군필(左君弼)을 패주시켜서, 그들의 운송선박을 모두 다 얻었다.

원의 병사들이 서주(徐州)를 침고하미 맞서 싸워 이를 대파하여,
붙잡거나 참수한 것이 만 단위로 헤아렸다. 회남과 회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군대가 귀환하자, 태조는 오(吳)를 정벌하는 일을 의논했다.
우상국(右相國) 이선장(李善長)은 이를 늦추자고 청하였다.

이달이 말하길 "장씨는 사치한데다 가혹하고, 대장인 이백승(李伯昇)의 무리들은 자녀와 옥백을 끼고 있으니,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부리는 자들은 황(黃), 채(蔡), 섭(葉) 3명의 참군(參軍)인데, 이들은 서생이라 대계(大計)를 모릅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서달을 대장군으로 배하고, 평장(平章) 상우춘을 부장군(副將軍)으로 삼아,
수군 20만명을 건리고 호주(湖州)에 로 나갔다.

적이 세 길로 출전하니, 서달 또한 3군으로 나눠 대응케 하면서, 따로 병사를 보내 그 귀로(歸路)를 장악하게 했다.
적들이 전투에 패배하여 돌이켜 달아났지만, 성을 들어갈 수 없었다.

아와 싸워, 이들을 대파하고, 장수와 관리 2백인을 붙잡고 그 성을 포위했다.
장사성이 여진(呂珍) 등을 보내 병사 6만명으로 달려가 구원케 하여,
옛 관아에 주둔하며 다섯 군데 목책을 쌓아 스스로 굳건하게 했다.

서달은 상우춘 등을 시켜 10개의 보루를 쌓아 이를 막게 했다.
장사성이 직접 정병을 거느리고 내원하여 오니, 조림(皂林)에서 이를 대파했다.

장사성은 달아나니. 마침내 승산(昇山)의 수륙채(水陸寨)를 모두 파했다.
다섯 태자와 주섬(朱暹), 여진(呂珍) 등이 모두 항복하여, 성 아래에서 복종하니, 호주가 항복하였다.

마침내 오의 강주(江州)를 함락하고, 태호로부터 진격하여 평강(平江)을 포위했다.
서달은 봉문(葑門)에 진치고,상우춘은 호구(虎丘), 곽자흥은 누문(婁門), 화운룡(華雲龍) 서문(胥門),
탕화(湯和)는 창문(閶門), 왕필(王弼)은 반문(盤門), 장온(張溫)은 서문(西門), 강무재(康茂才)는 북문(北門),
경병문(耿炳文)은 성의 동북, 구성(仇成)은 성의 서남에, 하문휘(何文輝)는 성의 서북에 진치며,
긴 포위망을 쌓아 적을 곤궁케하였다.

목탑(木塔)을 성중의 부도(浮屠) 등과 함께 얽어 매었다.
따로 누대를 3군데 쌓아 완성하여, 성중을 감시하면서, 궁노(弓弩)과 화통(火筒)을 두었다.

대(臺) 위에는 또한 큰 석포(巨礮)를 두어, 공격할 때마다 번번이 부수었다.
성중이 크게 놀라니, 서달이 사신을 보내 일의 처리에 관하여 청하자, 태조가 칙하여 위로하길
"장군의 지모와 용맹은 절륜(絕倫)하여 능히 난리와 약탈을 막고, 군웅들을 없앨 수 있소.
지금의 일에 꼭 명을 받을려고 하는 것은, 이는 장군의 충성심 때문이니, 내가 무척 기쁘오.
그러나 장차 외부의 일에 관해서는, 내가 제어하지 않으리다.
군중의 완급(緩急)은 장군이 편의대로 행하지, 나는 관여하여 제어하지 않겠소." 라 했다.

평강이 파해지고 나서, 장사성을 사로잡아 이를 응천을 보내고, 뛰어난 병사 25만명을 얻었다.
성이 장차 파해지려 할 때, 서달이 상우춘과 함께 약속하길
"군대가 입성하면, 나는 왼편에 군영을 둘테니, 공은 우편에 두시오"라 했다.

또 장사(將士)들에게 영을 내리길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백성들의 집를 훼손하는 자 또한 사형에 처하며, 군영에서 20리를 벗어나는 자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이윽고 입성하니, 오의 백성들은 예전처럼 편안하였다. 군대가 돌아오자, 그를 신국공(信國公)에 봉한다.

얼마후 서달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에 배하고 상우춘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25만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취하게 하고, 태조는 친히 용강(龍江)에서 마제(禡祭)를 지냈다.

이 때 명장이라 칭하면 반드시 서달과 상우춘을 추천하였다.
두 사람은 재주와 용맹이 서로 비슷해, 모두 태조가 빼어나고 중하게 여겼다.

상우춘은 빠르고 신속하여 과감히 깊숙히 들어가고, 서달은 또한 모략에 뛰어났다.
상우춘은 성읍을 함락시키면 능히 주륙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서달은 가는 곳마다 동요지 않고,
장사(壯士)를 붙잡으면 편안케 해주어 은의(恩義)로 맺으니, 자기를 위해 기용했다.

이 때문에, 많은 자들이 즐거이 대장군에 귀부하였다.
이에 이르러,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유시함에 군대를 거느릴 때는 기율을 중하게 중요하게 지니고
전투에 이겨 공취(攻取)하는 것은 장수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되, 대장군인 서달처럼 하라고 했다.

또한 서달에게 이르길 진군하여 경략함에 산동(山東)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좋을 것이라 했다.
군대가 행군하자, 기주(沂州)를 함락하고, 수비장인 왕선(王宣)을 항복시켰다.

진격하여 역주(嶧州)를 함락했는데, 왕선(王宣)이 다시 반(叛)하자, 그를 쳐서 참하였다.
거(莒)주, 밀주(密), 해주(海)의 여러 주들이 모두 항복했다.

이에 한정(韓政)을 시켜 군대를 나눠 하수를 장악하게 하고, 장흥조(張興祖)에겐 동평(東平), 제녕(濟寧)을 취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익도(益都)을 함락하고, 유(濰), 교(膠)의 여러 주현을 순행하며 항복시켰다.
제남(濟南)이 항복하자, 병사를 나눠 등주(登), 내주(萊)를 취하였다. 제나라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태조가 제위에 오르고, 서달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삼았다.
황태자를 책립(冊立)함에, 서달에게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하게 했다.

부장군(副將軍) 상우춘이 동창(東昌)을 함락하니, 제남(濟南)에서 군대를 집결하여,
낙안(樂安)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쳐서 참수했다.

돌아와 제녕(濟寧)이 진치면서, 수군을 끌고 하수를 거슬러 올라, 변량(汴梁)을 급히 가니
수비장인 이극이(李克彝)가 달아나고, 좌군필(左君弼), 죽정(竹貞) 등은 항복했다.

마침내 호로관(虎牢關)에서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원의 장수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와
낙수(洛水) 북쪽에서 크게 싸우다 이를 파하고 패주시켰다.

양왕(梁王) 아로온(阿魯溫)이 하남을 들어 항복하니, 숭(嵩)주, 섬(陝)주, 진(陳)주, 여(汝)주의 여러 주를 공략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동관(潼關)에 모였다. 이사제(李思齊)가 봉상(鳳翔)으로 달아나고, 장사도(張思道)는 부성(鄜城)으로 달아나니,
마침내 입관(入關)하여 서쪽으로 화주(華州)에 이르렀다.

승첩을 보고하니, 태조가 변량으로 행차해서, 서달을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여,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면서 또한 북벌을 모의하였다.

서달이 말하길 "대군이 제와 노를 평정하고, 하수와 낙수를 쓸었는데, 왕보보(王保保)는 우물쭈물 멈칫하여 관망하고 있습니다.
동관은 이미 함락하였고, 이사제의 무리들은 낭패하여 서쪽으로 달았났습니다.
원의 응원군이 이미 끊어졌으니, 지금 승세를 타고 바로 원의 도성을 치다면 가히 싸우지 않고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황제가 "좋다"라 했다.
서달이 다시 진언하길 "원의 도성이 함락되고, 그 주인이 북으로 달아나면, 장차 늦추지 않고 끝까지 추격해야 합니까?" 라 물었다.

황제가 "원의 천운이 쇠락하였고, 그 운행이 절로 소멸하니, 번거롭게 끝까지 추격할 필요없소.
변새 밖으로 나간 이후로는, 굳건히 강역을 수비하여, 그 침범이 있는가 정도만 방비하면 되오"라 했다.

서달이 머리를 조아리면 황명을 받았다.
마침내 부장군의 하음(河陰)에서 군대를 합치고, 비장(裨將)을 보내 길을 나눠 하북의 땅을 순행하게 하니,
연달아 위휘(衞輝), 창덕(彰德), 광평(廣平)을 항복시켰다.

군대가 임청(臨清)에 머물면서, 부우덕(傅友德)을 시켜 육로(陸道)를 열어 보병과 기병을 통하게 하고,
고시(顧時)에겐 하수를 준설하여 수군을 통하게 하면서,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

상우춘은 이미 덕주(德州)을 함락하고, 병사를 합쳐 장로(長蘆)를 취하고 직고(直沽)를 장악하고는,
부교를 만들어 군대를 건너게 했다.

수륙으로 병진하여, 하서무(河西務)에서 원군을 대패시키고, 진격하여 통주(通州)를 함락했다.
원나라 순제(順帝)는 후비와 태자를 거느리고 북으로 갔다.

날이 지나자, 서달은 병사를 제화문(齊化門)에 진치고, 해자를 메워 성에 올랐다.
감국(監國) 유왕(淮王) 첨목아불화(帖木兒不花), 좌승상 경동(慶童), 평장(平章), 일아필실(迭兒必失),
박새인불화(朴賽因不花)  우승(右丞) 장강백(張康伯), 어사중승(御史中丞) 만천(滿川) 등은 항복하지 않으니, 참수했고,
그 나머지 한명도 살륙하지 않았다.

부고(府庫)를 봉하며, 도서와 보물을 문서에 기록하고, 지휘(指揮) 장승(張勝)에게 영을 내려
병사 1천명으로 궁의 전문(殿門)을 지키게 하였다. 

환자(宦者)에겐 여러 궁인과 비(妃) 주(主)를 감호하여 살피게 하였고, 사졸들에게 침범하여 난폭한 일이 없도록 금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은 편하게 지내었고, 시장에서는 함부로 제멋대로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승첩을 보고하자, 조를 내려 원의 도읍을 북평부(北平府)로 삼고, 육위(六衞)를 두며,
손흥조(孫興祖) 등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면서, 서달과 상우춘에게는 진격하여 서산(山西)을 취하도록 명을 내렸다.

승세를 타고 상우춘이 먼저 보정(保定), 중산(中山), 진정(真定)을 평정하고, 탕화(湯和)는 회경(懷慶)을 항복시키고,
태항(太行)을 지나 택(澤)과 로(潞)를 취하였고, 서달은 대군으로 이를 뒤이었다.

이때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 = 코케 케무르)가 병사를 이끌고 안문(雁門)을 넘었고,
장차 거용(居庸)으로부터 북평을 공격하려 하였다.

서달이 이를 듣고 여러 장수들과 모의하길
"확곽은 멀리서부터 나왔으니, 태원(太原)이 필히 비어있을 것이다.
북평에는 손도독이 있어, 족히 막아낼 수 있다.
지금 적들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바로 태원을 치면, 진격하여도 싸울 수 없고 물러나도 지킬 바가 없게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이 소위 (손빈이 말한) 비항도허(批亢擣虛) 인 것이다.
저들이 만약 서쪽으로 돌아와 자신을 구원코자 할 때면, 이 때 사로잡힌 신세가 될 뿐이다." 라 했다.

제장들이 모두 "좋습니다" 라 했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태원을 달려갔다.

확곽은 보안(保安)에 이르러서 과연 돌아와 구원하였다.
서달은 정병을 선발해 밤에 그 군영을 기습하였다.

확곽은 18기만 거느리고 달아났다.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키고, 마침내 태원을 함락했다.

승세를 타고 대동(大同)을 거둬 들였으며, 병사를 나눠 아직 항복하지 않은 주현을 순행하니,
서산이 모두 평정되었다.

홍무 2년,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하수를 건넜다. 녹
대(鹿臺)에 이르자, 장사도(張思道)는 달아나니, 마침내 봉원(奉元)을 함락했다.

이 때 상우춘은 봉상(鳳翔)을 함락했는데, 이사제(李思齊)는 임조(臨洮)로 달아나니,
서달은 제장들을 모아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모두 말하길 "장사도는 재주가 이사제만 못하고, 경양(慶陽)은 임조보다는 쉬우니,
청컨대 경양을 먼저 하십시오"라 했다.

서달이 말하길 "그렇지 않소. 경양성은 험하고 병사들은 정예이니, 갑작스레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임조는 북으로 하수, 황(湟)과 접경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강족과 융족에 제어하고 있어,
이들을 얻으면, 그 사람들이 족히 전투에 대비할 수 있고, 물산은 군대를 돕기에 풍족하오.
대병으로 쫓는다면, 이사제는 달아나지 않고 자기 손을 묶어 포박될 것이오.
임조가 함락되고 나면, 그 주변 군현이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소."했다.

마침내 농(隴)을 건너, 진주(秦州)를 함락하고, 복강(伏羌), 영원(寧遠)을 항복시키고, 공창(鞏昌)에 입성했다.
우부장(右副將) 풍승(馮勝)을 보내 진치면서 임조(臨洮)를 압박하게 하니, 이사제가 과연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병사를 나눠 난주(蘭州)를 함락하고, 예왕(豫王)을 습격해 패주시켰고, 그 부락의 군수물자는 모두 거두어 들였다.
돌아와 소관(蕭關)을 나와, 평량(平涼)을 함락시켰다.

장사도는 영하(寧夏)로 달아나다 확곽에게 붙잡혔고, 그의 아우인 양신(良臣)이 경하를 들어 항복했다.
서달은 설현(薛顯)을 보내 항복을 받도록 하였다.

양신(良臣)이 다시 반(叛)하여, 밤에 병사를 내어 설현을 기습해 부상을 입혔다.
서달이 군대를 독려하며 적을 포위했다. 확곽(擴廓)이 장수를 보내 내원(來援)하였지만,
도리어 공격하여 패주시켰고, 마침내 경양을 함락시켰다.

양신의 부자는 우물에 몸을 던지니, 우물 밖으로 꺼내서 참수했다.
섬서(陝西) 지역을 모두 평정하고 하였다.
조를 내려 서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하고, 백금과 비단(文綺)을 매우 후하게 하사했다.

장차 논공하여 크게 봉하려 할 때, 확곽이 마침 난주를 공격하여, 지휘사(指揮使)를 죽였고,
부장군 상우춘은 이미 죽었는지라, 홍무 3년 봄 황제가 다시 서달을 대장군으로,
평장 이문충(李文忠)은 부장군으로 삼아, 길을 나눠 출병케 하였다.

서달은 동관으로부터 서쪽 길로 나가 서쪽을 쳐서 평정하고, 확곽을 잡았다.
이문충은 거용(居庸)으로부터 동쪽 길로 나가 대막(大漠)을 끊고, 원의 사주(嗣主)를 추격했다.

서달이 정서(定西)에 이르자, 확곽은 퇴각하여 침아곡(沈兒峪) 주둔하여 조금 진군하였다.
해자와 보루를 사이에 두고 수일간 교전했다.

확곽이 정병을 보내 사잇길로 동남쪽 보루를 겁박하니,
좌승(左丞) 호덕제(胡德濟)가 창졸간에 실수를 저질러 군대가 놀라 요동하니, 서달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를 쳐서 퇴각시켰다.

호덕제는 대해(大海)의 아들인데, 서달은 그가 공신의 아들이라 해서, 계구를 채워 경사로 보내고,
그 휘하의 지휘(指揮) 등 여러명은 참수하여 이를 돌렸다.

다음날, 정병이 해자를 빼았고 죽을 각오로 싸워 확곽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담왕(郯王), 문제왕(文濟王) 및 국공(國公), 평장(平章) 이하의 문무 속료(僚屬) 1,860명,
장수와 군사 84,500여명을 사로잡았고, 말과 낙타, 기타 가축은 거만(巨萬)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확곽은 겨우 처자 수명을 끼고 화림(和林)으로 달았나다 호덕제가 경사에 이르자,
황제가 그를 풀어주었고, 서신을 써써 서달을 칙유하길
 "장군은 위청(衞青)이 소건(蘇建)을 베어 죽이지 않을 것을 본받았을 뿐, 사마양저(穰苴)가 장가(莊賈)를 기다린 것은 보지 못했소?
장군이 이 자를 주살했다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오. 지금 조정의 논의에 내려 보냈으나, 나는 또한 그의 신주(信州)와
그가 여지껏 세운 공을 생각하면 차마 죽일 수 없소. 지금 이후로 계속해서 장군은 고식책(姑息)을 섬기지 마시오."

서달이 이미 확곽을 파하고 나서, 곧 군대를 거느리고 휘주(徽州) 남쪽에서부터 108번 건너 약양(略陽)에 이르렀는데,
면주(沔州)를 함락하고, 연운잔(連雲棧)으로 들어가 흥원(興元)을 공격하여 이를 취했다.

부장군 이문충 또한 응창을 함락하고, 원나라의 적손(嫡孫)의 비주(妃主)와 장상(將相)을 붙잡았다.
이를 전후로 승전보를 보고하니, (황제가) 조하여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로 돌아오게 하였다.

황제가 용강에까지 나가 영접하고 위로했다. 이에 조를 내려 공신을 크게 봉하였는데,
서달에게 개국보운추성선무공신(開國輔運推誠宣力武臣), 특진광록대부(特進光祿大夫), 좌주국(左柱國),
태부(太傅), 중서우승상참군국사(中書右丞相參軍國事)를 제수하고 위국공(魏國公)으로 고쳐 봉하고,
세록(歲祿)을 5천석으로 하고, 세권(世券)을 주었다.

다음해 성희(盛熙) 등을 거느리고 북평으로 가서 군마를 조련하고, 성과 해자를 수리하며,
254둔(屯)을 두고 밭 1,300여경을 개간했다. 겨울이 되자 소환하였다. 

홍무 5년 다시 크게 군대를 내어 확곽을 정벌했다.
서달은 정로대장군으로 중도(中道)로 나아가고, 좌부장군(左副將軍) 이문충은 동도로
정서장군(征西將軍) 풍승(馮勝)을 서도(潟)로 나아가면서 각기 5만 기명을 거느리고 변새를 넘었다.

서달이 도독 남옥(藍玉)을 보내 토라하(土剌河)에서 확곽을 쳐서 패배시켰다.
확곽이 하종철(賀宗哲)과 병력을 합래 힘꺼 대항하니, 서달이 싸웠지만 불리하여, 죽은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황제는 서달의 공이 크다고 하여 불문에 부쳤다.
이 떄 이문충의 군대 또한 불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직 풍승이 서량(西涼)까지 이르러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나, 낙타와 말을 은닉한데 연좌되어,
상은 행해지지 않았으니, 이에 관한 사정이 이문충전과 풍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해, 서달이 다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변방을 행군하며, 답라해(答剌海)에서 적을 격파하고,
돌아와 북평에 진치며, 3년간 머문 후에 돌아갔다.

14년, 다시 탕화 등을 거느리고 내아불화(乃兒不花)를 토벌하였다.
토벌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 진수했다.

매해 봄이 되면 출정하고, 겨울이며 불러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돌아오면 번번이 장군의 인을 바치니, 휴가를 주어 쉬게 하고, 연회에 나와 기뻐하며 술마시니,
포의 시절 처럼 형제라 칭했지만, 서달은 더욱 공손하고 삼가하였다.

황제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길 "서형이 큰 공을 세웠는데, 평안한 거처가 아직 없으니, 구저(舊邸)를 내려주리다"라 했다.
저란 태조가 오왕 시절 거처하던 곳이다.

서달은 간고히 사양하였다.
황제가 서달의 집에 갔는데, 센 술을 마시고 취하여 이불을 덮고 정침(正寢)에 올라 잤다.

서달이 술이 깨서 놀라 계단 아래로 내려와, 부복하며 죽을 죄를 졌다고 외쳤다.
황제가 이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구저의 앞쪽을 좋은 저택(甲第)로 수리하고, 그
 방(坊)을 표하여 "대공(大功)"이라 하였다.

호유용(胡惟庸)이 승상(丞相)이 되어서는 서달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서달은 그의 인품을 박하게 보아 대답하지 않으니, 서달 집의 문지기(閽者)인 복수(福壽)에게 뇌물을 주어 서달을 도모하게 하였다.

복수가 발각되었지만, 서달은 또한 문초하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황제를 위해 말하기 호유용은 재상을 맡길 만한 자가 아니라고 했다.
에 과연 패망하게 되니, 황제가 더욱 서달을 중하게 여겼다.

홍무 17년, 달(太陰=)이 상장(上將) 자리를 범하니, 황제가 마음속으로 이를 싫어했다.
서달이 북평에 있을 때, 등창의 병이 생겼는데, 더욱 심해지니, 황제가 서달의 장자 서휘조(輝祖)를 보내
지난 노고를 위로하는 칙서를 주고, 얼마 후 불러들였다.  

다음 해 3월, 병이 위독해져, 마침내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황제가 조회를 폐하고, 상에 임하여 비통해 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중산왕(中山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며, 3대에게 모두 왕작(王爵)을 주었다.
종산(鍾山)의 음택을 하사해 장사지내게 하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직접 지었다.
태묘에 배향하고, 공신묘에 초상을 두되 그 위치를 모두 제1로 하였다.

서달은 말이 간략하되 생각은 정밀하였다.
군대에 있을 때는, 영을 내려도 서로 다르지 않았다.

제장들이 봉지(奉持)할 때는 늠름하여도 황제 앞에서는 공손하고 삼가하여 능히 말을 못하는 것 같았다.
부하를 어루만지고 위무하길 잘하여, 부하들과 감고(甘苦)를 같이 하니, 
사졸들은 은혜에 감동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향하는 곳마다 이기게 되었다.

또한 부대를 엄정히 단속하여, 평정한 큰 도읍(大都)이 둘이요, 성의 도읍(省會)가 셋이요, 
군읍(郡邑)은 수백이나 되었지만, 백성들은 여항(閭井)은 편안하여 백성들이 군대를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 돌아가는 날은, 한대의 수레에 타고 관사로 가고,
조정에서는 유생들을 예로 대하여 담소하고 의논하기를 종일하였으니, 화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황제가 일찍이 그를 칭찬하며 말하길 "명을 받들어 나가고, 공을 이뤄 돌아오는데,
자랑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不矜不伐), 부녀를 사랑한 바도 없고, 재보를 취하는 바도 없으니,
중정(中正)함에 허물이 없어 해와 달보다 밝고 분명한 것은 대장군 한사람 뿐이다"라 했다.

아들은 넷이다. 휘조(輝祖), 첨복(添福), 응서(膺緒), 증수(增壽)
(이 뒤로 서달의 장자 서휘조의 열전이 있지만, 이건 생략)
장녀는 문황제후(文皇帝后)가 되었고, 차녀는 대왕비(代王妃), 차차녀는 안왕비(安王妃)이다.


御製 中山徐武寧王神道碑 / 황제 주원장이 서달을 위해서 직접 지은 신도비문

大眀中山武寧王姓徐氏諱達鳯陽府鳯陽縣人家世農業王年二十有二值元末兵興嵗癸巳朕集義旅王來麾下朕視其所以周旋幾二年動靜語黙悉超羣英於是命為帥首凡有微征以代朕行又幾一載眀年乙未朕被敵所執敵之帥首亦為我軍所執明日王來以身代朕歸朕歸縱敵帥首易王還已而從朕渡江下採石定太平時機務浩繁姑孰之郡密邇大江況元帥首曼濟哈雅率舟師以拒江面為朕肘腋之患不暇率兵四征乃命王為將擇精兵數千東取溧水溧陽王兵至守者不戰民庶咸安眀年丙申春二月敗元舟師於採石王檣溧水三月召王從征建業越十日庚寅師入建業越七日丁酉命為大將浮江而下水陸並進東取京口大破元師京口巳定東探浙右時張士誠擅稱名號遣將巳據毗陵旌旗相望其守者潛遣間諜誘我斥堠王察知遣使歸告請勒兵以討朕許之王將三萬人逼近其壘復遣使歸告賊勢少窘益兵可下朕遣戰將千餘員甲十三萬師會合圍毗陵張士誠自姑蘇發其弟張九六將兵數萬來援王遣兵逆戰不移時破之生擒張九六城守猶堅朕復益新附二萬合勢共圍守者窘甚計出多方誘我新附者二萬新附帥首宻從傾營入城助彼來戰初我軍環其城而營之因新附者叛四方去其三獨王固守其南開平王猶營東南外一舍之餘扼彼援兵尚未驚移聞新附者叛冦迫王營王拒守且戰開平自外來援內外夾攻大敗其衆擒其守將張徳餘軍敗入其城王復還而困之士誠自姑蘇遣將呂珍寅夜入城督兵以守與王相抗初彼軍雖少糧且足用戰守益堅及誘降入軍多糧少戰且狐疑丁酉春守將呂珍潛遁城下師旋復遣征寧國城圍援至王發兵扼要而戰援者敗俘斬者衆旬日城降宣城亦附凱旋時四方羣雄甚多朕固守江東數郡命王秣馬厲兵以觀四方之勢又眀年戊戌命王點兵固守建業朕親下浙東金華既平六月師還未幾遣王西征皖城水陸並進微北秋命王西征池州師抵而平陳友諒遣兵來救斬首萬級生獲三千餘時張士誠發兵來冦宜興城陷遣王將兵復取師抵城下不旬日城復生獲三千餘皆戰死其年惟揚元義兵盡歸壬寅秋王従朕下潯陽陳友諒敗潰時張士誠發兵攻長興留王守潯陽未幾召歸師次中塗令復守潯陽比至陳兵巳入城守王遣兵與戰陳兵復潰俘斬數千獲其眷屬戰騎彼時潯陽之境空荒棄而弗守師旋建業癸夘春正月取豫章城降命王西取武昌不克班師中塗豫章內變王復討平張士誠北冦夀春朕親往援王為前部張兵敗北旋師金斗周圍其城戰間陳友諒大率兵冦豫章詔王罷金斗之圍歸整舟師解豫章之難秋七月師次彭蠡陳友諒罷圍逆戰王身先諸將敗陳一巨艘死者千五百人自是彼軍勢弱我軍威振由王身先癸夘嵗留王守京朕西征武昌甲辰武昌下克陳之後其年大會兵於京師乙巳嵗命王取淮東淮陰諸州仲夏師旋嵗丙午命率甲士二十萬東取吳越鏖戰於吳興皂林之野生擒張兵六萬不戮一卒盡赴京師冬十有一月師抵姑蘇明年丁未秋九月姑蘇下兼浙左之大半詔班師命王西畧蒼梧九溪率服還軍京師洪武元年戊申春正月朕即大位二月命王為征北大將軍銀青榮祿大夫上柱國錄軍國重事中書右丞相兼太子少傅信國公命率甲士二十五萬北定中原抵齊魯而民安所過輯兵守禦規畫足食兵不民擾所得壯士帥而徂征不煩朕念北齊既平命河南兵至大梁父老壺漿以迎西下洛陽長驅崤函直抵潼闗守者拒戰王命宋國公馮勝抜之朕命據闗而守諭歸大梁北下河內由鄴下趨趙州抵臨清其年八月三日辛未北入燕都捷奏平敵復命西下晉冀如命井陘長驅晉冀以平二年春正月召渡河西兵入闗中守者皆棄全有闗內之地召歸天下太平三年冬十有一月論功行賞命王為開國輔運推誠宣力武臣特進光祿大夫左柱國太傅中書右丞相征北大將軍改封魏國公五年夏五月衆議北入沙漠王至嶺北兵疲而還勑命沿邊輯守嵗鎮於燕口外餘民自是收盡海內無虞十七年甲子太陰數犯上將朕惡之召罷北鎮勞勞於家是年臘月二十有一日染疾朕恐之星馳四召名醫咸至疾終弗瘳眀年乙丑二月二十七日己未薨特封中山王諡武寧享年五十有四爰以是年四月十八日己酉塟於鍾山之陰生男四人世子允恭襲封魏國公女四人長女燕王妃王平昔言簡慮精當提兵之時令出不二諸將敬若神眀所至之處攻城不屠與人不戱凡受命而出及功成而旋每不自矜至於封姑蘇之府庫置元宮之美人財寶無所取婦女無所愛忠志無疵昭明乎日月既薨朕恐嵗月幽遐磨迷偉績朕特親筆生前張我武威偃兵息民混一區夏奠安人神之勞以示子孫耿光萬世勒諸堅石樹當神道歌曰
景命昌兮天彰錫我英俊兮忠良幽韜祕畧兮神機黙溫溫兮兼剛秉旄鉞而徂征兮既出幡幢繚繞兮雄氣軒昻戰騎靈兮蹄疾旌旗烈烈兮前行六軍濟濟兮甲冑礪矛燦爛兮精鋩舍之兮周廬星列屬櫜兮比比懸傍刁斗聲頻兮令宻山川妖魅兮奚蔵彎弧力勁兮射欃槍幾披星月兮秋霜奮忠海內兮孰前當摧堅撫順兮我武惟揚


서달(徐達)의 딸들 ㅡ 글 : 상전(商傳)

 영락제의 애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영락제의 일생에 있어서 영향이 가장 컸던 여자를 따지자면 서황후(徐皇后)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명성이 자자한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딸이다.
이 서황후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사서에 따르면, "어려서 정정(貞靜)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여자수재라고 불렀다"
이렇게 재주가 있는 여자이다보니 당연히 주원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하루는 주원장이 서달을 찾아간다.
"너와 나는 포의 시절의 친구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이는 현재의 군신관계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물며 자고이래로, 군신이 서로 가까우면 서로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너의 장녀를 나의 넷째에게 주면 어떻겠는가?"

주원장과 서달을 어려서 같이 소를 기르던 친구이다.
나중에 함께 천하를 얻었고, 서달은 최고의 개국공신이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들의 관계는 어려서부터 함께한 친구이다. 그
러나, 이때는 이미 두 사람의 신분이 달라져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고, 하나는 비록 전공이 혁혁하지만 여전히 신하였다.
주원장이 황제인데, 스스로 찾아와서 자식의 혼사를 요청하니, 그의 말이 곧 성지이다.

신하인 서달로서야 어길 수가 없다.
물론, 그로서도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혼사는 이렇게 결정된다.

이해에 영락제 주체는 16살이었고, 서씨는 그보다 2살이 어려서 14살이었다.
서달의 딸은 장수집안의 여인이지만, 글을 읽고, 예절을 배워서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홍무9년에 연왕비(燕王妃)에 봉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고황후의 총애를 받는다.

이 서왕비의 몸 속에는 대장군 서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어쨌든 장수집안의 딸이다.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는 이경륭(李景隆)을 파견하여 북경을 공격하게 했다.
런데, 이때 주체는 영왕 주권에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상태였다.

북경성은 비어있었으니,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서왕비는 갑옷을 입고 나서서, 북경을 구해낸다.

당시 이경륭의 군대는 10만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가 북경성을 밤낮으로 공격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북경은 원나라의 수도로, 성벽이 높고, 호성하가 넓으면서도 깊었다.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이다.
그리하여 이경륭은 군대에 북경의 9개 성문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정남방의 여정문은 바로 지금의 정양문(속칭 전문)이다. 이 곳이 공격의 핵심이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완강히 버티면서, 서왕비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서왕비는 성안의 남자들이 모두 전투에 참가하여 더 이상 남은 남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친히 성안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성벽에 올라가서 전투를 도운다.

그녀가 성벽에 올라오자, 수비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즉시 조정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사기를 눌렀다.

북경 서쪽의 부성문도 조정군대가 공격하는 중요대상이었다.
일부 조정군대는 한때 구능 부자의 지휘하에 성문을 돌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륭은 그들이 최고의 전공을 차지할 것이 두려워서 대군이 도착하면 함께 공격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체의 병사들이 밤중에 성벽에 물을 뿌려서, 성벽에 얼음이 얼어버렸다.

그리하여 다음날 전투를 개시하자 성벽을 기어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명이 지키는 북경성이 십만명의 밤낮없는 공격을 견뎌낸다.

나중에 영락제가 황제에 오른 후, 서왕비도 자연스럽게 서황후가 된다.
서황후는 글도 썼다.

<여헌>, <여계>를 참고하여 <내훈>24편을 쓰고,
고대인들의 선행과 좋은 말을 모아서, <권선서>를 써서 간행한다.

그녀는 46세때 병으로 사망한다.
영락제는 애통해하며 그녀에게 인효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락제의 생명에서 또 하나의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는 바로 그의 처제인 서묘금(徐妙錦)이다.
이 여인은 서달의 작은 딸이다.
서황후가 사망한 후, 영락제는 그녀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서달의 두 아들과 두 딸은 아주 재미있다.
장남 서휘조(徐輝祖)는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고, 사남 서증수(徐增壽)는 연왕 주체를 지지했다.

큰 딸은 연왕 주체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다.
서달의 작은 딸 서묘금은 건국영웅의 기백이 있었다.

주체는 그녀를 그리워했으나, 그녀는 주체의 반대편에 섰다.
나중에 주체가 황위를 빼앗고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그녀는 결연코 그에 따르지 않는다.

주체가, "네가 나에게 시집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시집가는지 보겠다."고 하자,
서묘금은 아예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주체가 남경을 공격했을 때, 서묘금은 주윤문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어디도 가지 말고, 이 황궁대전에서 주체를 기다려라. 그가 너를 어떻게 하는지 봐라."

그러나 주윤문에게는 그런 담량이 없었다.
영락제가 가장 총애한 권비(權妃)는 주체가 원정을 나갈 때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를 보면 그녀를 아주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권비가 사망했을 때, 주체는 상심하여, 그녀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여기고, 후궁을 대거 죽여버린다.

이 권비는 서묘금과 닮았다고 한다.
한왕 주고후의 말에 따르면, "권낭낭은 (주체)의 처제와 칠푼(七分) 닮았다."

주체는 잔혹했지만 그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주체가 서묘금에게 정중하게 청혼했을 때, 그녀가 이를 거절하며 쓴 <답영락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정원의 예쁜 도화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하기 보다는, 산 속의 작은 풀이 되어 혼자서 피고 지겠다.
이제부터 패엽포단, 청등고불을 벗삼아, 청정한 여생을 지낼 것이다."

서묘금은 개성이 대단한 여인이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시집가지도 않았으니, 정말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홍수전(洪秀全, 1814~1864)과 태평천국


첨원은 태평천국 시기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의 왕부가 되기도 했고,

민국시기에는 여러 정부기관이 이곳에 자리했다.


1958년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1961년에 태평천국 기념관은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으로 개칭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에는 태평천국과 관련된 문물 2800여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문헌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홍수전은 어려서부터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꿈꿨다.

열넷에 첫 과거에서 낙방한 그는, 결국 네 번째 과거에서 낙방한 서른부터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포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지향점을 찾은 것이다.

그 계기는 7년 전(1836) 과거시험장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나눠준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이었다.


당시 홍수전은 그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해를 연달아 부시(府試)에서 낙방한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극한의 상태로 치달은 그는 수십일 동안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천상으로 올라간 홍수전은 금빛 수염을 기른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그에게 사악한 것을 퇴치하라고 하면서 칼과 황금 인장을 건네주었다.


홍수전은 어떤 남자와 함께 요괴를 쫓아냈다. 이 꿈의 의미를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른 그는 다시 과거를 준비했다.


그리고 네 번째 낙방! 이때 홍수전의 친척이 놀러 왔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권세양언>을 빌려갔다.

<권세양언>은 중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양발(梁發)이 성경을 발췌해 만든 것이다.


홍수전의 친척은 무척 흥미진진하게 그 책을 읽었고 홍수전에게도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하느님 · 천지창조 · 천국 · 악마 · 심판 등의 내용이 담긴 <권세양언>을 읽고 홍수전은 깨닫는다.

그 옛날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꿈이 바로 계시였음을!


노인은 하느님이고, 자신과 함께 요괴를 쫓아낸 남자는 예수다.

홍수전은 자신이 누군지 깨달았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홍수전에게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유교 사당을 파괴하고, 상제를 섬기는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했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1851년에 마침내 태평천국을 세우게 된다.

태평천국의 천왕(天王)임을 선언한 홍수전은 만주족 정부를 악마로 규정하고 성전을 선포했다.


태평천국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남부를 점령했고, 1853년에는 난징을 함락했다.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로서, 태평천국이 멸망한 1864년까지 천경(天京)이라 불렸다.


“논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쓴다.”

평등한 지상낙원, 이것이 태평천국의 원칙이자 이상이었다.


착취와 차별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들은 태평천국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청나라 조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일등공신인 증국번은 한족 출신의 유가 관료였다.

증국번은 공자의 위패와 사당을 부숴버린 홍수전을 중국의 파괴자라고 생각했다.


한족 지식인에게는 만주족과 한족이라는 민족의 경계보다는

‘공자’라는 부호가 ‘중국’의 정체성으로서 훨씬 더 유의미했던 것이다.


천경이 함락되기 한 달 전 홍수전은 세상을 떠났다.

증국번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2년 뒤(1866), 홍수전의 고향 광둥에서 쑨원이 태어났다.

“제2의 홍수전이 되겠다”고 어릴 적부터 다짐하던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주인공이 된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를 타도한 배만(排滿)혁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쑨원은 과거에 뜻을 둔 적이 없다.


과거제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던 1905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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