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각(鳳凰閣)





봉황대(鳳凰臺)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서조(瑞鳥)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용의 몸, 기린의 날개, 물고기 꼬리 모양을 하고,

찬란한 5색 빛에 오음(五音)의 소리를 내는데 수컷이 봉(鳳)이요 암컷이 황(凰).


오동나무에 살면서 태평할 때에만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 예천(醴川:甘泉)을 마시며

천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올라 / 이백(李白)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옛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거늘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이제 봉황은 가고 대는 비어 강물만 흐른다.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오솔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나라 고관대작들도 오래된 무덤으로 남았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금릉 삼산은 푸른 하늘에 반 토막쯤만 드러내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진회 두 물줄기는 백로주를 휘돌아 흐르는구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햇빛은 온통 뜬구름에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내마음이 슬프도다.


어구(語句)
金陵 : 지금의 南京(남경). 삼국시대 손권(孫權)이 오(吳)나라를 세우고 금릉을 처음 도읍으로 정했다.
鳳凰臺 : 남경에 있는 대(臺). 南朝宋(남조 송)의 王顗(왕의)란 사람이 봉황(鳳凰)이 떼를 지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대를 창건했다.
吳宮 : 삼국 시대 때의 오나라 孫權(손권)의 궁전.
幽徑 : 그윽한 오솔길.
晉代 : 晉 나라 시대(265~420). 서울이 洛陽(낙양)이었다가 東晉(동진) 때(317~420) 서울을 建業(건업) 곧 지금의 남경으로 옮겼음.
衣冠 : 옷과 갓. 예의바르게 옷차림을 한 公卿大夫, 貴人(공경대부, 귀인) 들.
古丘 : 오래된 언덕.
三山 : 금릉의 서남쪽에 세 봉우리가 잇달아 있는 산.
半落 : 반쯤 떨어짐. 구름에 산의 반이 가리어 있음.
二水 : 秦水(진수)와 淮水(회수). 秦淮. 江蘇省 江寧縣(강소성 강녕현)의 두 강으로 이 주변이 六朝(육조) 때 陳(진)의 도읍지였음.
白鷺洲 : 진수와 회수가 돌아 이룬 섬. 두 강은 중도에서 합류하다가 하류에서 갈라져 한 줄기는 성 안으로 들고

한 갈래는 성 밖을 돌아 흐르는데, 그 중간에 백로주 섬이 생겨났다고 함.
長安 : 옛 중국의 前漢(전한), 隋(수), 唐(당) 등의 서울. 지금의 陝西省 西安, 長安(섬서성 서안, 장안) 일대.

여기서는 현종 임금을 말함.


수련(首聯, 기起 1~2구)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다가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 봉황 떠나니 누대는 비어있고 강물만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봉황대 위에는 그 옛날 봉황새가 날아와 놀았다.

그런데 지금은 봉황새는 날아가고 봉황대는 비어 있고 장강의 물만 유유히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만물(萬物)이 유전(流轉)함과 역사(歷史)의 흘러감을 옛날과 지금의 상황을 대조(對照)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릉 봉황산 위에 지은 누대에 봉황새들이 날아와 놀았다.


봉황새는 상서로움을 전한다는 전설의 새로서, 이는 흔히 왕조가 흥성(興盛)할 것임을 상징한다.

즉 봉황대를 지은 송나라가 자신의 왕조의 흥성을 기원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현실은 봉황새는 떠나가고 봉황대에는 오갔을 수많은 당대의 귀족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강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흘러내린다.


상구(上句)에서의 기대와 환희, 낙관과 축복이 하구(下句)에서는 실망과 비애, 비관과 애수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즉 상구는 하구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감개(感慨)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함련(頷聯, 승承 3~4구)
吳宮花草埋幽俓(오궁화초매유경) :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황폐한 길에 묻혀 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 잔나라 고관들은 낡은 무덤 다 되었네


산문적 의미는, “먼 과거를 생각해보면, 화려했던 오나라 궁궐(吳宮), 그 궁궐 속의 꽃과 풀(花草) 같았던 궁녀들은

이미 한 줌 흙이 되어 잡풀 우거진 작은 오솔길(幽俓)에 묻혀버려(埋)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진나라 시대(晉代)의 화려한 의상(衣冠)을 입었던 부자(富者)와 귀족(貴族)들도

이제는 모두 다 죽어서 오래된 무덤(古丘)의 주인 신세가 되고(成) 말았다. ”이다.


여기서는, 봉황대와 관련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여 수련의 시상을 확대하고 있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나라 궁궐의 “아름다운 궁녀”를 비유한다.


그윽한 좁은 길(幽俓)은 횡폐화 된 궁궐 터의 “풀에 묻혀버린 좁은 길”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화려함이 지금은 모두 풀섶 길에 묻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진대의관(晉代衣冠)은 오궁화초(吳宮花草)와 대를 이룬다.

따라서 진대의관은 “진나라 시대의 고관”을 비유한다.


고구(古丘)는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으로, 작가의 시대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무덤이라는 뜻이다.

결국, 인간이 선망한 공명(功名)도 지금은 모두 죽어 헛되이 사라지고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구에서는 궁녀, 하구에서는 고관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사실을 들어 인생살이의 무상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경련(頸聯, 전轉 5~6구)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 삼산의 봉우리 푸른 산 밖으로 반쯤 솟아있고
二水中分自鷺洲(이수중분자로주) : 두 강물은 나뉘어 백로주로 흐른다


산문적 의미는, “이제 이러한 시름에서 벗어나기나고 싶어 먼 곳을 보니, 삼산이 푸른 하늘 밖으로 솟아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너무나 높고 또 아득히 멀리 있어, 산 아래로 안개가 자욱하여 보이지 않고 윗 부분만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기둥이 떨어진 듯 솟아 있다.

그리고 산 아래로는 두 물줄기가 노주에서 가운데로 나누어져 흐르고 있다.”이다.


여기서는, 봉황대를 둘러싼 보다 큰 자연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삼산과 이수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웅대하고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산수자연과

왜소하고 변하는 인간의 군상을 은연중 대비시키고 있다.


삼산(三山)은 남경 서쪽에 잇달은 세 봉우리를 뜻한다.

반락(半落)은 산의 모습이 아래 절반은 보이지 않고, 윗 절반만 보이는 상황을 뜻한다.


아래 절반은 연무에 싸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천외(靑天外)는 산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서는 삼산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수(二水)는 진수(秦水)와 회수(淮水)를 뜻한다.

백로주(白鷺洲)는 이수의 한 갈래가 이룬 삼각섬이다.


중분(中分)은 가운데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봉황대를 둘러싼 이수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 )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해를 가리어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 서울 장안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 근심 이네


산문적 의미는, “모두가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지만,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에 잠기게 하는구나.”이다.


여기서는, 떠도는 구름이 해를 가리어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 현상을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자신이 서울로 불려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상구(上句)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은

하구(下句) 長安不見(장안이 보이지 않은)의 까닭을 설명하는 시구이다.


총위(總爲)는 “모두-때문이다”의 뜻이다.

부운(浮雲)은 “뜬 구름”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키면 “조정의 간신”을 비유한다.


폐일(蔽日)은 “해를 가리다”이며, 하구(下句)의 의미와 연관시켜보면 “일(日)”은 임금을 뜻한다.

부운능폐일(浮雲能蔽日)은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는 뜻이 된다.


長安不見(장안불견)은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 의미와

“서울로 다시 불리워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면적 의미를 갖는다.


使人愁(사인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스럽게 한다.

” 여기서 사람은 내면적으로 “작가 자신”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권력의 지전투구에 쫓겨난 작가가

봉황대에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변화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유구하기만 하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지금의 장안 권력자들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간신배에 의해 작자 자신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봉황대의 전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현재의 눈앞의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부질없는 권력의 역사가 되풀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자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작가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원망과 슬픔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이백은 율시를 잘 짓지 않았으나 이 작품만큼은 당대의 율시 중에서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시를 지은 동기와 유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내려 오고 있다.
이백이 당 현종(玄宗) 임금 때 조정에서 버림을 받아 武昌(무창)의 黃鶴樓(황학루)에 가서 유랑하던 중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 704~754)의 시 <황학루(黃鶴樓)>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시에 그만 감탄한 나머지

최호(崔颢)의 경지와 견줄만한 시를 지을 수 없음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 남경시)의 봉황대에서 칠언율시로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를 지어

최호의 시‘黃鶴樓'와 비견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 시는 착상(着想)이 비슷하고 운자(韻字)도 같아 이 시 또한 명작으로 꼽힌다.
최호 시의 끝구가 ‘연파강상사인수(煙波江上使人愁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이니

이 시의 끝구‘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이 보이지 않아 나는 슬프도다)’와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경관을 풍류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사회를 개탄했음이 최호의 시와 다르다고들 평하니,

尾聯(미련, 結 7~8구)에서 “뜬 구름이 해를 가리듯 간사한 신하들이 천자의 총명을 가려,

비록 객지를 떠도는 처지이기는 하나 현종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몸”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 그것이다.


한편 다른 설이 있다.

이백이 말년에 유배되어 야량(夜郞)에 가던 도중 풀려나와 동남부를 유랑할 때 쓴 시라고 보는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말년의 작품이 아니고 쓰인 시기를 중년으로 보아

장안에서 간신배의 모함에 걸려 현종에게 쫓겨나 강호 지역을 유랑하면서 금릉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봉황대에 올라 당시의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시는 어지러운 국가의 장래를 근심하는 작품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 옛날 오나라 진나라 화려했던 궁궐도 잡풀에 묻히고 황폐한 먼지에 싸여 잊혀져 가는 게 인간 세상이라지만

강물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기만 한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고 했던가.

세상 만사가 원래 그런 것이라 달관하면 그만인가 싶더니 끝내 그는 권력 다툼에 시달리다

산천을 떠돌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모두가 저 간신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탓이라 한탄한다.


세상 일이란게 본디 다 그런것을...

하지만 그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어깨 위에 그림자처럼 짙게 얹혀 있다.


이 시에서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二水分中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란 구절은 유명하다.

보통시인 같으면 삼산은 하늘 끝에 반쯤 솟아 있고 라고 표현했을 법한데

이백은 반쯤 떨어져있다고 표현하는 '반락'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위 구절이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민요중에 '양산도'라는 노래에서는 이 시를 본따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이요 - 이수분중하니 능라도라....."하여 靑天外 대신에 평양의 모란봉을 집어넣고

白鷺洲 대신에 대동강변 능라도를 넣어서 작사해 불렀으니

이백이 지은 이 시가 우리 백성에게 끼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면서도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고심하다가 누각에 씌어 있는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를 보고

자기는 그만한 시를 지을 자신이 없다고 한탄하며 붓을 놓고 만 일은

두고두고 천재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언젠가는 최호의 시에 버금가는 멋진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뒤 이백은 황제에게 글을 지어 바치는 관직인 한림공봉(翰林供奉)에 임명되어

약 3년 동안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西安)에 머물다가 천보 3년(744)에 그 자리에서 쫓겨나 도성을 떠났다.


이백이 조정에서 쫓겨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의 모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은 당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세력과 외척세력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력사의 질시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저녁에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흥경궁(興慶宮) 안에 있는 침향정(沈香亭)으로 행차했다.

당나라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모란 그림과 모란씨를 보냈다는 일화도 있듯이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는 모란을 매우 숭상한지라 침향정 주위에도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란꽃을 보고 현종이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라고 했다.

그때 이백은 이미 퇴청하여 장안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


끌려가다시피 침향정으로 간 그는 얼굴에 찬물 세례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좀 차렸다.

그리고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고력사의 부축을 받으며 현종 앞으로 나아가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던 양귀비가 먹을 갈아 받쳐 들고 있는 가운데

일필휘지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이 시에서 이백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해 가며

양귀비의 미모를 극구 칭송했는데 평소 이백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던 고력사가

양귀비를 꾀어 함께 이백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조비연은 본래 기녀 출신으로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얼마 동안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를 모시는 궁녀로 있다가 결국 평민의 신세로 전락하여 여기저기 떠돌다 죽었기 때문에

양귀비를 조비연에 비유한 것은 이백이 넌지시 양귀비를 모욕한 것이라는 것이 고력사가 양귀비를 꾄 논리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장안을 떠난 이백은 어느 날 금릉(金陵, 지금의 강소성 南京)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갔다.

봉황대는 옛날에 봉황이 내려와서 노닌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누대였다.


눈앞에 갖가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 부근에 있는 삼산은 마치 대지 바깥으로 미끄러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지구에 매달려 있고

먼 길을 달려온 진회하(秦淮河)는 백로주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황궁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온통 잡초에 뒤덮여 있고,

동진 때에 세도를 떨치던 고관대작들은 덩그런 무덤만 하나씩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눈을 들어 장안이 있는 서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황학루에서 있었던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붓을 들었다.


이처럼 최호와의 경쟁의식 속에 지어진 이 시는, 봉황대 일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나아가 조정이 충신을 포용하지 못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고 자신의 깊은 우국충정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원스러운 풍경과 개인의 향수를 노래하는 데에서 그친 최호의 시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관점도 있고 최호의 시가 더 낫다는 관점도 있다.


어쨌거나 이백은 이 시 덕분에 남경 사람들의 추앙을 많이 받고 있다.

백로주공원 정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이 시 제5·6구가 씌어 있으며,

백로주공원에서 평강부로(平康府路)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간 곳의 진회하에 놓여 있는 평강교 밑에는

이백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뒤의 벽에 초서체로 쓴 이 시가 새겨져 있다.


백로주공원 안에 있는 작은 다리들 가운데 ‘이수교’라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시의 성가를 말해 주는 예증이다.



봉황대(鳳凰臺)에서 바라본 봉황각


봉황대 옆 진회하(秦淮河)


황학루(黄鹤楼)  ㅡ 검색 자료


호북성의 성도(省都)인 무한(武漢)은 장강(長江) 남쪽의 무창(武昌) 지역과

장강 북쪽의 한양(漢陽)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 도시다.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강의 남쪽, 정확히 말하면 무한장강대교의 남쪽에

황학산 · 황곡산(黃鵠山) · 사산(蛇山)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이 산 꼭대기에 가면 황학루라는 누각이 하나 있다.


서기 223년에 창건되어 근 1,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누각은 중국 4대 누각의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천하강산제일루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기도 한데 이 누각의 창건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신씨(辛氏)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우람한 사나이가 하나 와서 술을 한 잔 달라고 했다.


차림새로 보아 술값 낼 돈이 없어 보였지만 두말없이 한 잔 주었다.

그 뒤로 사나이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공짜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사나이가 그 동안에 진 빚을 갚겠다며 귤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는 노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한 마리 그렸다. 황학이었다.

그림이 참으로 정교하여 술집에 있던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학이 박수 소리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 뒤로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황학의 춤을 보기 위해

이 술집에 들르는 바람에 신씨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10년쯤 지난 뒤에 그 동안 어딘가로 사라졌던 사나이가 갑자기 돌아와

벽에 있는 학을 불러내어서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씨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했다.

최호의 이 시는 황학루에 올라가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방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향생각이 간절해져서 지은 것이다.


남송 시인 엄우(嚴羽)가 “당나라 사람들의 칠언율시는 당연히 최호(崔颢)의 <황학루>를 최고로 쳐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 시는 천재 시인 이백(李白)마저도 감탄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이 황학루에 올라 눈앞에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어 보려는데

좀처럼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고개를 들어보니 최호의 이 시가 누각에 씌어 있었다.

이백은 이 시를 보고 나서 “눈앞의 경치를 표현하지 못하는데, 최호가 시를 지어 누각에 써 놓았네”라고 탄복하면서

시 짓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황학루가 있는 황학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내려간 곳에 각필정(擱筆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으니

 ‘붓을 놓은 정자’라는 뜻의 이 정자 이름이 바로 이와 같은 일화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학루 안에 진열되어 있는 역대 황학루의 모형을 보면 당나라 때의 황학루는 2층짜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5층이나 되는 고층 누각인 데다 안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내리기에는 편리하지만 예스러운 맛이 없어서 많이 아쉽다.


다만 누각 앞에 황학 두 마리를 조각한 황동상을 세우고 황학귀래상(黃鶴歸來像)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한다.

누각의 고층화로 인해 잃어버린 운치를 다소나마 만회해 주는 셈이다. (이상 검색 자료)


황학루(黄鹤楼) / 최호(崔颢 704~754)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나버려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 그대로 유유히 떠도네.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내 건너 한양의 나무숲 뚜렷하고
芳草萋萋鸚鵡洲 (방초처처앵무주) 꽃다운 풀 앵무주에 더부룩 자랐구나.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멘고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


어구(語句)
黃鶴樓 : 호북성 武漢市(무한시)에 있는 누각. 양자강과 南湖(남호)에 임했고 蜀(촉)의 費褘(비위)가 신선이 되어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 하여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하고〈寰宇記〉, 辛氏(신씨) 술집에 온 사람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그림 학이 날아가 버려 신씨가 누각을 세워 항학루라 했다고도 하며〈武昌誌〉,

仙人(선인) 子安(자안)이 황학을 타고 여기를 지났다고도 함〈齊諧志>
昔人 : 옛날 사람. 古人(고인).
空 : 헛되이. 부질없이.
悠悠 : 여유있고 한가함.
歷歷 : 하나하나 그 자취가 뚜렷함.
漢陽 : 무한시 서쪽에 있던 지명. 漢陽縣(한양현)이었고 晴川閣(청천각)이 있다고 함.
萋萋 : 초목이 우거져 무성함.
鸚鵡洲 : 무한시의 남쪽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섬. 後漢(후한)의 江夏太守 黃祖(강하태수 황조)가 禰衡(이형)을 죽인 곳으로,

이형은 문인으로 단숨에 글을 잘 짓는 재주로 독수리에 비기기도 했고, 曹操(조조)를 모욕하다가 쫓겨나 황조에게 의지해

 ‘鸚鵡賦(앵무부)’를 지어 칭찬을 받기도 했으나 황조의 비위를 거슬려 피살당하니,

앵무주는 그의 ‘앵무부’에서 따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앵무새를 바친 사람이 있어 이름 삼았다는 異說(이설)도 있음.
鄕關 : 고향.
煙波 : 아지랑이나 안개가 낀 水面(수면).
江上 : ① 강가의 언덕. ② 강물 위. 여기서는 ①임.
使 : 하여금.


감상(鑑賞)


황학루(黄鹤楼)는 북송 시대부터 20 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교의 명산성지로 이용되었으며

최호(崔颢, 704~754), 이백(李白) 뿐만 아니라, 역대의 저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 가도(贾岛, 779~843),

육유(陆游, 1125~1210), 양신(杨慎, 1488~1559), 장거정(张居正) 등의 작품으로 인해 천하절경으로 알려져 왔다.


이 시는 당시(唐詩)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최고작으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인구(人口)에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작품이다.


일설에 따르면 천보(天宝) 3년에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황학루(黄鹤楼)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최호(崔颢)의 시를 발견하고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창강(长江,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崔颢)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함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그 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市)의 봉황대로 가서 칠언율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를 지으니,

착상과 운자가 최호의 황학루와 같아 이 또한 명작으로 이름이 높다. 


이 시 황학루(黄鹤楼)에서 수련(首聯, 기起 1~2구)은 전설상의 선인(仙人)에 대한 동경의 염(念)을 담았고,

함련(頷聯, 승承 3~4구)에서는 그 동경이 헛된 것임을 흰구름에 의탁해 시상을 이었는데,

이 두 연은 회고(懷古)의 정을 담았다 하겠다.


경련(頸聯, 전轉 5~6구)은 눈앞에 펼쳐지는 뛰어난 경치를 그린 서경(敍景, 사경寫景)으로 멋지게 시상을 전환했다.

물론 함련과 경련은 시작법(詩作法)대로 대구(對句)로 구성되었다.

미련(尾聯, 결結 7~8구)은 나그네의 처지가 된 자신의 시름과 망향(望鄕)의 정을 읊어 시를 마무리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