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9장] 민권투쟁의 중심에 서다

2013/01/10 08:00 김삼웅

 

 

1963 영국 우드블록

함석헌은 1962년 2월 10일 미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예정으로 미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의 갑작스런 방미에는 세간의 의혹이 따랐다. 당시 미국무성은 후진국의 정계ㆍ학계ㆍ종교계 등의 중진급 인사들을 초청형식으로 미국으로 불렀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오피니언 리더를 양성하려는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유당 시대부터 노태우정권기까지 적지 않은 ‘친미파’가 육성되었다.

함석헌의 경우는 달랐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이 <5ㆍ16을 어떻게 볼까?>를 영역하여 미국무성에 보내고, 국무성은 군사쿠데타의 와중에서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느냐고 하여 그를 초청한 것이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유럽, 인도, 아프리카의 콩고, 슈바이처가 사는 곳, 특히 퀘이커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케냐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출국하기 전날 밤을 밝혀 <수난의 여왕께 드리는 유언ㆍ예언 - 잠시 고국을 떠나면서>를 쓰고 한국을 떠났다. 이 글은 <사상계> 3월호에 실렸다. 편집자 이름으로 이같은 사실과 함께 귀국이 반년 내지 1년 후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밤이 새면 나는 간다. 말은 미국을 간다지만 미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계획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한 해 있다 돌아온다지만 한 해가 아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길이요, 세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바퀴를 도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이 불러서 간다지만 미국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그 국무성이 어떻게 나를 부르며 내가 뭐하자고 그 명령에 복종할까? 미국이 어디 있을까? (주석 21)

함석헌은 이 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길”이라 쓴 대로, 당초의 여정이 크게 앞당겨졌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단순한 ‘이별가’ 수준이 아니었다. 군부세력이 쉽게 민간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 어려움이 올 것을 예상했다.

“이제 어려움이 올 것이다. 역사는 싸움이다. 시대와 시대, 사상과 사상의 싸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삼켜 버리기 전은 쉽지 않는 싸움이다. 시대를 넘겨 주기를 초등학교 교장이 졸업장을 주듯이 한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날껏 자유는 인사로 얻어진 일이 없다. 기성복처럼 입혀줌을 받은 일이 없다.” (주석 22)

함석헌은 미국 여행 중에 국내 정세,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에는 탈권 당한 민주당 정부 요인과 5ㆍ16에 반대한 장성 등 정치망명자가 많았고, 교포들도 <사상계>에 쓴 그의 글을 연상하면서 사자후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문제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포들의 오해가 따랐으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을 세워 군사독재를 비판하지만, 해외에 나와서는 삼가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3개월 간의 미국 시찰을 마친 함석헌은 워싱턴 D.C 소재 물리학자 김용준 교수의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지냈다. 해외 순방중에도 이전부터 시작된 1일 1식과 한복차림을 유지하였다. 한인 교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서 ‘함석헌 사쿠라’란 비난도 나돌았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모임인 펜들힐로 가서 지내다가 1963년 1월 초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버밍험에 있는 퀘이커대학 우드브록 컬리지에서 3월 말까지 한 학기를 보냈다. 이때에 퀘이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퀘이커 교도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서부 지역과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에든버러를 돌아보았다. 4월 28일 독일로 건너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안내로 스위스,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주석
21> <사상계>, 1962년 3월호, 40쪽.
22> 앞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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