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3 08:00 김삼웅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말기적인 전재를 일삼았다.
58년 연초 형법의 언론보도 규제 조항으로 언론기본권을 제약하고,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5월 2일 실시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관권이 동원된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126석(민주당 79석)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함석헌의 필봉은 이 지점에서 더욱 날을 세운다.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는 팔고 억지를 쓰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 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 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있을까? 정육점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주석 14)
이 글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정부는 함석헌을 구속했다. 8월 8일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구속 이유는 남한을 ‘꼭두각시’라 하여 정부를 부정하는 이적행위를 했다고 몰았다. 20대의 젊은 담당 형사는 함석헌을 수사하면서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았다. 자식보다 어린 경찰의 만행 앞에 참담함을 가누기 어려웠다.
트레이드마크처럼된 수염은 소련군에 잡혀있을 때 깎지 못하고, 38선을 넘으면서 그대로 두었던 것이 자라서 상징처럼 되었다. 경찰은 일제나 소련군 치하와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일선 형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이문동’과 ‘남산’, 전두환 정권의 ‘남영동’이 집권자의 의지의 발현이듯이 자유당 정권기의 경찰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다.
함석헌은 ‘꼭두각시’의 두목을 비롯하여 수족들의 사냥감이 되었으나, 민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사상계>는 불티나게 팔렸다. 정의와 진실에 목말라했던 씨알들에게 모처럼 들려주는 청량수였다. 원래 이 글에는 제목이 없었던 것을 편집자 계창호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붙인 것이다. (주석 15)
그런데 사장 장준하의 이름으로 쓴 <사상계> 8월호 권두언 말미에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는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는 거두어 진다”고 쓴 것으로 보아 장준하의 뜻이 배인 것 같다. <사상계> 8월호에는 ‘실존주의 특집’과 주요한의 <우리의 비원>, 유기천의 <자유사회>, 김팔봉의 <우리가 걸어온 30년> 등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단연 돋보이는 글은 함석헌의 이 논설이었다.
함석헌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20일 만에 서울시경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딱히 보안법으로 얽을 조항이 없었고 국민의 비등한 여론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이승만 정권은 농성중인 야당 의원들을(무술경위들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하고 신국가보안법을 변칙 처리했다. 내용 중에는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를 끼워넣었다. 함석헌 류의 정부 비판을 봉쇄하려는 언론탄압용 조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석헌은 정치평론, 바꿔 말해서 독재비판의 험난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된 함석헌은 9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통해 다시 소신을 밝혔다. “정부를 비난했기 때문에 정부를 부인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무슨 정부요, 관청이냐?’ 하는 말을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들으면 물론 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말을 중공이나 소련보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욕을 하는 것은 하리만큼 사랑하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받는 자보다 도량이 넓고 커야 할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투옥에도 필화에도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충견이 된 지식인과 언론인의 핏발 선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피력한다.
나는 앞으로도 싸움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나 자신이나 남이나 우리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것이 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동포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결코 감정으로, 미움으로는 아니 하기로 맹세한다. 감히 장담을 하리오마는 적어도 그리하고자 힘쓸 것이요, 하나님이 그 실력 주시기를 겸손히 빌 것이다. (주석 17)
이 해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월남 이상재 언론상을 받았다.
글을 문제삼아 감옥에 가두는 권력이 있는가 하면 상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 12년 동안에 함석헌만큼 이승만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는 일제 36년과 군정ㆍ전쟁ㆍ이승만 독재를 겪으면서 몸을 사리고 순치된 지식인ㆍ언론인들의 비판정신을 일깨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14> 앞의 책.
15> 계창호, <젊은 날을 불사른 사상계>, 장준하 선생 추모문집위원회 편,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나남출판, 1995.
16> <사상계>, 1958년 9월호.
17> 앞과 같음.
58년 연초 형법의 언론보도 규제 조항으로 언론기본권을 제약하고,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5월 2일 실시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관권이 동원된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126석(민주당 79석)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함석헌의 필봉은 이 지점에서 더욱 날을 세운다.
선거를 하면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는 팔고 억지를 쓰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 뿐이요,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 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나? 칼은 있기는 있나? 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치들이 칼이 있을까? 정육점의 칼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주석 14)
이 글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정부는 함석헌을 구속했다. 8월 8일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구속 이유는 남한을 ‘꼭두각시’라 하여 정부를 부정하는 이적행위를 했다고 몰았다. 20대의 젊은 담당 형사는 함석헌을 수사하면서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았다. 자식보다 어린 경찰의 만행 앞에 참담함을 가누기 어려웠다.
트레이드마크처럼된 수염은 소련군에 잡혀있을 때 깎지 못하고, 38선을 넘으면서 그대로 두었던 것이 자라서 상징처럼 되었다. 경찰은 일제나 소련군 치하와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일선 형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이문동’과 ‘남산’, 전두환 정권의 ‘남영동’이 집권자의 의지의 발현이듯이 자유당 정권기의 경찰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다.
함석헌은 ‘꼭두각시’의 두목을 비롯하여 수족들의 사냥감이 되었으나, 민중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사상계>는 불티나게 팔렸다. 정의와 진실에 목말라했던 씨알들에게 모처럼 들려주는 청량수였다. 원래 이 글에는 제목이 없었던 것을 편집자 계창호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붙인 것이다. (주석 15)
그런데 사장 장준하의 이름으로 쓴 <사상계> 8월호 권두언 말미에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는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를 뿌려야 의의 열매는 거두어 진다”고 쓴 것으로 보아 장준하의 뜻이 배인 것 같다. <사상계> 8월호에는 ‘실존주의 특집’과 주요한의 <우리의 비원>, 유기천의 <자유사회>, 김팔봉의 <우리가 걸어온 30년> 등 읽을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단연 돋보이는 글은 함석헌의 이 논설이었다.
함석헌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으로 20일 만에 서울시경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딱히 보안법으로 얽을 조항이 없었고 국민의 비등한 여론때문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이승만 정권은 농성중인 야당 의원들을(무술경위들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하고 신국가보안법을 변칙 처리했다. 내용 중에는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를 끼워넣었다. 함석헌 류의 정부 비판을 봉쇄하려는 언론탄압용 조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함석헌은 정치평론, 바꿔 말해서 독재비판의 험난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된 함석헌은 9월호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통해 다시 소신을 밝혔다. “정부를 비난했기 때문에 정부를 부인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게 무슨 정부요, 관청이냐?’ 하는 말을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들으면 물론 분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말을 중공이나 소련보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욕을 하는 것은 하리만큼 사랑하고 믿고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받는 자보다 도량이 넓고 커야 할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투옥에도 필화에도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충견이 된 지식인과 언론인의 핏발 선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피력한다.
나는 앞으로도 싸움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나 자신이나 남이나 우리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것이 나의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동포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결코 감정으로, 미움으로는 아니 하기로 맹세한다. 감히 장담을 하리오마는 적어도 그리하고자 힘쓸 것이요, 하나님이 그 실력 주시기를 겸손히 빌 것이다. (주석 17)
이 해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월남 이상재 언론상을 받았다.
글을 문제삼아 감옥에 가두는 권력이 있는가 하면 상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유당 독재 12년 동안에 함석헌만큼 이승만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는 일제 36년과 군정ㆍ전쟁ㆍ이승만 독재를 겪으면서 몸을 사리고 순치된 지식인ㆍ언론인들의 비판정신을 일깨우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주석
14> 앞의 책.
15> 계창호, <젊은 날을 불사른 사상계>, 장준하 선생 추모문집위원회 편,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나남출판, 1995.
16> <사상계>, 1958년 9월호.
17>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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