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필화사건 이후 정열적으로 글을 썼다.
주로 <사상계>의 지면이지만 <사조(思潮)>와 <신태양>, <새벽> 등 월간지에도 기고하였다. <나의 인생시초(詩抄)>, <사자냐 아메바냐>, <새 삶의 길>, <정치와 종교>, <우리가 어찌할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때가 오고 있다>, <물 아래서 올라와서>, <나라는 망하고>, <3ㆍ1정신>,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백두산 호랑이>, <남강ㆍ도산ㆍ고당>, <사모님론>,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 것이냐 카에자의 것이냐>, <한배움>, <38선을 넘나들어>, <들사람 얼(야인정신)>, <씨알의 설움>,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간디의 아슈람>, <에밀레> 등이다. <사상계>에 쓴 글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글이다. (주석 18)
1959년 1월호 <새벽>에 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씨알의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이었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안법 개정을 통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면서 1959년 4월 30일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는데도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조기에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못가도록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1960년 초부터 3월 1일까지 44일 동안 자신과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을 벌였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에 앞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취재 기자의 전언이다.
단식으로 함 선생의 용모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은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핏기가 가시고 피로가 느껴진다. “철저히 단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설탕물도 먹구….” 결국 문제는 ‘마음이 맑아지고’ 참회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며 앞으로도 글도 쓰지 않고 참회의 고행을 계속함으로 2개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발표도 안 하실 작정이라고 하시며 극구 “거 좀 내 얘기 안 나오게 해줘! 글이 문제야 말이 문제야, 난 죄인이야!” - 함 선생의 간곡한 말씀에 기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하시던 함 선생, 모 신문을 읽으시더니,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라, 그래 일요일에 학교 나오라는 사람이 나쁘지, 건 잘못했구만, 학생이 어디 나쁜가. 젊은 기백으로 의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 사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해, 쩍 하면 도미(渡美)한다 빽찾구. 학생 나무랄 것 있나. 교육자가 나빠. 학생들 말이 교수들의 강의에 환멸을 느낀대요. 교수들이 사상이 있어야지. (주석 19)
함석헌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3ㆍ15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함석헌은 종로 2가 100번지 사상계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시위대열을 지켜보았다.
“4월 19일 두 분(함석헌과 장준하-필자)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주석 20)
4ㆍ19날 시위 시민ㆍ학생들은 종로 화신 앞에서 종로 5가까지 한 길을 가득 메웠을 적에 한청빌딩의 사상계 깃발을 보고 격려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이, 씨알들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승만 12년 독재와 자유당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체세력이 없는 혁명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의 몫이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분열하고 무능함을 내보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를 썼다. 혁명 뒤의 혼란과 민주당의 분열상에 분노하는 글이다.
“4ㆍ19혁명은 실패다. 허정 과도정부는 그만두고 장면의 정부는 이날까지 해논 것이 무엇인가? 당파싸움하는 동안에 겨울은 다 되고, 생산기관 하나 신통히 돌아가는 것 없고, 민중은 못 살겠다고만 하는데, 농 안에 가뒀던 쥐는 다 도망가고…." (주석 21)
‘농 안에 가뒀던 쥐’는 이승만의 하와이 탈출과 부정선거 원흉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법망을 피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새로 쥐를 잡지는 못하나마, 잡아 준 쥐도 놓쳐? 나는 사형 폐지 주장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원흉이라고 죽여야 한다는 것 아니요, 또 나 자신이 이승만이요 자유당인 판에, 감히 애국심의 전매특허나 하는 듯 엄벌주의 주장할 양심도 없지만, 정권을 쥐고 민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 하면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고, 놔주면 놔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음 분명히 처리를 했어야지,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다 놓쳐버렸다. 대체 왜 다 잡아 논 쥐를 못먹나? 이 고양이가 벌써 늙었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도둑질을 해 배가 불렀나? (주석 22)
함석헌은 4ㆍ19가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헛총’이었기 때문이라 비유하였다. 역설논법이다. 당시 세간에 ‘헛총’이란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4ㆍ19는 실패다. 왜 실패했나?
헛총이었기 때문이다. 4ㆍ19혁명은 헛총이다. 헛총 쏜 학생들이 잘못이란 말은 아니다. 헛총 쏜 것 잘했지. 마땅히 헛총이어야지. 헛총의 뜻은 무엇인가?
이 도둑놈들아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쏜다.
우리게 정말 총알 있다.
그러나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헛총을 쏘면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요, 알을 넣어서 쏘면 짐승으로 여긴 것이다. 마음은 헛총에 맞아 살아나는 것이요, 살은 알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허칙실(虛則實)이요 실칙허(實則虛)다. 학생들 잘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나? 쏜 것은 도둑놈 쫓으려고 쏜 것인데, 앞에 있던 몇 놈은 사람다운 정신을 차려서는 아니지만 앞에 있었던 만큼 혼쌀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뒤에 섰고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것들도 맘은 같은 도둑인지라 알이 아니든 줄 알자 기어 든 것이다. (주석 23)
함석헌은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완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예언가와 같은 말을 남긴다.
“길가의 막돌을 되는대로 던지는 듯 한 이 글을 다 썼는데 때 아닌 겨울 장마가 한 주일이냐 계속하다가 해가 나나보다 했더니 또 눈을 뿌린다. 그것은 무슨 예언인가?” (주석 24)
주석
18> 정현필 정리, <함석헌 저작 연대별 분류>, <함석헌 연구>, 제3권 제1호, 2012.
19> S기(記), <단식 44일 끝나다>, <세계>, 1960년 4월호.
20> 이문휘, <문화강연회 가치를 높이 들고>,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50년과 장준하>, 1995.
21> <사상계>, 1961년 1월호, 권두논단.
22> 앞과 같음.
23> 앞과 같음.
24> 앞과 같음.
주로 <사상계>의 지면이지만 <사조(思潮)>와 <신태양>, <새벽> 등 월간지에도 기고하였다. <나의 인생시초(詩抄)>, <사자냐 아메바냐>, <새 삶의 길>, <정치와 종교>, <우리가 어찌할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때가 오고 있다>, <물 아래서 올라와서>, <나라는 망하고>, <3ㆍ1정신>,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백두산 호랑이>, <남강ㆍ도산ㆍ고당>, <사모님론>, <이단자가 되기까지>, <내 것이냐 카에자의 것이냐>, <한배움>, <38선을 넘나들어>, <들사람 얼(야인정신)>, <씨알의 설움>,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간디의 아슈람>, <에밀레> 등이다. <사상계>에 쓴 글은 일종의 자서전적인 글이다. (주석 18)
1959년 1월호 <새벽>에 쓴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씨알의 꿈틀거림을 내다보는 예언서와 같은 글이었다. 이승만의 노욕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안법 개정을 통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면서 1959년 4월 30일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는데도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조기에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못가도록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1960년 초부터 3월 1일까지 44일 동안 자신과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을 벌였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단식에 앞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취재 기자의 전언이다.
단식으로 함 선생의 용모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 우선 머리와 수염을 깎은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핏기가 가시고 피로가 느껴진다. “철저히 단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설탕물도 먹구….” 결국 문제는 ‘마음이 맑아지고’ 참회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며 앞으로도 글도 쓰지 않고 참회의 고행을 계속함으로 2개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발표도 안 하실 작정이라고 하시며 극구 “거 좀 내 얘기 안 나오게 해줘! 글이 문제야 말이 문제야, 난 죄인이야!” - 함 선생의 간곡한 말씀에 기자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하시던 함 선생, 모 신문을 읽으시더니,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라, 그래 일요일에 학교 나오라는 사람이 나쁘지, 건 잘못했구만, 학생이 어디 나쁜가. 젊은 기백으로 의당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 사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한심해, 쩍 하면 도미(渡美)한다 빽찾구. 학생 나무랄 것 있나. 교육자가 나빠. 학생들 말이 교수들의 강의에 환멸을 느낀대요. 교수들이 사상이 있어야지. (주석 19)
함석헌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3ㆍ15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에 항의하는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온 함석헌은 종로 2가 100번지 사상계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시위대열을 지켜보았다.
“4월 19일 두 분(함석헌과 장준하-필자)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한청빌딩에서 지켜보시던 모습은 묵묵히 역사의 격류속으로 되새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주석 20)
4ㆍ19날 시위 시민ㆍ학생들은 종로 화신 앞에서 종로 5가까지 한 길을 가득 메웠을 적에 한청빌딩의 사상계 깃발을 보고 격려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답례하면서, 이름 없는 민초들이, 씨알들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들불처럼 일어나는 것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학생과 시민들은 이승만 12년 독재와 자유당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체세력이 없는 혁명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의 몫이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당이 되면서 분열하고 무능함을 내보였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1월호에 <국민감정과 혁명완수>를 썼다. 혁명 뒤의 혼란과 민주당의 분열상에 분노하는 글이다.
“4ㆍ19혁명은 실패다. 허정 과도정부는 그만두고 장면의 정부는 이날까지 해논 것이 무엇인가? 당파싸움하는 동안에 겨울은 다 되고, 생산기관 하나 신통히 돌아가는 것 없고, 민중은 못 살겠다고만 하는데, 농 안에 가뒀던 쥐는 다 도망가고…." (주석 21)
‘농 안에 가뒀던 쥐’는 이승만의 하와이 탈출과 부정선거 원흉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법망을 피한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새로 쥐를 잡지는 못하나마, 잡아 준 쥐도 놓쳐? 나는 사형 폐지 주장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원흉이라고 죽여야 한다는 것 아니요, 또 나 자신이 이승만이요 자유당인 판에, 감히 애국심의 전매특허나 하는 듯 엄벌주의 주장할 양심도 없지만, 정권을 쥐고 민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써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 하면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고, 놔주면 놔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음 분명히 처리를 했어야지, 어물어물하는 동안에 다 놓쳐버렸다. 대체 왜 다 잡아 논 쥐를 못먹나? 이 고양이가 벌써 늙었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도둑질을 해 배가 불렀나? (주석 22)
함석헌은 4ㆍ19가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유를 ‘헛총’이었기 때문이라 비유하였다. 역설논법이다. 당시 세간에 ‘헛총’이란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4ㆍ19는 실패다. 왜 실패했나?
헛총이었기 때문이다. 4ㆍ19혁명은 헛총이다. 헛총 쏜 학생들이 잘못이란 말은 아니다. 헛총 쏜 것 잘했지. 마땅히 헛총이어야지. 헛총의 뜻은 무엇인가?
이 도둑놈들아 물러가라.
아니 물러가면 쏜다.
우리게 정말 총알 있다.
그러나 너희를 사람으로 본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헛총을 쏘면 사람으로 대접한 것이요, 알을 넣어서 쏘면 짐승으로 여긴 것이다. 마음은 헛총에 맞아 살아나는 것이요, 살은 알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허칙실(虛則實)이요 실칙허(實則虛)다. 학생들 잘했다.
그런데 왜 실패했나? 쏜 것은 도둑놈 쫓으려고 쏜 것인데, 앞에 있던 몇 놈은 사람다운 정신을 차려서는 아니지만 앞에 있었던 만큼 혼쌀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뒤에 섰고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것들도 맘은 같은 도둑인지라 알이 아니든 줄 알자 기어 든 것이다. (주석 23)
함석헌은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완수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말미에서 예언가와 같은 말을 남긴다.
“길가의 막돌을 되는대로 던지는 듯 한 이 글을 다 썼는데 때 아닌 겨울 장마가 한 주일이냐 계속하다가 해가 나나보다 했더니 또 눈을 뿌린다. 그것은 무슨 예언인가?” (주석 24)
주석
18> 정현필 정리, <함석헌 저작 연대별 분류>, <함석헌 연구>, 제3권 제1호, 2012.
19> S기(記), <단식 44일 끝나다>, <세계>, 1960년 4월호.
20> 이문휘, <문화강연회 가치를 높이 들고>,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50년과 장준하>, 1995.
21> <사상계>, 1961년 1월호, 권두논단.
22> 앞과 같음.
23> 앞과 같음.
24> 앞과 같음.
'▷ 참스승 함석헌 > 함석헌 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회] 쿠데타 주체 ‘정신분열증 노인’ 망발 (0) | 2014.08.05 |
---|---|
[41회] 5·16쿠데타에 첫 포문 열어 (0) | 2014.08.02 |
[39회] 이승만 정권에 투옥ㆍ수모 겪어 (0) | 2014.07.31 |
[38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필화사건 (0) | 2014.07.30 |
[37회] 천안에서 ‘서울농장’ 경영 (0) | 2014.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