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
013/01/05 08:00 김삼웅
4ㆍ19 뒤 한 때의 혼란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혼란상이었다. 일부 학생과 혁신계의 과도한 주장도 있었지만,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차츰 진정되어갔다. 연말부터는 정국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민주당의 분당사태로 장면 정부가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군사쿠데타의 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1961년 5월 16일,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반란군의 주모자 박정희가 일본군 다카키 마사오인 것 같다는 장준하의 말을 듣고는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가누기 어려웠다. 반란군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권을 장악, 4월혁명으로 태어난 장면 정부를 타도했다. 쿠데타를 첫 모의한 시점은 1960년 9월 10일이다. 이들은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가 좌절되고, 5월 12일로 연기했다가 16일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반란군은 최고권력기구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입법ㆍ행정권과 사법의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국회ㆍ정당ㆍ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미군정 3년과 이승만 12년 독재에 시달려온 국민은 4월혁명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모처럼 자유를 찾았다가 1년여 만에 다시 포악한 군사독재를 맞게 되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로 군사반란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언론인ㆍ지식인들이 겁을 먹고 비판은커녕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절망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 군부의 정치개입과 군국주의가 어떻게 득세하고, 얼마나 폐악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감이 더욱 깊었다. <사상계>는 6월호 제작이 거의 진행된 와중에 5ㆍ16을 겪으면서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필자의 주관인지는 몰라도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 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ㆍ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주석 25)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 대목을 들어 장준하도 5ㆍ16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선전한다.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합법 정권이 총칼로 전복되고, 정부 각료를 비롯하여 수천 명이 갖가지 이유로 체포ㆍ구금되고 국회가 해산된 공포정치의 상황에서 장준하나 <사상계> 편집위원들이라고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여 군사반란 세력에 포문을 열었다. 함석헌이 저격수로 나섰다. 7월호 권두논문으로 36쪽에서 47쪽까지에 실린 200자 100매 분량의 <5ㆍ16을 어떻게 볼까?>는 반란군 세력의 서릿발치는 계엄하에서 쓰이고 게재되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장준하는 잡지사의 문을 닫을 결심을 하고 실었다.
글은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일제 패망 뒤에 광복군이 되거나, 해방 후 독립만세를 부른 것과 비유된다.
함석헌은 논설의 말미에서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주석 26)
함석헌은 먼저 5ㆍ16쿠데타가 가져온 공포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이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 난 국민은 아무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27)
함석헌은 5ㆍ16을 준열하게 비판했다. 4월의 학생들이 잎이라면 5월의 군인들은 꽃이라는 비유를 들어 조속히 부대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최근까지 박정희 추종자와 사이비 언론인 중에는, 함석헌이 5ㆍ16을 꽃에 비유할 정도로 지지했노라는 허튼 언설을 편다.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거두절미한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ㆍ16은 꽃 한 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ㆍ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혀야 하는 것이다. (주석 28)
함석헌은 5ㆍ16의 군사반란을 결코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하지 못한다. 어떤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선의로 했다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주석 29)
한 사학자는 함석헌의 이 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놨다.
“그 잘못을 꾸짖는 준엄한 질타이기는 하나 그저 질타에 그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타이르듯이 무엇이 잘못이며 그 잘못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가를 누누이 설명한다. 쿠데타는 크게 잘못된 불장난이지만, 이제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첨에 약속한 대로 하루라도 속히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는 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쿠데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하였지만, 혁명이 무엇인지나 알고 했느냐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주석 30)
함석헌의 글이 세상에 나오면서 민중은 막혔던 숨통이 다소나마 터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고,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처신에 몸 둘 바를 몰라했으며, 쿠데타 주역들은 분개했다.
주석
25> 김삼웅, <장준하 평전>, 423쪽, 시대의 창, 2009.
26> <사상계>, 1961년 7월호.
27> <사상계>, 1961년 7월호.
28> 앞과 같음.
29> 앞의 책.
30>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608쪽, 인간과 자연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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