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63년 2월 영국 체류 중일 때 장준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함석헌이 유럽을 방문하고 있을 즈음 국내 정세에 더욱 소연해졌다. 군부세력이 4대의혹사건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이 돈으로 민정당을 사전 조직한데 이어 박정희는 민정 불참의 선서를 했다가 번복하여 민정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함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大平) 일본 외상과 비밀 회동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의 대가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상업차관 2억 달러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군정 4년 연장을 시도하는 등 국내 정세가 위급하니, 이를 질타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상계>는 1963년 4월호를 ‘창간10주년 기념특대호’로 꾸미면서 권두에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실었다. 28~31쪽에 실린 짧은 글이지만, 그의 글 어느 것 못지 않는 알찬 내용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부제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가 의미하듯이, 주권자가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였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여러운 것 아니다. 간단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더라, 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지, 무슨 복잡한 것이 있겠냐?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군인은 깨끗해야 한다고 늘 하는 말 아닌가? 소견이 옳았거나 글렀거나, 하여간 생각에 군정을 꼭 해야겠다 하거든 군정이라 하고 해! 또 권력을 좀 쥐고 해 먹고 싶거든 그렇다 하고 해! 호랑이도 호랑이 노릇하고 독수리도 청천백일에 내놓고 남의 고기 먹는데 너라고 못할 것 없지. (주석 23)
함석헌은 예리한 필봉으로 부정어법을 통해 진정한 ‘군인정신’을 알리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군인’을 질타한다.
또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 말할까? 그것도 같은 말이다.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 년 전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지.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글귀를 쓰는 것은 민중을 속여 바치는 척 하면서도 속살로는 그냥 쥐고 있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의 논점은 군인들이 탈취해간 정권을 꼼수 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이다. “천하는 천하요….”의 구절은 맹자의 주장을 상기시킨 대목이다.
당초 잘못은 민중이 깨지 못한 데 있다. 민중 스스로가 제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됐지, 죽음으로 자유 지키는 민중에 도둑이 어디 둘 수 있나?
또 바른 길 말할까? 이것도 다 알면서 못 본척 하는 길이다. 무슨 길? 언론의 자유다. 민중이 깨는데 언론의 자유 없이 어떻게 되겠냐? (주석 24)
박정희의 군정연장 의도가 노골화되면서 신문들은 점차 연골화되어 갔다.
쿠데타 초기에 <민족일보> 사장의 처형 등을 지켜보면서 공포감에 빠진 언론(인)은 ‘민정이양’의 공약이 군정연장에서 다시 민정참여로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데도 크게 비판의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감옥행’을 권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감옥문 만이 정말 민정으로 건너가는 직통로다. 진리란 참 묘한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자들이 민중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감옥을 짓지만,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까 가지고 나오는 것을 어찌하나? 그러므로 진리는 막강하다. 압박하는 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감옥을 넓히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이 넓어지고 높아질수록 자유의 길은 열리는 것을 어찌나.
민권을 찾고싶거든 감옥으로 들어가라!
살고 싶거든 죽음의 입으로 들어가라! (주석 25)
함석헌이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인의 갈 곳은 감옥뿐”이라 썼다. 함석헌의 이 시론이 소로와 맥이 닿아 있음을 본다. 함석헌이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시론을 쓴 <사상계> 4월호에는 창간 10주년 특집의 하나로 유진오ㆍ김팔봉ㆍ안수길ㆍ현승종ㆍ김성한ㆍ신상초ㆍ안병욱이 “나와 사상계”란 주제로 각기 인연과 사연을 피력했다. 당시 주간이던 안병욱의 글은 함석헌이 ‘세상에 불려나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소상하다.
연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 선생 댁에 들렸다.
지금은 원효로에 살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촌 이대 앞에서 사셨다. 열 칸 쯤 되는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함 선생을 뵈었다. 두 칸쯤되는 장판방에 조그만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고 계시다가 반가히 맞아주셨다. 톨스토이는 바이블을 읽기 위해서 54세 때부터 히랍어공부를 시작했지만, 함 선생의 히랍어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물어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대단하시다.
한자에 능하시고 영어를 잘하시지만 그런 빛이 통 없다. 오산고보에서 영어선생들이 모른 것이 있으면 함 선생한테 가서 물었다. 그는 정말 도깨비였다.
<사상계>에 글을 쓰시라고 하였더니 “내가 뭘” 하시면서 사양을 하신다. 그 후 몇 번 들렸다. 안 쓰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은 쓰셨다. 그후 내 성화에 못견뎌서 여러 번 쓰셨고, 쓰실 때마다 남이 못하는 소리를 하셨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리를 쓸래면 뭣 때문에 글을 써, 글이란 나 아니면 못하는 소리를 써야 돼”.
언젠가 나 보고 하신 말씀이다. 글 다운 글을 쓰라고 책하시는 말씀 같았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 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했다. (주석 26)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
함석헌은 귀국을 서둘렀다. 안병무의 회고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 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류(落류)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주석 27)
이 부문과 관련, 함석헌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래서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이던 인도여행 계획도 취소했지. 그래 돌아와서는 <사상계>의 장준하 한테 갔고 사상계사가 주최해서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대광학교 운동장에서도 강연을 했는데, 그때 사람이 8, 9만이나 모였다고 해요. 그게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면 시작인데, 나는 사회참여니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러던 중 6ㆍ3 데모가 터졌지. 이런 때 가만 드러누워 있으니 이걸 어떡하지 그러다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나와서 머리 깎고, 세상이 다 알거나 말거나 나대로 책임을 지는 생각을 하고, 깊이 생각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두 주일 단식하고 그랬지요. (주석 28)
주석
23> <사상계>, 1963년 4월호, 28~29쪽.
24> 앞의 책, 30쪽.
25> 앞의 책, 31쪽.
26>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66쪽.
27>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었는가 - 안병무와의 대담>, <씨알의 소리>, 4월 창간호, 1970년.
28>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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