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7 08:00 김삼웅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 사진은 변종만 시민기자.

 

김근태는 10월 21일 휴전선을 넘어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공단창립 5주년 행사 참석이었다. 개성공단은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 협력의 상징적 사업으로,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인력과 부지가 결합하여 설립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강경책과 연평도해전 그리고 금강산 관광의 폐쇄 등 남북관계의 위기국면에서도 여전히 유지될 만큼, 유일한 남북공동사업체가 되고 있다.

김근태는 북한의 갑작스런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다시 긴장상태에 빠지고, 당내 일부에서도 반대 여론이 비등한데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개성공단을 방문하였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한나라당이 전쟁도 불사한다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크게 위협받은 상황에서 김근태는 “평화가 곧 밥”이라는 성명을 내고 방북길에 올랐다. 자칫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개성공단에서 남북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북한 정권을 향해 핵실험을 중단하라고 말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 역시 신변의 위험을 무릅 쓴 발언이었다. 이후 북한은 2차 핵실험을 포기하고 6자회담에 나오게 되었다.

사단은 점심시간에 벌어졌다. 방문단 일행과 남북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북한 여성봉사원이 다가와 함께 춤을 출 것을 권했다. 이 여성은 김근태가 누군줄도 몰랐다. 그는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잠깐 무대위에 올라가 엉거주춤 서 있다가 내려왔다. 끝내 거절하다가는 남쪽 남자들이 옹졸하다고 핀잔을 들을까봐 이끌려 갔다고 술회한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과 수구신문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당 대표가 북한 여성과 개성에서 춤판을 벌였다는 자극적인 신문 제목이 뽑히고, 김근태는 붉은 색깔의 공격을 받았다. 6ㆍ25 당시 행방불명이 된 형들의 얘기까지 깃들여졌다. 서울로 귀환한 김근태는 수구언론의 개혁이 없이는 남북 화해협력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지지자들이 김근태의 춤은 ‘평화의 춤사위’였다고 들고 일어나면서 야당과 언론의 매도는 수그러들었다.

김근태는 열린 마음으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그리고 개성공단이 성공하도록 도왔다. 2004년 12월 20일에 쓴 편지 <불티나게 팔린 개성 냄비>에서는 이렇게 썼다.

롯데 백화점에서 북한산 냄비가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뉴스다운 뉴스였습니다. 한국의 설비와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만나 생산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이틀만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정말 상징적인 뉴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 서로 가장 멀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냄비를 매개로 만나게 된 것이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성공단을 터전삼아 남과 북이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들이 근로환경에도 주의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당연히 배려를 해야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개성공단은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남과 북이 상생하는 협력의 용광로로 발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이 함께 꿈꾸는 희망의 근거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은 우리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보살필 필요가 있는 그런 곳입니다.(하략)
(주석 4)


주석
4> 김근태, <일요일에 쓰는 편지>, 195~197쪽, 샛별 D&P,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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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6 08:00 김삼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2006년 6월 28일 오전 당사에서 열린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 지도부를 선출한 우리당의 행로는 그러나 만만치가 않았다. 5월 31일 실시된 제4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집권당이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나 지자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고 있으나, 이 때 우리당의 경우는 ‘참패’라는 용어 그대로였다.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전북지사 1명만 당선되고, 기초단체장 선거도 수도권 66곳 중에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7개 대도시의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전패한 것이다. 655명을 뽑는 광역의원 선거(지역구)에서도 수도권은 물론 부산ㆍ대구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대도시에서 1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패했으나, 광주ㆍ전남북은 잔류 민주당 후보에게 손을 들었다.

정동영 의장이 선거 결과가 드러난 6월 1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취임 100일도 못되어서다. 일부 최고위원들도 동반 사퇴하여 우리당은 지도부 부재 상태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집권당의 표류는 국정의 표류로 연계된다.

좀 묵은 얘기지만 김근태는 2002년 대선후보 과정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발언을 남겼다. 이번 당의장 선거에서 패배한 심경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기자가 물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후, 개인적 ‘역사성’을 지키는 일과 대중정치인으로 ‘성공’ 하는 일 사이에서 쉽지 않은 줄타기를 했으리라고 보인다. 둘 사이에 균형을 잡는 데 이제 익숙해졌다고 자평하는가?”

여전히 굉장히 어렵다. 우리 정치의 제도와 관행이 아직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번에 양심 고백한 것은 범죄를 자백한 것과 다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양심고백을 했다면 왜 당당하지 못하나” 이러는데, 옛날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한다면서 왜 도망 다니느냐”고 공격하던 것과 똑같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우리 신념의 실현을 막는 제도와 관행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을 내치는 사회라면 그건 서로 냉소하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주석 3)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동영 의장과 일부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우리당은 6월 7일 국회의원ㆍ중앙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논란 끝에 과도 지도부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키로 했다. 2003년 11월 창당 이래 벌써 4번째 비대위 체제였다. 일천한 헌정사이지만 집권당이 이렇게 흔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대위는 중앙위원회로부터 당헌당규 개정과 인사권 등 전권을 위임받고, 전직 당의장 등 8인으로 구성된 인선위원회에서 6월 9일 김근태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당의장)으로 선임했다.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에 탈락한 지 4개월 여 만에 과도체제의 당의장에 선임된 것이다.
분당 과정에서 원내대표에 선출된데 이어 두번째로 맡는 과도기의 요직이었다. 당내 위기 시기에 그는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번갈아 맡게 되었다. 역량과 위기관리 능력이 그만큼 평가된 셈이지만, 씁쓸한 마음을 쓸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독배를 마시는 심경으로 비대위위원장의 책임을 맡겠다”면서 비상시의 당의장에 취임했다. 비대위 상임위원에는 김한길ㆍ문희상ㆍ이미경ㆍ정동채ㆍ김부겸ㆍ정장선 의원이 선임되고, 유인태ㆍ이호웅ㆍ이강래ㆍ박병석ㆍ박명광ㆍ윤원호 의원은 비상임위원에 위촉되었다.

 


열린우리당은 2006년 6월 7일 오전 당사에서 의원총회를 갖고 향후 당 진로를 논의했다. 김근태, 김혁규, 조배숙 최고위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근태는 취임과 더불어 의장 직속으로 ‘서민경제회복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일자리 창출과 기업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사회적 대타협을 도모하는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그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심을 모아온 정책이었다.

김근태는 6월 28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정부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김병준 전 대통령 정책실장을 내정한 것과 관련, 당의 비판적 여론을 전하고, 인사문제에 있어서 좀 더 광범위한 여론을 수렴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 안 팎에서는 김 의장이 좀 더 강하게 대통령을 압박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의 ‘액운’은 이어졌다. 7월 26일 실시된 서울 성북을과 송파갑, 경기 부천ㆍ소사, 경남 마산갑의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에서 이번에도 모두 패배했다. 또 10월 26일 국회의원 2곳과 기초단체장 등 9개 지역에서 실시한 재ㆍ보궐선거에서도 전패했다. 여당이면서도 영남지역 일부에는 단체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지역갈등은 강고했고, 영남지역의 한나라당세는 가히 철옹성이었다.


주석
3> <인물과 사상>, 2002년 7월호,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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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5 08:00 김삼웅

 

 

열린우리당은 2006년 2월 18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신임 의장에 정동영 상임고문을 선출했다. 정동영 의장이 박수치는 김근태 최고위원을 바라보고 있다.

 

김근태는 2005년 12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임하고 당에 복귀했다. 이어 해가 바뀐 2006년 1월 11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의장 후보 출마를 선언, 준비에 나섰다. 그동안 한국 정당들의 직제는 총재→대표→당의장으로 당의 최고책임자의 직명이 변하였다. 권위주의적 호칭이 바뀐 것이다. 김근태가 출마를 선언한 우리당 의장 후보에는 정동영ㆍ김혁규ㆍ조배숙ㆍ김영춘ㆍ임종석ㆍ이종걸ㆍ김부겸 의원과 김두관 대통령정무특별보좌관이 각각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김근태는 출마선언의 기자회견을 갖고 <바꾸면 반드시 이깁니다>란 제목의 소견을 밝혔다.
△ 바꾸면 반드시 이깁니다. △약속을 지키면 분명히 이깁니다. △기적을 만듭시다. 대반전을 이룹시다. △ 이른바 ‘실용’은 실족했습니다. 아니 실패했습니다. △ 새로운 성장을 위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겠습니다. △ 정치혁신을 이루겠습니다. 창당 초심을 되찾겠습니다. △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 △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등 7개 항목의 ‘공약’을 제시했다.

회견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곧은 나무는 재목(材木)으로 쓰고, 굽은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써야 합니다. 당의 기둥을 똑바로 세워야 합니다. 기둥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당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부동산 대책에서 머뭇거렸던 우리의 과오와 창당정신인 기간당원제를 흔들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 기둥을 곧은 나무로 바꿔 세워야 합니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2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우리의 기둥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 1월 15일에는 <당 재건을 위한 김근태의 7가지 약속>을 발표했다. 그동안 원내 대표와 국무위원으로 재임하면서 익혀온 알찬 내용과 포부를 담았다.

당 재건을 위한 김근태의 7가지 약속

1. 할 수 있는 개혁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 대선, 총선 공약이행 점검단 설치
- 미이행 공약에 대한 추진 방안 마련
- 국민보고회 개최

2. 범민주세력 대연합을 실현하겠습니다.
- 범민주세력대통합 추진
- 민주당, 민주노동당과 정책 공조 강화
-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 완화 전향적 검토

3. 동반성장과 양극화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추진하겠습니다.
- 당내에 ‘사회적 대타협 추진기구’ 구성
- 여야, 정부, 경제계, 노동계,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범국민기구 구성

4. 정치문화 개혁을 위한 제도개선을 추진하겠습니다.
-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제도개선 추진
- 선거구제 개편 추진

5. 당을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겠습니다.
- 당ㆍ청 의사소통 체계 활성화
- 고위당정회의 강화 : 상설협의체 구성
- 당 정책위원회를 강화해 당정협력 사무국 역할 부여

6. 당의 통합과 단결을 이루겠습니다.
- 당내 의사소통 구조의 확장과 개방
- 당원의 의견 수렴을 위해 평당원 포럼 운영
- 당원협의회의 기능과 권한 강화

7. ‘깨끗한 정치’ 실현을 위해 기간당원제를 보완하겠습니다.
- 허위당원. 대납당원 근절을 위한 확인 시스템 정비
- 전 당원에 대한 당원가입의사 재확인.
(주석 2)

 


열린우리당은 2006년 2월 18일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후보를 신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투표전 전당대회장 앞마당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김근태는 당의장 선거를 앞두고 연초부터 26개 도시를 순회하고, 6천 명이 넘는 당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당의 개혁 노선을 설명하였다. 4년 전 대선 후보 때에도 하지 못했던 강행군이고 열정이었다. 비틀거리는 참여정부를 바로 세우고 3기 민주정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의 변화와 혁신적 개혁이 요구되었다. 이를 대의원들에게 설명하고, 자신이 선장노릇을 맡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김근태가 여전히 집권당의 대표로 선택받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원인 중에는 대중정치인으로서 지역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영호남의 지역성을 갖지 못한 경기 출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정략적으로 갈라놓은 영호남의 갈등 관계가 역설적으로 민주 진영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수도권의 당원ㆍ대의원 중에는 의외로 영호남 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의 향배에 따라 당대표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1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동영이 4,450표(48.2%)를 얻어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전국 대의원 1만 213명 중 9,229명이 참가(투표율 76.1%)하여 1인 2표 방식으로 실시된 이날 선거에서 김근태는 3,847표를 얻어 2위에 그치고 말았다. 3위는 김두관(3,218표), 4위는 김혁규(2,820표)였다. 세 사람이 모두 영호남 출신이고, 김근태만 경기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600여 표 차이로 당대표에 비록 2위에 그쳤지만 김근태의 선방이었다는 것이 당내외의 여론이었다. 당의장에 선출되지 못하고 수석 최고위원에 만족해야 했다. 정동영은 2004년 5월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의장직에서 물러난지 2년 여 만에 다시 당의장에 롤백하였다. 그의 달변과 대중성을 김근태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지만, 수석 최고위원으로서 응분의 역할을 하고자 마음을 가다듬고,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도와준 당원과 동지들을 격려하였다.


주석
1> 김삼웅 보관자료, <김근태 당의장 출마선언>.
2>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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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4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복지부장관 취임 무렵부터 퇴임 후인 2007년 여름까지 2년여 동안, 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일요일이면 만사를 제치고 짧지만 정감 넘치는 편지를 썼다. <일요일에 쓰는 편지>라는 타이틀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복지ㆍ책 얘기, 드라마 얘기까지, 마음 닿는 대로 편하게 쓰는 편지였다. 당연히 많은 조회수와 댓글이 붙었다.

2004년 12월 15일에 쓴 <일요일, 편지쓰기를 시작하며>에는 김근태의 소박한 정감이 담겼다.

마음 편하게 쓰겠습니다. 잘 정리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품었던 ‘생각의 조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일을 보내고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추억이건 감상이건 눈물이건 분노건…. (주석 9)

 



김근태는 정부 각료로서 국민과 소통을 위해 글쓰기를 시작하고, 2년 뒤에 그 가운데 46편과 네티즌들의 댓글 120편을 모아 <일요일에 쓰는 편지 - 김근태, 따뜻한 세상을 꿈꾸다>를 간행했다. 여섯 번째의 저서인 셈이다. 그는 또 2004년 3월 <김근태 아저씨의 국회 이야기-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올벼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일종의 어린이용 국회 소개 책자다. 노현정 화백이 그림을 그렸다. 어린이들에게 국회ㆍ국회의원의 역할을 정확히 알려서 정치에 대한 인식과 관심, 그리고 미래 세대들이 좋은 정치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김근태의 ‘일요일에 쓰는 편지’에는 그의 성실성과 휴머니즘, 군림하는 장관이 아닌 현장을 찾는 목민관의 모습을 보게한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고,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씨병 환자들을 찾았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들려준, ‘패자부활전’이 있는 사회를, 저출산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고령화’라는 재앙을 대비하자는, 정책 제안에 이르기까지의 편지글에서 담았다.

녹동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를 향하면서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떠올랐습니다.
그 피리소리를 들으려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삘릴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그 사이에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흔적없이 사라져간 만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의 한숨과 슬픔이 아련히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얼마간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노인환자들이 식사하시는 것을 도왔습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침이 튀기는 듯 했습니다. 움찔 물러났습니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환자들을 대담하게 만나는 장면이 순간 스쳐갔습니다.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된다. 장관이 거리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졌습니다.

힘을 주어 악수했습니다. 병실 모두를 방문해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마을도 찾아갔습니다. 손이나 발이 없는 분들과 손과 눈이 마주치는 악수를 했습니다. 그분들 중 몇 분이 마음을 여는 듯 했습니다.
(주석 10)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무한경쟁의 정글’에 비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영원히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사업에 한 번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결과는 참혹합니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직장인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합니다. 사업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타협 없는 외길 투쟁을 반복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이런 일들이 ‘무한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쟁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말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국경없는 글로벌 경쟁시대에 너무 한가한 얘기를 한다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2005년 12월 3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 본회의에서 차기 복지부장관으로 유력한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을 찾아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장관은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지만, 표결에는 불참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꼭 행복하고 바람직한 것일까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외길수순’인 걸까요? (주석 11)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보건복지부를 떠나면서 그동안 여러 번 강조했던 말씀을 잔소리처럼 한 번 더 드리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보건복지부는 이미 우리사회의 방향을 좌우하는 사회정책의 중심부서로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핵심부서라는 엄중한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산이나 권한을 탓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핵심과제인 저출산, 고령화대책과 사회양극화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모두 여러분의 두 어깨에 짐지워져 있습니다. 사회안전망과 국민연금,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공공인프라를 튼튼히 구축함으로써 미래의 우리 사회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사회’ ‘가장 경쟁력 있는 사회’로 만들 책임도 여러분께 있습니다. 공공의료를 강화하고, 안전한 식탁을 지킬 책임도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제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지만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튼튼한 육성체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시간에 쫓기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어려운 것이 공직생활이지만, 시간을 쪼개고 정성을 보태서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경쟁력이 바로 우리 사회의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다시 국민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여러분을 감시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석 12)


주석
9> 김근태, <일요일에 쓰는 편지>, 8쪽, 샛별 D&P, 2000.
10> 앞의 책, 25~26쪽.
11> 앞의 책, 91쪽.
12> 앞의 책,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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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3 08:00 김삼웅

 

 

2005년 10월 11일‘새생명, 새희망! 불임치료 지원사업’협약식에 참석한 백은희 전 ‘아기모’ 사이트 운영자, 이석재 삼성코닝정밀유리 대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최선정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회장. (왼쪽부터). 사진은 여성신문.

 

 

김근태는 2004년 7월 1일부터 이듬해 연말까지 제43대 보건복지부장관이 되었다. 1년 반 기간이다. 대권을 지향하는 정치인은 장관이 되기를 원한다. 국무위원으로서 국가경영의 전반을 살피고, 수시로 언론의 조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부 장관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국가의 중요 사항과 정책을 토의하고 의결한다.
위정자들도 ‘후계자’의 수업을 위해 측근 몇 사람을 각료로 임명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영구집권의 야욕이어서 예외로 치면, 전두환은 노태우, 노태우는 박철원, 김영삼은 이회창, 김대중은 노무현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오해’를 피하고 상호 ‘경쟁’을 위해 복수로 입각시킨 경우도 있었다. 노무현은 김근태에 앞서 정동영을 통일부장관에 기용하였다.

장관에 취임하면서 김근태는 <희망한국 21 - 함께하는 복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서민대중과 중산층의 복지정책에 주안점을 두고자 하였다. 서민ㆍ중산층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생계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청장년들이 직장을 잃었다. 서울역과 시내 지하철에는 노숙자가 떼를 이루고, 생활고에 자살자가 속출하였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한 국정으로 생긴 외환위기는 김대중 정부에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있었으나, 하위 계층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복지부는 서민 생활과 직접 연관되는 정부의 부처다. 김근태는 우선 사회안전망을 설치하고 강화하는 데 힘을 모았다.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답게 직원들과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정책제안을 들었다. 그리고 현장을 방문하여 민정을 살폈다. 군림하여 지시하는 행정이 아닌 밑바닥과 옆의 여론과 제안을 수렴하는 스타일이었다.

김근태는 취임 초기에 전문가들과 국민의 의견을 모아 11개 분야 주요정책을 설정하고, 이를 집행하는 방식으로 복지부를 운영하였다. 11개 분야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사회양극화에 대응하여 ‘희망한국 21함께하는 복지’ 프로젝트 등 사회 안전망 강화대책 마련.
②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 시행 등 저출산ㆍ고령화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추진체계 구축 및 노인수발보장제도 도입 추진.
③ 암 등 고액ㆍ중증환자 부담경감과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로드맵 마련.
④ 국민연금 개혁추진과 기금운용 성과 제고.
⑤ 의약품ㆍ의료기기 등 보건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
⑥ 긴급복지지원법과 129번 보건복지콜센터를 설치하여 수요자 중심의 온라인 서비스 기반 마련.
⑦ 국민인식조사를 바탕으로 실효성 있는 금연정책 추진.
⑧ 공공보건의료체계 개편 및 선진국형 응급의료체계 구축안 수립.
⑨ 성과관리체계 구축 및 국민지향적 제도개선 추진 등 조직 혁신.
⑩ 보건의료분야 투명사회협약, 보험수가계약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한 정책추진기반 구축 노력.
⑪ 미래지향적 보건복지정책 수립을 위한 미션ㆍ비전 2010 수립 및 보건복지 미래전략포럼 운영.
  (주석 6)

김근태는 의욕적으로 복지부 업무를 추진했다. 소속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운동권출신 여당 중진 정치인 장관의 행정력 미숙 등을 우려하는 분위기였으나, 그의 열정과 현장주의 그리고 치밀하고 꼼꼼한 업무 수행능력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2005년 1월 28일 김근태 장관, 고흥군 소록도를 방문. 사진은 김성철 시민기자.

 

 

김근태는 겨울을 앞두고 <겨울맞이 특별기획 2004 한국의 사회안전망>의 플랜을 짜서, 용산역과 서울역 등에서 노숙인들을 만나고, 직접 노숙체험을 하기도 했다. 이어서 서울역 노숙인 무료 진료소를 방문하여, 의사ㆍ간호사ㆍ약사들이 종교단체의 지원과 함께 지속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김근태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 가정에서 11월부터 신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전기료ㆍ수도세ㆍ가스요금이 체납되더라도 생계가 어려운 가정에 대해서는 단전ㆍ단수하지 않도록 정부 각 부처간에 합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건강보험 체납자들, 소액납부하는 납세자들, 최하 빈곤층 바로 위인 신빈곤층 등을 9월부터 일제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최빈곤층은 지적 생활 보장 수급 대상자로 분류하고, 이보다 조금 나은 생계자들은 의료급여, 자활급여 등의 지원을 시행하였다. 이들 중에는 정부 양곡을 50% 가격으로 제공하여 극빈 생계 가족을 도왔다.

전국적으로 25만 명에 이르는 결식아동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고, 특히 이들이 방학 동안에도 급식할 수 있는 방안을 국무회의에서 마련토록 제안하였다.

김근태 장관이 1년 반 동안 복지부에서 얻은 주요 성과는 11가지로 꼽힌다.

주요 성과

1. 사회안전망 강화 대책을 마련.
2. 저출산ㆍ고령사회 대응채계를 구축.
3. 건강보험 재정을 안정화하고 보장성을 강화.
4.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고 기금운용의 성과를 제고.
5. 보건복지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
6. 긴급복지지원제도를 도입하고 129번 보건복지콜센터 설치.
7. 금연정책의 실효성을 강화.
8. 공공보건의료 확충을 위한 종합대책을 수립.
9. 보건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혁신.
10.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추진 기반을 구축.
11. 보건복지 미래전략 수립을 추진.
(주석 7)

 


2005년 1월 31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인터뷰에서.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김근태는 2005년 새해를 맞아 <2005년을 국민통합 원년으로 만들자>는 장관 신년의 계획과 포부를 밝혔다. 여기에는 그의 철학과 비전이 담겼다.

“<국민과의 계약>을 준비하면서 세 가지 과제를 집중 검토하고 있다. 첫째, 사회안전망의 획기적 강화, 둘째,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실효적 대책, 셋째, BT와 바이오 헬스산업을 실질적 성장 동력산업으로 육성이다.”

또 신년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 (마지막 구절)을 담았다.

무엇보다 보건복지부는 어머니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기본 사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숨짖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 사회통합의 기초를 만드는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행정을 혁신하겠습니다.
투명한 행정, 국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을 하겠습니다.
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앞서 노력하겠습니다.

2005년에는 우리 사회가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인간적인 사회로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이 한층 또렷해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석 7)


주석
6>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2004년 12월 15일.
7> <보건복지부>, <국민과의 약속 이행보고>, 2005년 12월.
8>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200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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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2 08:00 김삼웅

 

2004년 4월 17일 저녁 광화문 촛불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탄핵무효' 카드를 들어올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제17대 총선의 정치사적 환경은, 두 번째로 정권을 잃은 한나라당이 반노무현의 감정에 빠진 민주당 일각과 야합하여 대통령 탄핵 감행 중에 치른 선거였다는 사실이다. ‘탄핵정국’은 곧 이어진 ‘촛불집회’와 맞물렸다. 국민은 민주평화의 기치를 든 신생정당 우리당을 저지하는 ‘이변’을 보였다. 국민은 우리당에 152석을 안겨주었다. ‘노무현 지지’의 의미가 담겼다.
민주개혁세력이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한 것은 헌정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4월혁명 뒤 민주당은 7ㆍ29선거를 통해 민ㆍ참 양원에서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으나 곧 신민당의 분당사태로 ‘소수여당’이 되고,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거대한 다수 야당에 휘둘러서 개혁입법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김종필 국무총리와 한승헌 감사원장은 야당의 반대로 1년여 ‘서리’의 자격으로 국정을 맡아야 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은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조ㆍ중ㆍ동과 손잡고,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을 흔들고 마침내 탄핵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총선에서 우리당에 다수당을 내주게 되고, 여기에 진보정당인 민노당이 10석을 얻어 진보개혁세력이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2004년 4월 16일 창원을에서 당선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와 비례대표 당선자들이 16일 오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3당 대표회담을 열어, 대통령 탄핵과 이라크 파병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그러나 다수당이 된 우리당은 개혁입법 추진과 악법폐기 등 시대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정체성이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탄핵의 바람을 타고 공천=당선되고,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의 요인도 지적되었다. 다음은 여론조사 전문가의 진단이다.

2004년 4월 9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반(反) 탄핵 바람을 타고 대승을 거둔다. 여당이 마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 마냥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나는 총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총선 전반 판세를 여론조사를 통해 분석하고 있었는데, 그때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사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암울한 미래’와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여러 언론은 152석의 과반 여당 탄생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었지만, 선거의 중간 흐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 총선의 흐름에서는 탄핵 주체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패배라는 의미 외에 분명 또 다른 현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17대 총선 기간 중 이미 선거기간 전부터 잡탕 정당이라고 비난 받던 열린 우리당의 지지도가 내려가는 대신, 민노당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소리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주석 4)

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으나 ‘잡탕정당’의 구성원으로 하여 제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3선 의원이 된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성공해야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서민대중의 생계가 보장되고, 남북관계가 화해협력의 관계를 더욱 진척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당내 개혁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았다.

 


 


우리당의 역사적, 현실적 책무가 무거워질수록 김근태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국민이 152석의 국회의원을 준 것은 개혁을 하라는 지엄한 뜻이었는데, 과연 이것을 수행할 수 있을 지 걱정을 한 것이다.

김근태는 부드러움과 강건함을 고루 지닌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운동권 치고는 유약하다는,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평을 동시에 듣기도 한다. 여당의 중진이 된 처지에서도 그의 진면을 제대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한 언론인의 ‘심리분석’은 세월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있으면서도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그의 유연한 태도는 운동에서 겪게 되는 어려운 시기마다 그 진가를 발휘해왔다. 보스로서의 지도력이나 포용력은 감히 있다고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소(小)소유자”가 되려는 소시민적 경향까지 있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김근태가 내세울 수 있는 운동가적 자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따뜻한 가슴과 어머니의 핏줄에서 나온 고집스러움과 일에 대한 추진력이라고 한다. 이에 사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그 특유의 방법론이 곁들여져서 그는 어느덧 지도자의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특징들은 얼굴에서도 나타난다.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의 선과 조용한 미소는 따뜻한 가슴을 엿보이게 하나, 고집스러워 보이는 곱슬머리와 차분한 말투에서 그의 단정한 일 매무새를 짐작할 수 있다.

짐작해보건대 무언가를 추진해 나가고 조직하는 그의 능력은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어린 시절의 환경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성 싶다.
(주석 5)


주석
4> 김현태, <대중여론으로 읽는 한국정치-분노한 대중의 사회>, 11쪽, 후마니타스, 2009.
5> 한경심, <김근태>, <여성동아>, 1988년 8월호,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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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1 08:00 김삼웅

 

2003년 10월 27일 오후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에서 김원기 준비위원장 등 발기인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집권 여당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가칭)을 발족,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구주류는 거세게 비난하면서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중도파로 3분되어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당무회의에서는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신주류는 7월 3일 국회의원 60명이 포함되는 신당추진기구를 출범하고 때마침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ㆍ이우재ㆍ김부겸ㆍ안영근ㆍ김영춘 의원이 합세하고, 재야 인사들이 참여하는 등 신당창당의 세를 이루게 되었다.

민주당 신주류는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의 명칭으로 원내교섭 단체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로 김근태를 선출하였다. 김근태는 분당상태에서 실질적으로 여당의 원내 대표가 되었다. 극구 사양했으나 다수 의원들의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였다. 과도기의 원내대표는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신당파의원 40여 명은 9월 20일 민주당 탈당계를 내고, 한나라당 탈당의원 5명과 함께 ‘국민참여 통합신당’(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 등록을 마친데 이어 10월 22일 원외의 신당세력인 개혁신당창당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범여권 신당의 당명을 ‘열린우리당’(우리당)으로 결정했다. 김근태는 여전히 원내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신당은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김원기ㆍ이태일ㆍ이경숙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1년여 만에 민주당과 우리당으로 분열되었다. 이 기간이 김근태에게는 정계 입문 이래 가장 고통스럽고 고민이 많았다. 줄곧 진보민주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주창해왔던 터였기에 고통과 고민이 더욱 깊었다.

김근태는 당의 분열과 신당창당의 와중에서 원내대표가 되고, 이어서 우리당의 당의장이 되었으나, 당시는 원내 활동보다 이합집산 과정이어서 국회에서 크게 활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될 때는 여당의 분당사태로 한나라당이 다시 제1당이 되고, 우리당은 제2당의 신세로 전락했다. 더구나 친구가 갈라지면 적보다 더 멀어지듯이 잔류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밀접해지면서, 결국 노무현 탄핵 카드를 꺼내게 되었다.

 


2004년 4월 14일 단식중인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 등 당지도부는 투표 하루전날인 14일 저녁 정호준 후보의 지역구인 서울 명동에서 총력유세를 갖고 지지를 호소했다. 정동영 당의장, 김근태 원내대표, 정호준 서울중구 후보 등이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 인사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상하이 임시정부의 이승만탄핵 제외)의 제17대 총선이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었다. 한나라당과 여당의 보수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의결하면서 광화문에 연일 수만명 씩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선거는 의외의 결과로 나타났다. 정부도, 신당파도, 구당파도 한나라당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4ㆍ15총선은 47석이었던 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도 전국구 정당투표제에 힘입어 10석을 얻었다. 그 대신 한나라당은 여전히 의석수가 많은 강고한 영남 지역주의에 힘입어 121석을 얻었으나 제2당으로 전락했다.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던 민주당 지도부는 줄줄이 낙선하여 9석을 얻는데 그침으로써, 민노당에도 뒤진 제4당으로 전락, 사실상 정당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김근태는 4ㆍ15 총선에서 여유있게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도봉 갑구 유권자들은 그를 신뢰하고 폭넓게 지지하였다. 총선 뒤 어느 신문사는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을 펴냈다. 다음은 김근태의 프로필이다.

‘햄릿형 정치인’으로 불릴만큼 우유부단하고 신중한 이미지를 보여왔으나 4ㆍ15총선을 계기로 대중성과 유연성을 선보이며 여권내 유력 차기주자의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혔다.(중략)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선언한 뒤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노무현 국민경선후보”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나 2003년 민주당 탈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늘 고민이 길어 ‘결단’이 반보 늦는다는 평을 들었고 노 대통령과도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보였다.

그러나 4ㆍ15총선에는 “노인폄하 발언”으로 한때 위기에 몰린 정동영 전의장을 적극 엄호하며 구원투수로 나서는 등 과단성과 신중함을 조화시키며 대중적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총선 이후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당선자 대부분과 오랜 재야출신 동지들을 포함해 40여 명을 원군으로 둔 ‘정통민주파’의 좌장으로 원내기반도 두터워졌지만 원내대표를 그만두고 입각 예정. 로버트 케네디인권상, 백봉신사상 등을 수상했다.
(주석 3)

이 책에는 김근태의 신상에 관한 여러 가지가 실렸다.

혈액형 : O형
존경하는 인물 : 김구ㆍ문익환
좋아하는 색깔 : 청보라
좋아하는 음식 : 해산물, 김치찌개, 된장찌개
감동받은 책 : 토지(박경리), 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감동적으로 본 영화 : JSA, 서편제, 안토니아스라인, 부에나비스타 소설클럽,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아웃 오브 아프리카
좌우명 :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정자정야 자수이정 숙감부정) 정치라는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니 올바른 것으로써 솔선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는가?


주석
3> 동아일보 발행,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 27쪽,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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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0 08:00 김삼웅

 

 

24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반전평화공동행동(준) 소속 단체 회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라크 팔루자 학살 규탄 및 파병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노무현의 정치적 미숙 또는 독선적 정책결정은 초반부터 지지층의 이반현상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결정이었다. 대통령 취임 당일부터 한나라당은 자민련과 함께 원내 다수의 힘으로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변칙 처리하여 정부에 보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세간의 억측과 오해를 푸는 길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정부는 3월 21일 국무회의를 열어 600명 규모의 국군 건설공병지원단과 100명 안쪽의 의무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국군부대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을 의결하여 국회에 이송했다. 집요한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청을 물리치고, 대안으로 건설공병지원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진보ㆍ보수단체 간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던 관계로 국회 심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사건건 노무현의 발목을 잡아온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지지하고, 집권당의 상당수 의원들과 진보언론이 반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다룰 송두환 특별검사팀의 현판식이 16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해암빌딩내 14층에서 특검 사무실앞에서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김근태는 대북특검과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여러 채널을 통해 청와대에 이런 뜻을 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뇌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과거 집권당은 대통령이 총재가 되어서 재정, 인사권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노무현은 대선공약에서 당정분리를 내걸고, 집권해서는 이를 실행하면서 당은 백가쟁명, 중구난방의 상태가 되었다. 대선후보 선출과정의 감정과 특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당내 분쟁ㆍ분열상이 심화되었다.

앞당겨서 말하자면 원내대표 시절(2003년 말에서 2004년 초) 김근태가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던 일은 이라크파병 문제였다. 개인적 소신과 당론, 집권당의 원내대표와 정부의 정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이 깊었다. 특히 당대표와 동료 의원들의 2중적인 언사와 태도에서는 정치 이전의 인간적 배신감에 가슴 아파하였다.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양날의 칼’이었다. 거부할 경우 엄청난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야 했고, 파병을 결정할 경우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 민중운동 진영과 회복불능의 ‘절연’을 각오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뜨거운 감자’를 국회에 넘겼다.
시민사회는 촛불집회를 열며 거세게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집권당은 분당하여 우리당은 45석의 소수의석에 불과했다. ‘뜨거운 감자’가 송두리쨰 김근태에게 넘겨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라크 파병안이 국회로 넘어오기 한참 전부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나 사실 김근태 원내대표의 입장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슬기롭게 이라크 파병을 거절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는 이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하며 지혜와 묘수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당내 일부 의원들은 파병을 반대하며 단식이나 농성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의원들은 ‘무조건 파병’을 주장하며 원내대표실에 찾아와 김근태의 결단을 압박하곤 했다. 더러는 미국이 주도할 전후복구사업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미국이 주문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파병(참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한나라당이나 정부의 경제ㆍ외교 관료들과 똑같았다.

 


2004년 5월 11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된 천정배 의원의 연설을 듣는 김근태 전원내대표, 정동영 당의장, 김원기 고문.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우리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의제로 20번 이상 공개ㆍ비공개 의원총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난상토론이었다. 한국정당사상 의안 하나를 두고 이때처럼 격렬하게 당내 토론을 거친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몇 달 동안 20여 차례 의총을 열면서 이라크 파병문제를 토론하도록 이끈 김근태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묘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의원총회의 수많은 논의 결과, 나름대로 찾아낸 묘안이 바로 ‘비전투병 중심의 인도적 지원부대’라는 새로운 파병방안이었다. 나중에 우리 정부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민 의료지원ㆍ전후복구 등에만 참여하는 소규모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한 것도 의원총회 토론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근태는 이라크 현지에 의원 실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둘째, 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정부가 미국 네오콘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굴복하지 않도록 국회와 여당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면서 국회와 여당을 핑계거리 삼아 국익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숨통을 터주고자 했던 것이다. 김근태는 정부와 청와대에 이런 주문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했다. 국회와 여당이 이 문제로 격론을 벌이고 있고, 집권 여당에도 반대 기류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삼으라는 주문이었다.

셋째, 당내 의견통일이었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개별 의원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소신을 주장하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없는 화약고처럼 폭발력이 큰 사안이었다. 이 문제를 충분한 토론없이 결정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45석에 불과한 미니 여당은 다시 분열하고, 힘 한 번 쓰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주석 1)

의총의 토론이 거듭되면서 청와대는 당론결정을 재촉하고, 조ㆍ중ㆍ동 등 보수수구신문은 연일 “국가 중대사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못하는 무능한 여당”이라고 몰아쳤다. 그런가하면 의총에서는 “김근태가 저래서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비난이 쏟아지고, 파병반대 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의총은 마침내 당론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본회의장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 김근태는 찬성 버튼을 눌렀다. 임종석 등 몇 의원은 끝까지 소신대로 반대투표를 했다. 김근태는 소신과 원내대표 그리고 당론 사이에서 깊은 고민 끝에 결국 공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날 오후 내내 원내대표실에는 깊은 정적만 흘렀다. 김근태는 원내대표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방안에서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자리에서 당내 경쟁자 격인 동료에게 인생을 걸고 지켜온 소신에 대해 “타이밍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공개리에 모욕을 당했고,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후배의 해괴한 민주주의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와 당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뜻으로 찬 성 버튼을 눌렀다.

김근태는 그 방에 다시 들어가 홀로 몇 시간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그날 그 몇 시간 동안, 김근태가 그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몇 시간 동안을 그 방 앞 책상 의자에 앉아 민주주의와 김근태에 대해 생각하며 속으로 하염없이 속울음만 울었다.
(주석 2)


주석
1> 당시 우리당 원내대표실 비서팀장 증언, 2012년 9월 25일.
2>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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