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1 08:00 김삼웅

 

2003년 10월 27일 오후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에서 김원기 준비위원장 등 발기인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집권 여당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가칭)을 발족,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구주류는 거세게 비난하면서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중도파로 3분되어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당무회의에서는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신주류는 7월 3일 국회의원 60명이 포함되는 신당추진기구를 출범하고 때마침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ㆍ이우재ㆍ김부겸ㆍ안영근ㆍ김영춘 의원이 합세하고, 재야 인사들이 참여하는 등 신당창당의 세를 이루게 되었다.

민주당 신주류는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의 명칭으로 원내교섭 단체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로 김근태를 선출하였다. 김근태는 분당상태에서 실질적으로 여당의 원내 대표가 되었다. 극구 사양했으나 다수 의원들의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였다. 과도기의 원내대표는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신당파의원 40여 명은 9월 20일 민주당 탈당계를 내고, 한나라당 탈당의원 5명과 함께 ‘국민참여 통합신당’(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 등록을 마친데 이어 10월 22일 원외의 신당세력인 개혁신당창당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범여권 신당의 당명을 ‘열린우리당’(우리당)으로 결정했다. 김근태는 여전히 원내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신당은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김원기ㆍ이태일ㆍ이경숙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1년여 만에 민주당과 우리당으로 분열되었다. 이 기간이 김근태에게는 정계 입문 이래 가장 고통스럽고 고민이 많았다. 줄곧 진보민주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주창해왔던 터였기에 고통과 고민이 더욱 깊었다.

김근태는 당의 분열과 신당창당의 와중에서 원내대표가 되고, 이어서 우리당의 당의장이 되었으나, 당시는 원내 활동보다 이합집산 과정이어서 국회에서 크게 활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될 때는 여당의 분당사태로 한나라당이 다시 제1당이 되고, 우리당은 제2당의 신세로 전락했다. 더구나 친구가 갈라지면 적보다 더 멀어지듯이 잔류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밀접해지면서, 결국 노무현 탄핵 카드를 꺼내게 되었다.

 


2004년 4월 14일 단식중인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 등 당지도부는 투표 하루전날인 14일 저녁 정호준 후보의 지역구인 서울 명동에서 총력유세를 갖고 지지를 호소했다. 정동영 당의장, 김근태 원내대표, 정호준 서울중구 후보 등이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 인사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상하이 임시정부의 이승만탄핵 제외)의 제17대 총선이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었다. 한나라당과 여당의 보수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의결하면서 광화문에 연일 수만명 씩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선거는 의외의 결과로 나타났다. 정부도, 신당파도, 구당파도 한나라당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4ㆍ15총선은 47석이었던 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도 전국구 정당투표제에 힘입어 10석을 얻었다. 그 대신 한나라당은 여전히 의석수가 많은 강고한 영남 지역주의에 힘입어 121석을 얻었으나 제2당으로 전락했다.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던 민주당 지도부는 줄줄이 낙선하여 9석을 얻는데 그침으로써, 민노당에도 뒤진 제4당으로 전락, 사실상 정당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김근태는 4ㆍ15 총선에서 여유있게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도봉 갑구 유권자들은 그를 신뢰하고 폭넓게 지지하였다. 총선 뒤 어느 신문사는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을 펴냈다. 다음은 김근태의 프로필이다.

‘햄릿형 정치인’으로 불릴만큼 우유부단하고 신중한 이미지를 보여왔으나 4ㆍ15총선을 계기로 대중성과 유연성을 선보이며 여권내 유력 차기주자의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혔다.(중략)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선언한 뒤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노무현 국민경선후보”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나 2003년 민주당 탈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늘 고민이 길어 ‘결단’이 반보 늦는다는 평을 들었고 노 대통령과도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보였다.

그러나 4ㆍ15총선에는 “노인폄하 발언”으로 한때 위기에 몰린 정동영 전의장을 적극 엄호하며 구원투수로 나서는 등 과단성과 신중함을 조화시키며 대중적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총선 이후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당선자 대부분과 오랜 재야출신 동지들을 포함해 40여 명을 원군으로 둔 ‘정통민주파’의 좌장으로 원내기반도 두터워졌지만 원내대표를 그만두고 입각 예정. 로버트 케네디인권상, 백봉신사상 등을 수상했다.
(주석 3)

이 책에는 김근태의 신상에 관한 여러 가지가 실렸다.

혈액형 : O형
존경하는 인물 : 김구ㆍ문익환
좋아하는 색깔 : 청보라
좋아하는 음식 : 해산물, 김치찌개, 된장찌개
감동받은 책 : 토지(박경리), 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감동적으로 본 영화 : JSA, 서편제, 안토니아스라인, 부에나비스타 소설클럽,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아웃 오브 아프리카
좌우명 :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정자정야 자수이정 숙감부정) 정치라는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니 올바른 것으로써 솔선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는가?


주석
3> 동아일보 발행,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 27쪽,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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