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0 08:00 김삼웅

 

 

24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반전평화공동행동(준) 소속 단체 회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라크 팔루자 학살 규탄 및 파병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노무현의 정치적 미숙 또는 독선적 정책결정은 초반부터 지지층의 이반현상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결정이었다. 대통령 취임 당일부터 한나라당은 자민련과 함께 원내 다수의 힘으로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변칙 처리하여 정부에 보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세간의 억측과 오해를 푸는 길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정부는 3월 21일 국무회의를 열어 600명 규모의 국군 건설공병지원단과 100명 안쪽의 의무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국군부대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을 의결하여 국회에 이송했다. 집요한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청을 물리치고, 대안으로 건설공병지원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진보ㆍ보수단체 간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던 관계로 국회 심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사건건 노무현의 발목을 잡아온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지지하고, 집권당의 상당수 의원들과 진보언론이 반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다룰 송두환 특별검사팀의 현판식이 16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해암빌딩내 14층에서 특검 사무실앞에서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김근태는 대북특검과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여러 채널을 통해 청와대에 이런 뜻을 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뇌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과거 집권당은 대통령이 총재가 되어서 재정, 인사권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노무현은 대선공약에서 당정분리를 내걸고, 집권해서는 이를 실행하면서 당은 백가쟁명, 중구난방의 상태가 되었다. 대선후보 선출과정의 감정과 특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당내 분쟁ㆍ분열상이 심화되었다.

앞당겨서 말하자면 원내대표 시절(2003년 말에서 2004년 초) 김근태가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던 일은 이라크파병 문제였다. 개인적 소신과 당론, 집권당의 원내대표와 정부의 정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이 깊었다. 특히 당대표와 동료 의원들의 2중적인 언사와 태도에서는 정치 이전의 인간적 배신감에 가슴 아파하였다.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양날의 칼’이었다. 거부할 경우 엄청난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야 했고, 파병을 결정할 경우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 민중운동 진영과 회복불능의 ‘절연’을 각오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뜨거운 감자’를 국회에 넘겼다.
시민사회는 촛불집회를 열며 거세게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집권당은 분당하여 우리당은 45석의 소수의석에 불과했다. ‘뜨거운 감자’가 송두리쨰 김근태에게 넘겨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라크 파병안이 국회로 넘어오기 한참 전부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나 사실 김근태 원내대표의 입장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슬기롭게 이라크 파병을 거절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는 이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하며 지혜와 묘수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당내 일부 의원들은 파병을 반대하며 단식이나 농성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의원들은 ‘무조건 파병’을 주장하며 원내대표실에 찾아와 김근태의 결단을 압박하곤 했다. 더러는 미국이 주도할 전후복구사업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미국이 주문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파병(참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한나라당이나 정부의 경제ㆍ외교 관료들과 똑같았다.

 


2004년 5월 11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된 천정배 의원의 연설을 듣는 김근태 전원내대표, 정동영 당의장, 김원기 고문.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우리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의제로 20번 이상 공개ㆍ비공개 의원총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난상토론이었다. 한국정당사상 의안 하나를 두고 이때처럼 격렬하게 당내 토론을 거친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몇 달 동안 20여 차례 의총을 열면서 이라크 파병문제를 토론하도록 이끈 김근태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묘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의원총회의 수많은 논의 결과, 나름대로 찾아낸 묘안이 바로 ‘비전투병 중심의 인도적 지원부대’라는 새로운 파병방안이었다. 나중에 우리 정부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민 의료지원ㆍ전후복구 등에만 참여하는 소규모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한 것도 의원총회 토론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근태는 이라크 현지에 의원 실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둘째, 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정부가 미국 네오콘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굴복하지 않도록 국회와 여당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면서 국회와 여당을 핑계거리 삼아 국익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숨통을 터주고자 했던 것이다. 김근태는 정부와 청와대에 이런 주문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했다. 국회와 여당이 이 문제로 격론을 벌이고 있고, 집권 여당에도 반대 기류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삼으라는 주문이었다.

셋째, 당내 의견통일이었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개별 의원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소신을 주장하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없는 화약고처럼 폭발력이 큰 사안이었다. 이 문제를 충분한 토론없이 결정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45석에 불과한 미니 여당은 다시 분열하고, 힘 한 번 쓰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주석 1)

의총의 토론이 거듭되면서 청와대는 당론결정을 재촉하고, 조ㆍ중ㆍ동 등 보수수구신문은 연일 “국가 중대사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못하는 무능한 여당”이라고 몰아쳤다. 그런가하면 의총에서는 “김근태가 저래서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비난이 쏟아지고, 파병반대 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의총은 마침내 당론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본회의장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 김근태는 찬성 버튼을 눌렀다. 임종석 등 몇 의원은 끝까지 소신대로 반대투표를 했다. 김근태는 소신과 원내대표 그리고 당론 사이에서 깊은 고민 끝에 결국 공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날 오후 내내 원내대표실에는 깊은 정적만 흘렀다. 김근태는 원내대표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방안에서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자리에서 당내 경쟁자 격인 동료에게 인생을 걸고 지켜온 소신에 대해 “타이밍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공개리에 모욕을 당했고,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후배의 해괴한 민주주의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와 당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뜻으로 찬 성 버튼을 눌렀다.

김근태는 그 방에 다시 들어가 홀로 몇 시간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그날 그 몇 시간 동안, 김근태가 그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몇 시간 동안을 그 방 앞 책상 의자에 앉아 민주주의와 김근태에 대해 생각하며 속으로 하염없이 속울음만 울었다.
(주석 2)


주석
1> 당시 우리당 원내대표실 비서팀장 증언, 2012년 9월 25일.
2> 앞과 같음.



03.jpg
0.05MB
02.jpg
0.05MB
01.jpg
0.1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