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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8 08:00 김삼웅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연설 차례를 기다리는 5명의 후보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후보 국민참여 경선제를 도입하여 당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후보를 뽑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근태ㆍ김중권ㆍ노무현ㆍ유종근ㆍ이인제ㆍ정동영ㆍ한화갑(가나다순)이 후보에 나섰다. 국민참여경선은 당원과 일반국민을 같은 비율로 섞어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200만 명 중에서 무작위로 2만 명을 추출해 선거인단을 구성한 것이다.
김근태가 출사표를 던진 것은 당원은 계보와 조직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참여한 시민들은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경선 직전의 대세는 이인제 후보가 선두 주자였다.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 주류가 그를 밀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출마로 여권이 분열되고, 이회창이 열세에 놓이면서 김대중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동정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제주에서부터 이변이 터졌다. 한화갑이 이인제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노무현이 3위였다. 이어진 3월 10일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치고 오르고 이인제는 3위에 머물렀다. 김근태는 세 곳의 경선 투표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민심을 헤아렸다.

3월 12일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는 성명서와 함께 후보를 사퇴하였다.
사퇴에 앞서 노무현을 만나고,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노무현이 당선되어 민주정권을 이어받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된 데는 김근태 지지세력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후보를 사퇴했는데도 후폭풍이 거세게 나타났다. 정치자금 수수의 법적책임 문제가 따른 것이다. 김근태는 자신의 ‘고백’을 정치자금 투명화의 계기로 만들고자 했지만, 현실은 사법처리 쪽으로 흘러갔다. 검찰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김근태를 기소했다.

2003년 7월 24일 서울지법 형사 5단독 유승남 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 의원의 주장대로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신고를 누락하는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인정돼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6월에 추징금 2,000만 원을 구형했다.

최후진술에 나선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며 국민적 요구가 됐다”며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인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파헤친 양심고백이 이러한 흐름에 작지만 의미 있는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2002년 민주당 울산 경선에서 후보 연설 도중 이인제 후보가 김근태 후보(좌)와 한화갑 후보(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근태의 진술은 이어졌다.
“지난 3월 대선 경선 과정에서 중앙선관위는 3억 원을 지출 한도로 정했는데 기탁금만 2억 5천만 원이 들었다”며 “선거인단만 7만 명, 잠재적 선거인단 숫자로는 1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단지 5,000만 원을 갖고 전국 선거를 하라는 것은 정말 코메디였다”고 강조했다. 또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먼저 자신의 정치자금에 대해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의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서 “위선과 동거하면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이중성과 동행하는 한 개혁도 미래도 없다.”고 역설했다.

8월 14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벌금 500만 원과 추징금 2,000만 원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정치자금법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점을 볼때 위헌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법원에서는 개별 사안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김 의원이 이 같은 사실을 양심고백을 통해 언론에 밝히고 청렴결백한 의원으로 인정돼 왔으며 권 전 의원으로부터 함께 정치자금을 받은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기소되지 않는 점 등을 감안, 벌금형이 적당하다.”고 덧붙였다.

김근태는 의원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거액의 벌금형과 추징금을 내게 되었다. 김근태는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한국정치의 병폐로서 정ㆍ재계의 유착, 정치부패의 근원이기도 하는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고해성사가 ‘실정법 위반’이라는 부메랑 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소속 정당에서도 ‘해당 행위’라는 질타를 받고, 심지어 대선후보 경쟁자였던 노무현도 “우스갯거리가 됐다”고 언급했다.

후일 김근태는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지만, 썩은 상태로 정권교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재단은 정치인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에서 가장 먼저 회계 내역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석 9)

김근태는 정치인의 생활이 익숙하지 않았다. 점잖음과 겸손함 그리고 양심문제는 정치인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품목이다. 속물 정치인일수록 국가현안에는 침묵하거나 뒷걸음치고, 이념 투쟁이나 포퓰리즘, 이권에는 앞장서는 경우가 적지않다. 특히 총재ㆍ대표의 주변이나 텔레비전 카메라가 비칠 때에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다투어 앞자리를 차지한다. 꼬마민주당 부총재 시절, 한 언론이 <‘견습’ 못뗀 김근태의 고민 : 제도권 진입 2개월, 민주당 부총재직 소화 아직 역부족>이란 기사에서 김근태의 “소극적 태도는 아마도 점잖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썼다.

김근태의 이같은 ‘습성’은 재선의원이 되고, 여당의 최고위원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인기 발언이나 데마고기식 정책제시에는 딱 질색이었다. 한 언론이 제기한 대로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의 정치현실에서, 당내 경선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터였다.

김근태는 ‘인간적 존엄’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 이 명제는 그의 모든 가치에서 우선되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심중 깊숙이에는 낭만주의가 자리하고, ‘신사와 투사’가 공존하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못하고, ‘비정치적인 정치인’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굉장히 리얼리스트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인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힘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내고 결집시켜내라는 주문이라 생각되는데, 좌우간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를 잘 보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낭만주의자란 소위 격정이 있고 열정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열정이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절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집안 분위기 같고, 이전부터 열정과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면 실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석 10)
 

주석
9> <경향신문>, 2012년 1월 4일.
10> 김근태, <희망과 체념사이에서>, <희망의 근거>,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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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

012/10/17 08:00 김삼웅

 

 

대선경선에 뛰어든 김근태는 3월 3일 다시 기자회견을 통해 “2000년 전당대회(당 최고위원 경선) 때 권노갑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2,000만 원을 받았고, 모두 2억 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폭탄적인 양심선언을 했다. 대선후보 경선 과정의 초입에서 폭로된 양심선언은 당내는 물론 정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김근태는 “현재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엄청난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있다. 캄캄하고, 이는 즉시 중단되야 한다”는 소신도 아울러 밝혔다.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서 김근태는 일부 후보 진영이 보이고 있는 인력동원과 자금살포설을 우려하여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양심선언’을 택한 것이다. 당내 최대 계파의 수장이고 김대중 정부의 실세인 권노갑이 2000년 전당대회 당시 최고위원 경선에 나선 김근태를 비롯 일부 후보들에게 거액을 지원한 것이 폭로된 것이다. 정치자금 수수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오랜 당내 관행이기도 하고, 특히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성행했다.

김근태의 양심선언은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수구보수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김근태와 권노갑의 정치자금에 공세의 초점을 맞췄다. 한나라당은 호재를 만난 듯이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김근태는 사면초가의 신세로 몰렸다.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깨끗한 정치풍토를 위해 자기희생으로 던진 양심선언이 정략의 빌미가 된 것이다. 진행 중인 민주당 후보 지역 경선에서도 악재로 작용했다. 자기만 깨끗한 척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론조사에서 최하위권의 지지율에 맴돌자 자신의 ‘클린 이미지’를 이용, 지지도를 끌어 올려 보려는 돌출 행동이라는 악평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고백이 권 고문의 정치자금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대목을 개탄하여 “울고 싶은 심정” 이라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자신의 발언은 순수한 양심선언이었지, 그 어떤 정치적 노림수도 없다고 밝혔다.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하자는 내 양심선언을 정쟁화하지 말라”고 한나라당을 비판하며, “정치권 관행에 따라 선배로서 후배에게 격려금을 준 것이며 기본적으로 선의로 해석한다”면서 권노갑 전 최고위원을 엄호했다.

김근태는 주류측 경선 주자들과 조ㆍ중ㆍ동 그리고 한나라당의 협공을 받는 처지로 내몰렸다. 더욱이 야당으로부터 민주당 전체가 공격받고, 국민경선 자체가 ‘돈경선ㆍ조직경선’으로 폄하되고 있어, 그 정치적 책임이 고스란히 김근태가 떠안아야 했다.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혼자 살려고 당을 다 죽인다”는 격한 비난이 따랐다.

김근태는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 정치자금 투명화의 ‘제물’로 삼겠다”며 “검은 정치자금의 굴레를 벗지 못하면 한국정치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라고, 거듭 소신을 피력했다. 자신의 ‘양심선언’이 정쟁화되는 데 대해 “나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참겠지만, 국민경선제는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주석 6)

다음은 한 신문의 사설, 제목은 <김 고문을 바보로 만들면 안돼>다. 사설의 중간 부분이다.

우리는 김 고문의 고백을 정치 철부지의 경망스런 행동으로 몰아가려는 이런 풍조를 경계한다. 정치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며, 그 과정에 부정의 소지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고 선진국에나 후진국에나 널리 존재하는 문제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돈과 정치의 얽힘에 사실상 해결방안이 없는 것으로 체념하고 있다. 자신의 발등을 찍는 심정으로 고해성사를 했다는 그의 말은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주석 7)

김근태는 2월 25일 제주도 신산공원에서 열린 ‘반부패사회 정책을 위한 대국민 청결서약식’에 참석하여 가장 먼저 서약하는 등 부패정치의 청산을 위해 앞장섰으나 ‘관행’이 되다시피한 정치부패의 탁류를 정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근태가 양심고백을 했던 당사자 권노갑은 김근태가 타계했을 때 심경을 밝혔다.

깨끗하고 소신 있고 자기 주장에 흔들림이 없던 사람이다. 나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할 때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김 고문은 거기서 전기고문도 받았다. 학자풍이고 양심적 정치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랐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 김 고문이 2년 전 최고위원 선거에 나와 사무실 비용으로 2,000만 원을 나에게 받아썼다고 ‘고해성사’했는데 그 당시 나온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다줬다. 두 사람(김근태ㆍ정동영)것만 나타난 거다. (주석 8)


주석
6> <경향신문>, 2002년 3월 6일.
7> <한겨레신문>, 2002년 3월 5일.
8> <경향신문>, 2012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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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차기 집권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이으면서 긴 세월 옥중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구상해온 국가경영의 큰 뜻을 펴보고자 하였다.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본선에서는, 다수의 국민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꾸어온 정직한 자신을 선택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김근태는 1월 24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반부패 대통령이 되겠다”며 당내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며 “저에게 기회를 주면 반부패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고 국민ㆍ언론ㆍ검찰이 함께 하는 ‘깨끗한 손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인 부패와의 전쟁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김근태가 후보경선 출마선언에서 제시한 주요 정책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치혁명의 이정표를 세우겠다.
대세론과 지역후보론은 낡은 정치행태다.
각 후보가 정책과 비전, 자질이 투명하게 검증되는 경선의 장에 당당하게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실천을 담보하는 리더십,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된 리더십이 요구된다.
특권과 부정부패, 지역주의를 뿌리뽑고 깨끗한 사회, 경제도약, 한반도 평화정착을 이루겠다.


김근태는 출마 회견에서 “우리당 경선후보들이 돈 안 쓰는 선거를 실천하기 위해 이번 경선에서 얼마를 쓸 것인지를 공개하고 경선 후에도 지출내역을 함께 공개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당내 특정계보가 후보경선에 간여하거나, (예비후보들이) 특정계보에  기대어 후보가 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쇄신과정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반대하다가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임하자마자 이른바 차별화를 들고 나온다면 잘못된 태도”라고 비판했다.
(주석 4)

 

다음은 일문일답.

- 타 주자들이 경선비용 공개 제안을 수용안해도 혼자 할 의향이 있나.
△ 당 선관위와 지도부가 전향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란다.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특정계보 경선 개입 반대는 동교동계를 지칭하는 것인가.
△ 대통령이 총재로 계실 때 특정계보는 하나만 존재했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면 공정한 경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 노무현 상임고문 등 개혁세력 연대문제에 대한 견해는.
△ 지금은 각 출마자가 자기의 비전, 정책, 열정으로 경쟁하는 게 오히려 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국민이 기대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임하겠다.

- 내각제와 자민련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 이 시점에서 내각제 개헌은 어렵고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바란다. 이회창 총재가 결심하면 시간은 충분하다. 자민련과의 연대는 긍정적이나 합당은 반대다. 정치적 거래로 규정될 가능성이 있으며 시너지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 8. 30 전당대회 때 권노갑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했는데.
△ 도움 받았다고 인정한다. 액수 공개는 적절한 기회를 보겠다. 그분들(동교동계)의 지난날에 대해 평가하지만 거듭 태어나야한다.
(주석 5)


주석
4> <연합뉴스>, 2002년 1월 24일.
5>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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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5 08:00 김삼웅

 

 

 

김근태가 대선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개인적 야망때문만이 아니었다.
원내에 진출한 이래 동료 의원들과 언론, 국민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론조사에서 ‘차기’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민주화운동 전력과 능력, 신사적인 의정활동이 드러난 것이다.

김근태는 1998년 8월, <신동아>가 실시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에 선정되고, <뉴스피플>의 1999년 1월에 ‘가장 기대되고 호감가는 정치인’ 1위에 뽑혔으며, 4월에는 <일요신문>의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리더’ 1위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 27일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정치부 기자 202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정직성, 언행일치, 공정한 처신, 모범적 의정활동 등의 항목에서 압도적인 득표를 기록한 김근태를 백봉 신사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그는 네 차례나 이 상을 수상했다.

앞의 <신동아>가 ‘의원들이 뽑은 상대당의 우수의원’(설문응답 171명)에서 야당의원이 뽑은 우수 여당의원에 ‘실력 및 성실성’의 항목에서 김근태(8표)ㆍ조순형(6표)ㆍ정세균(4표), ‘매너’ 부문에서 김근태ㆍ김원길ㆍ강창희ㆍ이협ㆍ조순형ㆍ조순승 순위였다. 여당의원이 뽑은 우수 야당의원은 이미경ㆍ김기춘 등이 윗자리를 차지했다.

<시사저널>이 1999년 11월 실시한 ‘21세기 한국을 이끌어 갈 가장 적합한 정치인’의 여론조사는 김민석(1), 이회창(2), 이인제(3), 김근태(4), 노무현(5)의 순위로 선정되고, <한겨레21>이 2000년 5월 8일 국회의원 당선자 273명을 대상으로 ‘네티즌이 뽑은 16대 국회 예비스타’에는 김민석ㆍ임종석ㆍ추미애에 이어 4위에 올랐다. 2000년 6월 25일부터 4일간 사이버 정치증권 시장인 포스탁(www.posdaq.co.kr)이 시민 1,031명을 대상(복수응답 7,217표)를 상대로 실시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20~30대 네티즌들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후보 가운데 김근태 의원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근태가 894표(12.4%)로 최다득표를 하고, 한화갑 881표(12.2%), 이인제 829표(11.5%), 정동영 811표(11.2%), 박상천 849표(9.0%), 김민석 644표(8.9%), 추미애 507표(7.0%) 순이었다.

<뉴스피플>은 1999년 12월 16일치에 ‘21세기 한국을 이끌 뉴리더 21인’을 선정 발표했다.
이회창, 김대중, 이건희, 정몽준, 박원순, 김근태, 이인제, 정몽구, 김민석, 정명훈, 정주영 순이었다. 같은 무렵 <경향신문>이 조사한 국회 여야 의원을 통틀어 가장 진보적 의원에는 김근태(60), 이부영(31), 김문수(20), 김원웅(19), 임종석(19), 김민석(12), 이창복(11), 이재정(10), 이해찬(7)으로 김근태가 진보의 기수로 선정되었다.

 



 

대학교수들이 실시한 국회의원 299명 중 가장 진보성향의 국회의원에는 김근태가 압도적으로 1위에 뽑혔다. 지식인과 정치부 기자들은 그를 ‘차기 1순위’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치는 ‘차세대 지도자 집중분석 시리즈’를 싣고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를 ‘집중분석’했다. 이 기사는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

장점                           
1. 민주화의 희생자라는 인식
2. 재야 출신의 도덕성
3. 진보적이고 개혁적 이미지
4. 활발한 의정 활동(기초에 충실)
5. 인간적 친화력이 뛰어남
6.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음
7. 지역감정에서 자유스러움
8. 치밀하고 합리적인 성격
9. 부인 인재근씨의 지명도
10. 폭넓은 대인 관계

단점

1. 이미지가 가벼워 보임
2. 학자적 스타일
3. 행정 경험이 없음
4. 정치적 리더십이 검증되지 못함
5. 재야 출신 이미지
6. 대중적 인지도가 낮음
7. 정치적 지역 기반 취약
8. 국가적 정책 제시가 미흡
9. 당내 기반 취약
10. 3김 극복 결단력 부족

<뉴스메이커>는 또 역학자 마의천(六甲의 저자)의 김근태 ‘관상평’을 실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0년에는 제2의 성城 구축한다”

학변동오지상(鶴變冬烏之相), 두루미가 찬 겨울 까마귀로 변하여 소나무에 앉아 먹이를 노리는 형상이다.
얼굴이 긴 장안(長顔)에 눈빛이 야릇하여 심오함과 일을 도모함에 묘미가 있다. 이마가 직립해 학업 운은 있으나 이마 양옆 부위가 협소해 초년에 뜻을 펴지 못하는 불운이 있다.

자신의 웅지를 피려는 투자에 찬 기(氣)가 충족돼 있으나 신(神)이 부족해 40세 이전까지 몽유(夢遊)할 뿐이다. 얼굴이 바람 풍(風)자 형으로 인생 풍파는 거세지만 뼈가 곧고 면모가 청수해 그 뜻이 고원(高遠)하다.

눈썹이 양분해 형제 동기의 덕은 없으나, 어미 간문골이 둥그린 태를 이루고 있어 처자 덕은 있다. 얼굴 중심인 비량(鼻粱ㆍ콧등)이 틀어져 45세 이전에는 늪에 빠져 인생을 자탄한다. 그러나 법령선이 곧고 양 턱 부위가 힘있게 뻗어 노년은 평안하고 진취적이다.

45~46세부터 운명이 환희적 전환기를 맞는다. 눈동자가 붉고 흐린 듯하나 눈빛에 은광(隱光)이 나와 탁기(濁氣)를 만회하고 주위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중적이고 이단적인 성격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 99년은 보이지 않는 고통이 따랐지만 기반을 닦고, 2000년 53~54세 운세는 강둑에 바늘구멍이 있어 배신의 통(通)이 있지만 제2의 성을 구축하는 성숙의 운력이다.

수지모야 무면수(誰知暮夜 無眠愁) 심해창파 자주망(深海滄波 自走忙) 수지북림 좌한구(須知北林 坐寒鳩) 갱위남류 금의맹(更爲南榴 錦衣甍).

긴 밤 잠 못 이루는 근심을 누가 알겠는가. 심해 창파 스스로 분주한 명이여.
모름지기 북림의 찬 비둘기는 알 것이다. 다시 남류의 호화스런 꾀꼬리가 될 것을.
(주석 2)

<대한매일>은 1999년 1월 7일치에서 ‘99년의 정치인 99인’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52.9%, 이회창 20.6%, 김종필 16.3%, 김민석 11.1%, 노무현 7.2%, 이인제 6.1%, 이해찬 4.7%, 김근태 4.2%, 조세형 4.2%, 강재섭 4%의 순으로 “99년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가장 기대되거나 호감이 가는 정치인은 누구입니까”의 조사결과를 실었다.

<대한매일>의 주간 자매지 <뉴스피플>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국민 6,000명과 각 분야 전문가 100명 씩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신동아>는 2001년 8월호에서 “한국의 21세기를 열어가는데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을 선정 발표했다. 중앙일간지와 방송기자 1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여야 구분 없이 3명까지 복수답변토록 한 조사결과 강재섭(1), 김근태(2), 이인제(3), 손학규(4), 김덕룡(5), 한화갑(6), 이부영(7), 노무현(8)의 순위로 나타났다.

정치개혁시민연대와 의회발전시민봉사단이 1999년 10월에 발표한 ‘98년 국정감사 모니터 활동결과’에서 김근태는 재경위의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었다. 두 단체의 ‘상임위별 바람직한 의원’에도 김근태는 재경위의 대표로 뽑혔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김근태는 초선 시절부터 주목받는 정치인, 2000년대 한국을 이끌 정치 리더로 지목되었다. 여야의 쟁쟁한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상위권에 선정되고, 상임위와 국정감사 활동에서도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신동아>는 2001년 9월호에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인간탐구’에서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를 함께 실었다.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 째 1위를 차지한 것은 반갑다. ‘믿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주석 3)


주석
2>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
3> <신동아>, 2001년 9월호,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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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4 08:00 김삼웅

 

 

김근태 의원과 부인 인씨가 후원의 밤에서 희망돼지모임 회원들에게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받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근태의 성실한 의정활동과 폭넓은 대내외 활동에도 대중적 인기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어느 주간지가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시사저널>)이라고 뽑을만큼 다른 ‘잠룡’들에 비해 지지율이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책무’를 생각하면서 경선출마를 서둘렀다.

능력이나 인품과 대중성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의 정치풍토는 더욱 그런 편이다. 연꽃은 흙탕물에서도 곱게 피지만 흙탕물 못지 않는 한국 정계의 탁류에서 식견과 품성이 우수한 사람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김근태는 당내 대선 경선을 앞두고 여러날 고심을 거듭했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때에도 돈이 없어 쩔쩔맸던 터였다. 최고위원 경선이 지역주의와 돈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을 지켜보던 터라 고심은 더욱 짙었다.

김근태는 2001년 5월 작가 공지영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도 정치적으로 폭발할 기회가 온다”면서 대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긴 대담에서 공지영이 뽑은 발문에서 이즈음 김근태의 고뇌의 일단을 살피게 된다.

“정당 내부의 민주화를 이뤄야 합니다. 집권민주당 역시 이념과 정책과 역사성에서는 민주정당이지만 그 행태와 정책 실현의 과정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맹목적 지역주의, 그에 기초한 보수체제와의 연결고리를 혁파해야 합니다.”

“정치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져요. 높은 수준에서 보면 다 똑같이 보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사회, 좀더 땀흘리는 사람이 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의원들에게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고, 그것과 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라는 것은 법치주의ㆍ법치사회를 만들고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포용할 수 있어야 돼요. 포용이 아니면 적어도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되지요.…자기 세력을 특별하게 규정하면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다 상대편으로 쫓아내는 결과로 나타나고, 그래서 소수화시키면서 어려움이 발생하죠.”

“저는 사회심리적으로 한국사회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미국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면 한국 국민의 심리가 어떨까… 걱정되요. 국민통합은 지역주의 때문에 이뤄지지 않고, 정치참여는 불신 때문에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매우 좁습니다.”
(주석 1)

중국의 근대혁명을 주도한 문인 루쉰의 산문에 ‘불의 얼음’이란 대목이 나온다. 표면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안은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김근태를 여기에 대입하면 맞을 듯 하다.

김근태는 2002년 2월에 시작되는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뽑는 국민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1년 전 기존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김근태는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당의 중진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참이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개혁진보세력이 다시 정권을 맡아서 민주화와 서민생계, 그리고 남북관계를 더욱 화해협력 체제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이라 믿었다. 보수세력이 반세기 이상 한국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빈부ㆍ지역ㆍ도농ㆍ남녀ㆍ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가져오고, 남북 대결을 불러온 파행성을 김대중의 5년 집권으로는 바로잡기 어렵다는 것이 김근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주석
1> <월간중앙>, 2001년 5월호, 136~148쪽,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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