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6 08:00 김삼웅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2006년 6월 28일 오전 당사에서 열린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 지도부를 선출한 우리당의 행로는 그러나 만만치가 않았다. 5월 31일 실시된 제4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집권당이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나 지자체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고 있으나, 이 때 우리당의 경우는 ‘참패’라는 용어 그대로였다.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전북지사 1명만 당선되고, 기초단체장 선거도 수도권 66곳 중에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7개 대도시의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전패한 것이다. 655명을 뽑는 광역의원 선거(지역구)에서도 수도권은 물론 부산ㆍ대구ㆍ광주ㆍ대전ㆍ울산 등 대도시에서 1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패했으나, 광주ㆍ전남북은 잔류 민주당 후보에게 손을 들었다.

정동영 의장이 선거 결과가 드러난 6월 1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취임 100일도 못되어서다. 일부 최고위원들도 동반 사퇴하여 우리당은 지도부 부재 상태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집권당의 표류는 국정의 표류로 연계된다.

좀 묵은 얘기지만 김근태는 2002년 대선후보 과정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어느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발언을 남겼다. 이번 당의장 선거에서 패배한 심경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기자가 물었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후, 개인적 ‘역사성’을 지키는 일과 대중정치인으로 ‘성공’ 하는 일 사이에서 쉽지 않은 줄타기를 했으리라고 보인다. 둘 사이에 균형을 잡는 데 이제 익숙해졌다고 자평하는가?”

여전히 굉장히 어렵다. 우리 정치의 제도와 관행이 아직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번에 양심 고백한 것은 범죄를 자백한 것과 다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양심고백을 했다면 왜 당당하지 못하나” 이러는데, 옛날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한다면서 왜 도망 다니느냐”고 공격하던 것과 똑같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우리 신념의 실현을 막는 제도와 관행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을 내치는 사회라면 그건 서로 냉소하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주석 3)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동영 의장과 일부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우리당은 6월 7일 국회의원ㆍ중앙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논란 끝에 과도 지도부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키로 했다. 2003년 11월 창당 이래 벌써 4번째 비대위 체제였다. 일천한 헌정사이지만 집권당이 이렇게 흔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대위는 중앙위원회로부터 당헌당규 개정과 인사권 등 전권을 위임받고, 전직 당의장 등 8인으로 구성된 인선위원회에서 6월 9일 김근태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당의장)으로 선임했다.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에 탈락한 지 4개월 여 만에 과도체제의 당의장에 선임된 것이다.
분당 과정에서 원내대표에 선출된데 이어 두번째로 맡는 과도기의 요직이었다. 당내 위기 시기에 그는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번갈아 맡게 되었다. 역량과 위기관리 능력이 그만큼 평가된 셈이지만, 씁쓸한 마음을 쓸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독배를 마시는 심경으로 비대위위원장의 책임을 맡겠다”면서 비상시의 당의장에 취임했다. 비대위 상임위원에는 김한길ㆍ문희상ㆍ이미경ㆍ정동채ㆍ김부겸ㆍ정장선 의원이 선임되고, 유인태ㆍ이호웅ㆍ이강래ㆍ박병석ㆍ박명광ㆍ윤원호 의원은 비상임위원에 위촉되었다.

 


열린우리당은 2006년 6월 7일 오전 당사에서 의원총회를 갖고 향후 당 진로를 논의했다. 김근태, 김혁규, 조배숙 최고위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근태는 취임과 더불어 의장 직속으로 ‘서민경제회복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일자리 창출과 기업투자 활성화를 목표로 사회적 대타협을 도모하는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그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심을 모아온 정책이었다.

김근태는 6월 28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정부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김병준 전 대통령 정책실장을 내정한 것과 관련, 당의 비판적 여론을 전하고, 인사문제에 있어서 좀 더 광범위한 여론을 수렴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 안 팎에서는 김 의장이 좀 더 강하게 대통령을 압박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의 ‘액운’은 이어졌다. 7월 26일 실시된 서울 성북을과 송파갑, 경기 부천ㆍ소사, 경남 마산갑의 국회의원 재ㆍ보궐 선거에서 이번에도 모두 패배했다. 또 10월 26일 국회의원 2곳과 기초단체장 등 9개 지역에서 실시한 재ㆍ보궐선거에서도 전패했다. 여당이면서도 영남지역 일부에는 단체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지역갈등은 강고했고, 영남지역의 한나라당세는 가히 철옹성이었다.


주석
3> <인물과 사상>, 2002년 7월호,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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