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8 08:00 김삼웅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연설 차례를 기다리는 5명의 후보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후보 국민참여 경선제를 도입하여 당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후보를 뽑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근태ㆍ김중권ㆍ노무현ㆍ유종근ㆍ이인제ㆍ정동영ㆍ한화갑(가나다순)이 후보에 나섰다. 국민참여경선은 당원과 일반국민을 같은 비율로 섞어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200만 명 중에서 무작위로 2만 명을 추출해 선거인단을 구성한 것이다.
김근태가 출사표를 던진 것은 당원은 계보와 조직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참여한 시민들은 다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경선 직전의 대세는 이인제 후보가 선두 주자였다.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 주류가 그를 밀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출마로 여권이 분열되고, 이회창이 열세에 놓이면서 김대중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동정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제주에서부터 이변이 터졌다. 한화갑이 이인제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다. 노무현이 3위였다. 이어진 3월 10일 울산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치고 오르고 이인제는 3위에 머물렀다. 김근태는 세 곳의 경선 투표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민심을 헤아렸다.

3월 12일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는 성명서와 함께 후보를 사퇴하였다.
사퇴에 앞서 노무현을 만나고,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노무현이 당선되어 민주정권을 이어받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된 데는 김근태 지지세력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후보를 사퇴했는데도 후폭풍이 거세게 나타났다. 정치자금 수수의 법적책임 문제가 따른 것이다. 김근태는 자신의 ‘고백’을 정치자금 투명화의 계기로 만들고자 했지만, 현실은 사법처리 쪽으로 흘러갔다. 검찰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김근태를 기소했다.

2003년 7월 24일 서울지법 형사 5단독 유승남 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 의원의 주장대로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수수하고 신고를 누락하는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인정돼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징역 6월에 추징금 2,000만 원을 구형했다.

최후진술에 나선 김근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며 국민적 요구가 됐다”며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인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파헤친 양심고백이 이러한 흐름에 작지만 의미 있는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2002년 민주당 울산 경선에서 후보 연설 도중 이인제 후보가 김근태 후보(좌)와 한화갑 후보(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근태의 진술은 이어졌다.
“지난 3월 대선 경선 과정에서 중앙선관위는 3억 원을 지출 한도로 정했는데 기탁금만 2억 5천만 원이 들었다”며 “선거인단만 7만 명, 잠재적 선거인단 숫자로는 1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단지 5,000만 원을 갖고 전국 선거를 하라는 것은 정말 코메디였다”고 강조했다. 또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먼저 자신의 정치자금에 대해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의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서 “위선과 동거하면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이중성과 동행하는 한 개혁도 미래도 없다.”고 역설했다.

8월 14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벌금 500만 원과 추징금 2,000만 원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정치자금법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고 따르고 있는 점을 볼때 위헌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법원에서는 개별 사안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김 의원이 이 같은 사실을 양심고백을 통해 언론에 밝히고 청렴결백한 의원으로 인정돼 왔으며 권 전 의원으로부터 함께 정치자금을 받은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기소되지 않는 점 등을 감안, 벌금형이 적당하다.”고 덧붙였다.

김근태는 의원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거액의 벌금형과 추징금을 내게 되었다. 김근태는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한국정치의 병폐로서 정ㆍ재계의 유착, 정치부패의 근원이기도 하는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고해성사가 ‘실정법 위반’이라는 부메랑 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소속 정당에서도 ‘해당 행위’라는 질타를 받고, 심지어 대선후보 경쟁자였던 노무현도 “우스갯거리가 됐다”고 언급했다.

후일 김근태는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지만, 썩은 상태로 정권교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재단은 정치인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에서 가장 먼저 회계 내역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석 9)

김근태는 정치인의 생활이 익숙하지 않았다. 점잖음과 겸손함 그리고 양심문제는 정치인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품목이다. 속물 정치인일수록 국가현안에는 침묵하거나 뒷걸음치고, 이념 투쟁이나 포퓰리즘, 이권에는 앞장서는 경우가 적지않다. 특히 총재ㆍ대표의 주변이나 텔레비전 카메라가 비칠 때에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다투어 앞자리를 차지한다. 꼬마민주당 부총재 시절, 한 언론이 <‘견습’ 못뗀 김근태의 고민 : 제도권 진입 2개월, 민주당 부총재직 소화 아직 역부족>이란 기사에서 김근태의 “소극적 태도는 아마도 점잖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썼다.

김근태의 이같은 ‘습성’은 재선의원이 되고, 여당의 최고위원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인기 발언이나 데마고기식 정책제시에는 딱 질색이었다. 한 언론이 제기한 대로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의 정치현실에서, 당내 경선의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터였다.

김근태는 ‘인간적 존엄’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 이 명제는 그의 모든 가치에서 우선되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심중 깊숙이에는 낭만주의가 자리하고, ‘신사와 투사’가 공존하는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못하고, ‘비정치적인 정치인’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굉장히 리얼리스트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인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이 어려운 국면에서 힘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내고 결집시켜내라는 주문이라 생각되는데, 좌우간 근본적으로 낭만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를 잘 보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낭만주의자란 소위 격정이 있고 열정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열정이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절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집안 분위기 같고, 이전부터 열정과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면 실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석 10)
 

주석
9> <경향신문>, 2012년 1월 4일.
10> 김근태, <희망과 체념사이에서>, <희망의 근거>,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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