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7장] 집권당 원내대표, 당의장 맡아

2012/10/25 08:00 김삼웅

 

 

열린우리당은 2006년 2월 18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신임 의장에 정동영 상임고문을 선출했다. 정동영 의장이 박수치는 김근태 최고위원을 바라보고 있다.

 

김근태는 2005년 12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임하고 당에 복귀했다. 이어 해가 바뀐 2006년 1월 11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의장 후보 출마를 선언, 준비에 나섰다. 그동안 한국 정당들의 직제는 총재→대표→당의장으로 당의 최고책임자의 직명이 변하였다. 권위주의적 호칭이 바뀐 것이다. 김근태가 출마를 선언한 우리당 의장 후보에는 정동영ㆍ김혁규ㆍ조배숙ㆍ김영춘ㆍ임종석ㆍ이종걸ㆍ김부겸 의원과 김두관 대통령정무특별보좌관이 각각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김근태는 출마선언의 기자회견을 갖고 <바꾸면 반드시 이깁니다>란 제목의 소견을 밝혔다.
△ 바꾸면 반드시 이깁니다. △약속을 지키면 분명히 이깁니다. △기적을 만듭시다. 대반전을 이룹시다. △ 이른바 ‘실용’은 실족했습니다. 아니 실패했습니다. △ 새로운 성장을 위해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겠습니다. △ 정치혁신을 이루겠습니다. 창당 초심을 되찾겠습니다. △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 △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등 7개 항목의 ‘공약’을 제시했다.

회견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곧은 나무는 재목(材木)으로 쓰고, 굽은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써야 합니다. 당의 기둥을 똑바로 세워야 합니다. 기둥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당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부동산 대책에서 머뭇거렸던 우리의 과오와 창당정신인 기간당원제를 흔들었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 기둥을 곧은 나무로 바꿔 세워야 합니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2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당이라는 우리의 기둥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석 1)

김근태는 이어 1월 15일에는 <당 재건을 위한 김근태의 7가지 약속>을 발표했다. 그동안 원내 대표와 국무위원으로 재임하면서 익혀온 알찬 내용과 포부를 담았다.

당 재건을 위한 김근태의 7가지 약속

1. 할 수 있는 개혁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 대선, 총선 공약이행 점검단 설치
- 미이행 공약에 대한 추진 방안 마련
- 국민보고회 개최

2. 범민주세력 대연합을 실현하겠습니다.
- 범민주세력대통합 추진
- 민주당, 민주노동당과 정책 공조 강화
-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 완화 전향적 검토

3. 동반성장과 양극화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추진하겠습니다.
- 당내에 ‘사회적 대타협 추진기구’ 구성
- 여야, 정부, 경제계, 노동계,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범국민기구 구성

4. 정치문화 개혁을 위한 제도개선을 추진하겠습니다.
- 지역주의 완화를 위한 제도개선 추진
- 선거구제 개편 추진

5. 당을 정치의 중심으로 만들겠습니다.
- 당ㆍ청 의사소통 체계 활성화
- 고위당정회의 강화 : 상설협의체 구성
- 당 정책위원회를 강화해 당정협력 사무국 역할 부여

6. 당의 통합과 단결을 이루겠습니다.
- 당내 의사소통 구조의 확장과 개방
- 당원의 의견 수렴을 위해 평당원 포럼 운영
- 당원협의회의 기능과 권한 강화

7. ‘깨끗한 정치’ 실현을 위해 기간당원제를 보완하겠습니다.
- 허위당원. 대납당원 근절을 위한 확인 시스템 정비
- 전 당원에 대한 당원가입의사 재확인.
(주석 2)

 


열린우리당은 2006년 2월 18일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후보를 신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투표전 전당대회장 앞마당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김근태는 당의장 선거를 앞두고 연초부터 26개 도시를 순회하고, 6천 명이 넘는 당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당의 개혁 노선을 설명하였다. 4년 전 대선 후보 때에도 하지 못했던 강행군이고 열정이었다. 비틀거리는 참여정부를 바로 세우고 3기 민주정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의 변화와 혁신적 개혁이 요구되었다. 이를 대의원들에게 설명하고, 자신이 선장노릇을 맡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김근태가 여전히 집권당의 대표로 선택받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원인 중에는 대중정치인으로서 지역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영호남의 지역성을 갖지 못한 경기 출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정략적으로 갈라놓은 영호남의 갈등 관계가 역설적으로 민주 진영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수도권의 당원ㆍ대의원 중에는 의외로 영호남 출신들이 많았고, 이들의 향배에 따라 당대표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근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1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동영이 4,450표(48.2%)를 얻어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전국 대의원 1만 213명 중 9,229명이 참가(투표율 76.1%)하여 1인 2표 방식으로 실시된 이날 선거에서 김근태는 3,847표를 얻어 2위에 그치고 말았다. 3위는 김두관(3,218표), 4위는 김혁규(2,820표)였다. 세 사람이 모두 영호남 출신이고, 김근태만 경기 출신이었다.

김근태는 600여 표 차이로 당대표에 비록 2위에 그쳤지만 김근태의 선방이었다는 것이 당내외의 여론이었다. 당의장에 선출되지 못하고 수석 최고위원에 만족해야 했다. 정동영은 2004년 5월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의장직에서 물러난지 2년 여 만에 다시 당의장에 롤백하였다. 그의 달변과 대중성을 김근태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지만, 수석 최고위원으로서 응분의 역할을 하고자 마음을 가다듬고, 어려운 처지에서 열심히 도와준 당원과 동지들을 격려하였다.


주석
1> 김삼웅 보관자료, <김근태 당의장 출마선언>.
2>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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