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내가 살고 있는 감방에 창이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깥마당으로 열려져 있지.
북동쪽을 향한 창문이어서 지난 추운 겨울 내내 햇빛과는 서로 엇비켜 서 있는 꼴이었소.
해는 떠서 아침을 먹을 녘까지만 창틀 옆 변소 담벼락을 비추다가 이내 그늘 속으로 내 방 창문을 묻어버리곤 했소.
해서 더욱 얼어 있었고 그 위를 회색빛 우울과 바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오.
용기를 내서 창문을 열었다가도 이내 닫아 버리곤 했다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창문은 나에게 설레임으로 다가왔소.
저 고대하는 우리들의 희망을 향한 발돋움대이기도 하고,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울적함을 노래에 실어 날려보내기도 하고, 저 아랫배로부터 토해져 나오는 짐승같은 신음소리를 쏟아내는 나의 창문이 되었다오.
지금 나에게는 꽤 중요한 것이 되었소.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작년 11월말 이후였다오.
그 전 두어 달 동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간섭해 오는 존재였다오.


내가 있었던, 또 지금 내가 있는 방들은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소.
앞뒤의 창들은 비닐로, 아스테이지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소.
조그만 구멍들이 뻥뻥 뚫린 철판을 대어 어두컴컴 했었소.
바깥에서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상당한 주의력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였소.
그 안에는 흉츳스런 것이 갇혀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고 경멸받아서 마땅한 존재로서 말이오.


작년 9월말 처음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난 이러한 것에 흥미나 관심이 전혀 가지지 않았다오.
아니 주의를 가질 기력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오.
오직 필요한 것은 컴컴한 짙은 어둠과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의 차단, 그것이었다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는 어느정도 비켜설 수 있게된 것이었으나,

더욱 깊어져 가는 마음의 상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냥 정신적 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박하였소.

 

어떤 와해, 버텨가는 것의 종착역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요.
나는 내가 이제 황폐함 속으로 밀려 떨어져 쓰러지겠구나, 이러한 것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무너져 내리는 곰 같은 신세였소.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로 핥는 것이었다오.
그래도 나는 안심이 되지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이때 나는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했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했던 것이오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소.
상처를 확인해 나가는 완화된 형태의 적의만이 순간순간 번득이는 것이었소.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나에게 있었다오.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구원은 나타난 것이었소.
그것은 마루 밑바닥으로부터였소.
그곳에서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오.
애정이 넘쳐흐르는 코 먹은 소리였다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쥐들의 사랑이었소.

 

오. 쥐가, 쥐의 그 목소리가 나의 구원이었소.
그러면서도 한편 나의 이성은 주저주저 하였소.

쥐는 나에게 이런 것이었소.
쥐약 먹고 골목길에 나자빠져 시뻘개진 창자가 툭 튀어나온 채 길바닥에 내던져 있는 것이거나,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페스트처럼 파괴와 죽음의 그림자였다오.
미키 마우스같은 영리함은 우리들의 감수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아마 누구나 이 점은 나와 비슷할 것이오.
그래도 이성은 살아서 이것은 뭐 이상하고 섬찍한 일인 것 같다고 나를 끊임없이 제동걸려고 했지만 제껴 버렸소.
내가 상식세계 그 바깥으로 쫓겨나 있던 그때 이성의 힘은 약합디다.


가슴에 다시 생명의 불씨를 살려 내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일 뿐이오.
사람의 사랑이 봉쇄되어 버렸던 나에게는 그나마 이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었소.
이렇게 막상 쓰다 보니까 뭔지 좀 어색해지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 때는 정말 사실이었소.
그리고 나의 희생에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오.
저희들끼리 나눈 쥐들의 그 사랑이 말이오.


그리고 참 인재근씨가 계속해서 넣어준 과일과 우유, 음료수, 이것도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소.
그 때 나는 별로 무엇을 먹고 싶거나 설사 어느 것을 먹었어도 소화해 낼 능력이 없었지만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이 물건들을 통해서 확인해 주는 그 손길이 눈물겨웠소.
거기에서 내가 아는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대기고 했고, 혹시 체온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어 자꾸 만져보기도 했다오.
모두 빼앗겨 버렸던 당시의 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도 싶었던 것이오.
이것을 채워주었던 것이지.

인재근씨, 당신이 말이오.


어쩌다가 하루 걸러서 이틀이 되고, 사흘이 그냥 지나면 나는 불안해졌던 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오.


또 다음에.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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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2 08:00 김삼웅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시해온 각종 선거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계층은 기권을 많이 하고, 부자들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에서는 부자 정당(보수정당)을 더 선호한다는 최근의 여론조사도 나타났다. 그래서 부자들의 대변자가 다수 당선되는 역설이 진행된다. 앞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의 화신’과 ‘고문의 화신’을 환치시키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이를 소급하면 친일파가 ‘건국의 주역’이 되고, 현재화하면 독재세력이 민주인사들을 ‘종북주의자’로 내모는 꼴이다.

김근태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감시, 정보기관의 용공조작과 족벌신문들의 흠집내기에도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고 버틴 데에는 역사에 대한 낙관때문이었다. 앞의 ‘남은 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는 민중(국민)을 믿었고,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그가 겪은 고통, 특히 육신의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웠다.

최후진술을 통해 밝힌 고문의 한 대목이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절반쯤 됩니다. 고문할 때는 밥을 주지 않는데,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아 심리적인 압박과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델시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셔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이런 참혹한 얘기를 하며 동물적 능욕을 가했습니다.

제 생식기를 가르키며 ‘이것도 잎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하면서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머리와 가슴ㆍ사타구니에 전기고문이 잘되게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며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했습니다.
(주석 3)

여기서 나오는 ‘이재문’은 남민전사건에 끌려가 고문 당해 죽은 사람을 말한다. 숱한 사람이 저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애국자들이 겪었던 고문과 비슷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하면서 일제의 고문 기술자들이 살아남고, 박정희ㆍ전두환 시대에는 그 후예들이 ‘고문기술’을 전수받았다. 다음은 1912년 ‘105인사건’ 당시 심한 고문을 당했던 선우훈의 기록이다.

네 놈이 밤낮 30여일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드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숫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훅 쏱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 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 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주석 4)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gt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일본군출신 박정희 정권과 그의 충복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근태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하수인은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한국의 대학생 중에는 김근태와 이근안을 분별하지 못하고, 6월항쟁과 김대중ㆍ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거친 뒤에 나타난 이명박 정권에서는 철거민들이 경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숨지고, 대통령의 측근들이 국무총리실에 아지트를 설치, 민간인을 사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하나회출신이 국회의장이 된다. 독재자의 딸은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이고, 5공의 대표적 조작시국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는 집권당 대표,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기도 한다지만, 이처럼 잔혹사가 단기간에 되풀이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김근태는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조직하여 전두환 세력과 전면에서 싸웠다. 1983년의 민청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정신을 닮았을 것이었다. 일제가 그랬듯이, 5공 정권의 보복은 혹독했다.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으로 ‘지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꺾이지 않고 옥살이 끝에 출감해서는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하여 청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갇힌 몸이라 수상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뤄야했다. 그 시대에도 동기생 중에는 고시를 하여 법관이 되거나 5.6공에 참여하고, 선량이 되기도 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지명도를 사서 김영삼이 종로 출마를 제의했으나 “지금은 군부독재와 싸우는 재야의 결집된 힘을 약화시키고 개인적 지위상승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때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5선, 6선은 따놓은 당상이 되었을 것이고, 정계의 거물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설 때와 머무를 때를 알았고, 어느 때에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정도인 지를 알았다. 백범 김구의 “정도냐 사도냐”를 늘 가슴에 새겨왔다.

그는 뒤늦게 정권교체와 정치혁명을 꿈꾸며 정치에 참여했다.
1991년 출감했을 때 김대중이 신민당의 부총재를 제의하여, 44세에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원외의 부총재, 그것도 임명직 부총재의 지위는 별로 힘을 쓰기가 어려웠고, 성격상 ‘정치적’이지도 못하였다. 한국의 정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보다는 정략에 능숙한 정상배들이 들끓었고, 정도보다는 사도가 정치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더욱이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에는 5공세력과 일부 야당이 야합한, 3당 야합 세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


김근태는 도전 끝에 제15대 국회의원이 되고, 이후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으며, 참여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가 별세했을 때 어느 신문의 사설처럼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 정치나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석 5) 김근태는 ‘정치공학’에는 서툴렀으나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정치인이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하고서도 도덕성과 순결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영혼’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마키아벨리즘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로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런 길이었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정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순결한 지성인이었다.


주석
3> 김근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1심 최후진술.
4>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65쪽, 사람과 사람, 1998.
5> <한겨레> 사설, 2011년 12월 31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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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27 03:00:00 기사수정 2012-10-27 10:02:20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하고 친정으로 15년 만에 돌아오게 된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가 그동안 자신의 어지러운 정치 행로를 공자(孔子)의 주유천하(周遊天下)에 비유했다.

이 대표는 25,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운명적으로 정치를 처음 시작한 어머니의 당으로 합류하게 돼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며 “공자님이 어머니의 나라를 떠나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다 14년 만에 돌아왔다고 하는데 저도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노(魯)나라에서 자신의 큰 뜻을 실현하기 어려워 경륜을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유랑한 것에 자신의 정치 행적을 비유한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지적이다.



이 대표는 1997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 터지자 탈당해 국민신당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대선 후에는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으나 대선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고 다시 탈당해 충청권 정당인 자민련에 합류했다. 이후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을 거쳐 최근엔 당명을 바꾼 선진통일당 대표가 됐다.

이 대표는 잦은 당적 변경에 대해 “당명이 바뀌거나 다른 당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은 당적 변경과 상관없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몇 번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김근태 평전 / [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1 08:00 김삼웅

 

위정자의 덕이 없어서인가, 국민의 복이 없어서인가.

이명박 치하 4년여 동안 강원룡ㆍ박경리ㆍ김수환ㆍ노무현ㆍ법정ㆍ박완서ㆍ김대중ㆍ김준엽ㆍ정기영(건축가)ㆍ박태준ㆍ김근태ㆍ이소선… 등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각계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사이비 종교지도자, 친일파군인, 독재자, 기회주의언론ㆍ문인, 유신잔당, 변절민주화운동가, 악덕기업인, 고문기술자 등이 호의호식하면서 한 세상을 누비는 데, 왜 그들은 그토록 빨리 죽어야 하는가.


<노자> 제70장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당과 악행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진정한 승리는 하늘이 항상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거꾸로 되는 경우가 많은가.

사마천은 한무제 천한(天漢) 2년 (B.C 99년)에 이른바 ‘이능의 화’ (李陵之禍)을 당한다.
이릉은 용감한 장군으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조정의 중신들은 물론 황제까지 나서 너나없이 이릉을 배신자라며 매도하였다. 그때 한 사람 사마천이 이릉의 사람됨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서 분연히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고 사내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당하고 말았다. 거액의 돈을 내면 방면될 수 있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사마천은 수모를 견디면서 <사기>를 집필하였다.
열전(列傳)의 첫머리에 백이숙제의 고사를 쓰고, <노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였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은 옳은가 그른가!”를 거듭 물은 것이다.

사마천은 젊은 날 스승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공양학을 배우면서 역사철학에 뜻을 세웠다.
스승은 “하늘은 자연의 모습을 한 유의지적(有意志的) 최고신이다. 감응의 방식은 하늘이 인간의 행위를 감찰한 뒤에 일련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나타냄으로써 인간 세계의 지배자에게 훈계나 상을 내린다” (주석 1)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창하여 천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갈 만한 곳을 골라서 가고, 해야 할 말을 하고, 삿된 길로 가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분발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재앙을 당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구나!”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하늘을 우러러 거듭 탄식했다.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날의 꿈은 교수였다. 전두환ㆍ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닉네임이 따를 만큼, 젊은 그는 행동인이기보다는 사색인이었다.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평온한 질서의 민주주의 시대였다면, 정치인 네루의 길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간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는 김근태,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 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의 투사로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이성을 짓밟을 때 김근태는 청년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온건한 대학생이 감분(感憤)하여 전선에 뛰어든 것은 군부독재세력의 야만성때문이다. 전방에 있어야할 군인들이 후방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는, 마치 고려의 무인시대와 같은 막장을 지켜보면서 저항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심했고 시련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사마천이 울분하여 <사기>를 지었다면 김근태는 감분하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고 하겠다.
어찌 김근태 뿐이었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 평화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외세의 탄압으로, 독재자들의 폭압으로, 겨레와 민족이 짓밟힐 때 빼앗긴 조국독립과 통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그들의 능력과 역량으로 보아 시대에 적응하고 시세를 좇았으면 크게 출세하여 부와 감투가 주어지고 대대손손 부귀광영을 누렸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배부르고 등 따뜻함”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고래로 정도(正道)는 가시밭길이고 사도(邪道)는 풍요롭지만, 그래도 소수 나마 정도를 택한 사람이 있고, 이들로 인해 정의와 진리는 지켜지고 역사는 조금씩이나마 진보한다.

김근태는 가끔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저항하다 잡혀 죽고, 비겁한 자들은 투항해서 바빌론의 앞잡이나 개가 되고, 저항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투항하기에는 소시민적 양심이 살아 있던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은 자들이 후에 다시 일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사를 재건하는 중추세력이 되었다. 남은 자들은 용기는 없지만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심성이 많고 때로는 눈치도 보지만 근본은 선한 자들이며 때가 되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사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민중을 믿었고, 민중의 힘으로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김근태는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았지만, 이를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독재자 편에 섰거나 반독재 투쟁을 외면하다가 ‘무임승차’하여 정ㆍ관계의 주역 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크게 탓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도 용서하였다. 다음은 김근태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어느 날의 ‘삽화’다.

1974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택시 합승을 했다.
뒷좌석에는 신세대 여대생들인 듯한 손님 둘이 앉아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고 얼마 후 김근태는 뒷좌석의 여대생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거나 격려해주는 것을 많이 접해본 그였다. 특히 고문경감 이근안으로부터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치욕을 당한 후 3년여의 옥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던 88년에는 지하철을 타면 낯선 시민들의 따뜻한 인사말에 답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상대가 신세대 여대생들인지라 속으로 괜히 흐뭇해하며 무슨 말을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다가 예의를 차려 물어 온 말인즉슨,

“저 … 이근안 선생님 아니세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낯이 익고 그가 고문당했던 재야인사라는 것도 생각나는데 그만 이름이 헷갈린 것이다. 고문 경감 김근태에게 붙잡혀 고생한 재야인사 이근안 선생님으로.

물론 그날 그 자리에서 김근태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근안이 아니라 김근태’라고 정정해주지 못하고 차를 내렸다. 마음 한 켠에 휑한 슬픔마저 느끼면서….
(주석 2)

하나의 ‘삽화’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때도 김근태는 ‘남은 자’들의 역할을 믿었다.

우리 겨레가 1900년대 전반기 ‘망국노’가 되었을 때나, 1900년대 후반기 이승만의 백색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카키색 군부독재시대에 헌법상의 ‘주권자’가 되었을 때도 ‘남은 자’들의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굳이 아놀드 토인비의 사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역사는 어차피 ‘창조적인 소수’에 이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소수의 민주화투사들에 의해 우리는 독립을 전취하고 제도적이나마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민중의 힘이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남은 자’들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근태는 ‘남은 자’ 들의 역할을 믿었던 것이다.

주석
1> 풍우(馮禹)지음, 김갑수 역, <천인관계론>, 95~96쪽, 신지서원, 1993.
2> 윤석진, <월간중앙 WIN>, 1999년 1월호, <국민회의 김근태 부총재>, 이후 (<월간중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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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근씨에게


병준이가 크레용으로 쓴 '우리 아버지'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나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오.
어제로 우리 곁을 떠나신지 꼭 20년이 되었구료.

 

그동안 아버지는 제사상 위의 사진에서, 사진틀속의 사진에서 나를 만났고, 평상시 생활에서는 그 무게가 점점 작아져 갔었지.
어렴풋한 추억 속으로 아버지는 떠밀려 간 것이겠지요.
그러나 언제쯤부터인지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팠던 상처들, 삶의 그늘에 대해서 눈을 떠가게 되었소.

 

어제는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날이었지.
그런데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때때로 흙먼지 날리고, 차가움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어.
이상스럽게 약간 무서운 느낌이 들고 내 가슴 속에 황황히 바람이 일어나더군.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어.
움푹 패여 그늘진 어깨, 말라서 길어진 목 뒤 모습, 그리고 허벅지께부터 바람에 날려 휘감기던 바지 가랑이,

바지 가랑이의 허전함이 목을 메이게 했다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그런 분은 아니었어.
이렇다할 깊은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차라리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가슴을 가진 분이셨지.
이 때문에 나는 사실 아버지를 별로 존경한 적이 없었고, 어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를 멀리서 소문으로 얘기들으면서

실망하고 짜증부리기도 하였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따뜻한 품을 가지고 계셨어.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아버지의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아늑하고 유쾌해졌지. 이럴때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고.


조금씩 크면서 나는 아버지 품을 넘치기 시작했고, 생물, 과학 등을 배우면서

아버지 체온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은 체질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오.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 품을 나는 영영 떠나게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 떠나가신 것이지.

 

20년 동안이나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 가셨던 우리 아버지가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해가 벌겋게 공중에 떠 있던 어제 나에게 되돌아오고 계셨다오.
아니 벌써 되돌아오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그 삶의 고뇌를 똑똑히 보게된 것일게야.


고난과 치욕의 이 겨레 20세기의 한귀퉁이에서 당신에게 몰아쳐왔던 그 절망과 부담에 짓눌려 겁먹은 채 살아가셨겠지.
버티느라고 부르르 부르르 떠시면서 말이요.
버티는 것이 힘겨워 몸에 늘 미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가려 주느라고 속으로 미열을 내며 앓으셨던 그런 삶이였을 거요.

 

3.1운동 때 아버지는 19살이셨다오.
읍내시장에는 못나가시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도의 숨은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투덜거리던 내 국민학생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구료.

 

유관순 누나같은 아버지가 아닌 것이 창피한 적도 있었지.
심약한 아버지를 가볍게도 생각하고. 


그러나 나 이제 우리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오.
작은.... 그런 아버지. 그 삶을 이 철창 안에 들어 앉아서 말이요.

 

저들의 뻔뻔한 짓에 두 발로 버티면서, 부르르 떨면서 나는 우리 아버지를 되돌아 오시도록 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내가 다시 우리 아버지의 그 고뇌에 참여하면서, 그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소.
혹시 내 삶을, 절망을, 아버지가 먼저 사셨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그리하여 남겨지고 이어지는 그 삶을, 그런 치욕과 중압을 오늘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불길하게 바람이 불고 뻘겋던 어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면서 목이 메어졌다오.
아버지처럼 두근거리는 작은 가슴을 가져 자꾸 겁을 먹으면서 말이요.
그러나 나 이제 작지만 끈질긴 가슴이 되는 것 같다오.
겁먹고 겁먹고서 다시 버티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요.

 

병준이는 아버지인 나를 보면서 멀지않아 이 두근거리는 내 가슴을 알게 되겠지.
두려워 밀리는 것에 실망도 하겠지.
하여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이 세상 깊은 곳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게 될 병준이, 병민이가 될 것이지.

 

난 사실 병준이, 병민이 아버지이어야 하는 것에 은근히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소.
그저 휘청거리면서 버텨 나가는 이 모습에서 어떤 것을 그 애들은 배우게 되고 흉내내게 될 것인지 말이요.
혹시 '별 볼일없는 삶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하며 실망할지 모르는 것도 조바심칠 일이지만,
그 애들 가슴에 맺힐지 모르는 상처들, 검은 그림자들의 드리움, 그것이 걱정이 된다오.

 

그러나 병준이 엄마의 따슨 사랑을 보면서 나는 안심을 하지.
애들이 그 속에서 몰아쳐 올지 모르는 어떤 것도 견뎌낼 것을 나는 믿는 것이요.
그러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또 그 애들 자신의 삶으로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1986년 1월.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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