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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4장] 전두환 타도의 전위 ‘민청련’ 이끌다

2012/07/14 08:00 김삼웅

 

고은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인물을 내다보는 독특한 안목을 갖고 있다. 1

986년부터 간행한 <만인보 12>에는 김근태에 관해 썼다.

김근태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천 어딘가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자격증 네 개 다섯 개 땄다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장 따위 던져도 좋았다
공장에서
떳떳한 호모 파베르였다

하얀 양초 같은 얼굴
하연 염소 같은 얼굴
그러나 노란 눈동자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몇십 년을 한 뜻으로 가는 의지
슬쩍 내비쳤다가 숨어버린다.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한 이래
그는 70년대에는
몇몇 친구들밖에는 몰랐다
무서운 청년시절을 다 바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떨치는 것
나서는 것
그것이야 뒤로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신의 고문을 의식 속에 기록한
결사적인 또 하나의 그 자신이야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주석 1)

1980년대는 한국현대사에서 보기드문 격동의 시대였다. 쿠데타와 살육, 저항과 연대가 동시적으로 혹은 비동시성으로 나타났다. 김근태는 격동기의 청년운동 중심부에 들어가 역량을 키우고, 아직 광주의 핏자국이 선명한 5공 초기에 반독재투쟁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강경한 광주 시위진압. ⓒ5.18 기념재단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정치사는 두 차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첫번째는 1960년대 초 4월혁명으로 이승만 백색 전제에 짓밟혔던 민주주의를 살려내서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국민의 자유선거에 의해 민주당이 집권하였다. 혁명 뒤끝이라 다소 소란이 있었지만 장면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주동하는 군 일부의 반란으로 민주당정부는 8개월 만에 붕괴되고 18년 5개월의 박정희 1인 독재가 자행되었다.

두번째는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면서 대한민국은 모처럼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본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반란을 일으켜 가녀린 민주주의의 새싹을 짓밟고 광주학살에 이어 정권을 찬탈했다. 민주주의는 다시 생명력을 잃고 대한민국은 제2기 군사독재 시대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패악을 그대로 전수받은 전두환 5공정권은 새로 개발한 수법까지 동원하여 포악성이 더욱 심했다. 광주학살의 피를 뿌리고 등장한 5공의 포학성은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데 가히 광적이었다. 반유신 투쟁을 벌여온 학생ㆍ재야ㆍ야권은 1980년 5ㆍ17사태로 풍비박산, 초토화를 면치 못했다.

8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적막강산이 되고, 사체를 훔치는 인면(人面)의 여우ㆍ승냥이 무리만이 성세를 누렸다.

한민족이 ‘반도국가’로 정착된 이래 그런 속에서도 지배세력은 사대주의를 국책으로 삼고서 권세를 누려왔지만, 민중은 민족자존과 자주정신을 잃지 않았다. 옛적의 일은 접어두고라도 근대에 이르러 동학 농민혁명을 시발로 하여 의병운동, 독립운동, 3.1운동, 의열투쟁, 의열단활동, 광복군 창군, 4월 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면면한 저항의 전통을 지켜왔다.

한국의 전통적인 양심세력은 “일의 성패를 문제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 “시작과 끝은 오직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다”는 양명학(陽明學)의 정신으로 무장하였다.

전제군주, 외세, 독재세력과의 싸움이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격이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기에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온 것이다. 한말 의병이 그랬고,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해방 뒤 독재와 맞선 민주화운동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는 백범 김구의 경구에서 의미가 집약된다고 하겠다.

전두환 일당의 폭압속에서도 저항의 활화산은 멈추지 않았다. 민중의 지층에서 저항의 용암이 다시 꿈틀거렸다. 단절될 수 없는 양심세력의 맥락이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앞장섰다. 반유신의 학생운동 출신과 5공의 만행에 침묵할 수 없는 학생들이 일어섰다.

1982년 3월 18일 김부식ㆍ김은숙 등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묻고자 벌인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학생들에게 만연된 패배감을 털고 다시 분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사건을 횃불로 하여 대학가에서는 산발적이나마 반정부 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1982년 하반기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1983년을 맞아 더욱 강화되었다.
이 해 연초 나까소네 일본총리의 방한 반대를 이슈로 하여 방학 중인데도 대학생들과 운동권에서는 반대 집회가 열리게 되고, 이는 반정부 투쟁의 시위로 연계되었다.

때마침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5월 18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26일간 단식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가 미국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내에서는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이 동조단식에 들어가는 등 정계와 원로그룹의 움직임은 한동안 움츠렸던 지식청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주석
1> 고은, <만인보 12>, 150~151쪽. 창작과 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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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3 08:00 김삼웅

 

김근태의 노동자ㆍ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담긴 글이다. 다시 인천 지역 산선의 노동상담역 시대로 돌아가 보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인천에서, 그것도 당국의 탄압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산업선교회에서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공장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과 사귀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선천적으로 말수가 적은 그는 노동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대중적 감각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김동완 목사로부터 유행가를 배우기도 하고 레크리에이션을 익히기도 했다. (주석 18)

김근태가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신산한 삶을 보내고 있을 때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살육을 거쳐 양심적 언론인을 축출하고, 정치정화법 제정 등을 통해 야성 정친인들을 묶으면서 5공체제를 굳혀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양심적 정치인ㆍ학자ㆍ종교인들을 묶어서 투옥하였다. 하지만 철벽같았던 유신체제가 허물어지듯이, 5공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신호로 그동안 움츠렸던 학생운동이 다시 저항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도전에 직면했다. 김근태는 아직 인천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만난 노동자들은 모두 그에게 매료됐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그는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으며 사소한 인간사에까지 진지하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대해, 노동자들에게 ‘성실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늘 당하면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흔히 지식인 출신 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을 운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인격체로 대해준 그와 오빠나 형처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김근태 씨가 일을 한 지 불과 1년 만에 산선엔 다시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노동자와 약속을 하면 단 1분도 늦은 적이 없다는 것이 당시 그와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노동조합 간부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주석 19)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인 듯 하다.
전두환 절대권력이 채 2년이 못되어 전두환의 친인척인 이철희ㆍ장영자의 ‘개국 이래 최대 어음 사기사건’으로 5공의 성벽에 구멍이 뚫렸다. 민주인사ㆍ학생ㆍ노동자들의 가혹한 고문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기도 했다. 김근태는 분노를 삭이면서 여전히 인천에서 노동자들의 상담과 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당시 그에 대한 평가다.

조 목사는 김근태 씨를 통해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조 목사는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만나 교육할 때 하루 한 시간 이상씩 늘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는 너무 바빠 미처 준비는 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목사님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은 뭔가를 배우겠다고 장시간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귀한 시간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풍부한 지식,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특별히 교육 준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그였는데, 이처럼 노동자를 마치 보석을 대하듯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산선 활동 과정에서 “운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3년 가까이 함께 활동한 조 목사가 그가 ‘탁월한 이론가’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85년 재판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할 만큼 산선시절 그의 모습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일꾼’이었다.
(주석 20)


주석
18> 이재화, 앞의 책, 160~161쪽.
19> 이재화, 앞의 책, 161쪽.
20> 앞의 책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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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2 08:00 김삼웅

 

http://gtcamp.tistory.com/

 

박정희가 뿌린 악의 씨앗은 심각했다. 그의 권부 아래서 육성된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ㆍ12 군부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이들은 1980년 5ㆍ17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고 제2기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밟은 길을 재현해나갔다. 독재자가 제거되고 이제 민주주의의 밝은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이나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다시 한번 혹한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김근태는 짧은 ‘서울의 봄’ 기간인 1980년 4월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인재근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8년 수배중에 가까운 가족만 모시고 결혼식을 치렀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친척ㆍ친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주례는 서울상대 변형윤 교수가 맡았다. 수배중에도 리포트로 학점을 주고 항상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http://gtcamp.tistory.com/

 

이제 가족이 딸린 몸이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다. 다행이라면 박정희 체제에서 따라 붙었던 추적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1980년 여름부터 ‘산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80년 7월경부터 '산선'에서 노동상담역의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산선'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화순 목사가 동일방직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지 6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조 목사는 자신이 구속된 후 활동정지가 돼 버린 산선활동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실무자를 구하던 중 김동완 목사, 최영희 씨 그리고 김근태 씨와 만나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조 목사는 노동상담역을 김근태 씨에게 맡겼다. 사실 일은 맡겼지만 당국의 흑색선전과 탄압으로 노동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인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 목사는 김근태 씨에게 “당신 능력껏 노동자들을 조직해보라”고 하고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주석 16)

김근태는 천성이 성실하고 근면한 편이다. 무슨 일을 맡으면 최선을 다하고 솔선수범한다. 그는 전태일과 같은 세대였다. 그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힌 일을 똑똑히 기억하였다.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고, 박정희 시대에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육체노동을 하며 살았다. 다음은 뒷날 노동자들의 수난을 지켜보다가 현장에 뛰어들었던 김근태의 기록이다. 1988년 12월 29일 밤 11시경 서울 광장동에 있는 미국계 회사인 모토로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인 사장 봅 칼빈을 면담하러 본관 쪽으로 가던 노조원과 구사대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일어난 사고였다.
“구사대 물러가라!” 하며 대치하던 조합원 중 4명이 위협용으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맞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붙힌 불이 그들의 몸에 확 옮아붙었던 것이다.

구사대 쪽에서 “어디 불 붙여 봐라” “신나인지 확인해 보자” 등의 비웃음소리가 나온 직후였다.
이 사고로 이강욱 씨는 깊은 화상을 입고 의식불명인 상태이고, 강문희ㆍ이종찬 씨 등 3명도 중태이다. 이런 끔찍한 사고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합원들의 목 쉰 증언에 의하면 구사대 쪽에 있던 김모 차장이란 자의 소행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불꽃이 되어 뒹굴고 있는 4명의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불을 끄는 대신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사진을 찍어 대는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격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어 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모를 일이다.

시간이 긴박했다. 지금도 안에는 도충환 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11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신나통을 들고 전산실에 들어가 노조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싸고 수백 명의 구사대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에까지 어떤 위협감이 감돌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빵과 우유를 사 들고 정문 옆 좁은 문을 통과하여 공장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인도적인 이유를 들어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구사대의 시꺼먼 적대감과 추운 겨울날에 쏟아지는 소방 호스의 물세례, 물공격뿐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소방 호스에서 쏟아지는 억센 물줄기에 맞서다가 돌아서서 등 뒤로 버티었다.

공장마당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몰려왔다. 신나통을 들고 버티고 있을 조합원들의 고독과 함께 남영동에서 지독하게 곱씹었던 무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추위가 서성이는 밤거리에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주석 17)

주석
16> 이재화, 앞의 책, 160쪽.
17> 김근태, <겨울 속의 풀뿌리>, <노동문학> 창간호(1983. 3), 38~39쪽,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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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3장] 고통의 청춘, 수배와 노동운동 시절

2012/07/11 08:00 김삼웅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피신중에 건축공사장의 인부, 기술학원의 강사, 그리고 조그마한 공장에 다니면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주 옮겨다니면서 추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쉬는 날이면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 책을 사서 읽었다. 그가 다방면에서 박식한 것은 뒷날 긴 감옥생활과 이 무렵의 독서에서 얻은 지식의 힘이 컸다. 피신중에 행운도 따랐다. 평생의 반려이고 동지인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열관리 기능사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77년 8월경 현재 부인 인재근 씨와 만나게 됐다. 상대 1년 후배인 장명국 씨(석탑노동연구원 원장, 현재 구속 중)의 부인인 최영희 씨(석탑출판사 사장)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재근 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75년부터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해왔었다. 인씨는 78년 2월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실무 간사로 활동, 동일방직 사건에 관여하기도 했다. (주석 13)

도피 중에 인재근을 만나게 된 것은 김근태에게 큰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산선’에서 일할 만큼 노동운동과 시대정신에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안전한 은신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친구들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모두 수배를 받고 피신했으며, 그 1년 후 김상진 서울농대생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자결에 자극을 받아 긴급조치 9호 아래에서 서울대 5ㆍ22 사건과 명동성당 장례식 사건의 배후로 연루되어, 박정희 씨가 저격당해 죽기까지 피신을 해야 했다.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고, 기술학원 강사생활도 했다. 이 기간에 집사람인 인재근을 만나 함께 활동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들 병준이도 낳았다. 아득하고 괴로운 세월이었지만 우리에게 행복할 수 있는 틈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박정희의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민권투쟁을 벌이며 박정희와 대결해온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등산길에서 의문사를 당하고, 1976년 3ㆍ1절 55주년을 맞아 윤보신ㆍ김대중ㆍ함석헌 등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것과 관련, 이들을 정부전복 선동 혐의로 구속ㆍ입건하였다. 그리고 1978년 12월 27일에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공화당이 31.7%를 얻었다. 야당이 1.1%를 더 득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폭압통치를 거듭하는 박정희 정권에게 국민은 분명하게 레드카드를 던졌다. 이처럼 민심의 이반현상이 드러났는데도 박정희는 반성하려 하지 않고 날로 광폭성이 더해갔다.

박정희는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자 경찰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1명을 사망케하고, 공화당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등 반이성적인 야만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10월 16~17일 부마항쟁과, 부산에 계엄령 선포, 서울 등지에서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18년 5개월 동안 1인 전제를 자행하다가 부하의 총탄으로 살해된 것이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http://gtcamp.tistory.com/

 

박정희의 암살 소식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수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온 김근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가정적으로도 불행이 닥쳤다. 그동안 막내아들 때문에 어느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었던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께서는 아들 병준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당시 암으로 쇠진할 대로 쇠진해지셔서 손자를 직접 보고 안아 보시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막내아들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확인하신 탓인지 1980년 1월 말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주석 15)


주석
13> 앞의 책, 160쪽.
14> 김근태, 앞의 책, 418쪽.
15> 앞의 책, 418~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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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형식(대구 한의대 교수)의 넋 나간 황홀경 - ‘朴비어천가’ 인용합니다.

 

"꽃 중의 꽃 근혜님 꽃! 8천만의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 영원히 피어라!

백두산 상상봉에 한라산 언덕 위에 민족의 꽃이 되어 아름답게 피어라!

별 중의 별 근혜님 별! 8천만의 마음에 빛나라, 빛나라, 영원히 빛나라!

저 하늘 높은 곳에 이 땅의 온누리에 아름다운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라!”

 

▲ ‘어천가’와 ‘鄧비어천가’ 핵심은 “번신물망모택동, 치부물망등소평” (飜身勿忘毛澤東, 致平)입니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정치적 해방) 오쩌둥 덕, 민을 먹고살게 한 건(경해방) 덩샤오핑 덕이니 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중의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마오를 ‘파(破)의 지자’, 덩을 ‘입(立)의 지도자’로 칭송하면서 주문처럼 읊조리는 문구입니다. 꼭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천편일률적’ 인식조차 곽형식의 ‘박비어천가’만큼 낯부끄러울 일도 아니고, 그저 감성에 치우쳤던 이인화(이화여대 교수)의 ‘朴비어천가’보다는 낯간지러울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소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이후 봉건적 신분제 피 말디 한번이나마 중국 인민들이 ‘정치적 자유권’을 누려본 적이나 있었습니까. 지난날 빈곤의 유는 일단 논외로 친다면, 근래 덩의 개혁개방조차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가 성취한 거와 유사한 ‘서구식 산업화’의 성공적 도정일 따름이지, 그게 어디 중국 인민들의 ‘사회경제적 기본권’ 향유나 풍요의 공유이기나 한 겁니까. 사실 이거야말로 이른바 정치민주화의 위업을 달성한 우리 대한민국이 비로소 오늘날 성취해 나가야 할, 이 시대 최고최대의 현안 과제로 생각합니다.

 

※ 세상에 무슨 진선진미한 건 없을 겁니다. 모처럼 조선일보의 국제관계 좋은 기사 올립니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좋기사 비율이 대체로 7 : 3이라면 나쁜 기사 비율은 3 : 7 정도일 겁니다. 이하, 요지와 함께 [조선] 기사, “115년 만에 일본 제친 중국… 中華주의 부활로 주변국 긴장!” 링크시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3&aid=0002456439

 

 

⑴ 경제력 美 이어 2위의 ‘G2 시대’로… 지난 10년간 年평균 10%대 고성장…

 

후진타오가 집권한 지난 10년은 중국이 'G2(주요 2개국)'로 불릴 정도로 경제·군사 등 각 방면에 걸쳐 국력이 크게 신장. 지난 10년간 연평균 10.7%의 고성장 기록. 2010년 일본을 넘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 2002년 1135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DP지난해 5432달러로 4.7배가 돼. 전체 GDP도 같은 기간 미국의 7분의 1에서 절반 가까치솟아. 빈부·지역 격차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상당수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넘어서는 등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높아져.

 

이런 성장은 장쩌민 시절인 2001년 이뤄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기반으로 작용. 하지만 후진타오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4조 위안(약 7200조원)의 과감한 경기 양책으로 돌파하는 등 중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끈 점을 과소평가할 수 없어. 또 3조 달러가 넘는 두둑한 외환을 쌓았고, 국가 채무가 GDP의 40%에 불과할 정도로 탄탄한 재정도 구축.

 

 

⑵ 군사력도 ‘G2' 시대로… 70년 숙원' 항공모함 첫 배치, 유인우주선 도킹도 성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 강화와 우주 개발도 본격화. 중국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국방비는 2002년 225억 달러에서 2011년 899억 달러로 4배 수준으로 증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다는 것이 해외 연구기관들의 평가. 중국인의 70년 숙원이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도 실전 배치.

 

2003년 첫 유인우주선을 발사한 데 이어, 올해는 우주정거장 건설에 필수적인 유인우주선 도킹기술까지 확보해 물오른 과학기술 수준을 과시. 2008년 건국 후 처음으로 개최된 베이징올림픽은 중국민이 지난 100년 치욕의 역사를 씻고, 자존심을 회복한 대형 이벤트.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이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오만과 군사적 압박으로 이어지면서, '중국 위협론'과 중화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어.

 

 

⑶ 3通으로 대만관계 획기적 개선 - 편지도 힘들었는데 이젠 관광객들 서로 왕

 

중·대만 양안 관계 개선은 후진타오의 최대 치적으로 꼽혀. 1990년대만 해도 양안 관계최악. 1995~1996년 중국군이 대만 부근 해역에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해 미국의 항모핵잠수함이 출동하는 대만 해협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후진타오는 취임 후 중앙당 내 대만 소조 조장을 직접 맡아 강온 양면책으로 대만 관계를 풀어나가.

 

대만 독립 주장에는 강경 대응을 계속하면서도, 양안 교류와 경제 협력 분야에서는 통 양보로 대만을 끌어들여. 2008년 양안 간 직항로 개설과 직교역, 서신 왕래 등 3통(通)합의됐고, 2010년에는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대만인의 반중(反中) 정서가 모두 해소된 건 아니지만, 10년 전 서신 교환조차 어려웠던 양안 관계는 서로 관광객이 오갈 정도로 해빙. 지난달 4일에는 '대만 독립'을 내걸고 중국과 대립해대만 민진당의 전 주석 셰창팅(謝長廷·67)이 방중하기도. 2008년의 대만 대선 당시 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대결했던 그는 역대 중국을 방문한 최고위급 민진당 인사.

 

 

⑷ 향후 최대 숙제 - 서부 대개발 본격 추진 등으로 ‘균부’(均富) 시대 열어내

 

여전히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지만, 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는 부분이 있어. 후진타오는 '과학적 발전관'을 표방하면서 지역·도농 간 불균형 해소에 노력. 2000년대 후반 농업세가 전면 폐지됐고, 농촌 지역 의료·양로보험 도입. 낙후한 중부 내륙과 서부 지역 발전을 위한 '중부굴기'와 서부 대개발 정책도 그의 임기 중에 본격 추진을 시작.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먼, 중국 최대의 향후 숙제일 것.

 

2012. 11. 7. (수) / 오용석, 개방과 통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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