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6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저항의식은 이 즈음부터 가슴 한 켠에서 모락모락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쫓아낸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그것을 박정희 정권과 연계시키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5.16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께서 별안간 강제로 정년퇴직하게 되고, 그 이후 우리의 가정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나는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었다. 고교 시절 내내 그랬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대열에 전교생이 참여했을 때도 나는 두어 명을 꼬셔서 교실에 외롭게 남아 있었고, 그 전해 그러니까 1963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도 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장하는 박정희 쪽이었다. (주석 10)

김근태의 중ㆍ고등학교 시절은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였다.
4ㆍ19혁명으로 잠시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듯 하다가 1년여 만에 박정희의 군사쿠테타가 일어나면서 천지는 군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김근태는 가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사회문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범생’이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를 두 군데나 다니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사회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영어회화 클럽에도 참석하는 등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고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전히 ‘모범생’이었다.
비록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강제퇴직을 계기로 사회가 불합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형체를 가진 사회의식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마디로 ‘친정부적 학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을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아울러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쾌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박대통령의 말이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형식논리’에 속은 것이다. 그의 고교동창생들의 기억에도 김근태는 영어회화클럽에 참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주석 11)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도 모범생이었던 김근태는 여전히 아버지에 관해 소년기의 콤플렉스와 반항심을 털쳐내지 못하였다.

미아리고개에서 살 때였는데 집 근처에 복덕방이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께서는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면서 반색을 하시곤 했다. 복덕방 노인들이 빼다 박은 듯 똑같다고 하며 웃으실 때 나도 그냥 따라 웃었지만 그것은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하고 달라요” 하는 부정의 웃음이었다. 이런 건방진 내가 마음의 빚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이었다. (주석 12)


주석
10> 앞의 책, 417쪽.
11> 이재화, 앞의 책, 156~157쪽.
12> 김근태, 앞의 책,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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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5 08:00 김삼웅

 

 

 

김근태의 형들은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제말기 일본에 유학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지식청년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형들의 문제로 인해 김근태는 뒷날 반독재 전선에서 정보기관과 보수신문에 의해 극심한 고문과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6남매 중 큰형 김홍태, 둘째형 김성태 그리고 셋째형 김영태 씨 등 위로 세 명의 형들이 한국전쟁 전후로 민족운동을 하다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외갓집의 삼촌들도 마찬가지였다.

큰형 김홍태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 해방이 되자 귀국해 진보적 운동을 했다. 그는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한 ‘수재’로서 해방 당시 ‘탁월한 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당시 우익운동을 했던 계훈제 씨는 말했다.

둘째형 김성태는 맏형 김홍태와 함께 원효로 적산가옥에서 자취를 하면서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역시 민족운동을 했다.

셋째형 김영태는 양정국교 5학년 때 의용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날 무렵 김근태는 불과 세 살이어서 형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주석 6)

6.25전쟁기에 이념적으로 갈리거나 피난 중에 이산이 된 가족이 수없이 많았지만, 김근태 가족의 아픔도 컸다. 수재 소리를 듣던 아들 셋이 6ㆍ25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것이다. 다시 이재화 씨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전쟁 이후 형 세 명은 집안과 관계가 끊어졌다. 85년 10월 김근태가 민청련사건 (당국은 민추위 배후인물로 그를 엮으려 했다)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은 “위 3명의 형들이 월북했다” 며 언론 플레이를 해, 모든 언론매체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형 국태 씨는 “큰형이 9.28수복 이후 수원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둘째형은 1ㆍ4후퇴 때 서울에서 봤다”는 풍문만 떠돌았을 뿐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한국전쟁 이후 김근태 씨의 집안은 쑥밭이 되어버렸다. 그의 집에는 연일 형사들이 진을 쳤고, 부모들은 소식이 두절된 아들들의 얼굴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울먹이곤 했다.
(주석 7)

어린 김근태에게 형들 특히 맏형 김홍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기고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맏형에 대한 막연한 선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근태는 1958년 서울의 사대부중과 경복중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 충격이 컸다. 형들의 뒤를 따르고자 하여 아버지에게 1년 동안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재수하도록 요청했으나 가정형편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2차인 광신중학교에 “시험 한번 쳐보기나 하라”고 하여 마지못해 응했다가 수석을 했다. 이런 연유로 광신중학교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고 줄곧 수석을 하였다. 광신중학 3학년 때 학원 장학회에서 실시하는 장학금수혜자 시험에 응시하여, 고교, 대학까지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김근태의 꿈은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큰형이 다닌 학교에 자신도 입학하는 것도 뜻이 있었겠지만 당시 우수한 중학생들의 일반적인 소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척같이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 입학의 꿈을 이루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경기고등학교에 비교적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내 평생 제일 악바리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그럼에도 졸면서 공부를 했다. 불 좀 끄고 잠자라는 부모님들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늦게까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주석 8)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ㆍ16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줄줄이 돈 들어가는 살림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정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 정도는 받아야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 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밖에 안 되지만 심장병으로 편찮으신 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학교 다니시는 아버지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 (주석 9)



주석
6> 앞의 책, 154쪽.
7> 앞의 책, 155쪽.
8> 김근태, 앞의 책, 416쪽.
9> 앞의 책, 412~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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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제(謙齊)를 생각하며
 

비오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비 가운데로 싸라기 우박이 가끔씩 뿌려지고, 이 3월 하순에 말이오.
겨울 떠나보내고 봄 기다리는 마음에 심술이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소.
착각은 그냥 자유일 뿐이지.
번갈아가며, 다투며 내리는 눈비가 익살스러워 차라리 마음이 들뜨는구려.


창틀 기대어 눈 쏟아지는 하늘 올려다보고, 희끗희끗 가려지는 앞산 건너다 보았지.
저 높은데서 거뭇거뭇하고 벌떼처럼 몰려 짓쳐 내려오는데, 점점 가까워지면 몸놀림 가뿐히 공간 넉넉하게 비워두고 하얗게 내렸다오.
한눈파는 사이 스르르 땅속으로 스며 하나 남기지 않고, 이 겨울 마지막 눈 전혀 쌓이지 않았어. 건너편 산골짜기에도.


지난 겨울 앞산 자주 눈 덮여 있었어.
가물가물한 두 겹 비닐 통해 쳐다봤지.
가끔 창 열고 바라봐도 '흑~' 찬바람 한입에 얼른 닫아 버렸었지.


거리에 캐롤 울릴 때쯤이었을까.
눈덮힌 산 그 아래 뾰족 첨탑 보이고 사슴이 끄는 썰매 탄 산타할아버지 눈에 어른거렸네.
언제부턴가 생활속으로 슬쩍 들어와 버린 카드 속 그림 닮은 그런 산, 그런 건물, 썰매, 그런 아이들 삼삼하였네.
난 그만 실소하구 말았지. 감수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로렐라이 언덕,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어디쯤 있을 황태자 첫사랑의 그 맥주집에 몸살나는 이 시대 교양인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에 몸 자지러지는 저 대중들, 그 중에 하나일까, 나도.


겸제(謙齊) 생각했지, 부끄러워 하면서.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어 가능했겠지만, 그것은 고뇌 끝의 결단이었어.
그렇더라도 상상 속 중국 산과 강 그리는 기법, 그 흉내 버리고, 펄펄 살아 뛰는 우리네 강산 선택한 건 모험이었어.
서러운 삶의 감정 스며있는 이 산하를.
차라리 반역이었을까, 사대 그늘아래 왕권질서에 대한.
위험하지 않았을까.
겸제는 얼마나 조롱당했을까, 경멸 또한.
눈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어두움들 어디에서 오는가.
허위의식 물든 관념에서, 감수성으로부터 올까, 누구였을까, 저주받은 바리새인들은.


중국적 봉건질서의 정치 문화적 표현인 주자학이 조선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크겠지.
헌데 일자 일획이 온통 진리였던 그것을 왜 한글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사람들 공맹의 길에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글 쓰임대 한층 풍부해졌을 게고.
이젠 복종의 다른 표현된 충효 빈 껍데기만 남겨놓고서 가버린 허망함 아니었을지도.


너무나 심오하여 감히 번역할 능력 아무도 없고, 언문으론 진서 그걸 제대로 표현할 길 도무지 없고,
누군가 개거품 물고 주장한 사람 있었을 게야.
많았을지도 모르고.
당시 시대적 제약 있어 모두 학문할 수는 없는 거고, 어차피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말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딴데 있는 거지.
혈통에 의한 봉건적 신분질서 유지 너무 적나라하여 문화적 구획으로 덮어 씌워놀 필요 정말 있었겠지.
깊은 진리 터득한 사람 있었을 게고, 많지 않지만.
일부만 알거나 형식적으로 아는 체하여 양반 지배계층에서 탈락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별 상관없었을 것이지.
아는거야, 이런 것은.

 

오늘은 어떤가.
혹시 진서 대신 원서가, 한문 대신 영어가, 중국 대신 서양이 또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아닐까.
꼬부랑 관념과 감수성, 글씨 몇 개 아는 지식인들 지배계층에 끼여들고 그렇게 제도화 되어 있고,
그 아랫사람들 열심히 흉내내고, 흉내바람은 사회적 강제가 되고,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여.


여기에 끼지 못하는 것 처벌이고 소외인 거야.
세련됨, 모던함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 그러기 위한 훈련, 학습, 교양 가지려고, 한마디로 간판 따려고 우리 모두 서둘러 왔던 것 같지.
서양의 문화, 문물, 예술 모두 암암리에 보편적인 것 되고, 특히 진정한 그 내용이나 진리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
어떤 형식이나 약간의 흉내가 오히려 기승부려 진짜 인류의 보편적 발전방향은 목졸라 버리는 것 같고,
그것으로써 우리자신의 주체성과 주인의식은 잊어버려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성 구현을 위한 발전방향과 진리는 서양의 특수한 것이라고 매도해 버리고, 역사는 반복할 것인가, 수치스럽게도.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며 더욱 중국적이었던 조선,
또다시 개명한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자신을 서양보다 더욱 서양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가.
진리냄새 피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등장한 이 시대에.


재판에 임하면서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오.
그 중에 하나가 판검사, 변호사들과 만났을 때 나도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 동류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지.
말씨나 절차 그것에서도 상호 느낄 수 있었고 말이오.
물론 서 있는 입장이 다르면서도.
우린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임을, 아니 적어도 상류계층임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러다가 구치소로 돌아와, 특히 자신의 감방에 들어가 갇혀질 때면 최하 천민계층으로 급락하는 것이었소.
부자유, 그건 능멸받아 마땅한 것이오.
옛날 노예가 살아있는 도구라고 짓밟혔던 그림자 아직도 여기에 살아있는거요.


여하튼 이런 차이를 반복하여 느끼면서 나는 사실 꽤 당황했다오.
정서적으로 묘한 혼란도 오고,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얄팍한 마음도 생기고 말이오.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고, 이것 모두 쓰잘 데 없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요

<후략>


(1986년 3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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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2장] 가족사의 비극, 우수한 모범생의 소년기

2012/07/04 08:00 김삼웅

 

김근태 고문의 학창시절.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gtcamp.tistory.com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용과 어머니 이한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부모는 교육열이 강하여 아버지의 박봉에도 자식들 중에는 일본유학까지 보냈다.

김근태는 아버지가 번번히 전근을 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니면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평택군에서는 청북과 진위초등학교를 다니고, 양평군에서는 원덕과 양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김근태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열변을 토했으나 3등밖에 못해 어린 마음에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었고, 또한 상처받은 고향으로 경기도 평택과 양평이 나에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상처받은 고향조차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리운 양평’은 모두 유원지로 전락되어버렸고, 평택은 공업지역으로 바뀌어버려 고향을 박탈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되는 시대적 추세 속에서 나의 고향 또한 잠겨버린 듯하다. (주석 1)

어릴적의 잦은 이사와 전근은 김근태가 아니라도 소년의 정서에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소년은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자주 전학 다니는 것은 나에게 크나큰 고문이었다. 새로 친구를 사귀면서는 텃세를 부리는 본토 애들과 싸우기도 하고 알랑방귀도 뀌어야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질 즈음해서는 어김없이 떠나야 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혹독한 처벌이었다. 몸살을 앓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권력자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주어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2)

해방 직후에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면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다. 다만 교직자의 신분이어서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자식들에게는 여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따뜻하신 분이었고, 어머니는 대단히 열정적이셨다. 아니 극성맞다고 해야 옳을 지 모르겠다. 두 분 다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는 만장일치셨다”고 김근태는 회고한다.

<민족과 지평> 편집위원 이재화는 1991년 봄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본인의 접견과 부인 인재근, 친형 김국태 교수(추계예술대 문예 창작과)를 비롯, 손학규ㆍ최민화ㆍ조화순ㆍ안병직ㆍ문익환ㆍ채만수 등 지인들을 만나고 <김근태의 삶과 사상>을 썼다. 그의 생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사진은 김근태를 말하다 블로그

김근태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네 차례씩이나 전학을 하는 것과 관련, “어린 김근태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거나 호방한 분이 아니라 작고 소심하여 두려움에 떠는 가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자연히 성격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형성된 구석이 많았다.” (주석 3)라고 소개하였다.

김근태는 이와 관련 부친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 인재근에 따르면, 남편은 “정열적인 면은 ‘기가센’ 어머니를 닮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 고 전한다. 김근태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또는 반항심은 더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아버지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읍내시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뒷동산에 혼자 올라가서 실컷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에이 왜 좀더 대담하지 못했을까” 하며 투덜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관순 누나같이 당당하지 못한 것이 창피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소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고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여야 만족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다.
(주석 4)

소년 김근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항심은 성장하면서 반독재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발산되었다. 어릴적에 “마음씨는 좋지만 무능하여” 늘 지방으로 옮겨다니는 아버지로 인해, 토박이 아이들 속에서 막 뿌리를 내릴 때쯤이면 다시 전학을 가야 하는 ‘뿌리뽑히는’ 고통을 어린 김근태의 가슴에 ‘약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서울에 올 ‘빽도 없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주석 5)

김근태가 태어난 1947년은 해방 2년차로서 미군정 시절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분단에 이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7년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고,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12월 2일에는 장덕수가 피살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ㆍ3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9일에는 북한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북에 상이한 두 개의 정권이 서게 되었다. 해방 3년만의 결과였다.

김근태는 동시대의 아이들처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어서 혼란시기에서도 생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기에 가족사에 불행이 겹쳤다. 김근태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때의 가족사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주석
1> 김근태, <희망의 근거>, 415쪽, 당대, 1995.
2> 앞의 책과 같음.
3> 이재화, <김근태의 삶과 사상>, <민족지평> 제3호(1991.봄여름), 153쪽.
4> 앞의 책, 153~154쪽.
5> 앞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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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장] 왜 김근태를 기억해야 하는가

2012/07/03 08:00 김삼웅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유성호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래서 2011년 말 별세했을 때, 생자(生者)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민주주의자’ 라는 헌사를 붙이고, 장례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명색이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는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터인데도 유독 김근태에게 주어졌다. 이 헌사가 돋보이고, 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한 것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파행과 불구성을 말해준다.

그가 성장하여 활동한 기간에 겪은 군부독재 30년은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유린되는 반이성, 야만이 지배하는 몰상식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김근태는 결코 관념적인 민주주의론자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파수꾼이고 수호자 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긴 세월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압제와 싸웠다.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바빌론의 철옹성에 불을 질렀다. 그는 용기가 있었고 담력이 남달랐다. 무인(武人)의 기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때문이었다.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앞에 14일 오후 조화가 놓여 있다. ⓒ권우성

 

짧다고도 길다고도 하기 어려운 64년의 생애, 특히 청년기와 중년시절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기간이었다. 동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고, 처절하게 육신이 망가진 ‘민주인사’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신ㆍ투신ㆍ자결ㆍ의문사 등 숱한 의열사들과 같은 반열에서 김근태를 ‘민주화의 화신’ 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김근태에게는 ‘햄릿’ 말고도 몇 가지 별명이 따랐다. ‘공소외(公訴外)’ ‘국제신사’ ‘김진지’가 그것이다. ‘공소외’는 독재시대 조영래ㆍ장기표ㆍ심재권 등과 반정부 시위를 도모하다가 이들은 체포되고 용케 피신했을 때 검사의 기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된 ‘백봉 신사상’의 단골 수상자일만큼 언행이 신사적이다. 일반적으로 투사와 신사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가능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투사이면서 신사의 이미지를 갖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차서 / …”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김근태는 투사와 신사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공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세속의 KS출신에 민주 투사이면서도 뽐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험한 말이나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진중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지하였다. ‘김진지’ 의 별명은 ‘햄릿’과도 연관이 닿는다. 행동하지 않는 진지함이란 자칫 햄릿이 되기 쉽지만, 누구도 그를 일러 실천성 없는 관념론자라 말하지 않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위원을 맡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공보실장이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지난 1988년 9월 3일 서남 민청련 창립대회에 참석한 고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은 고인이 창립대회에서 민중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연하는 모습). ⓒ유성호

박정희가 짓밟은 헌정을 다시 짓밟고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5공의 독기가 시퍼렀던 1983년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살인 정권에 도전장을 보냈다. 민청련의 조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5공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공개적인 반정부 청년조직이었다. ‘김진지’와 그의 동지들은 오랜 진지한 사유 끝에 민청련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걸었다. 양서 동물로서 독성이 강한 두꺼비는 뱀에게 잡히면 죽지만 뱀 역시 두꺼비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 새끼들은 그 안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실제로 민청련은 5공이라는 뱀파이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그 대신 독사의 뱃속에 들어간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오랜 ‘짐승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일찍이 죽음을 대면했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모순과 시대모순이 활개치는 시절에 젊음을 보내면서, 그리고 ‘제도적 약탈’에 민중의 삶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면서 뜨겁게, 불꽃같이 저항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불같은 열정이 치솟았다. 혁명가들의 생애가 그렇듯이 독재시대 그의 삶에는 비장감이 서렸다.

김근태는 3선 국회의원, 원내대표,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계에 투신한 이래 세속적인 출세를 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다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추는 등 민주주의, 통일 등 거대 담론과 함께 서민들의 복지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는 본디 서민출신이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꿈이 채 영글기도 전에 ‘민간 독재자’가 나타나서 역사를 87년 이전 체제로 되돌리고, 그는 병마에 쓰러졌다.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다가 2011년 12월 30일 눈을 감았다.
송건호ㆍ리영희 등이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차례의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과 수배 ….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이나 겪었던 험난한 길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겪게 되었다.

김근태는 대단히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이었다. 공사 생활에서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인이었다. 지극히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재산을 모을 줄 몰라 부인은 항상 생활에 쪼들리고,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굴리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그는 야권의 누구보다 개혁성이 강한 진정성의 지도자였다. 장준하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는 어디서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언론플레이용 강성 발언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의회주의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진짜배기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으로부터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독재에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폐기하고, 외세가 갈라놓은 조국의 분단을 이어보려는 큰 꿈을 간직했던, 우리 정계에서 흔치 않은 한반도의 미래를 구상하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그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ㆍ중동의 아랍국가에서 민중들이 독재자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반독재 민주화의 ‘원조(元祖)’ 격인 한국에서는 ‘민간독재’가 극성을 부렸다. 여기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호화판 기념ㆍ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경상도 어디선가는 ‘전두환공원’이 만들어졌다.

벤 알리(튀니지 전 대통령), 무바라크(이집트 전 대통령), 카다피(리비아 전 대통령)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쫓겨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비슷한 시각, 한국에서는 60여 년 전과 30여 년 전에 죽은 독재자들의 망령이 부활하는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보면서 김근태는 “그동안 헛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는 자괴감을 갖게 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김근태는 “2012년을 점령하라”는 피울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그리고 지역구민들은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의회로 보냈다. 김근태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국민이 때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의 많은 동지와 후배들이 빈소에서, 영결식장에서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발리바르는 조국해방전선에 나서면서 선서하였다.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과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마음과 팔뚝은 스페인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김근태의 <남영동> 표지 ⓒ중원문화

남한의 반독재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감옥에서 다짐하였다.

“지나온 그 짙은 어둠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오. 잠속에서 꿈속에서 짓눌려 오는 공포로 되살아나곤 하는구려. 그때는 숨을 몰아쉬어 방어의 채비도 서두르게 되고, 윤동주 시인의 맑은 눈물이 스며있을 듯한 벽에 기대어 밤하늘의 별을 끌어안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오.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채비를 해나가고 있는 중이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김근태 동지를 알자>고 광야에서 목메이게 외쳤다. 아직 대중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 시점이다.

김근태 동지는 이제 나이가 겨우 마흔을 갓 넘었지만 그는 이미 우리가 깊이 알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80년대 민족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아가 90년대 민족사를 구상하고 전망하는 데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이미 그는 민족사의 핵심에 서 있고, 앞으로도 그는 그 핵심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난날의 투쟁 때문만이 아니다. 지난날의 투쟁을 미루어 앞으로 전개될 민족사에 그가 담당할 몫을 생각하면서 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미래의 인물가운데 그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석 6)


주석
6> <김근태씨의 고문 및 옥중기록 남영동>, 277쪽, 중원문화, 1987.(이후 <남영동>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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