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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정(蛾眉亭)
이번 중국 인문기행 중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안내문이나 표지판을 보면 우선 한자(漢字)와 그 아래 영문,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의 한글 4가지 문자로 해설이 되어 있다.
< 아미정은 북송 희년 3년에 설립되었고, 역대의 왕조에서 수선을 진행하였으며,
민국 23년(1934년)에 또 재차 수선을 진행하였고, 1987년에도 재수선하였습니다.
이곳은 "앞에 동서 양산을 바라볼 수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구불구불한 아미산". 이로인해 아미정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미정은 현재 시급문물보호단위입니다.>
당시인이백의관총(唐詩人李白衣冠塚)
이백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 알려진 채석강 나루터 근처에 당시 이백이 벗어놓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묻었다는 묘.
글씨는 당대의 서예대가 임산지(林酸之)가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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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18. 이백기념관(李白記念館) 1 / 적선루(謫仙樓) (0) | 2016.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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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미정(蛾眉亭) 회사정 이백의관총 적오정 태백루 (0) | 2016.04.26 |
15. [동영상 02] 이백의 발자취를 따라서 / 증왕륜 사조루 경정산 (0) | 2016.04.05 |
14. 선주(宣州) 사조루(謝眺樓) (0) | 2016.04.04 |
13. 이백 묘(李白墓) (0) | 2015.10.06 |
謝眺樓 敬亭山 동영상 출처 : EBS
贈汪倫
李白乘舟將欲行 (이백승주장욕행)
忽聞岸上踏歌聲 (홀문안상답가성)
桃花潭水深千尺 (도화담수심천척)
不及汪倫送我情 (불급왕윤송아정)
이백이 배를 타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홀연 강언덕에서 발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들리네
도화담의 물이 깊이가 천 척일지라도
왕윤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宣州 謝眺樓 餞別 校書 叔雲 (선주 사조루 전별 교서 숙운) '선주'땅 '사조루'누각(樓閣)에서 '교서 숙운'과 헤어지며... - 당(唐)나라 시선(詩仙) '李白(이백)'이 '宣州(선주)에 있는 '謝眺樓(사조루)'에서 校書(교서)벼슬의 '叔雲(숙운)'을 전별(餞別)하고 쓴 시(詩) 棄我去者(기아거자) 나를 두고 떠나가는 것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어제처럼 지나간 시간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亂我心者(난아심자)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오늘 하루도 온통 번민과 걱정 뿐이로세.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먼길 가을 바람결에 기러기 날아가니 對此可以감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럴 땐 높은 누각에 올라 마음껏 취해보리라.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 같이 뛰어난 문장력, '건안'과 같은 풍모(의 숙운叔雲)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그 가운데 '소사'(의 詩)처럼 또 뚜렷이 빛을 발하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뜨거운 열정 함께 품고 원대한 포부 비약하니 欲上靑天攬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고 싶구나.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뽑아 물을 베어본들 강물은 계속 흐르듯이 擧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술잔을 들어 근심을 잊으려해도 시름은 더해만 가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의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라. [참고] 1) 宣州(선주): 지명,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쉔청(宣城)현'. 2) 謝眺樓(사조루): 누각(樓閣) 이름, '육조(六朝)시기' 선주(宣州)의 태수(太守)로 있던 '謝眺(사조)'가 세움. 3) 육조(六朝) AD 229~589년: 삼국시대의 '吳(오), 東晉(동진)'과 남조(南朝)의 '宋(송), 齊(제), 梁(양), 陳(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 4) 謝眺(사조:AD 464~499년): '대사(大謝)'라 불리는 '사령운(謝靈雲:AD 385~433년)'과 함께 '소사(小謝)'라 불린 '위진 남북조시기'의 '사씨(謝氏)' 성을 가진 두 명의 저명한 시인 중 한 사람. 5) 校書(교서): 서책(書冊)을 검열하는 직책의 벼슬 이름, 정식 관직 명칭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임. 6) 叔雲(숙운): 이름은 '이운(李雲)', '李白(이백)'이 '숙운(叔雲)'이라 부름은 같은 집안의 아재비뻘 되는 사람, 즉 족척(族戚)이기 때문. 7) 餞別(전별):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 :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 새들은 높이 날아가고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 외로운 구름만 한가히 떠간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건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 다만 경정산이 있기 때문
어구(語句)
敬亭山 : 安徽省 宣城地區(안휘성 선성 지구)에 있는 산.
孤雲 : 외로이 떠도는 구름.
相看 : 서로 봄. 바라봄.
不厭 : 싫지 않음.
감상(鑑賞)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17. 아미정(蛾眉亭) 회사정 이백의관총 적오정 태백루 (0) | 2016.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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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십영정(十詠亭)과 채석기(采石磯) (0) | 2016.04.07 |
14. 선주(宣州) 사조루(謝眺樓) (0) | 2016.04.04 |
13. 이백 묘(李白墓) (0) | 2015.10.06 |
12. 경정산 (敬亭山 ; 징팅산) (0) | 2015.09.23 |
임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김구 주석의 지시로 작성한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최초공개'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단 1명도 없었다. |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
역시 임정이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심지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게 하는 데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굴절되어 있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모습은 재적 141인 중 가 103, 부 6표로 가결되었다. 준비했다는 듯이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어떤 성격의 조직이고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김승학의 육필 명단을 기초로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
검찰관 서성달·곽상훈·이의식·심상준·김웅진·서용길·이종성 등 9명 중 7명의 검찰관이 모두 육필 원고에 들어 있다.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
우익정당에서는 도리어 좌익에 많음을 말하고 있음은 위협과 강요에 부득이하여 협력적 행동을 하게 된 자, 또는 형식적으로 협력하는 체 한 자 그들의 동원을 위하여 주역할을 하였던 친일협력단체의 주요 간부 및 친일 언론기관 경영자 등 소위 친일 선두부대의 죄과가 중대한 것을 특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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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이광수(시인)로 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 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신태악(변호사) 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 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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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작성한 친일파 명단(4776명)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작성한 708명의 친일파 명단
친일파 708인 명단(親日派 708人 名單)은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발표한 주요 친일 인사 708명[1]에 관한 명단이다. 이들 명단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 모임은 광복회(회장 윤경빈)와 함께 심사하여 명단을 공개했으며 이 가운데 692명은 광복회와 합의하에, 사회, 문화, 예술 분야에서 공이 커서 친일파 규정에 논란이 많은 나머지 16명은 별도로 발표했다.
다음 목록은 각 분야별로 발표된 목록이다.
(위키백과)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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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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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raise me up
When l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When l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 while with me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을 때까지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혀 줄 때 나는 강인해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The Prayer / Helene Fischer & Andrea Bocelli (0) | 2016.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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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gonna pray for Korea (0) | 2015.10.07 |
Va, PensieroVerdi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Campus Mission Church) (0) | 2015.10.07 |
Helene Fischer / Ave Maria (0) | 2015.04.07 |
이백묘(李白墓)
이백 묘원에서 우리를 먼저 맞은 것은 높이 11미터의 거대한 패방이다.
일종의 대문인 셈인데 4주3문(四柱三門)으로 된 전형적인 휘주식 패방이다.
시선성경(詩仙聖境)
패방 전면에는 저명한 현대서예가 계공(啓功, 치궁)의 글씨로 시선성경(詩仙聖境) 시선,
즉 이백이 잠든 성스러운 경내라 쓰여 있다.
천고풍류(千古風流) 영원한 풍류라는 뜻. 초서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임산지(林散之, 린싼스)의 글씨이다.
거배요월(擧杯邀月) 술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다.
이백은 실로 술과 달의 시인이었다.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술로 달래었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낀 그는 천상에 있는 달을 친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술과 달을 뻬고는 이백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술잔을 높이 들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이 소상은 그러한 이백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거배요월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월하독작(月下獨酌)> 제1수에서 따온 말이다.
청련지(靑蓮池) 이백의 묘원 안에 있는 연못이다.
이백의 호 청련거사(靑蓮居士)에서 이름을 딴 연못으로 연꽃을 많이 심어 놓았다.
또 착월교(捉月橋)라는 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착월(捉月)이란 '달을 잡는다'는 뜻인데,
이백이 강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로 뛰어들어가 죽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다리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行樂需及春(행락수급춘)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리니,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작품 배경
이 시들은 시인의 특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달 아래서 꽃을 벗하며 홀로 술을 마시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이 시들에는 시인의 근심이 숨겨져 있다.
이 시는 당시 정치적 타격으로 실의에 빠진 시인이 자신의 근심을 해소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백은 〈월하독작〉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4수의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는 제1수이다.
제목은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라는 뜻으로, 시의 형식은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봄밤에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시인은 낭만적 정취에 젖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여 홀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아득한 은하(銀河)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바람에서는 초탈을 구하는 마음이 읽혀진다.
첫구의 '화간일호주(花間一壺酒)'는 '화하일호주(花下一壺酒)' 또는 '화전일호주(花前一壺酒)'라고도 한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원문 및 해설
전체 4수로 이루어진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는 모두 상상력이 풍부한 낭만적인 시이다.
이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이다.
(제1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客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꽃 사이에서 놓인 술 한 단지,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네.
달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르는구나.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니 즐겁기가 모름지기 봄이 된 듯한데.
내가 노래하니 달이 배회하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술 깨었을 때는 함께 즐거움을 누리지만,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니.
영원히 정이 끊어지지 않는 교유를 맺으며, 저 멀리 은하수 저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리.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제2수)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爲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겠지.
천지가 원래부터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으리.
듣자하니 청주는 성인에 비견할 만하고, 또한 탁주는 현자와 같다하네.
성현들도 원래부터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랄 것이 있겠는가?
세 잔을 마시면 큰 도와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합해지니.
술 마시는 흥취를 알면 될 뿐,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게나.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태백비림(太白碑林) 곽말약(郭沫若) 書
태백비림에는 당대 저명 서예가와 유명 인사 107명의 글씨가 각각 흑색 화강암에 석각되어 있다.
모택동, 곽말약(郭沫若, 궈모뤄) 노신(魯迅, 루쉰), 우우임(于佑任, 위여우런), 임산지, 계공 등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다.
내용은 대부분 이백의 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모택동의 글씨가 먼저 눈에 띄었다.
모택동은 특유의 초서로 이백의 유명한 시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를 써 놓았다.
태백사(太白祠) 임산지의 글씨. 이백의 사당으로 안에 칼을 찬 이백의 소상과 유명한 '송비'가 있다.
詩無敵(시무적) : 두보가 이백을 두고 처음으로 쓴 말. 시로는 이백을 당할 자가 없다. 천하무적이다.
이백 묘
비석 덮개 위의 동그란 조형물은 돈을 상징하는 엽전이다.
이 돈으로 좋아하는 술을 사서 실컷 마시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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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산 (敬亭山 ; 징팅산)
해발고도는 286m이다. 황산[黃山]산맥에 속한다.
지금은 안후이성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고, 임목(林木) 자원이 풍부하다.
문화재로는 스셴사[十賢祠], 타이바이루[太白樓], 광쟈오사[廣敎寺] 등이 있다.
안후이성 남동부 쉬안저우시[宣州市]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자오팅산[昭亭山] 또는 차산[査山]이라고 불렀는데
남조 진나라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이름 소(昭)를 피해서 경(敬)정산으로 개칭했다.
선성 시내의 도로명에도 소정로(昭亭路)가 있고 사공로(謝公路)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경관이 수려하여 사조(謝脁)도 여러차례 이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정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백이다.
이백은 전후 일곱차례나 경정산을 올라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홀로 앉아-이다.
獨坐敬亭山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지유경정산
뭇 새들 높이 날아 다 없어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롭게 가버렸네
서로 봐도 양쪽 모두 싫지 않은 건
오직 저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敬亭山(경정산)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남쪽에 있는 산. 일명 소정산(昭亭山)
高飛盡(고비진) : 많은 새들이 높이 날아 어디론가 가버린다
孤雲(고운) : 외로이 떠도는 한 조각 구름
相看(상간) : 서로 바라봄
不厭(불염) : 물리지 않음. 싫지 않음
只有(지유) : 다만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너무나 유명한 이 시로 인해서 경정산은 천하의 명산이 되었다.
그후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경정산을 읊은 시가 1,000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은 ,강남시산(江南詩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경정산 입구 광장에는 이곳을 유람한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매요신(梅堯臣), 탕현조(湯顯祖) 등의 부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경정산 입구에 있는 시비들
고소정방(古昭亭防)
상사천(想思泉)
742년 이 백은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가족들은 남릉에 남기고 홀로 월지방으로 가 머물다가,
하지장과 옥진공주의 추천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여태까지 여러 산을 떠돌며 은자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 결실을 맺어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글의 초안을 잡거나 연회에 불려가 흥을 돋우는 시나 짓는 정도였다.
어용문인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와 술로 지내다 결국 744년 장안을 떠나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長相思(장상사)
其一
長相思(장상사) 늘 그리운 사람
在長安(재장안) 장안에 있네.
絡緯秋啼金井欄(낙위추제금정란) 가을 귀뚜라미 우물 난간에서 울고
微霜淒淒簞色寒(미상처처단색한) 서리 내려 쓸쓸한데 대자리 차갑네.
孤燈不明思欲絶(고등불명사욕절) 외로운 등불 희미한데 그리움 절절하여
卷帷望月空長歎(권유망월공장탄) 휘장 올리고 달을 향해 공연히 긴 탄식이로다.
美人如花隔雲端(미인여화격운단) 꽃같이 아름다운 님은 구름 끝 저편에 있네.
上有靑冥之高天(상유청명지고천) 위로는 푸르고 푸른 높은 하늘이 있고
下有淥水之波瀾(하유록수지파란) 아래로는 맑은 물 일렁이는 물결이 있네.
天長路遠魂飛苦(천장로원혼비고) 하늘 끝 길은 멀어 넋도 날아가기 힘들고
夢魂不到關山難(몽혼부도관산난) 꿈속의 넋은 관산 넘지 못하네.
長相思(장상사) 긴 그리움에
摧心肝(최심간) 심장 간장 다 끊어지네.
其二
日色已盡花含煙(일색이진화함연) 햇빛 이미 다하여 꽃은 연무 머금었고
月明欲素愁不眠(월명욕소수불면) 달은 밝아 희니 수심으로 잠 못 이루네.
趙瑟初停鳳凰柱(조슬초정봉황주) 비파를 뜯다가 기러기발 멈추고
蜀琴欲奏鴛鴦絃(촉금욕주원앙현) 거문고 꺼내 원앙현을 연주하네.
此曲有意無人傳(차곡유의무인전) 이 곡 뜻이 있으나 전해줄 이 없으니
願隨春風寄燕然(원수춘풍기연연) 봄바람 따라 연연산에 부쳐지기 바라네.
憶君迢迢隔靑天(억군초초격청천) 그대 그리워도 멀고 먼 푸른 하늘 사이하니
昔日橫波目(석일횡파목) 그 옛날 추파 던지던 눈
今成流淚泉(금성류루천) 이제는 눈물샘 흘러 넘치네.
不信妾腸斷(불신첩장단) 이 첩의 애간장 끊어짐을 믿지 못하면
歸來看取明鏡前(귀래간취명경전) 돌아와 거울 앞에서 들여다 보소서.
어구(語句)
長相思 : 오래 서로 그리워함. 漢(한) 나라 때의 고시로 樂府(악부)의 제목임.
素 : 흰 비단. 生綃(생초).
趙瑟 : 조 나라 여인들이 잘 타는 비파 또는 거문고 곡조.
鳳凰柱 : 봉황 모양을 새긴,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줄을 받치는 雁柱(안주, 기러기 발 곧 줄을 고르는 기구).
蜀琴 : 촉 지방에서 타던 가야금. 한 나라 文人(문인)인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촉의 부호 卓王孫(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갓 과부가 된 왕손의 딸 卓文君(탁문군)의 미모에 반하여 거문고로 鳳求凰曲(봉구황곡)을 타니 과연 탁문군이 밤에 그에게 달려와 부부가 되었음.
鴛鴦 :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암수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사이가 좋기에 부부간의 애정을 비유함.
燕然 : 연연산. 蒙古(몽골)에 있는 산인데 당시 匈奴(흉노)의 땅임.
迢迢 : 멀고 아득한 모양.
橫波目 : 눈물이 고여 옆으로 돌린 눈. 自流涕而橫波(절로 눈물이 흘러 옆으로 보네)〈傅毅 舞賦〉
감상(鑑賞)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읊은 악부의 노래 형식인 시.
첫 수의 대강은 ‘그리운 임은 장안에 있는데, 여치는 우물가에서 울고 옅은 서리에도 잠자리는 차갑네.
등불 어두우니 그리움 줄어들어 휘장 걷고는 달 보며 헛되이 탄식하노라니 고운 여인 같은 달 구름 저쪽 멀리 있구나.
위에는 푸른 하늘이요 아래로는 맑은 물결, 하늘 넓고 길은 멀어 꿈속 영혼은 고향까지 가지 못하는구나.
아아 그리워라 애끊네.’이다.
첫 수는 敍景(서경)을 중심으로 그리움을 그렸는데,
둘째 수는 抒情(서정)을 주로 하여 혼자 사는 설움을 읊었다
옥진공주(玉眞公主 690~762)
경정산에는 옥진공주의 묘가 있고 그 앞에 공주의 소상이 서 있다.
또 그 옆에는 상사천(相思泉)이라는 샘을 만들어 놓고 샘 뒤편에 옥진공주의 입상과 이백의 와상(臥像)을 새긴 부조가 놓여 있다.
옥진공주는 당나라 무측천의 손녀이자 예종(睿宗)의 열 번째 딸이고
현종(玄宗) 이융기의 누이동생으로 이백보다 9세 연상이다.
경정산이 옥진공주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이백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묘 앞에 세워진 '옥진공주 묘지(墓誌)의 내용은 이렇다.
공주는 젊어서 여도사(女道士)가 된 후 천하의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백을 알게 되었고
그를 현종에게 적극 추천하여 대조한림(待詔翰林)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다.
이백이 모함을 당하여 장안을 떠나자 공주는 울적한 마음에 공주의 칭호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후에 이백이 경정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는 이 산으로 들어와 수도를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독좌경정산"은 경정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함과 동시에 옥진공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 시라는 것이다.
옥진공주 묘비는 안휘성 선성시 경정산 풍경명승구 관리처가 2001년 9월에 세운 것이다.
공주의 무덤을 비롯한 구조물들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옥진공주(玉眞公主)를 빠트릴 수 없다.
그녀는 젊었을 때, 스스로 원해서 여도사가 되었다.
당시 옥진공주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부친인 당 예종 이단에게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당 예종은 당연히 쉽게 응락해 주지 않았다.
자기의 딸에게 손해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결심이 굳었다.
그녀는 모친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마도 당 예종은 가련하게 죽어간 그녀의 모친을 떠올렸을 것이다.
확실히 고혼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예종은 마침내 딸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해 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러우며, 풀들은 자라고 새는 날아다니는 계절에,
장안성의 밖에는 "옥진관(玉眞觀)"이라고 이름붙인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농삿일을 버려 두고 도관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1년 여의 공사끝에 옥진공주는 마침내 이 화려한 도관에 입주한다.
그녀와 동시에 입주한 사람들은 황실 음악가 중에서 은퇴한 가무녀들과 일부 은퇴한 궁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관은 여자들의 궁전과 같았다. 그리고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본떠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당시 중에 "지유지영옥엽관, 전운재월조인한(知有持盈玉葉冠, 剪雲裁月照人寒)"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영'은 바로 옥진공주의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옥엽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가지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하지 못했다(時人莫計其價)"고 한다.
청풍명월의 밤이 되면, 도관에는 맑은 악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무녀들은 인공산수 속에서 신선세계를 공연했다.
옥진공주의 생활은 시집간 다른 공주들보다 훨씬 나았다.
거의 단신여왕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당나라때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사람은 옥진공주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 고조때부터 당 소종때까지 근 300년 동안 이당황실에는 210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중에서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공주가 12명이나 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인 왕건은 <<당창관옥예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관야멱향래처, 유견계전쇄옥명(女冠夜覓香來處, 唯見階前碎玉明)"
여관은 여황관(女黃冠)이라도 하고, 여관자(女冠子)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도사를 가리킨다.
당나라때 여관(女冠)은 수진여관(修眞女冠)과 궁관여관(宮觀女冠)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바로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공주가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당나라때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사실, 당시 이들 도관에 들어간 공주들이 진정으로 머리를 깍고 출가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기르며 출가생활을 보냈다.
당나라때 공주가 도교에 입교하는 것은 당나라때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고, 도교 내부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련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의 두 황제 때에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기록은 없다.
당 고종에 이르러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도사가 된다는 것은 공주가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원인을 따져보면, 도교가 보유한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다.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득도를 하려는 이상과 바램이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과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나라 때 차이가 크다.
왜냐하면 도교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도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다.
공주는 천자의 딸로서 고귀하고, 신분이 존귀하다.
공주가 도교를 택한다는 것은 민간에도 도교에 귀의하는 기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공주는 여도사가 되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므로,
민간도사들이 힘들게 수련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나라 공주들의 도교귀의 동기는 간단히 말해서, 도를 그리워한다든지, 복을 추구한다든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든지 남편이 죽은 후에 속세를 떠나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나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공주들이 적극적으로 여도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여도사가 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재녀 어현기(魚玄機)였다.
당나라 때는 여권의식이 강했고, 일부 여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살면서, 자유롭게 애정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여도사'는 아주 그럴듯한 신분이었다.
'여도사'는 자유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살롱의 여주인과 같이.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여도사'의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했다가 반년,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황실의 공주는 민간의 보통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이다.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8살 때 '외조모 양씨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궁중에 살았다.
16세가 되어서 토번의 혼인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태평관(太平觀)으로 가서 관주가 된다.
혼사 얘기가 끝난 후인 20살 때 태평공주는 원하는 바대로 부마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다시 당 예종의 옥진공주를 보자.
출궁 이후 호화로운 옥진관에 살면서 자주 명인아사들을 불러모아 술마시고 놀았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아래 쓰러졌다.
공주가 비록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스캔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당 현종이 집권하자, 여동생인 옥진공주를 더욱 총애했다.
옥진공주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왕옥산 등에 여러 개의 도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도 별관, 산장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주위에는 방사와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렇게 젊은 여도사가 행동도 자유로운데, 애정 생활이 없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백, 왕유의 두 당나라 대시인도 옥진공주의 애정 생활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당나라의 옥진공주가 선례를 보이자,
나중에 당현종, 당대종, 당덕종, 당순종, 당헌종, 당목종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공주가 여도사로 된다.
심지어 한 때는 4명의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기도 한다.
이들 존귀한 미모의 황실 여도사는 사실 수시로 환속하여 시집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처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때의 여도사는 거의 귀족의 기풍이 된다.
고관대작들의 딸 중에서도 적지 않이 여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때 대시인들은 이들 여도사들을 추켜세웠다.
이백은 일찌기 여도사 이등공(李騰空)을 위하여 시부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이등공은 바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딸이다.
그리고 초당사걸 중 하나인 낙빈왕은 여도사 왕령비(王靈妃)를 도와 그녀의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여도사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현기가 쓴, "이구무가보, 난득유정랑(易求無價寶, 難得有情郞)"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이 싯구는 정말 좋다. 그러나, 풍진의 여도사가 썼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사대미녀 중 하나인 양옥환(양귀비)도 개가하여 시아버지인 당 현종에게 가기 전에 잠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황실 여도사들은 여도사가 된 이후에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그녀들의 혼인생활도 왕왕 황실의 체면이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집간 이후에 공주들의 행위는 왕왕 남편 집안에 의하여 제한된다.
고양공주, 양양공주, 태평공주, 곡국공주, 영가공주 등등은 모두 애인들을 두었다.
이들의 애인과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고양공주는 변기(辯機)와 절에서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고,
양양공주와 같은 경우는 애인의 모친에게 며느리로서의 예를 행하기도 했다.
당나라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후의 궁관생활은 도관의 경제문제에 부닥친다.
옥진공주는 출가하겠다는 뜻이 아주 강했다.
그는 집도 필요없고, 조세도 원치 않으며, 공주 칭호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출가한 공주들은 실제 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특히 궁관여관들은 장식 등도 많이 따지게 된다.
당나라 공주들의 일상적인 수요도 있다.
특히 도관에서 재초(齋醮)를 지내야 한다.
방대한 행사에는 호화로운 도량이 필요하고, 옷을 차려입은 여악사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모두 상당한 고정경비를 요하는 것이다.
장수를 원하는 궁관여관이라면, 특히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양생성선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궁관의 건조, 설비, 일상용품 등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때에 조정에서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궁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은 역대 왕조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 현종은 도교정책을 확립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신당서. 제공주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개원신제>가 실려 있다:
"장공주는 2천호에 봉하고...공주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역시 천호에 봉한다."
시집가지 않은 공주는 원래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병이 심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이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는 또 하나의 상황 즉 여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공주는 여전히 황실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관의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궁관여관은 체면을 잃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속세를 떠나서 산림에 은거하는 수진여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나라의 공주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자주권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 당왕조는 비록 관농일대에서 나타났지만, 선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남녀 관계에서, 중원의 명문대가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원의 봉건왕조가 되다보니, 윤리도덕도 따져야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개방된 성생활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려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태백독좌루(太白独坐楼)
태백독좌루는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을 기념하여 세운 누각이다.
그곳에 이백의 홀로 앉은 조각상과 시들이 갖춰져 있다.
이백은 경정산을 소재로 한 시 43수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적인 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을 지은 곳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녹설차사(绿雪茶社)
녹설차는 경정산을 원산지로 하는 중국녹차이다.
녹설차는 그 형상이 참새의 혀 같고, 통통하며, 녹색빛에 육기가 돈다.
찻잎의 표면은 미세한 흰털로 덮여있는데,
찻잎을 다린 물에 떠도는 그 털들이 마치 하늘에서 맴돌며 내리는 눈송이 같다.
이러한 녹설찻잎을 생산하는 차 밭이 경정산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경관이 별스럽고,
녹설차를 음미해볼 수 있는 녹설차사가 경구내에 있다.
경정산녹설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경정산에“ 녹설”이라는 이름의 낭자가 살았다.
나이는 아직어렸지만 총명하고 재주가 있으며 심성이 착했다.
녹설은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
생계와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은 깍아지른 산봉우리에 자생하는 찻잎을 따다 팔아서 충당하였다.
그날도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있는 차나무의 잎이 유난히 빛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저만한 품질과 양이라면 홀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값에 크게 보탤수 있겠다고 생각한 녹설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절벽을 타고 올라갔는데, 나무에 거의 도달했을 순간에 발이 미끄러져 깊디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녹설의 등 뒤 망태기에서는 그 동안에 따 담은 찻잎이 공중으로 흩어날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았고,
그렇게 온 산 온 계곡에 흩어져 내린 찻잎들은 모두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실한 차나무로 자랐다.
경정산 동네 사람들은 그 찻잎을 따다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녹설낭자에 대한 고마움이 넘쳐나 자신들이 따는 찻잎을“경정산녹설"이라고 불렀다.
천년의 시산(詩山) 경정산에서 생산되는 경정녹설은 항주의 용정차와 은 마찬가지로
납작한 편조(扁條) 형이며 홍청(烘靑) 녹차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진품(珍品) 녹차 중의 하나이며, 중국 역사 명차 중의 하나로 용정차와 꼽고 있다.
육우의『다경 』에 의하면 경정산이 속해 있는 하나로 선성(宣城) 에선
이미 동진(東晋: AD 317~322년)때부터 차가 생산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었었다.
경정녹설은 송라차(松蘿 茶)의 일종으로 명대에 창시되어 명청(明淸) 시기에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세상에 바치는 유명해졌으나,
후에 역사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수십년 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 연구가 시작되어
1978년에야 비로소 중국 정부의 심평과정을 통과하여 생산이 회복되었다.
경정산은 황산의 지맥에 속하며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산들이 높이 세상에 솟아 있어 산골짜기 또한 높이 매우 깊다.
운무가 또한 덮여 있어 골짜기엔 운무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숲과 골짜기엔 청죽(靑竹)이 숲과 하늘 높이 치솟아 해를 가리고,
상쾌하고 맑은 향기가 온 산에 이 가득하다.
『선성현지( 宣城縣誌)』의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의 기록에 보면,
“송라차(松蘿 茶)는 도처에 모두 있는데, 맛이 산에 쓰면서도 담백하다.
그러나 종류가 매우 풍부지만, 오직 경정녹설만이 최고품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차 이름이 ‘경정녹설’로 명명된 유래에는 3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맛이 있다.
첫째 전설은‘녹설’이란 차를 따는 아가씨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아가씨가 손재주가 비범하였다.
그녀는 차를 딸 때 손으로 영리하고 따지를 않고, 입으로 찻잎을 물고 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절벽에 손으로 올라 차를 따다가 그만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경정산차를 ‘녹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설은 찻물이 끓은 후, 찻잔위로 뜨거운 수증기가 마치 운무처럼 유유히 일어
구름처럼 떠있는 모습이 찻잔 속에 눈꽃이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절벽에 마치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고 이것이 있는 뿌리고 뜻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그 선녀가 바로 있는 앞에서 말한‘녹설’아가씨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설은 바로 뜨거운 물로 차를 우리게 되자 찻잔 속의 찻잎이 잎 한 한 잎 수직으로 한 가라앉을 때
찻잎의 하얀 솜털(白毫)이 뒤집어 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숲 속에 대설이 날리는 듯하여 ‘녹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설이 매우 신화적인 요소도 있고, 소박한 전설이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지만,
어쨌든 명칭 유래에 대한 소박한 세 가지 전설 모두가 ‘경정녹설’에 대한 특징을
중국인들 특유의 낭만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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