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정(蛾眉亭)


이번 중국 인문기행 중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안내문이나 표지판을 보면 우선 한자(漢字)와 그 아래 영문,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의 한글 4가지 문자로 해설이 되어 있다.


< 아미정은 북송 희년 3년에 설립되었고, 역대의 왕조에서 수선을 진행하였으며,

민국 23년(1934년)에 또 재차 수선을 진행하였고, 1987년에도 재수선하였습니다.

이곳은 "앞에 동서 양산을 바라볼 수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구불구불한 아미산". 이로인해 아미정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미정은 현재 시급문물보호단위입니다.>




당시인이백의관총(唐詩人李白衣冠塚)


이백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 알려진 채석강 나루터 근처에 당시 이백이 벗어놓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묻었다는 묘.

글씨는 당대의 서예대가 임산지(林酸之)가 쓴 글이다.














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謝眺樓 敬亭山 동영상 출처 : EBS


贈汪倫 
李白乘舟將欲行 (이백승주장욕행)
忽聞岸上踏歌聲 (홀문안상답가성)
桃花潭水深千尺 (도화담수심천척)
不及汪倫送我情 (불급왕윤송아정)
이백이 배를 타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홀연 강언덕에서 발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들리네 
도화담의 물이 깊이가 천 척일지라도 
왕윤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宣州 謝眺樓 餞別 校書 叔雲 (선주 사조루 전별 교서 숙운) '선주'땅 '사조루'누각(樓閣)에서 '교서 숙운'과 헤어지며... - 당(唐)나라 시선(詩仙) '李白(이백)'이 '宣州(선주)에 있는 '謝眺樓(사조루)'에서 校書(교서)벼슬의 '叔雲(숙운)'을 전별(餞別)하고 쓴 시(詩) 棄我去者(기아거자) 나를 두고 떠나가는 것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어제처럼 지나간 시간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亂我心者(난아심자)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오늘 하루도 온통 번민과 걱정 뿐이로세.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먼길 가을 바람결에 기러기 날아가니 對此可以감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럴 땐 높은 누각에 올라 마음껏 취해보리라.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 같이 뛰어난 문장력, '건안'과 같은 풍모(의 숙운叔雲)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그 가운데 '소사'(의 詩)처럼 또 뚜렷이 빛을 발하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뜨거운 열정 함께 품고 원대한 포부 비약하니 欲上靑天攬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고 싶구나.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뽑아 물을 베어본들 강물은 계속 흐르듯이 擧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술잔을 들어 근심을 잊으려해도 시름은 더해만 가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의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라. [참고] 1) 宣州(선주): 지명,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쉔청(宣城)현'. 2) 謝眺樓(사조루): 누각(樓閣) 이름, '육조(六朝)시기' 선주(宣州)의 태수(太守)로 있던 '謝眺(사조)'가 세움. 3) 육조(六朝) AD 229~589년: 삼국시대의 '吳(오), 東晉(동진)'과 남조(南朝)의 '宋(송), 齊(제), 梁(양), 陳(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 4) 謝眺(사조:AD 464~499년): '대사(大謝)'라 불리는 '사령운(謝靈雲:AD 385~433년)'과 함께 '소사(小謝)'라 불린 '위진 남북조시기'의 '사씨(謝氏)' 성을 가진 두 명의 저명한 시인 중 한 사람. 5) 校書(교서): 서책(書冊)을 검열하는 직책의 벼슬 이름, 정식 관직 명칭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임. 6) 叔雲(숙운): 이름은 '이운(李雲)', '李白(이백)'이 '숙운(叔雲)'이라 부름은 같은 집안의 아재비뻘 되는 사람, 즉 족척(族戚)이기 때문. 7) 餞別(전별):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 :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 새들은 높이 날아가고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 외로운 구름만 한가히 떠간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건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 다만 경정산이 있기 때문 
어구(語句)
敬亭山 : 安徽省 宣城地區(안휘성 선성 지구)에 있는 산.
孤雲 : 외로이 떠도는 구름.
相看 : 서로 봄. 바라봄.
不厭 : 싫지 않음.
감상(鑑賞)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임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김구 주석의 지시로 작성한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殺生簿 초안 최초공개'





이덕일 역사 평론가.

출처: 월간중앙 2001년,8월호.
“월간중앙”은 1948년 백범 김 구와 임 정 계열이 지목한
숙청 대상 친일 인사들의 명단 초안을 단독입수해 공개한다.

친일파 숙청의 민족사적 임무를 띠고 출범한 ‘반민특위'는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7,000여명의 혐의자를 조사해 이중 221명을 기소했다.
그러나 기소된 친일 인사 중 재판이 종결된 자는 불과 38인,
그나마 전원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민족반역자는 단 1명도 없었다.

이번에 “월간중앙”이 입수한 친일파 명단은
희산 김승학이 작성한 육필 원고를 통해 밝혀졌다.
김승학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투사'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에는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육필 원고가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1948년 원고 작성 당시의 김승학의 위치와 지위에 있다.
그는 이 명단을 작성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해 구성된 ‘반민특위' 재판관과 검찰관 17인 중 12인의 명단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그가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이 육필 원고의 친일파 리스트는
‘반민특위' 친일파 명단의 초안, 또는 기초자료로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에는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백범 김 구, ‘임정파’의 판단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식민지 잔재 청산의 ‘처절한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편집자>



2001년, 7월,12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는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열리고 있었다.
김승학은 일반에게는 생소하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남만주의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그리고 해방후 한국독립사를 편찬한 역사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관심끄는 육필 친일파 명단.

이날 고인의 120세 생일을 맞이해 열린 강연회 현장에서는 김승학 선생이 직접쓴 친필 사료들 몇 점이 공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갱지에 흐릿한 붓으로 쓴 ‘반민족특별재판소재판관·검찰관’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사료였다.
그 뒷장에는 ‘친일파 군상’(群像)이라는 중간제목 아래
‘(1)정계·관계·실업계 인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고 친일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친일파 명단 아래에는 옛날 시골 학교에서 반장선거 때 했던 방식대로
‘정’(正)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많은 경우는 ‘正’자 셋, 즉 15부터 ‘一’까지 매겨져 있었다.

이 육필 원고는 반민특위와 친일파들의 명단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숫자를 부기한 친일파 명단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원고 작성 당시 김승학의 지위 때문이었다. 김승학은
친필 명단 작성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자 정치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원고는 김승학이 당시 임정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단순히 개인 의사로 기록한 명단이 아니라
반민특위와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판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끈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견해

김승학은 1948년 4월 임정 국무위원 겸 정치부장에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정 주도 정당이었으므로 김승학은 임정 내의 위치로 보나 한국독립당 내의 위치로 보나
당시 독립운동가 진영의 핵심인물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등이 합당해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주류이자 임시정부의 집권당이었다.
환국 후인 1946년 4월에는 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 합당했으나 당명은 여전히 한국독립당이었고,

역시 임정이 주도하는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좌우 합작과 남북협상 통일정부 수립 등의 노선을 갖고 있었으므로
1948년 5월10일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는 불참했기 때문에 의회에는 일부 무소속 외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심지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게 하는 데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시기 많은 고난을 겪었던 김승학도 1948년 3월 신탁통치 반대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정도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굴절되어 있었고,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모습은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통탄해 마지않던 바였다.

그러나 비록 한국독립당의 선거 불참 속에 구성된 국회지만 제헌국회는 개회 벽두부터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1948년 8월5일 국회의장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金雄鎭)의원(파주. 무소속) 의원 등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의 구성안을 긴급동의해 재적 155명의 의원 중 가 105, 부 16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다음날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에 김웅진, 부위원장에 김상돈(金相敦)이 선출되었고,
8월17일에는 김웅진 의원 외 27인의 이름으로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제출돼 9월7일의 제59차 본회의에서

재적 141인 중 가 103, 부 6표로 가결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48년 9월 3일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반시킬 때가 아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폭발적 반응에 밀려 법안은 9월21일 국무회의에 상정됐다.
특별재판부에 국회의원이 포함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배치되는 사법권 침해라는 일부 국무위원의 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됐다.

이렇듯 친일파 숙청 문제가 공론화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결성이 기정사실화되자
정부나 국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임정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단독정부, 단독국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친일파 숙청 문제까지 방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승학의 이 육필 명단이 주목받는 것은 임정측의 이런 필요에 의해 작성되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정측의 이런 필요성이 아니라면 김승학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연필로 꼼꼼히 옮겨 적고,
아마도 동지들과 같이 한 것이 분명한 ‘正’표시를 부기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친일파 군상”의 육필 초고

이 육필 명단은 그냥 사장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설치 법안이 공포될 무렵인 1948년 9월,

준비했다는 듯이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삼성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의 발간 경위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책의 편찬자는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이지만 그간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어떤 성격의 조직이고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그런데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베일에 가려졌던 삼성문화사의 “친일파 군상”이

김승학의 육필 명단을 기초로 편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책은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이는 책이 반민특위를 겨냥해 출간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상등장인물’이라는 부제는 여기에 실려 있는 인물들이 반민특위에서 조사받아야 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사는 당시 김승학이 임정과 한국독립당 내에서 점하고 있던 위치로 볼 때
단순한 개인 의사가 아니라 임정측 입장임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임정 측의 입장이 반영된 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당시 한독당 김구 주석은 물론
임정계열의 여러 핵심 인사와 면밀한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다시 말해 ‘친일파 군상’의 초고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 이 육필자료는
김구와 임정계열의 친일파 청산 의지와 방법론, 청산 대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정은 비록 단독정부와 단독국회는 거부했으나 임정이나 한독당 명의 대신 ‘민족정경문화연구소’ 명의로
반민특위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육필 명단에 친일파 뿐만 아니라 이들 신상을 처리할 재판관,
검찰관의 명단까지 적어 두었다는 점 때문에 신빙성을 갖는다.




미리 예상한 반민특위 재판관, 검찰관 명단

반민특위 위원이나 재판부·검찰관 등의 명단이
“친일파 군상”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해 육필 명단에는 수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반민특위 구성원이나 특별재판관, 검찰관이 채 선정되지 않았을 때다.
육필 원고의 ‘반민법특별 재판관·검찰관’ 명단 중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金尙德)이 포함되어 있다.
부위원장 김상돈과 10명의 조사위원 명단은 누락되었으나 실제 구성된 특별재판부와 검찰부 구성원은
육필 명단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특별재판부의 재판관장 김병로와 제1재판부 재판관 오택관·홍순옥·김호정과,
제2재판부 재판장 노진설 재판관과 고평·신현기·김장렬,
제3재판부 재판장 서순영과 재판관 이춘호·최영환·최국현 등이 그들로
16명의 재판관 중 명단에 오른 인사가 12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특별검찰부의 검찰장관 권승렬과 검찰관 차장 노일환을 비롯해

검찰관 서성달·곽상훈·이의식·심상준·김웅진·서용길·이종성 등 9명 중 7명의 검찰관이 모두 육필 원고에 들어 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임정측 자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임정측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 군상”은 의외일 정도로 신중하다.
이 책의 범례(凡例) 1을 보자.
‘본집(本輯)에 등재된 전쟁 협력자는 1937년(소화 12) 7월,
즉 중·일 개전시부터 1945년(소화 20년) 8월15일,
즉 해방시까지 9년간 일본을 위하여 물질적·정신적 공헌자,
또는 위협에 피동되어 협력적 행동을 한 자로서 주로 세간에 발표된 자에 한함.’

이로 미뤄 임정측은 친일파 숙청이 무조건적, 보복적 차원에서 전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대상자를 중·일전쟁 이후 9년 간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이완용과 같은 초기 친일파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 친일파들은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등에서 근무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그 개인 명단을 발표하지 않아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배제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정은 친일파 문제가 각 정당의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이용될 것을 우려해 명단을 한정한 것처럼 보인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우려를 잘 나타내고 있다.
‘좌익정당에서는 우익정당에 친일파 반민자가 많은 것같이 선전하여 왔고,

우익정당에서는 도리어 좌익에 많음을 말하고 있음은
실로 이 문제가 정당의 선전자료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이 있다.’

이처럼 친일파 문제도 좌,우익에 의해 당리당략 차원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임정측에서는 신중한 자세를 보인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에서 ‘본집에 등재될 인물 중에는 진정 협력자도 많지만

위협과 강요에 부득이하여 협력적 행동을 하게 된 자, 또는 형식적으로 협력하는 체 한 자
절대 다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반민자 문제는 민족적인 양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상명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해
이 문제가 당리당략 차원에서 접근되는 데 대해 경계하고 있다.
즉, 김승학의 육필 명단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일파 문제가 당리당략이나 한풀이 식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민족적인 양심'으로 접근해야 할 ‘지상명제'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친일파 군상”의 서문은 이런 원칙에서 친일파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당시의 심한 박해에와 위협에도 백절불굴하고 그 절조를 고수한 애국지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직업의 지속, 재산의 보호, 신변의 안정 등을 위하여 관헌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비굴한 행동을 한 자 적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또한 그 당시 위협에 행동된 인사나 그들의 과오보다

그들의 동원을 위하여 주역할을 하였던 친일협력단체의 주요 간부 및 친일 언론기관 경영자 등

소위 친일 선두부대의 죄과가 중대한 것을 특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육필명단에 부기된 숫자의 의미.

육필 명단은
(1)정계·관계·실업계.
(2)교육계·종교계.
(3)언론계·문학계·연예계.
(4)기타 인물.
(5)거액(10만원 이상)의 국방헌금 헌납자.
(6)적극 지원병.
(7)1만원 이상 헌납자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1)은 43명 (2)는 13명 (3)은 45명 (4)는 11명 (5)는 19명 (6)은 70명이고
(7)은 모두 73명인데 17명의 명단만 밝혀놓았다.

그런데 (1) (2) (3) (4)의 범주에 드는 인물들은 이름 밑에 ‘正’자 표시가 붙어 있다.
이름 밑에 숫자가 매겨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의 면면을 보면 의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숫자가 매겨져 있는 인물은

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이광수(시인)로
이들은 모두 正자가 셋, 즉 15란 숫자가 매겨져 있다.

다음으로는 윤치호(연희전문 교장, 45년 12월 사망)와 주요한(시인)으로 13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뒤이어 김동환(시인)이 12, 고원훈(중추원 참의)·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

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 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박인덕(청화여숙장)·이종린(천도교 간부)·김활란(이화여전 교장) 신흥우(목사)·유진오(교육자) 등은 9,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박흥식(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백철(문학평론가) 이성근(每新사장)·황신덕(교육자)은 6,

신태악(변호사) 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

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5 이상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다.
그러나 민족 학살을 도모한 박춘금(대의당 당수)에게 2라는 비교적 낮은 숫자가 매겨지고,
1개군(郡)에서 비행기 1대씩 헌납하자고 주장했던 유명한 문명기(조선신문 사장)에게 1의 낮은 숫자가 매겨진 것은
이름 밑의 숫자가 친일 강도에 대한 절대적 분류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름 앞에 ‘가(假)’자가 부기된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은 박정형·정방오로, 반민특위가 구성될 무렵 애국지사로 자처하면서 상당한 세도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즉, 친일파이면서 애국자인 척하는 인물에게 ‘가’자를 붙인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좌절.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에 죄,
제2장에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에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절차 그리고 부칙 등 전문 32조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제1장 1조의 ‘죄’는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고 되어 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1월8일 제1호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화신백화점 4층 집무실에서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특위는 두번째로 해방후 자신 소유의 “대동신문”을 앞세워 반민법 제정 반대를 주장한 일본 헌병의 앞잡이 이종형을 구속하고,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과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 등을 지낸 이성근을 구속하는 등
온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특위 활동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10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했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를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

라면서 친일파 숙청을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힘입어 반민특위에 가장 적대적으로 나온 세력은

당시 친일세력의 온상이었던 경찰과 친일인사 원용덕이 사령관으로 있던 헌병사령부였다.

친일경찰과 헌병사령부는 친일파는 남이 아니라는 듯 반민특위에 쫓기는 친일경찰들이 헌병사령부로 찾아가면
원용덕은 이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경찰청 수도청 부청장 최연, 김제경찰서장 이성엽, 전북도경 사찰과장 이안순,
경주경찰서장 서영출 등 30여명의 친일경찰을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요원을 암살하려 하였다.

수배중이던 유명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등과 함께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사주해 김병로·권승렬·김상덕·김상돈 등을 암살하려다 백민태의 자수로 폭로되기도 하였다.

악질 친일경찰 최연과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반민특위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한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는 등

반민특위에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나 반민특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시대 1,000여건의 사상범을 검거한
평북 고등과 사찰주임 김덕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계속했다.

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나섰다.

반민특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49년 5월 제1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 등 4명이 구속되고,
이어 6월에는 제2차 국회 프락치사건이 발생해 특위 위원 노일환과 서용길 등 13명의 의원이 구속됐다.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국회 프락치사건은 국회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행정부의 이런 자세에 힘입은 경찰은 관제 군중을 동원해 특위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1949년 6월3일에는 관제 시위대가 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난입하려 했는데,

조사 결과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의 사주로 밝혀져 그를 구속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친일경찰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으니 안심하고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에 따라
경찰은 그해 중부서장 윤기병 등의 지휘로 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 시킨것이다.

친일경찰들의 특위 습격사건을 놓고 국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 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해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런 와중에 국회 프락치사건까지 겹치자 극도로 위축된 국회는 1950년 6월20일까지였던 반민법 공소시효를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김상덕 위원장 이하 전 위원은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잇따라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이미 특위는 무력화됐다.

그 뒤를 이어 평소 반민법에 반대해온 이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이 되었으나

그는 친일파 체포 대신 자수 기간을 설정해 형식적으로 친일파 숙청을 끝맺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 임무는 법원과 검찰로 이관되었다.

검찰과 법원은 실형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 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재심청구 등으로 풀려나 실제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한명도 없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鼠一匹)’도 아닌 ‘서무필’(鼠無匹)로 끝난 민족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육필 명단의 신현상은 나중에 특별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특별재판부나 검찰부가 선임되기 이전에 작성된 육필 명단이 거의 그대로 적중하고 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 문제에 관한 한 임정측 견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반민특위가 임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참고자료. ※

※ 정계. 관계. 실업계 인물. ※

이성환,이수우,윤치호,김연수,고원훈,신태악,조병상,여운홍,
인정식,박희도,이각종,김한경,김시권,박인덕,이정섭,김사연,
문명기,한상룡,정교원,차재정,이성근,박흥식,박춘금,안인식,
한규복,이종린,최린,최남선,박윤진,이돈화,장덕수,방응모,김석원,
김동원,가명 박정형, 가명 정방오, 김신석,손영목,고일청,차재명,
문덕상, 박상준,김오성 참고;김연수(인촌 김성수 동생),
여운홍(여운형 동생) 43명.

※ 언론계. 문학계. 연예계 인물. ※

김기진,박영희,정인택,이희적,이광수,주요한,김동환,김동인,
모윤숙,현영섭,백철,장혁주,이찬,김용제,최재서,이석훈,정인섭,
최승희(무용),오정민,김정의,박경조,김용환,이용설,홍해성,
유치진,김태진,박영호,이익,안석주,안종화,최인규,박기채,
방한준,서강백,홍양명,고승제,안함광,김억,이창수,이서구,
노천명,배상하,이영근,대조실신,송영,박순천 45명.

※ 교육계. ※

정남수(목사), 김활란(이대총장),장면(총리),허하백,
신흥우(목사),이헌구,이숙종,오긍선,양주삼(목사),유억겸,
유진오,송금선,황신덕,임국재,손정규,유각경,홍순원,고봉경,
김성수(동아일보사주).

19명 기타.
김정식,김선영,남기동,김용진,박영덕,이정수,
임영신(중앙대창설 초대 상공장관),노기환,김희영,
박휘언,이하영 11명.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조사활동 끝에 확정지었다는 친일파 99인의 명단이다.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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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작성한 친일파 명단(4776명)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


다음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29일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 인물 4776명(중복자 포함 5207명)의 명단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 밝히고 "이 명단을 무단으로 복사해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파할 경우 법에 저촉될 수 있다"며 네티즌들의 이해를 구했다.

❚분야별 대상자

을사오적 [5명]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정미칠적 [7명]
고영희 송병준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

경술국적 [9명]
고영희 민병석 박제순 윤덕영 이병무 이완용 이재면 조민희 조중응

수작(습작) [137명]
고영희 고중덕 고흥겸 고희경 권중현 권태환 김교신 김덕한 김병익 김사철 김석기 김성근 김세현 김영수 김영철 김정록 김종한 김춘희 김학진 김호규 남장희 남정철 민건식 민규현 민병삼 민병석 민상호 민영규 민영기 민영린 민영소 민영욱 민영휘 민종묵 민철훈 민충식 민형식 민형식 민홍기 박경원 박기양 박부양 박서양 박승원 박영효 박용대 박정서 박제빈 박제순 박찬범 성기운 성일용 성주경 송병준 송종헌 윤강로 윤덕영 윤웅렬 윤의섭 윤택영 이강식 이건하 이경우 이규원 이규환 이근명 이근상 이근택 이근호 이기용 이기원 이능세 이달용 이덕용 이동훈 이범팔 이병길 이병무 이병옥 이봉의 이영주 이완용 이완용 이완종 이용원 이용태 이원호 이윤용 이인용 이장훈 이재각 이재곤 이재극 이재완 이정로 이종승 이주영 이중환 이지용 이창수 이창훈 이충세 이택주 이풍한 이하영 이항구 이해국 이해승 이해창 이홍묵 이홍재 임낙호 임선재 임선준 장석주 장인원 정낙용 정두화 정주영 정천모 정한조 조대호 조동윤 조동희 조민희 조용호 조원흥 조중구 조중수 조중응 조중헌 조희연 최석민 최정원 한상기 한상억 한창수

중추원 [337명]
강경희 강동희 강번 강병옥 강이황 강필성 고영희 고원식 고원훈 고일청 고희경 구연수 구희서 권봉수 권중식 권중현 권태환 김갑순 김경진 김관현 김교성 김기수 김기태 김기홍 김낙헌 김돈희 김동준 김동훈 김두찬 김명규 김명수 김명준 김병규 김병욱 김병원 김사연 김상설 김상섭 김상형 김상회 김서규 김성규 김신석 김연상 김연수 김영무 김영배 김영진 김영택 김영한 김우영 김원근 김윤복 김윤정 김재환 김정석 김정태 김정호 김제하 김종흡 김준용 김진수 김창수 김창한 김춘희 김태석 김태집 김필희 김하섭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김현수 김화준 김희작 나수연 남궁영 남규희 남백우 노영환 노준영 노창안 문명기 문종구 민건식 민규식 민병덕 민병석 민상호 민영기 민영은 민영찬 민원식 민재기 민형식 박경석 박경양 박기동 박기석 박기순 박기양 박두영 박보양 박봉주 박봉진 박상준 박승봉 박영철 박영효 박용구 박의병 박이양 박제빈 박제환 박종렬 박중양 박지근 박철희 박필병 박해령 박흥규 박희양 박희옥 방의석 방인혁 방태영 백인기 상호 서병조 서병주 서상훈 서회보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성하국 손재하 손조봉 손창식 송문화 송병준 송종헌 송지헌 송헌빈 신석린 신석우 신우선 신응희 신창휴 신태유 신현구 신희련 심선택 심환진 안병길 안종철 양재창 양재홍 어담 어윤적 엄준원 엄태영 염중모 오세호 오재풍 오제영 오태환 원덕상 원병희 원응상 위기철 위정학 유기호 유만겸 유맹 유빈겸 유성준 유승흠 유익환 유정수 유진순 유태설 유혁로 유흥세 윤갑병 윤덕영 윤정현 윤치소 윤치오 윤치호 이갑용 이강원 이건춘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교식 이근상 이근수 이근우 이근택 이기승 이기찬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명구 이범익 이병길 이병렬 이병학 이봉로 이선호 이승구 이승우 이영찬 이완용 이원보 이윤용 이은우 이익화 이장우 이재곤 이재정 이종덕 이종섭 이준상 이지용 이진호 이충건 이택규 이택현 이하영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임선준 임창수 임창하 장대익 장상철 장석원 장석주 장용관 장윤식 장응상 장인원 장준영 장직상 장헌근 장헌식 전덕룡 전석영 전승수 정건유 정관조 정교원 정난교 정대현 정동식 정병조 정석모 정석용 정순현 정연기 정인흥 정재학 정진홍 정태균 정해붕 정호봉 조경하 조민희 조병건 조병상 조상옥 조성근 조영희 조원성 조재영 조중응 조진태 조희문 주영환 지희열 진학문 진희규 차남진 천장욱 최남선 최린 최상돈 최석하 최승렬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재엽 최정묵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최창호 최형직 피성호 하준석 한규복 한상룡 한상봉 한영원 한익교 한정석 한진창 한창동 한창수 허명훈 허진 현기봉 현은 현준호 현헌 홍성연 홍승목 홍우석 홍운표 홍재하 홍종국 홍종억 홍종철 홍치업 황종국

일본제국의회 의원(귀족원․중의원) [11명]
김명준 박상준 박영효 박중양 박춘금 송종헌 윤덕영 윤치호 이기용 이진호 한상룡

관료 [1,207명]
강경희 강계항 강규원 강근하 강대철 강명옥 강보형 강봉서 강상위 강성희 강세진 강신창 강원달 강원로 강원수 강익석 강인원 강준배 강진수 강창구 강창인 강창희 강태원 강태현 강필성 강홍대 경훈 계광순 계순 계용각 계용권 계응규 계찬겸 고관식 고긍명 고병권 고영준 고원식 고원훈 고윤수 고재열 고학진 고희승 고희준 공탁 곽인호 곽진 곽한탁 곽화태 구연복 구자경 구자록 구종명 국순옥 권갑중 권만주 권병선 권병필 권순구 권영석 권영세 권영택 권완주 권익채 권종원 권주상 권중만 권중명 권중수 권중식 권중익 권중형 권중환 권창섭 권태소 권태영 권태용 권태형 권한상 권혁병 권현섭 길원봉 김경배 김경배 김경태 김경희 김관현 김광일 김교명 김교철 김교필 김구연 김구현 김규년 김규목 김규승 김규호 김극일 김기득 김기선 김기영 김기준 김기홍 김기환 김대우 김덕기 김덕현 김도현 김돈희 김동곤 김동선 김동완 김동우 김동운 김동준 김동철 김동항 김동훈 김두천 김면수 김면필 김명련 김명연 김명찬 김백수 김병규 김병규 김병숙 김병엽 김병우 김병욱 김병제 김병직 김병태 김병필 김병호 김병호 김병희 김보현 김복규 김봉두 김봉식 김봉진 김봉진 김봉진 김상계 김상규 김상덕 김상봉 김상수 김상연 김상엽 김상윤 김상익 김상필 김상현 김상호 김서규 김석빈 김석영 김선재 김성두 김성윤 김성한 김성환 김성환 김수오 김수철 김순경 김순봉 김순조 김승운 김승원 김승표 김시권 김시명 김시욱 김신욱 김심영 김업 김연상 김연식 김연하 김염배 김영건 김영걸 김영국 김영근 김영기 김영기 김영년 김영도 김영두 김영묵 김영배 김영상 김영석 김영석 김영선 김영섭 김영섭 김영수 김영일 김영제 김영진 김영집 김영필 김영화 김영훈 김영훈 김예현 김오섭 김옥현 김완진 김용근 김용래 김용성 김용제 김우식 김우영 김우진 김우현 김원선 김원태 김원회 김윤성 김윤수 김윤옥 김윤정 김응준 김의영 김의용 김익삼 김장현 김재석 김재항 김재호 김재환 김정규 김정기 김정덕 김정배 김정제 김정태 김정현 김정희 김종석 김종섭 김종순 김종식 김종진 김종칠 김종화 김종휴 김주혁 김준보 김중삼 김진민 김진선 김진현 김진희 김찬오 김찬욱 김창균 김창두 김창수 김창수 김창영 김창욱 김창한 김창현 김처순 김천수 김철정 김철호 김태근 김태년 김태동 김태석 김태익 김태진 김태호 김택림 김학성 김학수 김학응 김한경 김한목 김한식 김한은 김현두 김형도 김형운 김형태 김홍규 김홍식 김홍채 김화준 김훈 김흥수 김희덕 김희선 김희준 나기정 나지강 나창섭 나호 남계룡 남궁영 남기윤 남기홍 남용희 남정구 남정학 남진우 남진우 남필우 남흥우 노봉익 노영빈 노일 노태식 독고위 마동규 마현희 맹건호 명인화 목원학 문동호 문명호 문무성 문병서 문작지 문정창 문창규 문태선 문태원 문태준 문학명 문혜관 민기호 민상현 민영오 민원식 민인호 민재호 박광렬 박규원 박근수 박기석 박기환 박낙승 박노태 박도순 박동익 박동호 박만수 박문웅 박민하 박봉구 박부양 박붕서 박상준 박선철 박성규 박성완 박성주 박승건 박승관 박승민 박승봉 박승수 박승원 박승장 박승준 박승호 박영근 박영근 박영빈 박영준 박영진 박영찬 박영철 박용관 박용구 박용득 박용섭 박용익 박용하 박용현 박우현 박윤동 박이순 박이순 박일경 박일헌 박재섭 박재수 박재홍 박정 박정규 박정수 박정순 박정욱 박제균 박제륜 박제승 박종만 박종선 박종순 박종식 박준성 박중양 박지양 박진영 박찬동 박철 박철희 박초양 박태병 박태순 박해령 박해주 박현모 박형균 박호근 박홍래 박희택 방규홍 방진태 방한복 방환악 배석린 배선만 배철세 백낙삼 백남일 백남준 백붕제 백원필 백정기 백철용 백흥기 변경삼 변기찬 변시붕 변영진 변영화 변정규 변종환 부완혁 부인식 상호 서극형 서기순 서병린 서병소 서병업 서병주 서병현 서상덕 서상면 서상준 서성극 서세갑 서승표 서윤석 서재덕 서재식 서정악 서회보 석명선 석봉희 석진형 선우렴 선우박 성낙영 성두식 성정수 성창기 소진우 소진은 소진하 손경수 손석도 손영기 손영목 손응린 손종권 손지현 손해진 손현수 송갑수 송문헌 송문화 송양호 송원섭 송원홍 송인섭 송주순 송주옥 송찬도 송태승 송택영 신광휴 신규선 신기덕 신병찬 신복근 신석린 신석하 신양선 신양재 신우선 신우영 신원배 신응희 신익균 신재영 신좌균 신창렬 신창섭 신창휴 신철균 신철균 신태건 신태무 신태빈 신태완 신태진 신택영 신현구 신현구 신현태 신현호 신희련 심규택 심노욱 심능익 심상국 심상준 심상희 심의승 심종석 심종순 심종협 심헌택 심환진 안국선 안기선 안배항 안병춘 안병헌 안성호 안승렬 안승복 안식 안영수 안용대 안용백 안윤옥 안정기 안종철 안창선 안창환 양관용 양봉제 양원탁 양익현 양재만 양재창 양재하 양재홍 양홍묵 어용선 어윤적 엄구현 엄민영 엄영택 엄주완 엄창섭 엄형섭 여구현 연관 염규환 오경린 오광은 오국영 오극선 오두환 오병문 오석룡 오석유 오세윤 오세흥 오수환 오영건 오영세 오영전 오유영 오재규 오재순 오종수 오찬갑 오치한 오태근 오태여 오태영 오태환 오해건 왕우순 왕종성 원대규 원은상 원응상 원의상 원정한 원진희 원훈상 위수봉 위종기 유경환 유광렬 유광준 유규정 유기덕 유기량 유기호 유대진 유만겸 유봉석 유봉환 유빈겸 유상범 유석기 유성렬 유성준 유승해 유승흠 유시태 유시환 유엽 유영준 유영호 유완종 유용진 유익렬 유인수 유진명 유진세 유진순 유진창 유진혁 유진호 유철희 유태영 유태훈 유혁로 유홍순 유홍종 유훈섭 윤갑병 윤건용 윤관 윤관일 윤길중 윤남철 윤덕명 윤명수 윤명은 윤범행 윤병희 윤사혁 윤상구 윤상학 윤상희 윤석중 윤석필 윤석호 윤성희 윤수병 윤승로 윤응규 윤자록 윤종완 윤종화 윤창현 윤태림 윤태빈 윤필 윤필구 윤필오 윤하영 윤헌구 윤형남 윤희성 윤희재 은치황 이경선 이경식 이경준 이계록 이계석 이계한 이계호 이공후 이관구 이관희 이규룡 이규완 이규진 이규한 이규홍 이근무 이근수 이근양 이근직 이기 이기명 이기방 이기백 이기상 이기원 이기원 이기주 이대용 이덕상 이덕응 이돈영 이동관 이동우 이동진 이동한 이동혁 이두황 이만식 이만용 이맹성 이면익 이명원 이명헌 이명환 이무성 이문하 이민구 이민영 이민하 이방협 이범관 이범기 이범래 이범소 이범승 이범익 이병년 이병렬 이병렬 이병민 이병석 이병숙 이병식 이병식 이병재 이병천 이병휘 이보상 이복영 이봉구 이봉종 이봉화 이사묵 이사필 이상균 이상만 이상철 이석구 이석기 이석희 이선호 이선호 이성근 이성호 이세영 이소영 이승구 이승근 이승조 이승채 이승칠 이승한 이심훈 이연회 이영식 이영준 이영태 이영택 이영화 이완직 이용수 이용수 이용학 이용한 이용휘 이용희 이우경 이우범 이운붕 이원구 이원국 이원규 이원보 이원영 이원찬 이원창 이원호 이유관 이유석 이윤세 이윤실 이윤영 이윤영 이은즙 이응원 이의풍 이인규 이인수 이인용 이인화 이일 이장우 이장희 이재성 이재신 이재탁 이재학 이재화 이정기 이종국 이종극 이종기 이종소 이종수 이종원 이종원 이종은 이종준 이종태 이종택 이종환 이준식 이준호 이준호 이준홍 이중현 이진호 이찬 이찬영 이찬용 이찬욱 이창규 이창근 이창룡 이창욱 이채욱 이탁응 이태근 이태용 이택규 이택수 이택준 이필국 이필동 이학귀 이학규 이한성 이한일 이한창 이항녕 이해용 이해익 이현재 이호승 이홍운 이화원 이훈영 이흥배 이흥우 이흥재 이희순 인태식 임관호 임대규 임동훈 임명순 임문석 임문환 임병억 임시재 임연상 임영준 임용준 임원용 임응목 임준희 임진섭 임창규 임창재 임철호 임춘성 임충재 임한덕 임헌영 임헌평 임홍순 임홍재 임흥재 장기창 장도건 장문화 장석원 장성화 장수길 장순응 장연철 장영두 장영한 장용환 장윤규 장윤식 장일정 장진석 장헌근 장헌식 장현태 장훈 장휴 전관연 전규락 전기대 전덕룡 전봉빈 전봉엽 전봉훈 전석영 전성오 전성진 전예용 전임봉 전재억 전재우 전종순 전지용 전창림 전창섭 전치덕 전태흥 전택수 전하식 전형순 전흥문 정경모 정계열 정교원 정국채 정규봉 정규원 정기창 정낙훈 정난교 정동일 정민조 정민조 정병기 정병현 정복 정수철 정순방 정연기 정용기 정용신 정용한 정우용 정운구 정운성 정원모 정응록 정인소 정인위 정인택 정일채 정자현 정재남 정재상 정재성 정종연 정종진 정직모 정진기 정진동 정찬선 정천모 정천종 정충원 정하형 정해용 정해운 정해인 정호기 정홍섭 정희찬 조경하 조경호 조구현 조긍현 조기행 조동민 조동선 조동순 조두석 조두환 조문제 조병계 조병교 조병연 조병우 조병우 조병칠 조상만 조성구 조영찬 조재풍 조정두 조정환 조제균 조종춘 조종현 조주현 조중관 조춘원 조충현 조풍호 조한욱 조한철 조희갑 조희련 조희문 주공건 주석균 주시헌 주영린 주영설 주영환 주영환 주우 주재영 주종덕 주진덕 진염종 차남하 차상열 차석민 차윤홍 차종호 차화선 채규항 채린 채선일 채수강 채수현 천장욱 최경식 최경진 최기영 최기집 최남교 최덕 최동근 최두연 최두영 최만달 최문경 최병상 최병원 최병철 최병혁 최병협 최봉기 최상봉 최상진 최상태 최석현 최승칠 최양호 최연식 최용덕 최운상 최원순 최원식 최응두 최익하 최인용 최일봉 최재익 최재호 최정덕 최주영 최준석 최중옥 최지환 최진한 최창한 최창홍 최탁 최태봉 최태현 최하영 최학래 최학수 최항묵 최형직 최홍섭 최화석 하국원 하준환 하태서 한경렬 한교 한교서 한국부 한규복 한동석 한복 한봉섭 한상용 한상헌 한석명 한승린 한영렬 한욱 한인근 한재경 한종건 한진범 한창수 한철우 한홍석 한희석 한희석 한희항 함기섭 함덕중 허강 허섭 현두영 현석호 현순관 현의섭 현장호 현정 홍난유 홍석현 홍성욱 홍순용 홍순욱 홍순일 홍승균 홍승표 홍승훈 홍영선 홍우도 홍우숭 홍운표 홍윤남 홍은식 홍응관 홍의식 홍일룡 홍재설 홍종국 홍종만 홍종무 홍종욱 홍종한 홍종희 홍창섭 홍필선 홍하규 홍한표 홍헌표 황남시 황덕순 황동준 황명수 황문연 황병희 황석교 황영수 황우찬 황운성 황윤동 황의박 황익연 황진성 황탁린 황한용 황항근 황희민

경찰 [880명]
강경희 강낙중 강난희 강남기 강노영 강덕호 강만표 강면욱 강보형 강봉서 강사영 강상혁 강영춘 강용건 강원생 강이황 강익엽 강인수 강인우 강재근 강정선 강진풍 강찬빈 강쾌열 강태규 강태만 강헌 강호순 계광순 계난수 고규윤 고원훈 고윤상 고정준 고제선 고창덕 고피득 곽두금 곽병호 곽을룡 구강 구연수 구연춘 구자경 권만진 권부용 권영대 권영중 권오용 권위상 권익채 권준상 권중익 권중철 권태형 권형철 금낙순 길병성 길소진 길옥열 길용일 김경구 김경배 김경업 김경용 김경태 김계현 김광호 김구배 김구열 김귀동 김규영 김규현 김극일 김근식 김기수 김기조 김기태 김난석 김대원 김덕기 김덕순 김덕양 김덕홍 김도식 김도원 김동선 김동설 김동숙 김동욱 김동진 김득률 김만근 김맹철 김면규 김명찬 김명환 김문용 김병렬 김병연 김병욱 김병주 김병철 김복길 김복의 김봉규 김봉문 김봉수 김봉인 김봉적 김봉준 김봉호 김봉희 김사연 김삼익 김상규 김상섭 김상순 김상욱 김상윤 김석기 김석기 김석칠 김석택 김석호 김성균 김성대 김성범 김성부 김성수 김성철 김세륜 김세보 김소복 김소직 김수만 김수일 김순 김순희 김승연 김승연 김승종 김승찬 김시욱 김양성 김억조 김영걸 김영규 김영동 김영배 김영상 김영석 김영선 김영세 김영수 김영순 김영식 김영주 김영진 김영하 김영호 김옥현 김요현 김용벽 김용선 김용완 김용우 김용제 김용헌 김용희 김우종 김운섭 김원조 김유하 김윤만 김윤복 김윤집 김윤철 김은제 김을도 김응권 김의수 김익권 김인봉 김인영 김인옥 김장환 김재덕 김재성 김재영 김재환 김정만 김정욱 김정탁 김정태 김정택 김정혁 김제병 김제성 김제현 김종가 김종관 김종구 김종두 김종석 김종원 김종주 김종진 김종현 김종환 김주환 김준권 김준홍 김중식 김중호 김증옥 김지연 김진봉 김진영 김진탁 김차봉 김찬욱 김창수 김창영 김창완 김창욱 김천리 김철수 김태석 김태형 김태희 김택근 김택원 김판동 김필수 김학규 김학석 김항곤 김해룡 김해일 김혁태 김현욱 김현철 김형권 김형수 김형순 김형조 김형진 김호우 김홍걸 김홍국 김홍식 김흥률 김희택 나구하 나규렴 나진용 남기윤 남기훈 남승희 남학봉 남효근 노기주 노덕술 노인국 노정근 노정순 노주봉 도광환 도세호 도헌 마동휘 마현희 맹해성 문경필 문관현 문대길 문성옥 문시창 문원보 문진상 문천목 문치재 문태영 박경진 박계봉 박광희 박권수 박귀환 박근수 박기남 박남주 박남진 박내창 박내춘 박달중 박덕용 박명석 박문기 박범룡 박병규 박병조 박병화 박보라 박사룡 박상용 박순상 박승관 박승수 박영근 박영수 박영우 박영화 박영환 박영환 박영환 박영희 박용 박용갑 박용암 박우빈 박운구 박원도 박윤성 박윤철 박을수 박응줄 박의창 박인종 박인훈 박장환 박재수 박재원 박정길 박정로 박정로 박정순 박제도 박제훈 박종숙 박종호 박준호 박진영 박진춘 박진하 박진항 박진호 박차숙 박찬구 박태선 박태언 박학로 박학진 박형로 박호양 박희정 방인형 방효선 배경훈 배귀암 배도준 배만수 배병모 배석린 배영원 배용표 배정자 백능수 백명갑 백성수 백영권 백원교 백의용 변성규 변영화 변종철 변훈 서기순 서기영 서상영 서상용 서소봉 서승렬 서육권 서재욱 서재익 서정국 서정국 서정진 서태하 선우갑 선우박 선우형 성낙영 성봉규 성은주 성정수 소진은 손경수 손석도 손양한 손영남 손해진 송남섭 송덕수 송병주 송병헌 송세태 송수용 송시경 송영호 송인석 송종태 송주호 송희철 신두영 신두현 신면동 신상호 신수일 신양재 신우균 신정식 신종섭 신철갑 신태균 신태현 신태희 신형수 신흥만 심능유 심두근 심상우 심재억 심형택 안경선 안병록 안수병 안승복 안정국 안정옥 안종렬 안종철 안창준 안형식 안흥준 양금룡 양성순 양익현 양재덕 양재홍 양주한 양형건 어봉룡 어윤호 엄명섭 엄의섭 엄주면 여경엽 여동춘 여태현 연성희 연태윤 염은준 오경팔 오기선 오도련 오동주 오동환 오봉수 오석근 오석유 오세기 오세영 오세윤 오수만 오연태 오영근 오영세 오용근 오이석 오준영 오치한 오태여 오학영 왕인식 왕희필 원세호 위금봉 위종기 유경시 유금열 유금용 유기룡 유남선 유만종 유명렬 유배한 유복문 유부룡 유석화 유성삼 유승운 유인근 유재춘 유정식 유진문 유진후 유창렬 유치억 유치엽 육무철 윤경로 윤만중 윤병희 윤상일 윤수현 윤시영 윤용대 윤용원 윤작로 윤정봉 윤정선 윤정희 윤종화 윤찬수 윤태남 윤학기 윤학행 윤학현 윤화규 윤훈모 은성학 은한섭 이경재 이경회 이계한 이교승 이구범 이국섭 이군돌 이규채 이규한 이근섭 이기영 이기현 이난수 이능섭 이덕근 이동섭 이동재 이두환 이면근 이면식 이명흠 이무갑 이민권 이민택 이민행 이민호 이배훈 이백규 이병면 이병식 이병호 이보운 이봉래 이봉선 이봉인 이봉재 이사은 이상배 이상섭 이상윤 이상춘 이성근 이성도 이성실 이성옥 이수달 이수협 이순만 이순재 이신규 이영관 이영근 이영근 이영우 이영춘 이완두 이용만 이용승 이용천 이원극 이원보 이원용 이원우 이원찬 이유하 이윤종 이은섭 이을룡 이응양 이응진 이인근 이인식 이인주 이재붕 이정근 이정남 이정술 이정용 이종국 이종만 이종무 이종수 이종식 이종한 이주완 이중수 이중화 이지균 이지춘 이진상 이진하 이찬익 이창배 이창순 이창우 이채순 이천주 이철봉 이춘근 이태순 이태훈 이택 이하주 이한구 이한선 이헌규 이현수 이현우 이홍순 이흥세 이흥식 이희영 임권택 임만선 임병식 임응기 임인식 임일성 임학용 임헌영 임형순 임호영 임흥재 장강선 장계택 장기석 장덕영 장두만 장성근 장성동 장세권 장우상 장우식 장준근 장춘갑 장헌근 장혜순 전규태 전기완 전남수 전문순 전병록 전봉덕 전봉설 전세엽 전영찬 전용환 전익서 전재우 전정윤 전진원 전창림 정관모 정규봉 정규혁 정기영 정기창 정낙서 정낙영 정낙주 정뇌호 정두형 정병규 정봉기 정석우 정성식 정세호 정쌍동 정연주 정우현 정운복 정운필 정이숙 정인영 정인하 정인회 정일룡 정재현 정정석 정정옥 정제봉 정준모 정준택 정진환 정창근 정충원 정치훈 정태휴 정태흥 정필화 정한영 정해인 정환선 정희영 조갈범 조갑이 조관빈 조규림 조기찬 조남재 조동흥 조성구 조연광 조익로 조익제 조익호 조인옥 조점제 조정관 조종춘 조종훈 조진원 조진호 조찬현 조창현 조천동 조태환 조희창 주익상 주찬오 주홍섭 지약영 진대성 진순길 진용섭 진형우 차대환 차원준 차정준 차창순 채규병 채규철 채규한 천경식 천규문 최경진 최관선 최규진 최금남 최기남 최기성 최동규 최동섭 최동수 최동주 최동직 최두천 최백순 최병두 최병식 최봉달 최봉오 최상덕 최상룡 최상욱 최석현 최성수 최순정 최승준 최여옥 최연 최연식 최영근 최영우 최용학 최원균 최원복 최응두 최인범 최재석 최제현 최주영 최준성 최지순 최지환 최진태 최창렬 최창학 최창한 최창홍 최치림 최탁 최태경 최태선 최태현 최한석 최형준 최흥선 표한용 하선진 하판락 한달원 한동석 한동희 한두형 한석명 한성구 한영기 한용 한용수 한인순 한 장현 한정석 한종건 한종수 한태헌 한호석 함병헌 함양수 함희창 허규원 허기엽 허섭 허현 허효연 현기언 현석준 현시달 현응팔 홍낙구 홍명후 홍병식 홍상옥 홍석창 홍성섭 홍성준 홍순관 홍순근 홍순봉 홍영언 홍재일 홍정길 홍종익 홍형표 황경준 황봉진 황산봉 황신태 황영철 황용석 황윤수 황인환 황재락 황치수 황태근 황헌성

군 [387명]
강기태 강동렬 강병일 강석호 강영태 강재순 강재호 강창선 강태민 강필룡 강필우 강혁신 강흥약 계병로 계인수(계인주) 고경수 고기범 고병억 고영균 고준봉 고준열 구동욱 구학서 권승록 권영한 권인채 권정식 권태한 권희수 김경천 김광언 김교선 김기백 김기원 김기주 김기호 김대식 김동하 김명덕 김묵 김민규 김백일(김찬규) 김복연 김부갑 김사석 김석람 김석범 김석원 김석원 김성규 김성운 김성훈 김송 김송산 김순길 김순선 김신도 김안도 김약선 김영 김영각 김영록 김영수 김영신 김영철 김영택 김영한 김옥기 김용국 김용기 김용헌 김용호 김원기 김응남 김응선 김응조 김인성 김인욱 김인욱 김일운 김일환 김임석 김재명 김재풍 김정렬 김정일 김정호 김정희 김종석 김종식 김주찬 김준원 김중규 김진길 김진무 김진창 김창규 김창룡 김천흥 김철남 김청송 김최길 김충남 김치반(김치학) 김태원 김학원 김해도 김현묵 김형섭 김호량 김홍준 김희선 김희초 나흥순 남우현 남희철 노태순 도일평 마동악 문용채 문이정 민덕호 박동균 박동준 박동춘 박두영 박문병 박범집 박병두 박봉조 박성도 박승훈 박영철 박영철 박요섭 박원석 박임항 박재흥 박정희 박준호 박창하 박춘식 박태희 박풍조 방득관 방문수 방영주 방원철 방인섭 방태욱 백겸 백경춘 백문린 백선엽 백세걸 백인섭 백인준 백창기 백홍석 서영철 서일보 서정필 석석봉 석주암 석희봉 선우갑 손병일 송석구 송석하 송오송 송진탁 신봉균 신상묵 신상철 신우균 신응균 신태영 신학진 신현준 심의진 안광수 안병범(안종인) 안영길 안영치 안옥기 안익조 안홍도 양국진 양대진 양진동 어담 엄주명 염창섭 오규범 오명복 오문강 오세훈 오준걸 오진영 왕유식 우종현 원용국 원용덕 유경식 유관희 유광렬 유기성 유병권 유승렬 유영림 유원식 유원효 유재흥 윤국상 윤덕병 윤상필 윤송남 윤수현 윤춘근 윤태일 이각 이강우 이광원 이국권 이규일 이근묵 이기건 이기영 이대영 이덕순 이덕진 이동암 이동준 이동훈 이두만 이명세 이명신 이문악 이병건 이병교 이병권 이병규 이병주 이봉수(이원길) 이봉춘 이상렬 이상묵 이상진 이선풍 이성림 이송승 이순 이승녕 이승칠 이영걸 이영산 이영춘 이용문 이용성 이용원 이용호 이용호 이원춘 이원형 이응구 이응준 이의풍 이일신 이재기 이제규 이제정 이종성 이종찬 이주일 이준(이준옥) 이준섭 이집룡(이룡) 이천택 이청갑 이춘성 이춘원 이학래 이학문 이한림 이해봉 이형근 이형석 이호연 이호진 이흥국 이흥권 이희겸 이희두 이희태 임달수 임병규 임병두 임재춘 임충식 장기섭 장기승 장기춘 장기형 장석윤 장성환 장수암 장연용 장연창 장영석 장유근 장택민 장효봉 전길룡 전남규 전영헌 전원상 정래혁 정상수 정세진 정운홍 정은용 정일권 정일평 정해붕 정현 정훈 조경성 조대호 조동윤 조명륜 조병권 조성근 조성엽 조영원 조용구 주선갑 주영걸 주재준 지인태 지장화 지진국 지치룡 차만재 차명환 채낙순 채병덕 채청송 최경만 최구룡 최귀창 최기청 최남근 최명하 최병혁 최복수 최세창 최수부 최승업 최우석 최재범 최재범 최재항 최정근 최주종 최진창 최창륜 최창식 최창언 최철근 최충의(최충희) 최학진 태용범 한광두 한기걸 한문권 한왕룡 한용현 한천봉 허수병 허영록 홍무 홍문과 홍사익 홍청파 황검추 황대천 황치삼

사법 [228명]
강동진 강병준 강신규 강영철 강완선 강중인 강철모 계명수 계창업 계철순 고운하 고재호 구자관 권중근 권태전 김갑수 김광근 김기정 김기조 김낙헌 김달호 김대경 김동현 김두일 김명수 김선득 김선태 김세완 김시두 김영렬 김영린 김영재 김영환 김용식 김용찬 김우열 김우영 김윤근 김윤수 김응모 김응식 김응준 김의균 김일룡 김장섭 김장호 김재완 김점석 김정배 김종석 김종호 김준평 김창모 김태영 김형근 김홍언 나재승 나진 나항윤 남정숙 노상구 노용호 노재승 노흥현 문석규 문승모 민경준 민병성 민병창 민복기 민부훈 민영수 박기준 박만서 박성대 박승유 박승준 박유병 박종근 박종훈 박준성 박지영 박춘서 박태병 방순원 방준경 백윤화 백한성 변기엽 변옥주 변재성 사경욱 사광욱 서광설 서기홍 서정국 석용환 석종구 소진섭 손동욱 손홍팔 송문현 송인태 송화식 신석정 신우영 신재영 심노욱 심동구 심상직 심원명 양원용 양정수 양태원 양판수 양홍기 엄보익 엄상섭 엄식 염세열 오건일 오성덕 오숭은 오승근 오완수 오용묵 오태경 원병희 원종억 유갑수 유동작 유성희 유영 유진영 유태설 유헌열 윤동식 윤성보 윤용섭 윤철균 윤학영 윤헌구 이근상 이근창 이기찬 이만준 이명섭 이병용 이상각 이상기 이선경 이수현 이용의 이우식 이우정 이원국 이원배 이의형 이정준 이정혁 이천상 이충영 이태희 이필은 이학천 이한린 이호 이호정 이홍종 이화종 이희목 이희적 임석규 임석무 임영찬 임한경 장경근 장기상 장두식 장후영 전병식 전영택 정규철 정낙헌 정문모 정봉춘 정섭조 정순석 정유섭 정윤환 정재환 정준모 정창운 조사달 조예석 조용순 조원규 조인환 조재천 조진만 조태로 조평재 지영구 진태구 진형하 차균경 채규명 채용묵 최대교 최병주 최윤모 최정묵 최종석 최창렬 최창조 탁창하 한규용 한복 한봉세 한상범 한용 함성욱 허진 형덕기 홍순용 홍승근 홍인석 홍진기

친일단체 [484명]
강근도 강병순 강병주 강성구 강영균 강영희 강용희 강이황 강인우 강일성 강홍범 고덕환 고용덕 고용종 고응민 고청룡 고황경 고희준 구연수 구창조 국기연 궁사청 궁하일 권병수 권우섭 권중기 권태동 길태홍 김갑명 김경식 김경호 김광엽 김광현 김구순 김권형 김규대 김규창 김기수 김기주 김기찬 김덕선 김동일 김동진 김동현 김두명 김두정 김두천 김명준 김명진 김명집 김몽필 김병걸 김병규 김병순 김병익 김복수 김봉기 김사연 김사영 김상익 김석연 김석진 김석태 김선술 김선재 김성렬 김세장 김세진 김시현 김신석 김연상 김연식 김영걸 김영구 김영설 김영우 김영준 김영희 김예현 김용진 김윤덕 김윤혁 김응구 김인창 김인하 김일수 김재곤 김재룡 김재순 김재익 김재홍 김재환 김정국 김정규 김정민 김정호 김제홍 김종완 김종헌 김준모 김준섭 김지련 김진태 김진하 김창도 김태섭 김태익 김태헌 김태형 김태훈 김택용 김택현 김한경 김한기 김해룡 김형태 김호중 김홍건 김환 김환성 김효순 김효진 남정관 노성석 노신근 노영근 노응린 노정규 동운경 문명기 문의홍 문익주 민영은 민원식 민재기 민정식 민태직 박계일 박구학 박규양 박규장 박규철 박병기 박병철 박봉윤 박선철 박성택 박순천 박승직 박영길 박영래 박영준 박영철 박우용 박은양 박주율 박준영 박지양 박창서 박창훈 박필원 박해묵 박혁준 박형채 박호병 박희도 방낙선 방운갑 방의석 배동운 배상하 백기수 백낙원 백동수 백윤호 백형수 변기택 사현필 서병은 서병조 서상건 서상환 서은상 서창보 서채 석문용 선우순 성원경 성준 소완규 손서헌 손영목 손응국 손재근 손치은 손홍원 송계원 송규환 송병천 송완섭 송은용 송재철 송종대 신국원 신동원 신동훈 신두현 신문언 신병휴 신석린 신승균 신영석 신영오 신의학 신재정 신태악 신태항 신효범 심도풍 심상직 심원섭 심의혁 안근모 안방렬 안순환 안익수 안인식 안종국 안준 안중수 안태영 양성식 양재익 양정묵 양주익 양지환 엄주명 엄주익 엄준원 여계보 염중모 염창순 예종석 오경식 오긍선 오기영 오두환 오성룡 오역선 오왕근 오응선 오필영 원덕상 원세기 원수남 원응태 유길수 유두환 유문경 유병문 유병의 유봉기 유봉주 유봉현 유상화 유석우 유영렬 유재한 유전 유제구 유지훈 유창만 유학주 유홍종 윤갑병 윤경순 윤귀영 윤규식 윤달수 윤대섭 윤대식 윤명진 윤범식 윤봉의 윤상우 윤상익 윤시병 윤익선 윤정식 윤창업 윤춘혁 윤치형 윤치호 이각종 이겸로 이겸제 이경렬 이경로 이경하 이규학 이규화 이근우 이기승 이기찬 이동락 이동영 이동우 이동초 이동혁 이두수 이문표 이민관 이방 이범승 이범찬 이범철 이병림 이병립 이병연 이병의 이보현 이석규 이석신 이석희 이선학 이선협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승운 이승한 이승현 이승호 이영근 이용구 이용문 이용한 이우현 이원규 이원보 이익성 이인수 이인흡 이정봉 이정욱 이종만 이종용 이종춘 이준용 이중현 이찬모 이찬요 이창선 이창엽 이창환 이치로 이태윤 이필규 이학재 이항발 이행민 이현우 이희덕 이희두 이희섭 임병익 임봉석 임용상 장동환 장두현 장순창 장진원 장헌식 장홍식 전만영 전부일 전성욱 전영배 전영조 전위현 전창근 전태현 정경수 정계형 정교원 정규원 정규환 정대현 정도영 정병조 정석모 정세진 정연상 정용태 정원섭 정인순 정환종 조대묵 조덕하 조병렬 조병상 조선하 조성근 조승환 조용률 조인성 조진우 조흥원 주련 주병섭 주성근 주학현 지봉서 차재정 차준담 차화준 천영기 최건호 최기남 최동섭 최두환 최병창 최상익 최수길 최양호 최영구 최영년 최영욱 최운섭 최원교 최정규 최정덕 최정묵 최주현 최준집 최진현 최창학 최창호 최홍섭 탁태윤 편상영 하준석 한경원 한교연 한국림 한국현 한규복 한기방 한남규 한보순 한상건 한영호 한욱 한재익 한정규 한창회 한태섭 한화석 함창현 허균 허현 현영섭 현장호 현준호 홍규표 홍긍섭 홍남표 홍사훈 홍승균 홍승원 홍윤조 홍인순 홍종덕 홍종면 홍준 홍충현 황규현 황대원 황명중 황석건 황정헌 황종국 황종우 황철수

개신교 [58명]
갈홍기 강도원 고한규 곽진근 구연직 구자옥 김관식 김길창 김수철 김영섭 김우현 김응순 김응태 김인영 김종대 김진수 김형숙 김활란 남천우 박마리아 박연서 박현명 변홍규 송창근 신후식 신흥우 심명섭 양주삼 오문환 유각경 유일선 유재기 유형기 윤치소 윤치영 윤치호 윤하영 이동욱 이명직 이문주 이용설 임학수 장기형 장운경 장홍범 전필순 정상인 정순모 정인과 정춘수 조승제 채필근 최지화 최활란 한석원 홍병선 홍택기 황종률

가톨릭 [7명]
김명제 김윤근 남상철 노기남 신인식 오기선 장면

불교 [54명]
강대련 강성인 곽기종 곽법경 권상로 김경림 김경주 김동화 김법룡 김삼도 김영수 김영호 김용곡 김재홍 김정섭 김정해 김지순 김진월 김청암 김탄월 김태흡 김한송 박대륜 박도수 박병운 박영희 박원찬 박윤진 박찬범 변설호 손계조 신윤영 신태호 유재환 윤상범 이덕진 이동석 이명교 이보담 이석두 이종욱 이태준 이혼성 이회광 임석진 장도환 정병헌 정창윤 정충의 차상명 최취허 허영호 홍태욱 황벽응

 


천도교 [30명]
김동수 김명호 김명희 김병제 김종현 남증석 박석홍 박완 백중빈 손광화 손재기 신용구 오상준 이군오 이근섭 이단 이돈화 이우영 이인숙 이종린 이종식 임문호 전의찬 정광조 조기간 최단봉 최린 최안국 최준모 하상태

유림 [53명]
공성학 권순구 김광현 김동진 김완진 김유제 김정회 김황진 나일봉 남상익 박기양 박상준 박승동 박장홍 박제봉 박제빈 박제순 박치상 서재극 성낙현 송시헌 신현구 심형진 안인식 여규형 오헌영 위대원 유만겸 유정수 유진찬 윤병호 윤희구 이경식 이대영 이명세 이상호 이선호 이인직 이학노 이학재 정만조 정문현 정봉시 정봉현 정순현 정윤수 정준민 정철영 주병건 최달빈 한준석 한창우 황돈수

문학 [41명]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안서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박팔양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룡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음악․무용 [43명]
강영철 계정식 고종익 김관 김기수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김영길 김원복 김재훈 김준영 김천애 김해송 남인수 박경호 박시춘 반야월 백년설 서영덕 손목인 안익태 이규남 이면상 이봉룡 이인범 이재호 이종태 이철 이흥렬 임동혁 장세정 전기현 조두남 조명암 조택원 최승희 최팔근 최희남 한상기 함화진 현제명 홍난파

미술 [26명]
구본웅 김경승 김기창 김만형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찬 노수현 박영선 박원수 배운성 손응성 송정훈 심형구 윤효중 이건영 이국전 이봉상 이상범 임응구 장우성 정종여 정현웅 지성렬 현재덕

연극․영화 [64명]
김건 김관수 김성춘 김소영 김승구 김신재 김영화 김일해 김정혁 김태진 김학성 김한 나웅 남승민 독은기 문예봉 박기채 박영신 박영호 박춘명 박향민 방한준 복혜숙 서광제 서월영 서일성 서항석 송영 신경균 신고송 신정언 심영 안석영 안영일 안종화 양세웅 오정민 유장안 유치진 이광래 이금룡 이명우 이백산 이병일 이서구 이서향 이익 이재명 이창용 임선규 전창근 조천석 주영섭 최순흥 최승일 최운봉 최인규 한노단 한형모 함대훈 함세덕 허영 홍찬 황철

교육․학술 [62명]
강영석 고광만 고승제 고원섭 고황경 구찬서 김도태 김두헌 김명식 김상용 김성수 김창균 김한경 김활란 박관수 박마리아 박순천 박영빈 박용구 박인덕 배상명 백낙준 서은숙 손정규 송금선 신봉조 신석호 양봉화 어윤적 여운홍 오긍선 유억겸 유진오 윤영구 이능화 이묘묵 이병도 이병소 이숙종 이완룡 이헌구 인정식 임숙재 장덕수 장응진 정구충 정만조 조기홍 조동식 조재호 조한직 주운성 차사백 최남선 최동 허하백 현상윤 현채 현헌 홍승원 홍희 황신덕

언론․출판 [44명]
김동진 김상회 김선흠 김인이 김형원 김환 노성석 노익형 노창성 민원식 박남규 박석윤 박희도 방응모 방태영 변일 서강백 서춘 선우일 송순기 신광희 심우섭 양재하 유광렬 이긍종 이기세 이상협 이원영 이윤종 이익상 이인섭 이정섭 이창수 이혜구 장지연 정우택 정인익 최영년 최영주 함상훈 홍승구 홍양명 홍종인 황의필

경제 [55명]
강번 강창희 고한승 김건영 김기옥 김동원 김두하 김성호 김순흥 김신석 김연수 김영기 김영준 김일남 김정호 김한규 김형옥 김흥배 맹영옥 목욱상 문명기 민규식 민대식 민병도 박기효 박승억 박승직 박흥식 방규환 방응모 방의석 백낙승 백남신 백완혁 손창윤 신용욱 예종석 유명한 유재륜 이종만 장직상 장홍식 정명선 정재학 정치국 조병학 조진태 주성근 차남진 차준담 최승렬 최창학 한기방 현준호 홍충현

지역유력자 [69명]
강위수 강창희 권연수 김갑순 김건영 김기옥 김기홍 김동덕 김동원 김두하 김명학 김민식 김병규 김상홍 김성재 김억근 김용우 김인오 김종섭 김주한 김치구 김태훈 김한수 김홍량 김희준 목순구 문원태 문재철 박기돈 박기용 박성행 박주병 박한표 배영춘 소진문 손홍준 송병문 양성관 엄달환 엄정환 원윤수 유훈영 이강혁 이봉구 이상옥 이석구 이용석 이정재 이종준 이종필 임종상 임호상 임흥순 장기식 장지필 정명희 정상진 정태범 정태석 조규철 조병학 지정선 지창선 최주성 최해필 한만희 한원준 한인수 현용건

중국_만주 [798명]
강경해 강국진 강기홍 강동춘 강만수 강만순 강면홍 강무석 강병철 강사용 강세권 강수범 강신채 강신향 강옥림 강용준 강원명 강전열 강태구 강태권 강태범 강태섭(강태변) 강필선 강항윤 강해원 강현묵 강흥렬 계구환 계난수 고동호 고수봉 고재필 고태연 공한석 구선일 권성근 권송극 권영천 권용활 권재권 권치안 권태술 권혁주(권일) 권희수 금창수 길익선 길창실 김각부 김경로 김경률 김경심 김경재 김경춘 김경하 김경호 김경환 김계룡 김관천 김광근 김국용 김국한 김권호 김극인 김근석 김금준 김기룡 김길룡(김기룡) 김길순 김길준 김길현 김남길 김남룡 김남수 김남익 김덕수 김덕창 김도명 김도일 김동규 김동근 김동렬 김동만 김동순 김동식 김동학 김동한 김동호 김동호 김동호 김동화 김동황 김동훈 김두익 김두찬 김두현 김득연 김득황 김만옥 김만용 김만종 김명여 김명완 김명한(김명찬) 김문극 김문홍 김민건 김백록 김백률 김범주 김병권 김병권 김병섭 김병억 김병욱 김병태 김병호 김봉남 김봉렬 김봉장(김봉위) 김봉진 김산천 김삼룡 김삼수 김상권 김상렬 김상선 김상영 김상학 김석준 김석준 김석진 김선풍 김성기 김성남 김성만 김성준 김성진 김성환 김송렬 김수열 김수영 김순구 김순남 김승식 김시영 김억록 김여백 김여화 김연수 김연찬 김열 김영규 김영석 김영수 김영익 김영재 김영주 김영철 김영춘 김영한 김완묵 김용국 김용순 김용익 김용주 김용찬 김용하 김용호 김용환 김우근 김우식 김우영 김우평 김운생 김웅각 김유영 김윤언 김은성 김응두 김응호 김응환 김이규 김인갑 김인배 김인수 김일규 김일병 김일송 김임수 김장섭 김장지 김재곤 김재용 김재필 김정 김정기 김정섭 김정하 김조 김종수 김종수 김주익 김준형 김중식 김중형 김진규 김진길 김진만 김진성 김창룡 김창범 김창보 김창영 김창학 김천을 김철림 김청송 김춘학 김태경 김태복 김태옥 김태욱 김태호 김택영 김파 김하성 김하영 김학성 김학수 김행룡 김헌운 김혁종 김현수 김현식 김형년 김형준 김혜해 김호준 김홍락 김화성 김화준 김흥두 나만봉 남명수 남박 남성규 남성만 남승범 남일남 남일록 남해원 노기연 노동훈 노영득 독고욱 독고환 마등철 마용하 마창권 문관오 문국빈 문용만 문일현 문종수 문태선 문혁남 민병찬 박광석 박근수 박근영 박기홍 박기화 박남세 박도진 박동준 박동춘 박두남 박두남 박두만 박두영 박만전 박민선 박병록 박봉수 박봉순 박삼룡 박석윤 박성봉 박송원 박순 박순봉 박순열 박승우 박승하 박승호 박시리 박시화 박안식 박안중 박암 박영규 박영식 박영준 박영천 박용범 박용석(박주석) 박용일 박용찬 박용촌 박원성 박원식 박장식 박재형 박제아 박준병 박찬열 박찬옥 박춘권 박춘만 박춘범 박춘화 박택 박필근 박호길 박홍순 방두천 방명규 방학수 배문례 배인덕 배정자 백금풍 백남현 백수봉 백영모 백의현 백태운 백형린 서계연 서범석 서상용 서소철 서장길 석금룡 석기옥 석범익 석창만 석창준 선우연 소용수 손광겸 손지환 손희상 송세환 송찬도 송태희 신기석 신덕승 신석희 신성환 신영식 신옥남 신용국 신은묵 신재희 신홍덕 심득순 안기초 안덕선 안삼룡 안삼룡 안성도 안영언 안용정 안용택 안응록 안창호 안채운 안홍익 양동요 양복석(양봉성) 양영환 양재규 양재하 양정묵 양종식 양호석 엄경선 엄대섭 엄만봉 엄주익 엄창수 염남욱 염면홍 염복봉 염선우 염창섭 오국호 오기준 오두환 오명규 오상조 오영헌 오원청 오정근 오종순 오헌영(오헌수) 오현상 오현찬 욱상창 원기범 원영춘 원영희 원정환 원철범 원치상 위동백 위봉조 유남진 유병철 유선장 유영악 유이규 유익상 유중희 유찬행(유진행) 유홍순 유희장 윤귀동 윤규현 윤동훈 윤만석 윤명선 윤상필 윤세욱 윤수복 윤영만 윤재권 윤정일 윤진서 윤태동 윤하태 윤홍수 이강준 이경빈 이경재 이기술 이기한 이기홍 이남수 이대덕 이덕준 이덕진 이도선 이도일 이동붕 이동석 이동성 이동수 이동욱 이동원 이동주 이동준 이동준 이동화 이두한 이만구 이명복 이명헌 이명훈 이무평 이문규 이문상 이민창 이범석 이범익 이범익 이병인 이병찬 이병찬 이병휘 이봉근 이봉남 이봉제 이봉춘 이상묵 이석기 이설년 이성권 이성백 이성삼 이성재 이송오 이승련 이승업 이승정 이시동 이시영 이시운 이시유 이영근 이영일 이영춘 이오익 이완구 이용성 이용택 이운철 이원 이원명 이원철 이원형 이월봉 이유석 이은석 이응도 이응렬 이응범 이이순 이인기 이인수 이일 이일림 이재수 이재수 이정근 이정린 이정린 이정림 이정의 이종선 이종섭(이종변) 이종희 이준목 이증흥 이지선 이지우(이기우) 이진 이창조 이창준 이철순 이춘선 이춘원 이충국 이탁 이태인 이태종 이태진(이원복) 이풍춘 이필동 이하영 이학문 이한원 이해봉 이해수 이해윤 이형준 이호일 이홍범 이회덕 이희덕 임대성 임병권 임성봉 임순봉 임영진 임용철 임윤경 임익룡 임인익 임정석 임한룡 임호석 장광렬 장규원 장달원 장덕명 장덕선 장동인 장두칠 장병호 장선태 장성진 장영준 장영춘 장원경 장원준 장이탁 장익민 장인춘 장정옥 장준걸 장지량 장진성 장창욱 전국보 전국정 전기룡 전길룡 전남규 전병옥 전병철 전병희 전봉만 전봉운 전재학 전정현 전종극 전철룡 전태화 전흥찬 정규성 정기 정민오 정복만 정빈 정석구 정성충 정순섭 정승복 정윤호 정인채 정재명 정창규 정창우 정항식 정호준 조광선 조국서 조규팔 조기풍 조대련 조동조 조병철 조봉준 조윤걸 조춘근 조한호 주굉섭 주기준 주림 주영환 주재덕 주종우 주평로 지금룡 지동한 지영철 지재성 진양근 진학문 차강 차득순 차용준 차재정 차중길 차화선 채규국 채규남 채규철 채규풍 채규화 채근 채민석 채봉림 채원규 채창룡 최관송 최광우 최기석 최남룡 최남선 최덕만 최도권 최돈직 최돈학 최동규 최동룡 최동륜 최동수 최동활 최동훈 최만형 최명주 최문송 최병기 최병학 최봉만 최봉춘 최삼림 최삼풍 최상현 최석규 최석환 최선오 최선옥 최수원 최승일 최영부 최영재 최영춘 최영혁 최용윤 최용현 최윤 최윤주 최일호 최재범 최재항 최정규 최정훈 최창락 최창봉 최창현 최철 최청송 최탁 최하랭 최하성 최홍준 최화삼 탁춘봉 태명수 태이훈 태장만 태한규 표성천 하임산 한국진 한낙규 한노수 한백순 한봉렬 한봉현 한상우 한성림 한영수 한영은 한영휘 한웅길 한원석 한의제 한인성 한일 한주옥 한찬숙 한풍준 한흥운 함대순 함두섭 함석창 함연호 함태형 허규활 허근종 허기락 허기열 허길봉 허동환 허수병 허용범 허인진 허일 허자룡 허자룡 허진성 허태봉 허학권 현봉룡 현상묵 현시달 현영주 현학수 현학춘 홍건표 홍기만 홍대영 홍성태 홍순봉 홍순삼 홍순일 홍식 홍영선 황금룡 황기호 황도연 황명춘 황병학 황봉춘 황사성 황상순 황석준 황시준 황재락 황종률 황종욱 황진식 황하숙

중국_관내 [66명]
고문규 공돈 김병건 김상호 김서분 김수인 김우풍 김이구 김인근 김인성 김일선 김일준 김일현 김정섭 김하종 박경도 박순구 박승기 박일석 변정금 봉명석 석현구 손창식 송경호 송경환 오건일 원치복 유압 유학곤 윤기풍 윤상만 윤인택 이동욱 이동제 이두규 이면화 이상우 이승언 이여강 이영 이영구 이원업 이종운 이창조 이치운 이치현 이학로 이화성 임두욱 임훈 장찬식 정영택 정원길 정이월 정치복 조국성 조병철 진식탁 최덕렬 최일천 하윤명 한기순 한처복 홍국철 홍승호 홍이두

일본 [39명]
강용옥 강재원 강창기 고권삼 고명복 김국종 김국필 김동조 김성용 김연수 김인엽 박내수 박대복 박병인 박석헌 박재용 박춘금 신현확 이근세 이기동 이동화 이선홍 이영개 이재동 이정희 임용길 장경탁 장철수 전택영 정상택 정인학 정재봉 진기훈 진의종 최병림 표성조 허원 홍재두 홍준표

러시아 [6명]
김만건 박남규 박병일 엄인섭 조영진 함동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작성한 708명의 친일파 명단

http://cafe.daum.net/chamdaedong/VPt8/1528?q=%BF%F9%B0%A3%20%C1%DF%BE%D3%20%C4%A3%C0%CF%C6%C4%20%BB%EC%BB%FD%BA%CE&re=1

 

친일파 708인 명단(親日派 708人 名單)은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발표한 주요 친일 인사 708명[1]에 관한 명단이다. 이들 명단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 모임은 광복회(회장 윤경빈)와 함께 심사하여 명단을 공개했으며 이 가운데 692명은 광복회와 합의하에, 사회, 문화, 예술 분야에서 공이 커서 친일파 규정에 논란이 많은 나머지 16명은 별도로 발표했다.

다음 목록은 각 분야별로 발표된 목록이다.

  1. 을사오적 : 5명
  2. 정미칠적 : 7명
  3. 일진회 : 9명
  4. 경술국적 : 8명
  5. 조선귀족 : 115명
  6. 일본 귀족원 의원 및 제국의회 의원 : 9명
  7. 중추원 : 561명
  8. 도지사 : 43명
  9. 도 참여관 : 103명
  10. 조선총독부 국장 : 6명
  11. 조선총독부 사무관 : 85명
  12. 조선총독부 판검사 : 4명
  13. 조선총독부 판사 : 16명
  14. 조선총독부 군인 : 7명
  15. 애국자 살상자 : 22명
  16. 밀정 : 16명
  17. 경시 : 103명
  18. 고등계 형사 : 10명
  19. 군수산업 관련자 : 12명
  20. 친일단체 : 21명
  21. 기타 : 74명
  22. 사회, 문화, 예술계 : 16명 (집중심의 대상)

           (위키백과)

 


<을사오적>
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일진회 관련자>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김윤식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조중응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매국노.
장석주 이토 동상 건립추진운동의 주동자.
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윤치호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정란교 박영효의 심복으로 친일 쿠데타의 돌격대.
신응희 3·1 운동의 무력진압 건의한 황해도 지사.
이규완 참정권 주장의 '선구자'.

<을미사변 관련자>
이주회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이두황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 받은 친일 무관.
우범선 민비시해사건의 주동자.
이진호 일제식민통치에 앞장 선 친일관료의 전형.

<왕실·척족>
윤덕영 한일'합방'에 앞장 선 황실 외척세력의 주역.
민병석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민영휘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주자.

<관료>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장헌식 중추원 칙임참의를 20년 간 역임한 일제의 충견.
고원훈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부르짖은 친일관료.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
석진형 총독부의 신임 두터웠던 절대 맹종파.
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자.

<직업적 친일분자>
민원식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동자.
배정자 정계의 요화(妖花)로 불렸던 고급 밀정.
선우순 내선일체론의 나팔수.
이각종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박석윤 항일무장투쟁 파괴|분열의 선봉장.
박춘금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까지 된 극렬 친일파.
현영섭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 꿈꾼 몽상가.
이영근 황국신민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일본주의자.
이종형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 높았던 밀정.

<경찰·군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 체포한 고등계 형사.
김덕기 항일무장투쟁 탄압의 선봉장.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경찰의 본색.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
정 훈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보도통제의 첨병.

<경제>
한상룡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
장직상 경북지방 최고의 친일 부호.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문명기 애국옹(愛國翁)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
박흥식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김연수 민족자본가의 허상과 친일 예속자본가의 실상.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현준호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문재철 암태도 소작쟁의 야기한 친일 거대지주.

<언론>
진학문 일제 문화정치의 하수인.
장덕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서 춘 매일신보 주필로 맹활약한 친일언론의 기수.

<학술>
정만조 친일유림의 대표자.
어윤적 유림 친일파의 앞잡이.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법조>
이승우 민족운동가 감시에 앞장 선 친일 법조인.
신태악 속물적 출세지향의 친일 변호사.

<여성계>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고황경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 선 여류 사회학자.
황신덕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여성 교육자.
박인덕 황국신민이 된 여성 계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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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인직 친일문학의 선구자.
이광수 민족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문학가로의 전락.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김동환 각종 친일단체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친일시인.
모윤숙 여성 교화사업의 첨병.
유치진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최재서 서구적 지성론자에서 천황숭배론자로.
백 철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기진 황국문학의 품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박영희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음악·미술>
홍난파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현제명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김은호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김기창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심형구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김인승 도쿄미술학교 우등생이 친일에도 우등.

<종교>
최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박희도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의지의 변절 행로.
정춘수 감리교 황민화의 앞잡이.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전필순 혁신교단 조직한 기독교 황민화의 앞잡이.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이회광 불교계의 이완용.
이종욱 항일투사에서 불교 친일화의 기수로.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학승.
김태흡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


 

 

You raise me up

 

When l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When l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Until you come and sit a while with me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을 때까지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혀 줄 때 나는 강인해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You raise me up so l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ㅣam strong, when l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l can be

 


  

 

이백묘(李白墓)


이백 묘원에서 우리를 먼저 맞은 것은 높이 11미터의 거대한 패방이다.

일종의 대문인 셈인데 4주3문(四柱三門)으로 된 전형적인 휘주식 패방이다.

 

시선성경(詩仙聖境)


패방 전면에는 저명한 현대서예가 계공(啓功, 치궁)의 글씨로 시선성경(詩仙聖境) 시선,

즉 이백이 잠든 성스러운 경내라 쓰여 있다.

 

 

 

 

 

천고풍류(千古風流) 영원한 풍류라는 뜻. 초서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임산지(林散之, 린싼스)의 글씨이다.


 

 

거배요월(擧杯邀月) 술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다.


이백은 실로 술과 달의 시인이었다.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술로 달래었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낀 그는 천상에 있는 달을 친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술과 달을 뻬고는 이백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술잔을 높이 들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이 소상은 그러한 이백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거배요월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월하독작(月下獨酌)> 제1수에서 따온 말이다.


 

청련지(靑蓮池) 이백의 묘원 안에 있는 연못이다.


이백의 호 청련거사(靑蓮居士)에서 이름을 딴 연못으로 연꽃을 많이 심어 놓았다.

또 착월교(捉月橋)라는 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착월(捉月)이란 '달을 잡는다'는 뜻인데,

이백이 강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로 뛰어들어가 죽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다리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行樂需及春(행락수급춘)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리니,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작품 배경

이 시들은 시인의 특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달 아래서 꽃을 벗하며 홀로 술을 마시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이 시들에는 시인의 근심이 숨겨져 있다.

이 시는 당시 정치적 타격으로 실의에 빠진 시인이 자신의 근심을 해소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백은 〈월하독작〉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4수의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는 제1수이다.

제목은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라는 뜻으로, 시의 형식은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봄밤에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시인은 낭만적 정취에 젖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여 홀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아득한 은하(銀河)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바람에서는 초탈을 구하는 마음이 읽혀진다.

첫구의 '화간일호주(花間一壺酒)'는 '화하일호주(花下一壺酒)' 또는 '화전일호주(花前一壺酒)'라고도 한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원문 및 해설

전체 4수로 이루어진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는 모두 상상력이 풍부한 낭만적인 시이다.

이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이다.

 

(제1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客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꽃 사이에서 놓인 술 한 단지,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네.
달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르는구나.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니 즐겁기가 모름지기 봄이 된 듯한데.
내가 노래하니 달이 배회하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술 깨었을 때는 함께 즐거움을 누리지만,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니.
영원히 정이 끊어지지 않는 교유를 맺으며, 저 멀리 은하수 저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리.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제2수)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爲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겠지.
천지가 원래부터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으리.
듣자하니 청주는 성인에 비견할 만하고, 또한 탁주는 현자와 같다하네.
성현들도 원래부터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랄 것이 있겠는가?
세 잔을 마시면 큰 도와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합해지니.
술 마시는 흥취를 알면 될 뿐,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게나.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태백비림(太白碑林) 곽말약(郭沫若) 書


태백비림에는 당대 저명 서예가와 유명 인사 107명의 글씨가 각각 흑색 화강암에 석각되어 있다.

모택동, 곽말약(郭沫若, 궈모뤄) 노신(魯迅, 루쉰), 우우임(于佑任, 위여우런), 임산지, 계공 등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다.


내용은 대부분 이백의 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모택동의 글씨가 먼저 눈에 띄었다.

모택동은 특유의 초서로 이백의 유명한 시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를 써 놓았다.

 

 

 

 

 

 

 

태백사(太白祠) 임산지의 글씨. 이백의 사당으로 안에 칼을 찬 이백의 소상과 유명한 '송비'가 있다.

 

詩無敵(시무적) : 두보가 이백을 두고 처음으로 쓴 말. 시로는 이백을 당할 자가 없다. 천하무적이다.

 

이백 묘


비석 덮개 위의 동그란 조형물은 돈을 상징하는 엽전이다.

이 돈으로 좋아하는 술을 사서 실컷 마시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경정산 (敬亭山 ; 징팅산)


해발고도는 286m이다. 황산[黃山]산맥에 속한다.

지금은 안후이성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고, 임목(林木) 자원이 풍부하다.

문화재로는 스셴사[十賢祠], 타이바이루[太白樓], 광쟈오사[廣敎寺] 등이 있다.

안후이성 남동부 쉬안저우시[宣州市]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자오팅산[昭亭山] 또는 차산[査山]이라고 불렀는데

남조 진나라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이름 소(昭)를 피해서 경(敬)정산으로 개칭했다.


선성 시내의 도로명에도 소정로(昭亭路)가 있고 사공로(謝公路)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경관이 수려하여 사조(謝脁)도 여러차례 이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정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백이다.

이백은 전후 일곱차례나 경정산을 올라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홀로 앉아-이다. 


獨坐敬亭山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지유경정산

 

뭇 새들 높이 날아 다 없어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롭게 가버렸네

서로 봐도 양쪽 모두 싫지 않은 건

오직 저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敬亭山(경정산)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남쪽에 있는 산. 일명 소정산(昭亭山)

高飛盡(고비진) : 많은 새들이 높이 날아 어디론가 가버린다

孤雲(고운) : 외로이 떠도는 한 조각 구름
相看(상간) : 서로 바라봄
不厭(불염) : 물리지 않음. 싫지 않음

只有(지유) : 다만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너무나 유명한 이 시로 인해서 경정산은 천하의 명산이 되었다.

그후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경정산을 읊은 시가 1,000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은 ,강남시산(江南詩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경정산 입구 광장에는 이곳을 유람한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매요신(梅堯臣), 탕현조(湯顯祖) 등의 부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경정산 입구에 있는 시비들

 

 

 

 

 

 

고소정방(古昭亭防)

 

 

 

 

상사천(想思泉)

 

742년 이 백은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가족들은 남릉에 남기고 홀로 월지방으로 가 머물다가,

하지장과 옥진공주의 추천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여태까지 여러 산을 떠돌며 은자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 결실을 맺어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글의 초안을 잡거나 연회에 불려가 흥을 돋우는 시나 짓는 정도였다.

어용문인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와 술로 지내다 결국 744년 장안을 떠나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長相思(장상사)

 

其一
長相思(장상사) 늘 그리운 사람
在長安(재장안) 장안에 있네.
絡緯秋啼金井欄(낙위추제금정란) 가을 귀뚜라미 우물 난간에서 울고
微霜淒淒簞色寒(미상처처단색한) 서리 내려 쓸쓸한데 대자리 차갑네.
孤燈不明思欲絶(고등불명사욕절) 외로운 등불 희미한데 그리움 절절하여
卷帷望月空長歎(권유망월공장탄) 휘장 올리고 달을 향해 공연히 긴 탄식이로다.
美人如花隔雲端(미인여화격운단) 꽃같이 아름다운 님은 구름 끝 저편에 있네.
上有靑冥之高天(상유청명지고천) 위로는 푸르고 푸른 높은 하늘이 있고
下有淥水之波瀾(하유록수지파란) 아래로는 맑은 물 일렁이는 물결이 있네.
天長路遠魂飛苦(천장로원혼비고) 하늘 끝 길은 멀어 넋도 날아가기 힘들고
夢魂不到關山難(몽혼부도관산난) 꿈속의 넋은 관산 넘지 못하네.
長相思(장상사) 긴 그리움에
摧心肝(최심간) 심장 간장 다 끊어지네.


其二
日色已盡花含煙(일색이진화함연) 햇빛 이미 다하여 꽃은 연무 머금었고
月明欲素愁不眠(월명욕소수불면) 달은 밝아 희니 수심으로 잠 못 이루네.
趙瑟初停鳳凰柱(조슬초정봉황주) 비파를 뜯다가 기러기발 멈추고
蜀琴欲奏鴛鴦絃(촉금욕주원앙현) 거문고 꺼내 원앙현을 연주하네.
此曲有意無人傳(차곡유의무인전) 이 곡 뜻이 있으나 전해줄 이 없으니
願隨春風寄燕然(원수춘풍기연연) 봄바람 따라 연연산에 부쳐지기 바라네.
憶君迢迢隔靑天(억군초초격청천) 그대 그리워도 멀고 먼 푸른 하늘 사이하니
昔日橫波目(석일횡파목) 그 옛날 추파 던지던 눈
今成流淚泉(금성류루천) 이제는 눈물샘 흘러 넘치네.
不信妾腸斷(불신첩장단) 이 첩의 애간장 끊어짐을 믿지 못하면
歸來看取明鏡前(귀래간취명경전) 돌아와 거울 앞에서 들여다 보소서.

 

어구(語句)
長相思 : 오래 서로 그리워함. 漢(한) 나라 때의 고시로 樂府(악부)의 제목임.
素 : 흰 비단. 生綃(생초).
趙瑟 : 조 나라 여인들이 잘 타는 비파 또는 거문고 곡조.
鳳凰柱 : 봉황 모양을 새긴,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줄을 받치는 雁柱(안주, 기러기 발 곧 줄을 고르는 기구).
蜀琴 : 촉 지방에서 타던 가야금. 한 나라 文人(문인)인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촉의 부호 卓王孫(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갓 과부가 된 왕손의 딸 卓文君(탁문군)의 미모에 반하여 거문고로 鳳求凰曲(봉구황곡)을 타니 과연 탁문군이 밤에 그에게 달려와 부부가 되었음.
鴛鴦 :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암수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사이가 좋기에 부부간의 애정을 비유함.
燕然 : 연연산. 蒙古(몽골)에 있는 산인데 당시 匈奴(흉노)의 땅임.
迢迢 : 멀고 아득한 모양.
橫波目 : 눈물이 고여 옆으로 돌린 눈. 自流涕而橫波(절로 눈물이 흘러 옆으로 보네)〈傅毅 舞賦〉

 

감상(鑑賞)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읊은 악부의 노래 형식인 시.

첫 수의 대강은 ‘그리운 임은 장안에 있는데, 여치는 우물가에서 울고 옅은 서리에도 잠자리는 차갑네.

등불 어두우니 그리움 줄어들어 휘장 걷고는 달 보며 헛되이 탄식하노라니 고운 여인 같은 달 구름 저쪽 멀리 있구나.

위에는 푸른 하늘이요 아래로는 맑은 물결, 하늘 넓고 길은 멀어 꿈속 영혼은 고향까지 가지 못하는구나.

아아 그리워라 애끊네.’이다.


첫 수는 敍景(서경)을 중심으로 그리움을 그렸는데,

둘째 수는 抒情(서정)을 주로 하여 혼자 사는 설움을 읊었다

 

 

 

옥진공주(玉眞公主 690~762)

 

경정산에는 옥진공주의 묘가 있고 그 앞에 공주의 소상이 서 있다.

또 그 옆에는 상사천(相思泉)이라는 샘을 만들어 놓고 샘 뒤편에 옥진공주의 입상과 이백의 와상(臥像)을 새긴 부조가 놓여 있다.


옥진공주는 당나라 무측천의 손녀이자 예종(睿宗)의 열 번째 딸이고

현종(玄宗) 이융기의 누이동생으로 이백보다 9세 연상이다.


경정산이 옥진공주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이백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묘 앞에 세워진 '옥진공주 묘지(墓誌)의 내용은 이렇다.


공주는 젊어서 여도사(女道士)가 된 후 천하의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백을 알게 되었고

그를 현종에게 적극 추천하여 대조한림(待詔翰林)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다.


이백이 모함을 당하여 장안을 떠나자 공주는 울적한 마음에 공주의 칭호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후에 이백이 경정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는 이 산으로 들어와 수도를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독좌경정산"은 경정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함과 동시에 옥진공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 시라는 것이다.

옥진공주 묘비는 안휘성 선성시 경정산 풍경명승구 관리처가 2001년 9월에 세운 것이다.

공주의 무덤을 비롯한 구조물들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옥진공주(玉眞公主)를 빠트릴 수 없다.

그녀는 젊었을 때, 스스로 원해서 여도사가 되었다.


당시 옥진공주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부친인 당 예종 이단에게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당 예종은 당연히 쉽게 응락해 주지 않았다.

자기의 딸에게 손해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결심이 굳었다.

그녀는 모친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마도 당 예종은 가련하게 죽어간 그녀의 모친을 떠올렸을 것이다.

확실히 고혼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예종은 마침내 딸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해 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러우며, 풀들은 자라고 새는 날아다니는 계절에,

장안성의 밖에는 "옥진관(玉眞觀)"이라고 이름붙인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농삿일을 버려 두고 도관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1년 여의 공사끝에 옥진공주는 마침내 이 화려한 도관에 입주한다.

그녀와 동시에 입주한 사람들은 황실 음악가 중에서 은퇴한 가무녀들과 일부 은퇴한 궁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관은 여자들의 궁전과 같았다. 그리고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본떠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당시 중에 "지유지영옥엽관, 전운재월조인한(知有持盈玉葉冠, 剪雲裁月照人寒)"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영'은 바로 옥진공주의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옥엽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가지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하지 못했다(時人莫計其價)"고 한다.

청풍명월의 밤이 되면, 도관에는 맑은 악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무녀들은 인공산수 속에서 신선세계를 공연했다.


옥진공주의 생활은 시집간 다른 공주들보다 훨씬 나았다.

거의 단신여왕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당나라때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사람은 옥진공주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 고조때부터 당 소종때까지 근 300년 동안 이당황실에는 210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중에서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공주가 12명이나 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인 왕건은 <<당창관옥예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관야멱향래처, 유견계전쇄옥명(女冠夜覓香來處, 唯見階前碎玉明)"


여관은 여황관(女黃冠)이라도 하고, 여관자(女冠子)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도사를 가리킨다.

당나라때 여관(女冠)은 수진여관(修眞女冠)과 궁관여관(宮觀女冠)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바로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공주가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당나라때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사실, 당시 이들 도관에 들어간 공주들이 진정으로 머리를 깍고 출가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기르며 출가생활을 보냈다.

당나라때 공주가 도교에 입교하는 것은 당나라때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고, 도교 내부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련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의 두 황제 때에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기록은 없다.

당 고종에 이르러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도사가 된다는 것은 공주가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원인을 따져보면, 도교가 보유한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다.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득도를 하려는 이상과 바램이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과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나라 때 차이가 크다.


왜냐하면 도교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도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다.


공주는 천자의 딸로서 고귀하고, 신분이 존귀하다.

공주가 도교를 택한다는 것은 민간에도 도교에 귀의하는 기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공주는 여도사가 되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므로,

민간도사들이 힘들게 수련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나라 공주들의 도교귀의 동기는 간단히 말해서, 도를 그리워한다든지, 복을 추구한다든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든지 남편이 죽은 후에 속세를 떠나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나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공주들이 적극적으로 여도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여도사가 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재녀 어현기(魚玄機)였다.


당나라 때는 여권의식이 강했고, 일부 여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살면서, 자유롭게 애정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여도사'는 아주 그럴듯한 신분이었다.


'여도사'는 자유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살롱의 여주인과 같이.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여도사'의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했다가 반년,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황실의 공주는 민간의 보통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이다.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8살 때 '외조모 양씨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궁중에 살았다.


16세가 되어서 토번의 혼인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태평관(太平觀)으로 가서 관주가 된다.

혼사 얘기가 끝난 후인 20살 때 태평공주는 원하는 바대로 부마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다시 당 예종의 옥진공주를 보자.

출궁 이후 호화로운 옥진관에 살면서 자주 명인아사들을 불러모아 술마시고 놀았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아래 쓰러졌다.

공주가 비록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스캔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당 현종이 집권하자, 여동생인 옥진공주를 더욱 총애했다.


옥진공주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왕옥산 등에 여러 개의 도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도 별관, 산장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주위에는 방사와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렇게 젊은 여도사가 행동도 자유로운데, 애정 생활이 없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백, 왕유의 두 당나라 대시인도 옥진공주의 애정 생활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당나라의 옥진공주가 선례를 보이자,

나중에 당현종, 당대종, 당덕종, 당순종, 당헌종, 당목종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공주가 여도사로 된다.


심지어 한 때는 4명의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기도 한다.

이들 존귀한 미모의 황실 여도사는 사실 수시로 환속하여 시집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처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때의 여도사는 거의 귀족의 기풍이 된다.

고관대작들의 딸 중에서도 적지 않이 여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때 대시인들은 이들 여도사들을 추켜세웠다.


이백은 일찌기 여도사 이등공(李騰空)을 위하여 시부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이등공은 바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딸이다.


그리고 초당사걸 중 하나인 낙빈왕은 여도사 왕령비(王靈妃)를 도와 그녀의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여도사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현기가 쓴, "이구무가보, 난득유정랑(易求無價寶, 難得有情郞)"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이 싯구는 정말 좋다. 그러나, 풍진의 여도사가 썼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사대미녀 중 하나인 양옥환(양귀비)도 개가하여 시아버지인 당 현종에게 가기 전에 잠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황실 여도사들은 여도사가 된 이후에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그녀들의 혼인생활도 왕왕 황실의 체면이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집간 이후에 공주들의 행위는 왕왕 남편 집안에 의하여 제한된다.


고양공주, 양양공주, 태평공주, 곡국공주, 영가공주 등등은 모두 애인들을 두었다.

이들의 애인과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고양공주는 변기(辯機)와 절에서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고,

양양공주와 같은 경우는 애인의 모친에게 며느리로서의 예를 행하기도 했다.


당나라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후의 궁관생활은 도관의 경제문제에 부닥친다.

옥진공주는 출가하겠다는 뜻이 아주 강했다.

그는 집도 필요없고, 조세도 원치 않으며, 공주 칭호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출가한 공주들은 실제 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특히 궁관여관들은 장식 등도 많이 따지게 된다.


당나라 공주들의 일상적인 수요도 있다.

특히 도관에서 재초(齋醮)를 지내야 한다.


방대한 행사에는 호화로운 도량이 필요하고, 옷을 차려입은 여악사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모두 상당한 고정경비를 요하는 것이다.


수를 원하는 궁관여관이라면, 특히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양생성선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궁관의 건조, 설비, 일상용품 등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때에 조정에서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궁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은 역대 왕조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 현종은 도교정책을 확립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신당서. 제공주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개원신제>가 실려 있다:

"장공주는 2천호에 봉하고...공주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역시 천호에 봉한다."


시집가지 않은 공주는 원래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병이 심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이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는 또 하나의 상황 즉 여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공주는 여전히 황실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관의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궁관여관은 체면을 잃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속세를 떠나서 산림에 은거하는 수진여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나라의 공주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자주권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 당왕조는 비록 관농일대에서 나타났지만, 선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남녀 관계에서, 중원의 명문대가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원의 봉건왕조가 되다보니, 윤리도덕도 따져야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개방된 성생활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려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태백독좌루(太白独坐楼)


태백독좌루는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을 기념하여 세운 누각이다.

그곳에 이백의 홀로 앉은 조각상과 시들이 갖춰져 있다.


이백은 경정산을 소재로 한 시 43수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적인 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을 지은 곳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녹설차사(绿雪茶社)

 

녹설차는 경정산을 원산지로 하는 중국녹차이다.

녹설차는 그 형상이 참새의 혀 같고, 통통하며, 녹색빛에 육기가 돈다.


찻잎의 표면은 미세한 흰털로 덮여있는데,

찻잎을 다린 물에 떠도는 그 털들이 마치 하늘에서 맴돌며 내리는 눈송이 같다.


이러한 녹설찻잎을 생산하는 차 밭이 경정산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경관이 별스럽고,

녹설차를 음미해볼 수 있는 녹설차사가 경구내에 있다.


경정산녹설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경정산에“ 녹설”이라는 이름의 낭자가 살았다.


나이는 아직어렸지만 총명하고 재주가 있으며 심성이 착했다.

녹설은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

생계와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은 깍아지른 산봉우리에 자생하는 찻잎을 따다 팔아서 충당하였다.


그날도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있는 차나무의 잎이 유난히 빛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저만한 품질과 양이라면 홀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값에 크게 보탤수 있겠다고 생각한 녹설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절벽을 타고 올라갔는데, 나무에 거의 도달했을 순간에 발이 미끄러져 깊디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녹설의 등 뒤 망태기에서는 그 동안에 따 담은 찻잎이 공중으로 흩어날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았고,

그렇게 온 산 온 계곡에 흩어져 내린 찻잎들은 모두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실한 차나무로 자랐다.


경정산 동네 사람들은 그 찻잎을 따다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녹설낭자에 대한 고마움이 넘쳐나 자신들이 따는 찻잎을“경정산녹설"이라고 불렀다.

 

천년의 시산(詩山) 경정산에서 생산되는 경정녹설은 항주의 용정차와 은 마찬가지로

납작한 편조(扁條) 형이며 홍청(烘靑) 녹차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진품(珍品) 녹차 중의 하나이며, 중국 역사 명차 중의 하나로 용정차와 꼽고 있다.

육우의『다경 』에 의하면 경정산이 속해 있는 하나로 선성(宣城) 에선

이미 동진(東晋: AD 317~322년)때부터 차가 생산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었었다.


경정녹설은 송라차(松蘿 茶)의 일종으로 명대에 창시되어 명청(明淸) 시기에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세상에 바치는 유명해졌으나,

후에 역사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수십년 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 연구가 시작되어

1978년에야 비로소 중국 정부의 심평과정을 통과하여 생산이 회복되었다.


경정산은 황산의 지맥에 속하며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산들이 높이 세상에 솟아 있어 산골짜기 또한 높이 매우 깊다.


운무가 또한 덮여 있어 골짜기엔 운무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숲과 골짜기엔 청죽(靑竹)이 숲과 하늘 높이 치솟아 해를 가리고,

상쾌하고 맑은 향기가 온 산에 이 가득하다.


『선성현지( 宣城縣誌)』의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의 기록에 보면,

“송라차(松蘿 茶)는 도처에 모두 있는데, 맛이 산에 쓰면서도 담백하다.

그러나 종류가 매우 풍부지만, 오직 경정녹설만이 최고품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차 이름이 ‘경정녹설’로 명명된 유래에는 3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맛이 있다.

첫째 전설은‘녹설’이란 차를 따는 아가씨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아가씨가 손재주가 비범하였다.

그녀는 차를 딸 때 손으로 영리하고 따지를 않고, 입으로 찻잎을 물고 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절벽에 손으로 올라 차를 따다가 그만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경정산차를 ‘녹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설은 찻물이 끓은 후, 찻잔위로 뜨거운 수증기가 마치 운무처럼 유유히 일어

구름처럼 떠있는 모습이 찻잔 속에 눈꽃이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절벽에 마치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고 이것이 있는 뿌리고 뜻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그 선녀가 바로 있는 앞에서 말한‘녹설’아가씨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설은 바로 뜨거운 물로 차를 우리게 되자 찻잔 속의 찻잎이 잎 한 한 잎 수직으로 한 가라앉을 때

찻잎의 하얀 솜털(白毫)이 뒤집어 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숲 속에 대설이 날리는 듯하여 ‘녹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설이 매우 신화적인 요소도 있고, 소박한 전설이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지만,

어쨌든 명칭 유래에 대한 소박한 세 가지 전설 모두가 ‘경정녹설’에 대한 특징을

중국인들 특유의 낭만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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