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정산 (敬亭山 ; 징팅산)


해발고도는 286m이다. 황산[黃山]산맥에 속한다.

지금은 안후이성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고, 임목(林木) 자원이 풍부하다.

문화재로는 스셴사[十賢祠], 타이바이루[太白樓], 광쟈오사[廣敎寺] 등이 있다.

안후이성 남동부 쉬안저우시[宣州市]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자오팅산[昭亭山] 또는 차산[査山]이라고 불렀는데

남조 진나라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이름 소(昭)를 피해서 경(敬)정산으로 개칭했다.


선성 시내의 도로명에도 소정로(昭亭路)가 있고 사공로(謝公路)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경관이 수려하여 사조(謝脁)도 여러차례 이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정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백이다.

이백은 전후 일곱차례나 경정산을 올라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홀로 앉아-이다. 


獨坐敬亭山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지유경정산

 

뭇 새들 높이 날아 다 없어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롭게 가버렸네

서로 봐도 양쪽 모두 싫지 않은 건

오직 저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敬亭山(경정산)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남쪽에 있는 산. 일명 소정산(昭亭山)

高飛盡(고비진) : 많은 새들이 높이 날아 어디론가 가버린다

孤雲(고운) : 외로이 떠도는 한 조각 구름
相看(상간) : 서로 바라봄
不厭(불염) : 물리지 않음. 싫지 않음

只有(지유) : 다만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너무나 유명한 이 시로 인해서 경정산은 천하의 명산이 되었다.

그후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경정산을 읊은 시가 1,000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은 ,강남시산(江南詩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경정산 입구 광장에는 이곳을 유람한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매요신(梅堯臣), 탕현조(湯顯祖) 등의 부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경정산 입구에 있는 시비들

 

 

 

 

 

 

고소정방(古昭亭防)

 

 

 

 

상사천(想思泉)

 

742년 이 백은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가족들은 남릉에 남기고 홀로 월지방으로 가 머물다가,

하지장과 옥진공주의 추천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여태까지 여러 산을 떠돌며 은자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 결실을 맺어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글의 초안을 잡거나 연회에 불려가 흥을 돋우는 시나 짓는 정도였다.

어용문인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와 술로 지내다 결국 744년 장안을 떠나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長相思(장상사)

 

其一
長相思(장상사) 늘 그리운 사람
在長安(재장안) 장안에 있네.
絡緯秋啼金井欄(낙위추제금정란) 가을 귀뚜라미 우물 난간에서 울고
微霜淒淒簞色寒(미상처처단색한) 서리 내려 쓸쓸한데 대자리 차갑네.
孤燈不明思欲絶(고등불명사욕절) 외로운 등불 희미한데 그리움 절절하여
卷帷望月空長歎(권유망월공장탄) 휘장 올리고 달을 향해 공연히 긴 탄식이로다.
美人如花隔雲端(미인여화격운단) 꽃같이 아름다운 님은 구름 끝 저편에 있네.
上有靑冥之高天(상유청명지고천) 위로는 푸르고 푸른 높은 하늘이 있고
下有淥水之波瀾(하유록수지파란) 아래로는 맑은 물 일렁이는 물결이 있네.
天長路遠魂飛苦(천장로원혼비고) 하늘 끝 길은 멀어 넋도 날아가기 힘들고
夢魂不到關山難(몽혼부도관산난) 꿈속의 넋은 관산 넘지 못하네.
長相思(장상사) 긴 그리움에
摧心肝(최심간) 심장 간장 다 끊어지네.


其二
日色已盡花含煙(일색이진화함연) 햇빛 이미 다하여 꽃은 연무 머금었고
月明欲素愁不眠(월명욕소수불면) 달은 밝아 희니 수심으로 잠 못 이루네.
趙瑟初停鳳凰柱(조슬초정봉황주) 비파를 뜯다가 기러기발 멈추고
蜀琴欲奏鴛鴦絃(촉금욕주원앙현) 거문고 꺼내 원앙현을 연주하네.
此曲有意無人傳(차곡유의무인전) 이 곡 뜻이 있으나 전해줄 이 없으니
願隨春風寄燕然(원수춘풍기연연) 봄바람 따라 연연산에 부쳐지기 바라네.
憶君迢迢隔靑天(억군초초격청천) 그대 그리워도 멀고 먼 푸른 하늘 사이하니
昔日橫波目(석일횡파목) 그 옛날 추파 던지던 눈
今成流淚泉(금성류루천) 이제는 눈물샘 흘러 넘치네.
不信妾腸斷(불신첩장단) 이 첩의 애간장 끊어짐을 믿지 못하면
歸來看取明鏡前(귀래간취명경전) 돌아와 거울 앞에서 들여다 보소서.

 

어구(語句)
長相思 : 오래 서로 그리워함. 漢(한) 나라 때의 고시로 樂府(악부)의 제목임.
素 : 흰 비단. 生綃(생초).
趙瑟 : 조 나라 여인들이 잘 타는 비파 또는 거문고 곡조.
鳳凰柱 : 봉황 모양을 새긴,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줄을 받치는 雁柱(안주, 기러기 발 곧 줄을 고르는 기구).
蜀琴 : 촉 지방에서 타던 가야금. 한 나라 文人(문인)인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촉의 부호 卓王孫(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갓 과부가 된 왕손의 딸 卓文君(탁문군)의 미모에 반하여 거문고로 鳳求凰曲(봉구황곡)을 타니 과연 탁문군이 밤에 그에게 달려와 부부가 되었음.
鴛鴦 :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암수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사이가 좋기에 부부간의 애정을 비유함.
燕然 : 연연산. 蒙古(몽골)에 있는 산인데 당시 匈奴(흉노)의 땅임.
迢迢 : 멀고 아득한 모양.
橫波目 : 눈물이 고여 옆으로 돌린 눈. 自流涕而橫波(절로 눈물이 흘러 옆으로 보네)〈傅毅 舞賦〉

 

감상(鑑賞)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읊은 악부의 노래 형식인 시.

첫 수의 대강은 ‘그리운 임은 장안에 있는데, 여치는 우물가에서 울고 옅은 서리에도 잠자리는 차갑네.

등불 어두우니 그리움 줄어들어 휘장 걷고는 달 보며 헛되이 탄식하노라니 고운 여인 같은 달 구름 저쪽 멀리 있구나.

위에는 푸른 하늘이요 아래로는 맑은 물결, 하늘 넓고 길은 멀어 꿈속 영혼은 고향까지 가지 못하는구나.

아아 그리워라 애끊네.’이다.


첫 수는 敍景(서경)을 중심으로 그리움을 그렸는데,

둘째 수는 抒情(서정)을 주로 하여 혼자 사는 설움을 읊었다

 

 

 

옥진공주(玉眞公主 690~762)

 

경정산에는 옥진공주의 묘가 있고 그 앞에 공주의 소상이 서 있다.

또 그 옆에는 상사천(相思泉)이라는 샘을 만들어 놓고 샘 뒤편에 옥진공주의 입상과 이백의 와상(臥像)을 새긴 부조가 놓여 있다.


옥진공주는 당나라 무측천의 손녀이자 예종(睿宗)의 열 번째 딸이고

현종(玄宗) 이융기의 누이동생으로 이백보다 9세 연상이다.


경정산이 옥진공주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이백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묘 앞에 세워진 '옥진공주 묘지(墓誌)의 내용은 이렇다.


공주는 젊어서 여도사(女道士)가 된 후 천하의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백을 알게 되었고

그를 현종에게 적극 추천하여 대조한림(待詔翰林)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다.


이백이 모함을 당하여 장안을 떠나자 공주는 울적한 마음에 공주의 칭호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후에 이백이 경정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는 이 산으로 들어와 수도를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독좌경정산"은 경정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함과 동시에 옥진공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 시라는 것이다.

옥진공주 묘비는 안휘성 선성시 경정산 풍경명승구 관리처가 2001년 9월에 세운 것이다.

공주의 무덤을 비롯한 구조물들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옥진공주(玉眞公主)를 빠트릴 수 없다.

그녀는 젊었을 때, 스스로 원해서 여도사가 되었다.


당시 옥진공주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부친인 당 예종 이단에게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당 예종은 당연히 쉽게 응락해 주지 않았다.

자기의 딸에게 손해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결심이 굳었다.

그녀는 모친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마도 당 예종은 가련하게 죽어간 그녀의 모친을 떠올렸을 것이다.

확실히 고혼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예종은 마침내 딸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해 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러우며, 풀들은 자라고 새는 날아다니는 계절에,

장안성의 밖에는 "옥진관(玉眞觀)"이라고 이름붙인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농삿일을 버려 두고 도관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1년 여의 공사끝에 옥진공주는 마침내 이 화려한 도관에 입주한다.

그녀와 동시에 입주한 사람들은 황실 음악가 중에서 은퇴한 가무녀들과 일부 은퇴한 궁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관은 여자들의 궁전과 같았다. 그리고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본떠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당시 중에 "지유지영옥엽관, 전운재월조인한(知有持盈玉葉冠, 剪雲裁月照人寒)"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영'은 바로 옥진공주의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옥엽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가지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하지 못했다(時人莫計其價)"고 한다.

청풍명월의 밤이 되면, 도관에는 맑은 악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무녀들은 인공산수 속에서 신선세계를 공연했다.


옥진공주의 생활은 시집간 다른 공주들보다 훨씬 나았다.

거의 단신여왕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당나라때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사람은 옥진공주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 고조때부터 당 소종때까지 근 300년 동안 이당황실에는 210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중에서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공주가 12명이나 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인 왕건은 <<당창관옥예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관야멱향래처, 유견계전쇄옥명(女冠夜覓香來處, 唯見階前碎玉明)"


여관은 여황관(女黃冠)이라도 하고, 여관자(女冠子)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도사를 가리킨다.

당나라때 여관(女冠)은 수진여관(修眞女冠)과 궁관여관(宮觀女冠)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바로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공주가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당나라때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사실, 당시 이들 도관에 들어간 공주들이 진정으로 머리를 깍고 출가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기르며 출가생활을 보냈다.

당나라때 공주가 도교에 입교하는 것은 당나라때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고, 도교 내부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련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의 두 황제 때에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기록은 없다.

당 고종에 이르러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도사가 된다는 것은 공주가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원인을 따져보면, 도교가 보유한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다.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득도를 하려는 이상과 바램이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과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나라 때 차이가 크다.


왜냐하면 도교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도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다.


공주는 천자의 딸로서 고귀하고, 신분이 존귀하다.

공주가 도교를 택한다는 것은 민간에도 도교에 귀의하는 기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공주는 여도사가 되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므로,

민간도사들이 힘들게 수련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나라 공주들의 도교귀의 동기는 간단히 말해서, 도를 그리워한다든지, 복을 추구한다든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든지 남편이 죽은 후에 속세를 떠나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나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공주들이 적극적으로 여도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여도사가 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재녀 어현기(魚玄機)였다.


당나라 때는 여권의식이 강했고, 일부 여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살면서, 자유롭게 애정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여도사'는 아주 그럴듯한 신분이었다.


'여도사'는 자유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살롱의 여주인과 같이.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여도사'의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했다가 반년,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황실의 공주는 민간의 보통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이다.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8살 때 '외조모 양씨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궁중에 살았다.


16세가 되어서 토번의 혼인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태평관(太平觀)으로 가서 관주가 된다.

혼사 얘기가 끝난 후인 20살 때 태평공주는 원하는 바대로 부마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다시 당 예종의 옥진공주를 보자.

출궁 이후 호화로운 옥진관에 살면서 자주 명인아사들을 불러모아 술마시고 놀았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아래 쓰러졌다.

공주가 비록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스캔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당 현종이 집권하자, 여동생인 옥진공주를 더욱 총애했다.


옥진공주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왕옥산 등에 여러 개의 도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도 별관, 산장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주위에는 방사와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렇게 젊은 여도사가 행동도 자유로운데, 애정 생활이 없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백, 왕유의 두 당나라 대시인도 옥진공주의 애정 생활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당나라의 옥진공주가 선례를 보이자,

나중에 당현종, 당대종, 당덕종, 당순종, 당헌종, 당목종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공주가 여도사로 된다.


심지어 한 때는 4명의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기도 한다.

이들 존귀한 미모의 황실 여도사는 사실 수시로 환속하여 시집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처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때의 여도사는 거의 귀족의 기풍이 된다.

고관대작들의 딸 중에서도 적지 않이 여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때 대시인들은 이들 여도사들을 추켜세웠다.


이백은 일찌기 여도사 이등공(李騰空)을 위하여 시부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이등공은 바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딸이다.


그리고 초당사걸 중 하나인 낙빈왕은 여도사 왕령비(王靈妃)를 도와 그녀의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여도사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현기가 쓴, "이구무가보, 난득유정랑(易求無價寶, 難得有情郞)"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이 싯구는 정말 좋다. 그러나, 풍진의 여도사가 썼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사대미녀 중 하나인 양옥환(양귀비)도 개가하여 시아버지인 당 현종에게 가기 전에 잠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황실 여도사들은 여도사가 된 이후에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그녀들의 혼인생활도 왕왕 황실의 체면이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집간 이후에 공주들의 행위는 왕왕 남편 집안에 의하여 제한된다.


고양공주, 양양공주, 태평공주, 곡국공주, 영가공주 등등은 모두 애인들을 두었다.

이들의 애인과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고양공주는 변기(辯機)와 절에서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고,

양양공주와 같은 경우는 애인의 모친에게 며느리로서의 예를 행하기도 했다.


당나라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후의 궁관생활은 도관의 경제문제에 부닥친다.

옥진공주는 출가하겠다는 뜻이 아주 강했다.

그는 집도 필요없고, 조세도 원치 않으며, 공주 칭호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출가한 공주들은 실제 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특히 궁관여관들은 장식 등도 많이 따지게 된다.


당나라 공주들의 일상적인 수요도 있다.

특히 도관에서 재초(齋醮)를 지내야 한다.


방대한 행사에는 호화로운 도량이 필요하고, 옷을 차려입은 여악사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모두 상당한 고정경비를 요하는 것이다.


수를 원하는 궁관여관이라면, 특히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양생성선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궁관의 건조, 설비, 일상용품 등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때에 조정에서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궁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은 역대 왕조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 현종은 도교정책을 확립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신당서. 제공주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개원신제>가 실려 있다:

"장공주는 2천호에 봉하고...공주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역시 천호에 봉한다."


시집가지 않은 공주는 원래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병이 심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이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는 또 하나의 상황 즉 여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공주는 여전히 황실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관의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궁관여관은 체면을 잃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속세를 떠나서 산림에 은거하는 수진여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나라의 공주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자주권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 당왕조는 비록 관농일대에서 나타났지만, 선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남녀 관계에서, 중원의 명문대가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원의 봉건왕조가 되다보니, 윤리도덕도 따져야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개방된 성생활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려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태백독좌루(太白独坐楼)


태백독좌루는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을 기념하여 세운 누각이다.

그곳에 이백의 홀로 앉은 조각상과 시들이 갖춰져 있다.


이백은 경정산을 소재로 한 시 43수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적인 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을 지은 곳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녹설차사(绿雪茶社)

 

녹설차는 경정산을 원산지로 하는 중국녹차이다.

녹설차는 그 형상이 참새의 혀 같고, 통통하며, 녹색빛에 육기가 돈다.


찻잎의 표면은 미세한 흰털로 덮여있는데,

찻잎을 다린 물에 떠도는 그 털들이 마치 하늘에서 맴돌며 내리는 눈송이 같다.


이러한 녹설찻잎을 생산하는 차 밭이 경정산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경관이 별스럽고,

녹설차를 음미해볼 수 있는 녹설차사가 경구내에 있다.


경정산녹설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경정산에“ 녹설”이라는 이름의 낭자가 살았다.


나이는 아직어렸지만 총명하고 재주가 있으며 심성이 착했다.

녹설은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

생계와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은 깍아지른 산봉우리에 자생하는 찻잎을 따다 팔아서 충당하였다.


그날도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있는 차나무의 잎이 유난히 빛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저만한 품질과 양이라면 홀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값에 크게 보탤수 있겠다고 생각한 녹설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절벽을 타고 올라갔는데, 나무에 거의 도달했을 순간에 발이 미끄러져 깊디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녹설의 등 뒤 망태기에서는 그 동안에 따 담은 찻잎이 공중으로 흩어날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았고,

그렇게 온 산 온 계곡에 흩어져 내린 찻잎들은 모두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실한 차나무로 자랐다.


경정산 동네 사람들은 그 찻잎을 따다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녹설낭자에 대한 고마움이 넘쳐나 자신들이 따는 찻잎을“경정산녹설"이라고 불렀다.

 

천년의 시산(詩山) 경정산에서 생산되는 경정녹설은 항주의 용정차와 은 마찬가지로

납작한 편조(扁條) 형이며 홍청(烘靑) 녹차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진품(珍品) 녹차 중의 하나이며, 중국 역사 명차 중의 하나로 용정차와 꼽고 있다.

육우의『다경 』에 의하면 경정산이 속해 있는 하나로 선성(宣城) 에선

이미 동진(東晋: AD 317~322년)때부터 차가 생산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었었다.


경정녹설은 송라차(松蘿 茶)의 일종으로 명대에 창시되어 명청(明淸) 시기에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세상에 바치는 유명해졌으나,

후에 역사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수십년 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 연구가 시작되어

1978년에야 비로소 중국 정부의 심평과정을 통과하여 생산이 회복되었다.


경정산은 황산의 지맥에 속하며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산들이 높이 세상에 솟아 있어 산골짜기 또한 높이 매우 깊다.


운무가 또한 덮여 있어 골짜기엔 운무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숲과 골짜기엔 청죽(靑竹)이 숲과 하늘 높이 치솟아 해를 가리고,

상쾌하고 맑은 향기가 온 산에 이 가득하다.


『선성현지( 宣城縣誌)』의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의 기록에 보면,

“송라차(松蘿 茶)는 도처에 모두 있는데, 맛이 산에 쓰면서도 담백하다.

그러나 종류가 매우 풍부지만, 오직 경정녹설만이 최고품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차 이름이 ‘경정녹설’로 명명된 유래에는 3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맛이 있다.

첫째 전설은‘녹설’이란 차를 따는 아가씨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아가씨가 손재주가 비범하였다.

그녀는 차를 딸 때 손으로 영리하고 따지를 않고, 입으로 찻잎을 물고 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절벽에 손으로 올라 차를 따다가 그만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경정산차를 ‘녹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설은 찻물이 끓은 후, 찻잔위로 뜨거운 수증기가 마치 운무처럼 유유히 일어

구름처럼 떠있는 모습이 찻잔 속에 눈꽃이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절벽에 마치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고 이것이 있는 뿌리고 뜻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그 선녀가 바로 있는 앞에서 말한‘녹설’아가씨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설은 바로 뜨거운 물로 차를 우리게 되자 찻잔 속의 찻잎이 잎 한 한 잎 수직으로 한 가라앉을 때

찻잎의 하얀 솜털(白毫)이 뒤집어 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숲 속에 대설이 날리는 듯하여 ‘녹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설이 매우 신화적인 요소도 있고, 소박한 전설이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지만,

어쨌든 명칭 유래에 대한 소박한 세 가지 전설 모두가 ‘경정녹설’에 대한 특징을

중국인들 특유의 낭만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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