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禹錫(유우석 772~842)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안사(安史)의 난’이라는 내전이 벌어져 국가의 기운이 급격히 기울어 수많은 백성들이 참담한 상처를 입었다.


안으로는 성정이 음험한 환관들에 의해 졸렬한 정치가 펼쳐지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약해진 중앙 왕실의 허점을 파고드는 호족 세력의 발호가 그치질 않았다.

당 왕실은 국력이 최고조를 발하던 성당(盛唐) 시기를 보낸 뒤 점차 쇠락의 길로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자(字)가 몽득(夢得)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나며 당대 천재소리를 들었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젊은 관료로서 왕숙문(王叔文)·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되었다.

권세를 독차지했던 정계의 실력자들에게는 매우 불리했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그들에게 밀려나 지금의 중국 동남부 안후이(安徽)성 조그만 현의 ‘통판(通判)’이란 자리를 받는다.

이 벼슬은 남송(南宋)에 가서야 나름대로 지방관을 규찰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직위지만 

당나라 시절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지방의 한직이었다.


중앙 왕실에서 권력 다툼에 밀렸다 싶은 그를 환대해주는 지방관은 없었다.

그의 상사는 골탕까지 먹이려 든다. 통판이란 벼슬에게 내주는 세 칸짜리 관사(官舍)를 두고서다.


지방관은 갖은 구실을 대서 그의 거처를 두 번 더 옮기도록 한다.

옮기면 옮길수록 그의 관사는 좁아지고 형편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받은 거처는 침대 하나에 책상과 의자 한 벌인 작은 방.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들여놓을 하찮은 거처였다.


그의 유명한 문장 ‘누실명(陋室銘)’은  이 무렵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자계(自戒)의 글이다.

글 제목은 ‘누추한 거처에서의 새김’이라는 뜻이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좋은 산일 터,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리라.

이 집이 누추하더라도 내가 닦은 덕으로 그윽할지니(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보기에도 한심했을 거처, 즉 '누실'에서 내보이는 유우석의 기개가 가상하다.

자신이 놓인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자신감은 스스로의 덕에서 비롯하는 것일 게다.


그 덕이란 반드시 도덕적인 기준을 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우석 본인의 속을 가득 채우는 실력과 사람 됨됨이다.


陋室銘(누실명) / 劉禹錫


水不在深有龍則靈(수부재심유룡칙령)
斯是陋室惟吾德馨(사시누실유오덕형)
苔痕上階綠草色入簾靑(태흔상계록초색입염청)
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담소유홍유왕래무백정)
可以調素琴閱金經(가이조소금열금경)
無絲竹之亂耳(무사죽지란이)
無案牘之勞形(무안독지로형)
南陽諸葛廬西蜀子雲亭(남양제갈려서촉자운정)

孔子云何陋之有(공자운하누지유)


산은 높아서가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하다 이르네.
이곳은 비록 누추하나 오직 나의 덕은 향기롭도다.
계단은 이끼 끼어 푸르고 풀빛은 주렴 발을 푸르게 비추는데
훌륭한 선비와 담소를 나누는데 왕래하는 비천한 사람은 없고
거문고를 타고 좋은 경전을 읽을 수 있구나.
음악 소리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관청의 문서를 읽는 노고도 없으니
남양의 諸葛亮(제갈량)의 초가집이요, 西蜀(서촉) 양자운의 정자와 같도다.
공자도 말하였지, 군자가 살고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라고....


陋 [lòu]                 
1.[형용사] (사는 곳이) 협소하다. 좁다. 누추하다. 초라하다.
2.[형용사] 견문이 좁다〔적다〕. 식견이 천박하다.
3.[형용사] 미개한. 문명화되지 못한〔않은〕. 좋지 않은. 케케묵다.


室 [shì]              
1.[명사] 실. 학교·기관·공장 등의 내부 업무 단위
2.[명사] 집. 실. [기관(器官)·기계 등의 내부 공간]
3.[명사] 방.


铭 [míng] 번체(銘) 새길 명
1.[명사] 명문. [금석(金石)이나 기명(器皿) 따위에 새겨 놓은 글]
2.[명사] 명. [금석(金石)·기물(器物)·비석 따위에 남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나 사물의 ...
3.[동사] (기물 위에 기념하기 위한 문자를) 새기다.


* 陋室: [lòushì] 누추하고 보잘것 없는 집.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铭:古代 器物에 새겨 자기를 警戒하거나 功德을 진술하는 文字를 “铭”이라 하고, 후에 一种의 文体가 되었다.

이러한 文体는 일반적으로 모두 對句를 사용하고,句式은 비교적 整齐되고,

朗朗上口(시문 등을 낭독할 때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유창하다.)하다.


* 在(zài): ~에 있다. 动词。
* 名(míng):出名,著名,名词가 动词로 작용한다.
* 灵(líng): (靈) 신령 령 1.[형용사] 총명하다. 기민하다. 영리하다.

2.[형용사] 재빠르다. 날쌔다. 날래다. 3.[형용사] 영험하다. 신통하다. 효력이〔효과가〕 있다.


* 斯:指示代词,此,这。是:~이다. 肯定을 표하는 判断动词.
* 馨 [xīn] 향기 형 1.[명사][문어] 꽃다운 향기. 분방(芬芳). 형향(馨香). 2.[명사][문어] 멀리 퍼지는 향기. 여기서는 品德이 高尚함을 말한다. 《尚书·君陈》:“黍稷非馨,明德惟馨。”。
* 苔痕上阶绿,草色入帘青:이끼 흔적이 계단 위에까지 자라고; 草色이 발안으로 비쳐 들어 푸르다.
* 鸿儒 [hóng rú] : 大儒, 여기서는 博学한 사람을 말한다. 鸿:“洪”과 같고,儒는 옛날 读书人을 말한다.
* 白丁 : 平民. 여기서는 어떤 学问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 调[tiáo]素琴:装饰을 하지 않은 琴을 弹奏하는 것을 말한다. 调:고르다. 조절하다. 여기서는 琴을 튕기는 것을 말한다.

素琴:장식을 하지 않은 琴
* 金经:지금도 学术界에는 여전히 争议가 존재하는데, 어떤 学者는 佛经(金刚经)이라 하고,

어떤 학자는 装饰이 精美한 经典(四书五经)으로 보고 있다. 金:珍贵한 것.
* 丝竹:琴瑟([qínsè] 거문고와 비파)、乐器의 总称, “丝”는 弦乐器를, “竹”은 管乐器를 말한다. 여기서는 奏乐의 소리를 말한다.


* 之:语气助词,不译。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사용하고,구절의 독립성을 없앤다.
* 乱耳:귀를 어지럽히다. 乱:形容词의 使动用法,使……乱,扰乱([rǎoluàn] 혼란시키다. 어지럽히다. 뒤죽박죽되게 하다. 어수선하게 하다.)
* 案牍 [àndú] : 官府의 公文, 文书.
* 劳形 [láoxíng] 身体를 피곤하게 하다. 劳:形容词의 使动用法,使……劳累. 形:形体、身体.
* 南阳:地名,지금의 河南省 南阳市. 诸葛亮이 出山하기 前에 일찍이 南阳 卧龙岗에서 隐居하고 농사를 지었다.


* 南阳诸葛庐,西蜀子云亭 : 南阳에는 诸葛亮의 草庐가 있고, 西蜀에는 扬子云의 亭子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诸葛庐과 子云亭 모두 남루하지만 居住하는 사람이 매우 有名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诸葛亮,字는 孔明,三国时 蜀汉의 丞相,著名한 政治家 및 军事家, 出仕前에 南阳卧龙岗에 隐居하였다.

扬雄,字는 子云,西汉时의 文学家,蜀郡 成都人. 庐:남루한 작은 집


* 孔子云:孔子说,云在文言文中一般都指说。选自《论语·子罕》篇:“君子居之,何陋之有?” 作者在此去掉君子居之,体现他谦虚的品格。
* 何陋之有:즉 “有何之陋”,宾语前置에 속한다. 之,助词,强烈한 反问을 표시하고,宾语前置의 标志는 不译한다.

 全句를 번역하면: 무슨 남루함이 있는가? 孔子가 말한 그 구절은 《论语·子罕》篇에 보인다. :

 “君子居之,何陋之有?” 여기서는 孔子의 말로 자기 스스로가 “君子”임을 비유하고,全文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화룡점정하고,全文에서 주제를 반영하는 어구이다.
* 谈笑有鸿儒:谈笑에는 学识渊博한 사람들이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속 누실은 한 개쯤은 있을 수 있다.

그게 학벌이든 신체적인 결함이든 남에게 자랑스레 밝히지 못할 곡절 하나씩은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누실의 반대어는 고대광실(高臺廣室)이리라. 그

러나 보기에 호화로운 집에 몸을 들이더라도 됨됨이와 교양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다면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라는 뜻이며,

'명(銘)'은 대개 쇠북이나 솥, 비석 따위에 스스로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길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새긴 글을 말한다.


작자는 자신이 놓인 초라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드러내면서,

일세를 풍미한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과 한나라의 양웅(揚雄)이 살던 초라한 집을 언급하여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나아가 마지막 구절에서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군자(君子)로 끌어올리고 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 거하려고 하였을 때 누군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이후 배도(裵度)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태자빈객 겸 검교예부상서가 되어 세간에서는 '유빈객'(劉賓客)으로 불렸다.

유종원(柳宗元)과 교분이 매우 두터워서 '유유'(劉柳)라고 병칭되기도 했으며,

항상 백거이(白居易)와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등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유백'(劉白)이라고도 병칭되었다.


그의 시는 통속적이면서도 청신하며 〈죽지사 竹枝詞〉가 유명하다.

철학저작인 〈천론 天論〉에서는 천·인(天人)의 구별에 대해 논증했다.


즉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음덕설(陰德說)을 반박하고 '하늘과 인간은 상승(相勝)한다'는 설과

'상용(相用)된다'는 설을 주장하여 하늘이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더이상 주재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유신론(有神論)에 대한 근원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즉 법제가 잘 행해져서 상벌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은 천명(天命)에 바라는 것이 없겠지만,

만일 법제가 흐뜨러져 있어서 상벌이 분명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오로지 천명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불교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다.

저서로는 유빈객집(劉賓客集) <유몽득집(劉夢得集)이라고도 함>이 있다.












장강(長江)과 착월대(捉月臺)   동영상 출처: EBS
임종가(臨終歌) / 李白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中天儶兮力不濟(중천최혜력부제)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가 몇 천 리에 이른다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 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천약불애주,주성부재천)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지약불애주,지응무주천)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술을 뜻하는 글자를 가진 별과 땅 이름이 있으니,

하늘과 땅도 술을 좋아함이 틀림없기에 술을 마시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별 이름이나 땅 이름은 말할 것 없이 인간이 붙였겠지만 시인은 짐짓 모른 체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도 청주를 성인에 비기고 막걸리를 현인이라 하니,

청주와 탁주를 모두 마신 나라 따로 신선을 구하려고 애쓸 것이 무언가 바로 내가 신선인데.

술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에 합치되는 것이라,


다만 술 마시고 느끼는 흥취를 얻으면 되나니 이 취중취를 술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말지니라.

그들이 이 맛을 알게 되면 세상의 술이 동이 날 것이 아닌가,

또 주중취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다.


하루에 3백 잔 술을 마셔야 성이 차고, 임금이 불러도

“저는 酒中仙(주중선, 술 속의 신선 곧 술로 속세의 일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가지 않은 이백이니,

이러한 작품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당투(當塗)와 차이스지(采石磯)    동영상 출처: EBS

이백과 두보의 교류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에 살았는데, 두보가 이백보다 11살 어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744년 봄으로, 이백은 한림공봉으로 재직하다가 궁궐에서 물러나서 낙양을 노닐고 있을 때였고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에 천하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백은 이미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으며, 두보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각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두보는 이백을 거의 우상으로 숭배할 정도로 우러러 보았지만 이백에게 있어서 두보는 아직 한갓 문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술을 마시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나이를 잊은 우정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듬해에 다시 한번 더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고적 등과 함께 산동에서 만나서 어울려 노닌 후 헤어지고는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두보는 항상 이백을 흠모하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현재 그들이 서로를 위해 지은 시는 두보의 시가 10여 수 정도 남아 있고 이백의 시는 3수가 남아 있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春日憶李白(춘일억이백) - 봄 날에 李白을 생각하며 / 杜甫(두보)

白也詩無敵,(백야시무적) 이백은 시가 무적이니 
飄然思不群.(표연사불군) 표연하여 그 생각이 남들과 달라서,
淸新庾開府,(청신유개부) 청신함은 유신과 같고 
俊逸鮑參軍.(준일포참군) 준일함은 포조와 같네.
渭北春天樹,(위북춘천수) 위수 북쪽에는 봄 하늘의 나무 
江東日暮雲.(강동일모운) 강 동쪽에는 해질 무렵의 구름.
何時一樽酒,(하시일준주) 언제나 한 동이 술로 
重與細論文.(중여세논문) 다시 더불어 자세히 글을 논할까? 
두보(712~770)의 오언율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다. 
봄날에 이백(701~762)을 생각하는 두보의 이 시에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위수(渭水)의 북쪽인 위북은 당시 두보가 머무르고 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강동은 이백이 떠돌던 강남(江南)을 말한다.

이 시는 비교적 많이 읽힌 작품으로 玄宗 天寶(현종 천보) 6년(747) 36세 때에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첫머리에 ‘白也’라 하여 이백을 높이지 않았으나, 이어서 ‘無敵’이니 ‘不群’이라 표현하여

최고의 讚辭(찬사)를 보내고, 이어 2연[3~4구]에서는 유신과 포조를 들어 그를 찬양했다.

3연[5~6구]에서 전환하여 그를 그리는 정을 표출하여 ‘그대가 없는 여기 장안의 봄이 무슨 뜻이 있으며, 그대가 있는 강남의 저녁노을 구름도 내가 없으니 제 빛을 내랴.’하고 읊어, 이백을 향한 지극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 구절은 특히 對句(대구)가 멋져서‘渭水江雲(위수강운), 暮雲春樹(모운춘수), 雲樹之懷(운수지회), 春樹暮雲情(춘수모운정)’ 이라는 새로운 語彙(어휘)가 생기게 되어 ‘먼 곳의 벗을 생각하는 간절한 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니, 시인의 어휘 창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는 언제 만나 함께 술 마시며 시와 글에 대해 논할 수 있으랴 하고 시인답게 끝맺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는 오직 이백뿐이라는 뜻을 숨겼다. 그런데도 이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두시언해’에서 이백과 관련된 시는 모두 8수인데, 이 시 외에 ‘冬日有懷李白(동일유회이백)’ ‘夢李白(몽이백)’ ‘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송공소보사병귀유강동겸정이백)’ ‘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여이12백동심범10은거)’ ‘贈李白(증이백 2수)’ ‘天末懷李白(천말회이백)’ 등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744년, 당 현종 때인 천보(天寶) 3년 낙양(洛陽)에서 처음 만났다. 칭화(淸華)대 중문과 교수였던 원이더(聞一多·1899~1946)의 표현처럼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듯 중국 역사상 가장 신성하고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다.

둘은 1년 여 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처음 만난 지 3년 뒤인 35세 때다.

시에 나오는 유개부는 북주(北周)의 문학가 유신(庾信·513~581)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지내 ‘유개부(庾開府)’로 불렸다.

포참군은 참군(參軍) 벼슬을 한 남북조ㆍ송대(宋代)의 시인 포조(鮑照·414?~466)다. 고려 후기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시에도 ‘淸新庾開府 終始郭汾陽(청신유개부 종시곽분양)’이라는 대목이 있다. 시풍이 청신함은 바로 유개부요, 부귀로 시종하기는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로다, 이런 뜻이다.


夢李白(몽이백)- 꿈 속에 이백을 보다 / 杜甫(두보)

浮雲終日行(부운종일행) : 뜬 구름 종일토록 하늘을 떠다녀도
遊子久不至(유자구불지) : 떠난 친구는 오래도록 오지 않네
三夜頻夢君(삼야빈몽군) : 한밤에 자주 그대를 꿈속에서 보니
情親見君意(정친견군의) : 우정의 친함으로 그의 마음을 보노라
告歸常局促(고귀상국촉) : 돌아간다 말할 때 항상 풀 죽어 보이고
苦道來不易(고도래불역) : 돌아오기 어렵다 괴롭게 말하네
江湖多風波(강호다풍파) : 강호에 풍파 잦고
舟楫恐失墜(주즙공실추) : 배 젓는 노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네
出門搔白首(출문소백수) : 문 나서며 흰머리 긁는 것이
若負平生志(약부평생지) : 평생의 뜻을 저버린 듯 하구네
冠蓋滿京華(관개만경화) : 높은 벼슬아치들 서울에 가득한데
斯人獨憔悴(사인독초췌) : 이 사람 내 친구는 홀로 얼굴 수척하다
孰云網恢恢(숙운망회회) : 누가 말했나, 하늘의 그물이 한없이 넓다고 
將老身反累(장로신반루) : 늙어서 몸이 도리어 법망에 걸려들었네
千秋萬歲名(천추만세명) :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해도
寂寞身後事(적막신후사) : 죽은 뒤의 일은 적막하기만 하다. 
​[참고]
* 중국의 한시의 최고봉은 당시인데 양한시대를 거쳐 육조시대에 이르러 시의 평측법과 압운법이 완성되어 
중국발음으로 한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노래가 된다.
이 당나라 시대에 두 천재시인 이백과 두보가 열 살 차이로 동시대에 태어나 낙양에서 조우하기도 했다.[이백이 11세 많음]
도가사상에 바탕한 이백의 시가 초월적 상상력에 비견할 자가 없다면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두보의 사실주의 시는 
현실비판 측면에서 당할 자가 없다.

贈李白(증이백) - 이백께 드리는 시 / 杜甫(두보)

秋來相顧尙飄蓬,(추래상고상표봉) 가을 와 서로 돌아 보니 아직도 떠도는 쑥인데, 
未就丹砂愧葛洪.(미취단사괴갈홍) 단사를 이루지 못해 갈홍에게 부끄러워한다.
痛飮狂歌空度日,(통음광가공도일) 통쾌하게 마시고 미친 듯 노래 부르며 헛되이 날을 보내거니와, 
飛揚跋扈爲誰雄.(비양발호위수웅) 날아 오르고 뛰어 넘으니 누구 위해 영웅인양 하는가.

魯郡東石門送杜二甫(노군동석문송두이보) -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다 / 李白

醉別復幾日,(취별부기일) 취하여 이별한 지 또 며칠이 지났던가? 
登臨徧池臺.(등림편지대) 못가의 누대를 두루 올라 굽어보았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의 길가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금 황금 술단지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낙사수) 가을이 되니 사수의 물결은 낮아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새벽빛으로 조래산은 환해졌네.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 날리는 쑥처럼 각자 서로 멀어지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손에 든 술잔이나 비우세

戱贈杜甫(희증두보) - 두보에게 농담조로 주다 / 李白

飯顆山頭逢杜甫,(반과산두봉두보) 반과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頂戴笠子日卓午.(정대입자일탁오) 머리에는 삿갓을 썼으니 대낮이라네. 
借問別來太瘦生,(차문별래태수생) 이별 한 뒤로 너무 말랐다고 물어보니 
總爲從前作詩苦.(총위송전작시고) 여태까지 시 짓느라 고생해서 그렇다네. 
 * 飯顆山= 일명 長樂坡라고도 하여 서안시 근처에 있는 산이라 하는데 語意대로 말하자면 밥풀산이 된다
別來= 헤어진 뒤에
太瘦生[태수생]= 매우 수척한 서생, 시를 짓느라 고생해서 수척해진 것을 뜻함
總爲[총위= 모두 ~ 때문이다.
註: 이 시는 이백이 44세 때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러면 두보는 32살 때이니 한참 후배로 생각했을 것이다. 
飯顆山이니 太瘦生이니 하여 詩題처럼 두보를 희롱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마는 마지막 두 句를 보면 
戱謔은 하면서도 깊은 정이 베어 있어 희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로 인해 詩作으로 고생하는 시인을 보고 태수생이라 부른다.
이백의 시가 폭포수 같이 시원 하다면 두보는 밥풀을 세이듯 한자 한자 따지는 꼼꼼한 시인으로 
서로 상반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 李白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에 이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리길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이백은 만년에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거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그도 체포되어 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에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이백은 자신의 사면 소식을 접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은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라는 뜻이다. 백제성은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산성이며,
강릉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으로 두 곳의 거리는 양쯔강의 물길로 약 300㎞이다. 
양안(兩岸)은 무산(巫山)과 협산(峽山)의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그 사이로 양쯔강이 흘러가는데 강폭이 좁아 유속(流速)이 최고 시속 24㎞에 이를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또 이곳은 원숭이들이 많은 지역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백은 한시라도 빨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아침 일찍 서둘러 백제성을 떠나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강가 양쪽 언덕에서 쉼없이 울어대던 원숭이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세찬 물살에 가벼워진 배는 겹겹이 쌓인 산들을 빠르게 지나 천리길 같은 강릉에 하루만에 도착한다.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빠른 물살처럼 경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이백의 명작 중의 하나이다. 
백제성에서 무협을 거쳐 호북성의 강릉까지 뱃길로 천 3백여 리요, 그 중 골짜기 길이가 7백 리나 되는 먼 거리인데, 
그 먼 길을 아침에 떠나 하루에 닿았다 하니, 강의 흐름의 빠름과 배가 얼마나 빨리 떠내려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강기슭의 원숭이 울음이 자꾸 뒤로 뒤로만 밀린다 했다. 
아침노을, 빠른 강 흐름과 똑같이 빠른 배, 산으로 첩첩이 쌓인 강 언덕 등 敍景(서경) 중심의 작품이다.
白帝 : 白帝城(백제성). 重慶市(중경시)와 湖北省(호북성) 사이의 巫峽(무협) 부근에 있는 성.1)
彩雲 : 빛깔이나 무늬가 있는 구름.
江陵 : 지금의 호북성 荊州市(형주시).
啼不住 : 원숭이 울음소리가 한 곳에서 계속 들리지 않고 없어져 버림. 배가 빨리 달리는 모양을 강조한 말임.
輕舟 : 가볍고 빠른 작은 배.


청풍정(淸風亭) 이백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던 곳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將進酒(장진주)  모택동은 당대 문장과 문필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청풍정 뒷편에 있다.


將進酒(장진주;술 한 잔 받으시오) / 李白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바다로 내 닫아서는 돌아오지 않았음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 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 밝은 거울에 비친 서글픈 백발,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때 백설 됨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 젊어 득의 찰 때 즐기기를 다할지니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금 술통 헛되이 달빛아래 두지 말지어다.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쓸모가 있었음인데,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돈이야 흩어졌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니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염소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기로 작정하면 삼백 잔은 마실 일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거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노래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귀 기우려 들어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 맛있는 음식 귀 할 것도 없으니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원커니 이대로 취하여 부디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들도 지금 모두 사라져 없고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 잘 마시던 이들의 이름만 남았다네.
晉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이 평락관에서의 연회,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히도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여보시게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라다 하나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어서 가서 술 사오시게 같이 한잔 하자고야
五花馬千金구(오화마천금구)     오화마,천금구 따위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어서 술과 바꿔오시게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우리 함께 더불어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구:가죽옷 구(求+衣)

주)
1. 고당 : 고대광실, 호화주택
2. 청사 : (청년 시)의 검은머리.
3. 잠부자 : 이백의 친구 잠삼(岑參)
4. 단구생 : 이백의 친구 원단구(元丹丘)
5. 진왕 : 조조의 셋째 아들, 칠보시로 유명한 조비의 동생인 조식(曺植). 진왕에 봉해졌고, 시호가 사(思)이므로 진사왕이라 한다.
6. 평락 : 낙양의 평락관.
7. 경수 : 지금 바로....해야 한다
8. 고취 : 사오다. 고(沽)=매(買)
9. 오화마 : 다섯 가지 털 무늬가 있는 명마.
10. 천금구 : 천금의 가치가있는 비싼 가죽 옷.





취라산 삼태각


연벽대(聯璧臺)


 30cm/40cm 정도의 크기로 깊게 각인된 글씨에는 붉은 페인트가 거칠게 칠해져 있는데

그 글씨 바로 아래에 조금 작은 글씨로 ‘착월대(捉月臺)’라는 각인 또한 뚜렷하게 보인다.

글자 그대로 달을 잡으려한 바위라는 뜻.


여기에서 술을 마시던 이백이 술에 취하고 강물에 비친 달빛 경치에 취해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암반에서 강의 수면까지 50여m는 될 듯한데 암반이 안으로 굽어 그 곳에서 몸을 던지면

아무런 지장없이 곧바로 강으로 떨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백은 소년 시절에 이미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격은 활달하였다.

깊은 학식과 검술를 갖춘 이백은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어느 날, 현종은 이백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였다.

"벼슬 한 자리 내리시려나 ?"
이백은 가슴이 부풀었으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잔치 때, 짐 곁에서 시나 좀 지어 주고 지내시오."
그것은 궁정 시인이 되라는 부탁이었다.


이백은 궁정에서 시를 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면서 지냈다. 

'아 ! 고향에 가고 싶구나.'


이백은 궁정 생활이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하루는 이백이 궁궐을 빠져나와 번화가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잔뜩 취했을 때, 이 무렵의 명가수인 이귀년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시를 지으시라 하오.그것을 내가 불러야 하는데………."
이귀년은 술이 곤드레 만드레 취한 이백을 들쳐 업고 궁궐로 돌아갔다.

당시 궁중 실력자이던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백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백의 신발을 벗기는 고력사(高力士)


당나라 현종은 흥경궁 공원에서 붉은빛, 자줏빛, 분홍빛, 새하얀 빛의 모란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가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귀비(楊貴妃)와 빠져 지냈다.


양귀비와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백(李白)을 불러오라 명한다.

공교롭게도 이백은 잔뜩 취해 있다.


황제 앞에 불려 와서도 여전히 취한 상태다.

현종은 그를 곁으로 올라오게 한다.


"내 신, 신 좀 벗겨."
이백은 당대 궁중의 실력자 환관 고력사에게 발을 내밀었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고력사이건만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노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만 안취했으면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물을 얼굴에 뿜어도 이백은 술이 깨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백에게 현종이 어서 시를 지으라고 재촉한다.

붓을 집어든 이백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 내려간다.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이귀년은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모란)과 미인(양귀비) 덕분에

온갖 근심을 날리고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웃음 짓는 군왕(현종)을 노래했다.


하지만 현종과 양귀비를 모두 만족시킨 이 시가 뜻밖에도 화근이 될 줄이야!

조비연(趙飛燕)도 양귀비보다 못할 거라는 구절이 문제였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왕실을 망가뜨린 악녀의 전형이다.

물론 이백은 조비연을 미인의 대표 격으로 인용했지만,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야 했던 고력사가 이 구절을 트집 잡아 양귀비에게 참소한다.


"이백은 귀비를 한나라 성제의 총희인 조비연에 비유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양귀비는 이 말을 듣고 이백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종은 이백에게 궁을 떠날 것을 명한다.

〈청평조의 가사〉에는 사실 양귀비를 비난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이 시는 이백의 명작이다.

이백은 스스로를 ‘술에 취한 신선’이라고 했다.


이백은 청평조사에서 ‘경국(傾國)’이라는 말로 미인을 표현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 황제가 미혹되어 나라의 위기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에겐 죄가 없다.

미혹된 황제가 죄인일 뿐. 현종도 그리고 태종도 자신의 갖가지 욕망 앞에서 무너졌다.

그들의 진짜 죄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죄다.


淸平調詞 -1  청평조(淸平調)라는 음악의 곡조에 맞추어 지은 가사(歌詞)라는 뜻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구름은 옷을 꽃은 얼굴을 생각하게 하고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꽃에 맺힌 이슬은 짙게 영그네.
만일 군옥산 머리에서 본 님이 아니라면
필시 달 밝은 요대에서 만난 님이 틀림없네.


淸平調詞 -2 


一枝濃艶露凝香 일지농염노응향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可憐飛燕倚新粧 가련비연의신장

한가지 농염한 모란꽃에 엉긴 이슬 향기
무산의 구름비 하염없는 단장의 슬픔이여.
한나라 궁중의 누구와 비할소냐.
조비연이 산뜻이 단장하여 아리땁구나.


淸平調詞 -3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양상환
常得君王帶笑看 상득군왕대소간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沈香亭北倚欄干 침향정북의란간

모란꽃과 경국지색 서로 반기니
왕은 웃음 띄우고 바라보네.
봄바람에 끝없는 한을 풀어 녹일 때
미인은 침향정 북쪽 난간잡고 기대네.








이백 친필 1 시권장류(詩卷長留)


두보(杜甫)의 시 - 송공소부사병귀유강동겸정리백(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747年)
공소부가 병으로 사임하여 강동으로 돌아가 쉬려 하니 송별을 겸해서 이백에게 드린다


巢父掉頭不肯住,(소부도두불긍주)
東將入海隨煙霧。(동장입해수연무)
소부는 머리를 흔들며 머물지 않으려 하고,
강동에서 장차 바다로 가 안개 따라가려 하네


詩卷長留天地間,(시권장류천지간)
釣竿欲拂珊瑚樹。(조간욕불산호수)
길이 남을 시집을 세상에 남겨두고,
낚싯대로 산호수에 앉은 먼지 터네。


深山大澤龍蛇遠,(심산대택룡사원)
春寒野陰風景暮。(춘한야음풍경모)
깊은 산 큰 못으로 용과 이무기 멀리 떠가고,
추운 봄날 음산한 들녘에 풍경은 저물어 가네。


蓬萊織女回雲車,(봉래직녀회운거)
指點虛無是征路。(지점허무시정로)
봉래산 직녀가 구름수레 되돌려,
허황된 점 지적하니 이것이 가야 할 길이네。


自是君身有仙骨,(자시군신유선골)
世人那得知其故。(세인나득지기고)
본래 그대 몸은 비범한 골격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까닭을 알겠는가。


惜君只欲苦死留,(석군지욕고사류)
富貴何如草頭露。(부귀하여초두로)
다만 그대를 아끼기에 한사코 머물게 하고 싶지만,
부귀란 것이 어떤가 풀잎 끝 이슬이거늘。


蔡侯靜者意有餘,(채후정자의유여)
清夜置酒臨前除。(청야치주림전제)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었네。


罷琴惆悵月照席,(파금추창월조석)
幾歲寄我空中書。(기세기아공중서)
거문고 마치고 서글프게도 달은 자리를 비추는데,
그 어느 해에나 나에게 하늘서신 보내려나


南尋禹穴見李白,(남심우혈견리백)
道甫問訊今何如。(도보문신금하여)
강남에서 우 임금 무덤 찾아 보다가 이백을 만나거든,
두보가 지금은 어떠신지 묻더라고 안부 전하게。


*孔巢父: 徂徠山 竹溪六逸의 한 사람 -> 李白: 魯郡東石門送杜二甫 참조
學問을 좋아했고 永王燐이 반란을 일으키고 幕下로 불렀으나 거절했다
*珊瑚樹: 庭園樹의 한 種類
*蓬萊: 方丈, 瀛洲와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苦死: 한사코, 반드시
*蔡侯靜者意有餘,清夜置酒臨前除: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는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宣王의 명을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해 죄인이 되어 오랏줄에 묶인 것을 비유하여 富貴何如草頭露의 부분의 부귀란 것이 덧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劉向新序 雜事二 50>에  <전략> 蔡侯之事故是也。蔡侯南遊乎高陵,北經乎巫山, 逐麋麇麞鹿,彉谿子隨, 時鳥嬉遊乎高蔡之囿, 溢滿無涯,不以國家為事,不知子發受令宣王, 厄以淮水,填以巫山, 庚子之朝,纓以朱絲,臣而奏之乎宣王也。<후략>
*蔡侯: 蔡나라(BC11c~BC447)는 주대에 중국에 존재한 侯國이다. 諸侯의 성은 姬이며, 爵位는 侯爵이다. 蔡侯는 蔡나라 마지막 諸侯 姬齊(BC450~BC447)의 爵位다.
*禹穴: 禹 임금이 藏書한 동굴로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다. 禹임금이 巡狩 중 會稽山에서 崩御하여 그 자리에 장사했다.

*道: ~로부터


이백(701~762)은 장안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올라 여행을 하다가 두보(杜甫)를 만나고 두 사람은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시인은 함께 하남 지방과 산동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백은 두보와 헤어져 각각 여행을 떠났다. 이백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712~770)는 양양에서 태어나 하남성 공현으로 이사하였다.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문에서 자란 두보는 7살 때 (봉황시)를 지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두

보는 20살 때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썼다.


"과거나 한번 볼까 ?'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보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두보는 낙양에서 이백과 작별하고 다시 장안으로 올라왔다.

두보는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현종이 실시한 시험을 보았으나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간신 이림보는 자기 보다 나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까봐 시험을 본 사람 전체를 낙방시켰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며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는 것까지도 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권력자들의 향락과 사치를 미워하는 시를 지었다.


그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반란평정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백은 영왕 인(璘)의 요청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왕이 숙종에게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는 바람에 이백도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은 강남일대를 방랑하다가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여러 곳을 방랑하던 두보는 낡은 배 안에서 59살 때 병으로 죽었다.
이백과 두보는 각각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많은 명작을 후세에 남겼다.

이백은 시선(詩仙) 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백 친필 2














이백기념관(李白記念館)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한

채석기(采石磯) 풍경 명승구 내에 있다.


풍경구의 4대편구(片区) 특색은 각기 달라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는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과 관련된 문화를 위주로

전쟁문화와 종교문화가 곁들어진 지역이며 복당편구(濮塘片区)는 양호한 생태환경을 기초로

대나무 경관과 대나무 문화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대한 감상과 휴식 위주의 지역이다.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는 이백문화와 사조문화(谢脁文化) 위주로 종교문화와 휴식오락 기능이 추가된 관광유람구이며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는 자연생태경관을 특색으로 하고 있는 관광지역이다.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의 지형은 매우 험준하여 금릉(金陵)으로 향하는 문호역할을 하며

역대 전략적 중요지역으로 춘추시기부터 민국 연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는 20여 차례의 유명한 전투가 발생하였다.


경내의 광제사(广济寺)는 삼국시기 적오(赤乌) 3년(239) 건립된 중국 초기 불교사찰의 하나이며

소주화산(小九华山)의 지장왕묘(地藏王庙)도 한때 번성하였었다.







태백루(太白樓)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의 글씨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 · 적선루(謫仙樓)라고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말년에 차이스지 부근의 당투현[當塗縣]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얼마 뒤 사람들이 그를 기려 지은 사당이 청련사이다.


산세에 따라 축조되었으며, 주루(主樓)와 2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정원은 전원과 후원으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주루가 있다.


홑처마 헐산식(歇山式) 구조의 대문(大門)은 아치 모양의 문이 3개 있다.

가운데 문에는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라고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벽에는 〈중수태백루비기(重修太白樓碑記)〉와 이백의 사적을 소개한 비각 등이 있다.


주루는 누각식(樓閣式) 목조 건물로, 구조가 교묘하고 장식이 화려하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겹처마 헐산식 지붕이다.


3층 지붕 아래에 '태백루'라고 크게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1층에는 이백이 차이스지를 유람하는 그림을 담은 커다란 병풍이 있고,

2층과 3층에는 황양목(黃楊木)으로 조각한 이백의 입상(立像)과 와상(臥像)이 있다.


벽에는 송나라 화가 왕단(王端)이 그린 인물화와 청나라 시인 정섭(鄭燮)이 그린 묵죽도(墨竹圖)가 걸려 있다.
차이스지의 절벽에는 착월대(捉月臺)라는 튀어나온 돌이 있는데,

술에 취한 이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이 돌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차이스지 부근에는 이백의 의관총(衣冠冢)도 있는데,

어부들이 강 하류에서 그의 의관을 발견하고는 당투현에 매장하였다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인터넷에 꽤 많은 펌글들이 검색이 되는 바, 처음 인터넷에 게재된 곳이 어디인지 출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ㅡ 서울대 허성도 교수의 2010년 강연내용 개제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746886.html


사회여성

이화민주동우회 창립 주도 박혜숙 열사 추모

등록 :2016-06-05 18:47



이화민주동우회는 5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유가족과 함께 박혜숙 열사의 추모제를 열고
 ‘공적 안내판’을 세웠다. 박 열사는 1972년 이대 약대에 입학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부회장을 비롯
민가협 결성에 참여했고, 위암 투병중에 건강사회를 위한 전국약사회와 이민동 창립을 주도하다 2004년 별세했다.
명동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민청련 운영위원장으로 고초를 겪은 최민화씨의 부인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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