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9 08:00 김삼웅

 

 


아직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함석헌 필화사건’이 또 있었다.
1972년 9월 박정희의 유신변란 직전이다.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은 과도체제로 김홍일 당수가 이끌고 있었다. 당기관지 <민주전선>은 함석헌을 인터뷰하여 1면 왼쪽 12단 크기로 실었다. 당시 야당은 분열된 상태이고 정부는 8ㆍ3긴급명령을 비롯, 유신쿠데타를 앞두고 음울한 분위기였다. 함석헌은 <자유는 자유로만 얻어진다>는 제하의 인터뷰에서 역사, 인권, 세계사, 시국 전반에 걸쳐 거침 없이 토로하였다. 발췌한다.

“이땅은 남북에 도사리고 있는 몇몇의 지배자ㆍ권력자들의 나라가 아니고 5천만 민중의 나라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주벌판 우거진 버들숲을 후려내고 백두산 천지에 내린 하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운 것도 민중이요, 한반도 엉그러진 골짜기 가시덤불, 자갈밭을 고이 고르고 5대강 언덕 위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영원한 이상의 부름을 들어 금수강산의 글월을 짜낸 것도 민중이요, 동해의 쉴날 없이 들이치는 맑고 흐린 물결과 싸우며 하늬바람 마파람의 끊임없이 오고가는 부드럽고 사나운 날씨에 시달리어 5천년 파란곡절의 역사를 지켜온 것도 민중이다.”

“단군을 우리 민중이 세웠고 동명을 우리 민중이 뽑았으며 왕건을 우리 민중이 낳았고 사육신 생육신을 우리 민중이 길렀다. 삼신산 불로초를 캐어 신선을 기른 것이 민중, 이 씨알의 얼이라면 삼강오륜으로 예의지향을 열어 선비로 하여금 뽐내게 한 것은 이 씨알의 힘이라 할 것이요, 만 이천봉 금강 속에서 보살의 나라를 장엄시킨 것이 이 씨알의 슬기라면, 삼교포함 인내천의 주장 아래 제폭구민의 깃발을 든 것은 이 씨알의 의지라 할 것이다.”

“눈을 들어 세계를 보자. 국제정세의 변화란 세상이 알다시피 진정한 의미이거나 아니거나 역사의 대세는 화해무드다. 해방 이후 우리는 동서 양극의 틈바구니에 끼어 양단된 분단 민족으로서 통일을 바라왔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를 산채로 허리를 잘라 두 토막에 내고 그 핏덩어리에 소위 원조요, 협상이요, 국제회의요 하는 꼭두각시의 줄을 걸어 서로 싸움을 부추겨가면서 자기네의 그 침략주의 약탈주의의 실험을 해왔다. 미국이 차츰 미온적이며 중공, 일본의 수작이 저러는데, 우리 민족은 어쩌려는가?”

“지배자들의 잘못은 국민을 내놓고, 내놓을뿐 아니라 억누르고, 억누르다 모자라면 달래고 달래서 아니되면 속여서라도 혼자서만 해먹으려는 케케묵은 소위 지도자의 의식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국민의 지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폭력으로 눌렀고, 폭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민보다 외국세력과 더 친했고, 그 결과 대국에 대해 속국처럼 꼬리치며 쳐다 봐야 하는 따라지 정치가 됐다.”

“이럴 때 일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지식인들이 뼈가 빠진 무골충이 됐다. 이상한 일이다. 학문이람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서양의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은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느 정부나 정치가 정말 민중을 가르치고 선정을 하느냐는 그 언론정책을 보면 안다.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이유를 무엇에 부치거나 민중을 속이고 억누르려는 뱃속이다.

그럼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는 경우에 어떻게 이를 되찾느냐? 우리의 오늘 당면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서 언론자유를 되찾을 것인가, 회답은 간단하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언론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만 해가지고는 소용이 없다. 자유라는 이름만 불러서 자유는 오지 않는다. 실제로 죄악적인 법을 무서워말고 할 말은 하고 쓸 글은 씀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면 감옥도 가고 징역도 살런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는 감옥에서 자기 알을 까고 나온다. 많은 자유투사들이 감옥에서 알을 까고 나올 때 언론자유는 얻어질 것이다.” (주석 20)

박정희 정권은 이 신문을 당원과 일반에 배포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제삼지 않기로 신민당과 ‘묵계’하였다. 해서 함석헌의 이 인터뷰 기사는 보관지에만 남게 되었다.  

주석
20> <민주전선>, 1972년 9월 15일치(제87호), 인터뷰어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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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8 08:00 김삼웅

 

 

대선이 끝난 뒤 복간된 <씨알의 소리>는 8월호 복간호에 이어 제4호인 9월호를 9월 15일자로 발행하였다.
함석헌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첫가을 소식>, <민족통일의 길>, <한 사람>, <달라지는 세계의 한 길 위에서>를 집필하고, 그 무렵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안병무가 <민족적 저항>을 썼다. 함석헌이 쓴 <민족통일의 길>은 시론 이상의 비중을 담은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여당이 남북협상, 가족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시점이다.

들어봐라. 남북협상을 그렇게 큰마음 먹고 할진대 왜 일찍이 김구 선생을 못 따라갔던가? 왜 그를 용공주의로 몰아치며 욕했고 왜 죽여버렸나?

가족찾기운동을 그렇게 인도주의 정신으로 벌려야 할줄 알았을진대 왜 학생들이 남북의 젊은이가 만나 아리랑이라도 서로 같이 불러보자 했을 때 좌익이라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못하게 했던가?

평화통일이 그렇게 대세에 합한 옳은 일인줄 알았을진대 왜 이태껏은 한 마디도 없었으며, 평화 소리만 해도 이북 공산당 편이라고 비난해 입도 못 열게 했던가?

왜 중립론을 전에 하고 남이 하면 잘못이고 내가 하면 좋을 일인가? 옳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처음 생각해 낸 독창적인 것처럼 전매특허를 하려나?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것은 무식한 소리라고 먼저 말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때는 들은 척도 않고 묵살하더니 요새 와서는 국시를 변경했는가? 국시도 넥타이처럼 남 봐가며 바꿔 매는 것인가? 국시라고 고정불변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치려면 그 이유를 아울러 국민 앞에 밝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주석 14)

함석헌은 이 글에서 남북 대결의 여러 가지 문제를 분석하면서 “우리 남북 문제에 있어서도 남이 북을 정복하거나 북이 남을 정복해서 문제의 끝이 날것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될 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 해도 못쓴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눈을 부빌만하다.

프랑스혁명의 표어가 자유ㆍ평등ㆍ박애 아니었나? 미국은 그 자유를 써먹고 자유진영의 대장이 됐고, 소련은 평등을 팔아가지고 공산진영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이 싸운다. 자유없는 평등 없고 평등없는 자유 없건만 그것이 국가라는 집단주의,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의 종이 되면 그런 모순이 생겼다. 이제 하나 남은 사람을 누가 써서 자유와 평등을 다 살려 이 자멸에 임한 인류를 건질까? 사람은 큰 놈, 강한 놈, 있는 놈, 아는 놈은 못 하지.

세계의 행길에 앉는 수난의 여왕, 그 부끄러운 역사의 안 면(面)은 무엇일까? 사랑의 주림, 그럼 너는 사랑을 못한단 말이냐?
  (주석 15)

함석헌은 1971년 10월에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 <고전풀이>와 <여행기>를 쓰고,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와 비폭력>을 번역 게재하였다. 지명관의 <70년대의 한국상>도 실렸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는 1946년 월남한 이후 25년 만에 고향(북한)에 띄우는 공개서한이었다.

“어느 땐들 서로 잊을 수 있습니까? 지금도 늘 꾸는 꿈, 꿈만 꾸면 언제나 평안북도 용천 우리 집에 가 있습니다. 헤어진지 30년이 거의 다 돼 오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단 말이 있으니, 모든 것이 많이 변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강산이 변할지언정 마음이 변할 리야 있습니까? 또 생각이 혹시 좀 달라지는 때가 있다손, 너도 나도 한국놈이요, 조선놈인 그 바탕에서야 어떻게 변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 돼야 합니다. 하나 돼야 삽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도 없고 산다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잘해서 해방 후 오늘까지 양편에서 한 일이 옳고 발라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날까지 쌓아 온 역사적인 속알의 덕택으로 이만이라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상의 물려준 유산으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것이 민족적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이 싸움 즉시로 그만두고 하나돼야 합니다. 이 이상 더 가면 간신히 남아 있는 이 정신이 아주 없어져 버리고, 소나 강아지처럼 중국사람 혹은 일본 사람의 가축노릇을 하고 기계노릇을 할지언정 한국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방심 마십시오. 시작이 급합니다.”
(주석 16)

함석헌은 또 이번 호에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를 집필했다.
5ㆍ16쿠데타를 당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의 소회였다.

“‘군인정치’라 했지만 내 참 느낌대로 한다면 ‘정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어떻게 이것을 정치라고 하겠는가? 차라리 ‘지배’라 하든지 ‘억누름’, ‘짜먹음’이라 하는 옳을 것이다.”  (주석 17)라고 지적할 만큼 군인지배, 10년의 통치를 통절하게 비판한다.

“왜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아니되나? 예로부터 ‘병(兵)은 흉기라’ 사람이 손에 칼을 잡으면 저 본심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의 근본 천생은 착한 것이나 한 번 무기를 손에 쥐면 그만 그 본성을 잃고 사나워지기 쉽다. 사납다는 것은 남을 나와 마찬가지의 인격적 존재로 알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물건으로만 보는 심정이다. 그래서는 정치는 못한다.”

“나는 첨부터 5ㆍ16에는 반대했고 오늘까지 싸워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내 치우친 생각으로나 아닌가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지배자들과 씨알의 얼굴을 늘 번갈아 살펴보는데 절대로 씨알 전체가 고마운 혁명이라고 승인해 준 일 없다.”

“나는 5ㆍ16은 오발탄, 곧 잘못 쏜 총이었다고 분명히 규정짓는다. 나는 4ㆍ19는 헛총이라 했다. 헛총은 첨부터 쏴서는 아니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을 아니 넣는다. 사람 죽일 뜻 없다는 말이다. 오발탄은 그와는 다르게 쏴서는 아니될 것을 쏜 것이다. 오늘의 이 어려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혁명공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본문 여섯 조건 보다도 끝에 붙여 쓴 말이다. 여섯 조건이 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못했을수록, 그 마지막에 달아 쓴 말대로 물러갔더라면 일은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인이 그 죄를 속하려면 이제라도 솔직히 우리 판단이 잘못됐었다하고 씨알 앞에 증언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때 잘못했던 것 보다는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분명히 알 것이, 모든 칼은 빗나가고야 만다. 칼 그 자체가 빗나감이다. 이날까지 모든 칼 든 사람이 잘못했지만, 나만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확신, 혹은 변명을 하지만, 그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 빗나간 생각이다.”
(주석 18)

함석헌은 매달마다 <씨알의 소리> 원고 집필에 열정을 쏟는 한편 연설, 강연, 대담, 토론에 불려다녔다.
4ㆍ27 대선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씨알이 이를 계기로 다시 민주회복의 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10월호 64쪽에는 “9월 중 함 선생님 동ㆍ정”을 실었다. 이 시기 바쁜 일정을 살피게 된다.

9/1, 매수요일 예배모임 시작(자택)
9/6, 월요 정기고전 강좌(젠센기념관)
9/10, 한국신학대학 출강
9/12, 부산 모임에서 <민족통일론 강연>
9/14, <책임>이란 제목으로 녹음(동아방송)
9/16, 춘천 성심여자대학 강연, <민족민주주의 앞날>
9/ 21, 기독교회관 강연, <한국종교의 당면과제>
9/23, 장로회신학대학 강연, <오늘의 신앙인>
9/24, 이화여대 설교, <가장 큰 공헌이란?>
9/27, <다리>사 창간1주년기념강연, <언론자유와 공익성>
9/30, 서울대 수원농대 강연, <한국사상의 사회적 실현과 젊은이의 자세>

박정희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71년 12월 6일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사후적인 조처로 공화당은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근로자의 단체교섭권ㆍ단체행동권 등을 규제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국민이나 야당은 안중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사태를 먼저 선포하고, 이를 추인하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는 등 헌정파괴의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의 돌연한 비상사태선언은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선포를 위한 전초전이었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국민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해놓고 남쪽에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유신체제, 북쪽에서는 김일성의 유일체제로 하는 변혁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짜고 치는 고스톱’ 술책이었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 11년 만에, 3선 대통령에 당선한 지 1년 반 만에, 스스로 제정한 헌법까지 짓밟으면서 유신체제를 만드는, 반헌정의 두번째 쿠데타를 자행하였다. 국가변란이었다.

함석헌의 1971년 희년(稀年)을 앞두고 지인들은 12월 2일 고희기념회와 기념강연회를 YMCA와 종로 대성빌딩 강당에서 각각 열었다. 3월 13일이 고희 기념일이나 그때는 인도에 체류 중이어서 뒤늦게 열린 것이다. 이희승ㆍ정구영ㆍ이병린ㆍ김상돈ㆍ백낙준 등 원로와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용준의 양력소개, 이희승, 김재준의 축사, 지명관의 <내가 본 함석헌>, 박두진의 축시에 이어 <씨알의 소리> 영구독자 300명을 모집하여 특별기금 300만원 확보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석헌은 희년기념 행사를 한사코 반대했으나 기금모금의 일환이라 하여 수용하였다.
축사에 나선 이희승은 “남달리 고초와 사선을 넘으시면서 살아온 함 선생의 생애는 보통사람의 2,3배 더 수난의 삶이었다”고 회고하고, “정치가 공정하고 옳게 돼 왔다면 선생님이 그처럼 생명을 버릴 각오까지 하시며 투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하였다. 김재준도 축사에서 “함 선생을 새로 말한다면 학(鶴)에 속한다”면서 특히 구약의 예언자의 모습을 비교하면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8,90 더 계셔서, 씨알의 백배 천배 만배의 결실을 축원한다“고 빌었다.
(주석 19)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71년 9월호, 11쪽.
15> 앞의 책, 26쪽.
16> <씨알의 소리>, 1971년 10월호, 3~6쪽, (발췌).
17> 앞의 책, 13쪽.
18> <씨알의 소리>, 1971년 10월, 3~27쪽, (발췌).
19> 앞과 같음.


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7 08:00 김삼웅

 

 

3선 개헌이 날치기로 처리되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언론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해가 바뀌어 1970년이 되었다. 이 해는 3선 개헌의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이며, 이듬해로 다가온 대통령ㆍ국회의원 양대 선거를 앞두고 정치ㆍ사회적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1970년 6월 2일 새벽 1시 50분쯤 중앙정보부 요원과 종로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 30여 명이 종로 관훈동 신민당중앙당사를 기습하여 당기관지 10만 7백부와 옵셋 아연판 4장을 압수했다. 이와 함께 <사상계> 사장 부완혁과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 그리고 시인 김지하를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민주전선>이 6월 1일자 (제40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제1야당 당사를 심야에 철문을 뜯고 들어가 당기관지를 압수하고 관계자들을 구속한 것이다.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당초 <오적> 시는 <사상계> 5월호에 실렸던 것을 <민주전선>이 ‘군부’ 관련 부문을 빼고 전재한 것이다. <사상계>는 시판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묵계’하여 넘어갔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오적>을 이유로 <민주전선>을 덮친 데는 달리 이유가 있었다. 국회에서 행한 야당의원들의 발언을 실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정여인 사건’에 대해 조윤형 의원이 폭로한 <눈물의 씨앗>등이었다. 시에서 인용된 ‘승일’이는 정여인이 낳은 사생아였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OOO의 미스터 X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 만이 알았을 것을
죽고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승일이가 누구냐고 모르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두가 미웁지 않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주석 12)

여기서 묵은 얘기를 꺼낸데는 까닭이 있다.
제1야당 당사를 수색하고 당기관지를 압류해가는 상황에서 사회와 언론은 더욱 위축되었고, 이 사건에 대해 비판이 사라졌다. 지식인들이 말문을 닫았다. <민주전선>은 제41호에 함석헌을 인터뷰하며 한 쪽 절반 이상을 실었다. 정당 기관지로서는 이례적이었다.

<민주전선>은 “민주전선의 압수사건을 계기로 새삼 언론의 사장(死藏)이 뼈아프게 거론된다. 지금은 정치권력의 교묘한 간섭으로 글 쓸 지면을 사실상 완전 봉쇄당한 함석헌옹도 민주전선의 위기에 크게 분노하며 본기자와 만나 ‘언론의 게릴라전’을 비롯하여 모든 정신적 투쟁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역설했다.”며 회견 내용을 실었다. 요지다.

“한밤중에 기관원들이 신민당사에서 민주전선을 압수해간 건 일제 때에도 없던 비겁하고 파렴치한 처사야. 그때는 차라리 검열제도라도 있었지.”

“도둑촌 같은 특권층을 만드는 것이 이적이지 그런 사실을 고발한 자가 이적일 수 있느냐고 자기들끼리도 그러더라는 거야.”

“민주전선이 <오적>때문에 압수당했다는 건 구실에 불과할 것이고 내용인 즉 다른 글에 있는 것 아니겠어?”

“근본들은 잘못됐어도 왜 좀 잘해보지 않고 억지로 완력과 폭력으로 억누르는 거야. 국민을 깔보지 말아야 해. 정권은 망해도 또 서지만 씨알을 억눌려 숨통을 막아버리면 끝장이야.”

“온통 세상을 독재의 장막에 몰아넣고 백만 년 해먹자는 건가. 역사는 냉엄한 고리대금업자야. 받아낼 것은 받아내고 찾아낼 것은 찾아내며 빼앗을 건 빼앗아야 돼.”

“언론이 옳게 쓰지 못하고 비판적인 압력을 받을 곳이 없으니 거칠 것 없이 날뛰는 것 아니겠어? 고쳐야지, 언론부터 고쳐야지. 나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씨알의 소리>라는 책을 만들어 옳은 소리 해보자고 했더니 엉뚱한 시비 만들어 폐간시켰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더군.”

“지식인 중에 안 넘어간 사람 별로 없지만 때는 아주 어려운 시기야. 불의의 시대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이라고, 몇 해 전에 말했지만 그게 참다운 생각이라면 벌써 감옥에 갔어야 했는데 못 간건 불행이야. 하긴 철창에 둘러 쌓인 곳만이 감옥은 아니지.”

“수양대군의 폭정에 억지 미치광이가 된 매월당 김시습은 한양 거리에다 대낮에 오줌을 갈기며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하고 통곡했다더군. 미친놈이 필요해. 미친 놈의 세상에 미치지 않는 놈이 미친놈이니까.”
(주석 13)


주석
12> <민주전선>, 1970년 6월 1일치.
13> <민주전선>, 제41호, 1970년 6월 22일치, 인터뷰어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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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6 08:00 김삼웅

 

 

박정희 정권은 함석헌의 ‘광야의 외침’을 방치하지 않았다.
창간호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 판매되고 있을 때 정부가 탄압의 공작을 벌였다. 창간 당시 계약한 서대문 소재 선일인쇄소가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인쇄를 거부했다. 해서 부득이 중구 소재 이우인쇄소에서 제2호를 발행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

정부는 이것을 트집잡았다. 인쇄인 변경 등록을 필하지 않고 다른 인쇄소에서 책을 찍었다는 이유로 문공부 공문 출 1028-8973으로 폐간을 통고했다. 창간 두 달 만에 폐간 처분이라는 날벼락이었다. 함석헌의 글이 얼마나 뼈아팠으면, 그의 존재가 얼마나 두려웠으면, 단칼에 폐간 조처를 취했을까. 뒷날 흘러나온 얘기로는 ‘창간사’ 중에 “시저를 죽였으면….”의 대목 등이 독재자에까지 보고되고, 비위를 크게 건드렸다고 한다.

제2호로 요절한 <씨알의 소리>는 박정권의 사나운 칼날에 비명 한 마디 못 지른 채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인권 변호사 이병린이 무료 변론을 맡아 법정투쟁에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법부는 어느 정도 양식을 지키고 있었기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헌법에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인쇄소를 바꿨다고 잡지의 목을 졸라버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권력의 압력으로 인쇄소를 방해한 처사였다.

이병린은 1970년 6월 8일 문화공보부장관 신범식을 상대로 ‘행정처분 취소 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그의 법리는 당당했다. 다음은 <청구원인>의 요지다.

첫째, 헌법 제18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동조 제2항 전단에는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나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 위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본다면 월간잡지에 대한 등록은 잡지를 발행한다는 사실을 발행인이 문화공보부에 신고하면 그 신고에 의하여 등록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등록은 허가처분이 아니라 사실 내용을 등록하는 사실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허가처분이 아닌 등록행위를 취소한다는 것은 법률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부에 출생사유가 등재되면 그뿐이지 출생신고의 등재를 취소할 수 없는 것과 하등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둘째, 등록이 허가처분과 본질적으로 성질이 판이한 것이기 때문에 가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가정할지라도 행정부에서 언론활동을 금지하여 잡지의 간행을 금지할 권한은 없다고 사려된다. 위와 같은 취지는 대법원 판례에서도 이미 명시하고 있는 바 이다. (1967. 7. 헌법 제18조의 결사의 자유는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
(주석 8)

소송이 진행 중일 때(8월 1일) 함석헌은 스웨덴에서 열리는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였다. 다른 사람이 참석하기로 되었으나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함석헌이 대신 나가게 되었다. 소송 문제로 떠나기 어려운 발길이었으나 이 대회 역시 중요성이 덜 하지 않아 갑자기 출국하기에 이르렀다.

함석헌은 스웨덴의 시그투나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한 뒤 영국→미국→캐나다→인도, 다시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펜들 힐에 머물면서 국내에 소식을 전했다.

<씨알의 소리>는 전덕용 편집장이 이 편지 글을 그때 마다 <폐간중에 드리는 소식>으로 프린트판으로 엮어 독자들에게 보냈다. ‘소식지’는 1970년 11월 17일 제16신(信)까지 제14호로 묶여졌다. 그런데 편지 중에 제8신, 제9신, 제11신이 증발되었다. 정보기관의 소행인지 우체부의 배달사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식지’에는 이 부분이 공란으로, 백지로 나왔다. ‘백지편지’의 효시인 셈이다.

함석헌의 ‘백지편지’를 보면 <수원시화(隨園詩話)>의 재미난 이야기가 연상된다. 곽희원이란 선비가 집에 편지를 부칠 때 잘못하여 편지 대신 백지를 넣어 보냈다. 그의 아내가 답서에서 쓰기를,

푸른 비단 창 아래서 님이 보낸 편지를 뜯어보니
편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흰 종이 뿐이어라
아직도 님께서 이별의 슬픔이 가득하여
수 많은 무언중에 나를 생각함이라.
(주석 9)

곽희원은 착오로 백지를 넣어 보냈지만, 함석헌의 경우는 착오가 아닌 기관의 검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곽의 아내가 백지에 감동하였듯이, 씨알의 독자들도 천 마디의 글자보다 무언(無言)의 백지 편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번에도 여행을 앞당겨 이듬해 4월 22일 돌아왔다. 재판에 대비해서였다. 재판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연기를 거듭하였다. 이듬 해 5월 4일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ㆍ윤일영ㆍ김석수 판사에 의해 “문화공보부의 <씨알의 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하여 <씨알의 소리> 승소판결을 내렸다. 문공부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1971년 7월 6일 재판장 김치걸ㆍ사광욱ㆍ홍남표ㆍ김영제ㆍ양병호 5인 판사의 이름으로 문공부 상고를 기각하고, ”씨알의 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 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고 판시하여, <씨알의 소리>의 승소판결을 확정했다.

<씨알의 소리>는 창간 두 달만에 목이 졸리는 단절 끝에 1971년 8월호(제3호)로 복간을 하게 되었다. 피눈물 나는 법정 투쟁 끝에 당당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병린 변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복간호(1971년 8월호)는 표지 오른 편 반쪽은 검은 바탕에 제호와 제목을, 왼편은 승소한 신문 보도 사진을 바탕에 깔았다. 복간의 상징성이 돋보였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펜들 힐의 명상-대화>를 함석헌이 쓰고, <‘씨알’은 죽지 않는다 - ‘씨알의 소리’ 복간에 부쳐>를 김재준 목사가 썼다. 또 <‘씨알의 소리’ 승소 경위>를 실무팀에서 소상히 밝혔다.

함석헌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승소의 소감을 밝히었다.

“법을 사랑하는 이 변호사는 문공부의 처사가 ‘분명히 헌법에 위반’이라는 문귀가 판결문 속에 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한탄은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이겼으니 다행입니다.” (주석 10)라고 고마움을 표시하고, 씨알에 대한 당부를 피력한다.

씨알 여러분, 아무리 괴로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럴듯이 말해도 속지 마십시오. 벼슬아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이젠 신문도 못 믿습니다. 신문이 우리 사정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씨알 편에 섰을 때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칼을 가지고도 그들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마는 그들은 이제 돈에 팔려 씨알을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금에 씨알을 저버리고 강했던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습니다. (주석 11)

제3호부터는 창간 당시부터 실무를 도왔던 박선균이 편집장으로, 문대골이 업무부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하지만 급여를 줄 처지가 못 되어서 두 사람은 ‘자원봉사’로 잡지 일에 매달렸다.

순서가 조금 바뀌었지만, <씨알의 소리>가 창간→폐간→복간의 힘겨운 싸움을 하는 기간은 정치적으로 격동기였다. 야당에서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0대 후보의 경선 끝에 김대중이 선출되면서 대여 정책 공세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침체되었던 선거전을 뜨겁게 달구었다. 11월 13일에는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19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 ‘전국연합노조 청계 피복노동조합’이 탄생하는 직접적 배경이 되고, 노동자들의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신민당과 학생ㆍ재야의 거센 반대운동에도 박정희는 관권동원과 천문학적인 국가예산의 전용,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4ㆍ27대선에서 승리하였다. 박정희는 이로써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서고, 통치 수법은 더욱 광폭해져갔다.

대선 기간에 <씨알의 소리>는 물론 김상현이 발행하던 월간 종합지 <다리>도 1971년 2월 12일 필화사건을 당하였다. 1970년 11월호에 게재된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을 트집잡아 임중빈과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대선 기간에 잡지를 발행하지 못하도록하는 비열한 처사였다.


주석
8> <씨알의 소리를 읽으시는 분들께> - <폐간중에 드리는 첫 번째 소식>, 14~15쪽, 1970년 8월.
9> 김용준, <근원수필>, 107쪽, 범우사, 2000.
10> <씨알의 소리>, 제3호, 6쪽, 1971년 8월.
11> 앞의 책,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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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5 08:00 김삼웅

 

 

함석헌 유영모

함석헌은 이 책에서 <씨알>이란 제목의 논설을 썼다. 이후부터 ‘씨알’은 그의 사유와 철학의 알갱이가 되고, 아호처럼 사용되었으며, ‘씨알사상’의 주제어가 되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씨알이란 말은 씨라는 말과 알이란 말을 한데 붙인 것입니다. 보통으로 하면 종자라는 뜻입니다. 종자는 물론 한문자의 種子에서 온 것입니다. 순전한 우리말로 하면 씨앗 혹은 시갓입니다. 아마 원래는 씨알인 것이 己이 人으로 변해서 씨앗이 되고 또 <아>줄과 <가>줄이 서로 통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씨갓으로도 됐는지 모릅니다.

어쨌건 종자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빌어서 民 의 뜻으로 쓴 것입니다. 보통은 없는 것을 새로 지어낸 말입니다. 지금은 민의 시대여서 우리는 늘 민이란 말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민, 인민, 민족, 평민, 민권, 민생…입니다. 그런데 거기 맞는 우리 말이 없습니다. 국(國)은 나라라 하면 되고 인(人)은 사람이라 하면 되지만 민(民)은 뭐라 할까? 백성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百姓의 음뿐이지 순전한 우리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민이란 말을 우리 말로 씨알이라 하면 어떠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유영모 선생님의 먼저 하신 것입니다.
(주석 5)

함석헌은 민이 주인이라는 시대에 순수한 우리말을 찾고자 하여 씨알을 쓰게 되었다. 유영모가 <대학> 강의를 하면서 풀이한 것이지만, 이 말에 생명을 불어놓고 대중화시킨 것은 함석헌이다.

왜 이대로 듣는 것 보다 아직 좀 어색한 듯 하지만 씨알이라 하자느냐? 쉽게 가장 중요한 점을 따져 말해서, 주체성 때문입니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것 아닙니다. 民, People 하고만 있는 동안은 民ㆍ의 참 뜻 People의 참뜻은 모르고 지나간 것입니다. 民ㆍ 그것을 우리말로 옮겨 보려 할 때 즉 요새 도착화란 말이 많습니다마는 도착회를 시켜 보려 할 때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말이 말만이 아닙니다. 낱말 하나 밑에 문화의 전 체계가 달려 있습니다. (주석 6)

함석헌은 이 글의 ‘씨알풀이’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렇게 쓴다.

씨알보다 더 좋은 말이 있거던 고칠 셈 치고 우선은 써 봅니다. 民대로도 좋지만 民보다는 좀 더 나가기 위해서 民은 봉건시대를 표시하지만 씨알은 민주주의 시대를 표시합니다.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가 거기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씨알입니다. (주석 7)


주석
5> 앞의 책, 15쪽.
6> 앞의 책, 17쪽.
7> 앞의 책,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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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

013/01/24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0년 4ㆍ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제도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상계>마저 발행인이 바뀌면서 더욱 쪼그라들고 있던 시점이다. 등록번호는 문화공보부 정기간행물(월간) 등록번호 라-1257호였다.

창간 당시에는 편집위원 제도가 없었으나 1972년 4월에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편집위원에는 참여에 시차가 있었으나 함석헌(주간)ㆍ이병린ㆍ이태영ㆍ김성식ㆍ안병무ㆍ송건호ㆍ법정ㆍ장준하ㆍ천관우ㆍ김용준ㆍ계훈제ㆍ김동길 등이었다. 창간호의 글은 모두 함석헌이 쓰고, 편집위원들은 나중에 집필에 참여했다. 창간 1,2호 때는 전덕용이 편집 실무를 맡았다.

시대는 점차 악화되고, 그래서 할 말이 많은데, 지면이 봉쇄되었다. 지식인들은 벙어리가 되고, 언론은 할 말을 못하였다. 3선개헌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이같은 현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어 갔다. 잡지를 내게된 배경이었다.

함석헌은 나이 70에 이르러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쉽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저항의 횃불을 켜든 것이다. 남들이 사업을 접을 연차였다. 사업 경험은커녕 잡지를 낼 경제적 여건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도전에 나섰다. 믿는 것은 도처에 산재한 씨아이고, 솟구치는 것은 학정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개인 잡지로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해방 뒤에는 믿음의 동지 노평구가 1946년부터 <성서연구>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재 신채호가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천고(天鼓)>를 힘겹게 펴낸 바 있었다. 3천부를 찍은 <씨알의 소리> 창간호(4월호)는 56쪽, 값 100원이었다. 일체의 상업광고를 배제한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500쪽이 넘는 여느 잡지보다 알찬 내용과 시대의 경고음을 담고 있었다.

창간호에는 5편의 글이 실렸다. 모두 주간 함석헌이 썼다.
<4월혁명 열돐에 되새겨 보는 말 - 썩어지는 씨알이라야 산다>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알>
<씨알의 울음>
<하나님의 발길에 채워서(1)>이다.

창간사 격인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에서 함석헌은 잡지 발행의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이 글은 그의 언론관과 시대의식이 들어 있는, 대표적 논설 중의 하나에 속한다. 띄엄띄엄 소개한다.

“잡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해방 후 줄곧 해오는 생각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지만 <말씀>도 그래서 냈었습니다. 6호까지를 내다가 5ㆍ16 파동으로 중단됐습니다. 그 담은 월간보다도 주간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꾸는 데는 나는 반드시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듯 합니다.”

“그 후 알아 보니 주간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 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정의감과 기백은 줄어드는 것이므로 그 법령의 그물을 통과하고 나오는 놈이면 묻지 않고 자기네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해도 좋다 하는 심산에서 나온 법입니다. 하여간 그래서 다시 월간지 생각을 했습니다.”

“군사정권에서 제1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3선개헌 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다름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왼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 서양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 시저 죽은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여야 할 것 아닙니까? 프랑스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ㆍ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 하고 친구가 바른 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가도 못 본척 하고 있었습니다.”

“풍토를 어떻게 고칩니까? 뒤집어엎어야 해! 누가 뒤집어엎습니까? 씨알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미운 것은 신문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오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ㆍ극장ㆍ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 강도에 대해 데모를 할 것이 아니라 이젠 신문을 향해 데모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국민이 생각이 있는 국민이면 누가 시키는 것 없이 동맹을 해서 신문이 몇 개 벌써 망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싸움터는 국회의사당도, 법정도, 학교도, 교회도, 신문사조차도 아닙니다. 직장, 다방, 선술집, 소풍 놀이터에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일만도 아니요, 누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요,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두의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왜 정치에 관계된 말을 하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럼 ‘도둑놈이야!’ 하고 내쫓을 생각도 아니해야겠습니까?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하는 놈은 도둑 한패 아닙니까? 나의 바라는 것은 정치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감히 못바라도, 적어도 손에 무기 쥔 정치 무리가 판을 치는 날이 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바보의 생각을 좀 말하리다. 나는 씨알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알은 못 놓겠습니다. 나 자신이 씨알인데, 나는 농사꾼의 집안에서 났습니다. 참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갓은 베고 죽는다’고 우리 마을에선 표본적인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농사는 나만이 하는 농사입니까? 밥은 나만이 먹는 밥입니까? 천하 사람이 영원히 먹을 밥입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씨알의 속에는 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받아야지, 누가 명령하나?(…) 순교자는 처음부터 강하지만 한 번 순교하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으면 순교자의 씨는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순교자 자신은 물론 그것을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는 그것을 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희생자의 뒤를 봐주는 조직적인 활동은 설교보다도 중요합니다.”

“씨알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길르기위해서입니다. 나라에 늙은이(중심세력-필자) 없으면 못생긴 우리 끼리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의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늙은이를 가질 것입니다.”
(주석 4)

주석
4> <씨알의 소리>, 창간호, 1~14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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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3 08:00 김삼웅

 

 

1969. 9.13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박정희의 권력욕은 군정 2년과 민선 2기 8년 도합 10년 세도로도 욕심이 차지 않았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김용태 등 공화당 의원들이 국민복지연구회를 만들어 김종필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다 철퇴를 맞고,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김종필은 정계를 은퇴하였다. 박정희는 1968년 초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을 빌미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청장년들을 한 묶음으로 엮고,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여 교육계와 학생들의 통제에 나섰다.
박정희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다가 4월혁명으로 쫓겨난 지 10년도 채 안 되어 1968년 말부터 권력지향의 충성분자들을 앞세워 개헌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당의장서리 윤치영이 부산에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이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3선개헌의 물꼬를 텄다.

6ㆍ8 부정선거를 통해 이미 개헌선을 확보하고, ‘항명파동’을 진압하여 공화당내 개헌반대 세력을 숙청한 터였다. 언론계도 그동안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대부분 순치시켰다. 문제는 학생과 야당이었다. 당시만 해도 재야는 아직 이렇다할 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박정희가 1969년 7월 25일 여당에 공식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할 것을 지시하면서 그동안 지하에서 맴돌던 3선개헌 공작이 양성화되고, 정계는 개헌정국으로 파란에 휩싸였다. 개헌안은 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변절한 3명 등 모두 122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되었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9월 13일 국회본회의장이 야당 의원들에 점거되자 14일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서 서명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단 6분만에 개헌안이 변칙 처리되었다. 박정희의 3선, 곧 장기집권의 길을 튼 것이다.

 


1969.9.12 3선개헌반대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강제 귀가조치를 당하는 함석헌선생 (이 사진은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 기구로 3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를 설치하고, 원내외에 걸쳐 저지투쟁에 나섰다. 재야에서는 3선개헌반대범국민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데 이어 신민당과 연합하여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석헌은 여기에 참여하여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개헌반대 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자 수많은 씨알이 강연장을 매웠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ㆍ19기념 강연회를 마친 뒤 범청년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인사들과 광화문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7월 19일 오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범야 3선개헌반대 강연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국민에게 호소했다.

3선개헌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민족의 역량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바로 민족의 역량으로 이를 저지해야 한다. 오늘날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반드시 공화당만의 책임을 아니다. 여기 앉아 있는 신민당 사람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제대로 저지운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속 의원 3명이 이탈하는 것도 막지 못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신문은 신문이 아니다. 한심하다. 학생 데모는 제대로 보도도 못하면서 아폴로 발사만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이 신문이냐.

여러분! 신문에 국민이 무섭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자.
사실보도도 하지 못하는 신문에 본떼를 보여주자.
우리가 단결하면 신문사 한 두 개쯤은 문 닫게 할 수 있다.
(주석 3)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투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전국의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교문을 박차고 나와 3선 반대 시위를 벌였다. 3선개헌 반대투쟁에는 변호사ㆍ교수ㆍ문인ㆍ종교인 등 사회 각계의 양심적 인사들이 참여했다. 신문 중에서는 <동아일보>만 8월 8일치 사설에서 <우리는 개헌주장의 동기가 결코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고 주장,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대부분의 언론이 지지하였다.

3선개헌은 결국 박정희의 의지대로, 오로지 일 개인의 장기 집권을 위한 방편으로 헌법을 장식물로 변개시키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여 요식적인 국민투표의 절차를 거쳤다.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건널 수 없는 다리’ 라고 명명한 대로,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국가의 비극이고, 그 자신의 단초가 되었다.

함석헌은 다시 한 번 깊은 좌절과 통분을 삼키면서, 씨알을 일깨우는 방안 찾기에 몰두하였다. 세상은 역류되고, 시름은 깊어만 갔다.


주석
3> <김삼웅 취재수첩>, 1969년 7월 1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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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2 08:00 김삼웅

 

 

1964년 신촌 종교친우회(퀘이커) 모임집 앞마당에서

함석헌은 1967년 7월 21일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다. LA에서 퀘이커 집회에 강연을 초청받은 것이다. 6개월여 간 미국에 머물면서 퀘이커들과 함께 생활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하면서 퀘이커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퀘이커에 관심을 갖고, 미주 여러 나라의 퀘이커 지도자들과 서신 교류를 하였다. 무교회주의를 떠나면서 퀘이커는 그의 정신적 구원의 종교가 되었다.

함석헌이 입문한 퀘이커교(Quaker)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여전히 낯설다.
기독교의 한 유파이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크게 다른 퀘이커교는 예배 때에 찬송가나 기도, 성례의식과 같은 일체의 행사가 없이 진행된다. 기독교처럼 목사나 가톨릭처럼 신부가 있어서 설교를 하거나 성례를 주관하는 일도 없다. 기록된 교리도 없고 교회나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 장소도 없다. 선교(mission)란 말을 선호한다. 한국에는 현재 신촌의 퀘이커교 모임 등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임이 있다. 전 세계의 교도는 20만 명 정도이다.

퀘이커교는 “지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사람”을 뜻하며 17세기 중반 영국의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특정 교파라기보다는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cis)'라고 부르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퀘이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모임이 시작된 것은 함석헌에 의해서였다. 함석헌은 1962년 미국 국무성과 영국 외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여행 중에 퀘이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왈링포드에 세워진 학교 펜들 힐과 영국 퀘이커대학이 있는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퀘이커신앙에 접하고 그곳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함석헌은 퀘이커에 입문한 것 이 아니었다.

함석헌이 한국최초의 퀘이커 교도인 이윤구의 소개로 퀘이커교도인 아서 미첼을 만난 것은 6.25 한국전쟁 시기였다.

“나중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이윤구는 당시 군산도립병원 복구사업을 하던 미국 퀘이커 봉사회를 만나 한국인 최초의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그때가 한국에서 퀘이커 모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는 이단자가 된 함석헌의 모임에 계속 나왔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을 느껴서 그들 사이에 중개역을 했다. 그들 덕분에 함석헌의 전쟁반대와 평화사상은 한층 깊어졌을 것이다.” (주석 1)

함석헌 이전에 퀘이커는 이미 한국에 전래되고 있었지만 퀘이커가 한국의 식자층에 깊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함석헌의 역할이 컸다. 5.16 군사쿠데타 이래 강력한 저항운동을 펴온 함석헌의 위상은 퀘이커의 홍보에도 일역을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1983년 월간 <마당> 5월호에서 퀘이커와 관련 특별 대담을 갖고 자신이 퀘이커가 된 과정과 퀘이커사상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함석헌이 퀘이커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월간 <마당>은 “함석헌은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장로교ㆍ무교회주의를 거쳐 현재 퀘이커교 한국 대표로 있으면서 최근에는 노장 철학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심취되어 모든 종교사상을 통합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내용 중 퀘이커 관련 부문을 발췌한다.

문 : 함 선생님이 퀘이커교도이신 줄 아는데 퀘이커교 교리가 무교회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답 : 우리(퀘이커교도)는 교리가 없고 제도도 없어요. 전연 없을수야 없지만, 가능한 한 그것 없이 하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번 제도나 교리가 결정이 되어 놓으면 변경이 잘 안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달라지고 시대도 달라지는데….

문 : 사실 제도나 교회 때문에 본래의 기독교 정신이 구애를 받거나 생명력이 제약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요. 퀘이커는 원래 대단히 개방적이야요. 극단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고 있으니까니, 종교적인 생각에 대해 가능한 한 ‘가타’ ‘그르다’ 그러지 않지요.

문 : 퀘이커교는 가장 규모가 작은 기독교파 가운데 하나로 압니다. 어떻게 이 교단과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까?
답 : 6.25 직후라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ㆍ미 합작으로 수십여 명의 사람을 보내 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을 복구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유엔에서 한국부흥단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퀘이커 사람이 서너 명 있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1962년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 퀘이커교는 제도나 교리가 없다는 것이 곧 교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교회나 예배 형식도 없는지요?
답 : 예배도 형식 없이 하자는 것이나, 전연 없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회란 말을 쓰지 않고 단순히 모임(meeting)이라고 하지요. 성직자라는 것도 없고 목사 신부라는 이름도 없으며 조직 자체가 없지요. 예배 시간에는 강단이 있어서 격식을 차려 앉는 법도 없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명상과 침묵하는 거야요.

문 : 설교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답 : 성경공부는 다른 시간에 하지요. 예배는 명상으로 하다가 감동을 받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를 수 있으며, 성경을 읽고 싶으면 읽을 수도 있고 감동ㆍ감화를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문 : 남녀동등권 문제가 제일 먼저 퀘이커교에서 나오는 등 앞질러 가는 운동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
답 : 남녀동등 문제도 퀘이커에서 나왔고, 노예 해방문제도 제일 먼저 제안했었지요. 그 다음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많이 드나들면서 인간 대접을 아니 한다고 항의하고 감옥제도를 개선하자는 발언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들에게도 너무 인간대접을 아니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책을 부르짖는 등 이런 착상을 먼저 해왔지요.

문 : 평화운동과 반전운동도 퀘이커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답 : 퀘이커 수가 많지 않은데 이 운동을 굉장히 진지하게 벌이고 있어요. 그중에서도‘평화증언’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 때에도 크게 활동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적국에도 모금을 해 보내고 적국의 부상자들을 위해 의약품을 보내지요.

문 : 조지 폭스를 창사자로 봐야겠군요?
답 : 그렇지요. 그러나 제일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니야요. 농민들 사이에 자연히 일어났는데 이들은 대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 폭스도 남의 집 구두수선공이었고, 그러나 솔직하고 정직하게 생긴 사람인데 장점이 있었나 봐요. 폭스는 상당히 번민을 했다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종교가 본래 뜻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이렇게 타락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래서 회의를 크게 느끼고 캠브리지, 옥스퍼드에 찾아가 신학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신통한 대답 안 해주고 그래서 내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야요.
(주석 2)


주석
1> 이치석, 앞의 책, 464쪽.
2> <퀘이커와 평화사상>, <월간 마당>, 1983년 5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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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1 08:00 김삼웅

 

 

1960년대는 <사상계>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민족주의세력이 이를 매국외교라 단정하면서 <사상계>는 반대투쟁의 본영이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더 많은 글을 이 지면에 쓰게 되고, 잡지의 권위와 파워가 그만큼 신장되었다.

<5ㆍ16을 어떻게 볼까?>에서부터 함석헌과 군부정권의 첨예한 대립각이 세워졌다.
함석헌은 <사상계> 1963년 3월호에 <우리 민족의 이상>, 4월호에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 8월호에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 9월호에 <한일회담을 집어치우라>, 10월호에 <새 혁명>, 1964년 3월호에 <양한재조재차일념>, 4월호에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9월호에 <우리는 알았다>, 1965년 1월호에 <비폭력혁명>, 5월호에 <세번째 국민에게 부르짖는 말>, 10월호에 <싸움은 이제부터>, 12월호에 <대담-민중의 증언>, 1966년 3월호에 <레지스탕스>, 5월호에 <우리 역사와 민족의 생활신념>, 1967년 1월호에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한다>, 2월호에 <저항의 철학>, 4월호에 <4자회담 좌담회>, 1968년 4월호에 <혁명의 철학>, 5월호에 <혁명공약의 행방>, 7월호에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남한산성)>, 8월호에 같은 연재 2회로 <행주산성>, 10월호에 같은 연재 3회로 <사상계>를 각각 썼다.

이 시기 함석헌은 60대 초ㆍ중반기의 나이였다.
왕성한 필력이고 놀라운 정력이었다. 모두 다 열정을 쏟은 글이고 그때마다 정치적ㆍ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는 어느 언론인보다 많은 글을 쓰고, 어떤 학자보다 심도 있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67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사상계>의 판권이 부완혁에게 넘어가면서 이 잡지에 글쓰기는 다소 뜸해졌다. 1968년 7월호부터 ‘역사의 격전지’ 연재는 현장(현지)을 탐방하여 다큐멘터리방식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다. 1회에 남한산성과 2회에 행주산성에 이어 3회에는 <사상계>를 찾아서 그 피어린 격전지의 사력을 집필하였다. 당시 <사상계>는 장준하와 부완혁 사이에 판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서도 아니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바루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줍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 주려고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ㆍ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 모나 김 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주석 30)

함석헌은 <사상계>의 분열이 장준하와 부완혁 간의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군사정권의 탄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5ㆍ16쿠데타를 주동한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만 ‘격전’의 원인을 알게 된다고 풀이한다.

격전지가 남한산성에 있는 줄 알고, 행주산성에 있는 줄 알고, 한라산 백록담에 있는 줄 알고 헤매이며 눈물 뿌렸던 나는 어리석었습니다. 서로 목을 찔러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비참한 자살적인 전쟁의 격전지는 다른 데 아닌 서울 복판에 있습니다. 대강이를 개구리 얻어 문 독사처럼 내저으며 근대화라 발전이라 미쳐 돌아가는 이 수도 서울에 있습니다. 인권선언을 내붙인 유엔의 깃발과 자유평등을 그 건국정신으로 한다면서 월남전쟁을 하는 값으로 자유를 부르짖고 일어나던 체코가 소련군대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체 외면하는 대미국의 국기가 펄펄 날리고 있는 이 서울에 있습니다.

함석헌에게 <사상계>의 ‘격전’은 지난날 어느 ‘역사적 격전지’에 못지않는 아픔의 상처였다. 날이 갈수록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지는 독재 세력에 맞설 언론매체란 <사상계>밖에 없는 터에, 이곳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 하다가 망하는 것이 그리 큰 일 입니까? 그것은 크고 작은 허다한 자살, 자살의 탈을 쓴 살인이 이 수도를 휩쓸고 있는 것을 절규하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인 마지막 촛불이 꺼진다면 그어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상계를 이날껏, 읽는 사람이거나 아니 읽는 사람이거나, 단 하나의 바른 말하는 잡지라고 했지오? 5천년 문화민족이노라고 하면서 신문잡지를 몇 천 몇 백으로 하면서 ‘단 하나’ 라는 말도 부끄럽지만 또 지나친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부끄러운 과장일수록 그 단 하나의 촛불이 꺼지도록 두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석 31)

함석헌은 굴욕회담의 격동기에 <사상계>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ㆍ잡지에도 적지 않은 글을 썼다.

<경향신문>(1963. 7. 8)에 <그 사람들은 살았더라>, <한국일보>(1963.7.22)에 <누구 믿을 때 아니다>, <신세계>(1963. 9)에 <나는 왜 갑자기 돌아왔나>, <경향신문>(1963. 9.9~10)에 <국민의 당 여러분께 애원합니다>, <소설계>(1963. 10)에 <호소, 국민에게 다시 호소한다>, <동아일보>(1963.10.14)에 <한 발걸음 바로 앞에서>, <20세기 사상강좌 5>(1964, 박우사)에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동아일보>(1964. 1~10), <새해의 말씀>, <조선일보>(1964.1.28)에 <3천만 앞에 또 한번 부르짖는다>, 같은 신문(1964. 3. 5)에 <휴전에서 군정종식까지>, <동아일보>(1964.8.26)에 <데모학생을 건집시다>, <조선일보>(1964.9.6)에 <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인물계>(1964. 9.10)에 <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올 다이제스트>(1964. 12)에 <준비 없는 통일 말하지 말라>, <크리스찬 신문>(1965. 2. 13)에 <우리의 살길은 무엇인가>, <경향신문>(1965.2.19)에 <일본은 대답하라>, <동아일보>(1965.7.1~2)에 <단식에 앞서 동포에게 드립니다>, <신동아>(1965.10)에 <대학이란 무엇이냐>, <종교계>(1966.1)에 <대중과 종교>, <여상>(1966.2)에 <우리들의 비너스에게 주는 말>, <종교계>(1966.7.8)에 <종교인은 죽었다>, <조선일보>(1968.4.10~12)에 <미국문명과 흑인문제>, 같은 신문(1968. 6.23)에 <개화백경> 등을 집필하였다. (주석 32)

함석헌이 이 무렵에 얼마나 많은 글을 쓰면서 매국외교를 반대하고, 씨알의 시대정신을 일깨우며, 언론ㆍ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중심매체는 <사상계>였다. 이 잡지가 박정권의 탄압으로 고사상태가 되고, 일시 부완혁에게 넘겨주었던 판권이 회수되지 못하면서, 함석헌과 장준하는 매체를 잃은 ‘삼손’이 되었다. 


주석
30> <사상계>, 1968년 10월호, 21쪽.
31> 앞의 책, 22쪽.
32> 정현필, 앞의 글,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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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0장] 매국외교 반대의 격랑 속에서 2

013/01/20 08:00 김삼웅

 

 

1959 백죽문화사

함석헌은 해외 순방 중이던 1962년 12월 국내에서 <생활철학>이란 단행본을 서광사에서 출간했다.
4ㆍ19 이후에 신문ㆍ잡지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59년 3월에 출간한 <새 시대의 전망>이래 두번째 펴낸 평론집이다. <새 시대의 전망>은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제되어 발행되었다.

<생활철학>의 서문에서 저자는 ‘누에의 철학’을 강조한다. 미국 벤틀 힐에서 쓴 글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닮았으니 푸른 뽕을 먹어 흰 실을 뱉는 신비의 누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땅 생김이 누에 같지 않은가? 어떤 이는 호랑이라 하고 어떤 이는 토끼라 하지만 차라리 누에라 할 것이다.
힘을 자랑하고 싶으면 호랑이라 할 것이고, 업신여기려면 토끼라 하겠지만, 이럴 것도 저럴 것도 아니요, 누에처럼 겸손히 누에처럼 부지런히, 누에처럼 평화롭게 살 것이니라. 그 땅만 아니라, 그 사람도 누에 같다. 그럼 또 누에와 같이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 힘은 비록 약하고, 그 입은 비록 적으며,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 아니어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는 날, 천하라고 다 먹을 수 있다. 유교문화도 옴질옴질, 불교문화도 옴질옴질, 기독교문화도 옴질옴질, 과학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정신에 가 붙어도 살금살금, 다툴 것 없이, 시기할 것 없이, 떠밀면 돌아눕고, 뺏으면 또 다시 가 붙으면서, 소리도 없이, 떠듦도 없이 먹고는 자고, 자고 나면 한 껍질 벗고, 새로 나서 또 먹어서 애기 잠, 두 잠, 석 잠, 그리고 한 잠을 자고 나면 백옥(白玉) 같은 문화의 전당 지을 수 있지 않겠나?

누에 - 번데기 - 나비의 생활철학이야말로, 씨알의 생활철학이다.
(주석 23)

함석헌의 글 ‘누에의 철학’은 연구가들이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머리말은 그의 어느 글 보다 의미와 상징성이 깊은 내용은 담고 있다. 하여 책의 내용보다 ‘누에의 철학’을 소개하기로 한다.

잠사(蠶史)란 말이 있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이른 말이다. 그가 흉노와 싸우다가 져서 항복한 이릉(李陵)이를 동정해서, 잘못이라 하지 않았다는 죄로 임금이 노하여, 궁형(宮刑)곧 자지를 잘라서 잠실 속에 던졌다. 잠실은 감옥이란 말이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사기>를 씀에 임금이 도로 좋아해서 중서경(中書令)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 잠실 속에서 쓰고, 그 때문에 살아나온 것이라 해서 잠사라 한다.

예로부터 정치한다는 것들이 그랬다.
제게 나쁘면 남의 생명 뿌리라도 자르고, 제게 좋으면 벼슬 주고 그러니 오늘 와서 보면 누가 정말 무서운가?
사마천의 자지를 잘랐던 임금인가? 그 잠실에서 실 뽑듯하는 글로 그것을 뚫고 나왔고, 그 뿐 아니라 오늘까지 살아, 그 따위 정치가란 것들은 목을 자르는 역사가인가?
(주석 24)

함석헌은 이름 없는 씨알을 누에에 비유하면서 권력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가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도 한 마리 누에로 자처했다.

번쩍 번쩍하는 네 옷이 그게 무어냐? 네 군복에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솥 다리가 그게 어디서 온 거냐? 얼마나 많은 누에가 죽어서야 된지 아느냐?
한 번 번드쳐, 빛 나라에 날아 보자던 나비를, 그 잠을 채 자기 전 그 집을 뺏고, 그 몸을 솥에 삶아 살로 뽑아내서 짠 것이 그 비단, 그 영광 아니냐?
살아나면 그리스도가 될 얼마나 많은 씨을 죽이고, 그 공로를 빼앗서 되는 너희 권력이요, 너희 도덕이요, 너희 종교요, 너희 명예인 줄 아느냐?
비단을 짜기 위해, 누에치는 계집의 손에서 고치를 뺏지 마라. 실을 뽑기 위해, 애매한 번데기를 솥에 삶지 마라.
한 잠을 자려고, 이 벤들 힐 뽕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나를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내가 채 변화하기 전에 너희가 내 무덤을 연다면, 가락꼬치나 미운 돌밖에 있을 것이 없느니라.
(주석 25)

함석헌은 안반덕 산골짜기에 머물 때 장준하의 요청으로 또 한 편의 평론을 썼다. <레지스탕스>였다. 자신이 ‘신을사조약’이라 명명한 한일조약 이후 <사상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필자들은 글 쓰기를 망설이고, 인쇄소도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신년호와 2월호의 발간이 늦어졌다며, 장준하는 추락하는 국민정신을 살리는 것과 항거 정신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날 망설임 끝에 찬 바람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정좌하여 필을 들었다. 이 평론 역시 밑 줄을 치고 읽을 대목이 많다.

생명의 길은 끊임없는 반항의 길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생명 있기 전에 무엇이 있던 것 아니요, 생명이 다 산 다음에 또 무엇이 있을 것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이외를 생각할 수 없다. 생명이 처음이며 끝이요, 생명이 목적이며 수단이다. 다른 무엇이 또 있어서 생명의 가는 길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규정이요 범주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되려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26)

함석헌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비록 당장은 권력이 승리하고 패악이 선을 누르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진보하고 선이 승리한다고 믿었다.

“역사는 절대의 진보요. 인생은 절대의 긍정이다. 작게 보면 진보의 시대도 있고 퇴보의 시대도 있으나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산길에, 한때 내려간 언덕도 결국 올라간 길인 것 같이, 스스로의 뜻이 목적이 되는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 다 진보의 과정이다.” (주석 27)

한·일협정 비준 반대

함석헌은 한일조약 비준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정신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항거정신을 잃어버린 국민정신에 대해 비판한다.

5천년 역사를 대체로 통틀어 볼 때, 이 민족이란 것이 무엇인가? 남의 세력에 기운을 못 펴고, 겨우 생존하여 온 사람들 아닌가? 백 가지 불행의 원인이 모두 거기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새로 짓는다는 이 마당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국민으로 하여금 먼저 쪽지를 펴고 내로라는 기상을 가지도록 길러 주는 일 아닌가? 한 마디로 해서 항거하는 정신의 고취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더 북돋고 가꾸어 주지는 못하고, 겨우 돋우려는 싹도 잘라 버리니 어떻게 하나?

숨김없이 말해보자. 한일조약이 아주 체결이 된 이후 오늘까지 얼마 아니되는 시일이나, 그 동안에 국민의 의기는 올라갔다고 할 것인가, 내려 갔다고 할 것인가?
(주석 28)

함석헌이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할 만큼 굴욕회담 과정에서 보인 지식인들과 국민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그래서 국가(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의기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절감하면서, 이 원고를 썼다. 여전히 생명력이 있는 글이다.

나라는 하루만 하고 마는 것도 아니요 일부 사람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닌데, 국민의 마음을 이꼴을 만들어 놓고는 도저히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의기 없는 국민을 가지고 무엇을 할 터인가? 제 나라 안에서도 감히 정치의 비평을 못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자는 용기를 못내는 백성이 어떻게 외국 세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을까? 더구나 국민을 덮어 누르는 이 정책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도 못되고 첨부터 남의 나라 세력에 끌려서 된 것임에서일까.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묻느냐?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주석 29)



주석
23> 함석헌, <생활철학>, 머리말, 서광사, 1962.
24> 앞과 같음.
25> 앞과 같음.
26> 함석헌, <레지스탕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7> 앞과 같음.
28> 앞의 책.
29>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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