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호)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힘겨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ㆍ26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 발행한 1980년 1,2월 신년호에서 함석헌은 <민족적 비전을 기르라>는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와 시론으로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를 썼다. '편지’의 한 대목이다.

80년대 들었다고 무엇을 조금 아노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댑니다. 씨알은 그 소리에 끌려들어 가서는 아니됩니다. 지나간 일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가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때도 지금 같이 떠들었고, 큰 소리를 펑펑 했습니다. 그때에 그 해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치 설계나 해설처럼 실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석 14)

정치선동꾼이나 기회주의 언론인들의 시세영합적인 설계나 해설에 함부로 현혹되지 말고 시국을 바로 보라는 내용이다.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글은 11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강연에서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낌새)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시대의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경고하였다. 글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을 ‘위기관리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년, 혹 몇 백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톡톡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 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주석 15)

계엄령 선포로 언론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씨알의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도 사전검열 때문에 12ㆍ12사태 등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자칫하다가는” 식의 표현으로 에둘러 쓴 것이다. “다시 군인이 정치에 나오다가는”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하나회 출신 신군부는 정치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서울의 봄’은 점차 짙은 안개 속에 덮혀갔다.

함석헌은 2월 29일 복권이 되었다. 무슨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투옥, 자격정지 등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자격회복이었다. 이날 687명이 함께 복권되었다. 함석헌은 3월호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고, 징역을 시킨다 했더라도 억울하단 맘도, 밉단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풀어줬다 해도 속임 없는 말로 고맙단 생각 조금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복권 어쩌고 해도 별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속임 없는 말이다. 왜 그랬나? 나도 사람이고, 그러는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부)란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서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16)

여기서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다시 살피게 한다. 그의 탈권력, 탈국가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 즈음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복권조치를 한 것은 씨알의 입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그런 이상이면 이제라도 씨알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어진 일일 것이다.” (주석 17)

제93호(1980년4월호, 창간 10주년 기념호)

1980년 4월은 함석헌이 70대 이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을 견뎌 가면서 발행해 온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이 되는 달이었다. 3, 4월이 되면서 지층에서는 혹독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새봄이 오는 듯 제법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함석헌도 대학가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의 초청으로 강연,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마다 ‘시대의 징조’를 설명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경계하였다.

1980년 4월호 <씨알의 소리>는 모처럼 126쪽에 이르는 두툼한 지면으로 제작되었다. 10주년기념호였다. 함석헌은 4ㆍ19 스무돌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에게 4ㆍ19는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평론을 실었다. CBS 공개방송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그리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세, 어떡허지?>를 썼다. 이 글에서는 고난에 찼던 지난 10년을 되돌아 본다.

나는 글을 깎이울 때 살을 깎이우는 것 같았고, 붓을 깎이울 때 등뼈를 꺾이우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가 갈렸지만 이는 풀을 갈아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대적을 물고 찢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면 어서 더 물게 하고 짓밟으면 어서 더 짓밟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습니다. 나더러는 원수 갚을 생각 말라 했습니다. (주석 18)

창간 10주년 행사는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회를 기점으로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ㆍ청주, 원주, 대전, 청주를 2차 계획으로 잡았다.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 강연회는 1,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함석헌ㆍ안병무, 대구는 함석헌ㆍ김용준ㆍ송건호, 부산과 전주는 함석헌ㆍ송건호가 각각 나서고, 광주는 함석헌과 장을병이 맡았다. 가는 곳마다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많은 시민이 모여 함석헌과 연사들을 환영하고, 그간 <씨알의 소리>의 역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화창한 5월의 푸른 하늘에 서리를 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80년 1,2월호, 6~7쪽.
15> 앞의 책, 63~64쪽.
16> <씨알의 소리>, 1980년 3월호, 4쪽.
17> 앞의 책, 9쪽.
18>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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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7 08:00 김삼웅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함석헌은 해외여행의 복이 없었는지 모른다. 1963년 모처럼 세계일주 여행길에 5ㆍ16주체들이 공약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데 이어, 이번에도 퀘이커의 도움으로 세계여행 중 10.26사태 소식을 듣고 여행을 중단한 채 돌아왔다. 박정희와는 전생에 악연이 켜켜히 쌓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불행한 최후를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사랑하고 ‘대통령감’으로 기대했던 장준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 측근은 증언한다.

어느 날이었다. 원효로 선생님댁이자 <씨알의 소리>사를 찾아온 몇몇 씨알들과 함 선생님은 대화 중 말씀하신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쉽지….” 하시고 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가리키고, ‘끝’이란 ‘박정희의 최후’를 가르킨다. 풀어서 말하면 “내가 박정희의 최후를 볼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어떤 분노나 감정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과 함 선생님만큼 철저하게 싸운 사람도 없지만, 대적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하시고 언제나 평상심으로 돌아와 꽃을 가꾸시고, 뜰을 쓸고, 기도와 명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진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석 12)

함석헌의 저항의 대상은 법과 제도 또는 체제이지 결코 개인은 아니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개인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위치나 권력을 탐하여 반독재 저항운동에 앞장선 것도 아니었다.

한때 사회 일각에서 그를 대통령후보 또는 야당 당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9년 가을,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당수 유진오가 병으로 쓰러지고, 야당은 와해 위기에 내몰렸을 때였다.

이무렵 재야인사 영입케이스로 야당 당수가 됐던 유진오 씨가 물러나고 야당의 새 당수를 뽑아야 할 때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야당 정치계에서 함석헌 선생을 당수로 모셔야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 국민의 지지를 받고 박정권에 대해 당당히 맞설 인물로 함 선생님 외에 다른 인물이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진 듯 했다. 그래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시한 중진 인물들이 줄줄이 원효로 함 선생님 댁을 찾아왔다. 정일형 박사, 윤보선 전대통령까지 찾아와 함 선생님을 설득한 것으로 안다. 정치계뿐만 아니라 재야 지성인들까지 가세하여 함 선생님께 권유했다고 들었다. 재야 지성인들이 함 선생님이 야당 당수가 되어야한다는 이유는 있었다. 지금까지의 야당은 야당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야당이었다. 진정한 야당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요즘 말대로 ‘물갈이’를 하기 위해서는 함 선생님 같은 참신한 인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석 13)

이같은 요청을 함석헌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결코 성격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그런 역량도 없다는 뜻이었다. 1963년 가을 쿠데타 세력이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면서 일부에서 함석헌을 범야단일후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도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함석헌은 자유당 말기 윤형중 신부와 논쟁을 할 때 “모가지가 아흔 아홉 번 잘려도 대통령은 아니한다”고 호언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면서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총을 쏘는 데”(장면 부통령에 대한 경찰의 암살음모)라고 예시를 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배자가 되는 것, 즉 감투를 쓰고 누구를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장로, 목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이승만을 쫓아내고도 장면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글과 말이 순수하고 무게가 실린 것은 개인적 이해를 떠나 공론(公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권과 지배가 없는 무권력주의의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 퀘이커에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해외순방 중일 때 박정희 정권은 도처에서 말기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새벽 2시에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을 당사에 난입시켜 노동자들은 끌어내고, 당직자와 취재기자들까지 무차별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회견을 빌미로 김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등 단말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농성에 동조하여 종교계, 해직 언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단체들이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서고, 마침내 10월 16일 부산대학생 4천여 명의 궐기를 시작으로 부마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7시경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성들을 불러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5·16쿠데타로부터 18년 6개월, 유신변란으로부터 7년 여 만이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면서 11월 15일 귀국하였다. 절대권력자가 장기독재 끝에 절명하면서 정국은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에 빠져들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유신세력은 여전히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재야 민주인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투쟁에 나섰다. 11월 24일 YWCA집회를 통해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를 통한 대통령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계엄상태에서 ‘위장결혼식’을 이유로 재야인사들이 모이게 되고, 선언문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거국내각 수립하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계엄사는 양순직ㆍ박종태ㆍ백기완ㆍ임채정 등 14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포고령위반으로 처벌되었다.

함석헌은 아직 긴 여행의 노독이 풀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노령을 이유로 구속을 면했지만, 박정희가 암살 당한 이후에도 다시 구금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되었다.

 


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MBC

독재자가 암살되고 외신에서는 ‘서울의 봄’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정치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 하나회 출신들이 하극상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또 새로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함석헌은 12ㆍ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계엄사 검찰부에 의해 12월 27일 다시 소환되었다.
군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해가 바뀐 1980년 2월 25일 함석헌은 군법회의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 면제 처분을 받았다. 신군부도 그의 위상에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주석
12> 박선균, <씨알 소리 이야기>, 108쪽, 도서출판 선, 2005.
13> 앞의 책,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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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79년 8월 11일 퀘이커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로 출발하였다. 국내사정이 어려웠으나 이 회의는 빠지기 어려운 국제대회였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퀘이커의 주요 인물로 인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2월 26일 함석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이어서 3월 5일에는 미국 퀘이커봉사회를 대표하여 바우만 여사가 노벨평화상 추천서를 갖고 함석헌을 찾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ㆍ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기구 및 간호원 파견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 모금운동 등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평가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퀘이커봉사회는 1월 24일자의 전문을 통해 “한국의 함석헌을 1979년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한다. 함석헌은 정의와 인권을 위하여 비폭력적 운동으로 일생 동안 헌신했고, 세계평화를 위한 씨알들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고취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1월 31일자 소개 편지에서는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실현에 대한 함 선생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은, 그의 깊은 종교적 신앙으로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반대하는 현정부일지라도 그의 반대는 정권욕이나 개인의 이득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함 선생은 그의 동포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투옥하는 자들과 또는 그를 제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함 선생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것은 그가 깊히 염려하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사람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주석 8)

함석헌은 자신이 이와 같은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퀘이커들이 나를 추천한 것 같으나 사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겸손해하였다. 그의 노벨상 추천 소식은 2월 26일치 <중앙일보>가 <워싱턴 스타>를 인용, 1단 기사로 보도했을 뿐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외면하였다.

함석헌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250여 명의 퀘이커들과 회의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갔다. 함부르크, 괴칭겐,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영국으로 들어갔다. 여행 중에는 그 나라 퀘이커들과 한인교회,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간혹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캐나다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피츠버그에 머물던 중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소식을 듣고, 11월 15일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 귀국하였다.

해외에 머물면서도 ‘씨알의 독자들’을 위해 여러 차례 <해외 통신> 보냈다. 이 소식은 <씨알의 소리> 에 실렸다.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도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어떤 할머니가 조그마한 싼 물건을 내밀면서 “뉴멕스코연회에서 왔습니다. 우리 연회 어떤 부인이 이것을 주면서, 대회에 가서 누구나 줌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드리라고 했는데, 내가 보니 당신이면 될 듯해 드립니다.” 했습니다.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 그 속에 든 것을 꺼내보니, 은으로 조그만 비둘기를 만들어 가슴에 차도록 한 것입니다. 나는 뭐라 말 할 수, 사양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절을 하고 받았습니다. 노벨상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조그만 표적인 줄 압니다.(주석 9)

함석헌은 이번 해외순방에 두 가지 목적을 두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세계 각지의 퀘이커들을 찾아보는 것이고 그 담은 또 간 곳 마다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퀘이커들 찾는 것은 본래 퀘이커 협의회에서 나를 초청해 주었고 세계일주를 하며 각지의 모임과 혹은 개인을 찾아보도록 일정을 꾸며주었기 때문입니다. 협의회가 그렇게 한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는 나로 하여금 세계 각지에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될수록 한국의 진상을 알려주도록 하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도 좀 더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석 10)

함석헌은 평화주의자였다.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독재와 반국가주의, 국제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침략주의를 주창하면서 싸워온 것은 궁극적으로 국제평화의 실현에 있었다.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에 “평화”를 특집으로 꾸미고 송건호ㆍ김용준ㆍ김동길과 함께 <세계평화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문제>를 주제로 하는 좌담회를 연 겻도 그 일환이었다. 함석헌은 이 좌담에서 우리나라가 단군신화에서부터 평화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난 우리나라도 고대 처음에 있어서는, 우연히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그걸 고증할 수가 없지만,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쟁이야기는 없이 개국을 했다고 하는건 퍽 크게 우리로서는 아주 주목할 점이라고 그렇게 보는데, 서양처럼 전쟁을 꼭 해가지고 나라를 세웠다든지, 동양에서 일본만 해도 역사 처음에는 전쟁으로 개국을 했다고 그러고, 아마 세계 어느 나라의 처음치고 싸움 없이 개국했다는 건 별로 없을 거고…. (주석 11)

주석
8>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102쪽.
9> <씨알의 소리>, 1979년 10월호, <해외통신> 제3신, 9~10쪽.
10> 앞의 책, 27쪽.
11>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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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5 08:00 김삼웅

 

 

산모에게 네 속에 있는 애기가 나올 때가 되어서 그런데 이제 나와야지. 낳는 것 네 책임이야. 이런 진통을 겪어야 돼. 그렇게 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낳을 작정을 하면 고통을 넘어설 수가 있어요.

함석헌은 지금이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진통기’로 보았다. 아무리 포악한 권력이라도 결코 민중의 항거를 언제까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씨알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맹자의 말을 인용한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길 때(天將降大任於是人也)
우선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必先苦其心志)

이 말은 생명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한단 이 말이에요.

함석헌은 자신의 고통을 비롯하여 국민의 고난을 새시대를 열기 위한 하늘의 시련으로 인식하면서 두려움 없이 독재정권과 싸웠다. 싸우고 싸우다보니 어둠은 더욱 짙어갔으나 국민을 배반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함석헌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

1979년 3ㆍ1절 60주년을 앞둔 함석헌의 감회가 각별했다. 18세 때 3ㆍ1운동에 참여한 이래 40여 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해방된 나라는 두 쪽이 나고, 가족을 남겨두고 택한 남쪽에서는 백색독재에 이어 군사독재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달랬다.
생각해 보라. 이렇게 죽은 민족이 어디 있나? 감각이 있고, 의분이 있고 결단이 있나?
금년이 3.1운동의 예순 돌이니, 한번 크게 뜻 있는 기념을 하여, 침체해 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날이 심해가는 사회부정의를 일소하여, 두 동강이 난 나라를 어서 빨리 하나로 묶고, 남북이 하나로 어우러져 회개와 용서의 눈물로 이 강산을 적시고 감사와 희망의 노래로 저 산천초목을 들뛰게 하며, 그리하여 세대의 모든 압박당하고 찌저진 민족으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하잔 생각을 어느 누가 아니했겠느냐?

함석헌은 이같은 심경에서 다시 행동에 나섰다. 1979년 3월 1일, 3ㆍ1운동 60주년인 이날 재야 민주인사들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민민연합)을 결성했다. 김대중의 석방을 계기로 그동안 다소 미온적이던 ‘국민연합’을 확대 개편하여 ‘민민연합’으로 확대한 것이다. ‘민민연합’은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면서 전권을 3인 의장단에 맡기고, 보다 광범한 활동과 조직기반을 위해 지방조직에 착수했다.

‘민민연합’은 3월 4일 <발족선언문>을 통해 유신체제 철폐와 민주정부 수립을 당면목표로 밝히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평화적으로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5월 1일에는 3인 의장단 명의로 최근 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민주인사들에 대한 장기 연금과 구치소 내의 심각한 인권침해, 폭행사건과 인권유린 사태를 검찰에 고발하고,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함석헌은 이 <발족선언문>을 힘차게 낭독했다.

권력과 부조리의 구조를 비판하는 모임에서 그가 글을 읽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그러한 기회에 ‘낭독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나이로 보아 비교적 젊은 것들이 읽지 못하는 일들을 그는 서슴치 않고 해낸다. 후배들이 선생님께 낭독을 부탁하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태연하게 허락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젊음 앞에 부끄러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늙은 젊은이, 물과 같은 부드러움과 불과 같은 의지와 어울리고 있는 늙은 젊은이, 바로 그가 멋쟁이 함석헌이다.

정부는 반체제 투쟁과정에서 시국선언문의 낭독자, 집필자, 서명자 순으로 체포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공동대표 체제를 갖추고, 서명자도 명망가들을 동원한다. 구속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또 발표자는 명망가 중에서도 저명 인사를 택한다. 잡혀가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선정된 함석헌은 각종 시국선언의 낭독을 한 번도 꺼리지 않았다. 해서 구속, 연행된 일이 수없이 많았다.

6월 23일에는 함석헌ㆍ윤보선 등 20여 명이 화신백화점 앞에서 카터 방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함석헌은 이번에도 연행되었다가 다음날 풀려났다. 박정권은 7월 31일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김영삼 총재의 대정부 질의 내용(개헌)을 게재한 것을 문제 삼아 문부식 주간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8월 9일에는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시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가 5ㆍ16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지 18년 째였다. 함석헌은 거듭 ‘시대의 징조’를 느끼면서 반독재 투쟁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주석
4> <씨알의 소리>, 1977년 7월호, 22쪽.
5> 앞의 책, 23쪽.
6> <씨알의 소리>, 1979년 3월호, <가시나무 가지의 외침>, 4쪽.
7> 한완상,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멋>, <씨알의 소리>, 1979년 7월호,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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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4 08:00 김삼웅

 

 

함석헌에게 박정희라는 통치자와 유신체제는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과 인권유린, 헌정질서 파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해서 끝없는 비판에 나서게 되고, 저항의 횃불을 내릴 수 없었다. 압제가 있는 곳에 저항이 따른다는 것은 그의 오랜 신념이었다.

유신체제에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변형된 선거제에 의해 두번째 치른 총선이었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선거제였다. 이같은 구도에서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 여당인 공화당이 31.7%를 얻어 야당이 1.1%를 더 득표했다. 하지만 국회의석은 야당이 3분의 1석에도 이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에 앞서 7월 6일 이번에도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9%의 득표로 5선 대통령이 되었다.

근대적 정당제도가 생기게 된 것은 반란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그리고 선거제도는 폭력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는 정당과 선거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상이 파괴되면 변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유신체제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데모와 각종 시위는 시민저항권사상의 발로이고 정당한 생존권투쟁이었다.

1978년 1월 19일 함석헌은 정구영ㆍ지학순ㆍ천관우ㆍ박형규ㆍ조화순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유신체제하의 모든 선거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양대 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서 2월 24일에는 윤보선 등 각계 인사 66명과 유신체제와 학원 및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3ㆍ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정보부에 연행되어 3월 1일까지 구금당하였다.

유신체제 붕괴의 서막인 YH사건이 터졌다.
5월 9일 YH무역 여성근로자들이 불법해고와 부당감원, 전직, 감봉, 인권유린 등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시작했다. 함석헌은 거듭 양대선거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5월 18일 이희호 등 양심수 가족들과 투표용지 소각식을 갖고, 해직교수, 해직 언론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철폐, 체육관선거 시정 등을 요구하는 <오늘의 우리 주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제도언론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6월 2일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기독교회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함석헌은 6월 2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박형규 등 민주인사를 비롯하여 대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유신체제 비판과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으로 해산되었다가 다시 모여 “유신철폐”, “박정희 퇴진” 등의 구호와 반체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인근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양심수들도 때를 맞춰 유신반대를 주장하며 옥중농성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20여 명과 가톨릭 신부 5명이 구속되고, 함석헌도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7월 5일 함석헌ㆍ문익환 등 각계 인사 402명은 ‘민주주의국민연합’(국민연합)을 발족했다. 서명 인사들의 연금 사태로 창립총회는 유산되었으나, 민주인사 402명 및 12개 재야 단체가 공동 서명한 <민주국민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도 제도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퇴약볕이나 혹한의 추위를 가리지 않고 반유신 시위에 참석했다. 그리고 경찰(전경)과 대치하는 맨 앞줄에 섰다. 학생들과 재야 단체에서 집회, 시위에 초청하면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지식인들과 외면하는 언론에 의분을 느꼈다.

함석헌에게 ‘의분(indignation)'이란 용어가 마음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3ㆍ1운동 때 우리를 도왔던 스코필드 박사의 위급 소식을 듣고 병원에 위문 갔을 때, 그가 손을 꼭 잡으면서 “한국 사람들 의분을 몰라요!” 했다는 것이다. (주석 1) 이후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의분을 느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항의 길을 시지프처럼 걸었다.

재판에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나는 여러 외국신문, 잡지의 기자들을 만났는데 (국내의 기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조직의 능력과 상대의 앞을 내다볼만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솔직히 말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성공이거나 실패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고, 다만 이것이 내 할 의무이기 때문에 할 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옳은 이상, 몇 해가 되겠는지 몇십 몇백 년이 되겠는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마침내는 우리가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에는 까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낯빚을 고쳐서 알았노라 동의를 했습니다. (주석 2)

함석헌은 1977년 7월 8일 기독교수협의회의 초청으로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고난>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무렵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하여 여러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날 강연장에는 수백 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함석헌은 이 강연에서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다.

지금 시점이 어려운 때에요. 애기가 꿈틀거리며 나오려고 그래요. 애기는 신시대 아니에요? 그런데 산모는 그걸 몰라. 그냥 고통스러워 해. 그래.

 


1978년 5월 8일 함석헌 선생님의 부인 황득순님의 장례식에서 말씀하시는 송두용선생. 뒷편에 서 계신 문익환, 백청수, 김제태 (오른쪽부터)

1976년 5월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 황득순이 눈을 감았다. 1917년 동갑내기로 결혼하여 61년을 살아온 아내였다. 10여 년 전부터 앓아누운 아내의 수발을 하면서 제대로 남편 역할을 하지 못한 통한을 삼켰다. 한 때는 외도로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있었다.

황득순은 글을 몰랐다. 해서 남편의 글을 한 편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아내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들이 조혼의 아내를 버리고 신여성을 택할 때도 그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를 사랑하며 끝까지 지켰다. 아내는 남편이 평생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월급봉투를 갖다주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고 어려운 가계를 꾸렸다. 함석헌이 생애를 두고 저항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이같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은은 읊었다.

함석헌옹 부인

세상에 바람 같은
훨훨 날아가는 학 같은
서천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그런 함석헌 옹에게 부인이 있다니
봉건시대 여성 호칭으로 부인 황씨
세상에 얼굴 한 번 내보이지 않은 채
영감은
온 세상의 얼굴인데
온 세상의 정신인데
부인 황씨 오래 몸져 누워

영감과 달리 몸집도 항아리처럼 큰 데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그 부은 얼굴 내보이지 않은 채
평생 불화 그대로
어느 날 숨졌다
그때에야 부랴부랴 사람들은
장례식 준비하였고
날씨는 사나운 개처럼 사납게 추웠다.
(주석 3)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7년 2월호, 3쪽.
2> 함석헌, <정신 바짝 차려>, <씨알의 소리>, 1997년 4, 5월호, 6쪽.
3> 고은, 앞의 책,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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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3 08:00 김삼웅

 

 

1983년 12월 한길사

함석헌이 쓴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 부문적으로 살펴보자. 간디의 길은 곧 함석헌의 길임을 보게 된다.

나는 꽃들을 사랑하지만 누가 묻기를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하면 대답을 못하고 “글쎄….”하고 만다.
여러 가지 책을 감격을 가지고 가장 읽지만 좋은 책을 골라 추천하라면 “글쎄….” 하다 마는 일이 많다.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새 누가 만일 추천을 해달라고 청한다면, 그보다도 청이 오기 전에 내 편에서 권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 책을 지금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또 깊이 반성해 봐도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이 있다.
(주석 15)

인용문대로 함석헌은 이 무렵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였다.
1927년과 1929년 마하데브 데자이가 1, 2권으로 번역한 영문판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간디는 1925년에 이 자서전을 썼다. <간디 자서전> 관련해서는 뒤로 미루고, 함석헌의 글을 다시 조명한다.

“어느 사람의 생애는 아니그럴까마는, 특히 간디의 일생은 마치 큰 나무의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날 때에는, 모든 도토리가 꼭 끝이 뵈는 도토리 알이듯이, 간디도 각별히 천재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람에 따라 점점 그것이 보통이 아닌 위대함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해서 간디는 자기를 개발한 사람이다. 이 의미에서 내가 한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그의 말은 그대로 옳은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어가노라면 꼭 소금을 집어 먹는 것 같다. 언제든지 같은 맛이다. 같은 맛인데 싱거운 대목이 하나도 없다.”

“사람은 나기는 물질적인 존재로 나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인 존재에까지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이 힌두교의 올짬이라면, 인도 민족이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간디 자신은 물론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참의 사람인 그가 그런 우상숭배적인 떠들썩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역사를 굽어보는 견지에서 한다면 그것은 역시 인도 씨알의 자기 발견의 한 발걸음, 나아가는 한발 걸음이라해야 할 것이다.”

“마하트마란 마하 곧 크다는 말과 아트만, 곧 영혼 혹은 자아라는 말을 합해서 만든 말인데 인도 역사에는 여러 마하트마가 있다. 민중에 의해서 불리워진 이름이지 어떤 제도에서 나온 자위가 아니다. 동양 말로는 대성(大聖)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인데 마하트마에 이르렀으니 m에서 M으로 올라간 것이다. 힌두교에서 인생의 목적이 self(小我)에서 Self(大我)의 발견에까지 가야한다는 그대로다.”

“그러면 간디를 마하트마에까지 올라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힘’(진리-필자)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서전의 이름을 “나의 힘에 대한 실험”이라고 했다. 그 실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자기 일생을 하나의 실험으로 보는 데 간디의 간디된 점이 있다.”

“하나 더 말한다면, 그를 몰아 총알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칠줄을 모르고 그저 올라만 가게한 것은 씨알에 대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자신이니, 박애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간디는 자기와 씨알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알이 돼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불가촉민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고, 완전히는 못되어도 제도상으로는 평등의 기초를 놓아 줄 수 있었다.”

“자서전을 읽어가며 놀랍고도 또 눈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저 페이지마다 사건마다 씨알, 씨알, 봉사, 봉사로 옷의 실밥처럼 무늬가 놓여있다는 점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여 <나의 진리 실험이야기 - 간디 자서전>을 1983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기왕에 쓴 간디 관련 논설도 한데 묶였다.

여러 군데서 눈시울이 뜨거워 그냥 써 내려갈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찾곤 했다.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인격적 매력이라 할까. 영어로 한다면 참말 스위트한 점이 있다. 선배의 존경을 어쩌면 그렇게 하는지 자기의 위대함은 전면 잊고 그저 어린애처럼 선배를 위한다. 자기의 위대함을 잊으니 정말 위대하지 않겠는가? (주석 17)


주석
15>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쪽.
16>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 19~22쪽, 발췌.
17> <씨알의 소리>, 52쪽, 한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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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2 08:00 김삼웅

 

 

마하트마 간디

함석헌이 영향을 받고 존경하는 인물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신앙의 대상이 있었고, 역사관과 철학사상의 가르침도 있었다. 국내 인물로는 안창호ㆍ조만식ㆍ이승훈을 존경하고 유영모와 김교신과는 스승이고 친구의 ‘사우(師友)’ 관계였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함석헌이 으뜸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다. 간디는 함석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존경한다. 그런데 함석헌의 간디 존경은 남달랐다. 여러 차례 그와 관련 글을 쓰고, 자서전을 번역하고, 인도를 방문하여 그의 생가와 기념관 등을 찾았다. 간디는 함석헌의 멘토였다.

함석헌은 3ㆍ1운동 뒤 인도에서 사챠그라하운동을 벌일 때 간디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로망로랑의 <간디전>을 읽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간디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간디에 관한 글을 쓴 것은 <사상계> 1965년 4월호였다. <사상계>는 “위기를 이겨낸 인간상”을 특집으로 꾸미면서 함석헌은 <간디의 참 모습>을 썼다. 부제 “죽음을 이겨낸 간디는 목적보다도 수단의 옳음을 외쳤다”에 이 글의 올갱이가 담겼다고 하겠다.

함석헌은 간디가 죽은 1월 30일, 글 쓴 날로부터 17년 전, 1948년 간디가 세상을 떠난 날에 맞추어 이 글을 쓴다고 밝혔다. 띠엄 띠엄 소개한다.

 

“간디의 일생은 파란많은 일생이요, 그의 남겨 놓은 공적도 가지가지로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히말라야 같이 자꾸만 올라가는 길세요. 올라갈수록 더 험하고 험할수록 그 보여주는 시야가 더 넓습니다. 그것은 운명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행동의 사람인 그는 자연 용기를 귀히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하는 그러면서도 대적을 미워함 없이 죽을 각오로 대할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우다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가거나 빌붙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다음 겸손입니다. 모든 위대한 인격이 다 그러한 것 같이, 이도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자신(自信)으로 하면 그렇게 자신이 강한 사람이 없건만 그러면서도 또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중의 하나는 “수단이 옳아야 옳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저절로 옳은 것이 된다” 하는 것이 그 정신입니다. 그러나 간디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주장합니다. 목적이 문제 아니라 수단이야말로 문제라고. 그리고 실제로 술책을 쓰지 않고 참대로 하면 일은 실패되는 것만 같지만 사실로는 그것이 이기는 길이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칠조차도 그 죽음 앞에 절하고 조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칠이 무엇입니까? 무너져가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려는 폭력주의의 낡은 정치사상의 한 개 상징입니다. 그 처칠은 일찍이 간디가 원탁회의를 하기 위해 런던에 갈 때 “그 반 나체의 비렁벙이 중놈”을 어찌 우리 폐하의 어전에 서게 하느냐고 약이 올라 반대했고, 2차 대전 때에 인도는 절대로 독립을 주어서는 아니된다고 간디를 잡아 감옥에 넣도록 지시했던 사람입니다.”

“처칠은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더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처칠은 잊을 날이 올 것입니다. 간디를 잊을 날은 없을 것입니다. 간디는 무엇으로 죽음을 이겼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주석 14)

제71호(1978년2월호)

함석헌은 <사상계> 1961년 2월호에 <간디의 길>, 서울대 가정대 <아람> 제2호에 <새 인도와 간디>를 쓰고, <씨알의 소리> 1976년 10월호에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특집으로 준비했다. 김성식의 <인물보다 업적을>, 함석헌의 <마하트마 간디>, 윤태림의 <윌리암 어네스트 하킴>, 송건호의 <서재필>, 전경연의 <옷도 A. 피터 선생>이 특집의 줄기였다.
<씨알의 소리> 1978년 2월호에는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 특집으로 <그는 어떻게 마하트마가 되었을까>(김동길), <간디가 던진 문제>(안병무)를 싣고, 같은 해 11월호에는 간디의 <비폭력의 원리>(이상진 역), 1979년 7월호에는 <간디의 평화단 운동>을 직접 번역하여 게재하는 등 간디에 대한 연구와 존경심을 계속하였다.



주석
14> <사상계>, 1965년 4월호, 234~240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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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

013/0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학교 시절 유영모에게 <노자>를 처음 배웠다. 그리고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또 이질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를 믿고 인도철학을 배우면서, 고난의 삶을 지탱하였다. 항일ㆍ반소ㆍ반독재 투쟁의 질곡에서도 정신적으로는 노ㆍ장의 세계에서 ‘소요유’를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도 2차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동양고전 속에 지혜가 있지 않겠느냐, 자유하는 민중으로 가는데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데서 공맹이나 노장을 파기 시작한 거지요.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생각하자는 거지요. (주석 10)

함석헌은 가파른 생애만큼이나 정신적ㆍ종교적ㆍ학문적으로도 가파랐다. 그의 시대가 전통사회 - 식민지 - 분단 - 전쟁 - 독재로 점철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학문, 정신세계도 변화와 융합을 거듭하게 되었다.

한 연구가의 분석이다.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면서 유가와 노장은 물론 불교에까지 넘나들면서 진리관에 있어서는 일종의 진리다원론적인 진리관을 펼친다. 기독교와 노장은 매우 이질적인 것에 속한다. 기독교가 유일절대신을 섬기는 종교라면 노장은 창조적인 신의 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自然而然)’과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自生自化)’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에게는 그것이 공존한다.

함석헌이 진리다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초등학교 때에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체로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비록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의 전부였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오산 시절에 종교를 과학적인 자리에서 바라보게 되면서부터 그것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주석 11)

함석헌은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이요, 그 알짬되는 진리에 있어서는 국경이나 시대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리다원설을 체득한다. 이로 인해 ‘정통기독교’ 측에서는 이단으로 배척했다. 그의 진리관은 기독교적인 유일신관을 뛰어넘고, 진리는 시대에 따라 적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채호가 말한 “불교의 조선, 유교의 조선, 기독교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불교, 유교,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는다.

그럼 여기서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노장과 관련지어보자.
함석헌은 1978년 그의 나이 여든이 다 되었을 때 생각하는 방식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라는 사고방식은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다원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노장의 말을 빌면 무위(無爲)의 정신으로 판단하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인도 판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 판단했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함석헌이 노자의 말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인 “어진 이는 지어먹은 마음이 없고 씨알의 마음으로 삼는다”를 응용하여 말한 것이다. 함석헌이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전체의 자리에 서 있으면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비록 선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석 12)

1996 한길사. 함석헌 주석

함석헌은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다는 <바가바드 기타>와 세계에서 가장 긴 시(詩)라고 하는 <마하바라타(Mahabharashtra)>를 번역하였다. 그는 ‘기타’를 번역하면서 간디 이야기를 서문에 썼다. 간디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읽었고, 젊어서 공부할 때 이 책을 외우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붙여 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웠다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밝힌다.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에 <바가바드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주석 13)

‘기타’의 연대는 기원전 4~5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신의 노래”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한다. 함석헌의 번역으로 두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되었고, 우리나라는 이슬람경전의 무지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게 되었다.


주석
10> <전집>17, <언로 열려야 시민정신 깬다>.
11> 조민환, <함석헌의 노장이해>, <한국사상과 문화> 제11집, 229쪽, 수덕문화사, 2001.
12> 앞의 책, 231~232쪽.
13> <전집>1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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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서 힘겹게 싸우면서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행동하였다. 생각하는 사람, 탐구하는 지식인, 행동하는 실천인이다. 그에게 나이는 시쳇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늙어가는 데 비해 그는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그만큼 사유와 독서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갔다.

갈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여 잡지에 연재하고, 동양고전을 풀이하고, 여행기를 쓰는 등, 4,50대의 학자가 하기도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였다. 학문의 질양면에서 어느 학자도 따르기 쉽지 않았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6월호에 “한국사상의 발굴과 창조”를 특집으로 꾸미면서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번역하여 실었다. 백낙청의 <분단시대 문학의 사상>, 김경재의 <기독교사상과 한국사상>, 이경식의 <한국정치사상의 모색>이 함께 실렸다.

함석헌은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중에 우선 3장만 번역하여 여기에 실었다. 이때까지도 한문으로 쓰인 이 책의 한글 번역이 없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도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 분야가 유ㆍ불을 비롯 기독교사상, 인도사상, 힌두교경전 등 미치지 않는 부문이 드물지만 도교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동양 고전은 20대 시절부터 그의 책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닦고 익힌 한문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와 <소요유>, <제물론> 등을 번역했다.

뿐만 아니라 맹자의 <맹자>, 굴원의 <어부사>, 왕양명의 <대학문>, 두보의 <병거행>, 문천상의 <정기가>등을 강론, 풀이하였다. 불교 경전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법정 스님이 머문 여수 불일암을 찾아서는 “나도 나이만 젊었으면 승려가 되었으면 싶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천착하면서 씨알들에게 쉽게 풀이하여 읽혔으며, 고전풀이 시민 강좌를 통해 대중화하려고 애썼다. 그의 성서와 고전 강좌에는 많은 시민이 참석하였다.

"오늘날 씨알이 씨알 노릇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옛글, 곧 고전을 고쳐 읽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의 옛글이다. 이날까지 서양문명, 더구나 물질주의적인 문명이 주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동양은 오랜 정신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 눌려서 거의 그 값을 인정받지 못했고, 동양사람 자신까지 동양의 생각을 업신여겨왔다. 더구나 종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서양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들었고, 인류의 장래를 위해 참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동양 소리를 하게 됐다.” (주석 5)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이후 연속적으로 ‘씨알의 옛글풀이’를 이 잡지에 연재하였다.
그의 한문실력은 ‘오산 도깨비’의 소문이 빈말이 아닐 만큼 출중해서 거침이 없었다. 단순히 번역 수준을 넘어서 주석을 달아 ‘함석헌식 해석’을 시도하였다. 동양의 대표적 고전을 자신의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더불어 생의 활력으로 삼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아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산 영(靈)이었지 결코 죽은 글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다 알지 못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ㆍ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道)에 가깝다”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알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莫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소요유>), 이 양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주석 6)

함석헌은 공자와 맹자의 철학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더 좋아했다. “유교는 실천도덕으로 단계적으로 지도하자는 것이요, 노ㆍ장의 가르침은 궁국의 자리를 뚫어 단번에 현실을 초월하는 자리에 가자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자연 예수가 밤에 찾아와서 “선생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 줄 압니다”한 니고데모에 대해,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하여 첫머리에서부터 까버리던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후에도 두고두고 논쟁이 있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 같이 노자ㆍ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길은 좁고 험하다고 했던 것 같이, 노자는 자기의 길을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주석 7)

함석헌이 특히 노자에 매료된 것은 그의 평화주의 사상때문이었다.

“나는 노자를 평화주의의 첫째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그전에 이미 이사야가 있어 ‘칼을 보습을 만들 것’을 외친 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자처럼 시종일관해서 순수한 평화주위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더구나 그것이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장자는 그것을 우주적인 나팔로써 외쳤다.” (주석 8)

노자와 장자는 함석헌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제자는 실천교사가 되었다. 그는 노ㆍ장을 닮고자 했고, 해서 그의 사유와 행동에는 2000년이 넘는 시차에도 스승들의 체온이 스민다. 기독교와 노ㆍ장철학, 인도사상, 힌두교사상을 통섭하는 그의 사유의 세계는 가히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접한다.

“사람의 마음이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 구속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하는 초월적 정신계에 사는 것”이라 풀이한 소요유에서 함석헌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함석헌이 동양고전 중에서도 가장 즐겼던 것의 하나가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였다. 일찍이 안중근이 소시적에 암송하고,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도 놓지 않았던 글이다. 함석헌은 특유의 문장으로 풀이했다.

정 기 가

하늘 땅에 빠른 숨 있어서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아래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위에선 해요 별이 됐으며
사람에서 허허라 부르는 것이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 찼더라(…)
제(齊)에 있어서 태사의 글
진(晋)에 있어서 동고의 붓
진(秦)에 있어서 장랑의 망치
한(漢)에 있어서 소무의 절개
엄 장군의 머리가 됐고
희 시중의 피가 됐으며
장 저양의 이가 됐고
안 성산의 혀가 됐더라
혹은 요동의 삿갓되어
맑은 뜻 어름 눈을 가다듬었고
혹은 출사표 되어
그 장렬함, 귀신을 울렸으며
혹은 강 건너는 뱃대 되어
분한 한숨 오랑캐를 삼켰고
혹은 도둑 치는 홑 되어
안 된 놈 대가리가 부셔졌더라.(…)
아아, 슬프다, 이 진탕 속이
나의 즐거운 나라 됐구나
어찌 무슨 다른 잔재주 있어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돌아보아 이 속에 깜작이는 빛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푸른 하늘인들 다하라만은
어진이들 가신 날은 이미 저물어도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처마 밑에 책 펴 읽고나니
옛 길 내 낮을 비쳐 주노나.
(주석 9)


주석
5> 함석헌, <옛글 고쳐씹기>, <전집 20>, 13쪽, 한길사, 1982.
6> 앞의 책, 26쪽.
7> 앞의 책, 29쪽.
8> 앞의 책, 31쪽.
9> 함석헌, <하늘땅에 바른 숨 있어>, 279~281쪽(발췌), 삼만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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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3장]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통섭하다

2013/02/0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6년 1ㆍ2월호부터 표지 뒷면에 <우리의 내세우는 것>을 제정하여 실었다.
일종의 사시(社是)인 셈인데, 8가지를 들었다. <씨알의 소리>의 나갈 길과 존재 목적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의 일단이기도 하다.

ㅇ 씨알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입니다.
ㅇ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ㅇ 씨알의소리는 어떤 종교ㆍ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ㅇ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ㅇ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ㅇ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ㅇ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래로 삼습니다.
(주석 1)

이것은 함석헌의 기본철학이고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새삼 통권 50호인 1976년 신년호에 이와 같은 사시를 내걸게 되었을까. 한 해 전에 인혁당 관련 8명의 처형과 긴급조치 9호의 발동, 장준하의 의문사 등을 목격하면서 유신체제와의 정면 싸움을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나타난다.

이즈음 함석헌의 관심은 국내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1976년 1월 중국에서는 실용주의 노선의 주은래가 사망했다. 그래서 중국의 국가주의의 팽창을 우려했다. <씨알의 소리>에 쓴 <세계구원의 꿈>이라는 대논설은 그의 폭넓은 국제정세, 특히 중국관을 투시한다. 40여 년이 되는 오늘에도 생명력이 넘치는 논설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일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그동안 오래 서구 세력에 눌렸던 반감은 불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小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주석 2)

함석헌은 우리가 살 길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에 앞장 서는 것과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공동체-필자)을 만들어야 한다”고 방법론을 제시한다. 함석헌은 이어진 글에서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가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 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 없이 한 표의 권리를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 (주석 3)이라 피력한다.

함석헌은 이 책에 김계숙(건국대) 교수의 <영구평화란 가능할 것인가>를 실어 자신의 ‘세계구원의 꿈’을 밑받침하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한다. 김계숙은 “인류의 앞날은 몰락이나 평화냐 하는 준엄한 양자택일의 위기에 직면하여 참다운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위하여 전인류가 최선을 다할 때에 비로소 영구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주석 4)라고, ‘민주주의적 이념의 구현’을 제시한다. 이것은 함석헌이 추구하는 길이었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쪽.
2> <세계구원의 꿈>,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 27쪽.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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