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30 08:00 김삼웅

 

 

양복차림의 함석헌 선생(50년대)

함석헌은 기독교의 교파싸움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비판한다.

장로회가 2분(二分)이 되고 감리회가 2분이 되고 한 교회당 안에서 두 파가 대립해 예배를 드리고 경관을 출동시키고 교회당 차압을 하고, 천주교는 우리는 그런 싸움 아니한다 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마치 국민의 불평을 식민지전으로 전가시켜 겨우 통일을 유지해 가는 제국주의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교파는 다 열교(裂敎)라는 것을 밤낮 선전해서만 유지되어가는 통일이다. 개신파에서 개종해 온 것을 선전 광고하는 것은 그것이 교파심 아니고 무엇인가?

종파 싸움은 기독교 저희끼리의 싸움을 하는 것은 외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근본으로 하면 일체 현세적인 것을 상대로 싸우잔 것인데 그 근본정신이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그런데 외적이 없다는 것은 타협한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타협을 한 것은 속았기 때문이다. 교의 파쟁(派爭)이 일본시대에는 별로 없었다. 공산침략이 심할 때는 천주교와 개신파도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대적이 좀 멀어질 때 종파싸움은 맹렬히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적을 전연 밖에서만 보았고 안에 보지 못한 것이다. 속았다는 것은 그것이다.

함석헌은 당시에 급속히 늘어나는 교회당의 문제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한국기독교는 이승만ㆍ김영삼ㆍ이명박 장로 3인을 대통령으로 ‘배출’했다.

최근에 와서 오는 현상으로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먼저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여러 말할 것 없이 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도 이때껏 어디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보냈다는 것은 못들었고 인간이 지은 것들인데 인간이 지었다면 어디서 났거나 돈 있어서 된 것이지 건축자가 그저 지어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해방 후 날로 더 잘못되어가는 경제에 교회에는 어떻게 그런 돈이 있을까?

교회 경영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무슨 힘으로 되나? 소위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장로란 결코 신앙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돈 있는 사람, 교회경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장로로 되도록 하는 것이오. 지금 교파쟁이 대부분 그 장로급을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 아닌가? 그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맘몬의 교회인가? 기독교인은 속죄를 받은 결과 이런 것도 죄로 아니 느끼리만큼 강철 심장이 되는가?

함석헌은 이 논설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 수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 아닌가? 그러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산 공기와 일광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같이 중압하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사상계> 주간 안병욱의 회상이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글이다. 이 글 때문에 <사상계>가 일약 수천 부가 증가했다. 저마다 다투어서 사 읽었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읽은 뒤에 소감도 여러가지였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신랄한 경고요, 또 선생님 자신의 기독교관을 적은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 선생은 이 글에서 프로테스탄트도 공격했고 가톨릭도 내리쳤다. 기독교인들은 분개했고, 비 기독교인들은 쾌재를 외쳤다.
(주석 24)

장준하는 이 글이 발표된 뒤 안병욱과 함께 신촌 전셋집으로 함석헌을 찾아가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대현동에서 내가 만난 함 선생님은 ‘퍽 수줍어하는 잘생긴 노인’이라는 인상이다. 그렇게 겸허한 노인이 그렇게 격렬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글을 쓰시나 하는 놀라움을 곁들게 하였다. 별로 말씀은 아니 하시고 곁에서 안병욱 형이 이것저것 묻는 말에도, “글쎄, 그럴까, 하기는” 등 비교적 모호한 말 한 두 마디씩을 남기실 뿐이었다. 내가 <사상계>의 발간 취지를 대강 말씀드리고 나서, 앞으로는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하여 글을 써 주십사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글쎄요”라는 말씀만 남기실 뿐이었다. (주석 25)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은 지지와 성원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반대와 폄훼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 명동성당 신부 윤형중이었다. 그는 <신세계> 9월호에 함석헌이 “일부 기독교도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씌우면서 침소봉대한다고 격렬하게 반박했다. 두 사람은 얼마 뒤 본격적인 논쟁을 벌인다.


주석
24> 안병욱, <옆에서 지켜본 사상계 12년>, <사상계>, 1965년 4월호, 265쪽.
25> 장준하, 앞의 글,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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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환도 후에 <말씀>이라는 신앙잡지에 많은 글을 썼다.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새 시대의 종교>, <말씀살이(시)> 등이다.
그리고 <편지>란 잡지에도 <영원히 불어 오고 가는 바람소리>, <맘의 나라>, <속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버리는 것이냐>, <간디의 죽음> 등을 썼다. 기독교 관련 잡지여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함석헌이 일반 국민, 시민을 상대로 한 글쓰기는 <사상계> 1956년 1월호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작으로 한다. 이 글은 무명의 그를 일약 한국사회의 대논객으로 부각시켰다. 당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마각이 드러나고 있던 시점이다. 1954년 5.20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이 금권ㆍ폭력선거로 승리한 것을 계기로 11월에는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을 감행하여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텄다.

1955년 9월의 <대구매일신문>의 필화사건은 언론탄압의 전초였다.
이승만은 1956년 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교ㆍ문화ㆍ예술 단체를 어용화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특히 기독교계의 어용ㆍ부패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함석헌의 대사회 비판은 기독교계를 향했다. 그만큼 사랑하고 아낀 까닭에 아프게 때렸다. 그는 그동안 대사회 발언을 삼가고 있었다. 천성과 성품이 누구를 욕하거나 나무라지 못한 까닭이다.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비판에 나선 것은 역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을 것이다.
 

1959.9 사상계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 장준하와 함께



1950~6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사상계>는 지식인,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고, 마치 지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사상계>가 그만큼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 사장 장준하의 잡지에 대한 열정과 정론정신이 바탕이 되었지만, 함석헌의 날카로우면서도 천의무봉한 글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상계> 1956년 1월호는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인간의학과 현대철학>, 김성식 고대교수의 <대학과 세계정신>, 이숭녕 서울대 교수의 <나의 독서관> 등 꽤 읽을거리가 있는 편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잡지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되고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함석헌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당시 함석헌은 무명인이었다. 서울 신촌에서 양계장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퀘이커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던 안병욱이 함석헌의 인물됨을 듣고 장준하 사장에게 천거하여 글을 쓰게 한 것이 <한국 기독교는…>이었다. 이 글이 시쳇말로 히트를 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함석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상계>에 계속하여 비중 있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한국의 간디’라 불릴만큼 한국지성계의 큰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장준하와 만나면서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의 혈맹 관계가 되었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스승이고 동지였다.

안병욱 주간은 뒷날 회고에서 자신이 잡지를 만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함석헌 선생과 류달영 교수를 ‘발굴’한 일을 들었다. 그러면서 잡지 편집장의 큰 책무는 좋은 글을 받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필자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주석 23)

안병욱에 의해 ‘발굴’된 함석헌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 철학자, 반독재 인권운동가, 언론인, 역사연구가 등으로 불리면서 군사독재와 치열하게 싸운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몇 차례 추천되었으며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씨알사상’을 정립하였다. 그 첫 출발이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평론이다.

이 글은 <사상계> 126쪽에서부터 140쪽까지,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의 평론이다.
원고 말미의 필자 소개는 ‘기독교인’이라고 명기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를 비판한 셈이다. 한국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한 이는 함석헌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높았다. 친여 성향으로 갓 창간한 월간 <세대>는 창간 2호인 7월호에 윤성범 교수의 <요한은 어디서 외쳤는가(함석헌론)>을 실었다. 윤성범은 함석헌을 선동가ㆍ이단자로 매도하였다.

함석헌의 첫 대사회 발언, 대종교 비판 발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기독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10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 온 길을 주로 역사적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라고, 기독교 신구교를 싸잡아 비판하는 글임을 밝혔다. 그는 비판을 거부해 온 종교를 비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어느 종교도 다 신성불가침을 주장한다.
‘비판’이라 할 때 교회는 본능적으로 수염을 끄들리는 봉건 귀족의 기분 같은 생각을 가진다. 사실 교회는 봉건제도의 뱃 속에서 설러져 나온 것이고, 아직도 그 젖 냄새를 못 버린 점이 많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지만, 해하려는 신성불가침은 없다. 비판 받아야 한다. 이젠 인간은 무반성 신뢰만이 신앙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떤 종교경전도 그는 비판 없이 읽으려 하지는 않는다. 반성을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대사회발언의 첫 목표를 한국교회에 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부치는 교리와 실제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과가 같지 않은 듯 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이 나게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고신도(古神道)나 화랑도 모양으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아주 완전히 죽어버렸다면 문제없다. 그것은 식은 재다. 삼국시대의 불교나 이조시대의 유교 모양으로 인심 위에 산작용을 하고 있다면 또 문제없다. 그것은 산 불길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미지근한 재요 시들어가는 나무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지 않을까?

당시 한국 기독교는 전후의 폐허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아래서 침묵하거나 ‘국부 이승만’을 떠받들며 교세 키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먼저 한국종교사상사의 뿌리를 소개한다.

기독교가 본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 올 때는 정복적인 생명력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사상으로 하면 고신도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이 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어 왔다. 물론 처음에는 고신도가 국민생활을 지도해왔을 것이고, 대륙으로부터 유교문화가 들어오자 도덕에 관한 한은 대체로 유교적인 것으로 대치가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사회생활의 실제 도덕에서는 높은 것이었으나,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세한 설명을 주는 것이 없음으로 고대의 고신도적인 것으로 내려오다가 불교가 당시의 중국에서 성했던 물질적ㆍ예술적인 문화를 타고 올 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불교적인 것으로 돼 버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정신계를 말하면 상반신 세계관적인데 관한 한 불교적 고신도적이었고, 하반신 도덕적인데 관한한 유교적이었다.

함석헌은 이어서 해방과 6ㆍ25 뒤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을 분석한다.

그런데 38선이 갈라진 것을 당하고 교회는 어떻게 했나? 처음 흥분이 식고 미ㆍ소 양군의 주둔이라는 어쩔 수 없는 비애를 먹고는 그 다음 일어난 것은 예언이었다. 그래 저마다 예언이다. 3년 후에 통일이 된다, 5년 후에 된다, 어느 해는 예수가 재림하고 소련이 망한다, 이런 것이 유행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역사적 문제를 전연 우연한 것으로 안 심리다. 말은 우연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니 계획이니 예언이니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문구로 해석해 놓으면 우연이란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이 형식적, 관념적이고 실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계의 일과 현실적인 일을 혼동하여 하늘나라의 일을 곧 지상에서 보려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는 역사에 대해 도덕적인 노력의 입장에 서지 않고 전연 자연현상에 대하는 모양으로 기다려서 결과를 얻으려는 심리에 빠진다. 고로 예언을 하게 된다. 정감록식으로 운명을 기다리는 심리가 암시되어 가지고 나온 특수 정신적 현상이 곧 예언이다. 그런 고로 몇 번 해보아도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안 요사이는 전연 그런 것은 죄다. 구약에 많이 있는 예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이 윤리적인 것이다. 국민의 갈 길을 지시해 힘쓰게 하자는 것이지 요행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석
23> 안병욱, <나와 함석헌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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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8 08:00 김삼웅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함석헌은 대구를 거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한때 제주도에서 머물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성서집회를 계속하면서 피난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식민지를 함께 겪고 해방된 한민족이 동족상쟁을 하게 된 까닭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뒷날 이때의 생각을 다듬어 6ㆍ25전쟁에 대해 비중 있는 글을 썼다.

6ㆍ25 싸움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둘째 번 세계 전쟁을 마치려 하면서 러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 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말이 하나요, 풍속ㆍ도덕이 하나요, 이날것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 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주석 16)

함석헌은 6·25전쟁의 원인으로 미ㆍ소 양대 블록의 세력다툼임을 들었다. 이어서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등을 거기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주석 17)

함석헌은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6ㆍ25 전쟁의 의미를 세계사적, 민족사적, 역사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가는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첨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 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었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주석 18)

부산에서 힘든 피난생활 중인 1952년 그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몇 동지들 앞에서 <흰 손>이라는 장편시를 낭송하였다. 이 시는 사실상 그의 ‘신앙고백’을 뜻하는 것이었다.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이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여봐라
예-이-
너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놈들을 끌어 내며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 내 뜻대로 살았느냐?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주석 19)

함석헌은 이를 시점으로 무교회주의와 결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상 그것(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 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믿기만 하면 된 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년대 내 마음 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 (주석 20)고 밝혔다.

함석헌은 무교회에 머물지 않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둘째번 이유를 소개한다. 여기에 의미가 다 포함된 듯 해서다.

우리나라 모양이 이미 누가 열어놓은 길을 그저 따라만 가 가지고 되기에는 너무도 독특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만이 당하는, 우리만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당하고 있다. 백 년을 가다가도, 천 년을 가다가도, 내가, 우리가 하게 생겼지, 어디서 다 된 것을 빌어다 써가지고 될 수는 없다. 물건은 빌릴수가 있지만 정신이야, 믿음이야, 빌 수 없지 않은가? 자리가 더 좋은 것이 없으면 ‘다다미’를 살 수가 있고, 김치가 모자라면 ‘다꾸왕’을 써도 좋지만, 정치는 암만해도 야마도 다마시이(일본혼)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릴 수, 될 수도 없고, 신앙도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가지고 우리를 살릴 수 없다.

무교회 신앙은 우치무라를 살리는 데 다 쓰고 털끝만큼도 남긴 것이 없다. 길이 길이 아니오 길 간 자리인 것 같이 신앙도 살고 난 자리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찾고 그것을 받들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무교회 빛깔이 차차 멀어지게 되었다. 남들이 주의시켜 줌을 받들고서야 내가 무교회 식이 아니고, 십자가 소리 적게 함을 알게 됐다. 나는 무교회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섭섭하게 받들었다. (주석 21)

함석헌은 1953년 가을에 서울로 올라왔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정부가 환도하면서 피난민들도 따라 올라왔다. 서울의 생활도 막막하기는 피난 부산과 다르지 않았다. 최태사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삶의 터를 잡았다.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가 신촌 이화여대 근처의 대현동에서 셋방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서울의 생활은 참담했다. 특히 월남한 피난민들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가면서 중앙 신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전쟁이 터지자 무책임하게 도망쳤던 대통령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북진통일론을 외치면서 점차 독재권력을 휘둘리기 시작했다.

 


함석헌 유영모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와 함께 종로2가 대성빌딩에서 학생ㆍ시민들을 상대로 종교ㆍ역사 강연을 하다가 세브란스의과대학 김명선 학장이 에비슨관을 내주어서 여기서 매일 오후 2시 정기 모임을 가졌다.

1955년 12월 14일은 함석헌이 태어난지 2만 날이었다. 이날 10여 명의 동지들이 신촌 그의 집에서 만둣국을 먹으며 2만일을 축하했다. 다석 유영모의 일기다.

오늘은 함석헌이 2만 날 되는 날이다. 신촌의 함 선생 댁에서 만둣국을 먹다. 2만 날 기념 만두로 포식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차라리 더 소중한 것은 앞으로 오고 오는 해를 잘 하고 잘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잘잘해는 2만 일이다. 1945년 4월 26일 김교신이 세상을 떠나고 그날 나는 20,133일, 함은 16,116일, 김교신은 16,080일 이었는데 벌써 3,885일이 지나가서 나는 24,017, 함은 20,000일 되었다. 오늘은 1955년 12월 14일이다. (주석 22)


주석
16>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 67쪽, 생각사, 1979.
17> 앞과 같음.
1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403쪽, 일우사, 1962년.
19>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223~224쪽.
20> 함석헌, <말씀모임>, <전집> 3, 김용준, 앞의 책, 69쪽, 재인용.
21> 함석헌, <말씀 모임>, <전집> 3, 139쪽.
22> 김흥호 엮음, <다석일지(多夕日誌)>, 제1권, 김용준, 앞의 책,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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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7 08:00 김삼웅

 

 

함석헌은 감금된 지 꼭 50일 만인 1946년 11월 11일 출옥했다.
네 번째의 투옥이었다. 세 차례나 일제에 투옥당한 것은 식민지 백성이어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군’으로 진주했다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50일 간이나 옥살이를 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주위의 시선도 차갑게 바뀌었다.

집에 와보니 세상은 달라졌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수갑을 차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어느 사람 하나가 아는 체 하지 않더니 해방이 되는 날 떠메어다 놓고 저마다 존경하노라더니 또 소련 사람에게 끌려갔다 오니 마주 서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인심은 조석변을 말로만 들었더니 실제로 당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우리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 나를 잡아먹었다. (주석 11)

출감한 함석헌은 장녀 은수를 결혼시키고(3월 5일), 연말에 장녀가 출산하는 신의주 만포동 딸네 집에 갔다가 12월 23일 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잡혀가서야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인물이라는 거였다.

다섯번째 투옥은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서인지 한 달 만에 풀어주었다. 나와보니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주 숙청령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2만 평의 전답이 지주로 낙인되었다. 그때 일꾼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경우, 항일운동의 전력과 일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서 제외돼야 한다는 주장과 정말 애국자라면 지주 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 갈렸다고 한다. 결국 신의주사건 등의 ‘반동’과 함께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었다. 재산은 전부 압수되고, 함석헌은 다시 투옥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이 예비되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 해를 지난 후 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 주위의 친구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시키기 위해 박천에서 용천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길에 올랐습니다. (주석 12)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함석헌은 박승병과 함께 평양에서 잠깐 머물다 해주를 거쳐 육로로 38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17일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때 헤어진 것이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가 월남할 때는 이미 38선이 굳어져서 무단 월선하는 데는 위험이 따랐다.

생사의 선을 넘어 나는 밝아오는 새날을 맞으러 친구와 둘이 손을 잡고 섰었다. 가지고 넘어온 것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성경이 한 권과 갇혔다 나온 후 지은 노래를 몇 수 적은 노트가 있을 뿐이었다. (주석 13)

함석헌도 젊은 시절 여느 지식 청년들처럼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짧은 기간 소련 점령기 북한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당하고)는 정신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 시절에 기독 신앙을 가지나, 사회주의자가 되나 많이 망설였다. 도덕적 정신적인 데서는 문제도 아니되지만 역사적인 자리에서 볼 때 사회주의에 어떤 ‘기본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아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주의 이론에 일면의 진리가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일면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옳게 이끌어 나갈 수는 없다. 그래 분명하게 잘라 버렸다.

기독 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험악한 공산주의는 몰라도 영국의 페비언 같은 것은 됐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 같이 현대 사람이야 넓은 의미로는 다 사회주의자지. ‘사회’란 생각을 빼고 오늘날 사람의 살림은 있을 수 없다.
(주석 14)

함석헌의 경우와 같이 해방 뒤 북한에서 탈출한 월남자 수는 1945~1949년 사이에 대략 45.6~74.0만 명, 6.25 전쟁 시기의 월남자 수는 대략 55.8~64.6만 명에 이른다. 두 시기를 합치면 해방 뒤 한국전쟁 종결시점까지 월남자는 101.4~138.6만 명에 달한다. 해방 직후 1946년 말 현재의 북한 인구 926만 명을 기준으로 삼으면 1945~1949년 사이에 북한 전체 인구의 4.9~8.0%가 월남한 셈이 된다. (주석 15)

월남자 중에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이 많았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 수는 20만 명 안팎으로 북한 총인구의 2.2% 수준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한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극우반공의 기수가 된 기독교 목사들이 있었고, 함석헌ㆍ강원룡ㆍ장준하ㆍ리영희 등처럼 민주화의 기수도 있었다.

 


방수원.현동완.유영모.김흥호.함석헌


서울에 도착한 함석헌은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 칩거하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집회를 시작했다.
날씨가 풀리면서 4월부터는 유영모의 주일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무렵부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주의를 실행한다. 1947년 7월 20일 함석헌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란 시를 지었다. ‘그 사람’의 대상이 김교신인지, 사선을 넘어 서울까지 인도해주고 다시 북녘으로 돌아간 박승방인지, 또는 낮선 서울에서 신앙으로 이끌어 준 유영모인지, 생애의 지침이 된 남강ㆍ도산ㆍ고당인지, 아니면 이 모두인지, 함석헌의 명작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지었다. 얼마 뒤 아내와 자식 일부가 월남하였다. 어머니와 장남, 딸 3명은 내려오지 못했다.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되었다.


주석
11>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1쪽.
12> 앞의 책, 277쪽.
13> <38선 넘나들어>, 앞의 책, 53쪽.
14> 앞의 책, 46~47쪽.
15>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410쪽, 중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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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012/12/26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여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던 중에 일은 이미 크게 꼬여들었다.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지고,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해방되던 해 11월 23일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결의하고 반소, 반김일성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에 보안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1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뒤늦게 학생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신의주사범학교의 부속 강습생들과 신의주공립여자중학교 학생들은 시인민위원회를 습격, 기밀문서 등을 빼앗고 공산당원들과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발포로 다시 많은 학생이 피살되거나 중경상ㆍ투옥되었다. 해방 100일 만에 일어난 참변이다.

함석헌은 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어 있는 신의주공산당본부에 들어갔다가 이들에게 체포되었다.

함석헌은 공산당본부에서 순식간에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국인 2세로 보이는 소련군이 일어나 러시아어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소련군 교육고문이 함석헌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한 사람이었는데, 함경도가 고향이라면서 자신을 친절하게 소개했었다. 함석헌은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흥분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지목하는 것 같이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의 운명이 끝이라고 직감하는 순간, 뜰에 꽉 찬 소련군들의 ‘총칼이 일시에 쏵’하고 그의 가슴으로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소련군 장교의 지시로 함석헌을 둘러싼 칼과 총부리와 피스톨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가 물러갔으나, 곧 방사선 형태로 죽음의 물결은 반복해서 그에게 다가들곤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마음은 그렇게 차분하고 평안해질 수가 없었다.
(주석 6)

함석헌은 소련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졸도하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깨어나면 다시 구타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연후에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처넣었다. 가족의 면회도 금지시켰다. ‘해방군’의 이름으로 들어온 소련군과 북쪽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었다.

함석헌은 죽음의 문턱에서 어렵게 살아났다. 짧은 ‘해방공간’에서 조만식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10월 초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될 때 함석헌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가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승에서 스승과 만난 마지막이 되었다. 그는 11월 초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추위,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네번째 투옥이라 이골이 날만큼 났다. 옥살이의 요령도 생겼다. 시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옥중에 쉰 날을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야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내 할 일은 우는 것인가 보다 하여 날마다 일어나는 느낌을 적어보았다. 그것이 내가 난 후 처음으로 시를 써 본 시작이다. (주석 7)

1961 일우사

옥중에서 시를 택한 것은 갑자기 시심(詩心)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필기구가 없어서였다. 어렵게 구한 몽당연필로 소련군의 휴지에 쓴 300여 편의 시는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 기약없는 처지에서 씌였다. 함석헌은 월남하여 뒷날(1961년) 펴낸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저간의 사정을 담는다.
소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나, 정권에 미친 놈들 단순한 젊은 가슴의 의분에 총칼로서 대립하고, 그 원통한 피 모두 내 머리에 돌려, 나를 잡아 옥속에 던지니, 해방의 소식을 밭고랑에서 거름통 멘 채 들으며 “오, 그날이 오기는 왔나보다” 하고 들을 뿐이리만큼 둔감한 내 가슴에서도 울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래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 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이다. 50일 갇혀 있는 동안,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짬짬이 면회 온 친구에게 주어 보낸 것이 모이니 삼백 여 수여서, 나온 후 그것을 한데 엮어 <쉰 날>이라 이름했는데, 그것은 1947년 봄 38선을 넘을 때 거의 다 잃어버렸다.
(주석 8)

함석헌의 초기 옥중 시는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졌다. 뒷날 그는 다시 여러 편의 시를 썼고, 시집을 간행했으며, 사후에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는 시비가 세워졌다. 그는 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고, 시인으로도 불린다. 시인 아닌 시인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지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아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위즈위즈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서 타골이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말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났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 같이 다 곯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주석 9)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는 최근 ‘함석헌의 종교시’를 탐구하는 저서를 냈다. 그의 ‘시인 함석헌론’이다.

필자의 관심은 창조적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그의 시론(詩論), 다시 말해서 그가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동양적 선비가 흔히 갖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동서양 고전의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 오늘에 재해석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함석헌의 진면목은 동트는 새문명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령자로서, 예언자로서, 신탁을 맡은 사제로서 살고 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시대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운명적 역할담당자를 한마디로 우리 시대 언어로 말할 때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석 10)


주석
6> 조동영, <동구보다 먼저 일어난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이치석, 앞의 책, 376쪽, 재인용.
7> 함석헌, <38선을 넘나들어>, <전집> 4, 50쪽.
8> 함석헌, <수평선 넘어>, <머릿말>, 생각사, 1961.
9> 앞과 같음.
10> 김경재,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12~13쪽, 책보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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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

012/12/25 08:00 김삼웅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 독립행진곡

함석헌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다가”가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이다.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주석 1)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왕 쇼화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항복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정작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어쨌던 일제는 항복하고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됐던가 의심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했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한 이리가 이 양(羊)을 놓고 물러갈 줄은 저희도 생각 않았거니와 우리도 감히 생각 못하였다.
그 이빨은 간 잎갈피에까지 들어갔고 그 발톱은 우리 등뼈 마디 짬에까지 박혔었다.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는 그 물러날 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치권이 그들 손에 있고, 경제정책이 그들 자기네 본위요, 토지가 대부분 그들 소유가 됐고, 교육방침이 철저한 일본 국민이나 혹은 그들의 영구한 종 기름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풍속을 고치고, 성을 갈고 말을 없애고, 글을 말살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세계사조 조차 혼란에 빠져, 민족 사이의 동정의 생각도 얻어볼 수 없고 국제간의 정의감도 찾아볼 수 없어져 세계 모퉁이에서 대낮에 인간의 대량학살을 공공연히 하게 됐으니, 아무도 그 종살이에 끝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志士)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보고 일본인돼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도들보고 일본섬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한 못난 민중이었다.
(주석 2)

함석헌은 8ㆍ15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했다. (주석 3)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중경과 미주 그리고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총독부의 정보ㆍ언론의 통제로 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두 손에 수갑이 채워 일경에 끌려 갈 때에 아는 채도 않던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불러냈다. 용천과 용암포에서 열린 해방축하회에 불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시기행진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은 ‘도둑맞고’ 있었다.

“해방 후 분한 일, 보기 싫은 꼴이 하나 둘만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해가려는 놈들이 많은 것이다.” (주석 4)

곳곳에서 정치 모리배들이 해방을 마치 자기네들이 쟁취한 것인양 민중을 속이고 공을 가로채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극히 비사교적 인물이다. 비정치적이고 감투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본의와는 상관없이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자리에 앉혀졌다.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에는 독립운동가 이유필이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것이 정치꾼들의 눈에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에게 그를 앞세워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4쪽.
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57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358쪽.
4> 앞과 같음.
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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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인생대학’ 3차년의 옥살이는 만 1년으로 1943년 봄에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처럼, 함석헌은 거듭되는 세 차례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생각은 한량없이 깊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다. <무량수경>을 비롯하여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등을 읽으면서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 22) 그만큼 종교와 사상의 폭이 넓어졌다.

출감하고 얼마 뒤 가슴 아픈 비보를 들어야 했다. 혈맹의 동지, 신앙의 동지 김교신의 부음이었다. 1945년 해방을 얼마 앞둔 4월 25일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와규>의 필자,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일경은 그를 악질 불온분자로 낙인하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돌연한 사망은 장티푸스였으나 극심한 옥고로 육신이 쇠약해지면서 발생한 병이었다. 김교신의 때 이른 죽음은 함석헌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개혁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좋은 벗이고 훌륭한 스승의 관계였다.

함석헌이 월남하여 1947년 7월 20일에 지은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는 김교신을 그리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깨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주석 23)

함석헌은 김교신을 기리면서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도 지었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을 비쳐 눈의 얼굴 보는 듯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악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주석 24)

함석헌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가 내던 <성서조선>도 폐간되어 어디에 글 한 줄도 쓸 수 없는 암담한 처지에서,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없이 참고서도 없이 읽었으니, 읽었던들 변변히 읽었다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주석 25)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고 있다는 징조이다. 일제는 1943년 11월부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고,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꽃다운 조선의 소녀와 처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어갔다. 막장이었다. 함석헌은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면서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
22>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전집> 4, 196쪽.
23>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133~134쪽, 일우사, 1961.
24> 앞의 책, 132~133쪽.
25> <전집> 4,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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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성서조선>팀을 덮쳤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신앙전문지까지 덮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함석헌은 1940년 11월 서울로 올라와 김교신의 집에서 <성서조선> 창간 14주년 기념 감사집회를 갖고, 1941년 3월에는 장남 국용의 결혼식을 치렀다. 김교신이 주례를 서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서도 <성서조선>에는 꾸준히 글을 썼다. 일제는 함석헌과 동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덮쳤다.

일제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트집잡았다.
<조와>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면서, 혹한 속에서도 봄이 오면 부활하는 개구리를 통해 민족독립 정신을 담은 짧은 글이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든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 외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었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주석 18)

김교신은 이 책에 <조와>외에 <강성지도(强盛之道)>, <부활의 춘(春)> 등 일제의 탄압과 침략전쟁, 결국 그들이 패망하고 민족 부활의 새봄이 올 것을 상징하는 단문을 실었다. <성서조선>은 당시 규정에 따라 모든 언론ㆍ출판물처럼 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간행하였다. 검열에서 통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 발매금지는 물론 샅샅이 뒤져 10년도 더 지난 창간호부터 전량을 회수하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12명의 필자 그리고 200여 명의 독자 중에 상당수를 구속하였다. 함석헌의 글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필화의 한 원인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에게 유일의 매체이었던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발행인 김교신과 주요 필자 함석헌 등은 ‘일망타진’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세번째 투옥이다. 수사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일본인 검사와는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검사 :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 그렇다.
검사 :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
(주석 19)

검사의 신문은 함정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일왕(천황)도 멸망한다는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처벌하려는 흉계였다. 함석헌은 이를 꿰뚫고 ‘성경의 탄력’을 이유로 빠져나왔다.

함석헌이 수형번호 1588번을 달고 미결수로 1년 동안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운형이 부일을 거부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인 김광섭도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항일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1942년 1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33명은 대부분 함흥감옥 등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은 여러 차례 형사와 검사의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였다. 결코 그들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턱 마주 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슬러야 매를 맞는 것 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 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주석 20)

함석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꿈 속에 다녀간 길 꿈 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엣 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남밥 한 웅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네 마리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 해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맘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 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교에 타고난 밤 금잔으로 쳐 나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輓歌)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놓고
봄 오면 우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주석 21)


주석
18> 김교신 <조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19> 이치석, 앞의 책, 292~293쪽.
20>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5쪽.
21>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68쪽, 나남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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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석헌의 교실에 장학관이 불쑥 들어와 일본어로 강의하는가를 감시했다.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는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와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 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론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은 제자들에게 일본말로 일본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그리고 조선인의 혼, 성씨와 이름까지 고치라는 창씨개명에는 견딜 수 없어서 교사직을 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여 직장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도 신념이지만 ‘권속’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함석헌에게는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다. 1919년 장남 국용이 태어나고, 1921년 8월 장녀 은수 출생, 1926년 4월 2녀 은삼 출생, 1929년 8월 3녀 은자 출생, 1931년 9월 2남 우용 출생, 1933년 4녀 은화 출생으로 2남 4녀가 있었다. 퇴직 이후인 1939년 1월에 5녀 은선이 태어났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린 함석헌은 교직을 떠나서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거처를 옮겼다. 퇴직 2년여가 지난 1940년 3월의 일이다. 이 학원은 조만식의 뜻을 이어받은 김두혁이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자고 세운 농사학원(農事學院)이었다. 이것을 함석헌이 인수한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모아 둔 돈을 털어서 인수했다.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들과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땅을 파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아직까지 농사일과는 거리가 있는 먹물에게 농삿일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심은 참외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8월에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서리’의 정체는 일본 경찰이었다.

설립자인 김두혁이 일본에서 동경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의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하여 활동중에 그가 구속되고,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9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세 번째 투옥이다. 이와 관련 평양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이 ‘장학축상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적발되어 학생 6명이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옥고보다도 작은 실수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 두고두고 자책하였다. 평소 주의를 해서 편지를 불태웠는데 한 통이 쓰레기통에서 적발되면서 이들은 2년 반씩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듬해 초여름에 출감할 때까지 1년여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농사학원은 폐농이 되고, 옥고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불온분자’로 찍힌 함석헌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큰 불효에 속한다. 아들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 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상주 노릇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함석헌은 하릴없는 농사꾼이 되었다. 서툰 농사일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땅이 2만 평 정도가 되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식구가 열 명이 넘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상속하여 농사일을 맡았다. 이것이 뒷날 화근이 되었다.

함석헌은 세 번째 옥고를 치루면서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같은 구치소에 있던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인 사이고 다까모리(西卿隆盛)의 시였다. 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였으나 그럴 듯한 싯구를 남겼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일본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獄中辛酸志始堅
丈夫玉碎 愧甑全
我家遺法人知否
不用子孫買美田
(주석 16)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지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서야 “그때에 차라리 단행했더라면”하고 뉘우쳤습니다. (주석 17)

함석헌의 농삿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국은 점차 어려워지고,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시행되고, 1937년 6월에는 민족주의계열 인사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수양등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흥사단 계열의 실력 양성 단체이던 수양동우회를 수사하면서 무관한 기독교계 인사들까지 구속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에 끌어갔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3차) 하여 ‘국체명징’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의 암송을 의무화했다.

1938년 4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창립, 1939년 10월 국민 징용령 실시,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3년 3월 징병제 공포, 10월 학병제 실시 등 일제의 폭압통치는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맞이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ㆍ항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그만큼 심해졌다. 1년 만에 석방된 함석헌은 서투른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농삿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0년 8월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한 것이다.


주석
1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0쪽.
16>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24쪽.
17> 앞의 책, 272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함석헌이 오산고보에서 ‘선생질’(자신의 표현)을 하고 있던 1930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여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3ㆍ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대표로 참가했다가 다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2년 가출옥하여 오산고보로 돌아와서 이 학교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훈은 함석헌이 일본 유학 중일 때인 1924년 김성수의 간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오산고보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힘을 쏟다가 66세를 일기로 삶을 접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자기의 유골을 해부하여 생리학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학교 동산에 안장되었다.

함석헌에게 남강은 생애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여러 날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상념을 이렇게 썼다.

여순이 지났어도 언제 몸을 찌그리는 일도 다리를 뻗고 버둥버둥하는 일도, 대낮에 낮잠을 자는 것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에게는 어려워서 자란 곳이 놋점(유기농장)이었던 것 같이 인생을 다듬어냄이었고, 젊어서 직업이 장사였던 것 같이 삶이란 개인이거나 나라거나 밑져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갈 때는 올 때보다 이를 남긴 것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성경에 있는 착하고 진실한 종,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이었다.

할 것은 하자는데 좋고 언짢고, 높고 낮고, 네 거 내 거가 있을 리 없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하자고 부서를 다 짜놓은 민족대표들! 이 선언서에 뉘 이름부터 먼저 쓰느냐가 문제가 되어 옥신각신하는데 어디 나갔다 들어오다가 비로소 그것을 알고 “그거 무슨 문제될 것 있느냐, 순서가 무슨 순서냐? 죽는 순서야! 어서 손병희부터 먼저 써라”해서 막혔던 일이 동이 터지듯이 일사천리로 됐다는 것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 아닌가?
(주석 12)

함석헌은 이같은 스승을 오산동산에 묻고 한동안 슬픔에 잠겼다.
강토는 아직 캄캄한 미명인데 나라 걱정하던 스승이 떠나고, 그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함석헌은 1930년 학교 교정에 세운 동상 앞으로 신입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으로 ‘남강정신’을 강의하였다. 당시 전교생이 500명 정도여서 교사와 학생들은 가족처럼 유대가 이루어졌다. 교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이었다.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간회가 해체되고, ‘민중대회사건’으로 40여 명의 핵심간부가 체포되었다.
그는 언제까지 평범한 교사생활로 안주하지 못하였다. 함석헌은 일경의 감시 뿐 아니라 교무처 직원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보고했다.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고난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1930년 여름방학에 서울에 사는 김교신과 정릉 그의 집에서 2주일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새학기를 위해 오산으로 내려간 날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 붙잡혀 갔다. 불문곡직, 무슨 혐의인지 밝히지도 않고 정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언론에서는 ML당(마르크스ㆍ레닌당) 간부를 체포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ML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함석헌은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한 주일에 유치장이 어떤 것임을 비로소 그 풍속화 맛을 알아서 이것이 훗날에 퍽 도움이 되었다.” (주석 13)고 말했다.

두번째 투옥까지는 일종의 ‘맛 뵈기’ 수준이였다면, 세번째는 좀 더 강했다.
세번째 투옥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사직하였다. 이유는 창씨개명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억누름에 더 이상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결단이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압박에도 수업시간에 우리 말로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가치있는 책들을 읽으라고 추천하면 학생들은 정주로 나가 사왔다. 1930년 7월에는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어 성경 연구와 함께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동은 ‘불온’의 대상이 되고, 압박이 심하여 차라리 그만 두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를 폐지하고,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낭독케 했다. 그리고 친일인사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국 강연회를 통해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옹호했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동창이며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서춘도 이 대열에 끼었다. 함석헌은 더 이상 ‘교사질’을 버티기 어려웠다.

오산시절의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함 도깨비’로 통했다.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서였다. 어느 해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평소 친일 성향으로 밉보였던 교사들을 두들겨 주기로 했다. 그런데 사전에 정보가 새나간 것인지, 막상 대상 교사들은 피신하고 엉뚱하게 존경하는 함석헌이 구타를 당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학생들이 폭행하려 하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라는 것, 나중에 학생들이 반성하면서 그 이유를 묻자 “나도 사람인데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작가ㆍ언론인 선우휘는 <사상계>에 쓰기도 했다.

그 이전 이미 나는 학생시절에 함옹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듣고 있었다.
오산고보에 다니는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화제에서 곧잘 ‘도깨비’라는 닉네임을 가진 교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옹이다.

처음이나 “도깨비가 개천물 마시듯 한다”는 속언이 생각시켜 “술을 잘 마시는 선생이냐”고 물었더니 “노오”, “그럼 성품이 고약하냐” 그것도 “노오”, “우악스럽게 생겼느냐”, 그것도 “노오”, 내가 곤혹을 느끼자 연민과 그제야 자기들만이 안다는 자랑이 뒤섞인 얼굴도 “무엇이고 못하는 것이 없어서 도깨비란다”고 알려주었다. 이어서 그들은 “오산고보를 나오고 동경일고와 동경고사의 입시를 보았는데 두군데 다 합격되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은사 이승훈 옹의 육영사업을 도울 생각에서 동경고사를 다닌 것이라 하여 너무 성적이 좋아 그것을 시기한 일인 학생에게 칼로 찔린 일이 있다”느니 “회화ㆍ작시ㆍ작곡 못하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늘 조선옷(한복)만 입고 다닌다고 했다. 개중에는 “일본말 교과서를 내놓고 조선식 한문자음을 옥편으로 찾아내라는 것은 질색이라”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주석
12>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66~167쪽.
13>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쪽.
14> 선우휘, <주관적 함석헌론>, <사상계>, 196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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