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1장] <씨알의 소리> 창간, 반유신투쟁의 선봉장

2013/01/28 08:00 김삼웅

 

 

대선이 끝난 뒤 복간된 <씨알의 소리>는 8월호 복간호에 이어 제4호인 9월호를 9월 15일자로 발행하였다.
함석헌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 첫가을 소식>, <민족통일의 길>, <한 사람>, <달라지는 세계의 한 길 위에서>를 집필하고, 그 무렵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안병무가 <민족적 저항>을 썼다. 함석헌이 쓴 <민족통일의 길>은 시론 이상의 비중을 담은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여당이 남북협상, 가족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시점이다.

들어봐라. 남북협상을 그렇게 큰마음 먹고 할진대 왜 일찍이 김구 선생을 못 따라갔던가? 왜 그를 용공주의로 몰아치며 욕했고 왜 죽여버렸나?

가족찾기운동을 그렇게 인도주의 정신으로 벌려야 할줄 알았을진대 왜 학생들이 남북의 젊은이가 만나 아리랑이라도 서로 같이 불러보자 했을 때 좌익이라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못하게 했던가?

평화통일이 그렇게 대세에 합한 옳은 일인줄 알았을진대 왜 이태껏은 한 마디도 없었으며, 평화 소리만 해도 이북 공산당 편이라고 비난해 입도 못 열게 했던가?

왜 중립론을 전에 하고 남이 하면 잘못이고 내가 하면 좋을 일인가? 옳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처음 생각해 낸 독창적인 것처럼 전매특허를 하려나?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것은 무식한 소리라고 먼저 말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때는 들은 척도 않고 묵살하더니 요새 와서는 국시를 변경했는가? 국시도 넥타이처럼 남 봐가며 바꿔 매는 것인가? 국시라고 고정불변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치려면 그 이유를 아울러 국민 앞에 밝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주석 14)

함석헌은 이 글에서 남북 대결의 여러 가지 문제를 분석하면서 “우리 남북 문제에 있어서도 남이 북을 정복하거나 북이 남을 정복해서 문제의 끝이 날것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될 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 해도 못쓴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눈을 부빌만하다.

프랑스혁명의 표어가 자유ㆍ평등ㆍ박애 아니었나? 미국은 그 자유를 써먹고 자유진영의 대장이 됐고, 소련은 평등을 팔아가지고 공산진영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이 싸운다. 자유없는 평등 없고 평등없는 자유 없건만 그것이 국가라는 집단주의,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의 종이 되면 그런 모순이 생겼다. 이제 하나 남은 사람을 누가 써서 자유와 평등을 다 살려 이 자멸에 임한 인류를 건질까? 사람은 큰 놈, 강한 놈, 있는 놈, 아는 놈은 못 하지.

세계의 행길에 앉는 수난의 여왕, 그 부끄러운 역사의 안 면(面)은 무엇일까? 사랑의 주림, 그럼 너는 사랑을 못한단 말이냐?
  (주석 15)

함석헌은 1971년 10월에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 <고전풀이>와 <여행기>를 쓰고,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와 비폭력>을 번역 게재하였다. 지명관의 <70년대의 한국상>도 실렸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는 1946년 월남한 이후 25년 만에 고향(북한)에 띄우는 공개서한이었다.

“어느 땐들 서로 잊을 수 있습니까? 지금도 늘 꾸는 꿈, 꿈만 꾸면 언제나 평안북도 용천 우리 집에 가 있습니다. 헤어진지 30년이 거의 다 돼 오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단 말이 있으니, 모든 것이 많이 변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강산이 변할지언정 마음이 변할 리야 있습니까? 또 생각이 혹시 좀 달라지는 때가 있다손, 너도 나도 한국놈이요, 조선놈인 그 바탕에서야 어떻게 변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 돼야 합니다. 하나 돼야 삽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도 없고 산다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잘해서 해방 후 오늘까지 양편에서 한 일이 옳고 발라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날까지 쌓아 온 역사적인 속알의 덕택으로 이만이라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상의 물려준 유산으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것이 민족적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이 싸움 즉시로 그만두고 하나돼야 합니다. 이 이상 더 가면 간신히 남아 있는 이 정신이 아주 없어져 버리고, 소나 강아지처럼 중국사람 혹은 일본 사람의 가축노릇을 하고 기계노릇을 할지언정 한국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방심 마십시오. 시작이 급합니다.”
(주석 16)

함석헌은 또 이번 호에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를 집필했다.
5ㆍ16쿠데타를 당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의 소회였다.

“‘군인정치’라 했지만 내 참 느낌대로 한다면 ‘정치’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어떻게 이것을 정치라고 하겠는가? 차라리 ‘지배’라 하든지 ‘억누름’, ‘짜먹음’이라 하는 옳을 것이다.”  (주석 17)라고 지적할 만큼 군인지배, 10년의 통치를 통절하게 비판한다.

“왜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아니되나? 예로부터 ‘병(兵)은 흉기라’ 사람이 손에 칼을 잡으면 저 본심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의 근본 천생은 착한 것이나 한 번 무기를 손에 쥐면 그만 그 본성을 잃고 사나워지기 쉽다. 사납다는 것은 남을 나와 마찬가지의 인격적 존재로 알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물건으로만 보는 심정이다. 그래서는 정치는 못한다.”

“나는 첨부터 5ㆍ16에는 반대했고 오늘까지 싸워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내 치우친 생각으로나 아닌가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지배자들과 씨알의 얼굴을 늘 번갈아 살펴보는데 절대로 씨알 전체가 고마운 혁명이라고 승인해 준 일 없다.”

“나는 5ㆍ16은 오발탄, 곧 잘못 쏜 총이었다고 분명히 규정짓는다. 나는 4ㆍ19는 헛총이라 했다. 헛총은 첨부터 쏴서는 아니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을 아니 넣는다. 사람 죽일 뜻 없다는 말이다. 오발탄은 그와는 다르게 쏴서는 아니될 것을 쏜 것이다. 오늘의 이 어려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혁명공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본문 여섯 조건 보다도 끝에 붙여 쓴 말이다. 여섯 조건이 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못했을수록, 그 마지막에 달아 쓴 말대로 물러갔더라면 일은 이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인이 그 죄를 속하려면 이제라도 솔직히 우리 판단이 잘못됐었다하고 씨알 앞에 증언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때 잘못했던 것 보다는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분명히 알 것이, 모든 칼은 빗나가고야 만다. 칼 그 자체가 빗나감이다. 이날까지 모든 칼 든 사람이 잘못했지만, 나만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확신, 혹은 변명을 하지만, 그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 빗나간 생각이다.”
(주석 18)

함석헌은 매달마다 <씨알의 소리> 원고 집필에 열정을 쏟는 한편 연설, 강연, 대담, 토론에 불려다녔다.
4ㆍ27 대선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씨알이 이를 계기로 다시 민주회복의 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10월호 64쪽에는 “9월 중 함 선생님 동ㆍ정”을 실었다. 이 시기 바쁜 일정을 살피게 된다.

9/1, 매수요일 예배모임 시작(자택)
9/6, 월요 정기고전 강좌(젠센기념관)
9/10, 한국신학대학 출강
9/12, 부산 모임에서 <민족통일론 강연>
9/14, <책임>이란 제목으로 녹음(동아방송)
9/16, 춘천 성심여자대학 강연, <민족민주주의 앞날>
9/ 21, 기독교회관 강연, <한국종교의 당면과제>
9/23, 장로회신학대학 강연, <오늘의 신앙인>
9/24, 이화여대 설교, <가장 큰 공헌이란?>
9/27, <다리>사 창간1주년기념강연, <언론자유와 공익성>
9/30, 서울대 수원농대 강연, <한국사상의 사회적 실현과 젊은이의 자세>

박정희의 권력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1971년 12월 6일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사후적인 조처로 공화당은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법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근로자의 단체교섭권ㆍ단체행동권 등을 규제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국민이나 야당은 안중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사태를 먼저 선포하고, 이를 추인하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는 등 헌정파괴의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의 돌연한 비상사태선언은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선포를 위한 전초전이었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국민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해놓고 남쪽에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유신체제, 북쪽에서는 김일성의 유일체제로 하는 변혁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짜고 치는 고스톱’ 술책이었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 11년 만에, 3선 대통령에 당선한 지 1년 반 만에, 스스로 제정한 헌법까지 짓밟으면서 유신체제를 만드는, 반헌정의 두번째 쿠데타를 자행하였다. 국가변란이었다.

함석헌의 1971년 희년(稀年)을 앞두고 지인들은 12월 2일 고희기념회와 기념강연회를 YMCA와 종로 대성빌딩 강당에서 각각 열었다. 3월 13일이 고희 기념일이나 그때는 인도에 체류 중이어서 뒤늦게 열린 것이다. 이희승ㆍ정구영ㆍ이병린ㆍ김상돈ㆍ백낙준 등 원로와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용준의 양력소개, 이희승, 김재준의 축사, 지명관의 <내가 본 함석헌>, 박두진의 축시에 이어 <씨알의 소리> 영구독자 300명을 모집하여 특별기금 300만원 확보운동을 전개하였다.

함석헌은 희년기념 행사를 한사코 반대했으나 기금모금의 일환이라 하여 수용하였다.
축사에 나선 이희승은 “남달리 고초와 사선을 넘으시면서 살아온 함 선생의 생애는 보통사람의 2,3배 더 수난의 삶이었다”고 회고하고, “정치가 공정하고 옳게 돼 왔다면 선생님이 그처럼 생명을 버릴 각오까지 하시며 투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하였다. 김재준도 축사에서 “함 선생을 새로 말한다면 학(鶴)에 속한다”면서 특히 구약의 예언자의 모습을 비교하면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8,90 더 계셔서, 씨알의 백배 천배 만배의 결실을 축원한다“고 빌었다.
(주석 19)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71년 9월호, 11쪽.
15> 앞의 책, 26쪽.
16> <씨알의 소리>, 1971년 10월호, 3~6쪽, (발췌).
17> 앞의 책, 13쪽.
18> <씨알의 소리>, 1971년 10월, 3~27쪽, (발췌).
19> 앞과 같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