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405번 홀은 주로 정물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Room of still life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Flowers in a clay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3 x 2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어린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동을 얻었으며,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의 르네상스 화가나 다이크와 같은 17세기 프랑드르 화가, 와토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헀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메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영향을 받아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Roses and nasturtiums in a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8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초상화가였던 앙리 팡탱 라투르는 세련된 배색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와 석판화에 담곤 했다. '접시의 장미꽃'에서는 단순히 주제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섬세함과 매우 짧게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늘어가는 애호가들과 영국 수집가들을 위해
우아하고 절제된 그림을 제작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팡탱 라투르는 모순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대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던 반면에 당대의 혁신적이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 잦은 교제를 가졌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로 옮겨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길 갈망했지만 정작 그의 대표적인 주제는 꽃 그림이었다.
결국 팡탱 라투르는 미천하다고 여긴 그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좌절감과
중압감을 느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렸던 그의 꽃 그림들에는 권태로움이 묻어난다. 앙리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가로 황동하였지만 사실
그를 유명하게 하고 수입이 되었던 것은 정물화였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의 정물들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꽃들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과일들은 언제나 달콤한 향기와 과즙을 뿜어 낼듯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고전적 표현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던아트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상을 부드러운 빛과 함께 아름답게 묘사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오랫동안 그렸다.
비록 그 자신은 양쪽 어디에 속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팡탱 라툴르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팡탱 라툴르는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승인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일련의 화가들의 모임에 정식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루아의 작품과 창조력으로부터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들은 사실적이고, 후기로 갈수록 보다 인상주의적이며
빛을 색이 아닌 색조로 표현했지만,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 즉 전후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두 가지의 회화 양식, 즉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양식에 맞게 혼합하여 그렸다.
그는 고대 거장의 화풍을 연구하며 고전적 요소도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와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시도도 받아 들었던 화가로
진정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혁신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화풍으로 작업했다.
Flower Still-Life, 1863. by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65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 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 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 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Landscape with a bridge, 1870. by Stanislas Lepin. oil on canvas. 26 x 39.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5.
스타니슬라스 레핀 (Stanislas Lepin 1835~1892)은 풍경, 특히 센 강의 풍경을 전문으로하는 프랑스 화가였다. 레핀의 예술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1859년 노르망디에서 만난 코로였고, 이듬해 그의 학생이 되었다.
레핀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센(Seine) 강이었다. 그는 인상파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1874년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의 그림은 분위기가 차분하고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다. 레핀은 1889년 박람회에서 최우수상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892년 파리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406번 홀에는 인상파 풍경화가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작품이 있다.
Room of Alfred Sisley and Camille Pissarr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Boulevard Montmartre in Paris, 1897.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92.8 x 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덴마크계 프랑스인 인상주의 화가다. 가장 훌륭한 근대 풍경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섬세한 감정과, 초기 농원(農園)의 연작(連作) 또한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Boulevard Montmartre)를 묘사하는 풍경화이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파리의 대로 몽마르트가 보이는 그랜드 호텔(Grand Hotel de Russy) 방을 임대했다. 피사로는 같은 지점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날씨에 13점의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빠른 붓놀림으로 설득력 있게 구현된 도시 생활의 역동성은 의식적이지 않고 공식적이지 않으면서 흥분되고 활기찬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든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French Theater Square in Paris, 1898. by Camille Pissarr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이 그림은 프랑스 극장 (Comedie Francaise) 근처 파리의 한 구석을 묘사하지만 극장 건물 자체는 캔버스 밖에 남아 있다.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작업의 주요 주제가 된 도시의 일상 생활에 관심이 있었다. 전경에는 당시의 대중 교통 수단이었던 말이 끄는 트레일러와 사람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자유롭고 분리된 스트로크는 인물과 어린 나무 잎의 움직임을 모두 전달한다. 햇살이 가득한 봄의 분위기는 도시에 활기찬 매력을 더한다. 클로드 모네처럼 피사로는 여러 주에서 같은 도시 풍경을 여러번 그렸다.
Windy day in Venyo, 188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1 x 6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는 잉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 풍경화가이다.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다.
1860년대 초에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공부했다. 여기에서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된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풍경을 그렸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졌고 일반 대중들이 익숙해진 시각보다 더 넓게 그려졌다. 그 결과로 시슬레와 그의 친구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시슬레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유실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64년경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인근의 오솔길"(Lane near a Small Town)이다.
이 작품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가
Ile-de-France에 위치한 Veneux-Nadon 마을에서 그렸다. 프랑스에서 이 지역의 성격은 시슬레의 작업에서 주요 주제가 되었다. 흐린 날씨는 밝은 색조를 유지하면서 그가 전달한 가벼운 공기 환경을 특별한 상태로 매료시킨다. 유연한 자유 스트로크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가며 나무의 흔들림과 구름의 움직임을 전달한다. 인상파의 민감한 눈은 자연의 상태를 결정하는 하늘의 삶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식별한다.
1866년 시슬레는 브르타뉴 지방 출신인 Eugénie Lesouezec과 결혼하여 2명의 자식을 두었다. 1870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재정적 지원이 끊겨,
시슬레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혼자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시슬레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
The town of Villeneuve-la-Garenne, 1872.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80.5 x 5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작은 지방 도시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에서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Villeneuve-la-Garenne 마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는 이 소박한 자연의 매력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킨 살아있는 햇빛은
자연의 다양성에 민감한 시슬레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1880년에 시슬레 가족은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작업하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인근에 있는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으로 이주하였다. 미술사학자 안 풀레(Anne Poulet)는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곳의 조용한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기는 그의 재능과 완벽하게 맞았다. 모네와는 달리 사나운 대양이나 코트 다쥐르(Côte d'Azur)의 빛나는 색채의 풍경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1857년에서 1961년 사이의 런던에서 지낸 시기와 1874년, 1881년 그리고 1897년 잉글랜드로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시슬레는 전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냈다.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슬레는 비록 시슬레가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하기는 했지만 서로 그림이 비슷했던 모네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에 따르면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시슬레는 그의 부인이 죽은 지 몇 달 뒤에 59세의 나이로 Moret-sur-Loing에서 사망했다.
Riverbank at Saint-Mammes, 1884. by Alfred Sisley.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6.
인상주의의 방법을 통해 시슬레는 날씨 상태, 변경 가능한 조명, 진동하는 빛을 작업에 구현할 수 있다. 하늘은 살아있는 자연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시슬레의 그림에서 좁은 강에서 흐름이 느껴지고 물 표면에 하늘의 반사가 부서진다.
Room of Claude Mon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403번 홀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 · 시슬레 · 르누아르 · 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다. 모네는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 · 드가 · 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모네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Room of Claude Monet.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방에 전시된 작품들은 40년 동안 모네의 작업을 시대별로 보여 주고 있다. 초기-인상파의 첫 전시 7년 전에 모네의 작품 "Woman in the Garden (정원의 여인 1867)"과 "안개 효과 (Effect of Fog 1903)" 등이 전시되어 있다.
Woman in the Garden. Sainte-Adresse, 1867.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01 x 8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정원의 여인(Woman in the Garden)은 1866년 클로드 모네가 26세 청년이었을 때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여성은 잘 살던 사촌의 젊은 아내인 Jeanne-Marguerite Lecadre이다. 그림의 스타일은 모네가 나중에 찬사를 받았던 전형적인 인상파 작품과는 달리 매우 구성적이고 세부적이다. 여인의 밝은 흰색 드레스는 정원의 빨강, 분홍색 및 녹색과 생생하게 대조되고 있다.
Pond at Montgero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94 x 1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인상파의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인 금융가
앨리스 호셰데(E. Hochede)가 의뢰한 4개의 장식 패널 중 하나다. 모네의 다른 세 작품 중 또 하나의 작품은 다음에 소개할 "Montgeron의 정원 코너(A corner of the garden in Montgeron)"로
대형 살롱을 장식하기 위한 작품이었다.
변화하는 자연의 존재 속에서 짧은 순간을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파들은
자신의 작품을 생생한 빛과 공기로 채웠다. 물결치는 물 속에서 일시적으로 반사하는 풍경이 중심 테마를 형성한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낚싯대를 가진 여성의 실루엣은 나중에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앨리스(Alice)일 가능성이 있다.
A Corner of the Garden at Montgero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94 x 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인상주의가 절정에 오르던 시기에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성숙기에 이르렀을 때 그려졌다. 이곳에서 꽃이 만발한 정원을 모티브로 한 모네는 자연의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며 살아 있고 변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림의 채색은 순수한 색상의 개별 획을 광학적으로 혼합한 것이다. 빛과 공기로 가득한 공간의 느낌은 진동하는 다채로운 질감으로 나타난다. 그림은 몽쥬홍(Montgeron)에 있는 호셰데 성(Hochede Castle)의 대형 살롱을 장식하기 위한 4 개의 장식 패널 중 하나다.
Garden at Bordighera, Impression of Morning, 1884.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5.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보르디게라(Bordighera)의 정원, 아침의 인상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배경에 야자수와 교회탑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884년 1월부터 4월까지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의 보르디게라에 머무는 동안 제작되었다. 그는 미술 평론가 친구인 테오도르 두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동화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다이아몬드와 보석의 팔레트를 가져갈 것입니다."
1881년에 이르자 원래의 인상파 집단은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그후에도 2차례의 전시회, 즉 신인상파가 출연한 뒤 1886년에 열린 8번째 전시회와 마지막 전시회가 더 열렸다. 오직 모네만이 똑같은 열정으로 자연 탐구를 계속했다. 그가 1880년대에 선택한 장소는 노르망디의 푸르빌 · 에트르타 · 페캉 · 바랑제빌 ·
브르타뉴에 있는 울퉁불퉁한 외딴섬 벨일, 황량한 크뢰즈 강 골짜기,
프랑스 남부 지방의 망통 · 앙티브, 그리고 이탈리아의 보르디게라 등이었다.
1886년 그는 2번째로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튤립 꽃밭을 그린 다음 에트르타와 벨일에 잠시 머물렀다. 1883년 모네와 오슈데, 오슈데의 자녀들, 그리고 모네의 아들인 장과 미셸은 파리에서 84km 떨어진 베르농 근처에 있는 엡트 강변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농가를 샀는데, 이 농가는 죽을 때까지 그의 집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프랑스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1880년대에는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1890년대에는 지베르니, 혹은 그 부근에서 지내면서 연작을 제작하는 일에 전념했다.
Haystack at Giverny, 188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81.5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지베르니(Giverny)의 건초더미”라는 작품에서 모네는 그의 가장 뛰어난 기술 중 하나를 사용했다. 모네는 항상 자연의 빛의 놀이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세부 사항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많은 종류의 빛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빛의 가장 작은 변화가 전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풍경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다.
모네는 관측 결과를 실제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조명으로 많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비슷한 그림이 전체 주기에 나타난다. 그러한 사이클 중 하나는 이 캔버스가 들어간 건초더미의 이미지가 있는 일련의 풍경이다. 모네는 지베르니 (Giverny)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같은 장소에서 나중에 다른 유명한 그림을 많이 만들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그림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왜 이런 풍경에 관심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관객에게 좀 난해하다. 이 그림은 조용한 농촌 지역에서 매우 평범한 평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은 수평으로 되어 있고 시각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사진 앞에서 신선하고 짙은 녹색 잔디가 그려져 있으며, 그 위에 거대한 건초 더미가 놓여 있다. 이 건초 더미는 즉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관심을 끌게 된다.
이 신선한 스트립 뒤에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맹렬한 여름 태양이 밝게 빛나는 붉은 빛깔의 잔디를 가미한다. 빛에서 그림자로의 전환은 가능한 한 명확하게 묘사된다. 직선이 아니라 캔버스의 대각선을 따라 움직이는 파선을 따라 가며 신뢰성과 역동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배경에는 작은 숲과 몇 채의 집이 있는데,
그 위에 떨어지는 빛 때문에 어두운 나무와 강하게 대비된다.
가벼운 공기와 자연 환경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포착한 모네는 날씨 변화의 순간, 즉 흐린 바람이 부는 날의 밝은 지평선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인상파는 흐린 자연을 밝은 색으로 칠하여 무한하고 풍부한 색조를 드러낸다. 이 시대의 특징적인 작은 획으로 그림을 그려서 무지개 빛깔의 효과를 냈다.
Poppy Field, 1890.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92 x 6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양귀비 들판 (Poppy Field)은 모네가 유명한 풍경 시리즈를 많이 그린 지베르니 (Giverny)에서 제작되었다. 변화 무쌍한 색조와 움직이는 플로럴 카펫의 광경에 매료된 작가는 이 주제를 거듭 반복했다. 모네의 대부분의 작품에 내재된 모티브의 겸손함은 결코 살아 있는 숨결의 이미지를 버리지 않는다. 지베르니의 풍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인 양귀비 밭에 접해 있는 건초더미와 포플러는 인상주의의 거장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Meadows at Giverny, 1888.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92.5 x 81.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1883년에 모네는 처음으로 지베르니를 방문하여 그의 후반기를 살았다. 1888년 여름, 모네는 남쪽에서 지베르니에 인접한 평야의 초원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이 작품에서 모네는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비와 돌풍이 태양 광선으로 대체되는 자연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핑크 톤이 구름에 나타나고 따뜻한 햇빛이 젖은 초원에 떨어진다. 서로 밀접하게 배치된 또다른 작은 획은 진동하는 질감과
단단한 페인트 레이어를 형성하고 가장 미세한 색상 뉘앙스를 전달한다.
On the steep banks near Dieppe, 1897.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바다와 바위가 있는 풍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노르망디 해안을 배경으로 한다. 1890년대에는 계절과 시간, 기상 조건 등에 따라 바뀌는 빛과 색의 영향을 면밀히 연구했다. 다양한 자연 상태를 포착한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된 인상파 화가로 그는 일련의 풍경을 묘사했다. 모네는 안개가 스며드는 가벼운 공기 환경의 가변성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
Woman in a Garde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50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Embankment in Le Havre, 1874.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61 x 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Landscape. Seine at Asnieres, 1873.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46.4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이 작품은 파리 북서쪽의 센 강에 있는 Asnières에 페니치가 정박되어 있는 늦은 오후의 풍경을 보여준다. 약간 북쪽에 있는 센 강의 또 다른 도시인 아르장퇴유에 살았던 모네는 이 풍경을 그리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왔다.
Seine at Rouen, 1872.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54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루앙의 센 강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세일링 보트의 맑은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The Garden, 1876.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75.5 x 10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1872~1879년에 모네는 아내 카밀과 아들 장과 함께 아르장퇴유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센 강의 이 작은 마을은 수상 스포츠 애호가들을 매료시켰다. 모네의 집에는 르누아르(Renoir)와 시슬리(Sisley)가 자주 방문했다. 모네의 집에서 센 강 건너편에 있는 에두아르 마네 역시
그를 찾아와 가끔 야외에서 함께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꽃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그가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정원은 풍부한 꽃으로 유명했다. 모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녹색 잎사귀에서 새로운 색상 뉘앙스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그의 비전을 훈련했다.
모네의 풍경에서 인물은 작품의 주요 주제가 아니다. 풍경에 활기를 불어 넣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모네의 그림에서 인간의 모습은 자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햇빛 반점과 다양한 색 반사로 인해 서로 섞여 따뜻한 공기의 진동 효과를 표현한다. 이 떨림은 물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한다. 모자를 쓴 우아한 여성이 꽃 사이에서 산책하거나 잔디 위에 앉아 있다.
Waterloo Bridge - Effect of Fog, 1903. by Claude Monet. oil on canvas. 101 x 65.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3년 동안 세 차례 이상
런던을 방문해 런던 풍경 연작 작업에 열중했다. 이미 1870년 보불전쟁 기간 중 영국으로 피신을 가면서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모네가 이 도시를 그리게 된 것은
1899년 아내 알리스, 아들 장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스무 살이던 장은 런던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잇따른 연작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모네 가족은 런던 최고급 호텔이던 사보이 호텔에 머물렀는데 호텔 창밖으로 템스 강의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네는 호텔에 머물며 템스 강과 워털루 다리, 채링 크로스 다리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국회의사당 세 가지 모티브로 연작을 그렸는데, 짙은 안갯속에서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모네는 시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모네는 안갯속에서 빛의 움직임을 펼쳐 보이며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쏟아냈다.
워털루 다리-안개 효과(Waterloo Bridge - Effect of Fog)를 비롯해서 그가 런던에서 작업한 그림들은 윤곽과 색이 모두 안개에 잠식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건축물들은 안개에 휩싸여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주변은 마치 꿈속에 들어온 듯 기묘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런던 연작은 1904년 5월 뒤랑 뤼엘의 갤러리에서 공개되었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전시 카탈로그를 쓴 미르보는 다음과 같이 모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들은 마술적이며, 악몽 같고, 꿈같으며, 신비하고, 강렬하며, 혼돈 같고, 비현실적이다.'
Flowers in a clay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3 x 2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는 프랑스 화가이다. 유명한 초상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어린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동을 얻었으며,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의 르네상스 화가나 다이크와 같은 17세기 프랑드르 화가, 와토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헀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메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영향을 받아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Roses and nasturtiums in a vase, 1883. by Henri Fantin-Latour. oil on canvas. 28 x 3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초상화가였던 팡탱 라투르는 세련된 배색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와 석판화에 담곤 했다. '접시의 장미꽃'에서는 단순히 주제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섬세함과 매우 짧게 지속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늘어가는 애호가들과 영국 수집가들을 위해
우아하고 절제된 그림을 제작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팡탱 라투르는 모순으로 가득찬 사람이었다. 그는 대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던 반면에 당대의 혁신적이고 새로운 젊은 화가들과 잦은 교제를 가졌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꿈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캔버스로 옮겨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길 갈망했지만 정작 그의 대표적인 주제는 꽃 그림이었다.
결국 팡탱 라투르는 미천하다고 여긴 그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좌절감과 중압감을 느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렸던 그의 꽃 그림들에는 권태로움이 묻어난다. 앙리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가로 황동하였지만
사실 그를 유명하게 하고 수입이 되었던 것은 정물화였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의 정물들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의 꽃들은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과일들은 언제나 달콤한 향기와 과즙을 뿜어 낼듯한 싱싱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고전적 표현 요소를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던 아트적인 모습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대상을 부드러운 빛과 함께 아름답게 묘사한 이런 종류의 그림을 오랬동안 그렸다.
비록 그 자신은 양쪽 어디에 속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앙리 팡탱 라툴르는 사실주의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앙리는 위대한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제자였고,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스승인 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고 작업하는 일련의 화가들의 모임에 정식회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루아의 작품과 창조력으로부터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들은 사실적이고, 후기로 갈수록 보다 인상주의적이며 빛을 색이 아닌 색조로 표현했지만,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 즉 전후 관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난 두 가지의 회화 양식, 즉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양식에 맞게 혼합하여 그렸다.
그는 고대 거장의 화풍을 연구하며 고전적 요소도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와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시도도 받아 들었던 화가로
진정 유연한 사고와 태도를 가진 혁신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팡탱 라투르는 초상화와 정물화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화풍으로 작업했다.
Hay, 1867~1868. by Armand Guillaumin. oil on canvas. 50 x 2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아르망 기요맹 (Armand Guillaumin, 1841~1927)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 태생으로 생활 때문에 처음에는 어떤 토목과에 잠깐 근무하면서 여가에 회화를 그렸다. 연구소에서 세잔과 피사로를 알게 되어 최후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기요맹은 누구의 감화도 받지 않은 제작으로, 갈색이나 붉은색 · 자색을 많이 쓰는 반면에, 개성이 강한 매력을 나타내며, 피사로나 모네처럼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야성적이면서 중후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
View of the town of Pont du Chateau, 1885~1886. by Albert Marie Lebourg. oil on canvas. 31 x 5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3.
알베르 르부르 (Albert Lebourg 1849~1928)는 프랑스 인상파 및 후기 인상주의 풍경 화가다. 그는 일생 동안 2,000 개가 넘는 풍경화 작품을 남기면서 빛나는 인상파 스타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879년 제 4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르부르는 클로드 모네, 카밀 피사로, 에드가 드가와 함께 알제에서 실행된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이며 30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제5회 인상파전 (1880년)에서 그는 루앙, 파리, 알제를 묘사한 20개의 작품을 전시했다.
르부르는 사계절 내내 루앙과 파리 안팎의 센 강의 애니메이션 장면을 그려 내고 있었다. 마침내 Puteaux에 정착하여 1888년부터 1895년까지 파리 주변에 머물며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을 그렸다.
그는 1920년 9월에 뇌졸중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1년 2월에 재혼했다. 그해에 2,137개의 작품이 포함된 Catalog Raisonné가 조직되었고 1923년에 발표되어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Room of Pablo Picasso,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402번 홀에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도 다섯 점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피카소의 작품은 431~434번 홀에 더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에르미타지 일반 참모건물(General Staff Building)에 전시되어 있는 피카소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Fruit Vase and Bunch of Grapes 과일 꽃병과 포도 다발, 1914. by Pablo Picasso. Paper, gouache, tempera, sawdust and pencil. 67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1881~1973)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큐비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1904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 색과 분홍 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스탈린을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이 스탈린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되어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 예를들어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년)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Man with arms crossed on his chest. 1909. by Pablo Picasso. Watercolor, gouache and charcoal on paper pasted on cardboard, 65.2 x 49.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시터의 머리, 얼굴, 흉상 처리는 1909년 봄 파리에서
다양한 기법으로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의 전형적인 형태와
색상 솔루션의 기하학적 단순화 원리를 보여준다. 작가는 여기에서 개인의 묘사보다는 오히려 형태의 은밀한 구조의 표현에 관심이 있다.
이미지는 개별 섹션으로 나뉘어 있지만 피카소는
엄격한 윤곽을 통해 하나의 장식 디자인으로 통합한다. 황토색과 회색 톤의 간결하고 거의 금욕적이며 조화로운 조합이 전체 구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피카소는 풍부한 색채를 보여주는 것보다 빛과 공간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Nude figure of a young man, 1906.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67.5 x 5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피카소가 파리에서 1906년 봄과 스페인에서 같은 해 여름에 작업한 젊은 남성의 인물이 있는 스케치 및 미완성 작품 그룹에 속한다. 이 그림에서는 구조적 원리의 기하학을 강조하는 경향이 피카소의 작업에 나타나기 시작한 후기 장미 시대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십대의 얼굴은 그 자체로 닫히고 주인의 관심은
골동품 회상이 느껴지는 해석에서 인물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카소 자신은 새로운 형태를 찾고 있다. 그 안에 둘러싸인 볼륨과 상호 작용하는 활기찬 등고선은 침착하게 서 있는 청소년의 이미지에서 내면의 긴장과 움직임을 드러낸다.
Composition with a cut pear,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5 x 3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904~1906년을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라고 하는데
이 때 피카소는 황토색과 연한 장미빛을 자주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 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Painting is just another way of keeping a diary. - Pablo Picasso 그림은 일기를 쓰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한 줄의 글도 써 내려갈 수 없다. 그만큼 피카소에 대한 수없이 많은 글과 책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피카소는 천재다, 그는 미치광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다" 여기에 몇 가지 말들을 덧붙이자면 그는 호색한이기도 했고,
동시에 휴머니스트, 무정부주의자였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 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 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 이남은 유럽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스페인(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던 유럽의 변두리였다. 스페인 회화의 오랜 전통은 프란시스코 델 고야 이후 그 맥이 끊겨 19세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로와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찌감치 자신이 라파엘로보다 낫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던 피카소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기에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의 스페인 출신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였던 시인 뽈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결별하면서까지 평생 한 여자에 충실한 편이었다면
피카소는 숱한 여성편력을 남겼다.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만을 혹은 한 여자가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지 아니면 지극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 개인의 경우로 국한해 놓고 본다면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말하는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등의 구분은 모두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그의 화면에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에
침잠케 했는데, 1901~1904년에 이르는 이 시기를 일컬어 "청색시대"라 한다.
이어서 그가 첫 여자 피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는 그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분홍시대를 열게 만든다. (1905년) 이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되는 데 이 시기에 피카소 주변의 인물들은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이었다.
현대의 회화사에 있어 "사진의 등장"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동안 자연의 모사에 치중했던 화가들에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 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마음 속으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들라크로와 같은 이들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사진가인 A. 스티글리츠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기존의 예술이라는 제도권 안에 진입시킨 공로가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의 예술계에서 사진이 예술이라는 체제 안으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1859년에 있었다. 프랑스사진협회의 노력으로 샹젤리에 궁에서 열렸던 "사진 살롱 개최"가 바로 그것인데, 사진의 예술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비평가로 활동하던 보들레르조차 "1859년 살롱비평"을 통해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였고, 1862년에는 앵그르를 비롯한 유명 미술가들이 사진의 예술 편입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 예술에 편입된 사진은 그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의 한 갈래가 되었다. 좀더 거칠게 말하자면 화가들이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더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것이 피카소가 등장하기 직전인 19세기의 일이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행했던 것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 구체적인 결실들을 맺어가는데, 1907년 일찌기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던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함축된
기하학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큐비즘(입체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런 혁명적 활동은 단순히 화풍(양식)의 변화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앙상블라주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무너뜨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이란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그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뽈 엘뤼아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Zebras at a watering hole, 1906. by Georges Manzana-Pissarro. oil on canvas,
64.5 x 5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이 작품은 1906~1907년 파리 전시회에서 전시된 피카소 초기의
특징적이고 조화로운 구성 중 하나이다. 그의 취향의 형성과 일종의 동양 장식 스타일에 대한 깊은 각인은 풍부한 금색 팔레트와 구불구불한 선형 아라베스크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의 모든 요소를 리듬에 종속시키는 예술가의 이국적인 아라비아에 대한 매혹에 의해 남아 있다.
Violin and Guitar 바이올린과 기타,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5.5 x 54.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가 당시 관심을 가졌던 큐비시즘 (cuism) 스타일로 그려졌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피카소는 악기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이올린과 기타”이다. 그림의 공간은 패턴, 핑거 보드, 바이올린 “에세이”, 벽지 조각, 테이블 단편, 눈에 띄지 않는 유리잔의 힌트로 연결되어 상호 침투하는 많은 평면 요소로 해체되며 정적 생명은 산란 요소의 혼돈에서 나온다.
피카소는 초기 청색시대의 작품과 나중의 입체적 작품들을 비교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카소가 진짜 대단한 화가라고 느껴지는 것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작품이 시기별로 나눠질 수 있게끔 화풍이 변해왔다는 점 아닐까 싶다. 표현하는 방법이 변한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방식이 변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큐비즘((Cubism 입체파) 시대 (1907~1917) 큐비즘은 20세기 야수파(포비즘 fauvisme) 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유럽 회화를 르네상스 이후의 사실주의로부터 해방시킨 20세기 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의 하나이며 입체주의라고 한다. 큐비즘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큐비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 표현파에서 하나의 극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느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술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 추구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나무를 쌓아 올린 것 같은 입체 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미술은 초기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의 가장 의의 있는 발전 가운데 하나인 이 회화 방식은 1907년과 1914년 사이에 조루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들의 엄격한 목표는 평면의 캔바스 위에다 견고함과 볼륨감을 표현하려는 것으로 캔버스란 그 2차원성 또는 그 "그림의 성격"을 상실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주제'를 여러 다른 각도에서 묘사하고 동시에 이를 캔버스 위세서 재구성함으로써 평면들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한다
20세기 최초의 새로운 미술운동이며 미술사의 전환점인 유파로서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큐브"는 정육면체란 뜻으로 큐비즘은 1907년 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나 유럽 전역에 파급된 미술 혁신운동이다.
Two Sisters (Date), 190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가 뛰어난 예술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두 자매 (Two Sisters)>는 피카소가 스물한 살에 그린 작품이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잘 그렸던 청년은 1901년 여름, 파리의 생라자르(Saint-Lazare) 병원을 방문해 두 자매의 만남을 목격한다. 두 자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흩어져 살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인생을 산 그들은 수녀와 창녀가 되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병원의 매춘부 수용 병동에서 만났지만
기쁨은 잠시, 서로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다. 피카소는 두 자매의 기막힌 사연을 잊을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두 자매가 남긴 짙은 인상을 꼬박 일 년에 걸쳐 그려 이듬해 여름에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에서 어느 쪽이 수녀이고 누가 창녀일까. 오른쪽의 여인을 수녀라고 생각하고 왼쪽을 창녀로 보기 쉽다. 그러나 거꾸로 왼쪽이 수녀고 오른쪽이 창녀가 된 자매다. 블라우스를 풀어 젖힌 오른쪽 여인의 왼쪽 팔에 아기의 검은 머리가 조금 보인다. 창녀가 된 여인은 세상에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힘겹게 지내면서
사람들의 학대를 받고 농락을 당해 몸이 더럽혀졌다. 무시와 경멸을 받을수록 세상을 향한 분개가 커졌다. 수치를 느낄수록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 분노는 자기 보호의 모습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 앞에 선 수녀는 머리를 들 수 없다. 친자매의 기구한 운명에 고통스러워하며, 세상 모든 죄의 죄인이 된 심정이다. 슬픔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녀는 감호 병동에 봉사하러 왔다가 병을 치료하며
아기를 돌보고 있는 자신의 자매를 우연히 만난다.
그림에 흐르는 팽팽한 정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해후한 두 자매는 침묵에 잠겼다. 그럼에도 맨발의 두 자매가 어울린 모습에서 병마와 고독의 고통 너머 슬픔을 위로하는 친밀한 가족적 유대가 느껴진다. 수녀 뒤로 아치가 보인다. 아치가 있는 곳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다.
피카소는 무엇이 남달랐을까 20대 초반에 피카소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1821~1881)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처럼 걸인, 장님, 행상, 유랑인, 노숙자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들을 파란 색조가 감싼다.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에르미타주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두 자매>는 딱 봐도 청색시대 작품으로 진한 청색이 주는 비극적인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청색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를 지나 피카소는 사람의 내면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외형을 해체해서 그 외면을 만든 내면을 그려 입체파(cubism)라고 불리는 표현법을 열었다.
The Dance of the Veils,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년 봄 피카소가 그린 베일의 댄스(The Dance of the Veils)는 초기 입체파 회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커튼이 달린 누드의 이미지는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 잡았다. 그 중 가장 주된 작품이 바로 이 그림이다.
스페인 예술 전통의 특징인 완전히 알 수 없는 세계의 신비한 폐쇄에 대한 아이디어는 피카소의 전망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중 하나이다. 인체의 구조를 변형시킨 피카소는 에너지 넘치는 음영으로 덮인 별도의 이동 가능한 평면에서 인체를 재현한다. 그것들을 움직이고 비틀면서 그는 댄서의 긴장하고 요염한 회전을 가시화한다. 그녀가 매체로서 신비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은 것은
그녀의 리듬이 완전히 해체된다는 증거이다. 배경과 커튼이 모두이 회전으로 그려진다.
파블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93세의 나이로 1973년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에게 있어 살아 생전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 자신의 작품 이외에 남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는 그렇게 만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을 비롯해서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자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전쟁을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그가 이런 전쟁과 대학살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 전쟁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바로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긴 것이다.
마드리드 시절부터 거리의 부랑아들과 빈민을 화폭에 그려내던 무정부주의자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공산당의 예술관과 피카소의 예술관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한국에서의 학살>을 둘러싼 피카소와 프랑스 공산당의 충돌은 결국 피카소로 하여금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피카소는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양심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1901-1904) 화가들, 특히 성공한 화가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 피카소는 19세 때 바르셀로나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지내게 된다. 당시 세기 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청색시대(1901-1904)를 맞이한다.
몽마르트에서의 '청색시대' 동안 피카소는 청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리며,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고...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서의 청색, 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다고 하며, 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1년 (20세), 그는 파리를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피카소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이때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말경에는 피카소의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 · 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 (Chat Noir)를 본뜬 '4마리의 고양이' (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Absinthe drinker, 1901.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피카소는 1901년 가을 22세였던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카페에서 인간의 외로움, 고립과 공허함의 주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드가와 피카소의 많은 존경을 받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스페인 사람의 그림에서 주제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감각을 얻었다.
외로운 여 주인공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고,
배경은 더럽고 붉은 벽이 불편함을 더 해준다. 캔버스의 평탄함을 강조하면서 벽의 색과 푸른빛이 도는 대리석 테이블은 여성을 둘러싼 공간을 안쪽으로 밀어내어 절망적인 외로움으로 그녀를 감싸는 듯하다. 압생트 벼랑의 포즈에서,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추방자를 식별할 수 있다. 그녀 몸의 완전히 밀폐된 공간, 오른손의 표현적인 왜곡은
코일 스프링의 긴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는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 엄격하게 상자를 두었다. 손은 그림의 불완전한 타원을 통해 정확한 수직으로 이어지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보호 손은 어깨를 움켜쥔다. 모든 것이 내면의 긴장감을 강화하고 주변 세계에서 인물을 차단한다. 피카소의 실제 관찰을 바탕으로 삶의 비극에 대한
일반화되고 시대를 초월한 상징을 만들었다.
그림의 뒷면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무거운 오버 페인트 밑에 숨겨져 있는 여성의 머리는 아마도 작가를 만족시키지 못한 작품의 일부일 것이다.
Absinthe, Girl in a Cafe, 1901. by Pablo Picasso. gouache, pastel on paper, 73 x 5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피카소의 그림 "압생트(Absinthe)를 가진 소녀"는 주인공의 비대해진 손이 마치 껴안으려는 듯 눈에 띄기 때문에 특별한 드라마로 가득 차 있다. 여자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그녀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예술 비평가들은 압생트에 앉아 피카소의 여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이 압생트에 포함된 Thujone은 마치
강한 커피를 수십 잔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한다. 신경자극을 통제하고 전달하는 효소를 막음으로써, 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성분에는 납이 일정량 포함되어 오랫동안 음용할 경우 건강을 해친다고 한다. 피카소 또한 이 압생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1901년 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이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보라색과 황색의 강한 대비가, 마치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알딸딸함을 뿜어내고 있다.
Portrait of Soler, 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00 x 7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3년, 스물 두 살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친구들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에는 젊은 예술가,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후원한 세련된 바르셀로나 재단사 솔러(Soler)의 초상화가 있다. 피카소와 솔러는 수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피카소는 한 번 이상 그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Hermitage에 소장된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솔러의 전체 모습에
내재된 예술성과 자연스러운 우아함, 그리고 멋지게 콧수염 끝을 올린
그의 얇은 얼굴의 기억에 남는 독창성을 전달한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려고 한다. 솔러를 그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는 강렬하게 우울한 청록색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피카소는 그 사람이 원래 내재되어 있던 "비극적인 삶의 감각"을 지닌 사람을 묘사하게 만든다. 이 초상화에서는 앞의 "Absinthe Drinker"에서와 같이 카페에서 한 사람의 외로움을 주제로 사람들 사이의 외로움이 들린다. 따라서 우울한 느낌과 신경질적인 얼굴에 슬픈 분리의 표현이 있으며, 그 유령같은 창백함은 배경과 의상의 깊은 음색에 의해 강화된다.
Green bowl and black bottl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5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녹색 그릇과 검은 병 1907년 피카소는 이미 널리 알려졌으며 새롭고 소위 큐비스트 방식으로 일련의 그림을 제작한다. 처음 비평가와 대중을 두려워하게 한 큐비즘은 곧 프랑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의 회화에서 가장 흔한 트렌드 중 하나로 발전한다. 세잔 (Cezanne)은 자연을 “볼, 원추, 원통형”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한 입체파 작가들을 창의적인 프로그램으로 간주했다. 세잔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따라 가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들은 더욱 급진적이었다. 입체파는 그 “깨끗한”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주변의 자연, 가정 용품, 인간의 모습은 그림의 볼륨과 평면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입체파 작가들과 무엇보다도 피카소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의 실험은 모든 것이 아니라 인지적이었다. 그러므로 큐비스트 시대와 관련된 피카소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새로운 측면에서의 현상을 드러내어 피사체에 대한 시청자의 관점을 깊게 한다.
정물 피카소의 작품에서 추상화가 주요 부분을 차지한 시기에 “녹색 그릇과 검은 병”이 기록되었다. 구성은 강조되고 간결하다. 함께 쓰여지는 초안 배경에 대해 두 가지의 평범한 객체만 있다. 객체의 위치는 재료의 질량, 형상, 심지어 텍스처를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불안감은 짙은 색조 (녹색과 검은 색)의 대비를 붉은 색과 대비하여 나타낸다. 갈색 – 빨간색, 검정 – 회색 및 녹색 귀머거리가 결합된 자신감이 일반화된 그림, 그러나 예술적 수단의 간결함은 이러한 단순한 대상들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한다.
환상적인 모습을 거부하고 양식의 정확성을 거부함으로써 피카소는 묘사된 각 혈관의 “성격”을 강화한다. 가늘고 모양이 완벽하고 우아한 검은색 병 및 넓고 다소 어색한 녹색컵이다. 비범한 영성과 “활력”을 얻는다. 작은 정물에서 피카소는 주변 현실에서 무진장의 시각적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완벽하게 나타냈다.
Boy with a dog. Turnover: study of two figures and a man's head in profile, 1905. by Pablo Picasso. gouache on cardboard, 57.2 x 41.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큐비즘이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싸롱도통에 출품된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의 풍경>이란 연작를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큐브)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하였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의 풍경>을 살롱전에 출품하였고, 이때 심사위원장은 마티스였으며 연작 중 두점 만이 입선되었고, 니머지는 모두 낙선되었다.
마티스 같은 위대한 화가조차도 후대들의 새로운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미술의 법칙인가 보다. 이에 불만을 품은 브라크는 출품된 작품 모두를 찾아 카베레를 화랑에서 개인전을 함으로써 세인의 비판을 구하였다.
세잔느의 " 자연의 형태는 원추, 원통,구형으로 나눌수 있다" 는 주장을 이론적인 근거로 한 큐비즘은 피카소가 1907년에 대담한 색채와 면의 구성을 보여주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동시에 표현하려 했는데 처음에는 색채를 부정하고 흑색, 녹색, 갈색 등으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했으며, 눈에 비친 형상의 우연적인 속성을 일체 생략하였다.
큐비즘의 중심사상은 르네상스 이래 서양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을 이용한 순간적인 현실묘사를 지양하고, 시점을 다수로하고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 만으로 한정하며 그 위에 자연의 여러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시켜 사물의 존재성을 2차원의 '타블로' 구축하여 재구성 하고자 하는데 있다.
Woman head, 1902~190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9.7 x 36.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11년에 살롱 데 쟁데팡탕의 전시실이 큐비즘의
전용으로 이용되면서 집단적인 발표가 이루어졌다. 큐비즘은 1911년이라고 하는 지극히 짧은 단 한 순간동안 서 있었던 실험 예술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현실에 두려움없이 직면했고 또 그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반 자연주의적인 유형의 형상화를 진전시켰는데 이것은 동시에 회화적 창조의 메카니즘을 홀딱 발가 벗겼으며 그 과정에서 추상과 재현의 인위적인 경계를 부셔버려는 쪽으로 멀찍이 나갔던 것이다. 요컨데 큐비즘은 금세기 전반의 예술에서 회전축과 같은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큐비즘은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확고하게 자리잡은 단일시점의 원근법에 의해 부여된 대상의 가짜 입체감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이차원적 캔버스 평면에 재구성하므로서 예컨데 19세기 리얼리즘 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암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말하자면 순수한 시각성에 의한 회화의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다.
큐비즘은 근본적으로 정적이며 반성적인 예술양식이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조아적인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조아적인 현실을 변혁가능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 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들어가게 하였다
큐비즘의 이론은 대상을 가장 진실되게 파악하기 위해서, 대상을 예리한 매스로
분석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종래에는 대상과는 더욱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은 화면에서 점차 사라져버리는 현실적 이미지를 찾기 위해 우연히 현실적 오브제를 직접 화면에 붙이는 방법을 찾았다. 트럼프, 악보, 신문지 조각같은 인쇄물을 화판에 부분적으로 부착하였는데 부분적으로 추상화된 이미지를 합하려고 하였다
Glassware, 1906.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8.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이 작품은 피카소가 1906년 여름을 보낸 스페인에서 그린 정물화이다. 그때까지 독립 장르로서의 정물은 피카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물화는 묘사된 것의 본질을 식별하는 데 점점 더 관심이 있음을 증언한다.
"Glassware"의 구성은 단순하고 고전적인 선명도가 특징이다. 각 개체는 엄격한 구성 리듬과 비교 및 상호 작용의 논리를 모두 준수하는 동시에 자체 공간 영역에 존재한다.
Nude woman (bust),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61 x 4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6년에 피카소의 작품은 이미 과거와의 "대담한"
돌파구와 "미지로의 돌파구"의 윤곽을 나타냈다.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예술의 예리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그는 시각적 신뢰성으로부터의 본질적인 자유와
필수 개념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거친 형태, 안면 마스크는 표현적인 구성성과 미스터리를
모두 갖춘 기본, 초개인 형태로의 경로를 나타낸다. 강조된 기하학과 도식주의와 함께 그림 언어의 참신함으로
피카소는 여성의 얼굴에 슬픔의 표현을 유지한다.
friendship,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1.3 x 101.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큐비즘은 물체를 입방체처럼 분석 분해해서 그 각 단면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큐비즘 작가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하였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활되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 있는 요소와 결합하여 융합되었다
피카소, 브라크, 그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 었으며, 화면의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레제와 들로네가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큐비즘의 충격은 대단했다. 즉 기존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양식의 창출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표현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네덜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절대적 추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딧게 하였고, 미국에서는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유도하였다. 그 여파의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의, 오르비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를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지대한 그 영향력 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1점 원근 시점에서 벗어난 동시점 즉 다시점 작풍 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는데 화면의 평면화, 빛의 평등한 분산, 주제의 일관성 등으로 그 실천적 성과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보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예술론을 성공적인 시도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
아폴리네에르, 앙드레 살몽, 모이스 레이날 등이 비평가로서 이 운동을 지원했다. 초기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라는 두 걸출한 대가의 독립된 조형상의 모색을 통해 탄생한 큐비즘은 당시까지 회화에서 추구했던 시각의 리얼리즘을 넘어 '이념의 리얼리즘'을 추구함으로써 회화의 일대의 혁명을 불러 왔다.
"자연을 원통, 구, 원추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 구축적인 회화 이념에 힘입은 바가 큰 큐비즘은 대상을 섬세하게 분할함과 아울러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화면에 병치하고 시간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결국 전통적인 회화 원리를 무너뜨렸다.
흔히 피카소의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 >과 마티스의 <에스타크 풍경>으로
비롯했다고 일컬어지는 큐비즘 회화는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인체를 자연스럽게 소재로 하였다 .
'청색시대' 로부터 '큐비즘시대', '고전적시대' 를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신화, 일상적인 누드를 지속적으로 그려온 피카소는 물론, <아비뇽 처녀들>에 필적하는 브라크의 나부들, 기계 미학의 경도를 보인 이후 다양한 형식의 인물을 그린 레제, 큐비즘 조각가의 개척자 아킨펭코 등의 작품에서는 독자적인 질서로 재구축된 인체를 만날 수 있다.
큐비즘은 한편 반성적인 예술 양식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예술적 성공이 곧 부르즈와적 순응주의에로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큐비스트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부르즈와적 현실을 변혁 가능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역겹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편하고 자기만족을 주는 그 현실 속으로 큐비즘을 쉽게 빨려 들어가게 했다.
Three wom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00 x 17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에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Musical instruments,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8 x 8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큐비즘은 초기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까지 3단계로 구분한다. 1907에서 1909년 사이를 초기 큐비즘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 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 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 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 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 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Brick factory in Tortosa,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0.7 x 60.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자연에는 원기둥, 원뿔, 구형밖에 없다'는 세잔의 가르침을 따른 <토르토사의 벽돌공장> 큐비즘은 두 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 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적 요소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 (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와 꼴라쥬 마티에르 (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 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Young lady,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3 x 7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 살롱 토론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Woman with a fan, 1907.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2 x 101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 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 삼각추,
원통형 입방체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는 명칭을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란 최초로 비평가인 R. 보셜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셜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차레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화면 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 표현 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내 재능을 잘 살릴수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 두기로 한다" (브라크),
Cafe table (Pernod bottle), 1912.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45.5 x 3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Bathing,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39 x 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여러 시대를 통하여 미술가들은 캔버스와 파넬의 평면 위에 어떻게 삼차원적 세계를 표현할수 있는냐 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해 왔다.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앞에 있는 것일수록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원근화법을 사용해 왔는데 이 기법은 2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의 깊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프랑스 화가 세잔느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는 자연풍경을 주의깊게 관찰하여 집이나 나무, 산들을 기하학적 형태와 일치시켰으나 그것들을 반드시 한 시점으로 처리하지는 않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눈도 한곳에 정지시켜 놓지 않음으로써
일상적인 시야처럼 사실과 같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이 형태를 분리하여 식별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마음 속에서 함께 결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마다 일어나는 과정이지만 회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곧 전통적인 원근 화법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Tavern, around 선술집, 1914.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29.5 x 3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4년 파리에서는 세잔느의 대규모 작품 전시회가 열렸는데 이 전시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젊은 화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다. 동시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작품도 전시되었는데 그 작품들의 단순성과 역동성은 미술가들의 관심을 미술의 원칙으로 돌리게 하였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미술과 초기 동굴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물론 원시적인 물건들이 오랫동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예술로 보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미술가들은 원시시대의 의식 용구의 힘과 단순성을 찬탄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재생과 영감을 구하였다.
Seated woma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50 x 9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7~1908년에 제작한 초기 입체파의 이 작품은 피카소가 시각적 진정성에서
벗어났고 그가 창조한 "새로운 현실"에 몰입하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무섭게 반발하고 때로는 새롭게 드러난 조화로 눈에 띄기도 한다.
"앉은 여인(Seated woman)"은 1908년 초 파리에서 그렸다. 졸거나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누드 인물은 그녀의 윤곽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최고의 도식주의로 구별된다. 직선은 그림의 주요 요소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강한 대비는 볼륨을 만들고 어두운 황토색은 그림의 색상을 결정한다. "앉은 여인"은 수면의 느낌을 준다. 이 주제는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Composition with skull 해골 구성,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16.3 x 89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최초로 입체파 회화를 그렸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선사시대로 관심을 돌렸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기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 계속적으로 의존해 왔었다.
그러나 원시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연 이상의 것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렇게 느꼈음이 틀림 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당대의 시점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미개성과 생경함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다.
Tenor and violin, 1913.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55.3 x 3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피카소는 전통 화가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데상에 대한
정상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전통적인 데상을 방기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제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손의 수법을 익히고 있었다. 브라크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놀랐다. 브라크는 자신의 실험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레스다크의 집들>에 보이는 나무의 대각선 조차도 세잔느가 사용했던 고안이다. 그러므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무엇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전통적인 원근화법과 삼차원적 환영을 버리고
훨씬 더 얕은 회화적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화면 위의 인물이나 대상들을 마치 캔버스 표면 위로
불쑥 밀어 올린 듯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하였다. 또한 단단한 형태들의 집합이 배열되어 새로운 구성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피카소는 직선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 조차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브라크는 보다 예민한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평가들은 이들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Farmer (half-length image),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 x 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1908년 가을 피카소는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La Rue-de-Bois) 마을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살았던 집의 여주인의 초상화인 "Farmer"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The Farmer"에서 인간의 육체가 돋보인다.
머리는 공, 목은 원통, 몸통은 입방체와 같은 기하학적 기호의
매우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시된다. 여성의 모습은 나무 블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인상이 강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연에 의해 공급되는 숨겨진, 강력하고, 원시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는 "나는 자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Dryad,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185 x 10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2
1908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초기 입체파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드라이어드(Dryad)의 세계는 따뜻한 햇빛을 알지 못한다. 어둡고 신비스럽고 비이성적인 모든 것에 열려 있다. 보이지 않는 높이로 단단히 닫혀 있는 나무 줄기는
인간형 자손을 그림의 전면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이어드의 모습은 저속하고 공격적이다. 다각형 실루엣에는 밝은 갈색, 회색 갈색 및
어두운 갈색의 측면과 같은 기하학적 표면이 포함된다. 이 얼굴의 관절은 명확한 선으로 표시된다. 신체를 해석하는 이 새로운 방법은 피카소가 그 구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에너지, 그 안에 작용하는
밀착력과 추진력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피카소는 말한다.
"본질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문학으로 가득 찬 그림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카소는 항상 "말"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고 서술적이지 않았다.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본성에 대한
예술가의 긴장되고 불안한 생각의 구체화였다.
Farmer (tall),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81.5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3
"농부(Farmer)"는 1908년 여름 말 피카소가 살았던
파리 근처의 라 루드부아 마을에서 그린 작품이다. 그 집의 여주인인 농부는 그의 생각을 "이상적인" 살아 있는 구체화의
일차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문제로 받아 들여 피카소는
"농부 (성장 중)"와 "농부 (허리 길이 이미지)"라는 두 가지 화신을 만들었다.
농부의 키 큰 모습은 그녀의 반장 이미지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간단하고 잘 맞는 볼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고 대략적으로 다듬어 진 머리로 끝난다. 그러나 키가 큰 그림에는 매우 표현력이 강한 몇 가지 악센트가 나타났다. 치마가 있는 거대한 부풀어 오른 배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먹 팔, 팔 레버, 팔 망치, 공격적인 무게로 가득 차 있다. 농부는 그녀의 어두운 잠재 의식의 첫 부름에 생명을 얻을 준비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로봇과 비슷하다.
House in the garden, 1908.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73.6 x 6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1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몽마르트의 세탁선이라는 하숙집에서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상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 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 교유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테 에브로의 에스파니야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화학 공간을 쌓아 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Woman with mandolin, 1909. by Pablo Picasso. oil on canvas, 92 x 73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34
1907년부터 1901년에 이르는 큐비즘의 제 1단계 동안에 보여준 것은
피카소와 부라크가 아직도 세잔느의 많은 영향 아래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보다 뚜렸이 그들의 양식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정물화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이를 주는 모든 일루전을 제거한 채 경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앞으로 당겨서 마치 상자 안에 물건들을 마구 쌓아 놓은 것처럼 그림의 전후 관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것이 과도기적 단계의 큐비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곧 실망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주체들을 거의 사라지게 해버린 예술가들에게 매혹될 것이다.
Room of Edgar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4층의 첫 번째 402번 홀에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에드가 드가는 프랑스 파리,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앵그르의 제자로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After the Bath, 1895. by Edgar Degas. pastel, gouache, tempera and charcoal on brown paper. 81.9 x 71.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는 풍경화에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진이나 우아한 일본 판화 등 당시 파리에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새로운 표현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드가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 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 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 왔다.
드가는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 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Woman combing her hair, 1885. by Edgar Degas. pastel on paper. 54 x 52.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880년대에 에드가 드가는 목욕하는 여자 연작에 몰두했다. 특이한 시각을 채택하는 드가의 능력은 기수나
발레리나를 다룰 때보다 목욕하는 여인 연작에서 한층 향상되었다. 그는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몰래 바라보는 듯한 각도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의 일상적인 동작을 캔버스에 담았다. 드가는 이상화되거나 규범에 의해 강요된 전통적인 누드 자세를 거부했다.
Toilet (Woman drying herself after bath), 1884. by Edgar Degas. pastel on brown paper. 50 x 50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화적인 주제에 등장하는 누드와는 매우 다른, 평범하게 남을 의식하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1886년 목욕하는 여인 연작이 공개되었을 때는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조지 무어 같은 친구들조차 드가가 관음증이 있다고 비난했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고 신체만 보이는 낮은 각도에서 그려진 드가의 누드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음란하고 노골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Behind the toilet, 1899. by Edgar Degas. pastel, charcoal on tinted paper. 54.5 x 58.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드가에게 여성의 인체는 평생에 걸친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그는 긴 머리카락에 페티시적인 집착을 보여서
많은 작품에 긴 머리를 빗는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마티스가 오랜 기간 소장하고 있었던 <붉은 방>과 같은 작품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머리빗기>는 이 머리카락이
추상적인 느낌까지 주는 감각적인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드가가 비범한 시점과 구도로 화면에 구축한 아름다움은 산문적인 리얼리티에서 드가가 끌어낼 수 있는 시적인 요소였다. 이 작품과 같은 그의 1890년대 이후의 회화는, 그 선과 색채가 사실주의적이라기보다는 표현주의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런 회화는 특히 고갱이나 르동 등 후배 세대 화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Seated dancer straightening shoe ribbons, 1875~1876. by Edgar Degas. charcoal and chalk on paper. 47.3 x 30.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Room 402.
1871년 즈음부터 드가는 오페라 극장을 자주 찾아다니면서
무용 연습에 열중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또는 무대공연에 열중인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를 그리기 시작한다.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드가는 제 1회 인상파 전시회를 제외한 모든 전시회에 참여하였지만, 인상주의 작가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광선에 대한 관심과 우연한 순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제외하면, 드가는 인상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화가였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그가 가진 주제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마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시 투루즈 로트렉에 의해 계승된다
Dancers heads, second half of the 1890s. by Edgar Degas. pastel, charcoal on light gray paper. 30.6 x 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Room 402.
Two Dancers, 0898~1899. by Edgar Degas. pastel on paper. 47.8 x 36.2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1890년대 후반에 드가는 무대에 올라 가기 바로 전에 무용수의 이미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보통 이 순간에 그들은 뭔가 치장을 하고 있다. 스트랩, 귀걸이, 헤어 스타일 – 아티스트가 “개막 전” 흥분을 정확하게 기록한 제스처. 무대 뒤에서의 삶은 날개 속의 가벼운 에피소드가 이미 드가를 현장의 광채보다 더 끌어들였다. 이 그림은 머리카락을 교정하는 발레리나인 “Two Dancers”와 정확히 같은 각도이다.
Seated Dancer (Danseuse assise), 1879~1880. by Edgar Degas. Charcoal and pastel on paper mounted on pasteboard. 63.5 x 4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Girls (women), 1907. by Georges Rouault. tempera, sometimes pastel on paper. Charcoal and pastel on paper mounted on pasteboard. 97 x 6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1958)는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이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에 미술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로의 화풍을 따랐으나, 스스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 · 창녀 · 어릿광대 · 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Spring. Turnover: Sketch of a vase, 1911. by Georges Rouault. oil on canvas. 72 x 57.4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2.
봄 풍경은 조르주 루오의 작품에서 극히 드믄 주제이다. 고딕 성당의 장미를 연상시키는 구성의 모양, 테두리를 장식하는 무늬가 있는 테두리, 풍경 형태를 나타내는 강렬한 선과 줄무늬, 사람의 모습, 공간 계획 등은 모두 루오의 작업 결과로 장식적인 취미를 증명한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도자기 분야, 풍경 형태의 어두운 혼합 사이에
밝은 수채화 레이어는 어느 정도 조명을 통해서 기능을 한다. 그러나 루오는 스테인드 글라스 페인팅을 모방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생생한 인식은 일종의 회화적 측면인
장식적인 원리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을 제공한다.
Hall of French painting of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Daumier, Manet,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바로 옆 404 홀에도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 콩코드 광장(Concorde Squar)이 전시되어 있다.
Hall of French painting of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Daumier, Manet, Deg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Concorde Square, 1875. by Edgar Degas. oil on canvas. 78.4 x 117.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콩코드 광장 (레픽 자작과 그의 딸들) 에드가 드가는 고전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르네상스 걸작의 프레임 안에는
'세계와 영원'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근대의 작품은
'작은 구석, 한 순간, 파편'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근대 도시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드가는 근대의 속도를 따르는 도시인의 눈이 훑고 지나가는 순간
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의 파편을 적극적으로 그림에 담았다. 조금만 있으면 그림의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릴 것 같은 레픽은
그런 행인의 눈에 들어온 대상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런 눈으로 다른 대상을 보는 산책자(Flaneur)이기도 하다. 책임감이나 소속감은 없으나 열정적인 구경꾼인 산책자는 드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Nosha (Laundress), 1850~1853. by Honore Daumier. oil on canvas. 131 x 9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404.
오노레 도미에 (Honoré-Victorin Daumier 1808~1879)는 프랑스의 화가, 조각가 및 판화가였다. 1830년부터 1870년 제 2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까지 그는
평생 동안 생계를 유지하며 정치인의 캐리커처와 만화를 제작하고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서 동포의 행동을 풍자하며 평생동안 유명해졌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알려져 있다. 그는 부르주아지, 교회, 변호사, 사법부, 정치인, 군주제를 공격한 공화당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가잔추어(Gargantua)가 출판된 후 1832년에 몇 달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도미에는 때때로 파리 살롱에서 그림을 전시했지만 그의 작품은 프랑스 대중과 대부분의 비평가들에 의해 대부분 간과되고 무시되었다. 그러나 시인이자 예술 평론가인 찰스 버들레어(Charles Baudelaire)와
도미에의 동료 화가는 젊은 세대의 인상파 및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그의 그림을 주목하고 크게 존경했다. 이후 세대는 도미에를 19 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도미에는 지칠 줄 모르는 다작의 예술가였으며 100개 이상의 조각, 500개의 그림, 1000개의 그림, 1000개의 나무 조각, 4000개의 석판화를 제작했다.
Bust of D. Kennedy,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자크 립쉬츠(Jacques Lipschitz 1891~1973)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 입체파 조각가였다. 어린 시절 립쉬츠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909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매료되어 현대 미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2~13년 러시아 제국군에서 잠시 복무한 후 립쉬츠는 파리로 돌아왔다. 1907년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파리에서 립쉬츠를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소개했다. 립쉬츠는 입체파 그림의 다색 프리즘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작업했다. 립쉬츠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Bust of D. Kennedy"(1964~1965)가 여기 전시되어 있다.
Jacob and the Angel,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예술적 혁신이 절정에 달한 1920년대에 자크 립쉬츠는
투명한 조각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인 형태를 실험했다. 나중에 그는 더 역동적인 스타일을 개발하여 인물과 동물의 청동 구성에 효과를 적용했다. 1924~25 년에 립쉬츠는 귀화를 통해 프랑스 시민이 되었고
베르테 키트로서(Berthe Kitrosser)와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정착했다. 1941년 뉴욕으로 이사했을 때 립쉬츠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입체파 스타일로 제작된 조각 "Jacob and the Angel"(1931)은 예술에 대한 립쉬츠의 열정을 반영한다.
Loneliness in the Closet 옷장 속의 외로움,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일리야 이오시포비치 카바코프(Ilya Iosifovich Kabakov 1933~)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Dnipropetrovsk)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모스크바에서 30년 동안 일했고 현재는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40년 이상의 경력을 통해 카바코프는 어린 시절부터 1980년대 초까지 그의 삶을 추적하는 방대한 회고록은 말할 것도없고 다양한 그림, 드로잉, 설치 및 이론적 텍스트를 제작했다.
모스크바 개념주의자이자 전체 설치 장르의 창시자인 카바코프의 방에는 2004년 작가가 Hermitage에 설치한 작품 "옷장 속의 외로움(Loneliness in the Closet)"과 "구석에 있는 화장실(Toilet in the Corner)"이 있다.
Toilet in the Corner 구석에 있는 화장실,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카바코프는 은밀하고 친밀하며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벽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한다. 작가는 어렸을 때 옷장에 오랫동안 숨어서 앉아 있거나, 소련의 현실에서 화장실에서 숨어 있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duard Steinberg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9
이 홀은 1960~1980년대 비공식 예술의 리더이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두 번째 물결의 예술가인 스타인버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러시아 종교 철학의 아이디어를 수행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은 작가의 미망인 갈리나 마네비치가 2014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기증했다.
모스크바 출생으로 러시아의 화가, 철학자 및 활동가였다. 그의 아내 갈리나 마네비치(Galina Iosifovna Manevich) 역시
러시아의 미술 평론가, 작가 및 수필가이다. 스타인버그는 처음에 생생한 모델과 풍경을 그렸고
나중에는 "형이상학적 정물"로 전환했다.
1960~1980년대에 스타인버그는 예술 표현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지지하는 소련의 반체제 운동에 참여했다. 스타인버그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드미트리 프리고프(Dmitry Aleksandrovich Prigov 1940~2007)는 러시아 작가이자 예술가였다. 프리고프는 소련 시대에 반체제 인사였으며 1986년에 잠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프리고프는 십대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Art Institute에서 조각가로 훈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시립 공원의 조각품을 디자인하고 건축가로 일했다.
프리고프와 그의 친구 루빈스타인(Lev Rubinstein)은 공연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보는 1960년대에 시작된 개념 미술학교의 리더였다. 그는 또한 깡통에 구절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2005년까지 거의 36,000 개의 시를 썼던 다작의 시인이었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그의 시는 지하에서 유통되었다. 공산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공식적으로 배포되기 훨씬 전에
émigré 간행물과 Slavic 학술지에 널리 게재되었다.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출판 및 전시되기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작가 연합에 가입했다. 그는 1975년부터 예술가 연합의 회원이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모스크바 개념 주의자이자 예술가, 시인, 조각가인 드미트리 프리고프의 방은 그의 감독 하에 예술가의 스케치에 따라 지어진 설치물을 보관하고 있다. 흑백 방은 의자와 일반적인 로프 울타리가 놓여 있고 빈 프레임이 벽에 걸려 있고 그 옆에 거대한 레이블이 있는 박물관 홀과 비슷하다. 태블릿에는 "마티스입니다", "렘브란트입니다", "말레비치입니다",
"레오나르도입니다." 라고 씌여 있다. 드미트리 프리고프는 예술에 대한 인식의 자유와 부족, 예술가 이름의 역할, "순수한 묵상"의 불가능성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금속 장식 전시관 이곳에는 오래된 유물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까지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금속 장식들 - 크기도 작은 것부터 큰것까지 다양하게 있다.
알렉산더(Alexander) 3세와 마리아 표도르브나(Maria Feodorovna )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시계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Rothschild Fabergé Egg
2007년 11월 Christie's 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된 Fabergé Egg는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의 러시아 소유 박물관인 바덴바덴에 있는 파베르제 박물관의 창립자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구입했다.
27cm 높이의 Fabergé Egg는 190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베르제(Fabergé) 수석 작업장인 마이클 퍼킨(Michael Perchin)이 만들었으며, 겨울 궁전의 유명한 오르몰루 자동 기계 공작 알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와 자동 기계를 모두 통합한 3개의 대형 Fabergé 달걀 중 하나였다.
유리병 장식
유리병 장식
조각
조각
Tsar Alexander III와 Tsarina Maria Feodorovna의 대관식, 1888. by Georges Becker. oil on canvas, 108 x 1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83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Tsar Alexander III 1845~1894)와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847-1928)의 대관식 장면을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5~1909)가 1888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6~1909)는
1845년 5월 18일 파리에서 부르주아 멜키즈 가문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성향과 의심할 여지없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파리 줄리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로마노프(Romanovs) 황제 가문의 초청으로
그는 오랫동안 러시아에 살면서 제국 황실의 명령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조르주 베커는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황후의 대관식을 몇 년 동안 작업하여 1888년에 완성했다.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의 대관식은 알렉산더 2세 황제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지 1년 반이 지난 1883년 5 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르주 베커는 1909년 가을 파리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인증샷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덴마크의 화가이자 조각가 라우리츠 툭센 (Laurits Tuxen 1853~1927)의 작품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4대 황제이자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1868년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적으로는 교양 있고 예의바른 신사였지만, 황제로서는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 러시아 혁명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적으로 그는 매우 교양있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그는 당대 러시아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발레 애호가였다. 문학가 중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을 높게 평가했으며 말할 때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 속 내용을 곧잘 인용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던 셈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니콜라이 2세는 유약하고 무능하면서도 독선적인데다 심한 반유대주의자에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으로 전제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유약하기만 해서 주변 말 잘 듣는 예스맨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유약함과 독선이라는 상반된 성향이 교대로 튀어나와 강단있게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의 수용해야 할 때는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처리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리더로선 정말 짜증나는 유형이었다. 전형적인 능력 없으면서 부지런하기만한 지도자상으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 말 안 듣고 자기 독단으로 밀어붙이다 모두 말아먹었다.
당대 러시아 정계에는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유능한 관료들이 존재했으며 니콜라이 2세 또한 스톨리핀에게 나름대로 힘을 실어주었지만, '나름대로 밀어주는 수준'으로 러시아를 되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톨리핀의 암살 이후로는 황제의 독선을 제지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일 만한 인사들이 없었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과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지지를 잃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정치는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누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맡았는데,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두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듣지 않았다.
당연히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다.
니콜라이 2세 본인은 권력을 휘두르는 라스푸틴을 황후처럼
맹신하진 않았지만 아내와의 충돌이 두려워 막지 않았다. 또한 농민 출신인 라스푸틴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방탕한 행동 또한 백성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고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자녀들과 지나치게 접촉하고 강간 의혹까지 터지며 라스푸틴을 잠시 유배보내긴 했지만 상황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의 말기
러시아 제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해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선량한 암군' 혹은 '죄 없던 자녀들까지 묶어서 잔혹하게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나, 제정의 몰락 자체는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본다.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은 우리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고종과 친러파는 아관파천 후 조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러시아에게 확실히 요청하고 싶어 했다. 전 세계 외교사절이 집결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 일행은 비밀리에 니콜라이 2세를 만나 조선을 러시아 보호국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차르가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이때 제안했다는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어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민영환과 러시아 외무상 로마노프 간에 체결된 각서 내용은 당시 수행원인 윤치호가 쓴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의 가치를 만주 방위를 위한 완충지대 정도로 생각했다. 일본에게 요긴한 조선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조선에 얽매이는 것보다 자신들의 국익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의 그런 저의가 드러나는 것은 고종이 환궁하고 나서 1년 여 지난 1898년 4월 25일 일본과 맺은 로제-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과의 다툼에
한 발 물러서는 모습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조선에서 러일 간 대립이 종식되고 일본의 독점적 지위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극도로 의존한 조선의 경제 구조, 만주 지역 경략의 매력이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끈을 놓게 만든 요인으로 보인다. 이해 9월 일본은 경부선 부설권을 재차 획득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의 초상화,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1770-1837) 조세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1814)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재력이 부유한 크리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첫 결혼으로 1794년 7월 28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 자작 Alexandre de Beauharnais 장군의 아내였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조세핀은 몇 달 동안 수감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1796년 그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과 재혼했다. 1799년에 그녀는 말메종 궁전 (Chateau de Malmaison)의 소유자가 되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프랑스 화가 앙투안 장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가 그린 Arcole의 다리 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전투 장면과 공식적인 초상화를 결합한 이 그림은 화가
앙투안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의 개인적인 인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캠페인에서 보나파르트와 동행했으며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했다. 그로스(Gros)는 나폴레옹의 이미지에서 신고전주의 예술의
전형적이고 강한 개인의 이상을 구체화했다. 그 모습은 영웅의 결단력과 용감함을 강조하는 긴장된 시선으로 차갑고 차분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Peter the Great, 1838. 복제품
Peter the Great, 1838. by Paul Delaroche, oil on canvas. 130,6 x 97 cm.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1797~1856)의 1838년 작품
표트르 대제의 옷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승마 초상화, 복제품
Catherine II on horseback, 18th century. by Vigilius Ericksen. oil on canvas. 358 х 388 cm.
군복과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독일 출신 화가 조그 크리스토퍼 그루쓰(Georg Cristoph Grooth 1716~1749)의 흑인 하인과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승마 초상화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파벨 1세(Pavel I Petrovich 1754~1801)는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다. 파벨의 출생에 대해선 파벨은 원래 표트르 예카테리나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 예카테리나와 그 애인인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근거는 없다.
파벨은 아내인 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가 죽자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혼하였다. 1783년 어머니에 의해 가트치나의 영지에서 살게 된 그는 그 곳에 작은 궁정을 갖고 영지를 관리하며 사병을 훈련시키고 정부 개혁을 계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서거하여 1796년 파벨이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그녀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는 황태자인 동시에 정적으로서 항상 어머니의 감시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혐오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총애하던 신하와 측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여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의 정책 전반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의 영향으로 1797년 그는 법령을 발표하여 제위 계승법을 맏아들 상속의 원칙으로 확립했다. 또한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더욱 거부하였고,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사상 서적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풍의 옷도 입을 수 없게 했다. 이렇게 그의 통치 방식은 엄격하고 혹독한 규제로 일관되었다.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그러나 파벨 1세는 음울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시행한 여러 정책들 간에 일관된 노선은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면 영지 경작을 위한 농노들의 노동 부역 일수를 주 3일로 줄였다. 이는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노들의 강제 노동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시행한 정책이었지만, 반면 과거보다 더 많은 12만 명의 황실령지 농민을 지주 귀족에게 양도하여 결과적으로 농노의 수를 늘려놓은 식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파벨 1세는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귀족들에게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와 맞서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79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프랑스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사실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정신 질환자의 기질이 있었다. 파벨 1세가 사람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들을 관료로 세우는 일이 있었고, 귀족들의 특권 중 여러 개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01년 3월 23일 새벽, 파벨 1세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버닝젠 백작의 개인 소유 군인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파벨 1세의 침실에서 들어와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에 파벨 1세는 군인들에게 크게 화를 냈고,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파벨 1세를 처형하였다. 일설에는 이에 아들 알렉산드르 1세가 동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화가를 알 수 없는 초상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0번째 군주. 본명은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Alexander Pavlovich Romanov 1777~1825)
파벨 1세와 뷔르텐베르크의 소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예카테리나 2세는 외아들 파벨을 싫어하여 그가 제위에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손자인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유주의 교육을 시키며 자신이 직접 데려다가 길렀다.
알렉산드르는 그런 그녀의 뜻을 거절하였으나, 예카테리나 2세에 뒤이어 황제가 된 파벨 1세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자 반란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당시의 러시아는 표트르 1세 때부터 추구해 온 서구화의 결과로 누적된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통 사회와 정치체제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공격과 비판의 대상으로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구화를 통하여 국력을 강화시키고 행정기구의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동안 계몽주의라는 서구의 사상까지 습득되어, 입헌정치와 권력층의 특권을 제약하는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농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가장 드세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의 악이라고 여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어 기존 질서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지자 알렉산드르 1세는 결국 러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쪽을 택하였지만 처음에는 국민에 대한 무마책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러시아 내부의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행정기구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알렉산드르 1세는 그의 젊은 시절 친구인 노보실체프, 스트로가노프, 차르토리스키 등으로 구성된 비(非)공식위원회를 조직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하면서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구성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 이후 1805년까지 비공식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농노제의 폐지를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부와 일반 대중은 이런 개혁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먼저 농노제의 폐지가 가져올 귀족층의 약화를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없었고 더욱이 황제 자신도 자신이 특권을 포기하는 자유주의 물결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회의는 자주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1805년 급기야
프랑스와의 전쟁 발발로 러시아의 개혁은 일단 보류되었다. 따라서 농노제는 무수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861년까지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집권 초기 몇 해 동안에는 착실한 성과도 있었다. 원로원이 부활되어 최고의 사법 및 행정기관으로 바뀌어 황제의 권한을 어느 정도 견제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실은 근대적인 관료제의 도입이었다. 이것은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폐지된 합좌제(콜레지아)에 대치된 것이다. 1802년부터 몇 년 동안 각 부서를 1명의 장관이 책임지는 현재의 체제와 흡사한 관료제도를 확립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법무부, 외무부, 재무부, 국방부, 상업부 그리고 문교부가 있었으나 나중에 상업부가 폐지되고 경찰부가 새로 구성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나폴레옹 포위망 1801년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끝없는 야심을 두려워하여 1804년 영국이 주도하는 대(對)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반(反)프랑스 세력에 가담하게 된 것은 영국과의 경제적 유대,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전통적 적대 감정 등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로 알렉산드르 1세는 오래 전부터 나폴레옹을 위험 인물로 생각해 왔으며, 그 나름대로 유럽의 새로운 질서 체계와 연관지은 몇 가지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의 연합군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가담하여 프랑스와 동맹국인 에스파냐와 충돌하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그 해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테를리치(Battle of Austerlitz)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참패를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아우에르슈테트 전투(Battle of Auerstadt)에서 큰 타격을 받고 전쟁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여 1806년 프로이센 왕국을 새로운 동맹국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예나(Battle of Jena)에서 프랑스에게 무참하게 격파당했고 러시아도 프리틀란트(Battle of Friedland)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르 1세는 재빨리 정책을 변경하여 나폴레옹과 강화협정을 맺고 1807년 6월 25일 틸지트에서 프로이센과 함께 프랑스와 화해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결국 프로이센을 2등국으로 격하시켰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러시아는 동유럽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으며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유럽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대두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맞서면서 프랑스와 잠정적 화해 관계로 안심하고 기타 상대국들과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국경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1803년과 1810년 사이에는 지배권이 서부의 그루지야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대륙 봉쇄(Continental System) 그러나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발표와 함께 양국은 다시 한 번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은 유럽의 무역을 마비시켜 유럽 각국은 프랑스에게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농업국가라서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영국으로 수출해 왔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으로 수출선이 끊기자 대지주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밖에도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 사이에 서로를 위험시하고 적대시하는 개인적인 감정과 양국의 외교적 팽창 다툼 등이 1812년 평화를 깨는 주된 요인이 되고 말았다. 또한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있어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영토가 탐이 났을 뿐더러 점점 남진해 내려오는 러시아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1812년 6월, 드디어 프랑스는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 15만 명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원군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했다. 병력을 각각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으로 나누어 총공세의 형태를 취했다. 한편 러시아는 서둘러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 및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서부 국경 지대에 있던 20만 명의 군사들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프랑스군과 맞서게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병력 수나 경험 면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러시아의 방어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알렉산드르 1세의 계획은 장기전으로 초기에는 방어전을 펴고 서서히 서부에서 동부쪽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는 1차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근거지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단결하였다.
고육지책으로 강구한 것이 초토화 작전이었다. 프랑스군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도록
후퇴를 거듭하면서 식량과 가옥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리고 항상 일부 병력을 매복대로 남겨두어 프랑스군을 기습공격했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러시아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총사령관으로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을 새로이 임명했다. 수보로프의 제자이자 그의 추종자인 쿠투조프는 후퇴 작전에 동의를 했지만 일방적인 후퇴를 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접근해 오자 그는 옛 수도인 모스크바를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서쪽 보로지노 촌락을 방어기지로
설정하고 나폴레옹과의 대결전을 계획했다. 보로지노의 지형적 조건은 병력 이동로가 매우 좁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종대로 공격할 수밖에 없음을 이용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쿠투조프는 12만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최대한 적군의 이동로에 근접시켜 후방을 기습 공격하도록 방어대형을 편성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동요되면 즉시 전방에 배치된 600여 문이 넘는 대포로 포격했다. 이렇듯 철저한 방어망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진격을 쉽게 하지 못했다.
1812년 9월 5일에 벌어진 야간전투가 도화선이 되어 쌍방의 전투는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이른바 치고 빠지기 전법을 폈고 프랑스군은 전형적인 공격전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군의 피해가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일단 공격을 중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포 사격을 공격 신호로 하여 총공격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왼쪽 방어선을 공격하자 러시아군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막았다. 프랑스의 8번째 공격으로 러시아의 바크라치온 장군이 치명상을 입게 되자 방어전이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왼쪽 방어선이 점령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피해가 상상외로 컸기 때문에 더 이상 진군할 수는 없었다. 보로지노 전투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격전이었다. 또 하루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4만여 명이나 전사했으며 프랑스와 동맹국 측에서는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바크라치온 공작과 그 밖의 유명한 지휘관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 사망자 중에는 다수의 장군과 수천 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러시아 진영의 중앙과 왼쪽은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했지만 오른쪽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전투를 중지하고 모스크바의 남동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9월 14일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 정복이 곧 러시아의 정복이라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나폴레옹은 크레믈린 궁전을 총본부로 삼고 전군을 분산시킨 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몇시간 후 모스크바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크레믈린 궁전에까지 옮겨 붙었다.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진화작업을 폈으나 사방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스크바 대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로는 프랑스 병사들이 민가에 들어가 식량을 약탈할 때 불이 붙은 등불을 그대로 두었다가 민가에 옮겨 붙게 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의 수비 책임자인 로스토프친이 프랑스를 괴롭힐 목적으로 죄수들을 석방시켜 곳곳에 방화했다는 설이다.
프랑스군이 애써 고생하며 겨우 정복한 모스크바가 하루도 안 되어 거의 불타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병사들이 숙영할 집도 없게 되었고 식량도 계속 모자랐다. 게다가 추위는 예년에 비해 더욱 혹독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이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니 알렉산드르 1세가 화평을 청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동안 추위는 더욱 극심해져 프랑스군 내에서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거꾸로 부하를 보내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강화를 구했으나 묵살당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마침내 1개월 만에 퇴각을 결정했다. 계속되는 혹한과 배고픔에 떨던 프랑스 병사들은 죽은 전우의 옷을 빼앗아 입고 죽은 말을 뜯어먹으며 퇴각을 했다. 그러한 때에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 기마병들이 출동하여 기습작전으로 협공을 가했다. 또한 곳곳에서 농민 파르티잔이 들고 일어나 앞길을 막고 공격해왔다.
나폴레옹은 가능하면 선발대가 이미 통과한 길을 피하고 물자가 있을 만한 다른 길을 택하여 퇴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눈치챈 러시아군의 기습으로 더욱 곤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11월 초에 군대를 해산하고 자유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말 나폴레옹이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올 때는 출발 당시 60만 대군 중에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귀국할 수 있었다.
1814년 러시아군의 파리 입성 1813년에 쿠투조프는 죽었으나 러시아군은 황제를 따라 프랑스군을 계속 추격했다. 1814년 3월 러시아군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일동 공로를 인정받으며 전후 처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기독교의 정의와 사랑을 내세우며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유럽의 복고 반동에 앞장섰다. 그 부산물로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양도받아
폴란드 왕국을 부활시키고 그 왕을 겸인하는 소득도 얻었다.
1812년의 나폴레옹 격퇴 전쟁은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으로 불린다. 영웅적인 투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
1813년~1814년의 원정 싸움에서까지 대승리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민족 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됐다. 러시아의 작가와 음악가, 화가 등 예술가들은
조국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어 많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대프랑스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 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 정치를 일임하고 국제 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 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는 흑해 연안의 요양지인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 워낙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가 죽음을 가장하여 제위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종교에 헌신하고 있다는 소문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알렉산드르 1세를 자칭하는 가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본부인 사이의 자녀가 어려서 죽어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이었다.
Battle of Borodino, by Peter von Hes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유럽 전역을 빨아들이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러시아를 피해갈 리는 없었고,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몇 가지 이유가 얽혀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일으킨다. 일찍이 없던 초대규모 병력의 침공 앞에 알렉산드르 1세는 군사적 소양이
사실상 전무함에도 전선의 전술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러시아군의
연전연패에 여러모로 기여하였으나 끝까지 항전한다는 의지만은 굳건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는 밀리지 않았을지라도 러시아의 광대한 토지와
극심한 추위, 그리고 제 몸을 갉아먹는 시간 앞에서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정의 기록적인 실패는 결국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몰락을 앞당기는 한편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실상 끝장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이 세워진 빈 체제에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해방자'로 일컬어지며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군사적 능력이야 어찌됐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의 지도자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수많은 영웅들로 장식된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붉은 성벽 앞에 그의 동상도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젊어서 따르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스스로 깨부수는 모순되는 처지에 있었고 전쟁 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극히 보수적인 군주가 되면서 한편 미신에 빠져드는 등 영웅으로 떠받들여진 겉모습과 달리 불행한 삶을 살다가 크림 반도에서 요양 중 사망한다.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copy), Anonymous Artist. 19th century. oil on canvas. 75 x 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original), 1807. by Gioacchino Giuseppe Serangeli. oil on canva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알렉산더 1 세 : 동맹과 적". 원작자는 로마 출신 화가 지오아치노 주세페 세란젤리 (Gioachino Giuseppe Serangeli 1768-1852)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Franz Krüger,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독일 출신 화가 겸 석판가 프란츠 크루거 (Franz Krüger 1797~1857)의 작품 니콜라스 1 세의 초상화.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아들 없이 딸만 있었던데다 이전 파벨 1세가 제위 계승법을 확립하면서 여성의 황위 계승을 금지하였으므로 그의 막내 동생인 니콜라이 1세(Nicholas I Pavlovich, 1796~1855)가 새로운 황제 로마노프 왕조의 11번째 군주로 등극한다.
니콜라이 1세는 1796년에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알렉산드르 1세보다 19살 아래였다. 니콜라이 1세는 체격이 건장하고 외모가 수려하여 귀족적인 위엄을 뿜어내어 항상 다른 사람을 압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권위에 찬 엄숙한 사람’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이와 같은 그의 인상처럼 그는 병사들의 복장이나 군대의 훈련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제위에 오른 후 먼저 군인들의 제복을 정비할 것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단추의 수까지 지정해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전쟁과 내란 등으로 사회가 불안했다. 게다가 즉위식 때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주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며 항상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본능적인 공포는 그를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혁명 운동 탄압에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의 헌병'으로 불렸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Georg von Bothman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예민하고 의심이 많던 니콜라스 1세는 국가의 모든 기능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여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어갔다. 니콜라이 1세는 정부의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직접 처리하려 했다. 국가평의회나 원로원 등의 도움 없이 황제 직속으로 사설 집행부를 만들어 일을 처리했다.
곧 황제원에 권력이 집중됐다. 황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처리하는 황제원의 단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제3부는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곧 거대한 비밀경찰기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3부의 제1과는 반(反)정부 조직을 감시했고, 제2과는 종교적 이단행위를 감시하고 위조화폐를 단속했다. 제3과는 체류 외국인을 감시하고 해외정보를 수집했으며, 제4과는 농촌과 농민의 동향을 감시했다. 제5과는 문서검열을 담당했다. 니콜라이 1세는 제3부에서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상세히 훑어보고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지시했다.
그와 더불어 반(反)정부 사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당시 갓 피어나던 러시아 문학도 제3부와 정부에 의해 감시를 받아, 개작을 강요받거나 작가가 유형 또는 구금을 당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교육 역시 반동의 깃발 아래 획일적인 통제 하에 놓였다.
1828년에 제정된 규칙에 따라,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다. 그와 더불어 법률학교와 여러 기술전문학교를 세우는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는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의 자녀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대학교육의 강조점도 관료체제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대외정책 면에서도 신성동맹의 정통 이념에 충실했던 니콜라이 1세의 첫째 목표는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책임지는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혁명운동을 진압하고 그 여파가 러시아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그의 지배 아래에 있던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1831년 데이비치 장군이 이끄는 15만 대군을 바르샤바에 보내 무참하게 진압했다.
그러고는 폴란드에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던 자유와 자치권을 빼앗고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렸다. 1832년 5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라는 세 열강국 간의 회의가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이 런던 회의는 그리스에 안정적인 정부를 성립하기 위해 모인 국제 회의였다. 이 협상으로 바이에른 왕자 오톤을 임금으로 세워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1833년에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과 동맹을 맺고 유럽을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와 즉각 외교를 단절하고 40만 대군을 서부 국경으로 집결시켰으나, 유럽 각국의 냉담한 반응에 군대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1849년에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요청해왔고, 니콜라이 1세는 기꺼이 군대를 보내 혁명을 진압하고 합스부르크 가를 위험에서 구출해주었다.
유럽의 혁명을 목도한 니콜라이 1세는 국내에서 억압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경찰통치는 점점 더 독단적으로 변해갔고, 개혁의 방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물론 이견의 표시마저도 금지되었다. 대학교에서도 입학자격과 교과과정이 더욱 개악됐다. 매우 경미한 정치범에게도 시베리아 유형이 떨어졌다. 체제의 충실한 옹호자였던 우바로프 문교부 장관마저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해임됐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강경책은 곧 군부에 대한 의존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정치가 거의 대부분 장군들로 구성된 특사에 의존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적 공백으로 인한 부패와 혼란이 가중되었다.
1853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다뉴브 강 유역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크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압력을 가해 왔다.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러시아가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러시아는 졸지에 유럽과 맞서 싸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러시아 해안에서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1854년 9월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동맹국들은 7만 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패배하였고 군사적 ·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55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실패로 끝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으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자유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껴,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하게된다. 19세기 전반기 농노제와 전제정치가 계속 존속하여 빈곤한 삶에 빠져 있던 러시아 제국에 자유주의 사상이 전파되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을 원정했던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 귀족들 사이에 자유주의 분위기 영향을 받게된 것부터 시작된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청년 귀족들은 1816년부터 구제동맹이라는 결사를 조직하였으나
중간에 사상적 차이로 인하여 공화제를 주장하는 남부결사,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는 북부결사,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슬라브 결사
등으로 분열되었으나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면서 3주 동안 후계 계승 논쟁으로
혼란한 공백기가 이어지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혼란한 기간을 틈타 이를 기회로 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은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1825년 12월 14일에 봉기를 하게 된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제폐지 등 서부 유럽같이 자유주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봉기는 준비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실행 직전에
남부 결사의 지도자였던 파벨 페스텔이 우연한 경위로 체포됨에 따라
사전에 계획이 니콜라이 1세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쉽게 진압되었다. 임시정부의 권력자가 될 예정이던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도망쳤다. 곧이어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의 연대도 역시 쉽게 진압되어 무너졌다.
이어서 니콜라이 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5명이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고, 31명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1879. by Makovsky, Konstantin. oil on canvas. 135,5 x 8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러시아 이동파 화가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 1839-1915)의 작품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Portrait of the palace grenadier M. Kulako, 1915. by Vladimir Alexandrovich Poyarkov oil on canvas. 79,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에르미타시 박물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① 거울궁전 -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 ④ 에르미타시 극장 신(New) 에르미타주시 구(Old)에르미타시의 뒷편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소(Small) 에르미타시만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차츰 컬렉션이 많아지면서 확장되어 지금은 구(Old)에르미타시와 신(New) 에르미타시 뿐만 아니라 겨울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까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고 있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이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힌다. 미술관은 소(Small) 에르미타시, 구(Old)에르미타시, 신(New) 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 극장, 겨울 궁전의 5개 건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고, 120개의 계단이 있다. 현재 본관의 일부인 겨울궁전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궁이다.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궁전 광장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한 것이 에르미타시의 기원이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는 "은둔지"를 의미하는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이름이 주어진 배경에는 에르미타시 초기에 굉장히 한정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기에 왕과 귀족들 간 '은둔자의 집' 이라 불렸던 이력이 있어서 이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 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시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은둔지, 인적 없는 방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시 명칭의 유래이다.
상공에서 본 에르미타주 박물관
① 겨울궁전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④ 신(New) 에르미타시 ⑤ 에르미타시 별관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
에르미타시 박물관 입구
①번 연한 하늘색이 에르미타시 본관인 겨울궁전 입구 ②번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입구이다. ③번은 에르미타시 극장 입구 ④번 위-아래 건물이 소에르미타시 입구, ⑤번 건물이 구(Old) 에르미타시 ⑥번 건물이 신(New) 에르미타시인데 ⑤ ⑥번 신-구 에르미타시를 합쳐 대에르미타시라고 한다. 위에 조금 진한 색이 구에르미타시, 조금 연한 색이 신에르미타시이다. ⑤ ⑥번의 입구는 따로 없고 ①번 ④번과 연결된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小)에르미타시’와 ‘구(舊)에르미타시’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시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新)에르미타시이다.
궁전 광장에서 본 에르미타시 본관 겨울궁전 입구
에르미타시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시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궁전광장은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시(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 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 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며, 볼셰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오니스트 등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인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은 러시아 제국에서 일한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로시 (Carlo di Giovanni Rossi 1775~1849)에 의해 설계되고 182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지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개별 건물을 개선문인 기념비로 통합하려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장엄한 아치는 러시아의 영광과 군사적 승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겨울 궁전의 중앙 부분과 대칭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 매표소
에르미타시 별관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표를 쉽게 살 수 있는데 이 표를 가지고 본관에 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에르미타시 입장권은 별관에서 사는게 좋다.
참모본부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에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에르미타시 박물관(Hermitage)은 1993년 참모본부 동쪽 건물에 19세기 및 20세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는 작업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박물관의 2층에는 상설 전시물인 아르누보 시대 예술품과 황제에게 제공된 희귀한 선물 컬렉션, 한때 러시아 제국 재무부 건물에 있던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입구에 들어서서 2층으로
3층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장식 예술과 의상들, 19세기 프랑스 회화와 조각, 19세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 미술 및 18세기 러시아 근위대 박물관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참모 건물에 거주하던 러시아 제국 외교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다.
2층 출입구에 들어서면 예술품을 전시 관리하는 시설물 모형이 나온다.
참모관 4층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적군에게 점령한 영토에서 압수되었으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은 1995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칸딘스키(Vasiliy Kandinskiy)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을 포함하여 혁명 이전 러시아 미술 컬렉션도 있다.
처음에는 로마노프 왕조가 수집한 예술품들을 겨울 궁전의 별관에 숨겨놓고 전시하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어느새 본관 전체로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넘쳐 흐른 나머지 2013년부터는 궁전 광장 건너편의 구 참모본부 건물을 별관으로 편입하여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별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모형
고려인 사회주의 혁명가 채그리고리의 첫 고국 방문, 경찰에 발각됐으나 비밀결사와 동료는 지켜내
채그리고리의 주검을 세브란스병원에 항구적으로 보존할 목적으로 제작한 철제관.
비밀결사 동료 7명이 둘러싸고 있다. 임경석 제공
국경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 단둥시)에서 평북 신의주로 입국하는 길은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위험했다. 비밀활동을 하는 혁명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조밀한 감시망이 겹겹이 깔려 있었다. 신의주경찰서는 ‘중범자’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손을 꼽는 관서였다. 1928년 한 해 검거한 ‘범죄’ 총수는 3109건이고 그중 중범에 해당하는 건 711건이다. 정치·사상범 사건은 131건에 이르렀다.1 한 달에 평균 10건이 넘었다. 국경을 넘으려던 독립군과 사회주의자가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발각됐는지 보여준다.
1928년 1월11일, 채그리고리는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37살의 러시아 태생 조선인, 즉 고려인이었다. 본명은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채였고, 조선식 이름은 채성룡(蔡成龍)이었다. 국내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박준호라는 가명을 쓸 예정이었다. 2주 전에 중국 베이징을 떠나, 여러 준비를 마치고 입국을 결행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입국하기로 약속한 동료는 세 사람이었다. 다만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따로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졸인 가슴 내려놓은 그 순간
국경을 통과하는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하면 경찰관, 헌병, 세무관리 세 종류 관헌들이 객차마다 올라탔다. 소설가 심훈은 그 양상을, “국경을 지키는 정사복 경관, 육혈포를 걸어멘 헌병이며, 세관의 관리들은 커다란 벌레를 뜯어먹으려고 달려드는 주린 개미 떼처럼 플랫폼에 지쳐 늘어진 객차의 마디마디로 다투어 기어올랐다”2고 썼다. 승객들은 시렁에 올려놓았던 짐짝과 가방을 검사받기 쉽게끔 내려놓고, 속을 열어 보여야 했다.
채그리고리는 안동역과 신의주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기차는 경성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졸이던 가슴을 막 진정하던 차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신의주 다음 정거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대였다. 아마 남시역이거나 차련관역이었을 것이다. 의심받을 만한 빌미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사람인데도 조선말이 서툴다거나, 입국 목적을 자연스럽게 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는 국경의 경계망을 통과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취조가 시작됐다.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오려 하는지, 연루자가 있는지, 있다면 누군지, 집요한 신문이 계속됐다. 사상범 의혹이 있어 조사 과정은 혹독했다. 전국 각지에서 연루자로 의심되는 이들도 삼엄한 취조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경성 숭삼동(명륜동 3가)에 사는 남정석은 “이 사건에 연락관계가 있다 하여 지난 1월16일 엄중한 가택수색을 당하고 신의주서로 잡혀갔는”데, 22일 무사히 방면돼 귀경했다고 한다.3 하지만 경찰의 의도와 달리 사건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런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구금 20일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단독범이었다.
치안 당국 상층부는 못 미더워했다. 사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1인 단독 사건으로 간주하기에는 피의자 신원이 너무 이채롭고 거물급이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사회주의운동의 한 씨앗이 발아할 때부터 거기에 참가한 고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당 고려부 비서, 연해주당 정치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그뿐인가. 문필 능력이 탁월해 이론가라는 지목을 받았다. 총독부는 정예 관리를 투입해 밑뿌리부터 재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그해 2월4일 채그리고리는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호송됐다. 밤 8시40분 경성역에 도착했을 때다. 역두에는 경찰 경계망을 피해 다수의 동료가 몰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잠시나마 보려는 의도였다. 웅성거리는 출영객들의 소란이 호송 중인 피고인에게 위안과 격려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30살의 채그리고리. 임경석 제공
1928년 2월4일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이송 중인 채그리고리(왼쪽). 임경석 제공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채그리고리는 예심을 받아야 했다. 예심이란 피고인의 공판 회부 여부를 심리하기 위해 도입한 일제강점기 형사소송법상 절차인데, 주로 사상범에게 적용된 악명 높은 제도였다. 이 제도 아래서 피고인의 인신을 무기한 구류할 수 있었다. 채그리고리는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계속됐다.
결국 ‘예심 종결서’가 1928년 5월28일자로 채택됐다. 총독부 예심판사는 공판에 회부해야 할 피고인의 ‘범죄행위’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1926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신철·정운해와 모임을 열고 조선의 적화를 위해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와 선전에 노력하기로 협의한 점. 둘째, 그해 10월부터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조선 내지의 사회주의자 마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 내부의 정세를 탐지한 점. 셋째,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다가 체포된 점이었다.4
채그리고리의 진술 전략이 일정한 효과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관되게 비밀결사에 가담한 혐의를 부인했다. 예심 종결서에 동료 이름이 몇몇 거론되지만, 단체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적 관계로 간주했다. 또 다른 진술 전략은 합법 운동론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신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는 합법 사상단체에 참여해 경찰 당국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운동하려 했노라고 주장했다. 재외국 조선인의 입장도 적극 내세웠다. 자신은 러시아 동포 3세로서 조선에 대한 향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국인데 일찍이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으므로, 이번 기회에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채그리고리는 이런 논리를 경찰, 검찰, 예심 취조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다. 공판 법정에서도 동일한 진술 전략을 택했다. 결국 채그리고리는 단독범으로 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을 피하진 못했으나 비밀결사의 존재와 그에 속한 동료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중형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
조선 사회주의 좌경화의 선도자
채그리고리는 비주류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다. 1926년 3월 결정서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이뤄진 뒤, 당외에 남아 있던 두 공산그룹이 독자 노선을 표방하면서 통합을 결의했다. 북풍파와 노동당(일명 국민의회파) 공산그룹이다. 이들은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베이징에 두었다. 채그리고리는 이 당외 통합그룹의 중앙위원회 멤버였다. 아마 책임비서였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좌경화를 선도했다. 1927년 초겨울, 북·노 통합그룹의 중앙간부들은 일련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국내외 운동 정세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였다. 국제적으로는 중국 국공 합작의 파탄, 코민테른 중국 정책의 좌선회, 중국 공산당 내 급진적인 취추바이(구추백) 노선 정립 등에 주목했다.
국내 운동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분열해 이른바 서상파와 엠엘파가 분립하게 된 것이다. 북·노 통합그룹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을 바로잡을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를 위해 베이징의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국내로 옮기기로 했다. 채그리고리를 비롯해 정운해, 신철, 마명 등이 국내로 입국하려 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신정책을 발표하여 노선 전환을 도모했다. 1928년 1월21일 경성청년회 명의로 ‘모든 수정파들의 기회주의적 연합전선을 공박함’이라는 긴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호응해 경북 상주청년동맹, 함남 영흥청년동맹, 경기도 안성청년회 등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서 급진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0년 4월19일 채그리고리가 사망했다. 경성역 맞은편 세브란스병원 제5호 입원실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사인은 폐병이었다. 3월29일 형기를 마치고 감옥 문을 나서던 때부터 그는 심하게 앓고 있었다. 자유를 잃은 지 2년2개월 남짓, 건강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유치장과 감옥에서 어떤 처우를 받았기에 유명을 달리할 만큼 심각한 건강 손상이 있었을까.
숨을 거두기 하루 전, 채그리고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상 연구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내일 오실 수 있는 분은 모두 모여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해 혁명사업을 도모했을 동지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밤새 병세가 급속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병실이 마치 감옥 같다는 느낌이 든다, 포근한 조선식 온돌방에 눕고 싶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유해를 연구재료로 쓰라”
러시아 연해주에는 아내와 함께 자녀 7남매가 있었다. 그중 맏딸은 20살 성년이었고, 막내아들은 아직 7살이라 했다. 고국에는 한 사람의 친척도 없었다. 채그리고리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준비했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신간회 본부가 장의위원회를 맡기로 했다.
4월22일 그의 영결식이 있는 날, 폭우가 쏟아졌다.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300명이 운집한 속에 영결식이 진행됐다. 일본 경찰은 채그리고리의 장례식이 무사히 치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약력을 소개하는 도중, 임석 경관은 발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집회 중지를 명령했다.
채그리고리의 유해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해부학 실습에 사용됐다. 의전 학생들의 학습 교재로 그의 인체 표본이 오래 활용됐다고 한다. 고인의 뜻이 제대로 실현됐다. 사후 1주기가 됐을 때 그의 동지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채로운 추도회를 열었다. 강철로 관을 만들어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로 했다. 병원 내에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몇백 년이라도 보존될 것을 생각하니 매우 기쁘다고, 제작에 참여한 동료 신철은 토로했다.
당시 사진이 남아 있다. 등신대(사람 크기)의 철제관이 세워졌고, 청년 7명이 이를 둘러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채그리고리와 비밀결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이라고 생각된다. 철제관 머리쪽에 혁명을 상징하는 별이 양각돼 있다.5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치.
2. 심훈, ‘동방의 애인(1)’,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3. ‘체포된 蔡某(채모)는 공산대학 교수’, <동아일보> 1928년 1월25일치.
4. ‘예심 종결서’, 경성지방법원, 쇼와 3년 5월28일.
5. ‘月餘(월여) 두고 鐵棺(철관) 제작, 동지 유골을 안치’, <조선일보> 1931년 4월19일치.
대궁전 동쪽 입구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공원으로 향한다.
아랫공원(Lower Park) 출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바라보이는 공원 풍경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공원(Lower Park)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박물관 ⑪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말리궁전,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
페테르고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이곳은 표트르 대제가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승리하여 핀란드만을 통해 발틱해로 나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린것을 기념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의 구도로 1714년 공사를 시작하여 1723년 8월 15일 대궁전, 대폭포, 몬플레지르 궁전 등을 완성하고 이미 이때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기초가 다져졌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북방 전쟁 (Great Northern War, 서기 1700 - 1721년)에서 러시아와 스웨덴은 발트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싸웠다. 1709년에 폴토바(Poltova)에서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 군대를 무찔렀고, 스웨덴의 칼 12세는(Charles XII) 오토만 제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어서 표트르의 해군은 1714년에 항코(Hanko)에서 스웨덴과의 해전에 이겼다.
이렇게 발틱해에 거점을 잡고 나서, 표트르 대제는 건축가와 기사들을 모아서, 해안가에 몽프라시르(Monplasir)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여기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오가는 길에 쓰려고 지은 여름 궁전이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717년에 베르사이 궁전을 (Chateau de Versailles) 방문한 뒤에, 표트르 대제는 이에 못지 않은 궁전을 계획하였고, 1721년에 완공하였다. 물론 나중에 여러 가지가 더 첨가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를 짓고서 러시아는 발틱해에 항구를 가지게 되었고, 표트르 대제는 이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페테르고프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태리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가 궁전을 설계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각 분수들의 물 공급을 위하여 1720~1721년 러시아의 수리학 기술자 바실리 뚜볼코프가 네덜란드와 프랑스로부터 배운 기술로 그의 지휘 아래 자연 저수지에서 윗정원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16m 경사진 아랫공원을 파이프와 관을 통해 분수의 물을 공급하고, 1721년 여름 아랫공원의 작은 운하와 갑문을 건설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곳에 물을 공급하고, 분수를 작동하기 위하여 수압에 의한 설비와 펌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벌써 18세기 초에 발달된 러시아의 수리 기술을 이곳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독일군은 페테르고프 궁을 본부로 삼았고 떠날 때 보복으로 대궁전 등을 불태우는 등 모두 파괴하였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Perseus)
페르세우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다양한 괴물을 처치하는데
메두사를 살해하고, 바다 괴물이자 바다의 여신인 케토 또는 수염고래를 죽이고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1947년에 주로 자원자들이 동원되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국민이 아끼는 황제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처음에는 이름을 독일식으로 페트로고프(Peterhof)로 지었으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이 궁전을 대체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2차 대전 이후에 페트로보렛츠(페테르 궁전)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 때는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 3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여름궁전 본관 건물과 주변의 크고 작은 20여 개의 별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유산이지만 정작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조성된 2개의 공원에 조성된 144개의 분수대들이다. 분수대 건립 당시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분수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름 궁전의 대분수(Grand Cascade of Peterhof)
대궁전과 핀란드 만 사이에는 대폭포와 해양 운하가 놓여 있다. 표토르 대제가 처음 만든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뒤를 이은 황제들이 제각각 하부 공원에 덧붙인 폭포와 분수는 물을 사용하여 즐길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분수대 전후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삼손 분수대 외에 우산분수나 아담분수, 이브분수, 피라미드 분수 등이 유명하다. 이 황금분수대에는 여름궁전 내 분수 144개 중 절반이 조금 안 되는 64개의 분수가 집중되어 있다.
여름 궁전 뒷편에 위치한 분수공원의 황금 분수대는 7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폭포와 어우러져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러시아 관광지를 소개하는 자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황금분수대가 바로 이곳이다.
분수의 백미인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분수공원의 핵심이 되는 연못에는 삼손이 사자의 입을 찢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황금색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자의 입에서는 20m 높이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보통의 분수는 펌프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윗공원으로부터 배수관으로 이어지는 물의 자연적 흐름을 통해 분수가 작동하게 만든 당시의 기술은 놀라운 일이다.
크고 작은 분수에서 나온 물은 반원의 호수에 모여서 수로를 따라 핀란드 만으로 흘러나간다.
삼손과 사자 분수(Samson and Lion Fountain)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전사 삼손이 사자와 싸우는 동상의 분수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메인 분수다.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승전 25주년 때 만들었다.
스웨덴 왕의 문장에 사자가 있어 삼손과 사자는 각각 러시아와 스웨덴을 상징하고 있다. 삼손상은 러시아의 조각가 미카일 코즐로브스크(Mikhail Kozlovsky)가
제작했으며 높이 3.3m 무게 5톤, 금박이 입힌 사자입에서 물이 20m나 뿜어져 나온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인증샷
페테르고프의 가장 큰 기술적 성과는 모든 분수가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은 천연 온천에서 공급되며 윗정원의 저수지에 모인다. 고도 차이는 그랜드 캐스케이드를 포함하여 아랫공원 대부분의 분수를 움직이는 압력을 생성한다. 삼손 분수는 길이가 4km (2.5 마일)가 넘는 특수 수로로 공급되며 고지대에서 물과 압력을 끌어온다.
핀란드 만으로 향하는 수로
수로 끝에 보이는 바다는 발트해와 연결된 핀란드 만으로 예전에는 여름궁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황금분수대와 인공폭포의 수로는 수로를 통해 핀란드 만과도 연결되어 있다. 핀란드 만에서 궁전 뒷편 분수대까지 수로를 따라 작은 배가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는 러시아 황제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1945년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 중인 복원 공사는 상당히 특별하다. 1709년 이미 이 지역의 잠재적 가능성을 알아본 표토르 대제는 1715년부터 1724년에 걸쳐 이곳에 장-바티스트 알렉상드르 르 블롱과 니콜로 미케티가 설계한 2층짜리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의 일부는 현재의 대궁전의 심장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대궁전은 3층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황후를 위해 바르톨로메오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긴 날개가 더해진 모습이다.
페테르고프의 그랜드 캐스케이드(Grand Cascade of Peterhof)
페테르고프(Peterhof)는 넓고 다양하다. 20개가 넘는 궁전과 파빌리온이 핀란드 만을 따라 뻗은 드넓은 정원에 흩어져 있다. 왕궁은 이전에는 귀족들의 궁전과 교외 별장의 언저리와 담을 맞대고 있었지만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고, 그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공식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바로크 풍의 파빌리온은 르 블롱 등의 작품으로 1714년부터 1726년에 걸쳐 지어졌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은 동쪽에 위치한 스트렐나의 콘스탄틴 궁전 (1797~1807년, 안드레이 보로니킨 작)과 별장 궁전(1826~1829년, 아담 메넬라프 작), 서쪽에 있는 로모노소프의 중국 궁전(1762~1768년, 안토니오 리날디 작)이다.
체스 산 분수(Dragons’ Cascade or Chess Mountain Fountain)
동쪽에 있는 체스 산 분수는 서양 장기판을 뜻하는 체스 바탕에 입구에는 날개가 달린 세 마리 용이 이를 드러내면서 물을 뿜고 있기 때문에 용 분수라고도 한다. 물은 흰색 검정색의 체스 판 무늬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폭포 양편에는 이태리에서 만든 대리석상을 세워 놓았다.
체스 산 분수 상단에 있는 작은 드래곤들 입에서 물이 나온다.
골든 산 분수(Golden Mountain Cascade)
서쪽에 있는 골든 산 분수는 22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양 받침대에는 그리스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중앙 상부에는 손에 삼지창을 든 로마 바다의 신이 있고 왼쪽에는 그리스의 반은 인간 반은 바다고기인 해신이 자신의 상징물인 소라고둥을 불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주(酒)신 바커스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있고 계단 아래 연못에는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계단 좌측에는 안드로메다 공주상이 있는데 엄마를 잘못 둔 죄로 제물로 바쳐질 뻔 했다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구출되어 결국엔 페르세우스와 결혼하게되는 에티오피아의 공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보기드문 해피엔딩 인물이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2개
체스 산 분수 아래에는 두 개의 로마분수가 있는데 처음에 이 분수는 나무로 만들었다가 18세기 말에 대리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분수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두 단으로 된 분수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 분수(Roma Fountain)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이탈리얀스키(Ital'yanskiy) 분수
고래 분수(Whale Fountain)
다네이드 분수 (Danaid fountain)
태양분수(Sun Fountain)
기둥 위에 달려 있는 둥근 형태의 원반에서 물이 분출되면서 수직형의 원반이 회전하는데 이 모양이 태양을 나타난다고 한다. 1721-1729에 미케치(Michetti)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독일 나치에 파손된 것을 1957년에 원래대로 복구했다고 한다.
태양분수(Sun Fountain)
버섯 분수(Mushroom Fountain)
비 오늘날 우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버섯의 깔때기 가장자리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이 물방울을 맞으면서 버섯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피라미드 분수(pyramid Fountain)
분수 밑받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세단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은 오벨리스크처럼 보이고 있다. 500개의 구멍에서 일곱 개의 계단으로 물이 뿜어 나오고 있다.
이브 분수 (Eva fountain)
이브 분수 (Eva fountain)
아담(Adam) 분수
분수를 장식한 조각품은 베니스 총독의 궁전을 장식했던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zzi)의 유명한 작품을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가 침입 했을 때 나치들이 정원에 묻었는데 분수를 다시 발견하여 1948년에 원래 형태로 복원 되었다고 한다.
아담(Adam) 분수
매니저 분수 (Menager fountains)
트리톤 벨 분수 (fountains Tritons-bells)
트리톤(Triton) 분수
바다 괴물의 턱과 씨름하는 트리톤을 묘사한 Oranzhereiny 분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며 반은 인간 반은 물고기인 트리톤(Triton)이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모습. 트리톤과 악어, 거북이 등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바다 괴물의 입을 찢는 트리톤(Triton) 분수
파르테논 분수
파르테논 분수 정면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울 분수(Bowl fountains)를 배경으로 인증샷
요술 분수
요술 분수는 사람이 없으면 물이 나오지 않고 벤치에 앉거나 사람이 벤치 앞을 지나가면 물이 위로 솟아 오올라 분수 벼락을 맞도록 되어 있다.
앗 ~ 깜짝이야 ~~ ! ! 요술 분수
나무와 꽃 분수
요술 분수 앞에 꽃과 나무 가지에 분수를 설치했는데 장미와 튤립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도록 만들어져 마치 사람들을 요술 분수 앞으로 유인하는 듯하다.
크래커 분수 "벤치" (Cracker fountains "Benches")
곡물의 단 분수(The Sheaf Fountain)
이 분수는 몽플레지르 궁전 앞에 있는 분수로 두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물을 뿜고 있는 형태여서 곡물 단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723년에 설치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파손된 것을 1952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뒤에 붉은색 지붕 건물은 표트르 대제가 가장 많이 이용했다는 몽플레지르 궁전(Monplaisir Palace)이며 궁전 앞은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과 정원 공중에서 보기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은 핀란드 만을 바라보는 아랫정원 동쪽에 세워져 있다. 커다랗고 경사진 지붕이 특징인 1층 건물의 가운데는 유리로 커버된 회랑 두 개가 접해 있어서 회랑을 따라 거닐면서 바다와 공원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다고 한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많이 애용하고 이용했던 여름 별궁으로 여름궁전 내 소궁전이다. 몽플레지르궁은 현재는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1714년에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몽플레지르 궁 (Monplaisir Palace, 프랑스어로 "my delight") 건축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이 궁은 표트르 대제가 크론스타트(Kronstadt)의 항구를 통해 유럽을 오가는 도중에 사용할 여름 휴양지였다. 이 해안 궁전의 벽에는 표트르 대제가 유럽에서 가져온 수백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전 (Monplaisir palace) 정원
몽플레지르 궁(Monplaisir palace) 내부
1714~25년에 장 바티스트 레블론 등이 지은 이 건물에는 표트르 대제가 수집한 서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다.
옻칠의 방 (Lacquer Study)
접견실 (Green Reception Room)
알랙산더 침실
황제전용 목욕실 (Bath Building)
알현실 (Audience hall)
다이븐 룸 (The Divan Room) - 두꺼운 받침대와 매트리스로 된 침대가 있는 방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내부
공중에서 본 말리 궁전 (Marly Palace) 전경. 말리궁전은 정원에 둘러쌓인 조용한 곳으로 1725년 표토르 대제가 은퇴 후 머무른 곳이다.
말리궁전 배치도 (Axonometrc projection of the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말리 궁전 (Marly Palace)
에이비에리(Aviaries) 파빌리온 새장이란 뜻의 에이비에리(Aviaries)는 나무로 만든 파빌리온이다.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정원은 도심에서 30km 떨어진 페테르고프에 위치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 버스 또는 수중익선을 타면 궁전에 도달할 수 있다. 분수, 소규모 폭포, 정원으로 유명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아랫공원 상공에서 본 조감도
1705년, 표트르 대제의 지시로 여름 휴양을 위한 궁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1710년부터 정원(공원)을 가꿨고, 1714~25년에는 건축가 요한 브라운슈타인 등이 윗정원과 같은 높이에 바로크 건축 양식을 띤 네덜란드풍의 2층 건물로 황제의 여름 관저를 건립했다.
이때부터 페테르고프 궁전은 대궁전과 공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여름궁전이 되었다. 그러나 1745~55년에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대궁전을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 라고 불리는 페테르고프는 황제의 가족들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이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궁전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폭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에
의해 건립된 마를리궁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소규모 폭포 안에는 삼손 조각상과 64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궁전 하단부에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원 양식을 본뜬 정원이 들어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지구의 일부를 형성한다.
페테르고프 궁전과 정원 경내에는 다양한 궁전 및 분수가 있고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러시아의 베르사유'로 알려진 이곳에는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존재하고 있다. 경내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과거 러시아 군주의 생활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바로크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궁전의 웅장한 노란색과 흰색 파사드는 내부 장식에 의해 실제로 가려진 느낌이 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지만 나중에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대학살 이후 완벽하게 재현된 대궁전 경내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벽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이 붙어 있고 금박이 벗겨진 침실은 찾아볼 수 없다. 왕족들은 활기가 넘치는 공식 알현실과 거실에 앉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가구와 벽화에 에워싸여 편안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페테르고프의 분수대는 그 자체가 관광명소다. 5월에 오픈 행사가 시작되고 음악 공연과 불꽃놀이 등 하루 종일 축제가 열린다. 녹음이 우거진 윗정원의 격자 울타리를 따라 거닐어 보거나 아랫정원에 흩어져 있는 완벽한 하얀색 조각상들을 둘러볼만 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과 공원 지도
여름궁전이라고도 불리는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은 대궁전을 사이에 두고 윗정원(Upper Garden)과 아랫정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정원을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이유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총 면적은 1000핵타르, 두 공원에는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공원, 가로수 길, 박물관, 작은 궁전이 있고 볼거리는 주로 아랫정원에 있다.
① 말리 궁전(Marly Palace) ② 에르미타지 오두막 ③ 황제 요트박물관 (Imperial Yachts Museum) ④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⑤ 삼손분수 ⑥ 대궁전 ⑦ 윗정원 ⑧ 학교 ⑨ 아랫공원 출입구 ⑩ Peterhof, State Museum-Reserve ⑪ Fountain-cracker Dubok 나무분수 ⑪ 태양분수(Fountain Sun) ⑫ "벤치" 분수 (Cracker fountains "Benches") ⑬ 몬플레지르 궁전
⑭ 몬플레지르 궁 내부 황제전용 목욕실(Bath Building)
윗정원은 넵툰분수, 멍청이분수,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아랫정원은 좌우 대칭으로 만들어 졌는데, 가운데 - 대분수, 삼손분수, 핀란드만 대궁전에서 오른쪽 정원 : 몬쁠레지르 궁전, 체스분수, 피라미드분수, 로마분수, 우산분수, 아담분수, 트리분수, 온실분수. 그외 많은 분수, 표트르대제 동상 대궁전에서 왼쪽 정원 : 에르미타쥐오두막, 마를리박물관, 이브분수, 황금산 폭포 등등이 있다.
페테르고프 궁전 앞문(Paradnyye Vorota, Front Gate)
지금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쓰이는 겨울궁전에 대비해
러시아 제국 황제가 여름에 지내던 궁전으로, 궁전에서 바로 핀란드 만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분수의 궁전', '러시아 분수들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분수가 가득한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페테르고프 궁전 윗정원(Upper Garden)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국립 에르미타지 박물관 말고 또 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궁전들이 근교도시에 자리들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름궁전이다. 이 대궁전은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 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 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에르미타지 박물관 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 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었다.
메제움니 (Mezheumny) 분수
물고기 형태의 황금 신화 생물이 있는 메제움니 분수(Mezheumny Fountain) 윗공원의 연못에서 가운데 금잉어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금잉어가 물을 뿜어대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매일 11시 정각부터 물을 뿜는 분수들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른 수압을 이용하여 무동력으로 물이 뿜어지게 만들었으며 분수와 어울어지는 조각상의 균형감 있는 배치들로 해서 이 정원은 18세기 초 유럽 정원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각상들은 대부분 로마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윗정원의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 바다의 신인 넵튠(Neptune) 동상이 오른손에 삼지창을 들고 서 있다.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으로 유피테르와 플루톤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투르누스와 옵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과 거의 비슷한 신이지만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넵투누스(Neptunus)의 개념은 많은 부분 에트루리아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 조각상
넵튠 동상 아래에는 좀 더 작은 크기로 말을 탄 기사, 창을 든 전사, 물고기를 탄 아기들 모습의 동상이 넵튠을 호위하고 있다. 이들 말과 물고기의 입에서는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넵툰 (Neptune) 조각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넵투누스(Neptunus)는 바다의 신으로 바다와 강, 호수, 조그만 샘에 이르기까지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친 머리칼과 턱수염을 한 건장한 모습에 언제나 세 개의 뾰족한 끝이 달린 창을 세워 든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단체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넵툰 분수(Neptune Fountain)에서 인증샷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숲 터널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윗정원(Upper Garden) 조경
오크(Oak-tree) 분수
오크 (Oak-tree 떡갈나무) 분수는 1734년 조각가 P. Sual이 만들었으며 1746년에 납 참나무가 제거되었고, 1802년에는 아랫공원으로 옮겨졌지만 "Oak"이라는 이름이 이전 분수에 남아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분수대의 역사는 끝없는 재건과 개조로 오늘날 구체화되었으며 1929에 마침내 구성적으로 완성되었다.
오크(Oak-tree) 분수
오크 분수는 우아함과 조화로 관광객들에게 계속 주목받고 있다. 분수의 건축 파노라마는 화강암 바닥이 어둡고 밝은 색조의 석판으로 늘어선 둥근 수영장이며, 중앙에는 불가사리 모양의 응회암 슬라이드가 있다.
"Oak" 분수의 수영장 한가운데 응회암 언덕에 조각가 D. Rossi가 1809년에 만든 연극 마스크를 쓰고 있는 큐피드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오크(Oak-tree) 분수에서 인증샷
단체 인증샷
인증샷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의 측면 날개 맞은 편에는
대칭으로 위치한 두 개의 광장 연못이 있다. 이 연못들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으며
아랫정원의 분수 시스템을 위한 저수지로 사용되었다. 처음에 연못은 기술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 연못에 별도의 분수가 세워졌다.
웨스턴 스퀘어 폰즈 분수(Western Square Ponds Fountain)
서쪽 연못은 "다이아나의 나무 아래 목욕"이라는 구성으로 장식되었다. 사냥의 여신은 다섯 마리의 어린 님프, 개, 돌고래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동부 연못의 중앙에는 젊은 신 아폴로(Apollo)의 형상이 있다. 분수대는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두 조각은 6 개의 동일한 청동 돌고래로 둘러싸여 있다. 금박을 입힌 바다 동물의 입에서 강력한 아크 제트물이 분출한다.
아폴로 분수 (Apollo fountain)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전면
정원에 들어서면 잘 조경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빽빽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빠져나가면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훤히 드러난다. 북쪽으로는 연한 갈색의 벽에 푸른빛이 약간 감도는 흰색지붕, 그 위로 황금색의 탑이 찬란한 로코코 양식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 전면에서 인증샷
페테르고프 대궁전(Peterhof Grand Palace) - 여름궁전
궁전의 내부는 라스트렐리의 바로크 양식과, 유리 펠텐 등이 예카테리나 대제를 위해 새로이 장식한 방들의 보다 차분한 신고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작은 오두막에서 이주해 와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고 한다. 1층은 표트르 대제의 방이고 2층에는 예카테리나 1세의 방이 있었는데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alace)은 표토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름 궁전(Peterhof Summer Palace)''이라고 불린다. 표트르 대제가 베르사유 궁전을 염두해 두고 조성한 궁전으로
'러시아의 베르사이유' 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궁전은 길이 300m의 2층 건물로 1714년에 건조되고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착공된 이래 9년이 지난 후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0년이나 지난 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 러시아와 유럽 최고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되어,
20여 개의 궁전과 140개의 화려한 분수, 7개의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여름궁전 1층에는 표트르 대제의 응접실과 서재,
침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왕실 대대로 내려오는 가구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핀란드만에서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이 조성되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 중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다. 총면적 1000ha의 부지에는 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 공원, 가로수 길, 대궁전을 포함하여 20개의 궁전건물이 서 있다.
러시아 황제 문장인 쌍두 독수리상이 있는 표트르 궁전 꼭대기의 장식
쌍두 독수리 문장은 27m 높이에 설치했는데 특수 장치로 인해 풍향계처럼 돌아간다. 이 독수리는 머리가 세 개로 되어지만 보는 각도에서는 머리 두 개만 보이도록 되어 있다.
대궁전의 교회 건물 (Church Building of the Grand Palace)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탑을 가진 여름궁전 동쪽 입구의 성당 (Church Of Grand Peterhof)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아랫정원으로 향한다.
[영상] 페테르고프 궁전(Peterhof Palace)과 윗정원(Upper garden)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 출입구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은 중요한 행사와 축하 행사, 리셉션, 무도회 및 가장 무도회를 주최하는 러시아 차르의 주요 의식 거주지였다. 이 기념비적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약 30 개의 방이 있다.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 사진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인 첫 번째 방을 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 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연회실을 지나면서 건물 2층은 아랫공원 부분과 윗정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아랫공원 쪽은 거울방, 모델방, 황금의방, 침실, 황제와 황족들의 전용 하얀식당, 중국의 방 등 주로 여황제들이 사용하였다는 방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우측으로 돌면서 윗정원 부분은 표트르 대제의 침실, 표트르 대제의 집무실 등으로 나뉘어진다. 윗정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한 영국식으로, 아랫공원은 대분수(삼손분수), 장난분수, 요술분수 등 많은 분수와 바다까지의 작은 수로 등 프랑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 도시는 표트르 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대조국전쟁(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들의 보복으로 대궁전 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 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실내 관람을 위해서 신발 겉에 신어야 하는 덧버선 바구니
실내 관람을 위해서는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황금으로 치장한 대궁전의 화려한 그랜드 계단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대부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Winter Palace, Hermitage Museum) 건축가인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디자인되어서 스타일은 비슷하다.
대궁전 입구는 건물의 서쪽 부분에 배치되었고
1751년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황금으로
치장하여 만든 화려한 그랜드 계단이 나온다.
현재 페테르고프 대궁전은 러시아 통치자의 그림과 도자기,
직물, 독특한 가구 및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약 350 점의
전시물을 포함하는 독특한 역사 및 예술 박물관이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18 세기에 댄스홀은 머천트 홀로 알려졌고 270평방 미터로 넓은 면적은 대궁전 서쪽 절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창문이 2단으로 배열되어 있고 수많은 거울과 그림이 장식으로 사용된다. 전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제는 건축가 라스트렐리(Rastrelli)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금을 방 디자인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대궁전 무도실(Ballroom) 인증샷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체스마(Chesma) 홀은 관리들이 리셉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왕좌의 방 앞에 위치한 대기실이다. 독일 출신 화가 제이콥 필립 해커트(Jacob Philipp Hackert 1737~1807)가 그린
12점의 작품이 홀의 주요 장식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들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체스마(Chesma) 전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였다.
대궁전 체스마 홀(Chesma Hall)
재미있는 사실은 체스마(Chesma) 전투의 그림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카테리나 여제 (Catherine II)는 이탈리아 리보르노 항구에서 호위함을 폭파하여 해전을 본 적이 없는 예술가가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북쪽과 서쪽 벽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세 개의 빈 벽을 따라두 줄로 배열된 12 개의 유화를 비춘다. 해커트(Hackaert)가 그린 이 대형 캔버스는 1769년에서 1773년 사이에 지중해, 에게해 및 아드리아 해에서 러시아 함대가 수행한 전투에 대한 일종의 그림 기록이다. 자세한 내용이 담긴 전투 차트, 사건을 목격한 옛 선원의 회상, 해커트(Hackaert)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괴테(Goethe)는 이러한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왕좌의 방은 군주가 공식 행사를 '위엄 있게' 주재하고, 의회를 개최하고, 청중에게 경의를 표하고, 높은 영예와 직책을 수여하고, 기타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장소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러시아의 차르가 사용하는 페테르고프 대궁전(Grand Peterhof Palace)의 단과 왕좌는 백말을 탄 캐서린 2 세의 큰 그림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에는 또한 수많은 유화와 11개의 샹들리에가 있다.
대궁전 왕좌의 방 (Throne Room)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는 1730 ~ 1740년
러시아 제국의 여제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했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 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했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했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했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로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옐리자베타는 모스크바 근처의 콜로멘스코예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출생년도인
1709년 보다 나중인 1712년에야 공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위 권리는 정적들로부터 도전받을 소지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황실 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3대 황제 표트르 2세와 4대 황제 안나의 통치 기간 동안은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오스트리아 제국 · 반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녀는 이전 황제들이 채택했던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아버지 표트르 1세가 만들었던 원로원을 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조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의 재위 기간은 표트르 1세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의 복귀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원로원의 부활은 명목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총신들이 다스렸으며, 아버지 표트르 1세의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됐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정치에 주력하기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다.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대학교와 예술 아카테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으로 겨울 궁전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아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정 상태는 악화되었고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알렉세이 베스투제프 류민의 지도로 러시아는 친오스트리아 · 반프로이센 외교 정책을 강력히 고수했고, 1741년에 러시아의 제위 계승과 관련된 내분을 틈타,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맞서싸워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관계를 개선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대항해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인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서거하여 제위는 그의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친프로이센으로의 정책 전환으로 프로이센은 겨우 위기를 모면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황후
옐리자베타는 살아 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많은 남성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평생동안 상복만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옐리자베타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즉위식 다음 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 공을 러시아로 불려서 황위 계승자로 책봉했으나 사이가 나빴다.
울리히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옐리자베타 여제가 표트르 3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고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던 중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가 약혼자로 결정되었다.
훗날 캐서린 여제가 되는 소피아는 1744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소피아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 폐기하여 연대기 작가들의 애를 태웠던 차리나 옐리자베타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한 <회상록>까지 남겨 후대의 작가들을 위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프로이센식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그의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 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 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브릴리언트 말을 타고 황후 캐서린 II, 1762. by Virgilius Eriksen. Grand Peterhof Palace.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비길리우스 에릭센(Vigilius Eriksen, 1722~ 1782)은 1757년부터 1772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예카테리나 2세 황제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을 소재로 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덴마크로 귀환한 이후에는 왕실 전속 화가로 근무하면서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을 포함한 덴마크의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의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고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카잔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남편을 폐위하고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표트르 3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당했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살해를 명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일반 대중들은 예카테리나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1762년 9월 차르의 고도(古都)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여제의 34년 통치시대가 개막되었다.
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 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 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 · 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 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 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 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 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 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도
술에 관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였다. 리가는 소련에서 독립한 발틱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현재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건강이 나빠진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가에서 나는 약주를 마셨는 데 마신 지 얼마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로 여제를 살린 술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프랑스의 드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인데 '블랙 리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세기 중반에 리가의 한 약사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보드카에 25 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45도의 독한 술인데 자세한 성분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이 술은 여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감기 치료 효과와 건위(健胃, 위를 튼튼하게 함) 작용이 있는데 이름처럼 짙은 검은빛이다.
명실공히 라트비아의 국민주인 리가 블랙 발삼은 국제적인 주류 품평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기 때문에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왕좌의 방 (Throne Room) 중앙 왕좌를 배경으로 인증샷
예카테리나 여제의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모순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이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 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 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궁전 초상화 홀
이 방의 벽은 유명한 러시아인과 표트르 대제의 친구 및 친척의 그림으로 덮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 곳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조심스럽게 잘 복구되어 보존되고 있다. 대궁전의 내부는 왕좌실, 서재, 중국식 로비, 흰색 식당, 초상화 홀의
다섯 부분으로구성되었으며, 내부 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
대궁전 초상화 홀 대궁전 전체 초상화의 갯수가 370개가 넘는다고 한다.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대형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흰색 식당은 축제식 사용으로 원래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했다. 그 후 1774 ~ 1775년에 독일계 건축가 유리 펠텐(Yuri Felten 1730~1801)은 예카테리나 여제(캐서린 대제)의 주문으로 홀을 크게 바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정원의 주철 난간 건축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유리 펠텐의 새로운 스타일은 이전 라스트렐리 스타일과 완전히 반대였다. 금빛의 광택 대신 내부는 엄격한 고전적인 대포로 장식되었다. 방 중앙에는 유명한 영국의 거장이자 도자기 산업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가 만든 흰색 식탁보와 30인용 도자기 세트로 덮인 거대한 테이블이 있다.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흰색 식당 임페리얼 다이닝 룸
대궁전 중국식 왕족 거실
대궁전 탈의실
대궁전 '하프가 있는 방'의 바로크 양식 인테리어 (왕족들의 휴게실)
대궁전 표트르 대제의 오크 연구
대궁전의 푸른색 드로잉 룸
대궁전 브레이크 프론트(Breakfront) 찬장 및 세라믹 스토브
이 세라믹 스토브는 제국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페테르고프(Peterhof) 대궁전뿐만 아니라 캐서린 궁전(Catherine Palace), 심지어 우글리치(Uglich) 궁전과 같은 많은 웅장한 궁전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