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3년 뒤 돌아올게”했던 남편이 해방 뒤 주검으로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아들 김찬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으로 세 차례 옥고,
젊은 아내 손응교에게 약속 뒤 중국 망명길 오르지만

 

‘왜관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직후의 김찬기 모습.

때는 1941년 2월로 추정. 고향 후배인 이명동 사진작가가 찍었다. 김주 제공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네 애비는 꿈이나 생시, 먹을 때나 쉴 때 언제고 오직 네가 무사히 돌아올 것만 축수하고 있다. 9월 그믐께 네 처가 편지로 예심에 회부되었다고 전해주더니, 어제는 다시금 네 병이 위독하다고 알렸더구나.”1

 

61살 김창숙이 감옥에 갇힌 아들 김찬기에게 쓴 편지의 일절이다. 아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났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었다. 큰아들 김환기가 19살 젊은 나이에 일본 경찰의 고문 탓에 저세상으로 간 뒤 맏이 노릇을 하는 아이였다. 큰아들을 옥중에서 잃었는데 성년이 된 둘째마저 감옥살이를 하다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맏이 노릇 하던 둘째마저 감옥살이

 

찬기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까닭은 비밀결사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왜관 사건’이라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관련된 혐의였다. 경상북도 왜관경찰서가 수사를 주관했으므로 그렇게 지칭된 이 사건은, 1938년 일어난 3대 사상사건의 하나로 꼽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관련자 기준으로 보아 제2차 혜산 사건, 원산 사건에 뒤이은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대구·경성·도쿄 등지를 무대로 하는 광역 조직을 꾀했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 유학생운동, 노동자문화운동 등을 포함해 다각적인 활동 양상을 보였다.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노선상으로도 전환점 같은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민족주의 적대 정책을 버리고 항일투쟁을 위해 상호 연대를 꾀하는 ‘인민전선 전술’을 실행에 옮겼다. 사회주의운동의 물꼬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2

 

2년 전이란 어느 시점인가. 1938년 2월이다. 그달 19일,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검거가 시작됐다. 김찬기는 사건 초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서점 운영을 생업으로 삼던 그는 대구경찰서에 연행됐고, 머잖아 왜관경찰서를 거쳐 김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의 서점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감옥 밖의 아버지 김창숙도 자유롭지 않았다. 14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년 만에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엄중한 감시하에 출옥한 상황이었다. 몸이 아주 쇠약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급성 맹장염, 신경쇠약, 치질 등 갖가지 병에 시달렸다. 심지어 대소변을 받아낼 사람이 있어야 했다. 사상범 처우에 극도로 인색한 조선총독부가 형 집행정지를 승인할 정도였다. 이즈음 그의 처소는 경상북도 울산 도심에 가까운 사찰 백양사였다. 1936년 3월 구석진 방을 하나 구해 4년간이나 정양하고 있었다. 그곳에 자리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파리장서 사건과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 운동의 동지이자 사돈 사이인 유학자 손후익이 울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서로 의지할 만했다. ‘찬기의 처’가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며느리 손응교다. 17살 되던 1933년, 세 살 연상의 신랑 김찬기와 결혼한 새댁이었다. 울산 동지 손후익의 둘째 딸이다. 남편이 투옥된 1938년 5월 초순, 첫 손자 ‘김위’를 낳아서 큰 기쁨을 준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보낸 음력 9월 그믐께 편지에는 찬기가 예심에 회부됐다고 하더니, 어제 받은 편지에는 찬기의 병이 위중하다는 내용이 실렸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왜관 사건 피의자들이 취조를 마치고 송국된 것은 1939년 10월25일이었다. 이날 피의자 91명 가운데 혐의가 무거운 30명이 기소됐다. 김찬기는 예심에 회부됐다 하니 기소자 명단에 포함됐음이 분명하다.

 

찬기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오장육부가 터질 듯하는” 아픔을 느꼈다. 되돌아보면 찬기가 본래 체질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 아이가 “몇 년씩 고문을 받았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치료비가 많이 들 거라고 감옥 의사가 말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다 기울인다 해도 아까울 게 없다”고 결심했다.

 

김찬기의 필적. 왜관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아버지 김창숙에게 올린 1940년 9월6일치 옥중 편지 첫 장이다. “아버님 전 상서, 옥중에서 세 번째 가을철이 닥쳐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김위 제공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아픔

 

김찬기의 옥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생애 첫 투옥을 17살 때 겪었다. 진주고등보통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학생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휩쓸었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학생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12월3일 경성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 12월9일 경성 제1차 연합시위 운동, 이듬해 1월15~16일 경성 제2차 연합시위 운동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 운동은 전 조선에 퍼졌다. 진주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그에 호응한 것은 1930년 1월17일이다. 이날 진주의 3개 중등학교 학생들이 연합 거리시위를 벌였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진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진주 시가지를 돌며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그날 이후 학생 40여 명이 검거됐고, 학교와 거리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항일 열기는 고조됐으나 거센 경찰 탄압에 부딪혔다. 며칠째 진주 시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 분위기를 깬 게 바로 1월20~21일 이틀간 밤마다 살포된 격문이었다. 3천여 장이 뿌려졌고, 시내 중요한 곳에는 격문을 써넣은 대자보가 첨부됐다. 시위 재발로 이어질까 경계하던 경찰이 맹렬한 수사에 나섰다. 마침내 혐의자가 체포됐다. 바로 김찬기였다. 진주고보에 입학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고보생이었다. 그는 격문 제작과 살포를 자기 혼자 다 했다고 주장했다.

 

김찬기는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아는 영민한 소년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유창한 일본말로 주장했다.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살 미만이며,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 미성년이라고 강조했다. 기발한 법정 투쟁이었다. 그의 실제 출생연월일은 1914년 2월19일이다. 그러나 호적에 어떻게 기재됐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해방 뒤 작성된 호적 제적부를 확인했더니 ‘단기 4248년(1915년) 5월5일생’으로 올라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호적은 연도가 달랐던 것 같다. ‘대정 5년(1916년) 5월5일생’으로 등재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찬기의 법정 투쟁은 효과를 거뒀다. 격문 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1년6개월 징역형에 5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3

 

김찬기의 두 번째 투옥은 1934년, 21살 때 일이었다. 결혼 이듬해 아내와 함께 대구 남산동에 살림집을 냈을 때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천 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김창숙이 회고하기를, “찬기는 17살 때부터 혁명사상을 품고 있더니, 그 후로는 몇 번 옥에 갇히고 일본 경찰이 항상 그 뒤를 미행하면서 감시가 심하였”다고 했다.4

 

17살 때부터 혁명사상 품어

 

김찬기는 결국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서 대구 각지에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11월5일이었다. 함께 체포된 혐의자가 40명이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혐의자가 많아서 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다행히 조직 사건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결국 김찬기는 그해 12월6일 풀려났다.5

 

김찬기의 세 번째 투옥은 1938년, 25살에 겪은 ‘왜관 사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3년 정도 복역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언제 출옥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추정할 단서는 있다. 호적 제적부에 따르면 그의 딸 ‘김주’의 생년월일은 단기 4274년(1941년) 12월23일이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의 출감연월은 대략 1941년 2월 전후였을 것이다. 출옥 직후, 그것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 있다. 동향인 성주 출신 사진작가 이명동이 찍었다. 단정하고 지적인 풍모를 풍긴다. 머리카락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은 것을 보면 출감한 지 한 달쯤 지난 때인 듯하다.

 

“자고 나면 떠날 것 뻔히 알지만 그때는 어른들도 계시고 해서 애정표현이라고 있나. 둘이 말도 잘 못했는데, 표정으로 주고받았지. 갈 때 하는 얘기가 ‘자식 둘이 있으니까 나중에 얻어먹을 형편이 돼도 아이들하고 같이 얻어먹고 그냥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되면 2년 반 되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 잘 부탁한다’ 하면서 갔지.” 6

 

아내 손응교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야의 젊은 남편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의 3년이면 돌아온다는 말은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한 빈말이었을까,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전망하는 뚜렷한 정세관이 있었기 때문일까.

 

지키지 못한 약속

 

젊은 아내는 딸의 첫돌이 지난 뒤 남편이 출발했다고 기억했다. 첫돌은 12월23일이었다. 이 회상은 문헌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찬기는 “1942년 12월27일에 집을 떠나 대구에서 동지들과 규합하여 준비를 마치고 1943년 1월13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망명이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게 아니라, 동지들과 협의해 상당한 준비를 거친 뒤 이뤄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같은 시기에 국문학자 김태준과 박진홍 부부가 연안으로 망명했던 일이 떠오른다. 태평양전쟁 때 김찬기와 김태준 부부의 행동 양상에 일정한 공통성이 있음이 흥미롭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김찬기는 해방 직후 죽어서 돌아왔다. 1945년 11월 귀국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이 김창숙에게 소식을 전했다. 김찬기는 1944년 중경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몹쓸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유골은 화장했으며, 머잖아 2진 귀국 인사들이 봉환하리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유골이 성주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온 마을이 울음바다가 됐다. 나무로 짠 유골함을 본 아내는 그게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겼다. 아내는 울지도 못했다. 시아버지도 울고 친정아버지도 우는데, 자기까지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말이 안 나왔다. 마음으로는 뭔가 의사표현을 하려는데, 목이 잠겨서 발음할 수 없었다. 10월23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벙어리처럼 지냈다. 6개월 가까이 그렇게 지냈다. 아내는 그렇게 남편과 작별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아들 승우(承宇)에게’(찬기燦基라고도 함), 1939년 겨울, <국역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384쪽, 1979년.

2. ‘왜관지방비밀결사,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구회,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계조선진출 3사건 검거상황’, <高等外事月報> 8호, 조선총독부경무국보안과, 9~16쪽, 1938년 3월.

3. ‘이력서’ 1쪽.

4.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782쪽, 1979년.

5. ‘이력서’ 1쪽.

6. ‘인터뷰: 격동의 세월에 온몸으로 맞섰던 심산 김창숙의 자부 손응교’, <향토와 문화> 15, 대구은행, 16~25쪽,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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