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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희망의 불씨

 

 

혜숙은 첫돌이 마악 지난
막내 아들 중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점점 더 야위어 가자
막내가 세 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다.

기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 져서
누어 있기조차 힘들어 했을 때...

혜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올 12 월까지는 살아야 될텐데..." 했다.

그러면 앞으로 6 개월이 남아 있다.
나는 "하필이면 왜 12 월까지야?"
하고 물었다.

"막내가 너무 어려서 엄마를 전혀 모를 것 같애...
중현이가 커서 엄마를 기억하게 되려면 두 돌은 돼야겠지?
나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돼!"

막내가 두 돌이 되려면
앞으로 9 개월이 더 있어야 한다.

혜숙은 9 개월이라는 세월을
더 살아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9 개월이 아니라
6 개월 만이라도 더 살아서
막내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남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다.

혜숙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가늠하고 예측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이거다~~~!!!

혜숙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희망은
막내에게 있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절대적 의지가
바로 막내에게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
유일한 희망은
바로 첫돌지난 막내에게 있었고
그것은 막내에 대한 모성 본능이었다.

과학적으로... 임상적으로 증명된 절망 앞에서
한갖 공허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추상적 희망이었지만

혜숙은 본능적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죽음을 이겨 내야 하는 의지...
생명에 대한 집착이
모성 본능에 의해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로
그 명맥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 이 다 .

 

 

 

 

76. 누런 신문지처럼

 

 

요즘에는 2 주에 한 번씩으로
주사하는 방법이 달라졌는가본데

혜숙은 3 주 째 한 번
그리고는 1 주 후에 한 번
다시 3 주 째와 1 주 후...

이런 방식으로 6 개월 동안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하던지
혜숙은 주사를 맞고 나면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듯
토하고 또 토하고

토할 것이 없어 헛구역질하느라
혼절할 지경에 이르르곤 했다.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 나가서
백구머리한 여승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몰골이 남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고
혐오감을 줄 정도로 변해 갔다.

가발을 장만해서
병원 가는 날이나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혜숙은 가발 쓰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동네 길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으면
혜숙은 타자마자 가발을 벗어 제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거울로 뒷자석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의아해 했다.

택시를 탈 때는 분명
다정한 연인이나 부부일 꺼라고 여겼던 모양인데
백미러로 보니까 평상복 차림을 한
여승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파계한 여승이 가족과 함께 탔거나
불륜스런 관계 쯤으로 여겼을 법했다.

혜숙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말문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
내 머리가 좀 이상해서 그러시죠?
요즘 새로 나온 패션으로 해 봤는데...
좀 이상한 가봐... 당신은 어때 여보...
당신도 이상해? 당신은 괜찮지?"

나는 혜숙의 속마음을 안다.
혜숙은 운전 기사에게
자기의 백구머리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농담을 던졌다기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신랑이고 우리는 부부'사이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혜숙은 가발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나중에는 머리 패션을 모자와 머플러로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동안(童顔)형이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
더욱 어려 보였다.

반면에 나는 제 나이보다도
좀 더 먹어 보이는 형이다보니
때때로 본의 아니게 불편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신발 상점에 들러 운동화를 고르는데
점원 아가씨가 내게는 아저씨라 부르면서
혜숙에게는 얘~~~쟤~~~ 해 가며
이거 신어 보라는 둥 저게 좋겠다는 둥
반말을 해 대는데
아마 고등학생 쯤 되는
아빠 따라온 딸인 줄 안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혜숙은
그 후부터서든가...
시장에 가든가 택시를 타든가
음식점이나 커피�에 가든가
아무튼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눈치만 보이면
여보... 당신... 소리를 자주 되뇌이곤 했다.

혜숙은 물만 간신히 조금 삼킬 뿐
거의 아무 것도 먹지를 못 했다.

잣을 좀 먹는가 싶으면 잣을 사오고
새우를 먹는가 싶으면
시장에서 제일 고소하고 먹기 좋은 새우를 사오고 했지만
입에 대고 맛을 보는 정도지 먹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소문로 옛 배재학당 입구에 보양죽집이 있다.
근 30 년 야채죽과 전복죽, 버섯 인삼 새우 등등
각종 죽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한 때 그 집에 들러
하루에 한 종류 씩 각종 죽을 포장해서 사 왔다.

그 중에서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혜숙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변해 갔다.

주치의는 체중이 34 kg 이하로 내려가면
좀 힘들어 질꺼라 했다.

그리 되면 거의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혜숙은 체중이 닷새에 1.5 kg 씩 줄어 들었다.

퇴원할 당시 48 kg 이던 체중이
두 달만에 34 kg 으로 줄어 들었다.

항암제를 두 달 째 맞는 날
주치의가 우리를 불렀다.

"박혜숙 환자는 이제 항암제를 그만 맞는 것이 좋겠어요...
항암제를 맞으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항암제가 치료에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의학적 노력에 매달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막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우선 고단백질로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저항력을 키워서 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현대의학에서도 이제 손을 놓아버리는구나!!!
더 이상 방법이 없다지 않은가?

이제 한 주간이면 마치게 되는 방사선 치료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서 받아 주지조차 않는 신세로
방치되는 거로구나...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혜숙은 더 이상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집에서 멍하니 숨만 쉬며 누어 있곤 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로구나' 싶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몰골은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어
내장을 감싸고 있는 뼈마디가 모두 드러나다시피 했다.

얼굴이며 피부는
오랜 세월
창고 속에서
회색 먼지에 싸인 채
처박혀 있는
빛바랜 신문지 색이다.

톡 건드리면
우수수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누렇고 바싹 마른 케케묵은 신문지처럼
그렇게
핏기가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하며
베개에 기대 앉아
겨우
숨만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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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또 하나의 시련

 

 

한편으로 그 당시 우리 가정은
경제적 사정까지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 마악 출소하고 혜숙은 약국을 후배에게 맡겨 놓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데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까지 처분해야 할 처지였다.

혜숙은 나에게 재정적 부담을 안기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지
주저주저 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려고 했지만 나 또한 사정을 알기가 두려웠다.

나는 네 번을 감옥에 드나들면서도 내 또래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 형편이 그리 못한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지만 일찌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다 결혼하고서부터는 집을 장만하고 약국까지 운영했으니
다른 동료들보다 형편이 좀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적금을 들고 저축을 했더라면 또는 여유 자금을 만들어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는 데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70 년대 말부터 돈을 좀 모아 둘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받은 만만치 않던 수입 모두를
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유지하는데 써 왔다.

말하자면 재야 민주화 운동 단체의
재정 책임을 맡아 해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비축한 재산이나
저축한 돈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을 살면서
갚아야 할 비용과 감당해야 할 빚들이 조금씩 늘어 났던 것이다.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감옥에 들어 가게 되면
지명 수배된 동료들이 혜숙을 찾아 온다.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신었던 양말이나 입었던 옷가지
속옷까지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도피 중인 동료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 뿐인가?
약국에는 언제나 다만 얼마라도 현금이 있을테니까
돈이 떨어지면 동료들이 혜숙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혜숙은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주곤 했다.
어느 날 혜숙이 심각한 사정을 내게 털어 놓는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집안 일을 잘 건사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해...
당신한테 지급된 월급과 상여금은
꼬박꼬박 수령해서 수배 중인 동료들한테 전달해 왔어...
쫓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약국에 있던 돈도 좀 보탰고...
그러다보니까 빚도 좀 지게 됐어...

여보! 나 지금 돈 때문에 피가 말라 죽겠어...
이거 어떻게 좀 해결해 줘...
내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데 나 죽은 뒤에
나 때문에 경제적 피해를 볼 사람들한테서 받을
원망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당신은 어차피 아이들하고
건강한 몸으로 살아는 갈 테니까...
죽어 가는 내 소원 좀 들어 줘 여보!!!
지금 당장 약국을 정리하고 집을 처분해야 될 꺼야 여보!!!
흐흐흐흑......"

혜숙은 내게 울먹이며 매달리다시피 했다.
집을 처분해야 할 정도라니...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숙이 기록해 둔 메모지를 보았다.
갚아야 할 돈이 모두 합해서
그 때 돈으로 4 천 8 백 만 원 가량이다.

막상 약국을 처분하려다 보니까
그동안 약품을 제약회사에서 외상으로 들여와
현금을 받고 팔다 보니 받을 돈은 거의 없고
갚아야 할 외상매입금만 남아 있었다.

41 평 가량 되는 집과
약국 임대보증금 등등을 합해서 처분하면
대략 5 천 여 만 원 정도가 된다.

혜숙이 소원대로 당장에 빚을 몽땅 갚고 나면
한 2 백 여 만 원이 남게 된다.

우리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 앉을 수는 없고
살만한 전세를 얻으려면
그 때 돈으로 1 천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8 백 만 원 가량의 빚은
계속 더 남아 있어야 한다.



 

78. 1 년은 살아 있어야 돼!

 

 

나는 당장에 대답을 못 하고 주저주저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내게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닐테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혜숙은 보름마다 한 번씩
두 번을 더 울먹이며 내게 매달렸다.

이 때 혜숙의 상태는
점점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6 월 중순 경...
혜숙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제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이 가부간에 대답하고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했다.
나는 혜숙에게 말했다.

"우선 약국부터 정리하고 급한 불부터 꺼 나가자 여보...
집은 우리가 장만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으니 그냥 두고...
내가 집을 안 팔고도 당신 보는 앞에서
1 년 안에 빚을 다 갚을께...
그대신 당신... 앞으로 1 년은 꼭 살아 있어야 돼!
빚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남은 애절한 소원과 기대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각오하고 다짐했던 계획을
나는 당장에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에게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돈을 굴리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해 낼 자신이 있었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오는 과정에서
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그리 시달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공부나 진학 문제에
그리 걱정하고 불안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택에 대한 문제를 걱정해 본 적도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문제 역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준비해 놓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크면 그때 가서 감당하면 되는 거지...
하는 자신감이 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1 년 안에 해 낼 꺼야... 해 낼 수 있어...
그런데 우리 혜숙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하지?
그러면 혜숙이 한을 남기게 될 텐데...
혜숙은 올 12 월까지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했는데...
기간 좀 줄여 보자... 올 연말로... 6 개월로 줄여 보자...
그래 6 개월 안에 감당해 보자'

나는 우선 약국부터 정리했다.
약품 도매상을 운영하는 분에게
관리 약사와 함께 전적으로 맡아 경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돈으로 우선 시급한 부채부터 갚아 나갔다.
내 사업 자금으로 43 만 원을 남겼다.




 

79.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전 중으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강 사장은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시대
민주화 운동 단체의 인쇄물을 도맡아 온 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문과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을
70 년대 초반부터 신변의 위험과 사업상의 손실을 무릅쓰고 인쇄해 준 유일한 분이다.

전북 남원의 가난한 집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어머님 슬하에
모태 신앙을 이어 받아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 하시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학교를 못 보내는 대신으로
글이라도 계속 접할 수 있는 인쇄소에 취직하도록 권면했다.

고향 남원에서 1 년 여 인쇄소에 다니던 그는 4 . 19 혁명이 일어 나자
어린 마음에 별천지 세상으로 바뀌겠다 싶었던지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서울을 향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직 미성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는 낙엽이 짙게 물든 가을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 여행삼아 갔다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해서 눌러 앉았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또한 부모님과 동생들 걱정으로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던 그는
입산한 지 1 년 여 만에 다시 세상으로 하산했다.

집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1963 년 다시 상경하여 인쇄소에 취직했다.

10 년 가까이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72 년 박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가운데
계엄 치하에서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애가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심정을 억누를 길 없어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 두고 독자적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차렸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이 후로 그는 엄혹한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 정권에 저항하는 활동 단체를 찾아 다니며
그가 이제까지 갈고 닦아 온 기능과 직업을 통해서
필생의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줄곧 민주화 운동에 기여해 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70 ~ 80 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구류를 살고 했다.

1980 년 4 월에는 김재규 관련 유인물 제작 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가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다가
이듬해 5 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석방되기도 했다.

나는 첫 직장이던 1977 년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일 적부터
필요한 인쇄물을 강은기 사장에게 맡겨 왔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등
내가 주도하고 관계했던 모든 단체의 유인물 역시 강은기 사장이 도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등 기독교 단체의 인쇄물도 거의 강은기 사장이 맡았다.

그는 실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 단체에서 나온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담당해 온 산 증인이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운동에 헌신해 온 민주 인사다.

그는 오랜동안 나와 같은 교회에 소속된 나의 선임 장로이기도 해서
나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본다.

그는 2002년 여름...
갑자기 췌장암으로 진단 받고 줄곧 병원에 입원해 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병실을 찾았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는
그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취재해 보도했다.

그리고 2002년 11 월 9 일
그는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그를 알고 그를 소중하게 여겨 왔던 이들은
누구랄 것없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민주인사 故 강은기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그를 안장했다.

식순 가운데 그에게 바쳐 진 조시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그 사람 웃으며 간다 ㅡ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유시춘 (소설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우리들에게
사계가 늘 겨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손톱밑 반달같이
여리고 뽀오얀 새눈 돋는 봄날과
시퍼런 삼나무 녹음
그 그림자까지 시퍼렇던 뜨거운 날과

먼길 흘러
저 혼자 깊어져
마침내 바다같은 한강하구 박차고
내 마음의 철새들 떠나는 날에도

성명서와
플랑카드와 스티커와
'민주화의 길' '민주노동' '민주가족' '민주통일'
'민' 字 항렬 인쇄물에 뒹굴던
우리 청춘은 늘 춥고 시렸다.

겨울 새벽 동쪽 하늘에 맨살로 걸린
그믐달이 친구였다.

날 선 분노 때문에
70 년대 80 년대 그때에는
을지로 뒷골목
세진인쇄 강은기 그 아저씨
늘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쇄물 몇 리어카 찍어 간
장영달 이해찬 수배되고 감옥 가면
그래서 쌓인 빚 늘어 가면
태백 정선 광부같이
한번
씨익 웃고 말았다.

밤새 찍어 준
인쇄물과 함께 그 아이들 사라지면
대신 경찰서에 끌려가
아마도 그리 말없이
씨익 웃다가

매타작에 죽을 고생하다가도
다시 만나면
그저 한번 씨익 웃었다

강은기
그 아저씨 가슴에는
비수같은 적개심이 없었다

생활이 운동이었다
운동이 곧 생활이었다
숭늉처럼 따뜻하고 융숭 깊었다

세진인쇄
빚진 사람들아
슬퍼마라 울지마라

그 아저씨 이제 하늘에 쌓아 둔
복록 찾으러 가느니

강은기
그 아저씨
외상값 못 갚은 친구들아
'국민의 정부'에 상기 가슴시린 벗들아
애통해 마라

그 사람 스스로
바다에 버린 양식

이제 곧
밀밭되어 보리밭되어
온 누리에 푸르게 물결칠 것을

그 사람
저기 말 없이
씨익 웃으며 가느니

( 전문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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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전화기와 책상 하나로

 

 

나는 남은 돈 43 만 원을 들고
을지로 5 가 을지전화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 전화를 신청하려면
20 만 원 권 전화 채권값을 포함해서
43 만 원이 필요했다.

가지고 간 돈을 몽땅 지불하고
지정 받은 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와 채권 한 장
달랑 받아 쥐고 나오다가

지금은 사라진 지난 날의 풍경...
전화국 앞에서 서성대는 아주머니에게
20 만 원 권 채권을 건네 주고
3 만 원을 할인해 17 만 원을 받았다.

17 만 원...
이 돈을 창업 자금으로...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6 개월 안에
5 천 만 원 가량 되는 부채를
갚아야 한다.

갚아야지...
꼭 갚고 말꺼야...

혜숙이 살아 있어야 할
올 연말까지는
꼭 갚아야 해...

1987 년 6 월 20 일...
나는 필사적인 행동을 개시하는
첫 번 째 업무를 마치고

중앙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을지로 2 가 속칭 인쇄 골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갔다.

을지로 3 가 쯤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전화기 한 대를 구입했다.

일제 때 지은 적산 가옥이
마치 혜숙의 빛 바래고 푸석푸석한 몰골처럼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서로 기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에 들어 섰다.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청을 울린다.

잉크 냄새가
코 끝을 진하게 스친다.

적산 가옥 비좁은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오른다.

색칠도 하지 않은 베니어판을
얼기설기 칸막이로 막아 구분해 놓은 사무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강은기 사장이 씨익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형님! 나 집사람 병 고치고 빚도 좀 갚아야 하는데...
여기 책상 하나 빌려 주세요...
아무래도 형님께 우선 신세 좀 져야 되겠어요.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나와 혜숙이 살아온 모습
활동해 온 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분이어서
나는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군더더기도 뺀 채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강 사장은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 놓여 있는
책상과 공타 기계를 요리조리 옮기더니
책상 하나 들여 놓을 자리를 비워 준다.
공간에 맞도록 조그만 책상을 들여 놓고
전화기를 달았다.

아! 이제 나는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는 밑천을 가지고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공간에서
홀홀단신으로 황당무계한 구름을 잡듯
청운의 뜻을 펼치듯
고난의 대 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 세진인쇄 강은기 사장

의자에 앉아 본다.
전화기를 만져 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다짐하고 다짐하며 필사적인 각오로
우선 뛰쳐 나오기는 했지만
막막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차례인데...
무엇을 어떻게 추진해 나가야 하나...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무심코 전화기 다이얼을 누른다.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 온다.

어! 이게 아닌데...
얼떨결에 "...에미 좀 바꿔 주세요" 한다.

"여보! 난데...
지금부터 사업 시작하는 거야...
사무실도 얻고 책상이랑 전화기도 마련했어...
당신한테 첫 번째로 전화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할려구...
1 년만 기다려... 1 년 안에 다 해결할 테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소리를 해 댄다.
그렇지! 맞아! 그래야 돼!
이제 시작해야 돼!

본격적으로... 필사적으로...
해 내고 말아야 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 다이얼을 누른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전화를 다 주시고...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되는 건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감옥에서 건강은 괜찮았고?
언제 나왔지?... 혜숙 씨는 요즘 어때? 병원에서는 뭐래?
이거 참 큰일이로구먼... 우리 친척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는데...
그럴 때는 이러저러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더라구...
그 분도 견디다 못 해 막판에는 이러저러했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저러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꺼라 그러더라구...
애들은 몇 이지?... 아이구 애들 생각해서라도
혜숙 씨가 빨리 건강해져야 할 텐데...
그나저나 우리 함 만나자구... 나한테도 시간 좀 내 줘...
점심도 좋지만 저녁에 만나서 회포도 풀어야지...
혜숙 씨 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첫 번째 통화에서
나는 막상 할 사업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한 채
서로 안부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두 번째도 그랬고 세 번째도 그랬다.
통화 내용도 비슷했다.

여기저기 전화 해 보았지만
계속 그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해 졌다.
안부 전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만큼
한가롭고 여유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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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세민약국과 나눔기획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로 작정했다.
그러다보니 연락처가 있어야 했고
명함이 있어야 했다.
상호가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9 년 전이던 78 년 6 월
혜숙이 나와 결혼하면서
약국을 차렸을 때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무엇으로 할까? 궁리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 서 있고
다가구 주택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 적만하더라도 우리가 살던 곳은
닭장 동네라 불릴만큼 판잣집이 많았다.

그나마도 세들어 사는 이들이 많이 살던
달동네 어귀였다.

나는 '씨알' 약국이라 할까?
'민중' 약국이라 할까... 했다.

너무 '티'를 내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조선조 숙종 때
우리 백성들은 참으로 생활이 곤궁했다.
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함경도 평안도 등
북쪽 지방이 더욱 심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조상이고 친척이고 고향이고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 헤매고 다녔다.

산에 닿으면 산나물을 뜯어 먹고
물에 닿으면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들에 닿으면 품을 팔아
곡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이런 이들을 일컬어 세민(細民)이라 했다.
가난하고 천한 이들이다.

함석헌 선생의 상징어가 된 '씨알'을
한자(漢字)로 표현할 때
민중(民衆)보다는 세민(細民)이 더 가깝다.

서양철학에서 임금 노동자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안(Proletarian)이라는 개념보다도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말이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혜숙의 약국 상호를
'세민약국'이라 작명했다.

한자로는 쓰지 않았다.
험악한 시절 냉전의 세상에서
상호에 담긴 의미를 가지고
괜한 빌미를 살까 염려해서다.

약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러 묻는 적도 있다.

상호가 부르기 쉽고 마음에 든단다.
무슨 의미냔다.

부부간에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지은 것 아니냔다.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영세민(零細民)에서 영(零)자를 뺀 거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다.

그 후부터 혜숙은
상호에 대해서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았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장동네라 해서
다닥다닥한 판잣집에 닭장처럼 옹기종기 모여 산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 분들이 다 영세민들이잖아요...
근데 '영세민 약국'하면 좀 이상하고 동네 자존심도 상할 것 같아서
'영' 자를 빼고 그냥 '세민약국'이라 했어요..."

상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회상에 잠기던 나는
이번에는 무얼로 지을까 궁리했다.

목적과 대상이 되는 객관적 개념보다는
실천과 행동...
구체적인 당위를 뜻하는 개념을 찾고 싶었다.

'나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실천적 개념이다.
분배의 정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행동적 개념이다.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단체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나눔' '나눔기획' '출판인쇄 나눔기획'......
상호를 '나눔기획'이라 정하고 명함을 만들었다.

사무실 입구에 네모반듯한 간판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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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네 번째 명함

 

 

첫 직장으로 나는 70 년대 후반
월간 < 씨알의 소리 > 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했다.

주위 동료들이 더러 선망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내게 맡겨 졌다.

이 후로 나는
감옥에 들어 가 있는 동안을 빼고
계속 직장 생활을 이어 갔다.

두 번째 직장으로 나는
당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의 추천으로
우리나라에서 전통 있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현암사에 입사해서
대작 "한국미술 5 천년"의 기획 출판을 맡아 했다.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뒤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째 감옥을 살게 된 나는 출소하자마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출판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민중민주운동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각각의 단체에서 상임위 의장, 청년단체 대표위원
실행위원 등을 맡아 활동해 왔다.

그러던 중 민청련 시위 사건으로
김근태 등과 함께 구속되어
네 번째 감옥을 살고 나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네 번째 감옥을 사는 동안
나는 인쇄 공장에 출역하게 되었다.

인쇄공장에는 활판인쇄기, 옵셋인쇄기, 조판 정판실,

최신형 마스타 인쇄기, 재단기 등등의 기계들과 제본실이 있었다.

원고가 들어 오면 편집과 조판 교정에서부터
인쇄와 제본까지 일괄해서 처리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10 개월 여 동안 인쇄 공장에 출역하면서
나는 제작 공정의 모든 실무를 직접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내 팔자에 인쇄 사업이 예정돼 있었던건가?...'

월간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미술 대작의 기획 출판을 맡고
연구원의 출판부서를 운영하는 책임과
인쇄 공장의 실무를 익히는 등으로

나는 우연치 않게도 10 여 년 동안
출판 인쇄 분야의 모든 실무와 운영을
두루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마음 한구석에
무언지 모를 자신감...
해 낼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나는 네 번째 명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달려 나갈 준비를 차린 것이다.

 

 

 

 

83. 첫 번째 주문

 

 

실천문학사 송기원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 좀 내어 저녁을 같이 하잔다.

송기원은 한국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의 마지막 세대이자
합병된 중앙대 문창과의 선두 세대다.


▲ 작가 송기원


그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문인들을 이끌고 실무일을 도맡아서
가장 치열하게 활동해 온 시인이요 소설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각각 단편 소설과 시로
한국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그는

치열했던 자신의 삶만큼이나 예리한 통찰과
탐미적 감수성을 보여 주는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나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고 있을 적부터
그와 가까이 사귀어 왔다.

때로는 서대문 구치소에 함께 구속된 처지에서
서로 통방을 하며 각별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종로 1 가 허름한 목로집에서 만났다.
손님들이 앉을 틈도 마땅찮게 비좁은 집이다.

"야! 니가 어떻게 이런 시련을 겪을 수 있냐?...
재야에서 니 경제적 지원 안 받은 단체가 없을꺼고...
니 신세 안 져 본 사람도 그리 없을텐데...
그런 천하의 아무개가 어떻게 사무실도 없이...
전화통만 달랑 갖고 나가 인쇄소 골목에서
나까마(행상)하게 되었냔 말야 임마!!!"

눈깔사탕처럼 땡그란 얼굴에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송기원은 동그랑땡 안주 국물에 소주를 들이키면서
황소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선 사무실이라도 마련해야 되겠지?...
급한대로 우리 실천문학사에 들러
한 2,3 백 만 원 가져 가 임마...
니가 할 일거리도 챙겨 둘테니까 가져 가고...
일거리 떨어지면 미리미리 얘기해.
출판사에서도 어차피 들어가야 할 비용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감옥 사는 동안에 우리 출판사 책 좀 팔렸어.
그러니 니가 했던 것만큼은 다 못 하더라도
네 사무실 제목마따나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눠 먹자 임마!..."

다음날...
나는 실천문학사로 송기원을 찾아 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는 경리부를 통해서 내게 2 백 만 원을 내 주었다.

그리고 원고 정리가 아직 덜 되었다면서
이미 출판되어 있는 소설책 한 권을 내밀고
전산 조판부터 인쇄 제작까지 새로 만들어
3,000 부를 납품해 달라는 거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고
새 원고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송기원은 앞으로 어차피
활판 인쇄용으로 조판된 책들을 재인쇄 할 때는
옵셋 인쇄용 전산 조판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일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들러서 가져 가라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의뢰 받은 주문이었다.

각별한 배려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사업이랍시고 뛰어 들어서
처음으로 결재 받은 돈이기도 했다.




 

84. 월간 <말> 합본호

 

 

내가 '나눔기획'을 차린 소식이
주변에 점점 알려 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아내가 위암에 걸려 죽어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병 구완도 제대로 못 한 채
돈을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행여나 내 마음이 다치거나 상처 받을새라
각별한 조심과 배려를 더 해 주었다.

그 당시 월간 <말> 지 사장으로 있던
김태홍 선배에게서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김태홍(1942 ~ 2011) 전 국회의원


김태홍 선배는 한국일보와 합동통신에서
외신부 기자로 있던 언론인 출신이고 
나중에는 광주 북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80 년 계엄 치하에서
기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 할 수 있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아
언론 검열 철폐 및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벌인 죄로 계엄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되었다.

"최 형을 이 고생하도록 놔 둔다는 것은 우리 주변 모두의 수치예요.
부끄러움이고 후안무치한 일이지...
요즘 <말> 지 사정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전두환 정권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하는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 이후로
<말> 지는 오히려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소.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그런데 마침 <말> 지 창간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간행된 것을
보도지침 폭로 기사 내용까지 수록해서 합본호로 만들기로 했는데
기왕이면 당신이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겠고...
비용은 한 천 여 만 원 들텐데 필요한대로 먼저 가져다 쓰시고..."

<말> 지는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월간 <씨알의 소리>가 1980 년 7 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무지막지한 탄압에 의해 폐간된 이후로

이 땅의 언론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50 년대부터 60 년대 말까지는
장준하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발행한 <사상계>가 있고
박 정권에 의해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 년부터 80 년까지
함석헌 선생을 발행인으로 한 <씨알의 소리>가 있다.

<씨알의 소리> 역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폐간된 이후
무려 5 년 여의 공백기를 지난 1985 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지가 있어
우리 나라 월간 잡지 역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75 년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과
1980 년 계엄 하에서 역시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기자들은
1984 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동안 거리로 내쫓긴 해직 기자들은 독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글과 각종 성명서를 통해, 때로는 거리 시위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다가 구속되고 옥고를 치루면서까지
자유 언론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 왔다.

하지만 정작 언론 매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실천적 활동을 벌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85 년 5 월 월간 <말> 지를 창간하게 되고
이를 모태로 해서 1988 년에는 급기야
<한겨레 신문>을 창간하기까지 이르르게 되는 것이다.

김태홍 사장은 내게 각별히 부탁한다.

"월간 <말> 지 합본호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제작해 줄 사람이
아마도 최 형 말고는 없을 것 같소... 

최형 입장에서야 어디 이 정도를 가지고 두려워서 못 할 분은 아니잖소...
그러니 가급적 조심해서 꼭 해 내 주기를 바랄 뿐이요..."

그 때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었다.
인쇄량은 물론이거니와 양장 특수 제본을 비밀리에 해 낸다는 게
여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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