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7 08:00 김삼웅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함석헌은 해외여행의 복이 없었는지 모른다. 1963년 모처럼 세계일주 여행길에 5ㆍ16주체들이 공약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데 이어, 이번에도 퀘이커의 도움으로 세계여행 중 10.26사태 소식을 듣고 여행을 중단한 채 돌아왔다. 박정희와는 전생에 악연이 켜켜히 쌓였던 것 같다.

함석헌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불행한 최후를 ‘예측’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사랑하고 ‘대통령감’으로 기대했던 장준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 측근은 증언한다.

어느 날이었다. 원효로 선생님댁이자 <씨알의 소리>사를 찾아온 몇몇 씨알들과 함 선생님은 대화 중 말씀하신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내가 그의 끝을 보기 쉽지….” 하시고 더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를 가리키고, ‘끝’이란 ‘박정희의 최후’를 가르킨다. 풀어서 말하면 “내가 박정희의 최후를 볼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어떤 분노나 감정으로 한 말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과 함 선생님만큼 철저하게 싸운 사람도 없지만, 대적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하시고 언제나 평상심으로 돌아와 꽃을 가꾸시고, 뜰을 쓸고, 기도와 명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진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석 12)

함석헌의 저항의 대상은 법과 제도 또는 체제이지 결코 개인은 아니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개인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위치나 권력을 탐하여 반독재 저항운동에 앞장선 것도 아니었다.

한때 사회 일각에서 그를 대통령후보 또는 야당 당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1969년 가을,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당수 유진오가 병으로 쓰러지고, 야당은 와해 위기에 내몰렸을 때였다.

이무렵 재야인사 영입케이스로 야당 당수가 됐던 유진오 씨가 물러나고 야당의 새 당수를 뽑아야 할 때라고 기억한다. 우리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야당 정치계에서 함석헌 선생을 당수로 모셔야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다. 국민의 지지를 받고 박정권에 대해 당당히 맞설 인물로 함 선생님 외에 다른 인물이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진 듯 했다. 그래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위시한 중진 인물들이 줄줄이 원효로 함 선생님 댁을 찾아왔다. 정일형 박사, 윤보선 전대통령까지 찾아와 함 선생님을 설득한 것으로 안다. 정치계뿐만 아니라 재야 지성인들까지 가세하여 함 선생님께 권유했다고 들었다. 재야 지성인들이 함 선생님이 야당 당수가 되어야한다는 이유는 있었다. 지금까지의 야당은 야당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야당이었다. 진정한 야당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요즘 말대로 ‘물갈이’를 하기 위해서는 함 선생님 같은 참신한 인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석 13)

이같은 요청을 함석헌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은 결코 성격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그런 역량도 없다는 뜻이었다. 1963년 가을 쿠데타 세력이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면서 일부에서 함석헌을 범야단일후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때도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함석헌은 자유당 말기 윤형중 신부와 논쟁을 할 때 “모가지가 아흔 아홉 번 잘려도 대통령은 아니한다”고 호언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면서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총을 쏘는 데”(장면 부통령에 대한 경찰의 암살음모)라고 예시를 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배자가 되는 것, 즉 감투를 쓰고 누구를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장로, 목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이승만을 쫓아내고도 장면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글과 말이 순수하고 무게가 실린 것은 개인적 이해를 떠나 공론(公論)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권과 지배가 없는 무권력주의의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 퀘이커에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해외순방 중일 때 박정희 정권은 도처에서 말기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새벽 2시에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을 당사에 난입시켜 노동자들은 끌어내고, 당직자와 취재기자들까지 무차별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회견을 빌미로 김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등 단말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농성에 동조하여 종교계, 해직 언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민주단체들이 반유신투쟁에 떨쳐나서고, 마침내 10월 16일 부산대학생 4천여 명의 궐기를 시작으로 부마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 저녁 7시경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성들을 불러 질펀한 술판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5·16쿠데타로부터 18년 6개월, 유신변란으로부터 7년 여 만이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면서 11월 15일 귀국하였다. 절대권력자가 장기독재 끝에 절명하면서 정국은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에 빠져들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유신세력은 여전히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재야 민주인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투쟁에 나섰다. 11월 24일 YWCA집회를 통해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를 통한 대통령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체의 집회가 금지된 계엄상태에서 ‘위장결혼식’을 이유로 재야인사들이 모이게 되고, 선언문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거국내각 수립하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등을 요구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계엄사는 양순직ㆍ박종태ㆍ백기완ㆍ임채정 등 14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포고령위반으로 처벌되었다.

함석헌은 아직 긴 여행의 노독이 풀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노령을 이유로 구속을 면했지만, 박정희가 암살 당한 이후에도 다시 구금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불구속 상태에서 기소되었다.

 


979년 10월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항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권력 정당성이 취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MBC

독재자가 암살되고 외신에서는 ‘서울의 봄’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나 정치의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 하나회 출신들이 하극상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또 새로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함석헌은 12ㆍ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계엄사 검찰부에 의해 12월 27일 다시 소환되었다.
군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해가 바뀐 1980년 2월 25일 함석헌은 군법회의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 면제 처분을 받았다. 신군부도 그의 위상에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주석
12> 박선균, <씨알 소리 이야기>, 108쪽, 도서출판 선, 2005.
13> 앞의 책,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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