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국의 참담함에 절망하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정보기관의 음모에 비관하면서도, 자책을 거듭하였다.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고, 언론이나 학계 어디를 둘러 봐도 의분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전을 강의하고 씨알들의 모임에 달려갔다.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이후 함 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컴에서는 일체 보도금지 되었으나, 함 선생님은 노자(老子) 모임, 장자(莊子) 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 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주석 6)

5ㆍ17쿠데타 세력은 5ㆍ16선배들의 판박이처럼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정치인들을 묶고 양심적 지식인, 언론인들을 추방하면서 5공권력을 구축했다. 광주학살의 잔혹상은 가끔 외국(인)을 통해서나 알려질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1년 초 오산학교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함석헌을 동창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89년 2월 숨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함석헌은 1987년 10월 제11회 인촌 언론상을 받았는데, 상금 1천만원 전액을 오산학교에 기증하였다. 3월에는 몇 지인들이 YWCA 강당에서 80회 생신 강연회를 열어서 <되돌아보는 나의 일생>을 주제로 1시간 여 동안 강연하였다. 8월에는 퀘이커 모임을 원주에서 갖고 요한복음을 풀이하는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음해가 나부껴도 함석헌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9년에 이미 다짐했던 길이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를 놓지 않으련다. 삼일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 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아크샤처럼 드러누웠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조선종 틈에 끼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주석 7)

정치변혁기가 되면 어김없이 변절자가 생긴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되어 온 악습이었다. 잦은 정세의 격변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정치인, 지식인들의 신념과 절조가 낮은 까닭이다. 함석헌은 3ㆍ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 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반제, 반공, 반독재의 길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1년 1월 동광출판사는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를 펴냈다.
기왕에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 낸 것이다. <안창호를 내놔라>, <남강 선생님 영 앞에>, <농촌을 살려야 한다>, <늙은 이의 옛날이야기>, <큰 도둑 작은 도둑>,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내가 맞은 8ㆍ15>,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예수의 비폭력 투쟁>, <간디의 참모습>, <벤들 힐의 명상>, <여자 한 사람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있다>등이 실렸다.

5공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비록 지난 글이라도 재생하여 씨알들에게 읽히자는 출판사의 뜻이었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여 짧은 기간에 몇 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함석헌은 1982년 가을 퀘이커 교인들의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젊은날의 스승이었던 우찌무라의 일화가 남아 있던 레딩을 찾았다. 연말에 귀국하였다.

1983년 5월 5일 좀 이색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장소는 수유리 안병무 교수의 뜰이다. 신랑은 시인 고은, 신부는 이상화 교수,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 대통령선출 저지를 위한 위장 결혼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결혼식이었다. 신랑 고은은 당시 50세의 만혼, 주례 함석헌은 84세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의 주례사는 길기로 이미 소문이 난 터였다. 이날 주례사도 장장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신랑ㆍ신부나 결혼식 장소나, 하객이나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처지였다. 주례는 모처럼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듣는 하객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고은은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무척 존경하였다.
50 중년에 장가를 들면서 함석헌에게 주례를 맡긴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70년대에 <만인보>에서 <어린 함석헌의 스승>을 지었다.

어린 함석헌의 스승

어린 함석헌
평안북도 정주 서당훈장
붓글씨 쓰는 시간
훈장은 일어서서
엎드려
글자 한 자 한 자 쓰는 학동을 살폈다.

먹 확실히 갈고
붓 확실히 꼬나잡은 것도
공부라

훈장이 뒤에서 학동의 붓 낚아챈다
낚아채지는 놈
네끼 이놈

붓을 그렇게 힘없이 잡아서야
어찌 힘찬 글이 써지겠느냐

왜놈 글씨는 이쁘지만
조선 글씨는 첫째 힘차야 하느니라.
(주석 8)


주석
6> 박선균, 앞의 책, 170쪽.
7>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37쪽.
8> 고은 <만인보> 15, 176쪽, 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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