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호)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힘겨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ㆍ26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 발행한 1980년 1,2월 신년호에서 함석헌은 <민족적 비전을 기르라>는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와 시론으로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를 썼다. '편지’의 한 대목이다.

80년대 들었다고 무엇을 조금 아노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댑니다. 씨알은 그 소리에 끌려들어 가서는 아니됩니다. 지나간 일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가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때도 지금 같이 떠들었고, 큰 소리를 펑펑 했습니다. 그때에 그 해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치 설계나 해설처럼 실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석 14)

정치선동꾼이나 기회주의 언론인들의 시세영합적인 설계나 해설에 함부로 현혹되지 말고 시국을 바로 보라는 내용이다.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글은 11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강연에서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낌새)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시대의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경고하였다. 글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을 ‘위기관리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년, 혹 몇 백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톡톡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 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주석 15)

계엄령 선포로 언론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씨알의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도 사전검열 때문에 12ㆍ12사태 등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자칫하다가는” 식의 표현으로 에둘러 쓴 것이다. “다시 군인이 정치에 나오다가는”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하나회 출신 신군부는 정치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서울의 봄’은 점차 짙은 안개 속에 덮혀갔다.

함석헌은 2월 29일 복권이 되었다. 무슨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투옥, 자격정지 등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자격회복이었다. 이날 687명이 함께 복권되었다. 함석헌은 3월호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고, 징역을 시킨다 했더라도 억울하단 맘도, 밉단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풀어줬다 해도 속임 없는 말로 고맙단 생각 조금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복권 어쩌고 해도 별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속임 없는 말이다. 왜 그랬나? 나도 사람이고, 그러는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부)란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서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16)

여기서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다시 살피게 한다. 그의 탈권력, 탈국가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 즈음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복권조치를 한 것은 씨알의 입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그런 이상이면 이제라도 씨알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어진 일일 것이다.” (주석 17)

제93호(1980년4월호, 창간 10주년 기념호)

1980년 4월은 함석헌이 70대 이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을 견뎌 가면서 발행해 온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이 되는 달이었다. 3, 4월이 되면서 지층에서는 혹독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새봄이 오는 듯 제법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함석헌도 대학가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의 초청으로 강연,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마다 ‘시대의 징조’를 설명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경계하였다.

1980년 4월호 <씨알의 소리>는 모처럼 126쪽에 이르는 두툼한 지면으로 제작되었다. 10주년기념호였다. 함석헌은 4ㆍ19 스무돌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에게 4ㆍ19는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평론을 실었다. CBS 공개방송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그리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세, 어떡허지?>를 썼다. 이 글에서는 고난에 찼던 지난 10년을 되돌아 본다.

나는 글을 깎이울 때 살을 깎이우는 것 같았고, 붓을 깎이울 때 등뼈를 꺾이우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가 갈렸지만 이는 풀을 갈아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대적을 물고 찢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면 어서 더 물게 하고 짓밟으면 어서 더 짓밟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습니다. 나더러는 원수 갚을 생각 말라 했습니다. (주석 18)

창간 10주년 행사는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회를 기점으로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ㆍ청주, 원주, 대전, 청주를 2차 계획으로 잡았다.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 강연회는 1,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함석헌ㆍ안병무, 대구는 함석헌ㆍ김용준ㆍ송건호, 부산과 전주는 함석헌ㆍ송건호가 각각 나서고, 광주는 함석헌과 장을병이 맡았다. 가는 곳마다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많은 시민이 모여 함석헌과 연사들을 환영하고, 그간 <씨알의 소리>의 역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화창한 5월의 푸른 하늘에 서리를 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80년 1,2월호, 6~7쪽.
15> 앞의 책, 63~64쪽.
16> <씨알의 소리>, 1980년 3월호, 4쪽.
17> 앞의 책, 9쪽.
18>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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