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19 08:00 김삼웅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외상으로 들여온 민주주의가 4ㆍ19혁명으로 많은 시민ㆍ학생들의 피를 흘렸지만, 5ㆍ16도벌꾼들의 도끼질을 당하면서 지체아가 되었다. 긴 세월 학생, 민주인사들의 수혈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민주주의의 가녀린 묘목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순이 돋고 부활하는 듯 보였다.

장장 18년의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시대가 오는 것으로 알고 환호하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유신잔당의 퇴진과 악덕기업의 처벌을 주장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전히 신군부의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움츠렸던 기자들도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화창난만하다. 생명이 약동하여 만화백초가 다투어 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5월은 4월을 대신하여 ‘잔인한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5ㆍ16쿠데타 때문이었다. 다시 정치의 계절 5월을 맞은 국민은 지난 폭압의 세월보다 새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간혹 외신에서 불길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보도관제로 일반 국민은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근거없이 낙관론을 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차 5월 16일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와 제주학생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5ㆍ17전국계엄 확대조치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전두환의 군사변란이었다. 5월 17일 자정에 서남동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고, 함석헌은 이날 오후에 서울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이란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시켰다. 그리고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부대를 은밀히 파견했다.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의 중지와 옥내외 시위금지, 언론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 비상계엄령이었다.

이어서 18일 새벽에는 김대중ㆍ김상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 거물급 26명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관련자 수십명도 이날을 전후하여 구속하였다. 5ㆍ17군사반란이 자행된 것이다.

5월 18일부터 광주시민들이 군사변란에 저항하자 신군부는 학생,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정권찬탈에 나섰다. 사망 240명, 행방불명 409명, 부상 2052명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정유린이고 국가변란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권력을 도득하고, 이땅에서는 18년 전의 5월보다 더 잔혹한 5월이 반복되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함석헌은 위험을 무릅쓰고 5월 26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를 삼켜야 했다.

7월호 <씨알의 소리>에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은 <治人事天莫若人-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다>를 썼다.

옛날 두목지(杜牧之)란 사람의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글이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이름이 높습니다. 내용인 즉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것이 옳은 이치로 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억지로 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압으로 천하 민중의 기운을 죽임으로써 하려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는데, 몇 날이 못가고 망했다.

그 원인이 뭐냐? 스스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악으로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누구나 보는 사람이 책을 덮어놓고는 긴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절이 있습니다.(한문 생략)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노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외로운 한 지아비(진시황) 마음이 날로 갈수록 교만하고 완고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도리어 천하 인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이곳 저곳서 반군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되어, 어떤 군대를 가지고도 깨칠 수 없다던 함곡관이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후략)

욧점을 말한다면, 씨알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알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 없고 훗 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 뿐일 것입니다.
(주석 1)

제95호(1980년7월호)

무서운 글이다. 함석헌은 광주시민 학살과 민주헌정을 짓밟는 전두환을 진시황에 비유하면서 반드시 망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계엄령의 서릿발치는 5공 초기에 쓰인 글이다. 5ㆍ16때 <5ㆍ16을 어떻게 볼까?> 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했다. 무식한 검열관들이 놓친 것이다. 옛날 고사를 끌어와 현실을 비판한 함석헌의 전략이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1일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통폐합의 조치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켰다.
1970년 4월 창간하여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의 폐간 이후 두번째 당한 폐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약된 인쇄소가 아니라는 이유라도 댔지만 전두환은 그런 저런 이유도 없었다. 막무가내 막가파식이었다. 함석헌은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의 통지를 보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은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는 죽여도 ‘씨알’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80년 7월호,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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