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2/12/3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자신의 존재와 <사상계>의 위상을 한층 돋보이게 한 글은 1957년 3월호에 쓴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이다. ‘할 말’은 주권재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부터 국민들은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권력은 반드시 변칙으로 종말을 고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다가 망했다. 함석헌의 이 논설은 <사상계>를 통한 최초의 대사회 발언이었다. 앞서 소개한 몇 편의 글이 대부분 기독교와 종교, 윤리 차원의 문제 제기였다면 이번 논설은 시사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본격적인 첫번째 노호(怒號)이었다.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풀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 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것 아니냐?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오만 있어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는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더기 떼같이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친 년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구정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재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산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라! 제발 그런 소리 맙시사! 시대착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름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스야 벌써 죽은지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할 수 없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가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함석헌의 이 평론은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상이다.
이 글은 <사상계>를 돋보이게 할 글이요, 함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놀라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한 글이다. …각계의 반응은 충격적으로 나타났다. 시원하고 통쾌한 글이라는 사람, 독설이 심하다는 사람, 또 너무 독선적이라고 하는 사람, 하여간 우리 인텔리 사회에 크나큰 화제를 던진 글임에 틀림없었다. 1956년 1월호에 발표한 함 선생님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에서 크게 분개하여 <신세계>지에 반박 논문을 썼던 윤형중 신부는 이 글 <할 말이 있다>에 대한 반박 논문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를 기고해 왔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1)
함석헌의 이 글은 ‘논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한국가톨릭을 대변해 온 윤형중 신부가 신랄한 반론을 제시하여 <사상계> 지상을 통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윤형중의 반론은 5월호 <사상계>에 게재되었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을 극렬하게 반박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오열(五列) 냄새’가 난다고까지 극언했다.
함 선생이 신부가 안 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설령 신부가 되겠다 할지라도 천주교회는 ‘모가지가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함 선생 같은 욕설가, 험구가, 모든 것을 혼동시만 하여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그런 인물을 신부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주석 2)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 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함 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如何)? (주석 3)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전은 이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글을 통해 반론을 폈다. 그러나 글의 형식은 윤 신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주석 4)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혀두고자 하는 말이 있다. 함석헌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형중은 뒷날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로서 유신체제와 싸우면서 함석헌과 ‘화해’하고 1979년 6월 15일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민주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 글에서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사상계>가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 중에서 일부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나는 윤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왜 없냐? 공개토론 하자는 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일인 듯 하나 겁이 나서는 아니다.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잡지사가 깎았다는 부분은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사실은 내 성의껏 말한 담엔 어떤 일을 당해도 좋다 생각했다. 군인ㆍ경찰ㆍ위력도 두려워 하고 싶지 않은 데 신부 한 사람 두려워 할까?”
<사상계>가 함석헌의 글에서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부분을 삭제하고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 독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 ‘역린(逆鱗)’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준하는 아직 이승만 독재체제에 정면 도전을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저자)는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참으로 놀랐다.
함석헌의 반론에 대해 윤형중의 재반론이 <사상계> 7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러는 동안 <사상계>는 시중의 화제가 되고 공전의 판매 부수를 늘리게 되었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작은 한옥을 지어 입주했다. 1956년의 일이다. ‘원효로 4가’는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거점이 되고, 저항언론 <씨알의 소리> 편집실이 되었다. 한 번의 대종교 발언으로 그의 글과 말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상계>는 거듭 거의 글을 청해 실었다. 기독교 비판 논설이 예상 외의 반향을 일으키고, 책의 판매도 크게 증가하면서 단골 필자로 모시게 되었다.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된 함석헌은 같은 해 4월호와 5월호에 <새 윤리>를 상하에 걸쳐 발표하고, 9월호에는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라는 좌담회에 유진오ㆍ백낙준ㆍ김필봉ㆍ윤일선과 함께 참가했다. 당대의 명사들이다.
이어서 10월호에 <진리에의 향수>, 12월호에 <사상과 실천>을 썼다.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고, 그만큼 <사상계>의 지면은 충실해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함석헌의 꿈은 사회적 명사가 되는 것도, 논객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청년을 키우면서 소박ㆍ단순하게 사는 것이었다. 평양송산농사학원을 운영한 것도 그런 꿈에서였다. 1941년 가을에는 단신으로 만주 길림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길림성 참사관으로 일하는 동생 함석창을 만나는 일과, 만주 어디에 묵은 땅을 구해서 이상촌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꿈이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이래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촌ㆍ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있었다. 노자의 ‘이상사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칼빈의 ‘기독교국가’, 박지원의 ‘허생전’, 푸리에의 ‘노동사회의 유토피아’, 아나키스트들의 ‘절대공동체’가 이에 속한다.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중국과 몽골, 러시아 지역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군사를 키워 일제와 싸우려는 비전을 제시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함석헌은 만주에서 실망하고 돌아왔다. 연암 박지원이 1780년 건륭제 축하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중원을 지나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하며 목을 놓아 통곡했다는 사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 말년에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혼자서 울음이 북받쳐 나와 참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연한 벌판을 보니 “원, 이놈들이 동지사(冬至使)랍시고 적어도 해마다 한 두 차례는 이 벌판을 봤을 텐데 이것 한 번 도로 찾아 살아보잔 생각은 못하였단 말이냐?” 하는 분한 생각에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중국놈들, 만주놈이 일본 흉내 내려고 하는 꼴을 보고 “우리 꼴도 저 꼴이겠구나”하는 슬픈 생각에서였다. (주석 6)
주석
1> 장준하, <사상계지 수난사>, <장준하문집> 3, 134쪽.
2> 윤형중,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사상계>, 1957년 5월호, 45쪽.
3> 앞의 책, 49쪽.
4> <사상계>, 1957년 6월호, 282~283쪽.
5> 이 부문, 김삼웅, <장준하 평전>, 354~360쪽, 인용.
6>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27쪽.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풀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 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것 아니냐?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오만 있어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는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더기 떼같이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친 년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구정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재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산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라! 제발 그런 소리 맙시사! 시대착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름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스야 벌써 죽은지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할 수 없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가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함석헌의 이 평론은 한국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상이다.
이 글은 <사상계>를 돋보이게 할 글이요, 함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놀라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한 글이다. …각계의 반응은 충격적으로 나타났다. 시원하고 통쾌한 글이라는 사람, 독설이 심하다는 사람, 또 너무 독선적이라고 하는 사람, 하여간 우리 인텔리 사회에 크나큰 화제를 던진 글임에 틀림없었다. 1956년 1월호에 발표한 함 선생님의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에서 크게 분개하여 <신세계>지에 반박 논문을 썼던 윤형중 신부는 이 글 <할 말이 있다>에 대한 반박 논문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를 기고해 왔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1)
함석헌의 이 글은 ‘논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한국가톨릭을 대변해 온 윤형중 신부가 신랄한 반론을 제시하여 <사상계> 지상을 통해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윤형중의 반론은 5월호 <사상계>에 게재되었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을 극렬하게 반박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오열(五列) 냄새’가 난다고까지 극언했다.
함 선생이 신부가 안 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설령 신부가 되겠다 할지라도 천주교회는 ‘모가지가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함 선생 같은 욕설가, 험구가, 모든 것을 혼동시만 하여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그런 인물을 신부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주석 2)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 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함 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如何)? (주석 3)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전은 이어졌다. 함석헌이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글을 통해 반론을 폈다. 그러나 글의 형식은 윤 신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주석 4)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혀두고자 하는 말이 있다. 함석헌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형중은 뒷날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로서 유신체제와 싸우면서 함석헌과 ‘화해’하고 1979년 6월 15일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민주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 글에서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사상계>가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 중에서 일부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나는 윤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왜 없냐? 공개토론 하자는 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비겁한 일인 듯 하나 겁이 나서는 아니다.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잡지사가 깎았다는 부분은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사실은 내 성의껏 말한 담엔 어떤 일을 당해도 좋다 생각했다. 군인ㆍ경찰ㆍ위력도 두려워 하고 싶지 않은 데 신부 한 사람 두려워 할까?”
<사상계>가 함석헌의 글에서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부분을 삭제하고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 독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 ‘역린(逆鱗)’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준하는 아직 이승만 독재체제에 정면 도전을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저자)는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참으로 놀랐다.
함석헌의 반론에 대해 윤형중의 재반론이 <사상계> 7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러는 동안 <사상계>는 시중의 화제가 되고 공전의 판매 부수를 늘리게 되었다. 이 논쟁의 시기에 <사상계>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형편으로 판매부수 4만부 선을 육박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 지식층의 관심을 한 몸에 모은 잡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작은 한옥을 지어 입주했다. 1956년의 일이다. ‘원효로 4가’는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거점이 되고, 저항언론 <씨알의 소리> 편집실이 되었다. 한 번의 대종교 발언으로 그의 글과 말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상계>는 거듭 거의 글을 청해 실었다. 기독교 비판 논설이 예상 외의 반향을 일으키고, 책의 판매도 크게 증가하면서 단골 필자로 모시게 되었다.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된 함석헌은 같은 해 4월호와 5월호에 <새 윤리>를 상하에 걸쳐 발표하고, 9월호에는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라는 좌담회에 유진오ㆍ백낙준ㆍ김필봉ㆍ윤일선과 함께 참가했다. 당대의 명사들이다.
이어서 10월호에 <진리에의 향수>, 12월호에 <사상과 실천>을 썼다.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고, 그만큼 <사상계>의 지면은 충실해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함석헌의 꿈은 사회적 명사가 되는 것도, 논객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청년을 키우면서 소박ㆍ단순하게 사는 것이었다. 평양송산농사학원을 운영한 것도 그런 꿈에서였다. 1941년 가을에는 단신으로 만주 길림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길림성 참사관으로 일하는 동생 함석창을 만나는 일과, 만주 어디에 묵은 땅을 구해서 이상촌을 건설해 보고자 하는 꿈이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이래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촌ㆍ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오랜 열망이 있었다. 노자의 ‘이상사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칼빈의 ‘기독교국가’, 박지원의 ‘허생전’, 푸리에의 ‘노동사회의 유토피아’, 아나키스트들의 ‘절대공동체’가 이에 속한다.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중국과 몽골, 러시아 지역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군사를 키워 일제와 싸우려는 비전을 제시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함석헌은 만주에서 실망하고 돌아왔다. 연암 박지원이 1780년 건륭제 축하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중원을 지나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하며 목을 놓아 통곡했다는 사력을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 말년에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혼자서 울음이 북받쳐 나와 참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연한 벌판을 보니 “원, 이놈들이 동지사(冬至使)랍시고 적어도 해마다 한 두 차례는 이 벌판을 봤을 텐데 이것 한 번 도로 찾아 살아보잔 생각은 못하였단 말이냐?” 하는 분한 생각에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중국놈들, 만주놈이 일본 흉내 내려고 하는 꼴을 보고 “우리 꼴도 저 꼴이겠구나”하는 슬픈 생각에서였다. (주석 6)
주석
1> 장준하, <사상계지 수난사>, <장준하문집> 3, 134쪽.
2> 윤형중,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사상계>, 1957년 5월호, 45쪽.
3> 앞의 책, 49쪽.
4> <사상계>, 1957년 6월호, 282~283쪽.
5> 이 부문, 김삼웅, <장준하 평전>, 354~360쪽, 인용.
6>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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