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8장] 독재자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
2013/01/0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57년 3월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였다.
30년간(당시) 이발사로 일하면서 농지를 사모은 정만수가 농장을 만들어서 경영을 맡긴 것이다. 그는 일제말기 천안 자기 집에서 농촌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다가 위험인물로 찍혀 1년 간 옥고 끝에 해방되던 해 3월에 풀려난 기독교인이다.
6ㆍ25전쟁 때에는 부산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 함석헌의 강의를 듣게 되고 이어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읽었다. 이어서 부산 YMCA에서 함석헌의 <성경>,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종교와 사상에 뜻을 같이 하였다.
전후에는 서울의 중앙대, 고대 등 대학구내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틈틈이 땅을 사모아 농장을 조성하여 함석헌을 초청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20년간 더 이발사를 하였다.
나는 일생을 남의 머리를 깎으며 살아왔다. 수 없는 사람의 머리가 내 손을 거쳐 갔지만 함 선생만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 없구나! 지금도 선생은 꼭 내손에 의해 이발을 하고 가신다. 나는 이 천직처럼 살아온 이발로 이제 선생을 이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람으로 만족한다. (주석 7)
함석헌은 정만수의 제안을 처음에는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선량한 사람이 평생 이발을 하여 마련한 농장을 인수하여 경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부탁이 워낙 강하고 진정성이 있어서 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농장을 간디가 요하네스버그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운영하면서 60명 동지들과 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해 보잔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장이름을 ‘씨알농장’이라 지었다. ‘씨알’이란 이름의 본격 사용은 이때가 처음이다. 물론 이 용어는 유영모가 ‘창안’한 것이다.
“언젠가 대학(大學) 강의를 하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大學之道 在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민(民)을 씨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대로 써 와서 이제 10년이 넘습니다.” (주석 8)
함석헌은 이 농장에 ‘씨알농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농장은 본래 땅주인이던 정만수 님이 30년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 직후 과일 나무를 심은 것으로 시작됐고, 그후 김병태 님이 그것을 맡아 그 목적으로 강당까지 짓기 시작했던 것을 경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될 형편에 빠져 내가 맡게 되었다. 정성은 물론 모자라고 사업의 재주가 도무지 없는 나로서 스스로 그 적당치 않은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은, 하나는 정님(정만수-필자)의 막아낼 수 없는 간청이요, 하나는 오산시절 이래로 그리는 나의 농촌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주석 9)
씨알농장의 운영은 쉽지가 않았다. 본래 농민이 아닌 그로서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당시 농촌 현실에서 집단형 농업이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방 농민과는 친구가 됐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내 죄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글공부 한 것이 죄가 되어 이러는 듯하다.(…) 우리 살림이라야 별것 없다. 4시면 일어나 찬물로 잘 때 씻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나 부르고 한 시간 명상이나 하고 보리밥에 배를 불린 다음엔 어둡도록 땅 파는 일이요, 짐승에 모이 주는 일이요, 10시에는 내일 해가 틀림없이 머리 위에 뜰 것을 믿고 누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가 있다면 봄에는 새벽 4시부터 반주를 해주는 푸른 공중의 종달새요, 가을엔 밤이 늦도록 노래하는 벽 틈의 귀뚜라미다. (주석 10)
함석헌은 씨알농장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삿일을 하고 닭을 길렀다. 평평한 농지에는 보리ㆍ고구마ㆍ콩을 심고, 비탈진 땅엔 복숭아와 사과 등 과수나무를 심었다. 청년 몇 명이 참여하여 일손을 돕고, 밤이면 이들에게 강의하고 토론을 하였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뒷날 이 책을 번역하여 펴냈다.
주석
7> 정만수, <존경하는 함석헌선생>, <세계>, 1960년 4월호.
8> 함석헌, <씨알>, <씨알의 소리>, 창간호, 1970년 4월호.
9> 함석헌, <씨알의 설움>, <전집> 4, 72쪽.
10> 앞의 책, 73~74쪽.
30년간(당시) 이발사로 일하면서 농지를 사모은 정만수가 농장을 만들어서 경영을 맡긴 것이다. 그는 일제말기 천안 자기 집에서 농촌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다가 위험인물로 찍혀 1년 간 옥고 끝에 해방되던 해 3월에 풀려난 기독교인이다.
6ㆍ25전쟁 때에는 부산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 함석헌의 강의를 듣게 되고 이어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읽었다. 이어서 부산 YMCA에서 함석헌의 <성경>, <노자>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종교와 사상에 뜻을 같이 하였다.
전후에는 서울의 중앙대, 고대 등 대학구내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틈틈이 땅을 사모아 농장을 조성하여 함석헌을 초청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20년간 더 이발사를 하였다.
나는 일생을 남의 머리를 깎으며 살아왔다. 수 없는 사람의 머리가 내 손을 거쳐 갔지만 함 선생만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 없구나! 지금도 선생은 꼭 내손에 의해 이발을 하고 가신다. 나는 이 천직처럼 살아온 이발로 이제 선생을 이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람으로 만족한다. (주석 7)
함석헌은 정만수의 제안을 처음에는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선량한 사람이 평생 이발을 하여 마련한 농장을 인수하여 경영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부탁이 워낙 강하고 진정성이 있어서 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농장을 간디가 요하네스버그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운영하면서 60명 동지들과 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해 보잔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장이름을 ‘씨알농장’이라 지었다. ‘씨알’이란 이름의 본격 사용은 이때가 처음이다. 물론 이 용어는 유영모가 ‘창안’한 것이다.
“언젠가 대학(大學) 강의를 하시다가 ‘대학지도 재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大學之道 在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풀이하시는데 ‘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민(民)을 씨알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이 참 좋아서 기회 있는대로 써 와서 이제 10년이 넘습니다.” (주석 8)
함석헌은 이 농장에 ‘씨알농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농장은 본래 땅주인이던 정만수 님이 30년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 직후 과일 나무를 심은 것으로 시작됐고, 그후 김병태 님이 그것을 맡아 그 목적으로 강당까지 짓기 시작했던 것을 경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될 형편에 빠져 내가 맡게 되었다. 정성은 물론 모자라고 사업의 재주가 도무지 없는 나로서 스스로 그 적당치 않은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은, 하나는 정님(정만수-필자)의 막아낼 수 없는 간청이요, 하나는 오산시절 이래로 그리는 나의 농촌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주석 9)
씨알농장의 운영은 쉽지가 않았다. 본래 농민이 아닌 그로서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당시 농촌 현실에서 집단형 농업이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방 농민과는 친구가 됐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내 죄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글공부 한 것이 죄가 되어 이러는 듯하다.(…) 우리 살림이라야 별것 없다. 4시면 일어나 찬물로 잘 때 씻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나 부르고 한 시간 명상이나 하고 보리밥에 배를 불린 다음엔 어둡도록 땅 파는 일이요, 짐승에 모이 주는 일이요, 10시에는 내일 해가 틀림없이 머리 위에 뜰 것을 믿고 누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가 있다면 봄에는 새벽 4시부터 반주를 해주는 푸른 공중의 종달새요, 가을엔 밤이 늦도록 노래하는 벽 틈의 귀뚜라미다. (주석 10)
함석헌은 씨알농장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농삿일을 하고 닭을 길렀다. 평평한 농지에는 보리ㆍ고구마ㆍ콩을 심고, 비탈진 땅엔 복숭아와 사과 등 과수나무를 심었다. 청년 몇 명이 참여하여 일손을 돕고, 밤이면 이들에게 강의하고 토론을 하였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뒷날 이 책을 번역하여 펴냈다.
주석
7> 정만수, <존경하는 함석헌선생>, <세계>, 1960년 4월호.
8> 함석헌, <씨알>, <씨알의 소리>, 창간호, 1970년 4월호.
9> 함석헌, <씨알의 설움>, <전집> 4, 72쪽.
10> 앞의 책,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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