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長江)과 착월대(捉月臺)   동영상 출처: EBS
임종가(臨終歌) / 李白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中天儶兮力不濟(중천최혜력부제)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가 몇 천 리에 이른다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 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천약불애주,주성부재천)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지약불애주,지응무주천)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술을 뜻하는 글자를 가진 별과 땅 이름이 있으니,

하늘과 땅도 술을 좋아함이 틀림없기에 술을 마시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별 이름이나 땅 이름은 말할 것 없이 인간이 붙였겠지만 시인은 짐짓 모른 체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도 청주를 성인에 비기고 막걸리를 현인이라 하니,

청주와 탁주를 모두 마신 나라 따로 신선을 구하려고 애쓸 것이 무언가 바로 내가 신선인데.

술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에 합치되는 것이라,


다만 술 마시고 느끼는 흥취를 얻으면 되나니 이 취중취를 술 못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말지니라.

그들이 이 맛을 알게 되면 세상의 술이 동이 날 것이 아닌가,

또 주중취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다.


하루에 3백 잔 술을 마셔야 성이 차고, 임금이 불러도

“저는 酒中仙(주중선, 술 속의 신선 곧 술로 속세의 일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가지 않은 이백이니,

이러한 작품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당투(當塗)와 차이스지(采石磯)    동영상 출처: EBS

이백과 두보의 교류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에 살았는데, 두보가 이백보다 11살 어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744년 봄으로, 이백은 한림공봉으로 재직하다가 궁궐에서 물러나서 낙양을 노닐고 있을 때였고 두보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에 천하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백은 이미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으며, 두보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각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두보는 이백을 거의 우상으로 숭배할 정도로 우러러 보았지만 이백에게 있어서 두보는 아직 한갓 문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술을 마시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나이를 잊은 우정을 과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듬해에 다시 한번 더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고적 등과 함께 산동에서 만나서 어울려 노닌 후 헤어지고는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두보는 항상 이백을 흠모하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현재 그들이 서로를 위해 지은 시는 두보의 시가 10여 수 정도 남아 있고 이백의 시는 3수가 남아 있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春日憶李白(춘일억이백) - 봄 날에 李白을 생각하며 / 杜甫(두보)

白也詩無敵,(백야시무적) 이백은 시가 무적이니 
飄然思不群.(표연사불군) 표연하여 그 생각이 남들과 달라서,
淸新庾開府,(청신유개부) 청신함은 유신과 같고 
俊逸鮑參軍.(준일포참군) 준일함은 포조와 같네.
渭北春天樹,(위북춘천수) 위수 북쪽에는 봄 하늘의 나무 
江東日暮雲.(강동일모운) 강 동쪽에는 해질 무렵의 구름.
何時一樽酒,(하시일준주) 언제나 한 동이 술로 
重與細論文.(중여세논문) 다시 더불어 자세히 글을 논할까? 
두보(712~770)의 오언율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이다. 
봄날에 이백(701~762)을 생각하는 두보의 이 시에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춘수모운(春樹暮雲)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위수(渭水)의 북쪽인 위북은 당시 두보가 머무르고 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키며

강동은 이백이 떠돌던 강남(江南)을 말한다.

이 시는 비교적 많이 읽힌 작품으로 玄宗 天寶(현종 천보) 6년(747) 36세 때에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첫머리에 ‘白也’라 하여 이백을 높이지 않았으나, 이어서 ‘無敵’이니 ‘不群’이라 표현하여

최고의 讚辭(찬사)를 보내고, 이어 2연[3~4구]에서는 유신과 포조를 들어 그를 찬양했다.

3연[5~6구]에서 전환하여 그를 그리는 정을 표출하여 ‘그대가 없는 여기 장안의 봄이 무슨 뜻이 있으며, 그대가 있는 강남의 저녁노을 구름도 내가 없으니 제 빛을 내랴.’하고 읊어, 이백을 향한 지극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 구절은 특히 對句(대구)가 멋져서‘渭水江雲(위수강운), 暮雲春樹(모운춘수), 雲樹之懷(운수지회), 春樹暮雲情(춘수모운정)’ 이라는 새로운 語彙(어휘)가 생기게 되어 ‘먼 곳의 벗을 생각하는 간절한 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니, 시인의 어휘 창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는 언제 만나 함께 술 마시며 시와 글에 대해 논할 수 있으랴 하고 시인답게 끝맺어, 더불어 대화할 상대는 오직 이백뿐이라는 뜻을 숨겼다. 그런데도 이 둘은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두시언해’에서 이백과 관련된 시는 모두 8수인데, 이 시 외에 ‘冬日有懷李白(동일유회이백)’ ‘夢李白(몽이백)’ ‘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송공소보사병귀유강동겸정이백)’ ‘與李十二白同尋范十隱居(여이12백동심범10은거)’ ‘贈李白(증이백 2수)’ ‘天末懷李白(천말회이백)’ 등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744년, 당 현종 때인 천보(天寶) 3년 낙양(洛陽)에서 처음 만났다. 칭화(淸華)대 중문과 교수였던 원이더(聞一多·1899~1946)의 표현처럼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듯 중국 역사상 가장 신성하고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다.

둘은 1년 여 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했지만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처음 만난 지 3년 뒤인 35세 때다.

시에 나오는 유개부는 북주(北周)의 문학가 유신(庾信·513~581)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지내 ‘유개부(庾開府)’로 불렸다.

포참군은 참군(參軍) 벼슬을 한 남북조ㆍ송대(宋代)의 시인 포조(鮑照·414?~466)다. 고려 후기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의 시에도 ‘淸新庾開府 終始郭汾陽(청신유개부 종시곽분양)’이라는 대목이 있다. 시풍이 청신함은 바로 유개부요, 부귀로 시종하기는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로다, 이런 뜻이다.


夢李白(몽이백)- 꿈 속에 이백을 보다 / 杜甫(두보)

浮雲終日行(부운종일행) : 뜬 구름 종일토록 하늘을 떠다녀도
遊子久不至(유자구불지) : 떠난 친구는 오래도록 오지 않네
三夜頻夢君(삼야빈몽군) : 한밤에 자주 그대를 꿈속에서 보니
情親見君意(정친견군의) : 우정의 친함으로 그의 마음을 보노라
告歸常局促(고귀상국촉) : 돌아간다 말할 때 항상 풀 죽어 보이고
苦道來不易(고도래불역) : 돌아오기 어렵다 괴롭게 말하네
江湖多風波(강호다풍파) : 강호에 풍파 잦고
舟楫恐失墜(주즙공실추) : 배 젓는 노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네
出門搔白首(출문소백수) : 문 나서며 흰머리 긁는 것이
若負平生志(약부평생지) : 평생의 뜻을 저버린 듯 하구네
冠蓋滿京華(관개만경화) : 높은 벼슬아치들 서울에 가득한데
斯人獨憔悴(사인독초췌) : 이 사람 내 친구는 홀로 얼굴 수척하다
孰云網恢恢(숙운망회회) : 누가 말했나, 하늘의 그물이 한없이 넓다고 
將老身反累(장로신반루) : 늙어서 몸이 도리어 법망에 걸려들었네
千秋萬歲名(천추만세명) :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해도
寂寞身後事(적막신후사) : 죽은 뒤의 일은 적막하기만 하다. 
​[참고]
* 중국의 한시의 최고봉은 당시인데 양한시대를 거쳐 육조시대에 이르러 시의 평측법과 압운법이 완성되어 
중국발음으로 한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노래가 된다.
이 당나라 시대에 두 천재시인 이백과 두보가 열 살 차이로 동시대에 태어나 낙양에서 조우하기도 했다.[이백이 11세 많음]
도가사상에 바탕한 이백의 시가 초월적 상상력에 비견할 자가 없다면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두보의 사실주의 시는 
현실비판 측면에서 당할 자가 없다.

贈李白(증이백) - 이백께 드리는 시 / 杜甫(두보)

秋來相顧尙飄蓬,(추래상고상표봉) 가을 와 서로 돌아 보니 아직도 떠도는 쑥인데, 
未就丹砂愧葛洪.(미취단사괴갈홍) 단사를 이루지 못해 갈홍에게 부끄러워한다.
痛飮狂歌空度日,(통음광가공도일) 통쾌하게 마시고 미친 듯 노래 부르며 헛되이 날을 보내거니와, 
飛揚跋扈爲誰雄.(비양발호위수웅) 날아 오르고 뛰어 넘으니 누구 위해 영웅인양 하는가.

魯郡東石門送杜二甫(노군동석문송두이보) -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다 / 李白

醉別復幾日,(취별부기일) 취하여 이별한 지 또 며칠이 지났던가? 
登臨徧池臺.(등림편지대) 못가의 누대를 두루 올라 굽어보았지. 
何時石門路,(하시석문로) 어느 때 석문의 길가에서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금 황금 술단지를 열 수 있을까? 
秋波落泗水,(추파낙사수) 가을이 되니 사수의 물결은 낮아지고 
海色明徂徠.(해색명조래) 새벽빛으로 조래산은 환해졌네.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 날리는 쑥처럼 각자 서로 멀어지니 
且盡手中杯.(차진수중배) 손에 든 술잔이나 비우세

戱贈杜甫(희증두보) - 두보에게 농담조로 주다 / 李白

飯顆山頭逢杜甫,(반과산두봉두보) 반과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頂戴笠子日卓午.(정대입자일탁오) 머리에는 삿갓을 썼으니 대낮이라네. 
借問別來太瘦生,(차문별래태수생) 이별 한 뒤로 너무 말랐다고 물어보니 
總爲從前作詩苦.(총위송전작시고) 여태까지 시 짓느라 고생해서 그렇다네. 
 * 飯顆山= 일명 長樂坡라고도 하여 서안시 근처에 있는 산이라 하는데 語意대로 말하자면 밥풀산이 된다
別來= 헤어진 뒤에
太瘦生[태수생]= 매우 수척한 서생, 시를 짓느라 고생해서 수척해진 것을 뜻함
總爲[총위= 모두 ~ 때문이다.
註: 이 시는 이백이 44세 때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러면 두보는 32살 때이니 한참 후배로 생각했을 것이다. 
飯顆山이니 太瘦生이니 하여 詩題처럼 두보를 희롱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마는 마지막 두 句를 보면 
戱謔은 하면서도 깊은 정이 베어 있어 희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시로 인해 詩作으로 고생하는 시인을 보고 태수생이라 부른다.
이백의 시가 폭포수 같이 시원 하다면 두보는 밥풀을 세이듯 한자 한자 따지는 꼼꼼한 시인으로 
서로 상반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 李白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에 이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천리길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이백은 만년에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거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그도 체포되어 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에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이백은 자신의 사면 소식을 접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은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라는 뜻이다. 백제성은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산성이며,
강릉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으로 두 곳의 거리는 양쯔강의 물길로 약 300㎞이다. 
양안(兩岸)은 무산(巫山)과 협산(峽山)의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그 사이로 양쯔강이 흘러가는데 강폭이 좁아 유속(流速)이 최고 시속 24㎞에 이를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또 이곳은 원숭이들이 많은 지역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백은 한시라도 빨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아침 일찍 서둘러 백제성을 떠나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강가 양쪽 언덕에서 쉼없이 울어대던 원숭이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세찬 물살에 가벼워진 배는 겹겹이 쌓인 산들을 빠르게 지나 천리길 같은 강릉에 하루만에 도착한다.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빠른 물살처럼 경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이백의 명작 중의 하나이다. 
백제성에서 무협을 거쳐 호북성의 강릉까지 뱃길로 천 3백여 리요, 그 중 골짜기 길이가 7백 리나 되는 먼 거리인데, 
그 먼 길을 아침에 떠나 하루에 닿았다 하니, 강의 흐름의 빠름과 배가 얼마나 빨리 떠내려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강기슭의 원숭이 울음이 자꾸 뒤로 뒤로만 밀린다 했다. 
아침노을, 빠른 강 흐름과 똑같이 빠른 배, 산으로 첩첩이 쌓인 강 언덕 등 敍景(서경) 중심의 작품이다.
白帝 : 白帝城(백제성). 重慶市(중경시)와 湖北省(호북성) 사이의 巫峽(무협) 부근에 있는 성.1)
彩雲 : 빛깔이나 무늬가 있는 구름.
江陵 : 지금의 호북성 荊州市(형주시).
啼不住 : 원숭이 울음소리가 한 곳에서 계속 들리지 않고 없어져 버림. 배가 빨리 달리는 모양을 강조한 말임.
輕舟 : 가볍고 빠른 작은 배.


청풍정(淸風亭) 이백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던 곳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글씨 將進酒(장진주)  모택동은 당대 문장과 문필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청풍정 뒷편에 있다.


將進酒(장진주;술 한 잔 받으시오) / 李白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하였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바다로 내 닫아서는 돌아오지 않았음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 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 밝은 거울에 비친 서글픈 백발,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때 백설 됨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 젊어 득의 찰 때 즐기기를 다할지니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금 술통 헛되이 달빛아래 두지 말지어다.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쓸모가 있었음인데,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돈이야 흩어졌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니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염소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기로 작정하면 삼백 잔은 마실 일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거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노래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귀 기우려 들어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 맛있는 음식 귀 할 것도 없으니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원커니 이대로 취하여 부디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들도 지금 모두 사라져 없고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 잘 마시던 이들의 이름만 남았다네.
晉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이 평락관에서의 연회,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히도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여보시게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라다 하나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어서 가서 술 사오시게 같이 한잔 하자고야
五花馬千金구(오화마천금구)     오화마,천금구 따위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어서 술과 바꿔오시게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우리 함께 더불어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구:가죽옷 구(求+衣)

주)
1. 고당 : 고대광실, 호화주택
2. 청사 : (청년 시)의 검은머리.
3. 잠부자 : 이백의 친구 잠삼(岑參)
4. 단구생 : 이백의 친구 원단구(元丹丘)
5. 진왕 : 조조의 셋째 아들, 칠보시로 유명한 조비의 동생인 조식(曺植). 진왕에 봉해졌고, 시호가 사(思)이므로 진사왕이라 한다.
6. 평락 : 낙양의 평락관.
7. 경수 : 지금 바로....해야 한다
8. 고취 : 사오다. 고(沽)=매(買)
9. 오화마 : 다섯 가지 털 무늬가 있는 명마.
10. 천금구 : 천금의 가치가있는 비싼 가죽 옷.





취라산 삼태각


연벽대(聯璧臺)


 30cm/40cm 정도의 크기로 깊게 각인된 글씨에는 붉은 페인트가 거칠게 칠해져 있는데

그 글씨 바로 아래에 조금 작은 글씨로 ‘착월대(捉月臺)’라는 각인 또한 뚜렷하게 보인다.

글자 그대로 달을 잡으려한 바위라는 뜻.


여기에서 술을 마시던 이백이 술에 취하고 강물에 비친 달빛 경치에 취해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암반에서 강의 수면까지 50여m는 될 듯한데 암반이 안으로 굽어 그 곳에서 몸을 던지면

아무런 지장없이 곧바로 강으로 떨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백은 소년 시절에 이미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격은 활달하였다.

깊은 학식과 검술를 갖춘 이백은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어느 날, 현종은 이백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였다.

"벼슬 한 자리 내리시려나 ?"
이백은 가슴이 부풀었으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잔치 때, 짐 곁에서 시나 좀 지어 주고 지내시오."
그것은 궁정 시인이 되라는 부탁이었다.


이백은 궁정에서 시를 짓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면서 지냈다. 

'아 ! 고향에 가고 싶구나.'


이백은 궁정 생활이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하루는 이백이 궁궐을 빠져나와 번화가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잔뜩 취했을 때, 이 무렵의 명가수인 이귀년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시를 지으시라 하오.그것을 내가 불러야 하는데………."
이귀년은 술이 곤드레 만드레 취한 이백을 들쳐 업고 궁궐로 돌아갔다.

당시 궁중 실력자이던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백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백의 신발을 벗기는 고력사(高力士)


당나라 현종은 흥경궁 공원에서 붉은빛, 자줏빛, 분홍빛, 새하얀 빛의 모란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가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양귀비(楊貴妃)와 빠져 지냈다.


양귀비와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백(李白)을 불러오라 명한다.

공교롭게도 이백은 잔뜩 취해 있다.


황제 앞에 불려 와서도 여전히 취한 상태다.

현종은 그를 곁으로 올라오게 한다.


"내 신, 신 좀 벗겨."
이백은 당대 궁중의 실력자 환관 고력사에게 발을 내밀었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고력사이건만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노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만 안취했으면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물을 얼굴에 뿜어도 이백은 술이 깨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백에게 현종이 어서 시를 지으라고 재촉한다.

붓을 집어든 이백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 내려간다.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이귀년은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모란)과 미인(양귀비) 덕분에

온갖 근심을 날리고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웃음 짓는 군왕(현종)을 노래했다.


하지만 현종과 양귀비를 모두 만족시킨 이 시가 뜻밖에도 화근이 될 줄이야!

조비연(趙飛燕)도 양귀비보다 못할 거라는 구절이 문제였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왕실을 망가뜨린 악녀의 전형이다.

물론 이백은 조비연을 미인의 대표 격으로 인용했지만,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야 했던 고력사가 이 구절을 트집 잡아 양귀비에게 참소한다.


"이백은 귀비를 한나라 성제의 총희인 조비연에 비유하여 비난하고 있습니다."
양귀비는 이 말을 듣고 이백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종은 이백에게 궁을 떠날 것을 명한다.

〈청평조의 가사〉에는 사실 양귀비를 비난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이 시는 이백의 명작이다.

이백은 스스로를 ‘술에 취한 신선’이라고 했다.


이백은 청평조사에서 ‘경국(傾國)’이라는 말로 미인을 표현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 황제가 미혹되어 나라의 위기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에겐 죄가 없다.

미혹된 황제가 죄인일 뿐. 현종도 그리고 태종도 자신의 갖가지 욕망 앞에서 무너졌다.

그들의 진짜 죄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죄다.


淸平調詞 -1  청평조(淸平調)라는 음악의 곡조에 맞추어 지은 가사(歌詞)라는 뜻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구름은 옷을 꽃은 얼굴을 생각하게 하고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꽃에 맺힌 이슬은 짙게 영그네.
만일 군옥산 머리에서 본 님이 아니라면
필시 달 밝은 요대에서 만난 님이 틀림없네.


淸平調詞 -2 


一枝濃艶露凝香 일지농염노응향
雲雨巫山枉斷腸 운우무산왕단장
借問漢宮誰得似 차문한궁수득사
可憐飛燕倚新粧 가련비연의신장

한가지 농염한 모란꽃에 엉긴 이슬 향기
무산의 구름비 하염없는 단장의 슬픔이여.
한나라 궁중의 누구와 비할소냐.
조비연이 산뜻이 단장하여 아리땁구나.


淸平調詞 -3   


名花傾國兩相歡 명화경국양상환
常得君王帶笑看 상득군왕대소간
解釋春風無限恨 해석춘풍무한한
沈香亭北倚欄干 침향정북의란간

모란꽃과 경국지색 서로 반기니
왕은 웃음 띄우고 바라보네.
봄바람에 끝없는 한을 풀어 녹일 때
미인은 침향정 북쪽 난간잡고 기대네.








이백 친필 1 시권장류(詩卷長留)


두보(杜甫)의 시 - 송공소부사병귀유강동겸정리백(送孔巢父謝病歸遊江東兼呈李白,747年)
공소부가 병으로 사임하여 강동으로 돌아가 쉬려 하니 송별을 겸해서 이백에게 드린다


巢父掉頭不肯住,(소부도두불긍주)
東將入海隨煙霧。(동장입해수연무)
소부는 머리를 흔들며 머물지 않으려 하고,
강동에서 장차 바다로 가 안개 따라가려 하네


詩卷長留天地間,(시권장류천지간)
釣竿欲拂珊瑚樹。(조간욕불산호수)
길이 남을 시집을 세상에 남겨두고,
낚싯대로 산호수에 앉은 먼지 터네。


深山大澤龍蛇遠,(심산대택룡사원)
春寒野陰風景暮。(춘한야음풍경모)
깊은 산 큰 못으로 용과 이무기 멀리 떠가고,
추운 봄날 음산한 들녘에 풍경은 저물어 가네。


蓬萊織女回雲車,(봉래직녀회운거)
指點虛無是征路。(지점허무시정로)
봉래산 직녀가 구름수레 되돌려,
허황된 점 지적하니 이것이 가야 할 길이네。


自是君身有仙骨,(자시군신유선골)
世人那得知其故。(세인나득지기고)
본래 그대 몸은 비범한 골격인데,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 까닭을 알겠는가。


惜君只欲苦死留,(석군지욕고사류)
富貴何如草頭露。(부귀하여초두로)
다만 그대를 아끼기에 한사코 머물게 하고 싶지만,
부귀란 것이 어떤가 풀잎 끝 이슬이거늘。


蔡侯靜者意有餘,(채후정자의유여)
清夜置酒臨前除。(청야치주림전제)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었네。


罷琴惆悵月照席,(파금추창월조석)
幾歲寄我空中書。(기세기아공중서)
거문고 마치고 서글프게도 달은 자리를 비추는데,
그 어느 해에나 나에게 하늘서신 보내려나


南尋禹穴見李白,(남심우혈견리백)
道甫問訊今何如。(도보문신금하여)
강남에서 우 임금 무덤 찾아 보다가 이백을 만나거든,
두보가 지금은 어떠신지 묻더라고 안부 전하게。


*孔巢父: 徂徠山 竹溪六逸의 한 사람 -> 李白: 魯郡東石門送杜二甫 참조
學問을 좋아했고 永王燐이 반란을 일으키고 幕下로 불렀으나 거절했다
*珊瑚樹: 庭園樹의 한 種類
*蓬萊: 方丈, 瀛洲와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神仙이 산다고 한다.
*苦死: 한사코, 반드시
*蔡侯靜者意有餘,清夜置酒臨前除:  채후는 조용하고 마음이 넉넉하여, 맑은 밤 술을 놓고 섬돌 앞에 있는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宣王의 명을 받드는 것을 알지 못해 죄인이 되어 오랏줄에 묶인 것을 비유하여 富貴何如草頭露의 부분의 부귀란 것이 덧없다는 예를 들고 있다.
<劉向新序 雜事二 50>에  <전략> 蔡侯之事故是也。蔡侯南遊乎高陵,北經乎巫山, 逐麋麇麞鹿,彉谿子隨, 時鳥嬉遊乎高蔡之囿, 溢滿無涯,不以國家為事,不知子發受令宣王, 厄以淮水,填以巫山, 庚子之朝,纓以朱絲,臣而奏之乎宣王也。<후략>
*蔡侯: 蔡나라(BC11c~BC447)는 주대에 중국에 존재한 侯國이다. 諸侯의 성은 姬이며, 爵位는 侯爵이다. 蔡侯는 蔡나라 마지막 諸侯 姬齊(BC450~BC447)의 爵位다.
*禹穴: 禹 임금이 藏書한 동굴로 浙江省 會稽山 뒤에 있다. 禹임금이 巡狩 중 會稽山에서 崩御하여 그 자리에 장사했다.

*道: ~로부터


이백(701~762)은 장안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올라 여행을 하다가 두보(杜甫)를 만나고 두 사람은 형제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시인은 함께 하남 지방과 산동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백은 두보와 헤어져 각각 여행을 떠났다. 이백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두보(712~770)는 양양에서 태어나 하남성 공현으로 이사하였다.

자(字)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시인의 가문에서 자란 두보는 7살 때 (봉황시)를 지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두

보는 20살 때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썼다.


"과거나 한번 볼까 ?'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보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두보는 낙양에서 이백과 작별하고 다시 장안으로 올라왔다.

두보는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현종이 실시한 시험을 보았으나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간신 이림보는 자기 보다 나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까봐 시험을 본 사람 전체를 낙방시켰다.

두보는 장안에 머물며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자식이 굶어 죽는 것까지도 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두보는 권력자들의 향락과 사치를 미워하는 시를 지었다.


그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반란평정에 뛰어들었다.

이때, 이백은 영왕 인(璘)의 요청으로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왕이 숙종에게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는 바람에 이백도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은 강남일대를 방랑하다가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여러 곳을 방랑하던 두보는 낡은 배 안에서 59살 때 병으로 죽었다.
이백과 두보는 각각 1천수가 넘는 시를 지었고, 많은 명작을 후세에 남겼다.

이백은 시선(詩仙) 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진다.



이백 친필 2














이백기념관(李白記念館)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한

채석기(采石磯) 풍경 명승구 내에 있다.


풍경구의 4대편구(片区) 특색은 각기 달라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는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과 관련된 문화를 위주로

전쟁문화와 종교문화가 곁들어진 지역이며 복당편구(濮塘片区)는 양호한 생태환경을 기초로

대나무 경관과 대나무 문화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대한 감상과 휴식 위주의 지역이다.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는 이백문화와 사조문화(谢脁文化) 위주로 종교문화와 휴식오락 기능이 추가된 관광유람구이며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는 자연생태경관을 특색으로 하고 있는 관광지역이다.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의 지형은 매우 험준하여 금릉(金陵)으로 향하는 문호역할을 하며

역대 전략적 중요지역으로 춘추시기부터 민국 연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는 20여 차례의 유명한 전투가 발생하였다.


경내의 광제사(广济寺)는 삼국시기 적오(赤乌) 3년(239) 건립된 중국 초기 불교사찰의 하나이며

소주화산(小九华山)의 지장왕묘(地藏王庙)도 한때 번성하였었다.







태백루(太白樓)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의 글씨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 · 적선루(謫仙樓)라고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말년에 차이스지 부근의 당투현[當塗縣]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얼마 뒤 사람들이 그를 기려 지은 사당이 청련사이다.


산세에 따라 축조되었으며, 주루(主樓)와 2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2개의 정원은 전원과 후원으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주루가 있다.


홑처마 헐산식(歇山式) 구조의 대문(大門)은 아치 모양의 문이 3개 있다.

가운데 문에는 '당이공청련사(唐李公靑蓮祠)'라고 크게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양쪽 벽에는 〈중수태백루비기(重修太白樓碑記)〉와 이백의 사적을 소개한 비각 등이 있다.


주루는 누각식(樓閣式) 목조 건물로, 구조가 교묘하고 장식이 화려하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겹처마 헐산식 지붕이다.


3층 지붕 아래에 '태백루'라고 크게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1층에는 이백이 차이스지를 유람하는 그림을 담은 커다란 병풍이 있고,

2층과 3층에는 황양목(黃楊木)으로 조각한 이백의 입상(立像)과 와상(臥像)이 있다.


벽에는 송나라 화가 왕단(王端)이 그린 인물화와 청나라 시인 정섭(鄭燮)이 그린 묵죽도(墨竹圖)가 걸려 있다.
차이스지의 절벽에는 착월대(捉月臺)라는 튀어나온 돌이 있는데,

술에 취한 이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이 돌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차이스지 부근에는 이백의 의관총(衣冠冢)도 있는데,

어부들이 강 하류에서 그의 의관을 발견하고는 당투현에 매장하였다가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아미정(蛾眉亭)


이번 중국 인문기행 중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안내문이나 표지판을 보면 우선 한자(漢字)와 그 아래 영문,

그리고 일본어와 우리의 한글 4가지 문자로 해설이 되어 있다.


< 아미정은 북송 희년 3년에 설립되었고, 역대의 왕조에서 수선을 진행하였으며,

민국 23년(1934년)에 또 재차 수선을 진행하였고, 1987년에도 재수선하였습니다.

이곳은 "앞에 동서 양산을 바라볼 수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구불구불한 아미산". 이로인해 아미정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미정은 현재 시급문물보호단위입니다.>




당시인이백의관총(唐詩人李白衣冠塚)


이백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 알려진 채석강 나루터 근처에 당시 이백이 벗어놓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묻었다는 묘.

글씨는 당대의 서예대가 임산지(林酸之)가 쓴 글이다.














采石磯(채석기)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馬鞍山] 서남쪽에 있는 양쯔강[揚子江]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난징[南京]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이다.


고칭 우저기(牛渚磯), 마안산시(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떨어진 취라(翠螺)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고적이 많아 남경(南京)의 연자기(燕子磯),

악양성능기(岳陽省陵磯)와 나란히 "장강삼기"(長江三磯)로 불린다.


인구는 약 1만 명(1990년 기준). 총면적 64.85㎢의 국가급풍경명승구(4차, 2002)로 차이스기편구(采石矶片区),

복당편구(濮塘片区), 칭산편구(青山片区, 청산편구), 헝산편구(横山片区, 횡산편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구는 시선(诗仙) 이백(李白)의 혼이 살아 숨 쉬며 깊고 두터운 역사와 문화가 깔려 있는

산악형 자연경관을 특색으로 문화, 자연관광 및 휴식을 위주로 한 종합형 풍경구이다.


풍경구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풍부하여 창강삼기지수(长江三矶之首)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차이스기(采石矶, 채석기)와 시선 이백(李白)의 문화를 대표로 하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채석기는 강옆에 우뚝 솟아있는데 절벽이 가파르고 강을 사이두고 천문산(天門山)과 마주하고 있으며

만리 장강이 호호탕탕 흘러와 기세가 방대하다.


채석기가 위치한 최라산은 삼면이 우저하에 에워쌓여 있고

서북쪽으로 강과 접해있어 마치 수면의 푸른 고둥어 같아 이 이름을 얻었다.


산위에는 초목이 울창하고 돌들이 서로 기이함을 다투며 환경이 그윽하고 누각이 솟아있다.

고금중외 수많은 문인들이 다투어 이곳을 찾아왔는데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안석(王安石), 소동파(蘇東波), 육유(陸游), 문천상(文天祥)등이 대량의 시구를 이곳에 남겼다.


태백루(太白樓), 상영정(賞?亭), 착월정(捉月亭), 관란정(觀瀾亭),

삼원동(三元洞), 이백관총(李白冠塚) 등 명승고적이 있다.


태백루는 일명 "적선루"(謫仙樓), "청련사"(靑蓮祠)라고도 한다.

당나라때 세워지고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높이 18m, 길이 34m, 너비 17m로 금색 오지기와로 되어 있고 처마가 건뜻 들린 3층 고건축이다.


웅위롭고 가관이며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남창 (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나란히

 "삼루일각"(三樓一閣)으로 불린다.


누각내 태백 친필서한과 각종 판본의 시집, 역사 명인들의 시편, 편액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이백의 친필서한이 가장 진귀하다.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천문이 중단되고 초강(楚江)이 열리며 푸른물이 동으로 흘러 이곳을 에돌아가고

두 기슭 청산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외로운 배 한척이 일출따라 오는" 정경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 지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즐겨 부르던 전래 동요이다.

이태백이 채석기 강변에서 배를 타고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고 강물에 넘실거리는 달에 취해서 물 속의 달을 잡기 위해 뛰어들어 죽었다는 곳. 


이백은 청련향(靑蓮鄕: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으므로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 하였다.
26세 때 벼슬을 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면서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 일컬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된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를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었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주지 않아 장안을 떠났다.


낙양에서 두보(杜甫)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 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송씨(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지금의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으며, 구선(求仙)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도교를 믿지 않았고 도경을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쾌락을 추구했다.
이백의 천성은 호쾌하여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다.


술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친교를 맺을 수 있었는데, 위로는 왕공, 귀족, 관리,

아래로는 주옹(酒翁), 낚시꾼, 승, 도인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두보는「주중팔선가(酒中八仙歌)」에서 “이백은 한 말 술이면 시가 백 편, 장안의 술집에서 잠을 자네.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자칭하여 신은 주중선이란다 (李白斗酒詩百篇 長安城裏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고 했듯이, 술이 없으면 시가 없었다.

이백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월하독작(月下獨酌)」을 통해 알 수 있다.


월하독작 (月下獨酌) - 이백(李白)


[1]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활짝 핀 꽃 속에서 술 단지 곁에 두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짝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부르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을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나를 따를 뿐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나마 달과 내 그림자 함께 벗 삼아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봄이 다가기 전 함께 즐긴다.
我歌月俳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주위에서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취하기 전에는 함께 즐겁게 놀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져 가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영원히 걸림 없는 교유를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2]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하늘에 주성(酒星)이 어찌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에 어이 주천(酒泉)이 있으랴.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니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술을 사랑함이 어찌 하늘에 부끄러우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듣기로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또한 탁주는 현인과 같다 하였네.
聖賢旣已飮(성현기이음)  성현을 이미 몸속으로 마셨거늘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구태여 신선이 되길 원하랴.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다만 술 마시고 얻은 즐거움이니
勿爲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자에게 전할게 뭐랴.


[3]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삼월의 함양성은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온갖 꽃이 다 피어 비단 같구나.
誰能春獨愁(수능천독수)  누가 봄에 홀로 수심에만 잠기랴
對此徑須飮(대차경수음)  봄이라면 술잔을 마땅히 들지.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인간세상 빈부와 길고 짧음은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일찍이 조화로 정해졌느니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한 동이 술로 생사가 덧없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인생 만사 가리기는 어렵기만 하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취하면 온 세상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쓰러져 홀로 자면 되지.
不知有吾身(부지유오신)  내 몸이 있는 줄을 나도 모르니
此樂最爲甚(차락최위심)  이보다한 즐거움이 더 있을쏜가.


[4]
窮愁千萬端(궁수천만단)  답답한 수심 천만갈래니
美酒三百杯(미주삼백배)  맛있는 술 한없이 마시리
愁多酒雖少(수다주수소)  수심은 많고 술은 비록 적으나
酒傾愁不來(주경수부래)  술잔을 기울이니 수심이 사라지네.
所以知酒聖(소이지주성)  술이 좋은 것이라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노라.
酒酣心自開(주감심자개)  술이 거나하면 마음은 절로 열리는 것
辭粟臥首陽(사속와수양)  수양산에 누워 조를 사양한 백이숙제,
屢空飢顔回(루공기안회)  쌀뒤주가 노상 비어 주렸다던 안회
當代不樂飮(당대불락음)  모두 당대에 즐겨 마시지 못하였나니
虛名安用哉(허명안용재)  후세의 헛된 이름 무슨 소용 있는가.
蟹螯卽金液(해오즉금액)  게 가제 안주가 바로 신선의 선약이요
糟丘是蓬萊(조구시봉래)  쌓인 술지게미 봉래산이로다.
且須飮美酒(차수음미주)  이제 마냥 좋은 술 마시고
乘月醉高臺(승월취고대)  높은 대 위에 올라 달과 함께 취하리.


행로난(行路難) - 갈 길 어려워라


金樽美酒斗十千 (금준미주두십천); 황금 항아리의 좋은 술 한 말에 일만 금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치만전); 옥 쟁반의 진수성찬 만 냥에 달하건만
停杯投箸不能食 (정배투저불능식); 차마 먹을 수 없어 잔 내려놓고 젓가락 던져둔 채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빼어들고 주위를 돌아보니 마음은 아득하누나
欲渡黃河氷塞川 (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
將登太行雪暗天 (장등태항설암천); 태항산 오르자니 눈보라가 하늘을 뒤덮었네
閒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차라리 강태공(姜太公)처럼 세월이나 낚을까
忽復乘舟夢日邊 (홀부승주몽일변); 이윤(伊尹)을 흉내내 꿈이라도 꾸어볼까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 갈 길 어렵구나 갈 길 어렵구나
多岐路 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으니 지금 여기 어드매냐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랑회유시); 긴 바람 거친 물결 만나는 날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구름같은 돛 달고 푸른 바다 건너리라


- 閒來垂釣碧溪上: 강태공(姜太公)이 周문왕을 기다리며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세월을 낚은 고사.
- 忽復乘舟夢日邊 ; 은(殷)나라 현신(賢臣) 이윤(伊尹, 摯)이 꿈에 탕(湯) 임금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해뜨는 곳(帝都)에 이르렀다(伊摯將應湯命夢乘船過)는 고사. ≪송서(宋書)≫에 나온다.
- 日月之旁: 탕(湯) 임금이 붕어한 뒤 아들 태갑이 무도하므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가, 삼년 뒤 개과천선하자 임금으로 세우고 그를 섬겼다는 고사.
- 長風破浪 = 남북조 시대 종각(宗慤)은 어렸을 때 그의 숙부가 포부를 묻자, "저는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파도를 넘고자 합니다"(我願乘長風破萬里浪)라고 대답했다. ≪남사(南史)≫(卷37) <종각(宗慤)>전에 나온다.
- 후진타오(胡錦燾) 중국 주석은 2006년 4월 19일 미국 시애틀시 기업인 및 미-중 우호단체가 공동주최한 오찬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을 인용해 미-중 관계의 미래를 요약했다.
-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언급하여 세인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세고,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갈림길이 많아 선택이 어렵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거리는 때가 올 것이다. 바로 그때 돛을 달고 푸른 바다를 건너가자. 이 시는 특히 마지막 2연 또는 마지막 4연이 절창이라 시진핑이 아니더라도 중국몽(中國夢)을 부르짖는 중국 지도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자주 인용하는 시다. 이백의 '행로난'은 이 시외에도 두 수가 더 있다.






채석기에 있는 이백의 소상


달을 따러 강물에 뛰어든 이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자유인 같다.


달을 따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적선(謫仙) 이백,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다시 고래의 등에 태워 하늘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이백이 야량으로 유배 가던 도중 백제성 근처에서 풀려난 후, 그의 말년은 대부분 안휘성에서 보내게 된다. 

소상 아래에는 이백이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시 임종가(臨終歌)가 씌여있다.


임종가(臨終歌)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余風激兮萬世(여풍격혜만세)
遊扶桑兮掛左襼(유부상혜괘좌예)

後人得之傳此(후인득지전차)
仲尼亡兮誰爲出涕(중니망혜수위출체)


온 천지 진동시키며 날던 대붕이
하늘 중간에서 날개가 꺽였구나

그 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일렁이고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고 전한다 해도
공자가 이 세상 뜬 이후이니 누가 눈물 흘려줄꼬


- 대붕(大鵬): 붕의 날개는 몇천리가 된다고 하는 새
- 부상(扶桑):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이태백은 임종시에도 장자의 대붕을 떠올렸으며, 자신과 대붕을 동일시 했다.
부상에서 노닐다가 옷소매가 걸리었다는 부분에서는 대붕이 장삼을 입은 이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은 이처럼 대붕을 꿈꾸었다.

다음 감상할 시도 이 무렵(761)의 시이다.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
밤에 우저 강가에 배를 대고서 회고하다 / 이백


牛渚西江夜(우저서강야) 우저산 앞 장강의 밤에
靑天無片雲(청천무편운) 푸른 하늘에 조각구름도 없네
登舟望秋月(등주망추월) 배에 올라 가을 달을 바라보니 
空憶謝將軍(공억사장군) 공연히 사장군을 그리워하네
余亦能高詠(여역능고영) 나 역시 능히 높게 읊을 수 있지만
斯人不可聞(사인불가문) 이 사람(사장군)은 들을 수 없네
明朝掛帆席(명조괘범석) 내일아침 배에 돛 달고 떠나면
楓葉落紛紛(풍엽낙분분) 단풍잎이 어지러이 떨어지겠지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는 과장이 없는 시로, 이백의 서글픈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백이 말년에 배를 타고 장강을 유랑하다가 우저기 곧 채석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배를 정박했던 것이다. 


동진 때, 사상(謝尙, 308~356) 곧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사장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상이 선성 지역에서 현령을 지냈다.
그가 어느 달밤 우저기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어디서 영사시(詠史詩)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 읊는 사람을 데려 오게 하였는데, 세곡(稅穀)을 나르는 뱃사공 원굉(遠宏)이었다.

두 사람은 날이 샐 때까지 놀았고, 그 후 사장군의 추천으로 원굉은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백은 인생 말년에 채석기에 와서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장군 같이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등용했는데

지금은 사장군 같은 인재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천리마는 세상 어디에도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백락이 없다.

그래서 이백은 원굉처럼 목소리 높여 시를 읊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시 읊은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그저 쓸쓸할 뿐이다.

이백은 가을 달처럼 자신의 재능을 알아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지만, 그런 사장군 같은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래서 공연히 그리워만 할 뿐 그저 쓸쓸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이백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이 많이 있는데, 이 시는 담담한 어조이다.

그래서 더욱 슬퍼 보인다.


이백은 <소가행(笑歌行)>에서 "우습구나 우스워, 영무자와 주매신은 나각 불며 장작지고 노래하며 다녔는데,

오늘 그대 만나도 몰라주니 어찌 미친 척하지 않으리."라고 하여, 춘추시대 나각 불던 영무자와 한 무제 때

나무꾼이었던 주매신도 재능을 인정받아 출사를 하였는데, 이백 자신은 이들과 같은 재능이 있는데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니 미친 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년 이백의 좌절감이 절로 느껴진다.

지금도 안휘성 마안산시 채석기에 가면 이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채석기(采石磯)의 원래 지명은 우저기(牛渚磯)였다.

우저기는 '쇠자갈모래톱'이라는 뜻이다. 


장강가에 있는 삼각주로 그곳에는 우저산이 있다.

소가 엎드린 모습의 삼각주라해서 우저산이라 한다. 


채석기에는 이백이 달을 잡으려다가 장강에 빠졌다는 착월대(捉月臺)와 의총(衣塚)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루와 이태백기념관도 있다.







謝眺樓 敬亭山 동영상 출처 : EBS


贈汪倫 
李白乘舟將欲行 (이백승주장욕행)
忽聞岸上踏歌聲 (홀문안상답가성)
桃花潭水深千尺 (도화담수심천척)
不及汪倫送我情 (불급왕윤송아정)
이백이 배를 타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홀연 강언덕에서 발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들리네 
도화담의 물이 깊이가 천 척일지라도 
왕윤이 나를 보내는 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宣州 謝眺樓 餞別 校書 叔雲 (선주 사조루 전별 교서 숙운) '선주'땅 '사조루'누각(樓閣)에서 '교서 숙운'과 헤어지며... - 당(唐)나라 시선(詩仙) '李白(이백)'이 '宣州(선주)에 있는 '謝眺樓(사조루)'에서 校書(교서)벼슬의 '叔雲(숙운)'을 전별(餞別)하고 쓴 시(詩) 棄我去者(기아거자) 나를 두고 떠나가는 것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어제처럼 지나간 시간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亂我心者(난아심자)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오늘 하루도 온통 번민과 걱정 뿐이로세.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먼길 가을 바람결에 기러기 날아가니 對此可以감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럴 땐 높은 누각에 올라 마음껏 취해보리라.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 같이 뛰어난 문장력, '건안'과 같은 풍모(의 숙운叔雲)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그 가운데 '소사'(의 詩)처럼 또 뚜렷이 빛을 발하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뜨거운 열정 함께 품고 원대한 포부 비약하니 欲上靑天攬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고 싶구나.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뽑아 물을 베어본들 강물은 계속 흐르듯이 擧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술잔을 들어 근심을 잊으려해도 시름은 더해만 가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의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라. [참고] 1) 宣州(선주): 지명,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쉔청(宣城)현'. 2) 謝眺樓(사조루): 누각(樓閣) 이름, '육조(六朝)시기' 선주(宣州)의 태수(太守)로 있던 '謝眺(사조)'가 세움. 3) 육조(六朝) AD 229~589년: 삼국시대의 '吳(오), 東晉(동진)'과 남조(南朝)의 '宋(송), 齊(제), 梁(양), 陳(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 4) 謝眺(사조:AD 464~499년): '대사(大謝)'라 불리는 '사령운(謝靈雲:AD 385~433년)'과 함께 '소사(小謝)'라 불린 '위진 남북조시기'의 '사씨(謝氏)' 성을 가진 두 명의 저명한 시인 중 한 사람. 5) 校書(교서): 서책(書冊)을 검열하는 직책의 벼슬 이름, 정식 관직 명칭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임. 6) 叔雲(숙운): 이름은 '이운(李雲)', '李白(이백)'이 '숙운(叔雲)'이라 부름은 같은 집안의 아재비뻘 되는 사람, 즉 족척(族戚)이기 때문. 7) 餞別(전별):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 :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 새들은 높이 날아가고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 외로운 구름만 한가히 떠간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건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 다만 경정산이 있기 때문 
어구(語句)
敬亭山 : 安徽省 宣城地區(안휘성 선성 지구)에 있는 산.
孤雲 : 외로이 떠도는 구름.
相看 : 서로 봄. 바라봄.
不厭 : 싫지 않음.
감상(鑑賞)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宣州謝眺樓餞別校書叔雲 (선주사조루전별교서숙운) / 이백(李白)
<선주의 사조루에서 교서 숙운을 전별하다>


棄我去者(기아거자)

나를 버리고 간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지난 세월은 머물러 있게 할 수 없고


亂我心者(란아심자)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현재의 세월은 번민과 근심이 많도다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까지 부는 긴 바람이 가을 기러기를 보내고
對此可以 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를 대하니 높은 사조루에서 술 마실 만하도다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이운)의 문장은 건안의 풍골(강건한 기상)이 있고
中間小謝又 發(중간소사우청발)

중간에 소사(사조)가 있어 또한 맑고도 수려하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두 사람 다 아주 씩씩한 생각이 하늘을 날고  
欲上 天覽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보고자 한다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경류)

칼을 뽑아 물을 갈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杯銷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잔을 들어서 수심을 녹여보지만 수심이 다시 솟아난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세상과 뜻 맞지 않더라도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에는 산발한 머리로 작은 조각배를 희롱하련다


중국 - 선성, 사조루
중국 - 선성은 이백이 말년에 머물렀던 안휘성 동남쪽에 있는 도시다.
이곳은 문방사우로 유명한 곳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선지는 이곳 선성에서 나는 종이를 말한다.
선성에는 이백이 존경했던 남조의 시인 사조가 세웠다는 누각 사조루가 있다.


宣州 : 지금의 안휘성 선성 부근으로 산수가 깨끝한 곳으로 유명함.
謝脁樓 : 謝脁는 남북조 시대 제나라의 대표적 시인임. 사조루란 그때 지은 높은 누각으로서 北樓라고도 함.
餞別 : 송별회를 열고 이별함.
校書 : 궁중에 소장된 도서를 정리, 교감하는 일을 했던 비서. 성의 교서랑을 가리킴
者 : ‘~ 것’. 곧 사물을 가리킴.
長風 : 만리 밖까지 부는 바람.
酣 : 술 마시고 즐거워 함.
蓬萊 : 중요한 책을 간직하던 동해의 신선
建安 : 후한 말 獻帝의 연호
中間 : 후한 말 건안 연간과 당나라 중간을 뜻함.
小謝 : ‘사령운’을 대사라 하고 ‘사조’를 소사라 함.
逸興 : 자유분방한 감흥
散髮 : 속세와 의 교류를 끊고 유교적 가치체계에 등을 돌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후한의 원굉은 당파 싸움이 일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고 함.
扁舟 : 조각 배
宣(베풀 선; 宀-총9획; xuān)
脁(제사 고기 조; 肉-총10획; tiǎo)
餞(전별할 전; 食-총17획; jiàn)
叔(아재비 숙; 又-총8획; shū)
棄(버릴 기; 木-총12획; qì)
昨(어제 작; 日-총9획; zuó)
煩(괴로와할 번; 火-총13획; fán)
憂(근심할 우; 心-총15획; yōu)
雁(기러기 안; 隹-총12획; yàn)
酣(즐길 감; 酉-총12획; hān,hán,hàn)
蓬(쑥 봉; 艸-총15획; péng)
萊(명아주 래{내}; 艸-총12획; lái)
俱(함께 구; 人-총10획; jù,jū)
懷(품을 회; 心-총19획; huái)
攬(잡을 람{남}; 手-총24획; lǎn)
抽(뺄 추; 手-총8획; chōu)
鎖(쇠사슬 쇄; 金-총18획; suǒ)
愁(시름 수; 心-총13획; chóu)
弄(희롱할 농{롱}; 廾-총7획; nòng,lòng)


이 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던 천보(天寶) 13년(753) 가을,

이백이 선주(지금의 안휘성 선성)에 머물 당시 감찰어사로 와 있던 이운(李雲)과 사조루에서 전별하면서 지은 것이다.


사조루는 남제(南齊) 때, 사조(謝眺, 464~499)가 선성 태수로 있을 때 지은 누각이다.
이백은 사조의 시를 몹시 좋아하여 죽을 때도 사조루 근처에서 죽었다.


이 시에서도 사조처럼 이백 자신의 문장도 맑고 구김이 없다고 하였다.

제목에서의 '숙(叔)'은 친척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공경의 뜻으로 쓰인 글자이다.


위의 시는 선주(선성)의 사조루에서 교서 벼슬을 지낸 아저씨뻘 되는 이운(李雲)과 전별하면서 쓴 시로,

형식은 물론 내용도 파격적이다. 전별시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이백이 당나라 궁중에서 쫓겨난 후, 10여 년을 떠돌다가 비서성 교서랑 이운을 만나서

그동안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묵은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억제할 수 없는 어제와 오늘의 복잡한 심정이 낭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지난 세월은 머물게 할 수 없고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현재의 근심과 번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전별시인데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곧 떠날 이운은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건안 칠자의 풍모와 같은 강건한 기상이 배어 있음을 칭찬하면서

이백 자신의 문장도 남조의 사조에 비유하여, 맑고 구김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백은 자신과 이운의 기상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표현하여 푸른 하늘에까지 올라가서 해와 달을 구경하자고 하였다.

이별의 생각이 안 드는 시이다. 또한 수심은 칼로 물 베기처럼 베고 베도 끝이 없으며

그 수심을 술로 달래보고자 하나 자꾸 더 솟아난다고 하였다.

 이 세상과 자신이 품은 뜻이 맞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나면 된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이백은 이운과의 전별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고 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는 미련 없이 산발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백이 서서히 신선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다.


사조루(謝眺樓)


안후이성 선성시(宣城市) 선성은 이백이 말년에 머물렀던 안휘성 동남쪽에 있는 도시다.

문방사우로 유명한 곳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선지는 이곳 선성에서 나는 종이를 말한다.

선성에는 이백이 존경했던 남조의 시인 사조가 세웠다는 누각 사조루가 있다.





사조루 앞에 있는 이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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