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묘(李白墓)


이백 묘원에서 우리를 먼저 맞은 것은 높이 11미터의 거대한 패방이다.

일종의 대문인 셈인데 4주3문(四柱三門)으로 된 전형적인 휘주식 패방이다.

 

시선성경(詩仙聖境)


패방 전면에는 저명한 현대서예가 계공(啓功, 치궁)의 글씨로 시선성경(詩仙聖境) 시선,

즉 이백이 잠든 성스러운 경내라 쓰여 있다.

 

 

 

 

 

천고풍류(千古風流) 영원한 풍류라는 뜻. 초서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임산지(林散之, 린싼스)의 글씨이다.


 

 

거배요월(擧杯邀月) 술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다.


이백은 실로 술과 달의 시인이었다.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울분을 술로 달래었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낀 그는 천상에 있는 달을 친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술과 달을 뻬고는 이백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술잔을 높이 들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이 소상은 그러한 이백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거배요월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월하독작(月下獨酌)> 제1수에서 따온 말이다.


 

청련지(靑蓮池) 이백의 묘원 안에 있는 연못이다.


이백의 호 청련거사(靑蓮居士)에서 이름을 딴 연못으로 연꽃을 많이 심어 놓았다.

또 착월교(捉月橋)라는 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착월(捉月)이란 '달을 잡는다'는 뜻인데,

이백이 강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로 뛰어들어가 죽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다리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行樂需及春(행락수급춘)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리니,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작품 배경

이 시들은 시인의 특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술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달 아래서 꽃을 벗하며 홀로 술을 마시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이 시들에는 시인의 근심이 숨겨져 있다.

이 시는 당시 정치적 타격으로 실의에 빠진 시인이 자신의 근심을 해소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백은 〈월하독작〉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4수의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는 제1수이다.

제목은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라는 뜻으로, 시의 형식은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봄밤에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시인은 낭만적 정취에 젖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여 홀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아득한 은하(銀河)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바람에서는 초탈을 구하는 마음이 읽혀진다.

첫구의 '화간일호주(花間一壺酒)'는 '화하일호주(花下一壺酒)' 또는 '화전일호주(花前一壺酒)'라고도 한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즉 「월하독작」은 전체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며,

오언고시(五言古詩)의 형태이다.


이 시는 시인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머물 때 지었다.

이백은 40여 세가 되서야 간신히 장안에서 관직을 얻어 황제 현종의 주변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타격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우울하고 괴로웠다.

이렇듯 이백이 침울하고 고독한 가운데 이 시를 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정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이백은 ‘술’과 ‘달’을 빌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시를 지었기에, 시 자체는 오히려 호방하고 신비롭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은 술을 통하여 달과 어울리는 환상을 그려내며,

술의 별과 술의 샘을 이용하여 술을 칭송하고, 술을 통하여 인생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역시 이백을 ‘주선(酒仙)’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술은 이백에게 있어서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초상화 역시 술에 취한 이백의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에게 있어서 술은 사실상 근심을 녹이는 영약으로 술을 통하여 자신의 근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내심의 고통을 술로써 해소하고자 했을 뿐이며, 사실상 시에 나타난 즐거움은 단지 근심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하독작」에서 표면적으로 술을 통한 즐거움을 표현하며 근심을 감추고 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다.


시인도 인간이기에 불현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근심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백의 시 중에서 술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 「장진주(將進酒, 将进酒)」의 마지막에서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녹이고자 하노라.(與爾同銷萬古愁)”라고 했던 것처럼

「월하독작」의 네 번째 시에서는 “근심이 많고 술이 비록 적지만, 술을 기울이면 근심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원문 및 해설

전체 4수로 이루어진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월하독작)」는 모두 상상력이 풍부한 낭만적인 시이다.

이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이다.

 

(제1수)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客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꽃 사이에서 놓인 술 한 단지,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네.
달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르는구나.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니 즐겁기가 모름지기 봄이 된 듯한데.
내가 노래하니 달이 배회하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오가는구나.
술 깨었을 때는 함께 즐거움을 누리지만, 취한 후에는 각자 흩어지니.
영원히 정이 끊어지지 않는 교유를 맺으며, 저 멀리 은하수 저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리.


첫 번째 시는 혼자 술을 마시지만, 달과 그림자를 의인화시켜 자신까지 세 사람으로 만들고는

이들과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여 매우 신비하고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록 달과 그림자를 벗하지만 사실상 혼자 마시는 것 자체는 외로운 일이며,

사실상 이백은 이들을 빌어 근심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백은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져버린다고 은근하게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영원한 교유를 맺길 원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저 기약할 뿐이므로 역시 쓸쓸한 심정이 배어 있다.

 

(제2수)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爲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겠지.
천지가 원래부터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으리.
듣자하니 청주는 성인에 비견할 만하고, 또한 탁주는 현자와 같다하네.
성현들도 원래부터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랄 것이 있겠는가?
세 잔을 마시면 큰 도와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과 합해지니.
술 마시는 흥취를 알면 될 뿐,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게나.


두 번째 시는 소위 애주가의 궤변이자 술의 덕을 찬양하는 주덕송(酒德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酒星)과 땅에 있는 샘(酒泉)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이를 빌어 술을 좋아하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니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성현들도 술을 좋아했으니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신선이 되길 노력하는 것이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하다고 재차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다음에는 한층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것은 큰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으며,

심지어는 자연과 합치된다고 하니 가히 술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술 마시는 흥취’는 단순히 술에 취한 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그의 당시의 정치적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 흥취는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을 가린 흥취인 것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달을 청하니, 그림자까지 세 사람이 되었네.


「월하독작」의 첫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 술이 마시는 시인은 달을 불러들여 벗하며, 또 달을 통해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 자신과 함께 세 사람으로 의인화시켜 함께 술을 마신다.

이 구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으로 역시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네.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을 것이네.


「월하독작」의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시인은 스스로 술을 사랑하는 이유를 하늘에 있는 술, 별과 땅에 있는 술 샘을 이용하며 설명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애주(愛酒)의 변(辯)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백의 특이한 상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태백비림(太白碑林) 곽말약(郭沫若) 書


태백비림에는 당대 저명 서예가와 유명 인사 107명의 글씨가 각각 흑색 화강암에 석각되어 있다.

모택동, 곽말약(郭沫若, 궈모뤄) 노신(魯迅, 루쉰), 우우임(于佑任, 위여우런), 임산지, 계공 등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다.


내용은 대부분 이백의 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모택동의 글씨가 먼저 눈에 띄었다.

모택동은 특유의 초서로 이백의 유명한 시 야박우저회고(夜泊牛渚懷古)를 써 놓았다.

 

 

 

 

 

 

 

태백사(太白祠) 임산지의 글씨. 이백의 사당으로 안에 칼을 찬 이백의 소상과 유명한 '송비'가 있다.

 

詩無敵(시무적) : 두보가 이백을 두고 처음으로 쓴 말. 시로는 이백을 당할 자가 없다. 천하무적이다.

 

이백 묘


비석 덮개 위의 동그란 조형물은 돈을 상징하는 엽전이다.

이 돈으로 좋아하는 술을 사서 실컷 마시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경정산 (敬亭山 ; 징팅산)


해발고도는 286m이다. 황산[黃山]산맥에 속한다.

지금은 안후이성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고, 임목(林木) 자원이 풍부하다.

문화재로는 스셴사[十賢祠], 타이바이루[太白樓], 광쟈오사[廣敎寺] 등이 있다.

안후이성 남동부 쉬안저우시[宣州市]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자오팅산[昭亭山] 또는 차산[査山]이라고 불렀는데

남조 진나라 황제 사마소(司馬昭)의 이름 소(昭)를 피해서 경(敬)정산으로 개칭했다.


선성 시내의 도로명에도 소정로(昭亭路)가 있고 사공로(謝公路)라는 이름도 눈에 띈다.

산은 높지 않지만 경관이 수려하여 사조(謝脁)도 여러차례 이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정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백이다.

이백은 전후 일곱차례나 경정산을 올라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홀로 앉아-이다. 


獨坐敬亭山 경정산에 홀로 앉아 - 李白


衆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지유경정산

 

뭇 새들 높이 날아 다 없어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롭게 가버렸네

서로 봐도 양쪽 모두 싫지 않은 건

오직 저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敬亭山(경정산)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남쪽에 있는 산. 일명 소정산(昭亭山)

高飛盡(고비진) : 많은 새들이 높이 날아 어디론가 가버린다

孤雲(고운) : 외로이 떠도는 한 조각 구름
相看(상간) : 서로 바라봄
不厭(불염) : 물리지 않음. 싫지 않음

只有(지유) : 다만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너무나 유명한 이 시로 인해서 경정산은 천하의 명산이 되었다.

그후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와서 경정산을 읊은 시가 1,000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은 ,강남시산(江南詩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경정산 입구 광장에는 이곳을 유람한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매요신(梅堯臣), 탕현조(湯顯祖) 등의 부조상이 조각되어 있다.

 

 

 

 

 

경정산 입구에 있는 시비들

 

 

 

 

 

 

고소정방(古昭亭防)

 

 

 

 

상사천(想思泉)

 

742년 이 백은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가족들은 남릉에 남기고 홀로 월지방으로 가 머물다가,

하지장과 옥진공주의 추천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여태까지 여러 산을 떠돌며 은자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 결실을 맺어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글의 초안을 잡거나 연회에 불려가 흥을 돋우는 시나 짓는 정도였다.

어용문인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와 술로 지내다 결국 744년 장안을 떠나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長相思(장상사)

 

其一
長相思(장상사) 늘 그리운 사람
在長安(재장안) 장안에 있네.
絡緯秋啼金井欄(낙위추제금정란) 가을 귀뚜라미 우물 난간에서 울고
微霜淒淒簞色寒(미상처처단색한) 서리 내려 쓸쓸한데 대자리 차갑네.
孤燈不明思欲絶(고등불명사욕절) 외로운 등불 희미한데 그리움 절절하여
卷帷望月空長歎(권유망월공장탄) 휘장 올리고 달을 향해 공연히 긴 탄식이로다.
美人如花隔雲端(미인여화격운단) 꽃같이 아름다운 님은 구름 끝 저편에 있네.
上有靑冥之高天(상유청명지고천) 위로는 푸르고 푸른 높은 하늘이 있고
下有淥水之波瀾(하유록수지파란) 아래로는 맑은 물 일렁이는 물결이 있네.
天長路遠魂飛苦(천장로원혼비고) 하늘 끝 길은 멀어 넋도 날아가기 힘들고
夢魂不到關山難(몽혼부도관산난) 꿈속의 넋은 관산 넘지 못하네.
長相思(장상사) 긴 그리움에
摧心肝(최심간) 심장 간장 다 끊어지네.


其二
日色已盡花含煙(일색이진화함연) 햇빛 이미 다하여 꽃은 연무 머금었고
月明欲素愁不眠(월명욕소수불면) 달은 밝아 희니 수심으로 잠 못 이루네.
趙瑟初停鳳凰柱(조슬초정봉황주) 비파를 뜯다가 기러기발 멈추고
蜀琴欲奏鴛鴦絃(촉금욕주원앙현) 거문고 꺼내 원앙현을 연주하네.
此曲有意無人傳(차곡유의무인전) 이 곡 뜻이 있으나 전해줄 이 없으니
願隨春風寄燕然(원수춘풍기연연) 봄바람 따라 연연산에 부쳐지기 바라네.
憶君迢迢隔靑天(억군초초격청천) 그대 그리워도 멀고 먼 푸른 하늘 사이하니
昔日橫波目(석일횡파목) 그 옛날 추파 던지던 눈
今成流淚泉(금성류루천) 이제는 눈물샘 흘러 넘치네.
不信妾腸斷(불신첩장단) 이 첩의 애간장 끊어짐을 믿지 못하면
歸來看取明鏡前(귀래간취명경전) 돌아와 거울 앞에서 들여다 보소서.

 

어구(語句)
長相思 : 오래 서로 그리워함. 漢(한) 나라 때의 고시로 樂府(악부)의 제목임.
素 : 흰 비단. 生綃(생초).
趙瑟 : 조 나라 여인들이 잘 타는 비파 또는 거문고 곡조.
鳳凰柱 : 봉황 모양을 새긴,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줄을 받치는 雁柱(안주, 기러기 발 곧 줄을 고르는 기구).
蜀琴 : 촉 지방에서 타던 가야금. 한 나라 文人(문인)인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촉의 부호 卓王孫(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갓 과부가 된 왕손의 딸 卓文君(탁문군)의 미모에 반하여 거문고로 鳳求凰曲(봉구황곡)을 타니 과연 탁문군이 밤에 그에게 달려와 부부가 되었음.
鴛鴦 :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암수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사이가 좋기에 부부간의 애정을 비유함.
燕然 : 연연산. 蒙古(몽골)에 있는 산인데 당시 匈奴(흉노)의 땅임.
迢迢 : 멀고 아득한 모양.
橫波目 : 눈물이 고여 옆으로 돌린 눈. 自流涕而橫波(절로 눈물이 흘러 옆으로 보네)〈傅毅 舞賦〉

 

감상(鑑賞)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읊은 악부의 노래 형식인 시.

첫 수의 대강은 ‘그리운 임은 장안에 있는데, 여치는 우물가에서 울고 옅은 서리에도 잠자리는 차갑네.

등불 어두우니 그리움 줄어들어 휘장 걷고는 달 보며 헛되이 탄식하노라니 고운 여인 같은 달 구름 저쪽 멀리 있구나.

위에는 푸른 하늘이요 아래로는 맑은 물결, 하늘 넓고 길은 멀어 꿈속 영혼은 고향까지 가지 못하는구나.

아아 그리워라 애끊네.’이다.


첫 수는 敍景(서경)을 중심으로 그리움을 그렸는데,

둘째 수는 抒情(서정)을 주로 하여 혼자 사는 설움을 읊었다

 

 

 

옥진공주(玉眞公主 690~762)

 

경정산에는 옥진공주의 묘가 있고 그 앞에 공주의 소상이 서 있다.

또 그 옆에는 상사천(相思泉)이라는 샘을 만들어 놓고 샘 뒤편에 옥진공주의 입상과 이백의 와상(臥像)을 새긴 부조가 놓여 있다.


옥진공주는 당나라 무측천의 손녀이자 예종(睿宗)의 열 번째 딸이고

현종(玄宗) 이융기의 누이동생으로 이백보다 9세 연상이다.


경정산이 옥진공주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이백과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묘 앞에 세워진 '옥진공주 묘지(墓誌)의 내용은 이렇다.


공주는 젊어서 여도사(女道士)가 된 후 천하의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백을 알게 되었고

그를 현종에게 적극 추천하여 대조한림(待詔翰林)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다.


이백이 모함을 당하여 장안을 떠나자 공주는 울적한 마음에 공주의 칭호를 박탈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후에 이백이 경정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는 이 산으로 들어와 수도를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독좌경정산"은 경정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함과 동시에 옥진공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 시라는 것이다.

옥진공주 묘비는 안휘성 선성시 경정산 풍경명승구 관리처가 2001년 9월에 세운 것이다.

공주의 무덤을 비롯한 구조물들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옥진공주(玉眞公主)를 빠트릴 수 없다.

그녀는 젊었을 때, 스스로 원해서 여도사가 되었다.


당시 옥진공주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부친인 당 예종 이단에게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당 예종은 당연히 쉽게 응락해 주지 않았다.

자기의 딸에게 손해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결심이 굳었다.

그녀는 모친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마도 당 예종은 가련하게 죽어간 그녀의 모친을 떠올렸을 것이다.

확실히 고혼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예종은 마침내 딸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해 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러우며, 풀들은 자라고 새는 날아다니는 계절에,

장안성의 밖에는 "옥진관(玉眞觀)"이라고 이름붙인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 명 이상의 백성들이 농삿일을 버려 두고 도관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1년 여의 공사끝에 옥진공주는 마침내 이 화려한 도관에 입주한다.

그녀와 동시에 입주한 사람들은 황실 음악가 중에서 은퇴한 가무녀들과 일부 은퇴한 궁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관은 여자들의 궁전과 같았다. 그리고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본떠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당시 중에 "지유지영옥엽관, 전운재월조인한(知有持盈玉葉冠, 剪雲裁月照人寒)"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영'은 바로 옥진공주의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옥엽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가지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하지 못했다(時人莫計其價)"고 한다.

청풍명월의 밤이 되면, 도관에는 맑은 악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무녀들은 인공산수 속에서 신선세계를 공연했다.


옥진공주의 생활은 시집간 다른 공주들보다 훨씬 나았다.

거의 단신여왕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당나라때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사람은 옥진공주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 고조때부터 당 소종때까지 근 300년 동안 이당황실에는 210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중에서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공주가 12명이나 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인 왕건은 <<당창관옥예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관야멱향래처, 유견계전쇄옥명(女冠夜覓香來處, 唯見階前碎玉明)"


여관은 여황관(女黃冠)이라도 하고, 여관자(女冠子)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도사를 가리킨다.

당나라때 여관(女冠)은 수진여관(修眞女冠)과 궁관여관(宮觀女冠)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바로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공주가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당나라때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사실, 당시 이들 도관에 들어간 공주들이 진정으로 머리를 깍고 출가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기르며 출가생활을 보냈다.

당나라때 공주가 도교에 입교하는 것은 당나라때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고, 도교 내부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련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의 두 황제 때에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기록은 없다.

당 고종에 이르러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도사가 된다는 것은 공주가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원인을 따져보면, 도교가 보유한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다.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득도를 하려는 이상과 바램이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과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나라 때 차이가 크다.


왜냐하면 도교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도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다.


공주는 천자의 딸로서 고귀하고, 신분이 존귀하다.

공주가 도교를 택한다는 것은 민간에도 도교에 귀의하는 기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공주는 여도사가 되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므로,

민간도사들이 힘들게 수련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나라 공주들의 도교귀의 동기는 간단히 말해서, 도를 그리워한다든지, 복을 추구한다든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든지 남편이 죽은 후에 속세를 떠나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나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공주들이 적극적으로 여도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여도사가 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재녀 어현기(魚玄機)였다.


당나라 때는 여권의식이 강했고, 일부 여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살면서, 자유롭게 애정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여도사'는 아주 그럴듯한 신분이었다.


'여도사'는 자유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살롱의 여주인과 같이.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여도사'의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했다가 반년,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황실의 공주는 민간의 보통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이다.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8살 때 '외조모 양씨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궁중에 살았다.


16세가 되어서 토번의 혼인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태평관(太平觀)으로 가서 관주가 된다.

혼사 얘기가 끝난 후인 20살 때 태평공주는 원하는 바대로 부마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다시 당 예종의 옥진공주를 보자.

출궁 이후 호화로운 옥진관에 살면서 자주 명인아사들을 불러모아 술마시고 놀았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아래 쓰러졌다.

공주가 비록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스캔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당 현종이 집권하자, 여동생인 옥진공주를 더욱 총애했다.


옥진공주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왕옥산 등에 여러 개의 도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도 별관, 산장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주위에는 방사와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렇게 젊은 여도사가 행동도 자유로운데, 애정 생활이 없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백, 왕유의 두 당나라 대시인도 옥진공주의 애정 생활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당나라의 옥진공주가 선례를 보이자,

나중에 당현종, 당대종, 당덕종, 당순종, 당헌종, 당목종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공주가 여도사로 된다.


심지어 한 때는 4명의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기도 한다.

이들 존귀한 미모의 황실 여도사는 사실 수시로 환속하여 시집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처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때의 여도사는 거의 귀족의 기풍이 된다.

고관대작들의 딸 중에서도 적지 않이 여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때 대시인들은 이들 여도사들을 추켜세웠다.


이백은 일찌기 여도사 이등공(李騰空)을 위하여 시부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이등공은 바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딸이다.


그리고 초당사걸 중 하나인 낙빈왕은 여도사 왕령비(王靈妃)를 도와 그녀의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여도사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현기가 쓴, "이구무가보, 난득유정랑(易求無價寶, 難得有情郞)"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이 싯구는 정말 좋다. 그러나, 풍진의 여도사가 썼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사대미녀 중 하나인 양옥환(양귀비)도 개가하여 시아버지인 당 현종에게 가기 전에 잠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황실 여도사들은 여도사가 된 이후에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그녀들의 혼인생활도 왕왕 황실의 체면이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집간 이후에 공주들의 행위는 왕왕 남편 집안에 의하여 제한된다.


고양공주, 양양공주, 태평공주, 곡국공주, 영가공주 등등은 모두 애인들을 두었다.

이들의 애인과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고양공주는 변기(辯機)와 절에서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고,

양양공주와 같은 경우는 애인의 모친에게 며느리로서의 예를 행하기도 했다.


당나라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후의 궁관생활은 도관의 경제문제에 부닥친다.

옥진공주는 출가하겠다는 뜻이 아주 강했다.

그는 집도 필요없고, 조세도 원치 않으며, 공주 칭호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출가한 공주들은 실제 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특히 궁관여관들은 장식 등도 많이 따지게 된다.


당나라 공주들의 일상적인 수요도 있다.

특히 도관에서 재초(齋醮)를 지내야 한다.


방대한 행사에는 호화로운 도량이 필요하고, 옷을 차려입은 여악사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모두 상당한 고정경비를 요하는 것이다.


수를 원하는 궁관여관이라면, 특히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양생성선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궁관의 건조, 설비, 일상용품 등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때에 조정에서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궁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은 역대 왕조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 현종은 도교정책을 확립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신당서. 제공주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개원신제>가 실려 있다:

"장공주는 2천호에 봉하고...공주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역시 천호에 봉한다."


시집가지 않은 공주는 원래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병이 심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이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는 또 하나의 상황 즉 여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공주는 여전히 황실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관의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궁관여관은 체면을 잃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속세를 떠나서 산림에 은거하는 수진여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나라의 공주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자주권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 당왕조는 비록 관농일대에서 나타났지만, 선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남녀 관계에서, 중원의 명문대가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원의 봉건왕조가 되다보니, 윤리도덕도 따져야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개방된 성생활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려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태백독좌루(太白独坐楼)


태백독좌루는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을 기념하여 세운 누각이다.

그곳에 이백의 홀로 앉은 조각상과 시들이 갖춰져 있다.


이백은 경정산을 소재로 한 시 43수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적인 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을 지은 곳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녹설차사(绿雪茶社)

 

녹설차는 경정산을 원산지로 하는 중국녹차이다.

녹설차는 그 형상이 참새의 혀 같고, 통통하며, 녹색빛에 육기가 돈다.


찻잎의 표면은 미세한 흰털로 덮여있는데,

찻잎을 다린 물에 떠도는 그 털들이 마치 하늘에서 맴돌며 내리는 눈송이 같다.


이러한 녹설찻잎을 생산하는 차 밭이 경정산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경관이 별스럽고,

녹설차를 음미해볼 수 있는 녹설차사가 경구내에 있다.


경정산녹설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경정산에“ 녹설”이라는 이름의 낭자가 살았다.


나이는 아직어렸지만 총명하고 재주가 있으며 심성이 착했다.

녹설은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

생계와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은 깍아지른 산봉우리에 자생하는 찻잎을 따다 팔아서 충당하였다.


그날도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있는 차나무의 잎이 유난히 빛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저만한 품질과 양이라면 홀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값에 크게 보탤수 있겠다고 생각한 녹설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절벽을 타고 올라갔는데, 나무에 거의 도달했을 순간에 발이 미끄러져 깊디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녹설의 등 뒤 망태기에서는 그 동안에 따 담은 찻잎이 공중으로 흩어날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 같았고,

그렇게 온 산 온 계곡에 흩어져 내린 찻잎들은 모두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실한 차나무로 자랐다.


경정산 동네 사람들은 그 찻잎을 따다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녹설낭자에 대한 고마움이 넘쳐나 자신들이 따는 찻잎을“경정산녹설"이라고 불렀다.

 

천년의 시산(詩山) 경정산에서 생산되는 경정녹설은 항주의 용정차와 은 마찬가지로

납작한 편조(扁條) 형이며 홍청(烘靑) 녹차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진품(珍品) 녹차 중의 하나이며, 중국 역사 명차 중의 하나로 용정차와 꼽고 있다.

육우의『다경 』에 의하면 경정산이 속해 있는 하나로 선성(宣城) 에선

이미 동진(東晋: AD 317~322년)때부터 차가 생산되어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었었다.


경정녹설은 송라차(松蘿 茶)의 일종으로 명대에 창시되어 명청(明淸) 시기에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어 세상에 바치는 유명해졌으나,

후에 역사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수십년 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 연구가 시작되어

1978년에야 비로소 중국 정부의 심평과정을 통과하여 생산이 회복되었다.


경정산은 황산의 지맥에 속하며 풍경이 매우 수려하다.

산들이 높이 세상에 솟아 있어 산골짜기 또한 높이 매우 깊다.


운무가 또한 덮여 있어 골짜기엔 운무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숲과 골짜기엔 청죽(靑竹)이 숲과 하늘 높이 치솟아 해를 가리고,

상쾌하고 맑은 향기가 온 산에 이 가득하다.


『선성현지( 宣城縣誌)』의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의 기록에 보면,

“송라차(松蘿 茶)는 도처에 모두 있는데, 맛이 산에 쓰면서도 담백하다.

그러나 종류가 매우 풍부지만, 오직 경정녹설만이 최고품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차 이름이 ‘경정녹설’로 명명된 유래에는 3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맛이 있다.

첫째 전설은‘녹설’이란 차를 따는 아가씨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아가씨가 손재주가 비범하였다.

그녀는 차를 딸 때 손으로 영리하고 따지를 않고, 입으로 찻잎을 물고 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절벽에 손으로 올라 차를 따다가 그만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경정산차를 ‘녹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설은 찻물이 끓은 후, 찻잔위로 뜨거운 수증기가 마치 운무처럼 유유히 일어

구름처럼 떠있는 모습이 찻잔 속에 눈꽃이 날리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절벽에 마치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고 이것이 있는 뿌리고 뜻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그 선녀가 바로 있는 앞에서 말한‘녹설’아가씨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설은 바로 뜨거운 물로 차를 우리게 되자 찻잔 속의 찻잎이 잎 한 한 잎 수직으로 한 가라앉을 때

찻잎의 하얀 솜털(白毫)이 뒤집어 지는 모습이 마치 푸른 숲 속에 대설이 날리는 듯하여 ‘녹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설이 매우 신화적인 요소도 있고, 소박한 전설이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지만,

어쨌든 명칭 유래에 대한 소박한 세 가지 전설 모두가 ‘경정녹설’에 대한 특징을

중국인들 특유의 낭만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도화담   동영상 출처: EBS

도화담은 도화담(복사꽃 그림자가 아롱지는 연못) 연못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황산시 북서쪽에서 180km, 경현 서남쪽에서 40km 떨어진 청고강변구촌에 있다. 담은 절벽아래 있는데 못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건조한 것이다. 이 마을에는 이백(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당나라 때의 시인)의 유명한 시 한 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詩仙 이태백은 평생을 중국천하를 주유하면서 살았으며 가는 곳마다 시를 남겼다. 그래서 이태백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태백을 초청하여 머물게 하였고 떠나갈 때는 후한 노자를 보태어 주었다. 지금의 안휘성에 살던 왕륜도 이태백을 이런 말로 초청하였다. 당신은 유람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십리에 도화꽃이 있습니다. 당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만가구나 되는 술집이 있습니다. 이말을 들은 이태백은 흔쾌히 왕륜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다. 자신의 초청에 응한 이태백에 대하여 왕륜은 이렇게 말하였다. 십리에 도화꽃이 있다는 것은 실제 도화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십리되는 곳에 도화담이라는 못이 있다는 뜻이며 만가구의 주점이 있다는 것은 만개의 술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술집 주인이 萬氏라서 萬家酒店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말을 들은 이태백은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왕륜은 이태백이 머물다 떠날 때에 말 여덟필과 비단을 주고 아쉬운 석별의 정을 표하고자 수십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떠나는 뱃머리 언덕에서 발을 구르며 노래하게 하였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왕륜에게 이태백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달과 술의 시인. 붓을 한번 휘둘러 장편 거작을 써내는 천재로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시인 이백. 도화담(桃花潭)에는 왕윤(汪倫)과 마을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춤을 추며 이백을 노래했다는 언덕, 답가고안(踏歌古岸)과 그 따뜻함에 보답한 시 ‘증왕윤(贈汪倫)’이 전해져 온다. 강 언덕에는 답가고안(踏歌古岸:발 구르며 노래부르던 옛언덕)이라는 이백과 왕륜의 옛 이야기를 전해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는 ‘시선(詩仙)’으로 불리며 죽음마저 전설처럼 전해지는데, 채석기(采石磯)는 이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의 배경이다. 이백의 묘(墓)가 있는 당도(當塗)에서는 생전에 이백이 좋아하던 술 노춘(老春)과 손수 시를 지어 바치며 이백의 시 세계에 심취해 본다. 왕윤과 이백에 얽힌 사연과 이백의 '증왕윤' 시를 살펴보자.

- 贈汪倫 (증왕윤 : 왕윤에게 주다)  /  이백(李白)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이백이 배에 올라 떠나려 할 때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문득 언덕위에 발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들리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도화담의 물이 깊어 천척이나 된다지만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윤송아정)    왕윤이 나를 떠나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네
註(주)  
汪倫(왕윤) : 李白의 친구. 桃花潭에서 李白에게 술을 권한 일이 있다.  
忽(홀) ; 문득  
踏歌(답가) : 발로 땅을 밟으며 노래하는 것.  
桃花潭(도화담) : 연못의 이름.  
[해설]  
詩의 첫머리에 작자 자신이 '李白'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시 전체를 객관적 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떠나가는 李白의 배와 강 기슭에서 노래로 李白을 전송하는 汪倫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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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담(桃花潭)


도화담은 안휘성 경현(涇縣) 서남쪽 청대강변(靑弋江邊)의 적촌(翟村)에 있다.

도화담은 물이 깊고 맑아 바닥까지 보이는데, 서쪽의 석벽은 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천만가지 자태를 뽐내고,

동쪽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갈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도화담은 도화담(복사꽃 그림자가 아롱지는 연못) 연못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황산시 북서쪽에서 180km, 경현 서남쪽에서 40km 떨어진 청고강변구촌에 있다.

담은 절벽아래 있는데 못은 물이 맑고 깨끗하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건조한 것이다.

이 마을에는 이백(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당나라 때의 시인)의 유명한 시 한 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詩仙 이태백은 평생을 중국천하를 주유하면서 살았으며 가는 곳마다 시를 남겼다.

그래서 이태백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태백을 초청하여 머물게 하였고 떠나갈 때는 후한 노자를 보태어 주었다.


지금의 안휘성에 살던 왕륜도 이태백을 이런 말로 초청하였다.

당신은 유람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십리에 도화꽃이 있습니다.

당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만가구나 되는 술집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태백은 흔쾌히 왕륜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다.

자신의 초청에 응한 이태백에 대하여 왕륜은 이렇게 말하였다.

십리에 도화꽃이 있다는 것은 실제 도화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십리되는 곳에 도화담이라는 못이 있다는 뜻이며

만가구의 주점이 있다는 것은 만 개의 술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술집 주인이 만씨(萬氏)라서 만가주점(萬家酒店)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태백은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왕륜은 이태백이 머물다 떠날 때에 말 여덟 필과 비단을 주고 아쉬운 석별의 정을 표하고자

수십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떠나는 뱃머리 언덕에서 발을 구르며 노래하게 하였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왕륜에게 이태백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달과 술의 시인. 붓을 한번 휘둘러 장편 거작을 써내는 천재로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시인 이백.


도화담(桃花潭)에는 왕윤(汪倫)과 마을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춤을 추며 이백을 노래했다는 언덕,

답가고안(踏歌古岸)과 그 따뜻함에 보답한 시 ‘증왕윤(贈汪倫)’이 전해져 온다.


강 언덕에는 답가고안(踏歌古岸:발 구르며 노래 부르던 옛언덕)이라는 이백과 왕륜의 옛 이야기를 전해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는 ‘시선(詩仙)’으로 불리며 죽음마저 전설처럼 전해지는데,

채석기(采石磯)는 이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의 배경이다.


이백의 묘(墓)가 있는 당도(當塗)에서는 생전에 이백이 좋아하던 술 노춘(老春)과 손수 시를 지어 바치며 이백의 시 세계에 심취해 본다.

왕윤과 이백에 얽힌 사연과 이백의 '증왕윤' 시를 살펴보자.


- 贈汪倫 (증왕윤 : 왕윤에게 바친다)  /  이백(李白)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이백이 배에 올라 떠나려 할 때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문득 언덕위에 발구르며 노래하는 소리 들리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도화담의 물이 깊어 천척이나 된다지만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윤송아정)    왕윤이 나를 떠나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네


註(주) 
汪倫(왕윤) : 李白의 친구. 桃花潭에서 李白에게 술을 권한 일이 있다. 
忽(홀) ; 문득 
踏歌(답가) : 발로 땅을 밟으며 노래하는 것.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 형식의 하나로서, 손을 서로 잡고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걸음걸이로 박자를 맞춘다. 胡三省의 注에 따르면, “답가라는 것은 손을 연이어서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땅을 딪는 것으로 박자를 맞춘다”라고 하였다.
桃花潭(도화담) : 연못의 이름.

 

[해설] 
詩의 첫머리에 작자 자신이 '李白'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시 전체를 객관적 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떠나가는 李白의 배와 강 기슭에서 노래로 李白을 전송하는 汪倫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이백이 떠나며 친구 汪倫 에게 준 시인데 시속에 드물게 자신과 친구 이름이 들어 있다.

왕륜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사람으로 성격이 호방하였다 한다.


그는 이백의 시를 좋아하고 흠모하였는데 당시 이백이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고 편지를 써 그를 초청하였다.
편지 속에 말하길 여기에는 十里桃花  萬家酒店 (복숭아 꽃이 피어 10리나 길게 뻗어 있고 술집은 만 개나 된다 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다)

이라했는데 술을 좋아하는 이백이 여기 와서 술도 즐기고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경치도 감상하시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이백이 막상 와서 보니 소위 十里桃花란 둘레가 10리가 되는 도화담을 말하고 萬家酒店이란 성이 萬씨인 사람이 운영하는 주점이었다.

(家를 양사로 쓰면 만 개나 되는 주점이 되나 일반명사로 쓰면 성을 의미하니 萬氏주점의 뜻이 된다) 


성격이 대범하고 호방한 이백은 한번 크게 웃고 이를 크게 개의하지 않았다.

왕륜은 이백을 극진히 대우하고 두 사람은 자연히 좋은 친구가되었다.


이 시는 이백이 떠나면서 그에게 준 시이다.


1,2절 : 이백이 배를 타고 막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강둑에서 답가 소리가 들려 왔다.

보니 왕륜이 사람들과 함께 당시 유행하는 답가를 부르며 자기를 전송하러 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갑자기 들린다 의 忽에는 의외로,  예상하지 못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마도 전날 왕륜의 집에서 융숭한 송별연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송별하러 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많은 마을 사람들이 당시 유행하는 답가를 부르며 함께 전송하러 오는 걸 보고 크게 감동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4절 : 도화담의 물이 비록 천자나 되게 깊다 하지만 왕륜이 나를 송별하는 그 마음에는 미치지 못한다.

즉 도화담의 깊은 물과 無形의 정(情)을 대비해서 정의 깊음과 감사의 뜻을 표현하였다.


 

도화담(桃花潭)  이백이 <증왕륜> 시에서 언급한 곳으로 맑은 물이 깊이 흐른다


의문(義門) 건륭황제의 글씨 

 

 

 

 

왕륜 묘(汪倫 墓)


 

 

 

 

이백과 왕륜  왕륜의 초청으로 이백은 도화담에서 한 때를 즐겁게 보낸다.


 

답가고안(踏歌古岸) 왕륜이 답가를 부르며 이백을 전송했다는 옛 나루터


나루터  지금도 배를 저어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다.



맑은 도화담수 천 수백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맑고 그윽하게 흐른다



회선각(懷仙閣)

 

 

회선각(懷仙閣)에서 계단을 올라 윗층에 이르니 사진과 같은 글씨가 액자에 담겨 있다.

무슨 글자이고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송재소 교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갸우뚱하신다.

현지 가이드의 말인즉슨 풍(風) 자에서 테두리를 벗기면 충(䖝)이 남고

월(月) 자에서 테두리를 벗기면 이(二)가 남으니 풍월(風月)을 뜻한다는 설명이다.


풍월[二]


이백이 한 때 호남 동정호 주변의 악양루를 거닐 때 근처 바위에 '一䖝二'라는 문자가 크게 써 있었다.

아무도 그 의미를 몰라 이백에게 묻자 이백은 이렇게 풀이했다.
'一'은 '수천일색(水天一色)', '䖝二'는 '풍월(風月)' 곧 '풍월무변(風月無邊)' 합하면 '수천일색 풍월무변'이다.

참으로 글자의 틀과 형식까지 깨어버리는 한시의 유연함과 이 백의 자유분방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동정호의 빼어난 경치를 이 정도로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의 천재성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믿기 어렵다. '一䖝二'를 그렇게 해석해야 할 어떠한 논리적 연관이나 추론적 근거는 없다.

그냥 누군가가 파자(破字)유희를 하다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을 이야기꾼들이 그럴 듯 하게 의미를 달아 옮긴 것일게다.
이백의 초인적 능력을 인정하여(?)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해 준다면 미어(謎語)또는 비사(秘秘)니 하면서

이백의 천재성이나 도교의 신비성 등을 알리기 위해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 것이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

 





문창각(文昌閣)

도화담(桃花潭) 가는 길 동쪽 언덕에 있다. 적씨대종사(翟氏大宗祠)로 가는 길목에 있어 들른 곳인데

가이드가 말하기를 이곳으로 관광 오는 분들을 안내하기로는 이제껏 우리 일행이 처음이라고 한다.


청건륭(淸乾隆) 32년(1767년)에 3층 8각으로 세워진 누각.

청대 초기에 수동적씨(水東翟氏)에서 과거 급제자가 23명이나 나오자 황제로부터 문창각을 건립할 수 있는 은전이 내려졌다.


적씨대종사(翟氏大宗祠)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세워졌다

 

 

治家格言 (치가격언)  백려 주용순(柏廬 朱用純 1672~1698)이 지은 글


여명즉기(黎朙卽起)                  이른 새벽에 바로 일어나
쇄소정제(灑掃庭除)                  마당을 물 뿌리고 쓸고
요내외정결(要內外整潔)            안팎을 깨끗하게 정리정돈 한다.

기혼변식(旣昏便息)                  어두워지면 곧(便) 쉬고
관쇄문호(關鎖門戶)                  대문과 쪽문을 걸어 잠그되
필친자점검(必親自檢點)            반드시 친히 점검한다.

일죽일반(一粥一飯)                  한 그릇 죽과 한 그릇 밥이라도
당사래처불이(當思來處不易)      마땅히 나오는 곳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고,
반사반루(半絲半縷)                  반 가닥 실오라기 반쪽 누더기를 걸쳐도
항념물력유간(恒念物力維艱)      항상 만드느라 힘들고 어려웠음을 생각한다

의미우이주무(宜未雨而綢繆)      비 오기 전에 서둘러 대비해야 마땅하니
무임갈이굴정(毋臨渴而掘井)      목마른 다음에야 뒤늦게 우물을 파지 마라.
자봉필수검약(自奉必須儉約)      스스로 씀에 반드시 검약할 것이니
연객절물류연(宴客切勿留連)      잔치 손님은 오래 붙잡지 마라.

기구질이결(器具質而潔)            그릇은 소박하고 청결하여야 할 것이니
와부승금옥(瓦缶勝金玉)            사기 항아리는 금옥 제품보다 낫다.
음식약이정(㱃食約而精)            음식은 검약하고 정갈하여야 할 것이니
원소유진수(園蔬逾珍饈)            남새밭 채소 반찬이 진수성찬보다 낫다.
물영화옥(勿營華屋)                  화려한 집을 꾸리지 말고
물모양전(勿謀良田)                  좋은 전답을 꾀하지 마라.

삼고육파(三姑六婆)                  가사(賤役)를 하는 여러 여자는
실음도지매(實淫盜之媒)            실은 음부, 도둑의 매개자이다.
비미첩교(婢美妾嬌)                  아리따운 여 시종과 첩실이
비규방지복(非閨房之福)            규방의 복이 아니로다.

노복물용준미(奴僕勿用俊美)      노복은 잘생기고 아리따운 이를 쓰지 말고
처첩절기염장(妻妾切忌艶妝)      처첩은 고운 외모를 반드시 피하라.

조종수원(祖宗雖遠)                  조상은 비록 멀리 계시나
제사불가불성(祭祀不可不誠)      제사는 정성스럽게 할 것이고,
자손수우(子孫雖愚)                  자손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경서불가불독(經書不可不讀)      경서를 반드시 읽도록 하여야 한다.

거가무기검박(居家務期儉朴)      기거에는 반드시 검박함에 힘쓰고
교자요유의방(敎子要有義方)      자식교육에는 옳은뜻과 방도가 있어야 한다.

막탐의외지재(莫貪意外之財)      뜻밖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물음과량지주(勿㱃過量之酒)      정량을 넘는 술을 마시지 마라.

여견도무역(與肩挑貿易)            등짐(肩挑) 행상과 거래함에
무점편의(毋佔便宜)                  야박하게 잇속(便宜)을 챙기지 말고,
견궁고친린(見窮苦親隣)            궁빈하고 괴로운 친지나 이웃을 보면
수가온휼(須加溫恤)                  따뜻하게 구휼(救恤)하라.

각박성가(刻薄成家)                  남에게 각박하게 하여 집안을 이룬 자는
이무구향(理無久享)                  이를 오래 누릴 리 만무하며(無久享之理),
윤상괴천(倫常乖舛)                  윤상[倫理]을 어그러뜨리면
입견소망(立見消亡)                  곧바로(立) 소멸하고 망함을 보게 된다.

형제숙질(兄弟叔侄)                  형제숙질간은
수분다윤과(須分多潤寡)            모름지기 나눔은 많게, 윤택함은 적게 하고,
장유내외(長幼內外)                  장유 내외간에는
의법숙사엄(宜法肅辭嚴)            마땅히 법도는 정숙하게, 말은 경건하게 한다.

청부언(聽婦言)                        아내의 잘못된 말을 듣고
괴골육(乖骨肉)                        골육(가족)간에 어그러지면
기시장부(豈是丈夫)                  어찌 대장부라고 하겠는가?

중자재(重資財)                        재물을 중하게 여겨
박부모(薄父母)                        부모에 박하게 하면
불성인자(不成人子)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가녀택가서(嫁女擇佳婿)          딸을 시집보냄에 훌륭한 사위를 택하되
무삭중빙(毋索重聘)                  두터운 폐물을 구하지 말고,
취식구숙녀(娶媳求淑女)            자식을 장가들임에 정숙한 여식을 구하되
물계후렴(勿計厚奩)                  두터운 혼수를 바라지 마라.

견부귀이(見富貴而)                  부귀한 자를 보고
생첨용자(生諂容者)                  아첨하는 얼굴빛을 띠는 자가
최가치(最可恥)                        가장 수치스럽고,
우빈궁이(遇貧窮而)                  빈궁한 때를 당하여
작교태자(作驕態者)                  아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자는
천막심(賤莫甚)                        그 천함이 막심하다.

거가계쟁송(居家戒爭訟)            기거함에 다툼과 송사를 경계할 것이니
송즉종흉(訟則終凶)                  송사가 있으면 끝내 흉할 것이다.
처사계다언(處事戒多言)            일을 처리함에 말 많음을 경계할 것이니
언다필실(言多必失)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언하게 된다.

물시세력이(勿恃勢力而)            세력을 믿고서
릉핍고과(凌逼孤寡)                  고아나 과부를 핍박하지 말고,
무탐구복이(毋貪口腹而)            배를 채우려는 욕심으로
자살생금(恣殺生禽)                  산 짐승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괴벽자시(乖僻自是)                  어그러지고 편벽됨을 스스로 옳다 하면
회오필다(悔悟必多)                  후회가 반드시 많을 것이요,
퇴타자감(頹惰自甘)                  무너지고 게으름을 스스로 달콤하게 여기면
가도난성(家道難成)                  집안 법도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압일악소(狎暱惡少)                  악한 젊은이를 친압하면
구필수기루(久必受其累)            오랜 후에도 반드시 그 허물을 받게 되고,
굴지노성(屈志老成)                  노성(어른)에게 뜻을 공손하면
급즉가상의(急則可相依)            급할 때에 서로 의지가 된다.

경청발언(輕聽發言)                  남의 말을 가볍고 듣고서 쉽게 말해 버리면
안지(安知)                              어찌 알랴?
비인지참소(非人之譖愬)            다른 사람이 거짓으로 참소하는 것이 아님을
당인내삼사(當忍耐三思)            마땅히 인내하고 세 번 생각할 것이다.

인사상쟁(因事相爭)                  일로 인해한 호상(互相) 다툼에
안지(安知)                              어찌 알랴?
비아지불시(非我之不是)            내가 옳지 않음을.
수평심암상(須平心暗想)            모름지기 마음을 평정하고 암암리 생각할지라.

시혜무념(施惠無念)                  은혜를 베푼 일은 생각을 말고
수은막망(受恩莫忘)                  은혜를 받은 일은 잊지 말아야 한다.
범사당류여지(凡事當留餘地)      무릇 일에는 마땅히 여지를 남겨 둘 것이니
득의불의재왕(得意不宜再往)      뜻을 얻는 일은 두 번 오지 않음이 상례다.

인유희경(人有喜慶)                  다른 사람에게 기쁜 경사가 있거든
불가생투기심(不可生妒忌心)      질투(嫉妬)심을 내지 말고
인유화환(人有禍患)                  다른 사람에게 재앙과 우환이 있거든
불가생희행심(不可生喜幸心)      기뻐하거나 고소하다는 마음을 품지 마라.

선욕인견(善欲人見)                  선행(善行)을 남에게 보이고자 하면
불시진선(不是眞善)                  참으로 착한 일이 아니다.
악공인견(惡恐人見)                  악행(惡行)을 남이 볼까 두려워하면
변시대악(便是大惡)                  이야말로 대악(大惡)이다.

견색이기음심(見色而起淫心)      여색을 보고 음심을 일으키면
보재처여(報在妻女)                  그 보답이 아내와 딸에게 갈 것이요,
익원이용암전(匿怨而用暗箭)      원망을 숨긴 채 숨어서 화살을 쓰면
화연자손(禍延子孫)                  그 재앙이 자손에 미치게 될 것이다.

가문화순(家門龢順)                  가문이 화기애애하고 순리를 따르면,
수옹찬불계(雖饔餐不繼)            비록 끼니를 잇지 못하더라도
역유여환(亦有餘歡)                  역시 여환(餘歡)이 있게 된다.

국과조완(國課早完)                  나라에서 부과한 세금을 일찍 완납하면
즉낭탁무여(即囊橐無餘)            쌀 포대에 여분이 없더라도
자득지락(自得至樂)                  스스로 지극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독서지재성현(讀書志在聖賢)      책을 읽음에는 뜻을 성현에 두고
위관심존군국(爲官心存君國)      관원을 함에는 마음을 왕과 나라에 두어라.

수분안명(守分安命)                  분수를 지키고 운명에 안주하며
순시청천(順時聽天)                  때를 따르고 하늘의 뜻을 좇으라.
위인약차(爲人若此)                  사람노릇 하기를 이같이 하면
서호근언(庶乎近焉)                  거의 (도에) 가깝다 할 것이다.


충효당(忠孝堂)

 


존종경조(尊宗敬祖)

 

 


이백(字는 太白, 靑蓮居士 701-762)


중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의 시집이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이 있음에도 현실에 의해 좌절되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 한 이백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삶을 일상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초월적 의지의 실현의 장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인간사회 질서의 상당부분이

인간을 속박하는 실체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로부터의 초월만이 진실한 자유라는 주제가 제시된다.

그의 시는 기교 면에서도 중국 시의 한 전기를 이루고 있다.


 □ 생애와 작품


 술과 달 의 시인 이백, 그는 과연  천재 인가,  광인 인가? 이백은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두보와 함께  이두 로 일컬어진다.

이백은  시선 , 두보는  시성 , 왕유는  시불 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조상들은 대대로 농서 성기에 살았으나 이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출생했다.


이백은 당의 현종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현종은 전반기(개원연대)에는 측천무후의 횡포로 어지러운 나라를 중흥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주였다.

그러나 후반기(천보연대)에는 정사를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넘기고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이 시대에 바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전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우고,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일찌기 검술을 닦았으며 도교에 심취하여 선계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재성을 발휘한다.


한편 26세 때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멀리 고향을 떠나 대장부의 뜻을 펴고자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재주를 떨쳐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 는 정치를 포부를 펴고자 동정호를 거쳐

여산 금릉 양주 등 한바탕 각지를 돌고 안육에 와서는 재상을 지냈던 허어사의 손녀딸을 아내로 맞고 10년 정도 정착했다.

그후 산동에서 공소부 등 5명과 조래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는데, 이들을  죽계육일 이라 한다.


그후 다시 10년간을 방랑하다가 절강에서 도사 오균을 알게 되었는데,

오균이 먼저 현종의 부름을 받았고 이백은 그의 천거로 42세 때 현종의 부름을 받는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남릉별아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현종은 그를 정중히 맞이했으나 한림이라는 높지 않은 벼슬을 주었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자질, 그리고 고매한 이상을 가지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의 궁중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음흉하고 간악한 소인배들이 가득했으므로 청명하고 방탕한 이백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간의 궁중생활에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오직 구토와 비분만을 느끼며 폭음을 일삼았다.

마침내는 궁중에서의 전권자인 환관 고력사에게 술취한 이백이 자기의 신발을 벗기게 하는 물의를 일으키고 궁중을 떠난다.

 

이백은 한 말의 술에 백 편의 시를 짓고 장안거리 술집에 쓰러져 자며

천자가 불러도 배 타고 갈 생각 않고 자기는  주정뱅이 시선 이라고 자칭한다. 


그의 생에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관직생활은 이렇게 2,3년 만에 끝난다.

3년간 한림생활을 하면서 봉건상류계층의 부패한 생활과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장안을 만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이백은 낙양에서 11살 아래의 두보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불후의 우정의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타락과 무능과 부패에 시들던 당은  안녹산의 난으로 내부의 모순과 파탄이 노출되고 무고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숙종이 즉위했다.


이에 그의 정치 참여 욕구는 더욱 강해져, 이때 숙종의 동생 영왕이 반란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이백을 부르자

애국적 정열로 충만했던 그는 쾌히 수락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왕이 형인 숙종의 임금자리를 노렸다는 반역죄로 몰리게 되자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벼락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낙관적이던 이백도 58세에 이러한 혹독한 벌이 떨어지자 귀양가던 도중 

한 평생 눈에 눈물 보인 적이 없건만 이곳에서 하염없이 흐니끼게 되누나 라고 슬퍼했다.


말년에는 강남을 주유하다가 친척집에서 죽었다.
이백의 일생을 결산하면 평생 술을 마셨고 방탕했으며 오직 시문만을 남긴 시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게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의 이상과 포부는 충국애민경세제민을 위해 자기의 학식과 자질과 호방한 성품을 마음껏 펴고 은퇴하는 것이었다.


□ 이백의 사상


천재와 광인을 가름하는 선을 긋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본래 초나라의 미치광이라고 자칭한 이백은 너무나 비범한 천재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참모습을 한마디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방한 낭만주의와 격렬한 현실주의를 동시에 지녔으며 탈속적인  도가사상과 아울러 경세제민의  유가사상 에 투철했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를 품었으며 또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을 지니고

열렬하게 현실참여를 희구했음에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하고자 은퇴한 이백이었다.


예술창작에서도 대답하게 초월하고 부정하고 기발한 창조세계를 펼친 그는 늘  나라를 편안케 하고(안사직)

백성을 구한다(제창생) 고 염원하면서도 항상 통음고가한 데카당스에 묻혔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과 같이 그의 시도 걷잡을 수 없이 다난하고 모순과 광기에 차 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온통 모순과 광기에 찼으니 자기도 광인으로 광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백은 우리 나라 동요에도 있듯이 암흑의 밤하늘에서도 청명한 달에서 놀기를 사랑했고

온 세상에 청신한 기운이 소생하고 이에 따라 대아의 서풍이 넘치기를 갈구했으며,

자기가 바로 그 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백은 (고풍)에서  대아의 문학사상이 오래 진작되지 않았거늘 나마저 시들면 누가 펴리오 하고 읊기도 했다.
이백의 사상의 바탕은  유가와  도가였다.

한마디로  써주면 나가서 일하고 안 써주면 물러나 숨는다(용행사장) 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의 본뜻이나 이상은  용행 인 유가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입공보국   안사직 제창생(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안녕케 한다) 하고 싶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미혹한 군주와 혼탁한 사회는 그를 알아 써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몰아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포부를 가진 내가 특별나게 용안을 우러러 모시게 되었거늘 흰 구슬을 쉬파리가 더럽힘으로써

홀연 황제와 신하가 갈라서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몰아낸 타락한 간신배들을 쉬파리에 자기를 흰 구슬에 비유했다. 

흰 구슬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오로지 쉬파리가 원죄를 씌운 것이다.


충정과 정의가 간사와 사악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에 방탕하고 정열적인 이백은 도가 쪽으로 기울었다.


현실적으로 유가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오직 실의와 비분에 차 술로 수심을 달랬으므로 그의 시 속에는

도가적 또는 낭만적 일면이 더 잘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 속에 있는 그의 유가적 이상을 잘 찾아야 한다.


이백의 예술은 사상감정이 탁월한 학식과 세련된 표현으로 승화된 주옥이라 하겠다.

그는 육조시, 특히 도연명사영운강엄포조 등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위에 대담하고 기발한 자기 세계를 창조했다.


이백의 격앙된 낭만주의는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으나,

단 그것을 굴원에게는 없는 도가적 탈속입경의 경지로 잘 다듬었으며 또 무위자연을 따라 청진한 시풍과 운치를 넘치게 했음이 특색이다.


속세와 소인배에 대해 실망한 그는 자연과 산천을, 특히  밤의 달 을 사랑했으며,

자질구레한 협잡과 간교에 진절머리를 낸 그의 표현에서도 호방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 전하는 이백의 시문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청의 왕기가 여러가지 책을 모아서 집주한 (이태백문집주) 30권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  이백의 작품 세계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됨으로써 완성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내용인 사상만이 강하고 형식인 표현이 빈약해도 안되지만, 반대로 표현형식이 사상 내용을 위축시켜도 안된다.


건안 이후 중국의 시문학은 대체로 형식미에만 흘렀다.
시상이나 기골 있는 정신은 위축되고 겉으로만 화려하고 잔재주로 꾸며진 시가가 판을 쳤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기골 있는 문장정신과 사상을 담은 글을 되찾기 시작했다. 즉, 고문운동이다.


한유와 유종원이 산문에서 형식적인 큰 성과를 거두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시문단에서도 초당 이후 점차로 속이 빈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기풍이 짙어졌으며,

그중에서도 진자양은 이론과 작품 면에서 시를 뜬 구름잡기에서 끌어내려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올려놓고자 진력했다.


이백의 문학관도 그와 같았다.  건안 이래의 기미염려한 시는 진중할 바 못된다. 

나의 뜻도 공자가 시 3백 편을 산출했듯이 대아 같은 정도의 시를 지어 천년 길게 빛을 남기고자 한다. 


이백이 말하는 대아 같은 정도의 시란 다름이 아니라 사상고 기골이 있고 현실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즉,  안사직   제창생 하는 데 적극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대도의 시문학을 말한다.


이백은 적어도 사내 대장부가 하는 문학활동이거늘 쓸데없는 허튼 소리나 자질구레한 말재주는 문학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백의 시는 위대한 사상이나 정치적 포부나 고매한 이상이 용솟음치는 정열을 담아내기 위해

대자연 원시림에다가 큰 도끼로 덤썩덤썩 찍어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케일이 크고 다이내믹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될 수가 있었으며,

거대하고 청신한 그의 사상과 생명이 때묻지 않고 영겁의 생명을 지닌 자연 속에 안심하고 깃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백은 시문학에 있어 획기적인 표현과 예술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혁신과 창작은 물론 올바른 전통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백의 적극적인 낭만주의에 가장 영향을 준 선배는 역시 굴원이었다.


굴원은 뛰어난 재능과 고매한 정치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면섣 현실적으로는 불운했고,

제 눈으로 자기의 조국이 간악한 무리들 손에 빠진 채 쇠망의 구렁으로 전락해가는 참상을 보고 분개하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백은 굴원의 낭만정신, 조국애, 부패한 통치자들에 대한 반항정신과 불만에 공감했고,

따라서 그의 표현상의 수법도 많이 배우고 계승했다.


특히 굴원이 민간의 시가를 잘 따서 높이 쓴 태도나 신화전설 등을 활용하고 낭만의 환상적인 세계를 마냥 펼쳤던 수법을

이백은 착실히 배웠으며, 그의 기상천외한 도가적 상상력을 시에서 잘 살리는 데 성공했다.

즉, 현실과 이상을 자유자재로 내왕하는 수법은 굴원의 (초사)와 낭만주의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크고 청신한 자연에서 자기에 맞는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외에도 이백은

자연 속에서 간악하고 음흉하고 옹졸한 인간사회의 추악을 말끔히 씻고 해탈함으로써  참된 삶 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는 조국의 웅장하고 수려한 명산대천을 찾아 사랑했고,
청진하고 소박한 자연의 풍물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즉 이백은 자연을 인격화하고 그 속에서 감정과 영기를 느낀다.


새들은 높이 날아 간 곳이 없고
조각구름은 홀로 사라질세
오로지 경정산 너만이 싫다 않고
마주 보아 주노나


경정산만이 자기의 고독과 적막을 이해해주고 또한 자기를 지켜보아주고 있었다.
이백에게 있어 청명한 달은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나라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른 달과 이태백,

그는 달을 청진의 상징으로 믿었으리라.


날 저물어 푸른 산에서 내려오니
산의 달이 나를 따라 돌아오더라


암흑이 덮인 인간사회에 달이라도 있으니 구원을 받는다는 심정이 나타난 듯하다.

자연을 정관하고 섬세하게 느끼며 대화를 나누던 이백은 일면 산을 밀어젖히고 바다를 뒤엎는 듯한 과장된 표현수법을 잘 썼다.


백발 삼천장 씨름따라 이렇듯 길던가!
부귀공명이 길다면 한수의 물이 응당 서북으로 흐르리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구나.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욱 험난하구나!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그의 자유분방한 낭만정신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러한 과장되고 격렬한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그의 강렬한 사상과 감정의 열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특히 선과 악을 얼버무리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부패한 무리들에 대한 반항과,

몽롱한 인간들의 잠을 깨우고 제정신이 들게 하기 위한 기발한 수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다.


이백은 형식적인 구속을 싫어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약 1천여 수의 시 가운데서 형식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율시는 80여 수이고,

대부분은 고체시가행악부시같이 형식적 구속이 적은 것들이며 민간의 시가를 잘 흡수한 평이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150여 수에 달하는 악부시는 평이하면서도 영묘하게 언어를 구사하여 참신한 뜻과 시정을 담아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현실과 이상, 전통과 독창, 고매한 낭만정신과 초탈한 선도사상으로 승화시킨다.
이백의 시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몇 수를 들어본다.


  산중문답

어째서 푸른 산중에 사느냐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 빙그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화꽃 흘러 물 따라 묘연히 갈세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 있네

 

   자야오가

장안 하늘에는 허허 달빛이 마냥 퍼지고
거리 집집마다 밤새 다듬이소리 요란해
소슬한 가을바람 불어 멈추지 않으니
모두가 옥문관 넘나드는 애타는 정이리!
어느날 북쪽 오랑캐 평정하고
그리운 임 싸움터에서 돌아오리!

 

   월하독작 1수

꽃 속에 술단지 마주 놓고
짝없이 혼자 술잔 드네
밝은 달님 잔 속에 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
달님은 본시 술 못하고
그림자 건성 떠돌지만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동반하고
모름지기 봄철 한때나 즐기고서
내가 노래하면 달님은 서성대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흔들어대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놀고
취해서는 각자 흩어져 가네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이백은 문학사상 앞선 시기의 낭만주의 시가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최고봉을 이룩했다.

그는 시가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민중들의 구비문학에 의해 창간된 신화전설에서 싹을 틔운 낭만주의 문학형태는 전국시대 굴원의 시가 창작에서 집대성되었다.

물론 장자의 산문에 나타난 환상적인 우화가 낭만주의 문학사조에 미친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대시기와 위진남북조 시기에 창작된 악부민요, 예를 들면 (목란의 노래) 등에서 낭만주의 시가는 거족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도연명과 같은 문인들과 남북조 시기 수이전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문학사조가 전승되어오다가 이백 때에 이르러 낭만주의 시가의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나타난 필연적 결과로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반항정신과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백의 시가는

당대 전성기의 낙관적 창조정신과 봉건질서에 불만스러워하는 민중들의 정서가 반영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나타내기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이백은 낭만주의적 표현수법을 풍부하게 했으며

시가의 형상수준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이백이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는 훌륭한 증좌가 된다.


이백은 당시의 시가를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진자앙의 시가혁신론을 계승하고 또한 실천을 통해 당대의 시가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옛사람의 글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식주의적 문풍과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제량의 궁정체 시풍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이백이 후세사람들과 후기문학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이름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의 시집이 거의 집집마다 있었다고 한다.


한유 등 시인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흡수하여 독창적 시풍격을 창조했다.

이하의 낭만주의적 시풍은 이백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송대의 소식과 신기질을 중심으로 하는 호방과는 이백의 시 풍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청대시인들을 놓고 말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를 열망하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며 호방한 풍격을 이룩한 시인은 역사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은 그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流夜郞贈辛判官(류야랑증신판관-야랑으로 유배가며 신판관에게 드림)


昔在長安醉花柳(석재장안취화류) : 지난날 장안에서 꽃과 버들에 취하여
五侯七貴同杯酒(오후칠귀동배주) : 고관 귀족들과 술잔을 같이 했었다
氣岸遙凌豪士前(기안요릉호사전) : 의기는 높아 멀리 호걸들을 넘었으니
風流肯落他人後(풍류긍락타인후) : 풍류인들 다른 사람에 떨어져 뒤질까
夫子紅?我少年(부자홍안아소년) : 그대는 홍안 소년 나도 젊은이
章臺走馬著金鞭(장대주마저금편) : 궁전 호화로운 거리 말 달려 금 채찍을 휘둘렀다
文章獻納麒麟殿(문장헌납기린전) : 글 지어 천자 계신 기린전에 바치고
歌舞淹留玳瑁筵(가무엄류대모연) : 노래와 춤 대모로 장식한 잔치에  머물렀소.
與君自謂長如此(여군자위장여차) : 그대와 길이 이러하리라 생각했는데
寧知草動風塵起(녕지초동풍진기) : 풀이 움직여서 풍진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函谷忽驚胡馬來(함곡홀경호마래) : 함곡관에서  놀랍게도 오랑캐 반란군 쳐들어오니
秦宮桃李嚮明開(진궁도리향명개) : 장안의 오얏꽃, 복숭아꽃 누굴 위해 피겠는가.
我愁遠謫夜?去(아수원적야랑거) : 지금 근심 멀리 야랑 땅으로 귀양 떠나는 것이니
何日金?放赦回(하일금계방사회) : 어느 날에야 금 닭 아래서 사면되어 돌아올까


 주(註)

(1) 流夜郞贈辛判官(유야랑증신판관) : 야랑으로 유배가며 신판관에게 드림.
(2) 花柳(화류) : 호화로운 유흥가를 말한다.
(3) 五候(오후) : 漢나라 成帝가 봉한 5명의 諸候. 여기서는 높은 귀족을 가리킨다.
(4) 岸(안) : 언덕. 언덕처럼 높음을 의미한다.
(5) 夫子(부자) : 선생. 당신.
(6) 章臺(장대) : 본시는 전국시대 秦宮안에 있던 臺. 여기서는 궁전 앞 호화로운 거리.
(7) 著金鞭(착금편) : 금채찍으로 말을 치며 달리는 것.
(8) 麒麟殿(기린전) : 天子가 있던 궁전의 이름.
(9) 玳瑁筵(머모연) : 대모로 장식한 호화로운 잔치자리.
(10) 草動(초동) : 풀이 움직인다. 반란이 일어남을 뜻함.
(11) 風塵起(풍진기) : 전쟁이 벌어짐을 뜻함.
(12) 胡馬來(호마래) : 오랑캐 출신의 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쳐들어 왔음을 의미.
(13) 向誰開(향수개) : 누구를 향하여 피는가 ? 임금이나 궁전에 살던 궁녀들이 모두 피난갔음을 의미.
(14) 金鷄(금계) : 중서령이 죄인을 방면하는 날 그 자리에 긴 장대위에 금빛 닭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15) 放赦回(방사회) : 죄를 용서받고 방면되어 돌아가는 것.



南陵別兒童入京(남릉별아동입경)


白酒新熟山中歸(백주신숙산중귀) : 막걸리 처음 익을 산으로 돌아오니
黃?啄黍秋正肥(황계탁서추정비) : 닭이 기장을 쪼아 먹는데 가을이라 살이 쪘다
呼童烹?酌白酒(호동팽계작백주) : 아이 불러 닭 삶아 안주하고 막걸리를 마시니
兒女嬉笑牽人衣(아녀희소견인의) : 아이들은 기뻐 웃으며 내 옷자락을 당긴다.
高歌取醉欲自慰(고가취취욕자위) :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취하여 스스로 위안하려
起舞落日爭光輝(기무락일쟁광휘) : 일어나 춤추니 지는 해는 그 붉은 빛을 다툰다.
游說萬乘苦不早(유설만승고불조) : 천자에게 내 뜻 설득함이 늦은 것을 괴로워하여
著鞭跨馬涉遠道(저편과마섭원도) : 채찍 치며 말에 올라 먼 길을 떠난다.
會稽愚婦輕買臣(회계우부경매신) : 회계땅의 어리석은 여자 남편 주매신을 버렸으니
余亦辭家西入秦(여역사가서입진) : 나도 집을 버리고 서쪽으로 장안으로 가련다.
仰天大笑出門去(앙천대소출문거) : 하늘 우러러 크게 웃으며 문을 나서 떠나니
我輩豈是蓬蒿人(아배기시봉호인) : 우리들이 어찌 초야에 묻혀 살 사람이겠는가


 주(註)
 남릉(南陵) : 安徽城 宣城縣 서쪽에 있다. 李白이 玄宗의 부름을 받고 長安으로 들어갈 즈음 이곳에서 妻子와 작별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주(白酒) : 탁주를 일컬음.
만승(萬乘) : 天子를 가리킴.
회계우부경매신(會稽愚婦輕買臣) : 《漢書》에 나오는 이야기.
朱買臣은 會稽君의 吳 땅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 생계를 이어갔는데 나뭇짐을 지고 가면서도 글을 읽었다. 아내가 동행하면서 창피하게 생각하고 글 읽는 것을 말렸으나 朱買臣은 더욱 빠른 소리로 읽었다. 결국은 아내가 朱買臣을 버리고 가버렸는데, 수년 후에 朱買臣은 出世하였다고 한다.
봉호(蓬蒿) : 쑥. 草野에 묻혀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여산 폭포를 바라보며)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색 안개 피어올라
遙看瀑布掛長川(요간폭포괘장천) : 아득히 폭포 바라보니, 긴 강이 걸려있구나
飛流直下三千尺(비유직하삼천척) : 날아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 이것 혹 은하수 하늘에서 떨어 것 아닐까


《여산폭포를 바라보며》라는 시제(詩題)로 번역하기도 한다.

2수 연작의 제2수로 《당시선(唐詩選)》에 수록되어 전한다.

이 시는 여산폭포의 장엄한 위용을 호방한 기개로 노래한 낭만적 서정시로서,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편으로 알려졌다.

시의 형식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분류되는 근체시이며, 1,2,4구의 마지막 글자 '연(煙)·천(川)·천(天)'이 운자(韻字)이다.


제1,2구는 눈에 보이는 실경을 시각적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 햇빛과 물보라를 배합시키고,

직선으로 떨어져내리는 폭포를 흐르는 강물과 연결시켜 매우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인 제3,4구는 엄청난 폭포의 높이와 곧바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기세를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호탕한 기개와 풍부한 상상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여산의 향로봉과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을 노래한 이 시는 전편을 통해 폭포의 웅장한 스케일과 속도감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선경(仙境)을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시제(詩題)에 나오는 여산은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중국의 명승지이자 유명한 피서지이다.

제1구의 '자연(紫煙)'은 향로봉 봉우리에 덮여 있는 안개구름이 햇빛에 비쳐 보라색 연기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제2구의 '장천(長川)'은 폭포가 흘러 이룬 내[川]를 뜻하는데, '전천(前川)'으로 표기된 책도 있다.

제3구의 '비류직하삼천척'은 폭포의 기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늘날 상투어가 되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구이다.


자연에 동화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임으로써, 탈속적이며 낭만적인 시정(詩情)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노장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여산폭포의 거대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백은 원래 악부와 가행을 잘했는데, 이는 악부와 가행의 형식이 자유로워서 자유분방한 감정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형식이 다른 연작시였지만 이백의 자유자재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후 시인들의 창작에도 큰 참고가 되었다.


이 작품은 725년 당 현종 13년 전후로 이백이 금릉 지역을 유람하면서 여산(廬山)을 들렀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작품 속 두 수의 체제 이질성을 근거로 같은 시기에 창작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廬山 : 광산(匡山)이라고도 불리는 여산은 중국의 명산 중 한 곳이다.

주(周)나라 때 광(匡)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그들이 거처한 오두막집(廬)이 변하여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의 장시[江西]성 지우장[九江]시 북쪽에 있다.

북쪽은 양쯔강, 동쪽과 남쪽은 보양호에 닿아 있으며, 서쪽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주봉은 피라미드 모양을 한 한양봉(漢陽峰, 1,474미터)이다. 작품에 나오는 향로봉은 여산 북쪽의 봉우리 이름이다.


운무가 자욱하게 낀 것이 마치 향을 피운 후에 올라가는 연기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여산은 예로부터 중국 문인들이 많이 다녀간 곳으로, 중국문학의 산실이라 할 만한 곳이다.

중국 역사상 이 산을 다녀간 문인들이 남긴 문학 작품은 4,000여 수를 헤아린다고 한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백거이(白居易, 766~826)의 〈비파행(琵琶行)〉,

소식(蘇軾, 1037~1101)의 〈제서림벽(題西林壁)〉 등이 유명한 작품이다.



정야사(靜夜思-고요한 밤에)

 

牀前看月光(상전간월광) : 침상 앞에서 달빛을 바라보니
疑是地上雪(의시지상설) : 땅에 내린 눈 내린 것 아닌가 생각했네.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 고개 들어 산에 걸린 달 바라보니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 고향 생각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 작품은 726년 당 현종 14년, 이백이 26세 때 양주객사()에서 <추석여회(怀)>와 더불어 지은 것이다.

이 작품에는 고요한 달밤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홀로 타지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시인. 밤이 되니 문득 잊었던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게다가 하늘에는 밝은 달까지 떠오르니 고향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나그네에게 밤은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달은 한없이 밝지만, 시인에게는 가을 달이고 서리처럼 차가운 존재다.

추석을 전후로 뜨는 가을 달은 다른 이들에겐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타향을 떠도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시인에게 달은 차가운 서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잠결에 깨어난 탓인지 침상 앞을 비추는 청량한 달빛을 지면에 내린 서리로 착각하였다.

서리는 달빛의 고결함, 가을의 차가움으로 형용된다. 이를 통해 타향을 떠돌아다니는 시인의 처지, 그 마음이 잘 드러났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고개를 드는 것과 숙이는 동작을 통하여 고향 생각이 깊어짐을 표현했다.

달빛이 서리처럼 보이는 모호함에서 깨어 나온 시인은 머리를 들어 달을 보면서 고향 생각을 참지 못한다.

이백의 작품은 주로 남성적이고 즉흥적인 것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여성적이고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추포가(秋浦歌)


秋浦長似秋(추포장사추) : 추포는 언제나 가을 같아
蕭條使人愁(소조사인수) : 쓸쓸함에 사람들 서글퍼진다
客愁不可度(객수불가도) : 객수를 이기지 못해
行上東大樓(행상동대루) : 동쪽 큰 누각에 올라본다
正西望長安(정서망장안) : 정면 서쪽으로는 장안이 보이고
下見江水流(하견강수류) : 아래엔 강물이 말없이 흐른다.
寄言向江水(기언향강수) : 강물에게 말하노니,
汝意憶儂不(여의억농불) : 네 마음속에 나를 기억하는지
遙傳一掬淚(요전일국루) : 한 손 가득 내 눈물을 멀리 전하여
為我達揚州(위아달양주) : 양주로 보내주려무나
秋浦猿夜愁(추포원야수) : 추포에 원숭이 밤이 슬피 울어
黃山堪白頭(황산감백두) : 항산도 백발이 되리라
清溪非隴水(청계비롱수) : 청계는 농산의 물이 아니어도
翻作斷腸流(번작단장류) : 창자를 끊는 듯 흘러간다.
欲去不得去(욕거불득거) :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니
薄游成久游(박유성구유) : 잠시의 여행이 영원한 여행이 되었구나.
何年是歸日(하년시귀일) : 그 어느 해가 돌아갈 날인가
雨淚下孤舟(우루하고주) : 눈물이 비 오듯 외로운 배에 떨어진다.
秋浦錦駝鳥(추포금타조) : 추포 금 타조
人間天上稀(인간천상희) : 세상엔 드물도다.
山雞羞淥水(산계수록수) : 물가의 산계도 부끄러워
不敢照毛衣(불감조모의) : 날개 한번 못 비추네.
兩鬢入秋浦(량빈입추포) : 추포에 와 내 귀밑머리
一朝颯已衰(일조삽이쇠) : 하루아침에 흩어져 늙었구나.
猿聲催白髮(원성최백발) : 원숭이 울음소리 백발을 재촉하니
長短盡成絲(장단진성사) : 긴 것도 짧은 것 도 실이 되어버렸네.
秋浦多白猿(추포다백원) : 추포에는 원숭이도 많아
超騰若飛雪(초등약비설) : 날리는 눈처럼 날뛰는구나.
牽引條上兒(견인조상아) : 나무 위의 새끼를 끌어당겨서
飲弄水中月(음롱수중월) : 물속의 달과 물마시며 논다
愁作秋浦客(수작추포객) : 시름 안은 추포의 나그네
強看秋浦花(강간추포화) : 기분전환으로 꽃구경한다.
山川如剡縣(산천여섬현) : 섬현 같은 산과 강
風日似長沙(풍일사장사) : 장사 같은 바람과 햇빛
醉上山公馬(취상산공마) : 술 취하면 모자 거꾸로 쓰고 말을 달린 진나라 관리 산간처럼 말에 오르고
寒歌甯戚牛(한가녕척우) : 날이 차면 노래하나로 제나라 대신 된 영적의 “반우가”를 노래했었다
空吟白石爛(공음백석란) : 헛되이 “백석란‘을 소리 내어 불러볼 뿐
淚滿黑貂裘(루만흑초구) : 눈물만 나의 검은 돈피가죽옷에 가득 떨어지는구나.

爐火照天地(로화조천지) : 화롯불은 천지를 비추고
紅星亂紫煙(홍성란자연) : 붉은 별빛 자색 안개 속에 어지럽다
??明月夜(난랑명월야) : 달 밝은 밤 낯 붉은 사나이
歌曲動寒川(가곡동한천) : 노랫소리 차가운 냇가로 울려 퍼진다.

秋浦千重嶺(추포천중령) : 추포의 천만 봉우리
水車嶺最奇(수거령최기) : 수거령이 가장 절묘하다
天傾欲墮石(천경욕타석) : 하늘이 기울어 돌이 떨어질 듯하고
水拂寄生枝(수불기생지) : 강물은 기생하는 나뭇가지를 스치고 흘러간다.

江祖一片石(강조일편석) : 강조의 한조각 돌

?天掃??(청천소화병) : 푸른 하늘에서 병풍을 쓸어낸다

題詩留萬古(제시류만고) : 병풍에 시를 지어서 마고에 남기려니
綠字錦苔生(록자금태생) : 푸른 글자에 비단 이끼 돋아나리라

千千石楠樹(천천석남수) : 천 그루, 또 천 그루, 많고 많은 석남수요
萬萬女貞林(만만녀정림) : 만 그루, 또 만 그루, 많고 많은 여정 림이라
山山白鷺滿(산산백로만) : 산마다 백로가 가득 날고
澗澗白猿吟(간간백원음) : 골짜기마다 흰 원숭이 우는구나.
君莫向秋浦(군막향추포) : 그대는 추포로 오지 말아요.
猿聲碎客心(원성쇄객심) : 원숭이 울음소리에 나그네 마음 부서진다오.

邏人橫鳥道(라인횡조도) : 나인에는 새 날아다니는 높은 길 비껴있고
江祖出魚梁(강조출어량) : 강조에는 물고기 통발 솟아있구나
水急客舟疾(수급객주질) : 물살이 빨라 나그네 배는 빠르고
山花拂面香(산화불면향) : 산의 꽃들 얼굴을 스치니 향기로워라

水如一匹練(수여일필련) : 물은 한 필의 비단
此地?平天(차지즉평천) : 땅은 넓은 하늘같구나.
耐可乘明月(내가승명월) : 차라리 밝은 달 타고
看花上酒船(간화상주선) : 꽃구경하러 술 실은 배에 올랐으면

?水淨素月(록수정소월) : 푸른 물에 깨끗하고 흰 달
月明白鷺飛(월명백로비) : 달빛은 밝은데 흰 백로가 날아드네.
?聽採菱女(랑청채릉녀) : 총각이 듣고 있네, 마름 따는 처녀가
一道夜歌歸(일도야가귀) : 밤 길 집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소래소리를

秋浦田舍翁(추포전사옹) : 추포의 시골 늙은이
採魚水中宿(채어수중숙) : 물고기 잡고 물가에 잠이 드네.
妻子張白?(처자장백한) : 아내와 아들은 백한새를 잡으려
結?映深竹(결저영심죽) : 그물 친 것이 깊은 대숲 속에 어리네.

?波一步地(조파일보지) : 여기서 도파 땅은 한 걸음 남짓
了了語聲聞(료료어성문) : 말하는 소리 똑똑히 들려오는구나.
闇與山僧別(암여산승별) : 몰래 산 속 스님과 이별하고
低頭禮白雲(저두례백운) : 머리 숙여 흰 구름에도 인사하며 떠난다.


어구(語句)
秋浦 : 池州府 秋浦縣(지주부 추포현, 安徽省 池州地區貴池市안휘성 지주지구 귀지시)으로 양자강 남쪽 연안임.
蕭條 : 분위기가 아주 쓸쓸함. 蕭索(소삭).
客愁 : 나그네의 시름. 객지에서 느끼는 수심. 旅愁(여수).
儂 : 나.
一掬淚 : 한 움큼의 눈물.
揚州 : 지금의 江蘇省 揚州市(강소성 양주시). 이백이 유랑하던 곳 중의 하나임.


감상(鑑賞)
지은이가 추포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은 連作詩(연작시). 제2수 이후의 몇 수를 보면,

‘추포 원숭이들의 밤 시름에 남쪽 黃山(황산)도 민둥산이 되고, 여기 청계는 隴(농) 땅의 강물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애끊는 소리 내며 흐르네.

고향 가고 싶으나 못 가 잠깐 여행한다는 게 오래되고 말아, 언제 가려는가 외로운 배에서 비오듯 하는 눈물.’은 제2수이고,

제3수는 ‘추포의 고운 錦駝鳥(금타조)는 천하에 드물어, 산꿩은 물가에 나와서도 감히 제 모습을 물에 비춰 보지 못하네.’이다.

 ‘추포에 들어가자 양쪽 귀밑털이 하루아침에 세나니, 원숭이 울음이 백발을 재촉해 머리털이 모두 흰 실이 되는구나.’는 제4수이고,

제5수는 ‘추포에는 흰 원숭이가 많아 마구 날뛰는 게 흰 눈이 날리는 듯한데,

가지 위의 새끼들을 끌고 내려와 물 속의 달을 마시며 희롱하는구나.’이다.

이렇게 추포의 풍물을 읊어 나갔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제15수〉
(백발삼천장 연수사개장 부지명경리 하처득추상)
백발은 삼천 자 길이, 수심 따라 하나하나 자라났구나.
거울 보니 알지 못괘라, 어디서 가을 서리를 저리도 맞았던고.


어구(語句)
白髮三千丈 : 백발이 삼천 길이 되도록 길게 자랐음. 誇張法(과장법)의 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임.
緣愁 : 수심에 인연하여. 시름 따라.
似箇長 : 이렇게 하나하나 자람. 似箇를 ‘이와 같이’로 보아 ‘이처럼 자랐구나’로 풀이하기도 함.
明鏡 : 거울. ‘맑은 水面(수면)’으로 풀이하기도 함.
秋霜 : 가을의 찬 서리. 백발.


감상(鑑賞)
머리칼은 내 시름 하나에 한 올이 세고 또 하나에 다른 올이 세고 하면서,

시름을 따라 세어가서 드디어 백발이 되고 그 길이가 사람의 키로 3천 길이나 된다.

문득 거울이나 물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알게 된 것인데, 내 언제 어디서 된 가을 서리 맞듯 저리도 백발이 되고 말았나.

깨달을 사이 없이 늙어가는 인생을 한탄한 명시이다.

참고로 제16수를 보면 “秋浦田舍翁 採魚水中宿 妻子張白鷳 結罝映深竹

(추포의 노인은 고기 잡으려고 강물 위에서 자고, 아내와 아들은 황새 붙들려고 대숲 깊숙이 그물을 쳐 놓았네)”이고

끝 수[17수]는 ‘桃波(도파)는 좁은 곳이라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나니,

산의 스님과 몰래 헤어지는데 고개 숙여 흰 구름에 절하는구나.’이다.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혼자 앉아)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 새들은 높이 날아가고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 외로운 구름만 한가히 떠간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건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 다만 경정산이 있기 때문


어구(語句)
敬亭山 : 安徽省 宣城地區(안휘성 선성 지구)에 있는 산.
孤雲 : 외로이 떠도는 구름.
相看 : 서로 봄. 바라봄.
不厭 : 싫지 않음.


감상(鑑賞)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자견(自遣-스스로 위안함)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 : 술잔을 마주하니 어두워지는 줄도 몰라
花落盈我衣(화락영아의) : 꽃잎은 떨어져 옷에 가득 찬다.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 : 취하여 일어나 개울에 비친 달을 따라 걸으니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 : 새는 둥지로 돌아오고 사람도 드물다


어구(語句)
自遣 : 스스로 자기 마음을 위로함.
暝 : ① 〈평성 靑(청) 운〉 어둡다. 캄캄하다. ② 〈거성 徑(경) 운〉 저물다. 쓸쓸하다. 여기서는 ②임.
盈 : 차다. 가득차다.


감상(鑑賞)
혼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 사이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 옷자락에는 떨어지는 꽃잎이 가득하다.

일어나 취한 걸음으로 달빛 비추는 냇가를 거니노라니,

새들도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 또한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려 적적하다.

외로움 속에 내 벗이란 하늘의 달과 떨어지는 꽃잎과 술, 이 세 가지뿐이로구나.

이것들이야말로 내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니 고독을 느낄 까닭이 없다.


 

월중람고(越中古-월나라에서 옛 일을 회고하다)


越王句踐破吳歸(월왕구천파오귀) :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이기고 돌아오고
義士還家盡錦衣(의사환가진금의) : 충신의사들 모두 돌아와 비단 옷을 입었다
宮女如花滿春殿(궁녀여화만춘전) : 궁녀들 꽃 같이 예쁘고 궁궐엔 봄이 가득했지만
只今惟有??飛(지금유유자고비) : 지금은 오직 자고새만 울고 있구나.


註(주)

(1) 越中(월중) : 越(월)나라의 首都인 會稽(회계)를 가리킨다.
(2) 覽古(람고) : 고적을 찾아 감상함을 뜻한다.
(3) 句踐(구천) ; 오왕 夫差(부차)에게 패했으나 20년의 忍苦(인고)끝에 부차를 격파하고 복수를 이룸.
(4) 義士(의사) : 월왕 구천과 함께 싸운 전사들.
(5) 錦衣(금의) : 싸움에 승리하고 상으로 받은 비단옷.
(6) 자고 : 꿩과에 속하는 새. 가슴 부분에 흰 반점이 있다.


[해설]
蘇臺覽古(소대람고)가 오왕을 노래했다면 이 詩는 越王 句踐(구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두 편의 시에서 공통되는 점은 인간 세상에 대한 영화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소대람고(蘇臺覽古-소대에서 옛날을 생각하다)


舊怨荒臺楊柳新(구원황대양류신) : 옛 동산 낡은 누대에 버들잎 새로 돋아나고
菱歌淸唱不勝春(릉가청창불승춘) : 연밥 따는 맑은 노랫소리 봄의 흥취 못 견딘다.
只今惟有西江月(지금유유서강월) : 지금은 강서의 저 달만 남아 있으니
曾照吳王宮裏人(증조오왕궁리인) : 저 달은 오나라 궁궐 속의 사람도 비추었겠지


語句 解釋

蘇臺(소대) : 고소대(姑蘇臺), 현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서쪽에 있다. 춘추(春秋)시대의 오(吳)나라 임금 부차(夫差)가 지은 궁전의 터전.
覽古(람고) : 옛 고적을 둘러본다.
舊苑(구원) : 옛날의 정원.
荒臺(황대) : 황폐한 고대(高臺)
菱歌(능가) : 연못에서 느름 따는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
不勝春(불승춘) : 봄을 이기지 못한다. 춘정(春情)에 노근하다.
西江(서강) : 서쪽에 흐르는 강물.
吳王(오왕) :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
宮裏人(궁리인) : 궁중의 사람, 즉 오왕 부차가 사랑했던 서시(西施)란 미인.


補充 說明
 계원(桂苑)의 낡은 정원과 황폐한 고소대(姑蘇臺) 언덕에는 버들잎들이 봄을 맞아 산뜻하고,

천지(天池) 연못에서 느름 따는 아가씨들의 맑은 노래 소리가 더욱 봄의 노근함을 못 견디게 하는구나.
 옛날 이곳에는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가 미인 서시(西施)와 더부러 놀던 곳,

지금은 오직 서쪽 강물위에 달이 비칠 뿐이지만, 옛날에는 오나라 대궐 안의 서시를 비춰주었으리라.


 궁정에서 쫓겨난 이백은 천보(天寶) 五년(七四九)에 남쪽 오월(吳越) 일대를 유람했다.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기원전 四九四년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는 명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 회계산(會稽山)에서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굴복시켰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그리고 나자 부차는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소주(蘇州)에서 마냥 영화를 누렸다.

도성에서는 계원(桂苑)이란 정원과, 곳대(姑蘇臺)란 고대를 만들어 궁전 누각을 세웠고, 또 천지(天池)란 연못을 파고 배를 띄우기도 했다.

더욱이 부차는 패자(敗者) 구천이 보내준 미인 서시(西施)에 빠져 나날이 유연(遊宴)만을 일삼았고,

마침내는 二十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구천에게 패하고 망하게 되었다.

이 시는 고소대와 오나라를 중심한 것이다.


贈汪倫(증왕윤 : 왕윤에게 )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 나 이백이 배 타고 떠나려는데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 언덕 위에서 문득 답가성이 들리어온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 도화담의 물 깊이 천 자나 되어도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윤송아정) : 왕윤이 나를 떠나보내는 정에 미치지 못 하리라

 

註(주) 
(1) 汪倫(왕윤) : 李白의 친구. 桃花潭에서 李白에게 술을 권한 일이 있다. 
(2) 忽(홀) ; 문득 
(3) 踏歌(답가) : 발로 땅을 밟으며 노래하는 것. 
(4) 桃花潭(도화담) : 연못의 이름. 

 

[해설] 
詩의 첫머리에 작자 자신이 '李白'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시 전체를 객관적 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떠나가는 李白의 배와 강 기슭에서 노래로 李白을 전송하는 汪倫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山中與幽人對酌(산중여유인대작-산속에서 은자와 대작하다)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 산에는 꽃이 피고 두 사람 술을 나눈다.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부일배) : 한 잔, 한 잔 또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아취욕면군차거) : 내가 취하여 잠이 오니 그대는 돌아가서
明日有意抱琴來(명일유의포금래) :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시게

 

어구(語句)
幽人 :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피하여 그윽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
對酌 : 마주하여 술을 마심. 對飮(대음).
有意 : 뜻 또는 생각이 있음.

 

감상(鑑賞)
제목을 ‘山中對酌’이라고 하는 작품. 유인이 속세에서 찾아온 사람과 술잔을 나누며 술에 취한 후 찾아온 사람에게 말하는 형식이다.

‘一杯一杯復一杯’는 지금까지도 술자리에서 자주 말해지는 유명한 구절이다.

셋째 구 ‘나는 취해 졸리니 그대는 돌아가라’는 말은 陶潛(도잠, 陶淵明도연명)이 술이 먼저 취하면 손더러 말하기를

“내 취해서 자고자 하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시오.” 했다는 것을 인용한 말로,

손님을 쫓아내려는 뜻이 아니라 속세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을 게 없고 그만큼 서로 무간한 사이임을 나타낸다.

‘山中答俗人(산중답속인)’ 시와 같은 사상과 풍류가 담긴 시이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가는 것을 전송하다)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 친구는 서쪽으로 황학루를 떠나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 춘 삼월 꽃피는 시절에 양주로 간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하늘 먼 곳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 오직 장강만 하늘과 맞닿아 흘러간다.

 

어구(語句)


黃鶴樓 : 湖北省 武漢市(호북성 무한시)에 있는 누각.1)
孟浩然 : 盛唐(성당)의 자연파 시인, 처사.2)
廣陵 : 江蘇省 揚州市(강소성 양주시)의 옛 이름.
故人 : 오랜 친구.
煙花 : 안개나 아지랑이 속의 꽃.
孤帆 : 외롭게 떠 있는 작은 배. 孤舟(고주).
碧空 : 푸른 하늘. 碧天(벽천).
長江 : 揚子江(양자강)의 중국식 명칭.
天際 : 하늘의 끝. 天末(천말).

 

감상(鑑賞)
오래 사귀어 온 친구인 맹호연을 전망 좋은 황학루에서 송별하며 지은 시.

맹호연은 양자강 따라 외롭게 배를 타고 동쪽 양주로 가게 된다.

때는 이지랑이 낀 속의 꽃을 볼 수 있는 음력 3월 봄철이다.

친구는 배를 타고 강물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떠간다.

드디어 그 배의 모습은 푸른 하늘 끝까지 가서 아물아물 보이지 않게 되고,

오직 보이는 것은 동쪽 하늘 끝까지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 강물만 보일 뿐이다.

이별의 아쉬운 정은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끝 두 구 ‘遠影碧空盡’과 ‘長江天際流’ 같은 시어 속에 스미어 있다.

제목은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라는 뜻으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송별시(送別詩)이다.

황학루는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 서남쪽 양쯔강[揚子江] 강가에 있는 누각으로,

선인(仙人)이 노란 귤 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백(701~762)은 쓰촨을 떠나 중원을 주유하다가 20대 후반에 12세 연상인 맹호연(689~740)과 교분을 맺었다.

이때 맹호연은 이미 시명(詩名)을 날리고 있었고 이백은 그를 위하여 〈증맹호연(贈孟浩然)〉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다시 세월이 흘러 739년, 이백은 황학루에서 우연히 맹호연을 만났다.

당시 맹호연은 광릉, 곧 지금의 양저우[揚州]로 가려던 참이었으므로 이백은 이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황학이 날아가버린 것처럼 옛친구도 작별을 고하여 떠나는데, 꽃 피는 계절을 함께 즐기지 못하여 더욱 아쉽다.

옛친구를 실은 배는 점점 멀어져 마침내 수평선에 닿은 푸른 하늘로 사라져버리고,

눈앞에는 짧은 인생의 이별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장강(양쯔강)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단 4구절로 석별의 정을 심원하게 드러낸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황학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맹호연은 이백과 헤어진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횡강사(橫江詞)


橫江館前津吏迎(횡강관전진리영) : 횡강의 관사 앞에서 나루터 관리가 맞으며
向余東指海雲生(향여동지해운생) : 바다에 피어오르는 구름 나를 향해 가리킨다.
?今欲渡緣何事(랑금욕도연하사) : 당신은 무슨 일로 강을 건너려 하는가?
如此風波不可行(여차풍파불가행) : 풍파가 이와 같이 심하니 건너지 못 한다


友人會宿(우인회숙)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 천고의 시름 씻어보자고
留連百壺?(류련백호음) :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신다.
良宵宜?談(량소의청담) : 이 좋은 밤, 이야기나 나누세
皓月未能寢(호월미능침) : 휘영청 밝은 달, 잠 잘 순 없어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 취하여 빈산에 누우니
天地?衾枕(천지즉금침) : 하늘과 땅이 바로 내 이불, 내 베개로세


새하곡(塞下曲-변방 병사의 노래)


塞虜乘秋下(새로승추하) : 변방의 오량캐 가을 타고 내려오니
天兵出漢家(천병출한가) : 천자의 병사는 도성을 떠난다.
將軍分虎竹(장군분호죽) : 장군들은 호죽의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戰士臥龍沙(전사와룡사) : 병사들은 사막에 자리 잡는다.
邊月隨弓影(변월수궁영) : 변방의 달은 활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고
胡霜拂劍花(호상불검화) : 오랑캐 땅의 서리 칼에 스쳐 꽃처럼 흩어진다.
玉關殊未入(옥관수미입) : 특별히 옥문관에 아직 들지 않았지만
少婦莫長嗟(소부막장차) : 젊은 부인들이여 길게 탄식하지 마시오.


추사(秋思)


燕支黃葉落(연지황엽락) : 멀고 먼 연지 땅엔 누런 낙엽 지겠지
妾望自登臺(첩망자등대) : 저도 먼 곳을 바라보려 스스로 높은 곳 올라갑니다.
海上碧雲斷(해상벽운단) : 바다 위는 구름 걷혀 푸른데
單于秋色多(선우추색다) : 오랑캐들 가을에 쳐들어온다.
胡兵沙塞合(호병사새합) : 오량캐들 사막에 모여들고
漢使玉關山(한사옥관산) : 천자의 사신은 옥관정에서 돌아오네.
世客無歸日(세객무귀일) : 우리 낭군 돌아올 기약 없으니
空悲蕙草催(공비혜초최) : 헤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는 공연히 슬퍼하노라


송우인입촉(送友人入蜀)


見說蠶叢路(견설잠총노) : 듣자니, 잠총으로 가는 길이
崎嶇不易行(기구불이행) : 험난하여 쉽게 갈 수 없다네.
山從人面起(산종인면기) : 산은 사람의 얼굴 앞에 우뚝 다가오고
雲傍馬頭生(운방마두생) : 구름은 타고 가는 말 옆으로 솟아오른다.
芳樹籠秦棧(방수롱진잔) : 풀과 나무는 높은 사다리 길을 가리고
春流?蜀城(춘유요촉성) : 봄물은 흘러 촉성을 돌아 흘러간다.
升沈應已定(승침응이정) : 승패는 응당 정해져 있거니
不必問君平(불필문군평) : 반드시 유명한 점장이 군평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네.


강상음(江上吟)


木蘭之?沙棠舟(목란지설사당주) : 목란나무 상앗대를 걸친 사당나무배에
玉簫金管坐兩頭(옥소김관좌양두) : 옥퉁소, 황금피리 들고 양쪽에 앉아있네.
美酒樽中置千斛(미주준중치천곡) : 맛있는 술 술통에 가득 채우고
載妓隨波任去留(재기수파임거류) : 기생을 태워 물결에 맡겨 마음대로 오고간다.
仙人有待乘黃鶴(선인유대승황학) : 신선은 기다리다 황학을 타고 가고
海客無心隨白鷗(해객무심수백구) : 뱃놀이 나그네 무심히 백구 따라 논다.
屈平詞賦懸日月(굴평사부현일월) : 굴평의 사부는 일월처럼 빛나나
楚王臺?空山丘(초왕대사공산구) : 초왕의 누대는 허물어지고 빈산만 남아있다
興?落筆搖五嶽(흥감락필요오악) : 흥에 겨워 글을 쓰면 오악도 흔들리고
詩成笑傲凌滄洲(시성소오릉창주) : 시를 지어 거만하게 웃으며 창주도 능멸한다
功名富貴若長在(공명부귀약장재) : 부귀와 공명이 영원하다면
漢水亦應西北流(한수역응서북류) : 한수도 또한 북쪽으로 흘러내리라


숙청계주인(宿?溪主人)


夜到?溪宿(야도청계숙) : 청계에 이르러 묵으니
主人碧岩裡(주인벽암리) : 주인은 푸른 바위 아래 살더라.
?楹掛星斗(첨영괘성두) : 처마에는 별들이 달려있고
枕蓆響風水(침석향풍수) : 잠자리에는 바람소리 물소리 들려온다.
月落西山時(월락서산시) : 서산에 달이 지니
??夜猿起(추추야원기) : 밤에 웅얼웅얼 원숭이 소리 들린다.


宮中行樂詞2(궁중행락사)


柳色黃金嫩(류색황금눈) : 버들 빛 황금빛으로 부드럽고
梨花白雲香(이화백운향) : 배꽃 흰 구름처럼 향기롭다
玉階巢翡翠(옥계소비취) : 옥계에는 비취새의 둥지가 있고
珠殿鎖鴛鴦(주전쇄원앙) : 주옥 궁전에는 원앙시를 가두었구나.
選妓隨雕輦(선기수조련) : 아름다운 궁녀 뽑아 임금 수레 따르게 하고
徵歌出洞房(징가출동방) : 노래를 청하여 깊숙한 궁방에서 나오게 하네.
宮中有第一(궁중유제일) : 궁중에서 제일 예쁜이는 누군가
飛燕在昭陽(비연재소양) : 소양궁에 조연비가 있다네.


戴老酒店(대로주점)


戴老黃泉下(대로황천하) : 대노인 죽어 황천에서도
還應釀大春(환응양대춘) : 반드시 대춘주를 빚으리라
夜臺無李白(야대무이백) : 저 세상 누각에는 이백이 없으리니
沽酒與何人(고주여하인) : 누구에게 술을 팔까, 너무 궁금하구나.


宮中行樂詞(궁중행락사)


小小生金玉(소소생금옥) : 나 어릴 적엔 대장간 집에서 자라났고
盈盈在紫薇(영영재자미) : 한참 때에 자미궁 궁궐로 갔었지요.
山花揷寶?(산화삽보계) : 산꽃은 아름다운 꼭지머리에 꽂고
石竹繡羅衣(석죽수나의) : 석죽화는 비단 저고리에 수놓았지요.
每出深宮裏(매출심궁리) : 깊은 궁궐 나올 적마다
常隨步輦歸(상수보련귀) : 임금님 손수레 따라 돌아왔었어요.
只愁歌舞散(지수가무산) : 다만 근심스러워요, 노래와 춤 다 끝낸 뒤
化作彩雲飛(화작채운비) : 오색구름으로 변하여 날아가 버릴 것 같아요


楊叛兒(양반아)


君歌陽叛兒(군가양반아) : 당신은 양반아 노래를 부르고
妾勸新豊酒(첩권신풍주) : 저는 유명한 신풍주를 권하지요
何許最關人(하허최관인) : 어디가 가장 저의 마음에 꺼리는지 아세요?
烏啼白門柳(오제백문류) : 까마귀는 백문의 버드나루 사이에서 운다.
烏啼隱楊花(오제은양화) : 까마귀 버드나무에 숨어버리 듯
君醉留妾家(군취류첩가) : 당신은 우리 집에 머무세요.
博山爐中沈香火(박산로중침향화) : 박산향로 속 침향에 불 붙여
雙煙一氣凌紫霞(쌍연일기릉자하) : 피어오른 두 줄기 연기 하나로 자하궁 올라가리.


越女詞(월녀사)


耶溪採蓮女(야계채연녀) : 아계의 연꽃 따는 아가씨
見客棹歌回(견객도가회) : 길손을 보고 뱃노래 부르며 가네.
笑入荷花去(소입하화거) : 웃으며 연꽃 속으로 들어가
佯羞不肯來(양수불긍래) : 부끄러운 듯 나오려하지 않네.

長干吳兒女(장간오아녀) : 강간의 오나라 아가씨
眉目艶星月(미목염성월) : 눈과 눈썹  별과 달처럼 예쁘다
?上足如霜(극상족여상) : 나막신 위의 발은 눈처럼 흰데
不著鴉頭襪(부저아두말) : 아두의 버선은 신지도 않았구나.


贈黃山胡公求白?(증황산호공구백한-황산의 호공에게 백구를 구하면서 지어주다)


請以雙白璧(청이쌍백벽) : 한 쌍의 흰 구슬로
買君雙白?(매군쌍백한) : 그대의 두 마리 흰 꿩을 사고 싶소.
白?白如錦(백한백여금) : 그 흰 꿩은 비단처럼 희어서
白雪恥容顔(백설치용안) : 흰 눈이 그 용모로는 부끄럽다네.
照影玉潭裏(조영옥담리) : 그림자를 옥담 속에 드리우고
刷毛琪樹間(쇄모기수간) : 깃털은 기수 사이에서 다듬는다.
夜樓寒月靜(야루한월정) : 한밤 서식처는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하고
朝步落花閑(조보낙화한) : 아침 산보에 떨어진 꽃이 한가롭구나.
我願得此鳥(아원득차조) : 나는 이 새를 얻어
翫之坐碧山(완지좌벽산) : 청산에 앉아 이들을 데리고 놀고 싶다.


哭晁卿衡(곡조경형)


日本晁卿辭帝都(일본조경사제도) :일본 사람 조형이 서울을 떠나
征帆一片?蓬壺(정범일편요봉호) :한조각 범선 타고 동해의 봉래와 방호 섬 돌았네.
明月不歸沈碧海(명월불귀침벽해) :달 같은 사람 푸른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니
白雲愁色滿蒼梧(백운수색만창오) :구름은 수심 띠고 남쪽 해안 창오 땅에 가득하네.


贈錢徵君少陽(증전징군소양-미군 전소양에게)


白玉一杯酒(백옥일배주) : 백옥 한 잔 술에
綠楊三月時(녹양삼월시) : 푸른 버드나무 춘삼월이라
春風余幾日(춘풍여기일) : 봄바람 며칠이나 남았는고.
兩?各成絲(량빈각성사) : 두 귀밑털 흰 실이 다 되었네. 
秉燭唯須飮(병촉유수음) : 촛불을 잡고 술을 마셔야 하니
投竿也未遲(투간야미지) : 이직도 낚싯대 드리우긴 늦지 않다네.
如逢渭川獵(여봉위천렵) : 만일 위천의 사냥꾼을 만난다면
猶可帝王師(유가제왕사) : 오히려 가히 제왕의 스승도 되겠네.


기동로이치자(寄東魯二稚子-동로의 두 자식에게)


吳地桑葉綠(오지상엽록) : 오나라 땅의 뽕잎은 푸르고
吳蠶已三眠(오잠이삼면) : 오나라  누에는 벌써 석 잠을 잤다.
我家寄東魯(아가기동로) : 우리 집 동로에 부치노니
誰種龜陰田(수종구음전) : 누가 구음의 밭에 파종을 하고 있을까
春事已不及(춘사이불급) : 봄철 일은 아직 다하지 못했는데
江行復茫然(강행부망연) : 강을 떠도는 일 아직도 망연하다
南風吹歸心(남풍취귀심) : 남풍에 고향 가고 싶은 마음 불어와
飛墮酒樓前(비타주루전) : 술집 다락 앞에 날아 떨어지는구나.
樓東一株桃(루동일주도) : 다락 동쪽엔 한 그루 복사꽃
枝葉拂?煙(지엽불청연) : 나뭇잎 파란 연기 떨치는구나.
此樹我所種(차수아소종) : 이 나무는 내가 직접 심은 나무
別來向三年(별래향삼년) : 떠나온 지 이미 삼년이 다 되어간다
桃今與樓齊(도금여루제) : 복사꽃나무 이제는 다락 높이만큼 자라났으나
我行?未旋(아행상미선) :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嬌女字平陽(교녀자평양) : 내 딸 이름은 평양인데
折花倚桃邊(절화의도변) : 복사꽃 나무에 기대어 꽃을 꺾고 있으리라
折花不見我(절화불견아) : 꽃을 꺾어도 애비인 나를 보지 못하니
淚下如流泉(루하여류천) : 흐르는 샘처럼 눈물을 흘리리라
小兒名伯禽(소아명백금) : 작은 아들 이름은 백금인데
與?亦齊肩(여자역제견) : 누이와 키가 비슷하게 자랐을 것이다
雙行桃樹下(쌍행도수하) : 둘이서 나란히 복사꽃나무를 걸으면
撫背復誰憐(무배부수련) : 누가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누가 아껴주리
念此失次第(념차실차제) : 이런 생각 하면 마음이 산란하고
肝腸日憂煎(간장일우전) : 날마다 내 간장이 탄단다
裂素寫遠意(렬소사원의) : 흰 천을 찢어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적어
因之汶陽川(인지문양천) : 이로 인하여 양천을 눈물로 얼룩지게 하는구나.


월야강행기최원외종지(月夜江行寄崔員外宗之-달밤에 강을 걷다가 원외랑 최종지에게 부치다)


飄飄江風起(표표강풍기) : 상랑 살랑 강물에 산들바람 일고
蕭颯海樹秋(소삽해수추) : 바닷가 나무에는 소슬히 바람 부네
登?美?夜(등로미청야) : 뱃전에 오르니 맑은 밤이 좋고
掛席移輕舟(괘석이경주) : 돛을 달아 빠른 배 지나가네.
月隨碧山轉(월수벽산전) : 달은 푸른 산을 따라 옮겨가고
水合?天流(수합청천류) : 물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흘러가네.
杳如星河上(묘여성하상) : 아득한 은하 위에
但覺雲林幽(단각운림유) : 다만 숲 구름 가득한 것을 알겠네.
歸路方浩浩(귀로방호호) : 돌아가는 길은 넓고도 넓어라
?川去悠悠(조천거유유) : 흘러가는 물은 아득히 멀리 떠나가고
徒悲蕙草歇(도비혜초헐) : 한갓 서글프게 향 풀이 시들어가고
復聽菱歌愁(부청릉가수) : 다시 마름 캐는 노래 들으니 서글퍼지네.
岸曲迷後浦(안곡미후포) : 언덕은 굽어져 뒤 개펄은 보이지 않고
沙明瞰前洲(사명감전주) : 모래가 맑아 앞 물가 모래섬이 훤히 보이네.
懷君不可見(회군불가견) : 그대가 그리워도 보지 못하니
望遠增離?(망원증리우) : 멀리 곳 바라보니 떠나온 그리움만 짙어지네.


송양산인귀숭산(送楊山人歸嵩山)


我有萬古宅(아유만고댁) : 나에게 만고의 집 있으니
嵩陽玉女峰(숭양옥녀봉) : 고양의 옥녀봉이라네.
長留一片月(장류일편월) : 한 조각달이 오래 머물러
掛在東溪松(괘재동계송) : 동쪽 개울 소나무에 걸려있네
爾去?仙草(이거철선초) : 네가 가서 신선초 채면
菖蒲花紫茸(창포화자용) : 창포는 자줏빛 꽃 피어있으리
歲?或相訪(세만혹상방) : 해 늦어 혹 서로 만나면
?天騎白龍(청천기백룡) : 푸른 하늘로 흰 용타고 오르리라


금향송위팔지서경(金?送韋八之西京-금향에서 위 팔이 서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客自長安來(객자장안래) : 객이 서울 장안에서 와서
還歸長安去(환귀장안거) :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는구나.
狂風吹我心(광풍취아심) : 미친 듯이 부는 바람 내 마음을 불어날려
西掛咸陽樹(서괘함양수) : 서쪽으로 함양의 나무에 걸어놓았네
此情不可道(차정불가도) : 이 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此別何時遇(차별하시우) : 지금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까
望望不見君(망망불견군) : 아득히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고
連山起煙霧(련산기연무) : 산이 맞닿은 곳에 안개와 연기만 인다.

 

파릉행송별(?陵行送別)


送君?陵亭(송군파릉정) : 그대를 보내는 파릉정
?水流浩浩(파수류호호) : 파릉의 물의 길은 넓고도 넓어라
上有無花之古樹(상유무화지고수) : 위에는 꽃 피지 않는 늙은 나무
下有傷心之春草(하유상심지춘초) : 아래에는 상심케 하는 봄풀이 우거졌구나.
我向秦人問路?(아향진인문로기) : 내가 진나라 사람에게 갈림길을 물으니
云是王粲南登之古道(운시왕찬남등지고도) : 이곳은 왕찬이 남쪽으로 오른 길이라
古道連綿走西京(고도련면주서경) : 옛 길은 뻗고 뻗어 서경으로 달리고
紫闕落日浮雲生(자궐락일부운생) : 궁궐에 해 저물고 뜬구름 이는구나.
正當今夕斷腸處(정당금석단장처) : 바로 오늘 밤이 애간장 끊어지는 이곳
驪歌愁?不忍聽(려가수절불인청) : 이가 소리 수심 겨워 차마 들을 수 없구나. 


송배십팔도남귀숭산1(送裴十八圖南歸嵩山-배 십팔이 남으로 숭산에 가려는 것을 전송하다)


何處可?別(하처가위별) : 어느 곳이 이별할 만한 곳인가
長安?綺門(장안청기문) : 서울 장안의 동쪽 문이라네.
胡姬招素手(호희초소수) : 오랑캐 여인은 흰 손으로 나를 잡아끌어
延客醉金樽(연객취금준) : 손님을 부러 술에 취하게 하네.
臨當上馬時(림당상마시) : 말에 올라 떠나려니
我獨與君言(아독여군언) : 내가 홀로 그대와 이야기하네.
風吹芳蘭折(풍취방란절) : 바람 불어 꽃다운 난초 꺾어지고
日沒鳥雀喧(일몰조작훤) : 해가 지니 새소리 시끄러워지네.
?手指飛鴻(거수지비홍) : 손들어 날아가는 기러기 가리키니
此情難具論(차정난구론) : 이 마음 다 말하기 어렵네.
同歸無早?(동귀무조만) : 머지않아 함께 내려가련다.
潁水有?源(영수유청원) : 영수에는 맑은 샘이 있다네.

君思潁水綠(군사영수록) : 그대가 영수가 푸른 것을 생각하고
忽復歸嵩岑(홀부귀숭잠) : 홀연히 다시 숭산 봉우리로 돌아오네.
歸時莫洗耳(귀시막세이) : 돌아갈 때 귀는 씻지 마라
?我洗其心(위아세기심) : 날 위해 그 마음을 씻어주게나
洗心得?情(세심득진정) : 마음을 씻음은 진정을 얻는 것
洗耳徒買名(세이도매명) : 귀를 씻음은 한갓 이름만 사는 것이네
謝公終一起(사공종일기) : 사공이여 끝내는 한번 일어나
相與濟蒼生(상여제창생) : 서로 같이 창생을 구제해보자꾸나


望夫山(망부산)


仰望臨碧空(앙망임벽공) : 올려 바라보니 푸른 하늘 보이고
怨情感別離(원정감별리) : 원망하는 정은 이별을 느끼는구나.
江草不知愁(강초불지수) : 강가의 풀은 근심을 알지 못하고
岩花但爭發(암화단쟁발) : 바위 위의 꽃은 다만 다투어 피었구나.
雲山萬里隔(운산만리격) : 구름 산은 만 리를 격하고
音信千里絶(음신천리절) : 소식은 천리만리 끊어졌구나.
春去秋復來(춘거추복래) : 봄이 가고 가을이 다시 오니
相思幾時歇(상사기시헐) : 그리운 정은 언제나 그칠까


相逢行(상봉행)


相逢紅塵內(상봉홍진내) : 붉은 먼지 낀 길에서 만나
高揖黃金鞭(고읍황금편) : 황금 채찍 높이 들었도다.
萬戶垂楊裏(만호수양리) : 수양버들 속 수많은 집들 중에
君家阿那邊(군가아나변) : 그대 집은 어느 언덕 가에 있는가?


贈內(증내-아내에게)


漠漠闇苔新雨地(막막암태신우지) : 새로 비 내린 땅, 막막히 이끼 짙어지고
微微凉露欲秋天(미미량로욕추천) : 차갑고 잔잔한 이슬이 가을을 재촉한다오.
莫對月明思往事(막대월명사왕사) : 밝은 달 바라보며, 지나간 일 생각하면
損君顔色減君年(손군안색감군년) : 당신 얼굴 축나고, 당신의 목숨만 단축된다오.


勞勞亭(노로정)


天下傷心處(천하상심처) : 천하에서 마음 상하는 곳
勞勞送客亭(노로송객정) : 그곳은 노로라 부르는 나그네 떠나보내는 정자라네
春風知別苦(춘풍지별고) : 봄바람도 이별의 괴로움 알아
不遣柳條靑(불견유조청) : 버드나무 가지를 푸르게 하지 않는구나.


魯中都東樓醉起作(노중도동루취기작-노 중도의 동루에서 취하여 일어나 짓다)


昨日東樓醉(작일동루취) : 어제는 동루에서 취했으니
還應倒接?(환응도접리) : 분명히 두건을 거꾸로 서고 쓸어졌을 것이다
阿誰扶馬上(아수부마상) : 누사 나를 부축하여 말에 태웠나
不省下樓時(불성하루시) : 동루를 내려온 때가 생각나지 않는구나. 


遊洞庭(유동정)


洞庭西望楚江分(동정서망초강분) : 동정호 서방을 바라보니 초강이 분명하고
水盡南天不見雲(수진남천불견운) : 물 다한 남쪽 하늘에 구름 하나 없네.
日落長沙秋色遠(일락장사추색원) : 해 지자 긴 모래벌판에 가을빛 멀어져
不知何處弔湘君(부지하처조상군) : 남편 따라 죽은 상수의 여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憶東山(억동산)


不向東山久(불향동산구) : 동산으로 가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네.
薔薇幾度花(장미기도화) : 장미는 몇 번이나 꽃을 피우고
白雲他自散(백운타자산) : 흰 구름 그것은 저절로 흩어지고
明月落誰家(명월락수가) : 밝은 달은 누구의 집에 떨어졌을까


秋下荊門 (추하형문-가을에 형문을 내려가며)


霜落荊門江樹空(상락형문강수공) : 형문에 이슬이 지고 강가에 나무 나떨어지고
布帆無恙掛秋風(포범무양괘추풍) : 일없이 가을바람에 돛대를 올린다네.
此行不??魚?(차행불위로어회) : 이 여행은 농어회 때문이 아니라
自愛名山入剡中(자애명산입섬중) : 명산이 좋아서 산중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擬古(의고)


今日風日好(금일풍일호) : 오늘은 날씨가 좋아
明日恐不如(명일공불여) : 내일은 그렇지 않을까 염려되누나.
春風笑于人(춘풍소우인) : 봄바람은 사람을 향해 웃으니
何乃愁自居(하내수자거) : 어찌 근심하면서 혼자 있겠는가?
吹簫舞彩鳳(취소무채봉) : 피리 불어 채색 봉황을 춤추게 하고
酌醴?神魚(작례회신어) : 단술을 거르고 희귀한 생선 회치게 한다.
千金買一醉(천금매일취) : 천금으로 술을 사서 한 바탕 취하여
取樂不求余(취악불구여) : 즐거움을 얻었으면 다른 것은 구하지도 않는다네.
達士遺天地(달사유천지) : 현명한 사람은 천지를 버리나니
東門有二疏(동문유이소) : 동문에 소구와 소광 두 소씨가 있었도다.
愚夫同瓦石(우부동와석) : 어리석은 남자 돌기와 같이 굳어있지
有才知卷舒(유재지권서) : 재능이 있어야 말고 펴는 법을 아는 법이라네
無事坐悲苦(무사좌비고) : 일없이 앉아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塊然?轍?(괴연학철부) : 바큇자국에 괸 작은 물의 붕어처럼 부끄럽게 굴지말자


夏日山中(하일산중)


懶搖白羽扇(라요백우선) : 깃털 부채도 권태로워
裸體?林中(라체청림중) : 푸른 숲에서 윗도리 벗는다.
脫巾掛石壁(탈건괘석벽) : 두건 벗어 바위에 걸고
露頂?松風(로정쇄송풍) : 맨머리로 솔바람 맞아본다


月下獨酌(월하독작)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 삼월의 함양성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 낮이라 온갖 꽃들이 비단처럼 화려하다
誰能春獨愁(수능춘독수) : 그 누가 봄을 수심 겹다 말했나?
對此徑須?(대차경수음) : 이 꽃길을 보고 모름지기 술을 마실지어다.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 궁하고 통하는 것과 길고 짧은 것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 모두 조화옹이 준 것이라네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 한 동이 술이 죽음과 삶을 같게 만들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 만사는 진실로 살피기 어렵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 거나하게 취한 뒤로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 올연히 베개 높이고 잠자러가노라
不知有吾身(불지유오신) : 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니
此樂最?甚(차악최위심) : 이런 즐거움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네.


訪戴天山道士不遇(방대천산도사불우)


犬吠水聲中(견폐수성중) : 물소리 들리는데 개는 짖어대고
桃花帶雨濃(도화대우농) : 복사꽃은 비에 젖어 곱기도 하다
樹深時見鹿(수심시견록) : 숲이 깊은 곳에서 사슴을 보고
溪午不聞鐘(계오불문종) : 계곡에는 낮이 되어도 종소리 들리지 않는구나.
野竹分?靄(야죽분청애) : 대나무는 푸른 이내를 나누고
飛泉?碧峰(비천괘벽봉) : 나는 듯한 샘물은 푸른 봉우리에 결려있도다
無人知所去(무인지소거) : 그가 간 곳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愁倚兩三松(수의량삼송) : 소나무 두세 그루에 근심스레 기대어본다


尋雍尊師隱居(심옹존사은거)


群?碧摩天(군초벽마천) : 여러 가파른 산봉우리 파랗게 하늘에 솟아
逍遙不記年(소요불기년) : 이곳을 소요한 햇수를 기억하지 못하겠다.
撥雲尋古道(발운심고도) : 구름을 헤치고 오래된 길을 찾아
倚石聽流泉(의석청류천) : 바다에 기대어 흐르는 물소리 듣는다.
花暖?牛臥(화난청우와) : 꽃들은 피어 따뜻한데 푸른 소가 누웠고
松高白鶴眠(송고백학면) : 소나무는 높고 그 위의 흰 학은 잠들었네.
語來江色暮(어래강색모) : 강 빛은 어두운데 사람의 말소리 들려와
獨自下寒煙(독자하한연) : 홀로 쓸쓸히 차가운 안개를 내려온다.


九日龍山歌(구일룡산가)


九日龍山?(구일룡산음) : 구일 날 용산에서 마시노니
黃花笑逐臣(황화소축신) : 누른 국화꽃 쫓겨난 신하를 비웃는구나.
醉看風落帽(취간풍락모) : 취하여 바라보니 바람에 모자가 떨어지고
舞愛月留人(무애월류인) : 춤을 추니, 아끼는 달이 사람을 머물게 하는구나.


夜下征虜亭(야하정로정)


船下廣陵去(선하광릉거) : 배는 광릉으로 내려가고
月明征虜亭(월명정로정) : 달은 정로정에 밝기만하다
山花如繡頰(산화여수협) : 산꽃은 비단옷 입은 여인의 뺨 같고
江火似流螢(강화사류형) : 강가의 고깃배 불빛은 날아다니는 반딧불 같다


客中行(객중행)


蘭陵美酒鬱金香(난릉미주울금향) : 난릉의 맛있는 술은 울금향
玉碗盛來琥珀光(옥완성래호박광) : 옥술잔에 가득 부으면 호박 빛이 나네.
但使主人能醉客(단사주인능취객) : 다만 주인이 손님을 취하게 하면
不知何處是他?(불지하처시타향) : 어느 곳이 타향인지 알 수 없게 하노라


太原早秋(태원조추)


歲落?芳歇(세락중방헐) : 한 해가 다 가니 온갖 꽃이 다 지고
時當大火流(시당대화류) : 철은 큰 불이 흐르는 때이라
霜威出塞早(상위출새조) : 일찍 변방을 나서면 서릿발이 엄하고
雲色渡河秋(운색도하추) : 구름색은 강 건너 벌써 가을이로구나.
夢繞邊城月(몽요변성월) : 꿈은 변방의 성 달을 두르고
心飛故國樓(심비고국루) : 마음은 고향의 누대로 달려간다.
思歸若汾水(사귀약분수) : 돌아가고픈 마음은 분수의 물 같아
無日不悠悠(무일불유유) : 돌아갈 날이 없어 편안하지가 않도다.


上三峽(상삼협)


巫山夾?天(무산협청천) : 무산이 푸른 하늘을 끼고
巴水流若?(파수류약자) : 파수가 이렇게 흘러가네.
巴水忽可盡(파수홀가진) : 파수가 홀연히 다할 것 같아도
?天無到時(청천무도시) : 푸른 하늘에는 이를 때가 없으리.
三朝上黃牛(삼조상황우) : 사흘 아침을 황우산으로 오르고
三暮行太遲(삼모행태지) : 사흘 저녁은 가는 것이 너무 더디구나.
三朝又三暮(삼조우삼모) : 사흘 아침 또 사흘 저녁 때
不覺?成絲(불각빈성사) : 귀밑머리가 실처럼 희어진 것도 모르겠구나.


망여산폭포수(望廬山瀑布水)

 

西登香爐峰(서등향로봉) : 서쪽으로 향로봉에 올라
南見瀑布水(남견폭포수) : 남쪽으로 폭포수를 바라본다.
掛流三百丈(괘류삼백장) : 삼백 높은 곳에 걸려 흘러
噴壑數十里(분학수십리) : 수 십리 골짜기로 뿜어져 내린다.
?如飛電來(훌여비전래) : 문득 나는 번개 같이 내리고
隱若白虹起(은약백홍기) : 숨은 것이 흰 무지개 같이 일어난다.
初驚河漢落(초경하한락) : 처음에는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놀라
半?雲天裡(반쇄운천리) : 반쯤은 구름 낀 하늘 속에서 떨어진다.
仰觀勢轉雄(앙관세전웅) : 올려다볼수록 그 형세 웅장하니
壯哉造化功(장재조화공) : 장쾌하다, 조화옹의 공이여
海風吹不斷(해풍취불단) : 바닷바람은 끝없이 불어오고
江月照還空(강월조환공) : 강의 달이 비춰 도리어 고요하다
空中亂?射(공중란종사) : 공중에서 어지럽게 물살이 쏟아져
左右洗?壁(좌우세청벽) : 좌우로 푸른 벽을 씻는구나.
飛珠散輕霞(비주산경하) : 구슬이 날 듯 놀이 흩어지고
流沫沸穹石(류말비궁석) : 흘러내리는 물보라 큰 바위에 용솟음친다.
而我樂名山(이아악명산) : 내가 명산을 좋아하니
對之心益閑(대지심익한) : 명산을 대하자 내 마음 더욱 한가해진다.
無論漱瓊液(무론수경액) : 옥 같이 맑은 물에 이 닦는 일 말하지 말라
且得洗塵?(차득세진안) : 때 묻은 얼굴을 씻을 만하다
且諧宿所好(차해숙소호) : 내가 좋아하던 이곳에 살고 자면서
永願辭人間(영원사인간) : 영원히 인간 세상 떠나고 싶어라


등여산오로봉(登廬山五老峰)


廬山東南五老峰(여산동남오로봉) : 여산 동남쪽 오로봉
?天削出金芙蓉(청천삭출금부용) : 푸른 하늘로 금부용 솟았네.
九江秀色可攬結(구강수색가람결) : 구강의 좋은 경색 손에 잡힐 것 같아
吾將此地巢雲松(오장차지소운송) : 나는 이곳 구름 낀 솔 나무에 집을 지으려네. 


두릉절구(杜陵?句)


南登杜陵上(남등두릉상) : 남쪽으로 두릉 위에 오르며
北望五陵間(북망오릉간) : 북쪽으로 오릉 사이를 바라본다.
秋水明落日(추수명락일) : 가을 물에 지는 해는 밝고
流光滅遠山(류광멸원산) : 흐르는 빛에 먼 산이 사라진다.


앵무주(鸚鵡洲)


鸚鵡來過吳江水(앵무래과오강수) : 애무새가 날아와 오강의 물을 지나니
江上洲傳鸚鵡名(강상주전앵무명) : 강 위의 모래섬을 앰무주라 이름 전하네.
鸚鵡西飛?山去(앵무서비롱산거) : 앵무주 서쪽을 날아 농산으로 갔지만
芳洲之樹何??(방주지수하청청) : 무성한 모래섬의 수목은 어찌 이리도 푸른가.
煙開蘭葉香風暖(연개란엽향풍난) : 연기 걷히자 따뜻한 바람 난초 잎 향기 풍겨오고
岸夾桃花錦浪生(안협도화금랑생) : 양 언덕의 복사꽃 비단 물결 이는구나.
遷客此時徒極目(천객차시도극목) : 이러한 때, 떠도는 나그네 부질없이 눈을 치뜨니
長洲孤月向誰明(장주고월향수명) : 긴 모래섬에 외로운 달은 누구를 향하여 밝은가


망천문산(望天門山)


天門中斷楚江開(천문중단초강개) : 천문산을 가운데로 초강이 나누어지고
碧水東流至此回(벽수동류지차회) : 푸른 물은 동으로 흘러 이곳에서 돌아가네.
兩岸?山相對出(량안청산상대출) : 양 언덕 푸른 산이 마주보고 나와
孤帆一片日邊來(고범일편일변래) : 외로운 돛단배 하나 햇빛 쪽으로 다가오네. 

 

註(주)

(1) 천문산 : 중국 양자강 가에 있는 산. 박망산(博望山)과 양산(梁山)이 마주보고 문처럼 서 있기 때문에 함께 천문산이라고 부름.
(2)중단 : 가운데를 자름. 즉 박망산과 양산 사이로 양자강이 흐르고 있음을 말함.
(3)지차 : 여기에 이르러. 차는 천문산을 가리킴.
(4) 초강 : 양자강.
(5)일변 : 해 주변, 하늘 가. 박망산과 양산 사이로 멀리 아득히 보이는 양자강 상류쪽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그쪽에서 범선 한 척이 물따라 흘러 내려오고 있음.


사공정(謝公亭)


謝公離別處(사공리별처) : 사공이 떠난 곳
風景每生愁(풍경매생수) : 그 풍경이 매번 수심을 자아낸다.
客散?天月(객산청천월) : 객이 다 떠나고 푸른 하늘에 달만 남아
山空碧水流(산공벽수류) : 산은 비고 푸른 물은 흘러만 간다.
池花春映日(지화춘영일) : 못에 가득한 꽃들 따뜻한 봄볕에 빛나고
?竹夜鳴秋(창죽야명추) : 창 앞 대나무는 밤에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今古一相接(금고일상접) : 옛날과 오늘이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니
長歌懷舊游(장가회구유) : 길게 노래하며 옛 놀던 일 생각하노라


중억(重憶)


欲向江東去(욕향강동거) : 강동을 향해가고 싶으나
定將誰?杯(정장수거배) : 진정 누구와 술잔을 들리오.
稽山無賀老(계산무하로) : 계산에는 하노인 없으니
?棹酒船回(각도주선회) : 도리어 노 저어 술 배 돌아온다.


대설헌종형우성재(對雪獻從兄虞城宰-눈을 보면서 우성고을 수령으로 있는 사촌 형에게)


昨夜梁園裡(작야량원리) : 어젯밤 양원에서
弟寒兄不知(제한형불지) : 아우가 추웠음을 형은 몰랐지요.
庭前看玉樹(정전간옥수) : 뜰 앞에서 눈 덮인 나무를 보고
腸斷憶連枝(장단억련지) : 형님을 생각하니 애가 끊어져요


취후증종생고진(醉後贈從甥高?-취하여 종생질 고진에게 주다)


馬上相逢揖馬鞭(마상상봉읍마편) : 말위에서 서로 만나 말채찍으로 서로 인사하고
客中相見客中憐(객중상견객중련) : 서로보고 객중에서 서로를 애련하게 여기네.
欲邀擊筑悲歌?(욕요격축비가음) : 격축가에 맞춰 슬픈 노래 부르려 해도
正?傾家無酒錢(정치경가무주전) : 마침 집안 살림 기울어 술살 돈 한 푼도 없다네.
江東風光不借人(강동풍광불차인) : 강동의 풍광을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고
枉殺落花空自春(왕살락화공자춘) : 죽여 떨어진 꽃잎 공연히 스스로 봄을 알리네.
黃金逐手快意盡(황금축수쾌의진) : 황금은 손에 닿는 대로 마음껏 다써버려
昨日破?今朝貧(작일파산금조빈) : 어제는 파산하고 오늘은 가난해졌다네.
丈夫何事空嘯傲(장부하사공소오) : 대장부 무슨 일로 공연히 오기를 부리는가?
不如燒?頭上巾(불여소각두상건) : 차라리 머리 위의 모자 불태우는 것만 못하다네.
君?進士不得進(군위진사불득진) : 자네는 진사가 되었어도 벼슬 얻지 못하고
我被秋霜生旅?(아피추상생려빈) : 나는 가을 서리 맞아 흰 머리털만 남았다네.
時?不及英豪人(시청불급영호인) : 시대 맑아도 재주 있고 호방한 이 미치지 못하니
三尺童兒重廉藺(삼척동아중렴린) : 삼척동자 도 염파와 인상여를 중히 여긴다네.
匣中盤劍裝?魚(갑중반검장작어) : 칼집 곡에 든 상어가죽 반검 칼
閑在腰間未用渠(한재요간미용거) : 한가히 허리에 있어 한 번도 써보지 못하네.
且將換酒與君醉(차장환주여군취) : 정차 술과 바꿔 그대와 취하여
醉歸托宿吳專諸(취귀탁숙오전제) : 취한 뒤 오전제에게 부탁하려네.


贈漢陽輔錄事(증한양보녹사)


鸚鵡洲橫漢陽渡(앵무주횡한양도) : 앵무주는 한양 나루터에 비껴 있고
水引寒煙沒江樹(수인한연몰강수) : 물은 쓸쓸한 연기 끌어와 강가 나무에 자욱하네.
南浦登樓不見君(남포등누부견군) : 남포에서 누각에 올라도 그대가 보이지 않으니
君今罷官在何處(군금파관재하처) : 그대는 지금 벼슬에서 물러나 어느 곳에 있는가?
漢口雙魚白錦鱗(한구쌍어백금린) : 한구의 한 쌍 물고기 하얀 비단 비늘
令傳尺素報情人(령전척소보정인) : 편지를 전해 정든 사람에게 보내노라
其中字數無多少(기중자삭무다소) : 그 중에 글자 수는 많고 적음이 없으니
只是相思秋復春(지시상사추복춘) : 이 곧 그대를 그리워하는 가을과 또 봄이여 


贈盧司戶(증노사호)


秋色無遠近(추색무원근) :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천지가 가을빛
出門盡寒山(출문진한산) : 문을 나서면 모두 다 쓸쓸한 산이로구나.
白雲遙相識(백운요상식) : 흰 구름이 멀리서 알고서
待我蒼梧間(대아창오간) : 나를 창오 고을에서 기다리는구나.
借問盧耽鶴(차문노탐학) : 노탐학에게 묻노니
西飛幾歲還(서비궤세환) : 서쪽으로 날아가 어느 해에 돌아오려나?


別東林寺僧(별동림사승)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 동림에서 객을 보내는 곳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 달뜨고 흰 잔나비 우네.
笑別廬山遠(소별려산원) : 웃으며 떠남에 여산이 멀어지니
何煩過虎溪(하번과호계) : 어찌 호계를 지나는 걸 꺼려하리오.


流夜郎贈辛判官(류야낭증신판관-야랑에 유배되어 신판관에게)


昔在長安醉花柳(석재장안취화류) : 지난날 장안 있으며 꽃과 버들에 취해
五侯七貴同杯酒(오후칠귀동배주) : 오후칠귀 들과 술 마시며 놀았다네.
氣岸遙凌豪士前(기안요능호사전) : 기상은 호걸들을 훨씬 능가하였고
風流肯落他人後(풍류긍낙타인후) : 풍류야 남에게 뒤지려 했을까보냐
夫子紅顔我少年(부자홍안아소년) : 그대는 아직 홍안이었고 나도 소년
章台走馬著金鞭(장태주마저금편) : 장안 번화가 당대에 말 달려 금채찍도 드날렸네.
文章獻納麒麟殿(문장헌납기린전) : 문장을 써 기린전에 올리며 궁전 드나들고
歌舞淹留玳瑁筵(가무엄류대모연) : 춤과 노래 대모 깐 자리에도 앉아보았다네
與君自謂長如此(여군자위장여차) : 그대와 이렇게만 되자고 하였건만
寧知草動風塵起(녕지초동풍진기) : 풀잎 움직이고 바람에 풍진 일어날 줄 알았으랴
函谷忽驚胡馬來(함곡홀경호마내) : 함곡관에서 호마가 온 것에 홀연히 놀라
秦宮桃李向明開(진궁도리향명개) : 진궁에 복사꽃 오얏꽃은 해를 향하여 피었네.
我愁遠謫夜郎去(아수원적야낭거) : 나는 지금 멀리 야랑으로 유배되어 가니


송륙판관왕비파협(送陸判官往琵琶峽-육판관을 보내어 비파협을 다녀오게 하다)


水國秋風夜(수국추풍야) : 가을바람 불어오는 섬의 밤
殊非遠別時(수비원별시) : 특히 멀리 떠나는 때는 아니어라
長安如夢裡(장안여몽리) : 장안의 일은 꿈속 같은데
何日是歸期(하일시귀기) : 어느 때가 곧 돌아갈 때인가


부득백로사송송소부입삼협(賦得白鷺?送宋少府入三峽-백로사를 얻어 송소부에게 주어 삼협에 든 것을 젓다)


白鷺拳一足(백로권일족) : 백로가 한 쪽 발을 들고 서있고
月明秋水寒(월명추수한) : 달은 밝고 가을 물은 차기만 하다
人驚遠飛去(인경원비거) : 사람에게 놀란 백로 멀리 날아가다가
直向使君灘(직향사군탄) : 바로 사군탄 여울을 향하는구나.


송저옹지무창(送儲邕之武昌-저옹이 무창 가는 것을 전송하다)


黃鶴西樓月(황학서루월) : 황학루 서쪽 누각의 달
長江萬里情(장강만리정) : 긴 강은 만리의 마음이라
春風三十度(춘풍삼십도) : 봄바람d; 서른 번을 불어
空憶武昌城(공억무창성) : 공연히 무창성만 생각나네.
送爾難?別(송이난위별) : 너를 보내려니 이별이 이리도 어려워
銜杯惜未傾(함배석미경) : 술잔을 들고 차마 기울이지 못하네.
湖連張樂地(호련장악지) : 호수는 장락지로 이어지고
山逐汎舟行(산축범주행) : 산을 쫓아 배를 띄워간다네
諾?楚人重(낙위초인중) : 한번 약속을 초인은 귀중히 여겨
詩傳謝??(시전사조청) : 시는 사조의 맑은 가락을 전하네.
滄浪吾有曲(창랑오유곡) : 창랑 맑은 물에 내 노래도 있으니
寄入棹歌聲(기입도가성) : 뱃노래 소리에 부쳐 보낸다네.


곡선성선양기수(哭宣城善釀紀?-선성 선양기 노인을 곡하다)


紀?黃泉裡(기수황천리) : 기가 늙은이가 죽어 황천에 가서도
還應釀老春(환응양로춘) : 그곳에서도 응당 노춘수를 빚을 것이네
夜臺無曉日(야대무효일) : 밤 누대에 밝은 해, 곧 나 이백이 없으니
沽酒與何人(고주여하인) : 어느 누구에게 술을 팔 것인가


고의(古意)


君?女蘿草(군위녀라초) : 그대는 여라초가 되고
妾作?絲花(첩작토사화) : 저는 토사화가 되었습니다.
輕條不自引(경조불자인) : 가벼운 줄기 스스로 가누지 못하여
?逐春風斜(위축춘풍사) : 봄바람에 쫓겨 기울어지는구나.
百丈托遠松(백장탁원송) : 백 길이나 높은 소나무에 걸려
纏綿成一家(전면성일가) : 얽히고 얽혀서 한 가족이 되었구나.
誰言會面易(수언회면역) : 누가 서로 만남이 쉽다고 말하나
各在?山崖(각재청산애) : 각각 청산의 절벽에 있다가
女蘿發馨香(녀라발형향) : 여라는 그윽한 향기 내 뿜고
?絲斷人腸(토사단인장) : 토사는 남의 애간장만 녹이는 것을
枝枝相糾結(지지상규결) : 가지마다 서로 얽혀있고
葉葉競飄揚(엽엽경표양) : 잎마다 다투어 떨어져 나부낀다.
生子不知根(생자불지근) : 새끼를 쳐도 그 뿌리는 알지 못하니
因誰共芬芳(인수공분방) : 누구와 함께 번영을 같이하리오.
中巢雙翡翠(중소쌍비취) : 가운데는 한 쌍의 비취새 둥지를 틀고
上宿紫鴛鴦(상숙자원앙) : 위에는 자색 원앙새가 잠들어있네
若識二草心(약식이초심) : 만약 두 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海潮亦可量(해조역가량) : 넓은 바다의 조수 물도 알 수가 있을 텐데


장문원(長門怨)


天回北斗掛西樓(천회북두괘서루) : 하늘에는 북두칠성 돌아 서편에 걸리고
金屋無人螢火流(금옥무인형화류) : 황금 집안에는 사람은 없고 반딧불 빛만 흐른다.
月光欲到長門殿(월광욕도장문전) : 달빛은 장문전에 비춰들고
別作深宮一段愁(별작심궁일단수) : 특별히 깊은 궁궐에는 일단의 수심이 깊어진다.

桂殿長愁不記春(계전장수불기춘) : 계수나무 궁궐에선 긴 수심에 봄도 모르고
黃金四屋起秋塵(황금사옥기추진) : 황금빛 네 집에서 가을 티끌 일어나는구나.
夜懸明鏡?天上(야현명경청천상) : 밤 되어 푸른 하늘에 밝은 거울 걸리어
獨照長門宮裡人(독조장문궁리인) : 홀로 길게 장문궁궐 속사람을 비추는구나.


맥상증미인(陌上贈美人)


駿馬驕行踏落花(준마교행답락화) : 준마는 아장걸음 걸어서 떨어진 꽃 밟고
垂鞭直拂五雲車(수편직불오운차) : 소년은 채찍 내려 오운거를 스쳐보네.
美人一笑?珠箔(미인일소건주박) : 주렴을 걷고서 미인이 한 번 웃으며
遙指紅樓是妾家(요지홍루시첩가) : 붉은 다락 저곳이 저의 집이라 멀리 손짓하네.


춘원(春怨))


白馬金羈遼海東(백마금기료해동) : 황금 굴레 갖춘 백마 타고 임은 요동 가버려
羅?繡被臥春風(라유수피와춘풍) : 비단 휘장 수놓은 이불에 봄바람이 드러눕는다.
落月低軒窺燭盡(낙월저헌규촉진) : 처마 아래 지는 달은 꺼져가는 촛불 엿보는데
飛花入戶笑床空(비화입호소상공) : 꽃잎도 안방에 날아들어 빈 잠자리 비웃는다.


월녀사(越女詞)


吳兒多白?(오아다백석) : 오나라 여인은 살결이 희고
好?蕩舟劇(호위탕주극) : 배 젓는 놀이를 좋아한다네.
賣眼擲春心(매안척춘심) : 추파를 던져 유혹을 하니
折花調行客(절화조행객) : 꽃을 꺾어 손님을 조롱하네.

鏡湖水如月(경호수여월) : 달빛처럼 맑은 경호의 물
耶溪女似雪(야계녀사설) : 눈빛처럼 흰 피부 야계의 여인
新?蕩新波(신장탕신파) : 단장한 새 모습 물결에 흔들리어
光景兩奇?(광경량기절) : 그 모습 모두가 너무나도 어울리네.


파녀사(巴女詞)


巴水急如箭(파수급여전) : 파수는 화살처럼 급하고
巴船去若飛(파선거약비) : 파선은 날아가듯 떠간다.
十月三千里(십월삼천리) : 시월에는 삼천리나 내겨가는데
?行幾歲歸(랑행기세귀) : 낭군님은 어느 해나 돌아오시려나.


조노유(嘲魯儒)


魯?談五經(노수담오경) : 노나라 노인이 오경을 이야기하며
白髮死章句(백발사장구) : 백발이 되도록 글 구절만 논하다가 죽었다네.
問以經濟策(문이경제책) :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면
茫如墜煙霧(망여추연무) : 안개와 연기 속에 떨어진 듯 멍한 표정이네
足著遠游履(족저원유리) : 발에는 먼 길 가는 나그네 신발을 신고
首戴方山巾(수대방산건) : 머리에는 상산건을 두르고 있다네.
緩步從直道(완보종직도) : 느긋하게 걸으며 곧은길을 따른다하고
未行先起塵(미행선기진) : 걷기도 전에 먼지부터 일으킨다네.
秦家丞相府(진가승상부) : 진나라 승상부에서는
不重褒衣人(불중포의인) : 선비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네.
君非叔孫通(군비숙손통) : 그대는 숙손통을 옳지 않다하는가
與我本殊倫(여아본수륜) : 나와는 본래 다른 무리라네.
時事且未達(시사차미달) : 세상일에 아직도 통달하지 못하니
歸耕汶水濱(귀경문수빈) : 문수 물가에 돌아가 농사나 짓게나그려.


초출금문심왕시어불우영벽상앵무(初出金門尋王侍御不遇詠壁上鸚鵡

-금문에 처음 나와 왕시어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벽위의 앵무를 읊다)


落羽辭金殿(낙우사금전) : 떨어진 깃이 금전을 떠나
孤鳴?繡衣(고명타수의) : 외로운 학이 울며 어사에게 의탁했었소.
能言終見棄(능언종견기) : 능히 말할 수 있으되 끝내 버림을 당하여
還向?西飛(환향롱서비) : 도리어 농서를 향해 달아난다오.


관방백응(觀放白鷹)


八月邊風高(팔월변풍고) : 팔월이라 변방의 바람은 높고
胡鷹白錦毛(호응백금모) : 오랑캐 매는 하얀 비단 빛 털이어라
孤飛一片雪(고비일편설) : 한 조각 눈처럼 외로이 날아
百里見秋毫(백리견추호) : 백리나 떨어져도 털이 다 보이는구나.

寒冬十二月(한동십이월) : 십이월 차가운 겨울에
蒼鷹八九毛(창응팔구모) : 여덟아홉 털을 가진 메기 푸른 하늘을 난다
寄言燕雀莫相?(기언연작막상탁) : 말 전하노니, 제비와 참새여 서로 쪼아대지 말라
自有雲?萬里高(자유운소만리고) : 저 먼 구름 낀 하늘까지 말리나 높이 난 새 있다


백로사(白鷺?)


白鷺下秋水(백로하추수) : 흰 해오라기 맑은 가을 물에 내려
孤飛如墜霜(고비여추상) : 서리 떨어지듯 외롭게 나는구나.
心閑且未去(심한차미거) : 마음이 편안하여 떠나려 하지 않고
獨立沙洲旁(독립사주방) : 모래섬 곁에서 홀서 서있구나

 

淸平調詞 (청평조사 :청평조의 노래)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 구름에서는 의상을 연상하고 꽃에서는 그 모습을 연상한다.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모란을 적시는 이슬이 빛난다.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 만약 이런 미인을 군옥산에서 만나 뵙지 못한다면,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 선녀의 세상인 요대에서나 만나 뵈오리다.

 

註(주) 

(1) 淸平調(청평조) : 청조와 평조 두 가지를 합친 이름. 
(2) 檻(함) : 궁전의 난간. 
(3) 露華(노화) : 아름다운 이슬. 
(4) 濃(농) : 요염하고 아름답다. 
(5) 군옥산 : 옥산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상의 이름. 아름다운 서왕모가

사는 곳. 
(6) 會(회) : 반드시.... 할 것이다.  
(7) 瑤臺(요대) : 전설상의 신선이 사는 곳. 

 

[해설] 
당나라 때 현종의 명에 의해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3수의 연작시 가운데 첫번째 詩.

그때 李白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으나 즉시에 주옥같은 시를 지어 올려 현종을 놀라게 했다.

이 詩를 노래한 이는 당시의 명창 이구년(李龜年)이었고, 그 노래의 곡에 맞추어 현종 자신이 직접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客中作 (객중작 : 나그네 길에

 

蘭陵美酒鬱金香 (난릉미주울금향) : 난릉의 좋은 술은 울금향같은 향기를 풍기고 
玉椀盛來琥珀光 (옥완성래호박광) : 아름다운 잔에 부으면 호박색으로 빛난다. 
但使主人能醉客 (단사주인능취객) : 오직 주인이 길손인 나를 취하게만 해 준다면 
不知何處是他鄕 (부지하처시타향) : 대체 어디가 타향이랴,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註(주) 
(1) 客中(객중) : 여행 도중에 
(2) 蘭陵(난릉) : 산동성의 지명. 술의 주산지. 
(3) 鬱金香(울금향) : 향료가 되는 풀의 이름. 여기서는 향기로운 술. 
(4) 玉椀(옥완) : 아름다운 잔. 
(5) 琥珀(호박) : 송진이 화석화한 황색의 광물. 
(6) 但使(단사) : 오직....하기만 한다면

 

宣州 謝眺樓 餞別 校書 叔雲 (선주 사조루 전별 교서 숙운 : '선주'땅 '사조루' 樓閣에서 '교서 숙운'과 헤어지며)
- 당(唐)나라 시선(詩仙) '李白(이백)'이 '宣州(선주)에 있는 '謝眺樓(사조루)'에서 校書(교서)벼슬의 '叔雲(숙운)'을 전별(餞別)하고 쓴 시(詩) -

棄我去者(기아거자)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나를 두고 떠나가는 것, 어제처럼 지나간 시간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亂我心者(난아심자)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오늘 하루도 온통 번민과 걱정 뿐이로세.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먼길 가을 바람결에 기러기 날아가니
對此可以감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럴 땐 높은 누각에 올라 마음껏 취해보리라.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 같이 뛰어난 문장력, '건안'과 같은 풍모(의 숙운叔雲)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그 가운데 '소사'(의 詩)처럼 또 뚜렷이 빛을 발하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뜨거운 열정 함께 품고 원대한 포부 비약하니
欲上靑天攬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고 싶구나.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뽑아 물을 베어본들 강물은 계속 흐르듯이
擧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술잔을 들어 근심을 잊으려해도 시름은 더해만 가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의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라.

[참고]

1) 宣州(선주): 지명,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쉔청(宣城)현'.  
2) 謝眺樓(사조루): 누각(樓閣) 이름, '육조(六朝)시기' 선주(宣州)의 태수(太守)로 있던 '謝眺(사조)'가 세움.
3) 육조(六朝) AD 229~589년: 삼국시대의 '吳(오), 東晉(동진)'과 남조(南朝)의 '宋(송), 齊(제), 梁(양), 陳(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
4) 謝眺(사조:AD 464~499년): '대사(大謝)'라 불리는 '사령운(謝靈雲:AD 385~433년)'과 함께 '소사(小謝)'라 불린 '위진 남북조시기'의 '사씨(謝氏)' 성을 가진 두 명의 저명한 시인 중 한 사람.
5) 校書(교서): 서책(書冊)을 검열하는 직책의 벼슬 이름, 정식 관직 명칭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임.
6) 叔雲(숙운): 이름은 '이운(李雲)', '李白(이백)'이 '숙운(叔雲)'이라 부름은 같은 집안의 아재비뻘 되는 사람, 즉 족척(族戚)이기 때문.
7) 餞別(전별):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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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옛거리는 송나라 때부터 형성되어 명·청대에 상업이 흥하던 곳으로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동서로 뻗은 1,273m 길이의 거리 좌우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다양한 종류의 상점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우리 인사동처럼 사람이 많다. 우리 재래시장보다는 상점들이 계획도시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


 

명청대 옛거리 옆을 흐르는 신안강. 항저우(杭州)까지 연결되어 물자의 운송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명청대에 시장이 형성되어 번성해 오다가 지금까지 명청대 옛거리로 각광받고 있는 관광 코스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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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체촌 [西遞村 시디춘]


  안후이성() 남부 황산시() 이현()의 촌락으로

2000년 완난고촌락(, Ancient Villages in Southern Anhui : Xidi and Hongcun)으로 훙촌(, 굉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중국역사문화명촌(1차, 2003)으로 지정되었다.


시디(西, 서체)는 송() 철종()의 원우 연간에 건축되기 시작하였으며,

하천이 마을을 관통해 서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원래의 명칭은 시촨(西, 서천)이었으나

이곳이 이전에 역참(驿)이 있었기 때문에 시디(西, 서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시디(西)의 시조는 당 소종() 이엽()의 아들로 변란을 맞게 되자 민간으로 피난하여

호씨()로 개명하였으며 이후 호씨()와 함께 명운을 달리하게 되었다. 


시디촌(西)은 동서로 마을을 관통하는 큰 도로와 양측에 각각 평행한 도로가 있어 각각의 골목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동서 길이 700미터, 남북 길이 300미터인 마을 중앙을 중심도로가 가로지르고 주변으로 수많은 골목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구조다.  


경애당(), 이복당(), 자사패루() 등 공공건축물 앞에는 작은 광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 124동의 완전한 명청 건축이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역사가 600년이 넘는다.


주요 건축물로는 명 만력 6년(1578) 건립된 청석패방()과 청 강희 30년(1691) 건축한 대부제() 등으로

대다수의 민가는 관광객들에게 내부까지 공개되는데 가구와 내부장식도 대부분 원형대로 보전되어 있다. [www.xidi.cn]


 건물 외부는 대부분 검정과 흰색(흰색 벽에 검정색 지붕)으로 담백한 느낌을 주며 조각을 비롯한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시디춘의 실세였던 후(胡) 씨의 사당인 징아이탕(敬愛堂), 마을 입구의 츠슈파이로우(刺史牌樓), 잔지아로우(轉角樓)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건축물뿐 아니라 주변 경관도 빼어나 예로부터 무릉도원 안에 있는 마을이라 불렸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69837&cid=43792&categoryId=43794


서체촌 고건축군 (西递村 古建築群)  여기에서 递는 遞의 간체자. 갈마들체 역참(체) 여인숙을 의미함.


  西递村是安徽省黄山市最具代表性的古民居旅游景点,座落于黄山南麓,距黄山风景区仅,素有“桃花源里人家”之称。西递镇村前的牌坊西递始建于宋朝的元祐(宋哲宗)年间,由于河水向西流经这个村庄,原来称为“西川”。因古有递送邮件的驿站,故而得名“西递”

  서체촌은 안후이성 황산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대 민가를 갖춘 관광지이다.


이것은 황산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황산 관광지역에서 40km 떨어져 있고 “무릉도원이 민가 안에 있다”라는 호칭을 받고 있다.

서체촌 앞 패방은 송나라의 원우(송철종)때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이 마을을 경유한다고 하여

원래는 “서천”이라 불렀는데 후에, 옛날에 이곳에 우편배달하는 우체국이 있어서 배달한다는 ‘递’글자를 따서 “西递(서체)”라고 불렀다.  

http://cafe.naver.com/jlyge/289


시디나 홍춘이 있는 이현()은 예로부터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나오는 도화원(桃花源)으로 불려졌다.

이는 이현의 자연환경이 도연명이 묘사한 도원동(桃源洞)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 듯하다.

실제로 도원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1956년 도로공사를 하면서 바위 절벽에 새겨진 도원동(桃源洞)이라는 글씨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시디는 이현에서도 사방이 산으로 막힌 벽촌으로 지금 황산시 중심지인 툰시(屯溪)로부터 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옛날에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 도원동이란 마을 앞에 배를 대고 도원동을 통과하여

산과 계류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가서야 비로소 시디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자(字)가 태백(太白)인 시선(詩仙) 이백(李白;701~762)은 이곳 황산을 여행하다가 시디[西遞]에 들렀을 때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 올리고 이곳 시디를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시를 남긴 것 같다.


    黟縣小桃源 이현소도원 ; 이현의 작은 무릉도원에는 
    煙霞百里間 연하백리간 ; 연기가 백리에 이를 정도로 아득하고 
    地多靈草木 지다령초목 ; 땅에는 신령스런 초목들이 가득하구나
    人尙古衣冠 인상고의관 ; 사람들은 옛 옷을 지금껏 입고 있나니    

    http://blog.daum.net/ydoy0000/17019928


▲  연못가 광장에 이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패방이 우뚝 서있는데 호문광(胡文光)의 패방이다.

‘자사패방(刺史牌坊)’, 또는 ‘서체패루(西遞牌樓)’라고도 하며 시디마을의 표시이기도 하다.

호씨(胡氏) 마을의 조상이 이씨(李氏)인 사연

시디(西遞)의 원래 이름은 시추안(西川) 또는 시시(西溪)였다고 한다.
이는 마을 안에 세 줄기의 냇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데서 취한 것이다.
또 휘주부(徽州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찍이 일종의 역참(驛站)인 "포체소(鋪遞所)"가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름이 서체로 바뀌게 되었다.

역사상 비교적 전란의 침습을 적게 받았으며 외부로부터 큰 경제적 충격이나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는 이곳이 옛 마을 본래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생각된다.

현재 마을 안에 남아있는 명청대 전통가옥은 모두 124채이며 그 중 사당이 3채이다.
또 마을 안의 도로나 수계(水系)가 원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40여개가 넘는 골목(巷,弄)들은
모두 특유의 청석판이 깔린 채로 본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시디 마을이 휘주 지역 고촌락 중의 본보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마을은 동서 약 800미터이고 세 줄기의 냇물이 마을 북과 동에서 흘러 들어와서
마을 뒤를 돌아 남쪽에서 만난다.

주택들은 주로 이 냇물에 의존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경애당(敬愛堂)과 추모당(追慕堂) 두 사당건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당이나 패방 등의 공공건축물 앞에는 비교적 널찍한 공터가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집회를 갖거나 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시디를 산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동서로 길게 누워 있어 마치 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은 서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입구에는 연못이 있어 근처 농지에 물을 대주고 있고
여름이면 색색의 연꽃들이 피어 마을을 찾는 이들을 맞아준다.

연못가의 넓은 광장에 이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패방이 우뚝 서있는데
이 마을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 호문광(胡文光)의 패방이다.
이 패방은 호문광자사(胡文光刺史) 패방(牌坊), 또는 "서체패루(西遞牌樓)"라고도 하며
시디 마을의 표지이기도 하다.

호문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마을은 호씨들의 동성마을이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호씨가 아니라 이(李)씨였다.

호씨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시디 마을 호씨의 시조는 당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아들이다.
서기 904년 당 소종이 양왕(梁王) 주전충(朱全忠)의 협박을 받고 황급하게 도망을 나섰는데
도중에 황후 하(何)씨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때 신안(新安)의 우위엔(?源) 사람인 호삼(胡三)이 몰래 태자를 데리고
휘주 우위엔의 카오쉐이(考水)로 돌아왔다.

그 후 태자의 이름을 창익(昌翼)이라 하고 성을 호(胡)로 고쳤다.
그렇게 해서 창익(昌翼)은 시디호씨(西遞胡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서기 1047년 호창익의 후손 호사량(胡士良)이 공무로 진링(金陵)에 가게 되었는데
도중 시디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지세가 산에 둘러싸이고 풍경이 수려하며 토질이 비옥한 것을 보고 길지라 생각하여
우위엔 카오쉐이에서 집안을 이끌고 시디로 옮겨왔다.

이로부터 시디는 호씨의 마을이 되었고 농사와 학문을 함께 힘써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들이 당나라 황족의 후예로서의 긍지를 지니고 있다.

http://www.andongji.com/andong/viewandong/Content.asp?cat1_id=73&cat2_id=1128&cat1_name=?%EB%93%A6%EF%BF%BD111??cat2_name&cat2_name


村头有座明万历六年(公元1578)建的三间四柱五楼的青石牌坊,结构精巧,是胡氏家族地位显赫的象征。

마을 입구에는 명나라 만력 6년(서기 1578년)에 지어진 네 개의 기둥과 5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청석으로 되어 있는 세 개의 패방이 있는데 구조가 정교하고 호씨 가족의 찬란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호문광(胡文光 1521~1593) : 명대 산동(山東)의 교주자사(膠州刺史), 신종(神宗)황제 때 형번수상

이 마을에서 태어난 호문광은 명나라 嘉靖34년(1555) 과거에 급제하고 만재현(万載縣)의 현령이 되었다.
그는 현령으로서 마을을 보호하는 성장(城墻)을 세우고 또 학교도 세워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많은 일을 했다.

뒤에 순무추천(巡撫推薦)을 거쳐 교주자사(膠州刺史) 겸 이해운(理海運)이란 벼슬을 지냈고
이후 형주왕부장사(荊州王府長史)가 되었다.

형주왕(荊州王)은 호문광에게 봉직대부(奉直大夫)를 주어서 그는 드디어 대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맡은 일마다 성심으로 했고 뛰어난 능력과 성실함으로 인해 명 만력6년(1578) 황제는
시디 마을 사람들에게 공덕패방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호문광자사 패방과 휘주지역의 다른 패방들은 양식상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인 패방의 형태는 우리나라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처럼
한 줄로 서 있는 기둥위에 문루를 올려 하늘로 솟구친 형상을 한 "충천주식(?天柱式)"인데
호문광의 것은 3단으로 된 뚜렷한 층차를 보이는 5개의 지붕을 가진 누각 형태로 된
소위 "누각식(樓閣式)"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패방을 따로 "패루(牌樓)"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높이 12.3미터, 폭 9.95미터이고 조각은 소박하면서도 정밀하며
전체적인 조형에서는 장엄하며 또 화려함도 보여준다.


호씨(胡氏)는 1465년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곳에 대규모의 건물을 짓고 사원을 수리하였으며 교각을 건설하였다.


17세기 중엽 가문에서 관리가 배출되어 촌락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18세기에서 19세기 동안 번영은 최고조에 달하여 당시 마을에는 600여 채의 화려한 주택이 있었다.




광고재(曠古齋)

청나라 초기 강희년간(1662년)에 세워진 건축물로 총 면적은 130평방미터.


이곳의 원래 주인은 상업에 능해 관직까지 지내고, 그 후에도 상업활동을 더 활발히 했던 문인으로 유명한 분이고

후손들은 더 발전하여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천정을 통해 보는 휘주 건축의 특징


시디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대문을 동쪽 측면으로 냈는데 이는 풍수적인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문을 들어가면 집안에는 바로 천정(天井)을 만나게 된다.


천정이란 대청과 대문 사이의 마당을 말한다.

천정은 대문과 "ㄷ"자 모양의 집을 덮은 지붕으로 둘러싸인 장방형의 하늘과 꼭 같은 크기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그 둘레는 좁은 수로를 파서 배수가 되고 또는 저수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지붕에서 천정바닥으로 빗물이 내려오는 홈통이 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지붕의 빗물은 모두 천정으로 모이게 된다.


이는 휘주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전해오는 "四水歸堂" 즉 온 세상의 물이 모두 집으로 들어온다라는 말과 관련된다.

또한 좋은 물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비유가 있는데 실제로 천정은

휘주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려는 바람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람을 모으는(聚人)"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천정은 또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공간이기도 하다.

낮에 청당 즉 대청에 앉아서 책을 본다거나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다거나 할 때

하늘에서 천정으로 내려온 햇볕은 천정 바닥에 반사되어 대청 안을 부드럽게 밝혀준다.

이것은 한국의 한옥에서 마당에 내려온 햇볕이 마루에 반사되고 그래서 온 집안을 부드럽게 밝혀주는 것과 통한다.


천정에 바로 면한 대청은 청당(廳堂)이라고 하는데 정면 벽에는 당호를 새긴 편액이 위쪽으로 높게 걸려 있고

그 아래 중당화(中堂畵)라고 하는 큰 폭의 그림이 걸려 있고 그림의 양쪽으로는 교훈적인 내용의 대련이 걸려 있다.


그림의 아래에는 좁은 상이 놓여 있는데 상 위에는 중앙에 자명종 시계,

왼쪽으로 도자병(陶瓷甁), 오른쪽에는 조각 장식을 한 나무받침 위에 거울이 놓여 있다.

이를 소위 "동병서경(東甁西鏡)"이라 한다.


이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 중국인들의 민속으로

매 시간마다 정시가 되면 자명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집주인은 "종생평정(終生平靜)"

즉 평생을 평안하고 조용하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계를 의미하는 "종(鐘)"이란 글자가 "終"과 같이 "쫑"이라고 발음하며

또 "병(甁)"은 평안을 의미하는 "平"과 같이 "핑"이라고 발음하고

거울을 뜻하는 "경(鏡)"은 고요하다는 "靜"과 같이 "징"이라고 발음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건축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발음이 같은 글자를 취하여 여러가지 상징기호를 만들어내는 예를 많이 만날 수 있다.

대청은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이며 남자들의 주 생활 공간으로 한국에서의 사랑채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시디 마을의 집들 뿐 아니라 휘주의 건축은 밖에서 보면 매우 폐쇄적임을 알 수 있다.

창문이 없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집들은 마치 감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집의 규모에 비해 좁은 대문을 들어가서 처음 천정을 만나게 되면

이 집이 밖에서 보던 그 감옥처럼 꽉 막힌 집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그것은 천정을 통해서 하늘을 볼 수 있으며 바람 불고 비가오고 또 따스한 햇볕이 집안을 밝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외부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폐쇄적인 집이지만 집안으로 들어오면 또한 매우 개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고

자연과 조화된 집이란 점에서 휘주의 집은 사람들에게 매우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휘주 사람들이 이 천정을 통해서 천지의 바른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믿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西递村建房多用黑色大理石,两条清泉穿村而过,99条高墙深巷,各具特色的古民居,使游客如置身迷宫。

 서체촌의 가옥들은 대부분 검은색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양 갈래로 맑음 샘물이 관통하고 있고

높은 벽으로 둘러싼 99 갈래의 골목들이 있어 각각 옛 민가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여행객들을 미궁 속에 빠지게 한다.



조상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경애당(敬愛堂)


경애당은 본래 호씨 14세조인 사형공(仕亨公)의 주택이었다.

처음 지은 것은 명(明) 만력년간(萬曆年間,1573~1620)인데 뒤에 화재로 크게 훼손되었다.


청(淸) 건륭년간(乾隆年間,1736~1795)에 중건하고 나서 호씨자손이 크게 번성했고

이후 점차 더욱 더 왕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문중사당 즉 종사(宗祠)로 확장하여 짓게 되었다.

현재 면적은 1800여 평방미터이다.


경애당의 대문 처마는 하늘로 오를 듯 날렵하게 위로 솟구쳤는데

대문을 들어가면 장방형의 천정(天井)이 나오고 들보 위에는 붉은 채등(彩燈)이 걸려 있다.


중문 위에 높다랗게 "경애당(敬愛堂)"이란 해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경애당이란 이름은 후손들에게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라(敬老愛幼)고 계시한 것이며

또한 문중 사람들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뜻과 서로 화목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종사(宗祠)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지만 이곳은 과거 상업이나 문중 일을 의논하기도 했고

또는 혼사나 그 밖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행사를 하기도 하며 불효한 사람을 벌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http://www.andongji.com/andong/viewandong/Content.asp?cat1_id=73&cat2_id=1128&cat1_name=?%EB%93%A6%EF%BF%BD111??cat2_name&cat2_name=



충(忠), 효(孝), 렴(廉), 절(節)


경애당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것은 문루 위에 걸린 3미터에 이르는 큰 편액이다.

이것은 "효(孝)" 한 글자를 쓴 것인데 남송 대철학가이며 교육가이고 이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쓴 것이라 한다.


당시 그는 충(忠), 효(孝), 렴(廉), 절(節) 네 개의 큰 글자를 썼는데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어 충, 렴, 절 세 글자의 편액은 없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효(孝)자의 편액이 남은 것은 당시 촌민 한 사람이 효자 편액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곡식창고의 덮개로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지금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이 편액의 귀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집으로 가져가서 창고 덮개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덕에 이 편액 하나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호씨족보서(胡氏族譜序)

据史料记载,西递始祖为唐昭宗李晔之子,因遭变乱,逃匿民间,改为胡姓。故自古文风昌盛,到明清年间,一部分读书人弃儒从商,他们经商成功,大兴土木,建房、修祠、铺路、架桥,将这里建设得非常舒适、气派、堂皇,当时村里有大约600家华丽的住宅。


역사자료의 기록에 의하면 서체의 시조는 당나라 소종 이엽의 아들이 변란을 맞아 민가로 숨어들어가게 되고

성을 호로 바꾸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옛부터 문화를 숭상하는 풍조가 만연했는데 명청시기에 이르러 일부학자들이 학문을 포기하고 상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하게 되면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집을 짓고 사당을 복원하고 도로를 놓고 다리를 세우는 것 등이 활발해졌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편하고 분위기 있으며 웅장하였고 당시 마을안에는 대략 600여개의 화려한 저택들이 있었다.


백대증상(百代蒸嘗) 경애당의 편액. 蒸은 겨울제사를 뜻하고 嘗은 가을제사를 뜻한다.



종중을 존경하고 조상을 공경하라는 뜻







리복당(履福堂)

村中有座康熙年间建造的“履福堂”,陈设典雅,充满书香气息,厅堂题为“书诗经世文章,孝悌传为报本”、“读书好营商好效好便好,创业难守成难知难不难”的对联,显示了儒学向建筑的渗透。


마을에는 강희년에 건립된 “리복당”이 있는데 장식이 우아하고 선비집안의 숨결이 숨쉬고 있다.

이곳의 테마로 “책과 시와 문장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효와 윗사람 공경을 근본으로 한다”,

“독서는 상업적으로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창업시 그 어려움을 알면 더이상 어려움이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달아서

유학이 건축물에 얼마나 깊숙히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제(大夫第)

村中另一古宅为“大夫第”,建于清康熙三十年(公元1691年)。“大夫第”为临街亭阁式建筑,原用于观景,楼额悬有“桃花源里人家。

”六个大字“有趣的是,近人多将此楼当作古装戏中小姐择婿”热抛绣球所在,现已成为西递村举办此项民俗活动的场所。


마을안에 있는 또 다른 건물인 “대부제”는 청나라 강희 30년(서기 1691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길에 인접해있는 정자식 건축물이다.

원래는 “무릉도원이 민가안에 있다”는 말을 써서 관광지로 이용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들을 고대 전통극 중 아가씨들이 남편감을 고르는데 사용되던 것으로 여겨서

현재 서체촌은 이러한 민속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가 되었다.


“大夫第”门额下还有“作退一步想”的题字,语意双关,耐人寻味。此外,村中各家各户的富丽宅院、精巧的花园、黑色大理石制作的门框、

漏窗,石雕的奇花异卉、飞禽走兽,砖雕的楼台亭阁、人物戏文,及精美的木雕,绚丽的彩绘、壁画,都体现了中国古代艺术之精华。


 “대부제” 문 윗쪽 아래에는 “作退一步想(한발짝 물러 생각하라)”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마을내의 각 집집마다 화려한 정원한 정교한 화원들을 가지고 있고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문틈과 창문,

돌로 새긴 진기한 꽃들과 풀, 그리고 조류와 야생동물들이 있고 벽돌로 쌓아올린 누각과 정자들,

인물을 묘사한 전통극,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조품들, 화려한 채색화, 벽화등이 있어

이는 모두 중국 고대 예술의 우수성을 표현한 것들이다.


历经数百年社会的动荡,风雨的侵袭,虽半数以上的古民居、祠堂、书院、牌坊已毁,但仍保留下数百幢古民居,

从整体上保留下明清村落的基本面貌和特征。


수백년에 이르는 사회의 풍랑들을 거쳐서 비록  반세기 이상의 고대 민가, 사당, 서원, 패방들은 모두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백개의 고대 민가들이 있고 전체적으로 명청시기 촌락의 기본적인 형태와 특징이 보존되고 있다.

http://cafe.naver.com/jlyge/289


송석도(松石圖)


매죽도(梅竹圖)


공산당원의 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중국역사문화명촌으로 지정된 마을답게 풍경을 그리는 학생들이 곳곳마다 눈에 띈다.




정감촌(呈坎村 청칸춘 Chengkan)


안후이성(安徽省) 황산시(黄山市) 후이저우구(徽州区, 휘주구) 북부에 위치한

청칸진(呈坎镇, 정감진)의 촌급 행정구로 2008년 중국역사문화명촌(4차)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휘파문화(徽派文化) 예술이 결합된 전범(典范)인 이 촌락은

산과 물에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주희(朱熹)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고 칭한 이 촌락은

후이저우구(徽州区) 북부, 205국도로부터 불과 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칸향(呈坎乡, 정감향) 정부 소재지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동한(东汉) 삼국시기에 건립되었다.

역경(易经)의 음양팔괘(阴阳八卦) 이론에 따른 배치로 양(阳)은 정(呈)이며 음(阴)은 감(坎)으로

당 말에 청칸(呈坎, 정감)으로 개명되었다.

 

송대에는 나천질(罗天轶)과 나천칭(罗天秤) 형제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이곳으로 와 정착하며 나씨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명대 중엽 나씨 문중은 촌락과 중천하(众川河)에 대해 대규모의 공사를 단행하여

산과 물에 둘러싸인 이상적 공간 환경을 갖춘 촌락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촌락은 현재 2,7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휘파(徽派) 고건축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촌락의 하나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풍격이 각기 다른 정(亭), 대(台), 루(楼), 각(阁), 교(桥), 정(井), 사(祠), 사(社) 및 민거(民居)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촌락은 3가 99항(三街九十九巷, 3개 거리 99개 골목)이라는 칭호를 지니며 현재 청대 민거 200여 동,

명대 민거 30여 동이 있고 골목과 큰 거리는 대체적으로 수직으로 나 있으며 화강암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중 나동서사(罗东舒祠)와 청칸촌(呈坎村) 고건축군(古建筑群)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장춘사(长春社)는 청칸나씨(呈坎罗氏, 정감나씨) 및 부근 촌락의 오(吴), 호(胡) 등 여러 성씨가

토지신, 오곡신(五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봄에는 일 년 동안 적기에 바람이 불고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으며 가을에는 오신(娱神), 주신(酬神)에게 수확의 감사함을 제사지내던 장소였다.

 

이 사당의 규모는 매우 크고 정문(正门), 정당(正堂), 침전(寝殿) 및 좌우 무랑(庑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공예가 장중하고 경건하여 고대 조상과 신령을 숭앙하고 공경하던 옛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청칸(呈坎, 정감)은 역사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송대 용도각(龙图阁) 대학사(大学士), 이부상서(吏部尚书) 나여즙(罗汝楫)과 그 아들인 나원(罗愿) 및 양저우팔성(扬州八怪)의 하나인 나양봉(罗两峰)이 이곳 출신이다.

 

 

 

 

 

 영흥호(永兴湖)


동한(東漢)부터 남송(南宋)시기 정감촌의 수구(水口)이고 풍수지리학에 지호(地戶, 물이 모이는 곳)로 불리우며,

물이 모여 재물이 쌓인다는 의미로 옛날부터 천문이 열려야 재물이 마을로 들어오고

지호에 물이 모여야 재물이 수구로 모인다고 천여 년 동안 정감촌의 흥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과 함께. 


2014년 전국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인천시장 재선에 출마 후 낙선하자마자 곧바로 연구활동을 위해서

중국 칭화대학교(淸華大學)에 머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는 황산 공항에서 합류했다.

학교 후배로 송 시장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여서 각별하게 반가웠다.

 

 

 평안감(平安坎) 정감팔괘마을 ㅡ 천신만고를 이겨내어 생겨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국풍수에 관한 건축교재이기도 하다.

 

 

 팔괘도(八卦圖) 정감 팔괘촌의 자연환경은 천연 팔괘도를 형성한다.


정감촌 주위는 8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선천팔괘로 불리운다.

촌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S"자 모양의 하천이 마을을 질러 흐름으로 팔괘음양의 흑백 분계선을 형성한다.

 

주택 집은 대부분 목조 건물 2층으로 되어 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천정(天井) 이것이 바로 천정의 전형이다.


햇빛은 물론이거니와 비가 오면 빗물이 마당으로 들어와 물을 받아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옛 휘주인들은 집을 지을 때 색채의 조화에 특히 신경을 써서 흰 벽체에 검은 기와가 청산녹수 속에 있으면 안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건물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집안에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건물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낮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마당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옛날 휘주인들은 비는 금을 의미하고 눈은 은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붕에 뚤린 구멍을 통해서 비와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것은 부(富)가 집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실내의 기온조절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습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ㅁ자형의 2층 가옥.


이 집들은 밖에서 보면 아래층에는 창문이 없고 2층과 3층에 조그만 창이 나 있다.

옛 휘주의 여성들은 절개를 소중히 여겨서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2층이나 3층 조그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 후 문을 열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이미 명 청대에 2층 3층의 목조 가옥을 짓고 오늘날까지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한옥과는 달리 온돌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중국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발용 의자?

가이드의 설명으로 100 여 년 전 외국에서 들여온 이발용 의자라는데...

1층에는 방이 없고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여름에는 에어콘 역할도 한다고.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

 고건축학자 나철문(羅哲文, 1924~2012) 서.

 

나동서(羅東舒)는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세심한 고증을 거쳐 족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완하는 등 가문에 기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3대 70년에 걸친 대공정 끝에 1617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사당을 완공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당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개인 이름의 사당이지만 나동서뿐 아니라 나씨 후대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여자들을 위한 사당, 곧 여사(女祠)도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부지면적은 약 3000㎡이고, 건축면적은 약 2000㎡이다.


주요 건축물은 조벽(照壁)·영성문(欞星門)·좌우비정(左右碑亭)·의문(儀門)·곁채·배대(拜臺)·향당(享堂)·후침(後寢) 등이다.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건물의 분포가 좌우로 대칭되어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성문은 나무 울타리로 된 패방식(牌坊式) 대문으로, 조벽과 더불어 하나의 전정(前庭)을 이룬다.

의문은 영성문 안 쪽에 있으며, 정면 폭이 7칸 26.5m, 안 길이 10m, 높이 9.5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의문을 지난 정원을 거쳐 향당에 이른다.

정원의 동서 양쪽에 있는 곁채에는 약 1000개의 고대 편액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30여 개만 보존되어 있다.


주 건물인 향당은 정면 폭이 5칸에 25.6m이고, 안 길이는 7칸에 22.5m, 용마루까지 높이는 13.6m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일 뿐 아니라 가문의 일을 의논하고 공신과 명족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보륜각(寶綸閣)


보륜각(宝纶阁)은 정감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명나라 가정(嘉靖) 21년(1542)에 건립되었고

침전(寝殿)의 대들보상의 채색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민간 채색의 진품이며 명대 고건축의 정수이다.

금사난목 기둥 1주의 가격이 3억 위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


후침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1칸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트러스(truss)와 지붕받침, 도리, 기둥머리 등에 보존된 명나라 때의 채색화로 더 유명하다.

향당 남쪽에 있는 여사는 면적이 160㎡으로 남사(男祠)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을 드러낸다.

 

 

보륜각(寶綸閣) 명말 서예가 오사홍(吳士鴻) 서.

 

 

 

 이륜유서(彛倫攸叙)

 동기창(童其昌 1555~1636) 서. 윤리가 일정하게 베풀어진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S자 모양으로 흐르는 큰개울이 있다.

 

 

 

 

 

 

 개울가에는 빨래터가 있어 빨래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기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관광객이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한단다. 주의해야 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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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는 중국역사문화도시 흡현의 핵심이며 휘주부 소재지로서 산수가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구내 고민가 촌락은 구조가 아름답고 고대의 다리, 탑, 거리, 골목길, 제방, 패방들이 잘 어울려서 소박한 풍채을 보여주며 마치 호장한 박물관과 같다.

휘주고성경구 6개 관광지: 동방개선문—허국석방,   휘주고성표지—휘주부,   강남제일거리—두산가.   휘상의근원 – 어량고항,   휘주대관원- 휘원,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 –토싱즈기념관.   http://blog.daum.net/choemh/16140891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관람도     http://www.guhuizhouta.com/


 

 휘주부서(徽州府署) 휘주부 관아

 

 

 


명경고현(明鏡高懸)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 오장육부가 훤히 비춰보이는 거울이라는 뜻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 :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한 법관을 비유함.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3권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鏡 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의 함양(咸陽)궁(宮)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 가운데, 너비가 4(四尺 : 1m 20Cm), 높이가 59

(五尺九寸 : 1m 77Cm)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그 모습이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 옛날의 사진기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피사체가 거꾸로 보였다는~)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腸 :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이 나타나는 거울이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몸의 환부(患部)가 나타나 병을 알아보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신기한 거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흉중(胸中 : 가슴 속)에 있는 심보(心褓)까지 알 수 있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秦始皇)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확인하였는데 특히 면전

(面前)에서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尋聞)하고 처벌했더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末期)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공격하던 혼란 와중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大學士 허국(許國)  1527~1596

휘주부() 흡현() 사람으로 자는 유정()이다. 명()나라 때의 대신()이다.

가정() 44년(1565)에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 국자감제주(), 태상시경(), 첨사(), 예부시랑(), 이부시랑(), 예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이 있다.

허국석방(許國石坊)은 흡현시내에 위치하며 중국내에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명대 석방형식의 건물이다. 1584년도에 처음 지어졌으며 8개의 기둥이 口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八脚牌楼(팔각패루)"라고 명명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이 11.54m, 동서로 넓이 6.77m, 높이 11.4m, 면적은 78.13㎡이다.

 

동기창(童其昌)  1555~1636  패방의 글씨는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이 썼다.

동기창의 자는 현상(). 호는 사백(), 향광() 화정( 상하이시 송강 )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를 시문서화()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을 종()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 미만종() 장서도()와 함께 ‘형장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에서 동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 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 『화선실() 수필』 등이 있다.

 

 

 

 

 

 도행지(知) 1891 ~ 1946

안휘성(省) 출생. 1914년 진링[]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J.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우고 1916년 귀국하여 후스[] 등과 그 교육론 보급에 힘썼다. 난징[]고등사범학교(후에 국립 ) 교수로 근무하였고, 1923년 이후로는 민족자본을 기금으로 한 민간교육운동에 헌신하며 강단에 서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하에서 창조적인 형태의 학교를 개설하고, 노동존중과 사상의 자유에 철저하여 공산당원을 옹호하였으며, 많은 혁명청년을 양성하였다. 난징의 사오좡[]사범학교, 상하이[]의 산하이공학단(), 충칭[]의 육재()학교 ·사회대학 등을 경영하였다.

1935년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참가하여, 교육은 어린이와 대중의 생활해방을 위해 민족해방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에서 내전반대 ·정치민주화를 주장하다가 1946년 7월 뇌일혈로 갑자기 죽었다. 전생애를 통해 반식민지인 중국 사회에 근대교육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추구하여 오늘날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기의 애국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교육이론은 중국의 교육이론에 계승되고 있다.

 

흡현(셔시엔, 歙县, Shexian) 

휘(徽) 지역의 중심지이자 수도이다. 아마 와 보면 '중국 전체의 상업을 휩쓴 집단이 이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다니' 하고 의아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대도시에서 성공하고, 이곳에는 자기 원래 집터에 큰 집을 짓는 순서였으니까. 그래서 흡현은 고상(삐딱해서 Sorry)하게 서당/사당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상인들이라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그곳이 어량(위량, 渔梁, Yuliang)이다. 그래서 같은 유적이라고 해도, 흡현은 먹물 냄새가 많이 나고 엄숙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어량은 돈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편, 그리고 활발했던 느낌이 많이 난다.

흡현의 옛 이름이 휘주(徽州), 즉, 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송대부터 중국 역사상 유명인사를 기록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 200여명에 달하고 사당, 서당, 서원이 120여개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정도에 비하면 너무 남아 있는게 없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정도부터 야심차게 수도 복원 사업을 했다는데, 한 결과가 운치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성곽의 붉은 벽과 위에서 얘기한 요란스러운 (브랜드 옷 가게로 즐비한)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양화문(양허먼, 阳和门, Yanghemen)을 들어서 허국석방(许国石坊)을 지나면 나타나는 요란무쌍한 흡현 시내는 2008년인가에 새로 칠한 화장일 뿐, 두산가(더우샨지에, 斗山街, Doushanjie) 들어 서면, 높고 큰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걷게 된다.

 

휘상()

명청() 시기 안후이성() 휘주부() 지역에 적을 둔 상인()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는 안휘의 서현(, 섭현), 슈닝현(, 휴녕현), 우위안현(, 무원현), 치먼현(, 기문현) 이현(), 지시현(, 적계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은 동진()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에 전성하였으며 청말()에 쇠퇴하였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 양식(), 차(), 문구필묵()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예작품은 서화가들이 (붓 필), (먹 묵), (종이 지), (벼루 연)이라는 문방사우를 이용하여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붓은 늦어도 상나라 때에 이미 있었다. 어떤 갑골에는 붓으로 써넣은 붉은색 부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중국 호남성 장사()의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붓이 작은 대나무 통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대나무로 된 붓자루는 길이가 18.5㎝, 지름이 0.4㎝이고 붓의 털이 토끼털이며 털의 길이가 2.5㎝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선필()과 호필()이다.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되는 붓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구양수()에 의해 “,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말은, 붓이 너무 부드럽거나 딱딱하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잡기에 매우 적합하고 백 개의 붓 중에 질이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당시 이 붓은 “천금을 주고 사려해도 시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저쟝성() 호주시()에서 생산되는 호필은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

’(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이다. ‘’은 회의자로, ‘’과 ‘’로 구성된다. 빛깔과 광택이 밝고 윤기가 흐르며, 재질이 부드러우며, 고색이 창연한 먹은 서예가들의 필수품이다. 현재 안후이성 흡현() 등의 지역에서 만든 ‘휘묵()’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지술은 고대 중국의 사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씨를 쓰는 재료로 갑골이나 청동기, 죽간, 견직물, 비단 등이 있었다. ‘’(종이 지)자의 편방은 ‘’인데, 이것은 종이가 실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는 본래 실을 빨 때 도구의 밑바닥에 남는 솜 모양의 물질인데, 한나라 때 사람들이 삼, 어망, 나무껍질, 헤진 천조각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륜

동한(25~220년) 때 채륜()이 제지술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가볍고 얇으며 깨끗해서 ‘채후의 종이()’라고 불렸다. 저렴한 종이가 나오면서 글씨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졌다. 종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선지()로, 중국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된다. 선지의 품질은 순백색으로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견고하며, 광채가 나지만 미끄럽지 않고, 빛이 통하면서도 빛깔과 광택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고 여러 번 접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노화에 강하고 벌레나 좀을 방지해준다. 이 때문에 ‘천년의 수명을 가진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자는 ‘’을 편방으로 하며 출현시기가 늦은 편이다. 이것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문방사우’라고 불린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아름다운 한자를 써내고 독특한 풍격의 서예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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