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고지>. 목판에 템페라 / 194×194cm / 14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프라 조반니(Fra Giovanni, 형제 요한)라 불리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00~1455)는
한 세기 후 미술가이자 저술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시절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에 대해 기술한 <예술가 열전>에
‘천사와 같은 화가’라는 뜻의 ‘픽토르 안젤리쿠스(Pictor Angelicus)’라고 소개되었다.
현재 그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같은 형제)’
혹은 ‘일 베아토 안젤리코(Il Beato Angelico, 축복받은 천사 같은 사람)’로도 부른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로 출발하여,
훗날 피렌체 인근 도시 피에솔레에서 수도원장 직에까지 오른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신의 뜻을 전하라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가르침을 ‘그림’을 통해 수행했다.
그림으로 기도를 대신한 것이다.
<수태고지>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피에솔레 수도원에 속한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다.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뒤 충만한 신앙심으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뜻하지 않은 방문과 함께 ‘임신’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속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식에도 순종의 예를 다하고 있다.
화면 왼쪽 모퉁이에서 시작된 빛은 성령을 의미한다.
중앙의 기둥을 통과하는 빛줄기 안에 비둘기 한 마리가 보인다.
비둘기 역시 성령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임신은 바로 이 성령의 힘, 이른바 은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앙 기둥 윗부분에 하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가슴에 포갠 두 팔은 ‘순종’을 의미한다.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위치한 공간은 ‘로지아’라고 부르는데 한쪽 면은 벽으로,
반대쪽은 기둥을 세워 외부와 연결되도록 트여놓은 곳을 말한다.
로지아의 천정은 푸른 하늘과 황금빛 별들로 장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화면 왼쪽의 외부세계이다.
두 남녀가 맥 빠진 모습으로 걷고 있고, 천사는 그들을 재촉한다.
이들은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예표론(Typology)’이라 하는데,
예표론적으로 보면 아담과 이브로 인해 만들어진 원죄는
바로 그 ‘죄’ 없이 잉태되어 세상에 오실 예수에 의해 사해진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만든 원죄의 늪에 빠진 인류는
‘순종하는’ 자로 인해 비로소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미술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유럽 인구의 대다수가 문맹이던 시절, 교회에서 성서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려서 붙이거나 벽화를 그리는 것,
혹은 조각을 하거나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넣는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각예술이 메시지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서의 내용이나 교회 쪽에서 신도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 외에도,
어떻게 하면 사람을 실제처럼 도톰해 보이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하면 3차원이라는 공간을 평평한 2차원 공간에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화가들의 시도가 쌓여서 공간의 입체감이나 인체의 볼륨감 등이
완성된 형태로 눈에 띄게 나타났던 때가 보통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다.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도 이런 기법을 잘 구사했다.
‘프라(Fra)’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수사라는 뜻인데, 고로 이 분은 수사이면서 화가였다.
‘수태고지’라는 단어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예수를 임신(수태)한다는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알려 준다(고지)는 뜻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에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성서를 읽고 있었는데(무릎 위에 조그마한 책이 놓여 있다),
천사는 그녀가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냐며 놀랐으나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것이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왼쪽 위에는 하느님의 손이 보이고 거기에서 장풍처럼 빛이 나와 마리아에게 오는 것이 보인다.
그 빛 가운데에는 흰색 비둘기가 있는데, 성령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늘 흰색 비둘기였다.
<수태고지> 중 비둘기 부분
마리아의 집을 보면 기둥 여러 개가 뒤로 갈수록 작아 보이는데, 이것이 원근법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이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을 때 앞의 것이 커 보이고 뒤의 물건이 작아 보이도록 그리는 것,
즉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림에서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거나 가장 커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람이나 사물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시기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중요한 것을 가장 크게 그리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의 크기를 달리 표현하는 것을 단축법이라고 한다.
마리아의 무릎 부분이 엉덩이 부분보다 앞으로 나오면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방 안의 긴 벤치 같은 것을 표현한 방법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이나 단축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알았지만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얼굴이나 목 부분을 부드러운 음영으로 처리한다든지,
뺨의 발그레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생동감과 볼륨감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나무판에 템페라(안료를 달걀노른자에 섞는 방식)로 그려졌다.
나무라는 재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면서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당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무판을 삶은 뒤 최소 십 년 이상을 말렸다고 한다.
당시에 캔버스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의 크기만큼 넓적한 나무는 없을 테니 나무판 여러 개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천을 한 겹 씌우고 밑칠을 해서 최대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의 특징은 달걀노른자를 생각하면 된다.
달걀 프라이를 먹다가 안 익힌 노른자가 그릇에 묻었을 때
재빨리 설거지하지 않으면 씻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경험은 한 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템페라화도 그렇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빨리 마르고, 한번 마르면 좀처럼 물감이 떨어지지 않아서 견고하다.
그러나 덧칠이 불가능하고 수정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템페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매우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후광, 가브리엘 천사 뒤에서 나오는 빛,
성령에서 나오는 빛 등은 금색으로 칠해졌는데, 이것은 금색이 나는 무언가가 아니고 진짜 금이다.
금화를 곱게 갈아서 가루 상태로 만든 다음에 칠했다.
금화를 갈아서 그림용 가루로 만드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림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가,
얼마나 구도가 혁신적인가 등으로도 가치가 매겨지지만 표면 자체의 물질의 가치가 꽤 높은 경우도 많다.
금도 금이지만, 마리아의 치마에 쓰인 푸른색은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라는 파란색의 준보석을 갈아서 칠한 것이다.
아주 귀한 파란색이었기 때문에 아무 곳에나 쓰지는 않았고,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만 주로 쓰던 비싼 물감이다.
집 밖의 풀이 우거진 정원에는 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인류의 첫 번째 남녀, 아담과 이브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인 것 같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남녀 모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아기를 낳을 때 고통스러우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을 입었고, 낙원에서 쫓겨났다.
이 장면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인데,
아담과 이브가 살던 때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순간은 몇 천 년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
수태고지 장면과 아담과 이브가 한 화폭에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담과 이브는 첫 번째 남녀로 인류의 대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인류가 지은 죄를 씻어 줄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은 프라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가도 볼 수 있는데,
자꾸 반복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은 교회 측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메시지라는 의미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앞의 세 개의 그림
이 작품의 아래를 보면 조그마한 그림들이 만화처럼 ‘조르륵’ 붙어 있는데,
제단화 밑에 작게 그려진 이런 부분을 ‘프레델라(predella)’라고 부른다.
프레델라에는 주로 위쪽 큰 그림의 주인공에 대한 부연설명이 나온다.
우리가 보는 그림의 주인공은 마리아이므로 이 프레델라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프레델라의 가장 왼쪽 그림, 그중에서도 방 안의 장면은 아기 마리아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 옆은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는 장면이다.
사실 마리아가 남편인 요셉과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요셉이 누구의 자손이며, 목수였고 성실한 남자였다는 설명 정도만 나와 있다.
그런데 성서의 내용으로만 온갖 그림을 다 그리기에는 세부사항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고로 삼곤 했던 것이 ‘외경(Apocrypha)’이다.
외경은 성서처럼 쓰이긴 했으되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성서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책이다.
그래서 야사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요셉이 어떻게 하여 마리아의 남편감이 되었는지도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마리아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마리아와 누가 결혼을 할 것인지가 동네 사람들의 이슈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네 사제는 ‘마리아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다들 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준비해서 회당으로 모이시오.
가장 적당한 남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서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날 것이오’라고 공고를 했다.
온 동네 총각들이 다들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회당에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어리둥절해 할 무렵,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요셉의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감으로 결정되었고,
요셉과 마리아가 손을 맞잡으려는 중 낙방한 다른 총각들은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다리로 부러뜨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자칫 심각할 수 있는 종교화에 생생한 느낌을 불어넣어 주는 부분이다.
이후 약혼만 했을 뿐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큰 그림에서처럼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고,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착한 남자였기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그때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다 하느님이 시킨 일이니 참고 살거라’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요셉은 가정의 수호성인이면서 인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들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키우려면 그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도 인내심이 꽤 필요했던 것 같다.
이 프레델라를 보면 요셉은 거의 대머리에 머리칼도 허옇다.
프라 안젤리코의 이 그림뿐만 아니라 요셉은 대부분의 서양 회화에서 할아버지로 묘사되는데,
이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했을 때도 처녀였고 죽을 때까지도 처녀였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평생을 남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여자의 남편이 젊고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라면
제아무리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대부분의 그림에서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은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뒤의 두 개의 그림
이어지는 그림은 임신한 마리아가 사촌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
그 옆은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장면이다.
이어서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시간이 훌쩍 흘러서 마리아가 숨을 거둔 장면이 나온다.
이 그림 속 마리아처럼 등을 똑바로 대고 누워 있는 인물을 보면 옛날 사람들은 ‘아, 죽었구나’라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잠자거나 쉬려고 누운 것은?
그것은 우리가 거실에서 쿠션을 베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자세처럼 옆으로 비스듬하게 그렸다.
대부분은 팔 한쪽을 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등을 붙이고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비스듬하게 누워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
젊은 여자와 날개 달린 젊은 사람 사이에 흰 비둘기가 있으면 수태고지 장면 등
‘척하면 척’ 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도상(iconography)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정해 놓은 약속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므로 책을 보고 그리스도교 종교화의 도상을 공부하거나
따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도상을 알아본다지만,
피렌체에서 1400년대에 살던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그림을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화라는 것은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본래 목적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도상이라는 것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존재한다.
늘 묻혀서 살기 때문에 인지를 못할 뿐이다.
몸 좋은 서양 남자가 바지 위에 팬티를 입고,
가슴의 오각형 안에는 S자, 망토를 두르고 서 있다면 그건 누구? 슈퍼맨이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그것이 슈퍼맨인 줄은 안다.
그러나 500년 정도가 지난 뒤에 누군가 우연히 슈퍼맨 이미지를 봤다고 치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려면 190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1400년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것은 그래서다.
도상을 몰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회화를 이해하려면 도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유럽 여행을 가서 미술관에 갈 텐데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책을 봐야 되나요?’
라는 미술관 초보의 질문에는 성서와 그리스 · 로마 신화가 답이다.
덧붙여 역사책도 읽으면 좋겠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0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