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데 페레다 <제노아의 구원> 캔버스에 유채 / 290×370cm / 1634~1635년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안토니오 데 페레다(Antonio de Pereda, 1611~1678)가 제작한 <제노아의 구원>은 스페인의 동맹국인 제노아가
사보이 공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된 것을 스페인의 명장 산타크루즈 후작이 구원하는 장면을 담았다.


호호백발로 그려진 제노아의 통수권자는 중앙에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산타크루즈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림 속 이들이 입고 있는 의상, 예컨대 모자 소매 장식 등은 워낙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티치아노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의 창들은 그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 <바히아 탈환> 캔버스에 유채 / 309×381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바히아 탈환〉을 그린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Fray Juan Bautista Maino, 1581~1649)는 엘 그레코의 제자로,
이탈리아 고전 바로크의 대가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i, 1560~1609)에게도 그림을 배웠다.


한때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들어가면서 붓을 꺾었지만, 펠리페 3세의 명을 받고 궁정에 들어와

당시 왕자였던 펠리페 4세의 개인 그림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궁정에서 열린 그림 경연대회에서 우승자로 벨라스케스를 선택하는 탁월한 안목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이윽고 벨라스케스와 함께 부엔레티로 궁정의 방을 장식하게 된다.


그림은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신대륙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를 대파시킨 장면을 담고 있다.
오른쪽에는 네덜란드 군대의 장수가 초록에 노란 옷을 덧입은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 총지도자

돈 파드리코 데 톨레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돈 파드리코 데 톨레도가 가리키는 태피스트리에는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쓰는 펠리페 4세의 모습이 보인다.


펠리페 4세의 곁에는 올리바레스 공작이 있다.

그림 왼쪽에는 바히아에 사는 포르투갈 여인이 쓰러진 병사를 치료해주고 있다.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는 살육이나 피비린내 나는 장면 대신 진지하고 침착한 표정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들과 더불어 아군이건 적군이건 상관없이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른바 전쟁 속에 핀 자비의 꽃을 보는 듯하다

클라우디오 코에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 캔버스에 유채. 271×203cm. 166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8a실


클라우디오 코에요(Claudio Coello, 1642~1693)는 카를로스 2세 때 활동한 궁정화가였다.
당대 화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루벤스나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벨라스케스처럼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펼쳤지만, 바로크 화가답게 웅대하고 환상적이며 동적인 구성이 가득한 화면을 펼쳐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에서 성자의 근엄하고도 우아한 형상은 극도의 사실감을 과시하지만
하늘을 떠다니는 천사, 기이한 형태와 색으로 얼룩진 구름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성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기독교 초기 시절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중세 신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세계 3대 참회록의 하나로 자서전격인 신앙 고백서 <고백론>을 저술했다.

그림 속 아우구스티누스는 발치에 놓인 조각상을 무심한 듯 쳐다보고 있다.


고대 조각상들은 이른바 우상숭배를 암시하며, 그 곁에 악마의 상징이자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그려져 있다.
너풀거리는 그의 하얀 옷은 구름과 뒤섞이며 푸른빛을 발하는데, 이는 주홍색 겉옷과 황금색 주교관의 색과 대비된다.

클라우디오 코에요 <성 루이 왕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 캔버스에 유채. 229×249cm. 1665~166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8a실


<성 루이 왕의 경배를 받는 성모자>는 십자군 전쟁에 두 번이나 참여했고,
역시나 전쟁 중 튀니지에 원정을 떠났다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한

프랑스의 왕 성 루이 9세(Saint Louis, 1226~1270)를 그린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왕권을 물려받은 그는 열두 살에 왕위에 올라 카스티야 출신 어머니의 섭정에 의존했지만,
여러 개혁 정치를 통해 약한 자를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에 앉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외할머니 안나가 건네는 꽃을 받아들고 있다.
그림 하단 왼쪽에는 양을 이끌고 있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상징이기도 한 낙타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성 루이가 이들 가족에게 경배를 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앞에는 홀과 왕관이 놓여 있다. 바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빛의 구성, 늘어진 커튼이나 호사스러움 등은

높은 경지에 오른 클라우디오 코에요의 바로크적 회화 기법을 반영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4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괴물>. 1680년경 제작. 캔버스에 유채. 165cm×108cm /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Juan Carreno de Miranda, 1614~1685)는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마드리드로 건너와 벨라스케스의 도움으로 왕실 화가가 되었다.


그 역시 알카사르궁 장식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몇몇 종교화도 제작했지만,

무엇보다도 왕실 가족의 초상화로 이름을 높였다.

<괴물>. 캔버스에 유채. 165cm×107cm. 16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두 그림은 에우헤니아 마르티네스 바예호(Eugenia Martinez Vallejo)라는

여자 아이의 초상화로 한 점은 누드로 연출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점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고야의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 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 옛 왕실에서는 가끔 신체적으로 기형인 이들을 기용해
왕실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놀도록 했다.


그녀의 선천적인 기형에 대한 세인들의 호기심은 벗은 몸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화가는 그러한 관음증적 욕구에 부응해 이처럼 잔인하고 비인격적인 초상화를 제작했다.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 211×125cm / 167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6a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도 등장하는 마리아나 왕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큰딸로, 펠리페 4세의 조카였다.


그녀는 펠리페 4세의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왕자가 요절하자
예비 시아버지였던 펠리페 4세와 결혼한다. 펠리페 4세는 첫 아내 이사벨과 사별한 터였다.


마흔이 넘었던 펠리페 4세로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다른 나라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혈통이어야 했기에
며느리로 삼을 뻔한, 심지어 조카인 겨우 열다섯 살의 그녀와 막장 드라마 같은 결혼을 추진했던 것이다.


왕은 전처 이사벨과의 사이에서도 제법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거의 요절했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자식 역시 그리 수명이 길지는 않았다.


겨우 살아남은 두 아이 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나오는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삼촌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한 후 역시 요절했으며,

아들 카를로스 2세는 발달이 늦고 몹시 허약한 채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림은 펠리페 4세가 사망한 후 병약한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는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근엄하고도 강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 양)〉 캔버스에 유채 / 37.3×62cm / 1635~164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은 17세기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했던 곳인 세비야에서 도제 생활을 거친 뒤 그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에 정물과 인물들을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인상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줄에 묶인 양을 그린 〈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 양)〉는 연극 무대 같은 빛과,
극도로 자제된 색상, 모든 군더더기를 생략한 오직 ‘양 한 마리’만으로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 그 자체’를 설파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화가인 성 루가〉 캔버스에 유채 / 105×84cm / 165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화가인 성 루가〉는 흔히 화가였다고 전하는

《루가의 복음서》의 저자 루가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수르바란은 대부분의 작품을 수도회를 위해서 제작했기에 주로 기도하거나 명상에 잠긴 수도사

혹은 성인들의 모습을 그리곤 해서 ‘수도사들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 캔버스에 유채 / 179×223cm / 162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0a실


〈성 베드로 놀라스코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한
성 베드로의 모습을 그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성인 베드로 놀라스코가 목격하고 놀라워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치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 같은 빛이 순교자의 몸을 환히 밝힌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빛과 어둠의 강력한 대비를 통한 절제와 명료함만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이런 화풍은 역시 카라바조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수르바란은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스페인 화가로 칭송받으며

‘스페인의 카라바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지나치게 금욕적인 그의 화풍에 흥미를 잃은 후원자들이 새로이 등장한 신세대 화가

무리요에게 환호하면서 주문이 극감해 빈곤 속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카디스 방어전〉 캔버스에 유채 / 302×323cm / 163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수르바란이 그린 전쟁화 〈카디스 방어전〉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1625년 영국 윔블던 경이 이끄는 해군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카디스에서 한참 작전을 수행 중인 스페인 군 지휘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수르바란이 주로 다루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기에 한동안 그가 아닌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과 나란히 부엔레티로 궁에 걸려 있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1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산체스 코탄 〈사냥감과 과일, 채소가 있는 정물화〉 캔버스에 유채 / 68×88.2cm / 160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8a실


후안 산체스 코탄(Juan Sanchez Cotan, 1560~1627?)은 오르가스에서 태어나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검은 배경이 인상적인 그의 깔끔하면서도 섬세한 정물화를 두고 고대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 나오는 일화를 언급하곤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는 자신이 그린 포도송이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새가 날아들어 그것을 쪼려다가 죽었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자만에 찬 그는 파라시우스에게 어서 그림을 보여달라며 그림 앞 커튼을 열어젖히려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커튼이 바로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림이 ‘완벽할 만큼 진짜’ 같을수록 훌륭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여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 실제 같이 느끼도록 하는 기법은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을 속이다’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불리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는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물화는 16, 17세기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주 그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는 만큼 이 지역 회화의 특성이 전해진 스페인에는 ‘보데곤(bodegon)’이라 하여
식기나 요리 재료들을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그림은 스페인 가정의 부엌 모습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정에는 레몬과 사과가, 그 곁에는 사냥물이 매달려 있다.


아래 왼쪽에도 잡은 새들을 꼬챙이에 꿰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선반 위 늘어진 당근과 무 옆에 엉겅퀴과의 채소 카르둔도 있다.


화가 자신이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평신도 자격으로 세고비아의 한 수도원에 들어간 전력까지 있어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영적인 훈련을 위한 묵상의 대상으로,

인간의 죄와 그 정화에 대한 일종의 종교화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면 카르둔은 창세기의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게 되리라”(3장 18절)라는

구절을 근거로 원죄를 안고 낙원에서 추방된 뒤 시작된 인간의 노동, 그 힘겨움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나아가 사과는 원죄를 의미하며, 레몬은 독을 제거하는 효능으로 인해 죄의 정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정물화를 무조건 종교적 상징으로만 읽는 것은 동전의 한 면만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당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그만큼 늘 봐오던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찰이 요구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리발타 〈성 베르나르두스의 환상〉 캔버스에 유채 / 158×113cm / 16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7a실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대한 저항과 가톨릭 자체의 개혁을 위해 몇 차례의 긴 공의회를 거친 교회는
신도들의 신앙심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미술을 주도하였다.


대체로 반종교개혁 성향의 그림에는 성인의 일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보다 크고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스페인의 17세기 미술에서 유난히 성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고, 나아가 그들의 모습을 마치 실제 인물의 초상화처럼
크게 클로즈업해 등장시키곤 하는 것은 스페인이 그만큼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성 베르나르두스의 환상〉은 발렌시아에서 활동하던 화가 프란시스코 리발타(Francisco Ribalta, 1565~1628)가
자신의 후원자인 후안 데 리베라(Juan de Rivera) 대주교가 소장하고 있던 카라바조의 모사본들을 연구한 결과 탄생할 수 있었다.


극명한 빛의 대비와 압도적인 사실감이 특징인 카라바조의 화풍이

이제 지중해를 거쳐 발렌시아 항구를 통해 리발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림은 예수가 친히 십자가에서 내려와 성 베르나르두스를 보듬는 신비한 체험의 순간을 담고 있다.
성 베르나르두스는 클레르보 대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 제도를 창시한 성인이다.


짙은 어둠에 가려 있지만 성인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이 얼마나 따사로운지는 성 베르나르두스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친밀도는 거의 관능적인 느낌까지 준다.


감정적인 자극을 강조하는 바로크 미술에는 딱 꼬집어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왠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드물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리발타 〈천사에게 위안받는 성 프란체스코〉 캔버스에 유채 / 204×158cm / 162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7a실


〈천사에게 위안받는 성 프란체스코〉는 성 프란체스코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 음악을 연주해 주어
어린 시절 성인이 즐긴 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그 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을 담은 그림이다.


천사나 성인이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침대보와 양털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리발타가 사물에 닿는 빛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천사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과, 바로 오른쪽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어느 존재는 그림의 분위기를 한껏 신비롭게 연출한다.
다소 과장된 바로크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성인의 발과 손에 난 상처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오상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세 드 리베라 〈아르키메데스〉 캔버스에 유채 / 125×81cm / 163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호세 데 리베라(Jose de Ribera, 1591~1652)는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스무 살이 되기 전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의 통치하에 있던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 머물며 작업했다.


그의 이름 ‘호세’는 종종 이탈리아어 식으로 ‘주세페(Giuseppe)’라고도 표기되며,
‘스파뇰레토(사랑스러운 스페인 사람)’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의 그림은 한눈에 카라바조가 연상된다.
강렬한 명암 대비로 인한 치밀한 사실주의는 감상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리베라는 카라바조로부터 명암법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탁월한 현실 감각까지 전수받았다.
카라바조는 위대한 성자나 성녀 들을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갑남을녀의 모습으로 그려
교회 관계자들의 우려 아닌 우려를 낳곤 했다.


이전의 종교화에 등장하는 성인들은 대체로 화려한 의상에 조각같이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과시하곤 했지만,

카라바조는 고난 속에서 핍박받고 산 이들이 그렇게 우아하고 세련되게 치장하고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사실주의’를 구축했다.


호세 데 리베라 역시 성서 속의 인물들뿐 아니라 신화나 고대 철학자의 모습까지도 평범하다 못해
심지어 다소 비천한 모습으로 묘사하곤 했다.

호세 데 리베라 〈성 필립보의 순교〉 캔버스에 유채 / 234×234cm / 163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실


〈성 필립보의 순교〉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Felipe Ⅳ, 1605~1665)의 수호성인 필립보(Philippus)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
한때 이 그림은 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의 순교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추정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인도까지 가서 그곳의 귀신 들린 공주를 치료함으로써 왕가 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자이다.
그러나 그는 곧 왕의 동생에게 붙잡혀 살가죽을 통째로 벗기는 고문을 당했고, 머리를 아래로 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다.


이 때문에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림 속 주인공에게는 그런 지물이 없다.


학자들은 성인 필립보의 이름이 후원자인 펠리페 4세(펠리페는 한국어로 필립보로 표기하는,

라틴어 필리푸스의 스페인식 이름이다)와 이름이 같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립보가

십자가형에 처해 순교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림 주인공이 성 바르톨로메오가 아닌 성 필립보라 주장한다.

순교를 당하는 성인의 하얀 피부와 그에 닿는 빛에 비해 성인의 뒷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 긴장감이 고조된다.
매달린 성인과 그를 고문하는 이들의 몸, 즉 근육과 뼈의 이음새 하나하나까지

해부학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큼 정확하고 사실적이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0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는 그리스 크레타 섬의 칸디아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로 이주했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별명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다.


그의 스페인 행은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 인근에 에스코리알 궁을 짓기 시작하면서

건축가들을 포함한 미술가들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당연히 엘 그레코도 에스코리알 궁 안의 교회당을 장식할 제단화 제작에 참여했지만,
당대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특한 화풍 탓에 교회 내부 전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펠리페 2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한 탓에 궁정화가 발탁이라는 행운에서도 멀어졌지만,
이탈리아 체류 시절부터 제법 행세깨나 하는 지식인이나 귀족층과의 친분을 쌓아둔 덕에

톨레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 수 있었다.


엘 그레코는 반듯하고 완벽한 인체 묘사와 비례, 균형 등을 최고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르네상스의 고전적 그림에서 많이 동떨어진 매너리즘 화풍의 대가였다.


매너리즘 화가들은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대가들의 정점에 달한 ‘기교’를 답습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키곤 했다.


매너리즘(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은 기교,

방법을 뜻하는 ‘마니에라(maniera)’라는 말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엘 그레코의 역량이 고스란히 담긴 〈수태고지 1596~1600년 제작〈그리스도의 세례 1596~1600년 제작〉

〈십자가 처형 1597~1600년 제작〉<오순절 1596~1600년 제작><부활 1596~1600년 제작> 이 다섯 작품은

현재 마드리드 마리나 에스파뇰라 광장(Plaza de la Marina Espanola)에 있던 수도사를 위한 아우구스티노 교단 소속

부설 학교 예배당의 제단화로 제작된 일곱 점의 작품 중 일부다.


궁정화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엘 그레코는

1596년 이 제단화들뿐 아니라 내부 장식을 위한 조각품 제작도 의뢰받았다.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번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사례로 받고 3년여의 작업 끝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제단화 일곱 점은 나폴레옹의 침략 기간 동안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후 이 다섯 작품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지만, 여섯째 작품인 〈목자들의 경배〉는 루마니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곱째 그림은 소실된 상태이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성모의 대관식〉을 주제로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위일체〉 캔버스에 유채 / 300×179cm / 1577~157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구름과 빛이 가득한 신비롭고도 기이한 배경과 길쭉길쭉하게 늘어진 신체,

화려하면서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원색 등은 매너리즘 화가 엘 그레코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하나님은 죽은 예수의 몸을 받쳐 들고 있다.

그들 주위로 날개 달린 천사들이 마치 새 떼처럼 부산스럽게 모여들고 있다.
염려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들의 표정은 감상자의 ‘공감’을 자극적으로 유도한다.


축 처진 상태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예수의 몸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노랑, 빨강, 파랑 그리고 초록 등의 생생한 색이 화면 곳곳을 채우는 동안

예수의 피부만큼은 말할 수 없이 창백해 보여 시선을 압도한다.


가슴에서 허리 사이에 난 작은 상처는 십자가 처형 당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빨리 덜어주기 위해 롱기누스가 창으로 찔러 생긴 것이다.


<수태고지> 캔버스에 유채. 315×174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수태고지>에는 노란 빛에 싸인 성령의 비둘기가 천상과 지상을 나누고 있다.
성령의 비둘기 바로 아래로 천사들의 머리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하다.


이 천사들의 형체는 구름과 이어지다 끊어지길 반복하며 감상자들을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심에 휩싸이게 한다.
오른편의 가브리엘 천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고 있고,
이에 마리아는 다소 놀란 모습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수태고지>. 캔버스에 유채 / 315×174cm / 1596~16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그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떠나기 전에 완성한 초창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의 화풍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베네치아 체류 시절에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자연주의적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비록 천정 어디선가부터 들이치는 모호한 빛 처리는 꿈이나 환상 등의 신비감으로 가득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후기에 그려진 그림보다 인체 왜곡이 훨씬 덜해 비교적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바닥의 타일과 중앙 출입문 밖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에서 보이는 잘 계산된 원근법은
화면 속 공간을 현실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그리스도의 세례>. 캔버스에 유채 / 350×144cm / 1596~16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그리스도의 세례>도 <수태고지>처럼 천상과 지상의 두 부분을 화면 전체 구성에 이용했다.
그림 상단에는 하나님이 갖가지 자세의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고, 하단에는 세례 요한이 세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례 요한은 조개에 물을 담아 예수에게 세례를 하고 있다.


종교화에서 조개는 종종 예수의 ‘빈 무덤’을 상징하므로 앞으로 그가 죽은 뒤 다시 부활하게 됨을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강한 빛과 함께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다.
천사들이 예수의 머리께로 들고 있는 붉은색 천이 이 길쭉한 화면을 구획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 캔버스에 유채. 312×169cm. 1597~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십자가 처형〉에는 흔히 이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인 마리아를 특별히 보살펴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화면 오른쪽이 사도 요한, 왼쪽이 마리아이다.
십자가 아래 예수의 발치를 지키고 있는 여인은 매음굴을 전전하다 회개한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일이 있는데, 그로 인해 주로 예수의 발과 가까운 곳에 그려지곤 한다.
그림은 좌우 대칭의 르네상스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상단에는 두 천사가, 중앙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그리고 하단에는 날개달린 천사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로 대칭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는 수건으로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있다.

〈오순절〉 캔버스에 유채. 275×127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 1절~13절에 기록된,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의 순간을 담고 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가 승천한 뒤 오순절을 함께 지내기 위해 모인 사도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이어 ‘불의 혀가 각자의 머리 위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강한 바람 소리와 불의 혀는 곧 성령 체험이자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쏟아내는 방언의 기적으로 해석되어
이후 이 작품은 ‘성령강림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된다.


엘 그레코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립, 강하고 거친 붓질과 연극 배우들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한 등장인물을 통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있다.


〈부활〉캔버스에 유채. 275×127cm. 1596~1600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9b실


〈부활〉은 〈오순절〉과 같은 크기로 제작되어 있다.

아마도 이 둘은 제단의 양측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가 든 깃발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단단하고 이상적인 신체를 살짝 벗어나 있다.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인 예수를 목격한 병사들은 소란스러울 만큼 과장된 자세로 현장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다.
놀라 나자빠진 병사의 몸과 공중에 떠 있는 예수의 몸이 서로 대조되며 묘한 긴장감을 유도한다.


현재 톨레도의 타베라 병원에 있는 조각상 〈부활한 예수〉는 엘 그레코가 직접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 그림 속 예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엘 그레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캔버스에 유채. 81.8×66.1cm. 15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왕실 입성은 실패했지만, 엘 그레코는 스페인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귀족들로부터 많은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그야말로 잘생긴 손이 압권인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는

‘스페인 신사’의 한 유형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레도에 체류할 당시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세르반테스가 엘 그레코와

자주 교류했다는 주장으로 인해 그가 이 그림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혹자는 톨레도 시장이었던 후안 데 실바 이 리베라 3세(Juan de Silva y Rivera III)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슴에 손을 얹은 자세는 맹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아래로 왕에게서 받은 메달이 보인다.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검은 당시 수준 높은 검 제작으로 유명한 톨레도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 제품으로 보인다.

〈우화〉 캔버스에 유채. 50.5×63.6cm. 15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8b실


〈우화〉는 한 소년이 막 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투박하고 거친 붓질이지만 어둠 속에서 환한 빛에 노출되었을 때 변화되는 피부색의 표현이 참으로 예리하다.


‘불씨를 붙인다는 것’을 성적 행위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원숭이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오른쪽 남자는 성적 방종을 의미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카를 5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35×283cm / 154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27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베네치아와 신성로마제국의 경계에 위치한 피에베디카도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베네치아로 이주해 처음에는 모자이크부터 시작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100세를 넘어섰다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는 허풍이 심해 태어난 연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장수한 화가로 피렌체나 로마와는 다른 베네치아 화풍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상을 정확한 선으로 묘사하여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잡아내는 것에 집중했던 피렌체나 로마에 비해,
그는 빛과 색의 완숙한 묘사에 더욱 치중하곤 했는데, 이는 스승으로 모셨던 벨리니 형제로부터 익힌 것들이었다.


세계적인 무역도시였던 베네치아를 근거지로 삼은 그는 값비싸고 귀한 안료들을

이탈리아 내륙 지방의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만큼 색을 사용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데생으로 형태를 잡은 뒤 색을 입히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붓으로 물감을 발라가며 자연스레 형태를 완성해내는 방법으로 작업하곤 했다.


그의 그림 솜씨는 베네치아를 넘어 유럽 각국의 군주와 귀족 들에게 알려졌는데,
그가 그린 당시의 초상화만 가지고도 궁정 인물사를 한 권쯤 쓸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 한 점 없는 자는 소위 유럽 실세 치곤

뭔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스페인까지 통치했던 카를 5세는 티치아노를 어찌나 신임했던지
그가 붓을 떨어뜨리자 친히 허리를 숙여 집어주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카를 5세의 기마상〉은 뮐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무찌른 황제의 위용을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을 빼고 봐도 완벽한 황혼녘의 풍경화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거친 말(자연)을 제압하는 영웅상으로,
훗날 궁정화가들이 그리는 많은 ‘황제 기마상’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티치아노의 기마상은 로마제국 시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 캔버스에 유채 / 192×111cm / 153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였던 초상화가 야콥 자이제네거가 이미 그렸던 그림을

다시 제작한〈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도 걸려 있는데,

이 그림에 반한 황제는 티치아노에게 기사와 백작의 작위까지 수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 캔버스에 유채 / 175×193cm / 1523~15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는 안드로스 섬 마을에서 벌어진

술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정중앙에는 하얀색의 그리스 옷차림을 한 남자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있다.


중앙 아래 한 여인이 한손엔 플루트를,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높이 쳐들어 술을 받고 있는데,
무릎에 놓인 악보에는 “술을 맘껏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의 가사가 적혀 있다.

중앙에 있는 남자의 높이 치든 포도주 병은 그야말로 ‘술에 대한 예찬’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티치아노가 참고한 고대 그리스 신화는 3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us, 190~?)의 저서
《상상(imagines)》에 기록된 것으로, 필로스트라토스는 “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는 것은 정신에 유익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당들의 핑계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술의 역효과 역시 티치아노는 놓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언덕에는 술에 곯아떨어진 한 사람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고,
그 아래 오른쪽 모퉁이에는 제 몸이 다 노출되는 것도 잊은 님프 하나가 널브러져 있다.


술 하면 음악이, 음악이 나오면 춤이 나오기 마련이라
화면 오른쪽에는 티치아노 특유의 ‘고급스러운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포도넝쿨로 만든 화관인데, 이는 디오니소스가 쓰고 다니던 것이다.

〈비너스를 경배함〉 캔버스에 유채 / 172×175cm / 1516~151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2실


〈비너스를 경배함〉은 오른쪽에 놓인 비너스(아프로디테) 상을 숭배하는 수많은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상단의 날개 달린 세 아이는 아마도 큐피드(에로스)를 포함한 님프들로 비너스의 상징인 사과를 모아들고 있다.


그림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결국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풍부한 생식력을 바탕으로 한 ‘풍요’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규모가 큰 유치원의 모습을 능가하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은 바로 그 사랑의 힘으로 생산된 결과물이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캔버스에 유채 / 129.8×181.2cm / 155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딸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왕이 딸 다나에를 탑에 가둔 사건부터 시작된다.
꽁꽁 가두어 그 어떤 남자와도 관계하지 못하게 하면 결국 외손자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희대의 바람둥이 신 주피터르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그녀의 몸을 적신 뒤 결국 다나에를 임신하게 만든다.


그림은 바로 그 황금비가 탑을 뚫고 들어와 그녀에게 닿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다나에를 ‘그 어떤 이유도 묻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백성’으로 해석하고

주피터르를 자신으로 생각한 듯, 이 그림에 크게 기뻐했다.


하녀로 보이는 노파는 왕이 베푸는 풍요로움, 즉 ‘금화’ 모양의 비를 앞치마로 한 가득 받고 있다.
좋게 보면 능력 있는 왕이 베푸는 일종의 ‘성은’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돈’으로 여자의 성을 사는 매음굴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본 뒤 “색채의 적용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드로잉 교육이 기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선과 형태보다 색채와 빛을 중요시한 베네치아 화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변신한 주피터르의 황금비는 미켈란젤로 식의 명료한 선을 거부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붓질 속에서 윤곽선을 잃고 오로지 ‘색의 유희’로만 존재한다.


빛과 색에 대한 뛰어난 감각은 다나에의 침실에 놓인 커튼이나 침대보, 노파 하녀가 입고 있는 옷 등의 질감을
예의 ‘성긴 붓질’만으로도 완벽하게 재현해놓고 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 캔버스에 유채 / 186×207cm / 155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4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무겁게 드리워진 구름과 그 사이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푸른색 하늘이 압권이다.
그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 옷차림의 사냥꾼 아도니스가 외출하려고 하자 비너스가 온몸을 다 바쳐 막고 있다.


큐피드는 자신의 화살통을 나무에 걸어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하다.
이 불길함은 결국 아도니스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비너스의 예감대로 아도니스는 사냥을 강행하다 결국 멧돼지에 물려 죽게 된다.
신화는 그날 그가 흘린 피가 땅을 적셔 피어난 꽃이 바로 아네모네라고 전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하늘에는 마차 하나가 지나고 있는데,
그곳에서 뿜어나온 빛나는 광채가 닿는 곳에 아마도 그 아네모네가 피어날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완성한 뒤, 비너스가 등을 보이지 않고 정면을 향하도록 그렸어야 했다며 아쉬움 가득한 글을 남겼다.
등보다 앞이 더 궁금한 남성 관람자들의 갈망을 티치아노가 뒤늦게 간파한 것이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 86×65cm / 1562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41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1576)는 100세가 되어도 질긴 고기를 뜯을 수 있다며 건강을 자랑했지만
실제로 그는 아흔이 못 된 나이에 당시 떠돌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럽 실세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신화, 종교, 역사화 등 그 모든 것에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군림한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자화상을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티치아노에게 색채 감각은 뛰어나지만 제대로 된 소묘가 부족하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정확한 선과 명료한 형태를 으뜸으로 치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륙 화가들의 편견에 가득 찬 평가에 불과하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닿는 빛이 그 본래의 색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모습을

예리하게 관찰해낼 줄 아는 그야말로 뛰어난 색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를 일러 색 감각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많은 색을 다채롭게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단출한 색 몇 가지만을 가지고도 다양하게 변주해 완벽한 데생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미묘한 지점들을 포착해내는 데 있다.


그는 “훌륭한 화가에게는 오직 세 가지 색, 검은색, 흰색, 빨간색만 필요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자화상에서도 역시 꼼꼼하고 성실한 세부 묘사를 많이 벗어난 그의 감각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붓이 닿은 흔적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형태감이 느껴진다.


뭉개진 물감층이 만들어낸 그의 수염은 손을 대면 그 부드러운 촉감이 그대로 전해질 듯하다.
카를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하사받은 두 줄 목걸이는 몇 번 툭툭 찍어낸 붓질만으로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목걸이의 찬란한 빛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미묘하게 그 음영을 드러내고 있어 사진보다 더한 극도의 사실감을 선사한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2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건초 수레〉 패널에 유채 / 135×190cm / 1516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현재 벨기에와 접한 네덜란드의 국경 도시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보스(Bosch)’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는
태어난 연대나 지도한 스승 혹은 후원자 등에 대한 기록이 무척 미미하다.


다만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을 정도로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
그 시대가 규범으로 삼는 그림보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그도 종교적 주제의 그림을 다수 그렸고, 〈건초 수레〉나 <쾌락의 정원>등에서 보듯
전통적인 교회 제단화 형식의 세폭화(triptych)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이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반인반수의 생명체를 화면 가득 채운다거나
엉뚱하고도 기발하며 때론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선정적이기까지 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그려 넣곤 해서,
과연 그의 그림이 교회에 세워질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이들 작품들을 소장했다는 교회에 대한 정보도 정확하지 않다.


왼편 날개 그림에는 상단에 하나님과 타락한 천사의 추락을 그려 넣었고,
그 아래로 ‘아담과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낙원에서의 추방’까지를 담고 있다.
가운데 그림은 시끌벅적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앙에 언덕처럼 높이 솟아 오른 건초더미는

“세상은 건초 수레와 같다. 우리 인간은 될 수 있는 한 더 많이 갖고자 욕심낸다”라는
네덜란드의 속담에서 비롯된 것으로 ‘탐욕’을 상징한다.


그림 하단에는 건초 더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나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천사의 존재,
심지어 하늘 높은 곳에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예수의 존재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어리석은 이들이 흥에 겨워 노래하고 있다.


수풀 속에는 희희낙락 사랑을 나누는 커플도 있다. 사다리를 놓고 수레 위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바로 그 곁에는 교황과 황제까지 말을 타고 탐욕의 건초 수레를 따르는 것이 보인다.


중앙 그림 오른쪽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물고기나 머리 잘린 모습 등은 바로 인간이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결국 닿는 곳은 오른쪽 날개에 그려진 불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일곱 가지 죄악〉 패널에 유채. 120×150cm. 1480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이 작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일곱 가지 죄악인

‘교만, 인색, 음욕, 질투, 탐식, 분노, 나태’를 그린 것으로, 탁자 상판을 장식하는 그림이었다.


중앙 그림에는 하나님의 동공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예수의 모습이 비친다.
바로 아래 “주의하라, 주의하라,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Cave, Cave, Deus Videt)”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전체 그림의 위아래 띠에 적힌 성경 <신명기>의 구절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32장 28, 29절)
그리고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32장 20절)의 내용과 이어진다.


동공 바로 아래 칸에는 옷까지 벗어던지고 싸우는 두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로 ‘분노’이다.
‘교만’의 칸에는 보석함을 곁에 둔 한 여인이 새로 산 모자를 뒤집어 쓴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로부터 거울은 허영과 교만의 상징이었다.

심지어 그 거울은 머리는 늑대이고 다리는 메뚜기인 괴물이 들고 있다.


‘음욕’의 칸에는 남녀가 광대를 대동한 채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태’에는 성경과 묵주를 들고 교회에 가기 위해 여자가 남자를 깨우는 모습과 벽난로 앞에서 자고 있는 개가 있다.
주인 남자나 개나 게으르긴 마찬가지다.


‘식탐’의 칸에는 식탁 가득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 그리고 술을 통째로 들이키는 남자가 보인다.
아이가 칭얼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탐욕’은 재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난한 자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모습이다.

‘질투’에는 자기 가까이에 있는 것은 그냥 둔 채 남자가 손에 쥔 닿지 않는 뼈만 쳐다보며 짖는 개들이 있다.


이 질투 장면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인데, 창 안의 부부 역시 남에게 일을 시키고

편히 노는 잘 차려입은 남자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구혼을 거절당한 부자가 처녀와 속삭이고 있는 남성을 질투하며 쳐다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각형의 모퉁이, 네 개의 원에는 사람이 죽어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 왼편 상단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막 임종하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의 곁에는 흰색 천사와 검은색 악마가 함께 있다.


오른쪽 상단은 최후의 심판으로 죽은 자들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동안

예수가 천사들과 12사도를 대동하고 심판하고 있다.
아래에는 각각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패널에 유채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히에로니무스 보스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가 그린 악마 같은 생명체들 중 일부는
중세부터 죄의 심판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도서 등의 필사본에 삽화로 그려진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스는 그 삽화본의 악마들에 더 선명하고 짙은 색을 입혔고, 그 형상을 더욱 비틀고 과장했다.
그리고 수많은 유혹과 그 유혹에 지배되어 곧 다가올 운명의 날을 애써 외면하는

인간 군상의 타락을 무서우리만치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 그림은 누가 주문했는지, 또 어떤 의도로 제작했는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속 장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하게 주장하는 바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쾌락의 정원〉이라는 제목도 화가가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 사가들이 붙인 것으로,

과연 타당한 제목인가에 대한 이견도 적지 않다.


세면의 제단화 형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그림 역시

어느 교회의 제단에 걸려 있었는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왼쪽) 패널에 유채 / 220×195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왼쪽 날개 그림에는 아담과 이브의 탄생을 담았다.
또 앞으로 인간과 함께 살아가게 될 온갖 종류의 동물이 역시나 갖가지 종류의 나무나 풀 등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중에는 더러 눈에 익숙한 생물도 있지만, 상상에나 존재하는 괴이한 모습의 것들도 많고,
부리 달린 새가 책을 읽는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행동이나 몸짓들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가운데) 패널에 유채 / 220×390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중앙 면에는 그야말로 삶 그 자체를 즐기는 여러 군상이 그려져 있다.
짝을 지은 남녀가 도색 잡지에나 나올 듯한 포즈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먹고 죽어도 남을 만큼 큰 딸기도 눈에 띄는데, 이 그림에 〈딸기 그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딸기나 앵두 등 과장된 크기로 그려진 과실은 비뚤어진 인간의 욕정, 탐욕, 그리고 그로 인한 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도처에 먹을 것이 떠다니는 이곳은 한편으로 보면 풍요로움이 넘치는 복된 공간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마구잡이로 해소하고 있는 ‘타락과 과욕의 정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다소 뜻밖의 해석도 존재한다.
빌헬름 프랑거(Whilhelm Fraenger)라는 학자는 이 그림이 인간의 타락상을 나열한 것이라기보다는

보스가 몸담았다고 추정되는 자유정신형제회에서 말하는 ‘성적 혼교를 통해

아담 이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실천을 위한 그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오른쪽) 패널에 유채 / 220×195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왼쪽 날개 그림이 창조의 순간이고 중앙이 쾌락의 정원이라면, 오른쪽 날개는 이 모든 일의 귀결인 심판의 세계를 담고 있다.
화면 중앙 하얀색 나무다리 모양에 둥그런 몸통을 가진 이상한 형태의 존재가 눈에 띄는데,
자세히 보면 심각한 표정을 한 어느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그림 중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 얼굴은 화가 자신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에 사람의 귀와 같은 형태에 뾰족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다.

아마도 귀를 뚫는 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남성 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나 동물의 내장 혹은 신체 일부 같은 이상한 형태들,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특수한 고문 장치,
사람이 사람을 먹고 배설하는 장면 등은 보스가 상상하던 지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중앙 그림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다 맛본 그 인간 군상들은 이제 속수무책으로 지옥의 기계 속에 고통스레 끌려들어간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지창조(재단화 닫힘면) 패널에 유채 / 220×110cm / 150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이 작품은 평상시에는 양쪽 날개를 접어 닫아놓게 되어 있는데,

닫았을 때의 면에도 심상찮은 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닫힌 면 상단에는 각각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와 “한마디 명령에 제자리를 굳혔다”라는

《시편》33장 9절의 글귀가 적혀 있다.

수정 구슬 속에 들어 있는 세계는 그만큼 약하고 부서지기 쉬워 보인다.
왼쪽 면 상단 귀퉁이에는 책을 들고 앉은 창조주가 있고,

책은 하나님이 《시편》의 글처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중임을 상기시킨다.


첫째 날에는 빛, 둘째 날은 물, 그리고 셋째 날에 땅과 식물을 만든 하나님은 아직 해와 달은 만들지 않은 상태이다.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고심이 얼마나 컸을까 싶지만,

정작 그렇게 만들어진 피조물들은 앞면의 그림에서 보듯 죄에 허덕이고 있다.

안토니스 모르 〈메리 튜더의 초상화〉 패널에 유채 / 109×84cm / 155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실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 Van Dashorst, 1516?~1576?)는 영국 체류 시절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을 비롯해 왕실 초상화를 다수 그렸다.


죽어서도 영원히 남게 되는 ‘흔적’으로서의 기념품,

경우에 따라선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사를 진행하는 정략결혼을 위해 보내지곤 하던 왕실 초상화들은 사진이 없던 시절,

사진만큼이나 정확하되 오늘날의 사진 보정술만큼의 교묘한 ‘성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화가가 아무리 열심히 그렸어도 주인공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치껏’이 요구되는 왕실 초상화 작업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 할지라도 손을 떨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그의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사이에서 낳은 딸로
영국 여왕이자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왕비이기도 했다. 메리 튜더와 펠리페 2세는 꽤 가까운 혈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족보를 왕창 꼬아 놓는 근친혼이었지만,
사실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가족끼리 그러면 안 돼!’ 수준의 금기쯤은 이권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른여덟까지 독신을 고수하던 메리가 굳이 스물일곱의 애송이 연하남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수준의 외교적 정략에 의한 것이었다.


<메리 튜더의 초상화>는 그녀가 펠리페와 결혼하던 해에 그려졌다.
그림 속 메리 튜더는 튜더 왕가를 상징하는 장미를 가슴에 안은 채,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공주와 막달레나 루이스〉

 캔버스에 유채 / 200×129㎝ / 1585~158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훗날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던 안토니스 모르는 프로테스탄트에 동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종교재판에 회부될 처지에 놓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궁정을 떠나게 되는데,

산체스 코에요(Alonso Sanchez Coello, 1531~1588)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코에요의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공주와 막달레나 루이스〉는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공주와
그녀의 보모이자 궁정의 시녀이기도 했던 막달레나를 함께 그린 초상화이다.


막달레나는 펠리페 2세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덕분에 왕이 국내외 순방을 떠날 때 수행하기도 했고,
가끔은 직언을 서슴지 않아 왕실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플랑드르 화가답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고 꼼꼼한 터치로 그려진 공주의 의상은
막달레나가 입은 검은색의 수수한 옷과 대비되면서 더욱 압도적으로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이들은 서 있거나 무릎을 꿇은 자세의 차이뿐 아니라,

각자의 배경이 되는 고급스러운 커튼과 칙칙한 벽으로도 대비를 이룬다.


이사벨 공주의 손에는 이 모든 부와 권력을 가능케 해준 아버지

펠리페 2세의 얼굴이 새겨진 카메오가 들려 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7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페드로 베루게테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 패널에 유채 / 154×92cm / 1493~1499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7b실


페드로 베루게테(Pedro Berruguete, 1450~1504)는 스페인 출생이지만 이탈리아로 건너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의 후원을 받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조반니 산티 등과 함께

그곳 궁정 벽화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에서 전수받은 르네상스 회화의 전통을 스페인에 이식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말년에 그는 주로 톨레도에 머물면서 대성당이나 부속 수도원을 장식하는 벽화를 그렸다.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St. Dominicus de Guzman, 1170~1221)이 툴루즈에서 이단인 알비니파를 화형시키는

13세기 초엽의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전통적인 복장인 하얀 옷에 검은 망토를 두른 채 한 손에 백합을 쥐고 서 있다.
그림 속 그는 이단자들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역시 도미니쿠스 수도사 복장을 한 남자가 이단자를 끌고 온다.
그림 오른쪽에는 화형식 모습이 보인다.


도미니쿠스가 서 있는 단상 등은 원근법에 입각해 그려졌지만,

인물 군상은 그림 전체의 비율에 그다지 맞지 않아 보인다.


성 도미니쿠스 데 구츠만은 로마의 스페인 총독 아들로 태어나 발렌시아 대학에서 수학한 뒤

성직자가 되어 평생 이단과 맞섰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창시했다.


화가들은 그의 현명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이마에 별을 단 모습으로 그리곤 했으며,

그가 순결한 삶을 살았다 하여 백합과 함께 그리기도 했다.


종교재판은 원래 12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 ?~ 1185)가

이단으로 지목된 카타리파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1478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해

통일 왕국을 이루면서, 무어인들의 침략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유대인과 무슬림을 내쫓기 위해

더욱 잔인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종교재판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는 방편으로도 이용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은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적을 없애거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 스페인 지식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은 1834년 이사벨 2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로베르 캉팽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폰 베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현재의 벨기에 지역 투르네에서 태어났다.

한동안 이 화가에 대한 정보가 없어 그저 ‘플랑드르의 거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와 함께 세심하고 정교한 선과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구사하는

플랑드르 초기 회화의 전통을 개척하고,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같은 제자를 대가로 키우기도 했다.


아래〈성녀 바르바라〉와 함께 이 두 작품은 세 폭으로 된 제단화의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중앙 그림은 현재 분실된 상태이다.


〈세례 요한과 프란체스코파의 하인리히 본 베를〉 속 세례 요한은 성경의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마태복음》 3장 4절의 구절처럼 동물의 털이 달린 가죽옷을 입고 있다.


그는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한 예수를 의미하는 어린 양을 대동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다.

그림 속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등을 지고 앉아 기도에 열중하는 수도자이자

이 그림의 주문자이기도 한 하인리히 폰 베를(Heinrich von Werl)을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지금은 분실된 중앙 그림 속 누군가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중일 것이다.
그림 속에는 오목한 거울이 보이는데, 이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속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에는 창틀이 비치는데, 가운데 십자가 모양이 예수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로베르 캉팽 〈성녀 바르바라〉 패널에 유채 / 101×47cm / 143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성녀 바르바라〉는 얼핏 보면 수태고지의 마리아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그림

〈수태고지〉를 고스란히 본떠 다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백합이나 빈 물병 등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녀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지물이라 할 수 없다.
성녀 바르바라는 4세기 초 막시미아누스 황제 시절에 산 어느 작은 나라의 공주였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바르바라의 아버지는 미모가 출중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가두어놓았으나 그녀를 흠모한 구혼자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정작 바르바라는 탑에 갇혀 있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해 자신이 갇힌 탑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창을 내도록 건축가에게 부탁할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개종에 크게 노하여 딸을 직접 사형시킨다.
이 그림에서 바르바라를 상징하는 것은 창 너머 멀리 펼쳐진 풍광 속에 우뚝 서 있는 탑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신앙 같은 난롯불 위 벽감에는 삼위일체의 조각상이 걸려 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십자가에서 내리심〉 패널에 유채 / 220×262cm / 14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8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은 투르네에서 태어나

로베르 캉팽의 공방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 뒤 브뤼셀로 이주해 그 도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면서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쌓아

15세기 플랑드르 최고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벨기에에 위치한 작은 도시 국가인 플랑드르는 모피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14세기 플랑드르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해 있던 부르고뉴 공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나라를 합치고 세를 확장해 현재의 네덜란드 전역을 지배했다.


이 나라는 정략결혼을 다시 감행해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인근 지역을

광범위하게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하나가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의 왕가를 잇게 되는데,

이로써 부르고뉴 일대는 자연스레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의 강압 정치에 맞서 독립전쟁을 선포하지만,

벨기에를 포함한 남부 지역은 이내 스페인에 백기를 들었고
반면에 오늘날의 네덜란드에 속하는 북부 지역은 전쟁을 지속해 독립에 이르렀다.


프라도 미술관의 왕실 소장품 중 네덜란드 출신 화가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바로 스페인과 이 나라의 불편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는 십자가의 나무 기둥에 사다리를 놓고 예수를 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을 감싸던 원래의 액자 틀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지만,

조각된 목재를 표현하고 있는 그려진 액자 틀이 이를 대신해주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그려진 틀과 마찬가지로 도금된 목재로 묘사되어 있으며,

양쪽 모서리에는 곡선으로 굽이치는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어두운 갈색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인물들이 위치하고 있는 얕은 공간을 암시한다.


예수를 포함하여 이 작품에는 총 열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좁은 나무상자와도 같다.


인물들은 옆으로 길고 얕은 공간 속에서 입체적인 깊이 없이 평면적으로 병렬 배치되어 있으며,

각자 다양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은 당대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던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사실적인 공간과 자연주의적인 세부묘사를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도상적 전통을 과감하게 바꾸고
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구성을 창출해냈다.


사실상 이 작품의 공간은 매우 불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양쪽 모서리의 장식무늬 뒤로 가려져 있는 얕은 공간은 인물들의 발 밑에 보이는 식물이 있는 전경의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같은 공간은 작품의 가장 뒤쪽, 사다리 위에 올라타 있는 인물로부터 앞쪽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열 명의 인물들을 모두 포함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작가가 설정한 모호한 공간설정은 분명 의도적인 장치였다.
로지에르 반 데르 바이덴이 작품 속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할만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제한하고 좁은 공간을 설정함에 따라

관람자는 빽빽하게 뭉쳐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그룹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그 순간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슬픔의 감정을

극도로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커다란 사선을 이루는 두 개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죽은 예수와 그를 받쳐 들고 있는 두 인물,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은 예수의 아래쪽에 쓰러져 있는 성모 마리아와 역시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두 인물이다.


이 같은 구성은 양 끝에 위치한 성 요한(St. John)과 막달라 마리아(Magdalen)에 의해서 괄호로 묶이고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성 요한은 무릎을 굽히며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에 젖어 온 몸을 비틀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죽은 예수의 자세는 기절한 성모 마리아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된 자세는 표현적 효과를 위한 장치이며, 또한 마리아의 공동수난(compassion),

즉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는 순간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은 예수의 손과 활기 없이 축 늘어진 마리아의 손은 서로 닿을 듯 가깝게 그려져 있다.
열 명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윤곽선은 다소 단순화되어 작품 속에서 리드미컬한 선적 패턴을 형성하며

다양한 색상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스물여섯 살 뒤러의 초상화〉 패널에 유채 / 52×41cm / 1498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15, 16세기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문화를 부흥하고 있는 동안

독일 인근 지역은 아직도 중세적인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에는 후손들이 다시 재조명해 부활시킬만한 고대 로마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독일 지역은 계승하고 싶은 직계 선조들의 수준 높은 문화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 는

자국의 문화적 후진성에 깊은 시름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가가 소위 인문학자의 수준으로까지 격상하는 동안 아직 독일은

그들을 그저 손재주 좋은 기술자 정도로만 치부하는 세태도 못마땅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금세공업자인 아버지의 뒤를 잇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몇 년의 도제 생활을 거쳐 드디어 꿈에도 갈망하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뒤러는 독일 최초의 이탈리아 유학파로서 이 지역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유입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자의식 강한 화가가 창 아래 “1498, 내 모습을 그렸다.


난 스물여섯 살의 알베르트 뒤러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초상화와 함께,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패널에 유채 / 209×81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두어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알브레히트 뒤러는 〈아담〉과 〈이브〉에서 보는 바

인체를 완벽한 비율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는 르네상스 회화의 기법에 통달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플랑드르나 독일 지역의 회화는 다소 딱딱하고 너무나 정교해서 종종 오히려

사실성을 떨어뜨리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뒤러는 유려한 선과 부드러운 음영 처리,

자연스럽게 몸매를 강조하는 자세로 누드의 아름다움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알브레히트 뒤러 〈이브〉 패널에 유채 / 209×80cm / 150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누드가 금기시되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다다른 화가들은 단순하게 ‘훔쳐보기’라는 관음증적인 욕구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심의 고취를 위해서’라는 아주 탄탄하고도 그럴싸한 명분을 댈 수 있는 존재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애초에 옷이라는 것을 입고 있을 리 없던 아담과 이브는 그런 점에서 적격이었다.
이 그림은 독일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2미터 크기의 대형 누드화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발가벗은 몸을 그린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마을로 돌아온 뒤러는 우려와는 달리 단번에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다.
미술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기 짝이 없다고 탓하던 뉘른베르크는 그를 시의원으로까지 추대했으며,
유화보다 싸지만 대량 판매가 가능한 판화 작업에도 성공하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는 다 누리며 지냈다.


한스 발둥 〈인간의 세 시기〉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한스 발둥(Hans Baldung, 1484?~1545)은 독일 슈바벤의 그뮌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제자가 되어 그로부터 판화 기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뒤러의 공방에 이름이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초록색을 뜻하는 ‘그린(Grien)’이라는 별명을 붙여 한스 발둥 그린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의 제단화 등 종교화부터 초상화, 태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말년에는 종교개혁가 루터를 추종하는 신교도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 시의회 의원까지 역임했다.


뒤러가 절대적으로 신임한 제자였던 만큼 그의 작품은 상당 부분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선망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들의 완벽한 균형감이나 조화로움

그리고 인체를 조각처럼 이상화하는 작업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그는 이 작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그래서 오히려 더 관능미가 풍기는 누드를 주로 그렸다.


〈인간의 세 시기〉는 그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 아기 시절을 거쳐 성숙한 여인의 시기가 지나면 노년이 된다.


이 세 시기를 거친 자들은 모두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에 이끌려간다.
해골은 당시 ‘허무’를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 양식에 자주 등장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 앞에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노년의 여인은 죽음을 앞두고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처녀 시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오른쪽 화면 상단에 십자가가 보인다. 화면 아래 왼쪽의 올빼미는 애도나 죽음을 의미한다.

한스 발둥 〈삼미신〉 패널에 유채 / 151×61cm / 1541~154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5b실


〈삼미신〉은 주피테르(제우스)와 에우리노메 사이에 태어난 딸들로 음악에 능통했다.

류트나 비올라가 그려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두 여인은 책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음악만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능력,

즉 지적 능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하단의 아이는 악보를 펼쳐놓고 백조와 함께 노는데,

고대인들은 새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 발둥이 그린 이 〈삼미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속 여신들처럼 우람하고 조각적인 몸이 아니다.
그저 매끈하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무게감보다는 경쾌함이 더하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1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성모 마리아의 장례식〉 목판에 유채 / 54.5×42cm / 1462년경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간중심적 문화를 재탄생시키는 르네상스

(Renaissance,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의미다)를 맞고 있었다.


중세시대 미술, 특히 회화는 대상을 자연스럽고도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이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단단한 입체감을 입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으면서부터였다.


파도바 출생의 만테냐는 만토바를 지배하는 루도비코 곤차가(Ludovico Gonzaga) 후작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곤차가 가문의 예배당을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림은 외경에서 전해지는 성모의 죽음을 주제로 했다.

그림 속에는 총 열한 명의 제자가 있다.

 
원래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인데,

예수를 은전에 팔아넘긴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다를 제외하면 숫자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화가들은 유다로 인해 생긴 빈자리를 기독교인을 박해하다가 개심하여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한 ‘사도 바울’로 채우곤 했다.


만테냐가 제자를 열한 명으로 그린 것은 유다의 부재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활한 예수를 도저히 믿지 못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토마스를 위해 예수는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게 하여 확인해준 적이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마리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어 성모가 승천하는 장면마저 목격하지 못해 또 한 차례 의심을 품게 된다.


이에 마리아는 토마스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승천하는 순간 허리띠를 토마스에게 던져준 일화가 있다.
만테냐는 토마스를 제외함으로써 이어질 그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다.


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게 모이는 타일의 모양은 만테냐의 원근법에 대한 관심과 기량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창 밖에 그려진 풍경은 만토바의 당시 모습을 꼼꼼하게 담고 있어 지형학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마리아의 죽음은 평평한 2차원의 화면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그림 가장 왼쪽에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13세기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가 쓴 《황금전설(Legenda Aurea)》은 기독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마리아는 자신의 하관식 때 요한으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도록 명했다.
종교화에서 종려나무는 대체로 순교자들의 승리의 상징물로 통한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천사〉 패널에 유채 / 74×51cm / 1475~147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e Messina, 1430~1479)는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플랑드르에서 발명한 유화를 베네치아를 통해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도입한 화가다.

그는 플랑드르 지역인 브뤼주에서 잠시 활동하면서 유화 기법에 크게 열광했고, 이후 자신의 고향 시칠리아로 건너온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로부터 유화를 이용한 정교한 표현의 ‘플랑드르 회화’ 기법을 습득하였다.


그의 무덤에는 “물감과 기름을 섞어서 이탈리아 회화에 화려함과 내구성을 선사해준 선구자”라는 글이 적혀 있다.

 유화는 기름에 물감 안료를 섞어 사용하는 기법으로,

시간이 지나도 심하게 변색되거나 훼손되지 않아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뿐 아니라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치밀할 정도로 세밀한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을 일구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랑드르 회화는 붓이 아니라 거의 바늘 끝으로 그린 듯이 정확하고 꼼꼼하게 대상을 묘사했다.
따라서 작품 속 예수의 땀과 고통에 젖은 머리칼과 코와 턱에 듬성한 수염은 만질 수 있을 듯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죽은 예수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아기 천사의 고운 머리칼, 날개 결,

예수의 몸을 두르고 있는 천 역시 사실적인 미감을 마음껏 발휘한다.


또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고통 속에 막 숨을 거두느라 채 입을 다물지 못한 예수의 모습과

이를 슬퍼하는 아기 천사의 애절한 표정을 기품 있게 그려냄으로써,

다소 도식적인 느낌이 드는 플랑드르 회화보다 한발 앞서 있다.


풍부하고도 자연스러운 표정, 조각처럼 단단한 형태를 갖춘 예수의 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화면 전체를 골고루 밝히는 고운 빛과 그림 상단 짙푸르다가

아래로 갈수록 점차 옅어지는 하늘색의 부드러운 변화는
색과 빛의 표현에 능숙했던 베네치아 화가들의 전통을 잘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배경에 그려진 풍경은 그의 고향 마을 메시나를 담은 것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예수와 천사에 비해 이 배경은

컴퓨터 그래픽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나치게 정교한데, 그래서인지 딱딱한 느낌마저 든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배경 부분과 다소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보이는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가 아니라 제자이자 아들인 야코벨로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하힘 파티니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 패널에 유채. 64×10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몇몇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풍경은

그림 속 인물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한다거나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스 북쪽의 화가들은 그림 속 풍경의 비중을 훨씬 높이곤 했다.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요하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 1480?~1524)는 북유럽 최초의 풍경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룬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고,

실제 자연을 그린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 말하는 풍경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어떤 지역의 풍광을 마치 새처럼 높은 곳에서 바라보듯 펼쳐 보이고 있어서

그림 속 일화들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이다.


화면 왼쪽의 낙원으로 굽이치는 강은 레테의 강이다.
생을 다한 이가 이 강의 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그림 속 낙원에는 천사들이 유유히 산책을 하고 있다.

정중앙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스틱스 강 위에 떠 있는 카론의 배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


배는 아마도 그림 오른쪽의 지옥을 향하는 듯하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과 더불어 괴이하게 생긴 건물 안에 머리가 셋인 개가 버티고 있는데,

이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이다.

요하힘 파티니르와 캉탱 마시 <성 안토니오의 유혹> 캔버스에 유채. 155cm×173cm. 1520~152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56a실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파티니르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캉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31)와 함께 그린 그림으로, 파티니르는 풍경을 그리고 캉탱 마시는 인물들을 그렸다.


성 안토니오는 3세기경의 수도사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스무 살 시절부터 깊은 산속에 홀로 살면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했다.


화가들은 그가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들을 자주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이 그림 속 성 안토니오에게 닥친 유혹은 바로 ‘미인계’다.


괴물처럼 흉측한 얼굴의 노파는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기괴한 노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노파 덕분에 성 안토니오를 유혹하는 젊은 미인의 아름다움이 한층 강조된다.


이 그림에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모습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이 있는 풍경〉보다는 크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시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어느 지방의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종교화이지만 풍경화이고, 반대로 풍경화이지만 결국 종교화인 셈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첫 번째〉패널에 템페라 / 83×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가득 받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종교적인 이유로 한때 붓을 꺾기도 했지만 그는 중세 동안 금지되다시피 한 고대 그리스 신화를 그림으로 옮김으로써
고대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수를 펼쳐보인다.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지오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에 나오는 일화를 담고 있다.


라벤나의 오네스티 가문 상속자 나스타조는 지체 높은 신분의 여인 파울라를 지극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그를 거절했고, 이에 나스타조는 상사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로 하여금 잠시 라벤나를 떠나 있기를 권했다.
첫 그림 왼쪽 모퉁이에는 라벤나를 떠난 나스타조가 머물던 천막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 옷을 입은 나스타조는 망연자실한 채 숲을 산책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나뭇가지를 집어 개를 쫓는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그날 나스타조는 산책을 하다 우연히 칼을 든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알몸의 여자를 쫓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여인이 기사가 풀어놓은 사냥개에게 잡혀 쓰러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그 개를 물리치려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두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2×138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인물과 사건을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려서 마치 오늘날의 사진과도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이라면, 이 그림은 그런 자연주의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동일한 인물이 한 화면에 두 번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득한 나무들 역시 요즘 동화책에서 흔히 보듯 도식적이어서 사실성보다는

그림으로서의 장식적 기능에 더 충실한 것 같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세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나스타조는 그 기사로부터 슬픈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기사는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여인이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얼마지 않아 여인도 죽게 되는데 기독교에서 금하는 자살을 한 기사와

그를 죽게 만든 여인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벌을 받게 된다.


금요일마다 남자는 여자를 쫓아 칼로 찔러 죽인 뒤 그녀의 내장을 꺼내 개에게 던져주는 일을 반복하고,

그녀는 늘 그런 죽임을 당하면서도 다시 살아나 매번 다시 쫓기고 죽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나스타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쫓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그 장소에서 성대한 파티를 연 다음

자신이 흠모하는 파울라를 초대하여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하였다.

파울라는 비로소 마음을 열고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네 번째〉 패널에 템페라 / 83×142cm / 1483년 / 개인 소장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7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8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수태고지>. 목판에 템페라 / 194×194cm / 142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56b실


프라 조반니(Fra Giovanni, 형제 요한)라 불리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400~1455)는

한 세기 후 미술가이자 저술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르네상스 시절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에 대해 기술한 <예술가 열전>에

‘천사와 같은 화가’라는 뜻의 ‘픽토르 안젤리쿠스(Pictor Angelicus)’라고 소개되었다.


현재 그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같은 형제)’

혹은 ‘일 베아토 안젤리코(Il Beato Angelico, 축복받은 천사 같은 사람)’로도 부른다.


그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로 출발하여,

훗날 피렌체 인근 도시 피에솔레에서 수도원장 직에까지 오른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신의 뜻을 전하라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가르침을 ‘그림’을 통해 수행했다.

그림으로 기도를 대신한 것이다.


<수태고지>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피에솔레 수도원에 속한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다.
성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뒤 충만한 신앙심으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뜻하지 않은 방문과 함께 ‘임신’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속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식에도 순종의 예를 다하고 있다.


화면 왼쪽 모퉁이에서 시작된 빛은 성령을 의미한다.

중앙의 기둥을 통과하는 빛줄기 안에 비둘기 한 마리가 보인다.


비둘기 역시 성령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임신은 바로 이 성령의 힘, 이른바 은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앙 기둥 윗부분에 하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가슴에 포갠 두 팔은 ‘순종’을 의미한다.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위치한 공간은 ‘로지아’라고 부르는데 한쪽 면은 벽으로,

반대쪽은 기둥을 세워 외부와 연결되도록 트여놓은 곳을 말한다.
로지아의 천정은 푸른 하늘과 황금빛 별들로 장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화면 왼쪽의 외부세계이다.

두 남녀가 맥 빠진 모습으로 걷고 있고, 천사는 그들을 재촉한다.


이들은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예표론(Typology)’이라 하는데,
예표론적으로 보면 아담과 이브로 인해 만들어진 원죄는

바로 그 ‘죄’ 없이 잉태되어 세상에 오실 예수에 의해 사해진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 만든 원죄의 늪에 빠진 인류는

‘순종하는’ 자로 인해 비로소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미술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유럽 인구의 대다수가 문맹이던 시절, 교회에서 성서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려서 붙이거나 벽화를 그리는 것,

혹은 조각을 하거나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넣는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각예술이 메시지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서의 내용이나 교회 쪽에서 신도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 외에도,

어떻게 하면 사람을 실제처럼 도톰해 보이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하면 3차원이라는 공간을 평평한 2차원 공간에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화가들의 시도가 쌓여서 공간의 입체감이나 인체의 볼륨감 등이

완성된 형태로 눈에 띄게 나타났던 때가 보통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다.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도 이런 기법을 잘 구사했다.
‘프라(Fra)’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수사라는 뜻인데, 고로 이 분은 수사이면서 화가였다.


‘수태고지’라는 단어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예수를 임신(수태)한다는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알려 준다(고지)는 뜻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에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성서를 읽고 있었는데(무릎 위에 조그마한 책이 놓여 있다),

천사는 그녀가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냐며 놀랐으나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것이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왼쪽 위에는 하느님의 손이 보이고 거기에서 장풍처럼 빛이 나와 마리아에게 오는 것이 보인다.


그 빛 가운데에는 흰색 비둘기가 있는데, 성령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늘 흰색 비둘기였다.

<수태고지> 중 비둘기 부분


마리아의 집을 보면 기둥 여러 개가 뒤로 갈수록 작아 보이는데, 이것이 원근법이다.
두 개 이상의 사물이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을 때 앞의 것이 커 보이고 뒤의 물건이 작아 보이도록 그리는 것,

즉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림에서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거나 가장 커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람이나 사물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시기에도

다른 지역에서는 중요한 것을 가장 크게 그리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의 크기를 달리 표현하는 것을 단축법이라고 한다.
마리아의 무릎 부분이 엉덩이 부분보다 앞으로 나오면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방 안의 긴 벤치 같은 것을 표현한 방법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이나 단축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알았지만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얼굴이나 목 부분을 부드러운 음영으로 처리한다든지,

뺨의 발그레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생동감과 볼륨감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나무판에 템페라(안료를 달걀노른자에 섞는 방식)로 그려졌다.
나무라는 재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면서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당시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무판을 삶은 뒤 최소 십 년 이상을 말렸다고 한다.


당시에 캔버스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의 크기만큼 넓적한 나무는 없을 테니 나무판 여러 개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천을 한 겹 씌우고 밑칠을 해서 최대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의 특징은 달걀노른자를 생각하면 된다.


달걀 프라이를 먹다가 안 익힌 노른자가 그릇에 묻었을 때

재빨리 설거지하지 않으면 씻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경험은 한 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템페라화도 그렇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빨리 마르고, 한번 마르면 좀처럼 물감이 떨어지지 않아서 견고하다.


그러나 덧칠이 불가능하고 수정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템페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매우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후광, 가브리엘 천사 뒤에서 나오는 빛,

성령에서 나오는 빛 등은 금색으로 칠해졌는데, 이것은 금색이 나는 무언가가 아니고 진짜 금이다.


금화를 곱게 갈아서 가루 상태로 만든 다음에 칠했다.
금화를 갈아서 그림용 가루로 만드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림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가,

얼마나 구도가 혁신적인가 등으로도 가치가 매겨지지만 표면 자체의 물질의 가치가 꽤 높은 경우도 많다.

금도 금이지만, 마리아의 치마에 쓰인 푸른색은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라는 파란색의 준보석을 갈아서 칠한 것이다.


아주 귀한 파란색이었기 때문에 아무 곳에나 쓰지는 않았고,

성모 마리아를 그릴 때만 주로 쓰던 비싼 물감이다.


집 밖의 풀이 우거진 정원에는 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인류의 첫 번째 남녀, 아담과 이브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인 것 같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남녀 모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아기를 낳을 때 고통스러우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옷을 입었고, 낙원에서 쫓겨났다.
이 장면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인데,

아담과 이브가 살던 때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순간은 몇 천 년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


수태고지 장면과 아담과 이브가 한 화폭에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담과 이브는 첫 번째 남녀로 인류의 대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인류가 지은 죄를 씻어 줄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은 프라도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 가도 볼 수 있는데,
자꾸 반복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은 교회 측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메시지라는 의미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앞의 세 개의 그림


이 작품의 아래를 보면 조그마한 그림들이 만화처럼 ‘조르륵’ 붙어 있는데,

제단화 밑에 작게 그려진 이런 부분을 ‘프레델라(predella)’라고 부른다.


프레델라에는 주로 위쪽 큰 그림의 주인공에 대한 부연설명이 나온다.
우리가 보는 그림의 주인공은 마리아이므로 이 프레델라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프레델라의 가장 왼쪽 그림, 그중에서도 방 안의 장면은 아기 마리아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 옆은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는 장면이다.


사실 마리아가 남편인 요셉과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요셉이 누구의 자손이며, 목수였고 성실한 남자였다는 설명 정도만 나와 있다.


그런데 성서의 내용으로만 온갖 그림을 다 그리기에는 세부사항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고로 삼곤 했던 것이 ‘외경(Apocrypha)’이다.


외경은 성서처럼 쓰이긴 했으되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성서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책이다.
그래서 야사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요셉이 어떻게 하여 마리아의 남편감이 되었는지도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마리아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마리아와 누가 결혼을 할 것인지가 동네 사람들의 이슈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네 사제는 ‘마리아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다들 나무 작대기를 하나씩 준비해서 회당으로 모이시오.

가장 적당한 남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서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날 것이오’라고 공고를 했다.


온 동네 총각들이 다들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회당에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어리둥절해 할 무렵,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요셉의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감으로 결정되었고,

요셉과 마리아가 손을 맞잡으려는 중 낙방한 다른 총각들은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다리로 부러뜨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자칫 심각할 수 있는 종교화에 생생한 느낌을 불어넣어 주는 부분이다.


이후 약혼만 했을 뿐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의 큰 그림에서처럼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고,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착한 남자였기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그때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다 하느님이 시킨 일이니 참고 살거라’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요셉은 가정의 수호성인이면서 인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들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키우려면 그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도 인내심이 꽤 필요했던 것 같다.


이 프레델라를 보면 요셉은 거의 대머리에 머리칼도 허옇다.

프라 안젤리코의 이 그림뿐만 아니라 요셉은 대부분의 서양 회화에서 할아버지로 묘사되는데,

이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했을 때도 처녀였고 죽을 때까지도 처녀였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평생을 남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여자의 남편이 젊고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라면

제아무리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대부분의 그림에서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은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중 뒤의 두 개의 그림


이어지는 그림은 임신한 마리아가 사촌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

그 옆은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장면이다.


이어서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시간이 훌쩍 흘러서 마리아가 숨을 거둔 장면이 나온다.
이 그림 속 마리아처럼 등을 똑바로 대고 누워 있는 인물을 보면 옛날 사람들은 ‘아, 죽었구나’라고 이해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잠자거나 쉬려고 누운 것은?

그것은 우리가 거실에서 쿠션을 베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자세처럼 옆으로 비스듬하게 그렸다.

대부분은 팔 한쪽을 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등을 붙이고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비스듬하게 누워 있으면 살아 있는 사람,

젊은 여자와 날개 달린 젊은 사람 사이에 흰 비둘기가 있으면 수태고지 장면 등

‘척하면 척’ 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도상(iconography)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정해 놓은 약속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므로 책을 보고 그리스도교 종교화의 도상을 공부하거나

따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도상을 알아본다지만,

피렌체에서 1400년대에 살던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그림을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화라는 것은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본래 목적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도상이라는 것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존재한다.

늘 묻혀서 살기 때문에 인지를 못할 뿐이다.


몸 좋은 서양 남자가 바지 위에 팬티를 입고,

가슴의 오각형 안에는 S자, 망토를 두르고 서 있다면 그건 누구? 슈퍼맨이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그것이 슈퍼맨인 줄은 안다.

그러나 500년 정도가 지난 뒤에 누군가 우연히 슈퍼맨 이미지를 봤다고 치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려면 190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1400년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것은 그래서다.

도상을 몰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회화를 이해하려면 도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유럽 여행을 가서 미술관에 갈 텐데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책을 봐야 되나요?’

라는 미술관 초보의 질문에는 성서와 그리스 · 로마 신화가 답이다.

덧붙여 역사책도 읽으면 좋겠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0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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