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캔버스에 유채. 79×61cm. 1510~1511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르네상스 최전성기를 구가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


그가 교황청에 머물면서 그린 〈추기경〉의 모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담한 시선의 카리스마 넘치는 그림의 주인공으로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Francesco Alidosi, 1455~1511) 추기경,


라파엘로와 자신의 딸의 혼사를 추진했던 비비에나(Bibbiena, 1470~1520) 추기경,

나아가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까지 언급되고 있다.


살짝 몸을 비튼 자연스러운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뿐 아니라 라파엘로는 피부와 눈, 코, 입 등이 만나는 부분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사실감을 드높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라파엘, 토비아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성모와 물고기)〉

캔버스에 유채. 215×158cm. 1512~1514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라파엘, 토비아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있는 성모자(성모와 물고기)〉는

성모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성서 《토비트서》(5장 15절)에 나오는 일화의 주인공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함께한다.


토비트는 어느 날 몸을 씻다가 자신의 발을 깨물려고 하는 물고기를 만나게 되는데,

천사 라파엘은 그에게 물고기의 내장을 뺀 다음 잘 보관하라고 일렀다.


얼마 뒤, 토비트는 사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사라는 본래 결혼해 첫날밤을 보낼 때마다 악마의 습격을 받아 신랑의 목숨을 내주어야 했었다.


그러나 토비트는 천사 라파엘이 일러준 대로 물고기의 내장을 태워 이를 물리친다.
그림 왼편에는 날개 달린 천사 라파엘과 자신을 나타내는 지물인 물고기와 함께하는 토비트가 그려져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347?~ 420)는

그리스어 역본의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로, 주로 성경책과 함께 그려진다.


또 그는 광야에서 스스로 금욕적인 고행을 하던 중

사자의 발에 꽂힌 가시를 빼준 경험이 있어 사자와 함께 등장하곤 한다.

〈갈보리 가는 길〉패널에 유채 / 318×229cm / 1515~1516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49실


〈갈보리 가는 길〉은 라파엘로가 공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으로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산타 마리아 델로 스파시모(Santa Maria dello Spasimo, 전율하는 성모 마리아 교회)를 위해 그려졌다.


고통받는 예수를 바라보며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힌 성모 마리아를 추모하며 지은 교회니만큼 그림 역시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예수와 이에 전율하는 마리아의 시선을 드라마틱하게 교차시켜 놓았다.

 
‘시칠리아의 전율(Lo Spasimo di Sicilia)’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그림은 완성 후 시칠리아 섬으로 옮기는 중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분실되었다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상태로 제노바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03


해설 김영숙 : 서양미술사를 전공했다.
<그림수다>, <현대미술가들의 발칙한 저항>,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산책> 등 미술관련 서적을 20여 권 저술하여
대중이 미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유쾌하고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엘그레코>가 있으며 현재 국공립단체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


안달루시아 세비야 출생. 17세기 에스파냐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아가 되어 불운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1639년까지 J.카스틸료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여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 세비야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주로 이탈리아의 S.라파엘로(1483∼1520), I.코레조(1494∼1534) 등과

북유럽회화의 거장 P.P.루벤스(1577∼1640), A.반다이크(1599∼1641) 등의 명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때까지 색조에 약간 차가운 느낌을 주던 세비야파적(派的) 그림에서
점차 안정감과 미감(美感)을 띤 훈훈한 느낌을 주는 화풍으로 바뀌었다.


그가 즐겨 그린 성모화는 미묘한 명암과 우아한 형태, 따사로운 색조 속에 자애와 경건함이 가득한 감미로운 작풍그림으로

그를 ‘에스파냐의 라파엘로’라고까지 불렀다.


거리의 거지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으며,

그들 작품에서는 어떤 감미로움이 감돌면서도 날카로운 사실력에 의해 독특한 매력이 풍긴다.


한편 1660년에 신설한 세비야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어서는 많은 조수와 제자를 길러냈다.

벨라스케스(1599∼1660)와 함께 에스파냐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풍속화가 ·초상화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다작의 화가였다.


작품으로 1645∼1646년 세비야프란시스코수도원의 복도에 그린 11장의 그림은 풍속화와 종교화, 사실과 종교적 정감의 결합이고,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죄 없는 마리아의 발현>(1678)은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로마 지방관의 꿈>(1664)에는 깊은 종교적 정열이 담겨져 빛과 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무리요의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 이외에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

독일 러시아 미국 등 전세계 중요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무염시태〉 캔버스에 유채 / 274×190cm / 1678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무염시태’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원죄없이 태어났다고 믿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이다.
마리아는 흔히 그 순결함을 강조하는 백합과 더불어 장미, 초승달 등과 함께 그려지곤 했다.


백합이나 장미가 주로 ‘수태고지’ 장면에 그려진다면, 초승달은 특히 ‘무염시태’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요한의 계시록》 12장에 기록된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처녀의 신으로 초승달이 상징인데,
마리아의 순결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를 차용한 것으로도 본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던 17세기의 스페인에서는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드높이는 종교화 제작이 활발하였고,

특히 무염시태와 관련한 그림이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54)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그려지곤 했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의 장인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이며 미술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회화의 기술(arte de la pintura)》(1649)에서 마리아는

“햇살 가득한 천국에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옷과 푸른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열두 개의 별이 빛나는 후광과 왕관을 쓰고 발밑에는 초승달을 딛고 서서 두 손은 가슴에 기도하듯 포갠”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 캔버스에 유채. 144×206cm. 1660~1665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7세기 세비야의 대표적 화가로, 한때 수르바란이 차지하고 있던 모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돌려버린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는 성모상을 무려 50여 점이나 그렸는데

그중 무염시태와 관련한 그림이 절반에 가깝다.


성모는 파체코의 말대로 햇살 가득한 천국 어딘가에서 하얀 옷을 입고,

푸른 외투를 걸친 채 발치 아래 초승달을 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모 주변에 가득한 앙증맞은 천사들은 라파엘로의 귀엽고 통통한,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천사들과 많이 닮아 있다.
수르바란의 그림들이 신비롭고 명상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근엄한 반면,

무리요의 그림은 따뜻하고 다정한 색감과 좀 더 인간적인, 따라서 친밀한 느낌을 준다.

<조개껍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124 x 104 cm. 프라도 미술관


〈성가족〉 캔버스에 유채 / 144×188cm / 165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무리요는 세비야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내 벨라스케스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되었다.

무리요가 태어날 무렵인 17세기 초반의 세비야는 파리, 나폴리 등과 함께 당시 유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인구 15만에 육박했던 세비야는 수도인 마드리드보다 규모가 훨씬 큰 도시로,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의 항구를 통해 신대륙과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경제 발전은 예술 작품에 대한 수요로 이어져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무리요와 같은

스페인 최고봉의 화가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무리요는 세비야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수집품에 섞인 라파엘로,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등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스페인의 라파엘로’라 불릴 만큼 세련되고, 또 다정하며 감미로운 화풍의 무리요는 종교화뿐 아니라

당대 소시민들의 삶을 담은 장르화나 초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성가족〉은 제목을 모르고 본다면, 고아로 자란 무리요가 꿈꾼 따사로운 가정을 담은 장르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예수의 가족(성가족)을 그린 종교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림 속 인물들이 가진 지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왼쪽의 마리아는 물레를 놓고 실을 풀고 있다.

성서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 책에 따르면 마리아는 성전의 휘장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을 만큼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서양으로 전해진 서아시아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운명을 지배하는 달의 여신은

‘숙명의 실을 감는 자’라 하여 거미줄 한가운데 있는 거미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달의 여신은 ‘처녀의 신’ 아르테미스이다.
동정녀로 인류 전체의 숙명을 책임질 마리아가 가끔 실을 잣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전례를 따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림 중앙에는 아기 예수가 새를 잡은 채 강아지와 장난치는 모습이 보인다.

손에 잡힌 새는 곧 예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
더없이 따사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 요셉 옆의 탁자에는 그가 목수임을 가리키는 이런저런 공구가 그려져 있다.

<주화를 든 소녀 (갈리시아인)> 캔버스에 유채. 43 x 63 cm. 1650년작. 프라도 미술관


<로사리오를 든 성모> 캔버스에 유채. 110 x 164 cm. 프라도 미술관


<레베타와 엘리에셀> 캔버스에 유채. 171 x 107 cm. 프라도 미술관


<적선하는 성 토마스 드 빌라뉘에바> 캔버스에 유채. 283 x 188 cm. 세비아 미술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22cm x 10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3






〈자화상 : 광상곡 1〉, 부식동판화. 13.5x11cm. 1797~1798년 제작.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교차하는 시대를 살았던 그는

뛰어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고야는 귀족적인 화려함과 민중적인 빈곤함을 모두 경험했다.

그를 단지 궁전에 봉사했던 화가로만 본다면

그의 예술은 다른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찬사만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힘없는 스페인 민중들의 고통과 절규에 귀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무지와 포악함에 촉각을 세우고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고야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앙시앵 레짐(전제정치)에서 시민 사회로 이전하는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그해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그가 궁정화가로 있던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다.

그는 참혹한 정복전쟁의 고통을 맛보았다.


고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진보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시민 사회를 추종한 혁명의식을 가진 화가였다.


고야는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하고 병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뒤틀리고 난해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판화집 〈광상곡 변덕〉 시리즈다.


에칭 형식으로 구현된 80여 점의 동판화에는 고야의 모습도 들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광상곡: 자화상 1〉이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불만에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당시 부패한 성직자와 무자비한 전제군주와

그 사이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의로 해석된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에 깊이 경도돼 있던 고야는

이 판화집에 수록한 어둡고 기괴한 작품들을 통해서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었다.


그러나 이 판화집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걱정한 고야는,

시장에 내놓은 지 열흘도 안 되어 모두 회수하고 만다.
사회 풍자를 통한 계도적 효과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카프리초스> 연작 중 ‘다 뜯기고 간다’1799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비록 왕가의 녹을 받으며 처세술에도 강한 고야였지만, 그는 분명한 계몽주의자였다.
무지한 백성들에 대한 비판, 탐욕으로 정신줄을 놓은 성직자들,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는 종교재판소,

착취를 일삼는 귀족과 먹고 놀기에 급급한 이달고나 한량 등을 비판하는 판화집 <카프리초스: 변덕>은

‘깨어 있는 이성’에 대한 고야의 동경을 의미했다.


이런 저런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살던 고야는 때론 비판의 그림을,

때론 생계를 위한 타협의 그림을 반복하며 자기 앞의 생을 이어나갔다.


말년에 그는 마드리드 교외에 집을 구했다.

이미 병으로 청력까지 상실한 고야는 심각하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첫 부인과 사별한 뒤 만난 마지막 연인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함께 지낸다.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쉬운 이 관계를 숨기느라 레오카디아 웨이스는 가정부로 위장했고,

고야는 외부인의 출입을 되도록 금한 채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고야는 일명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는 그 집의 방 두 개의 벽에 석고를 바른 뒤 유화를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그림들은 주로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갈색조를 이루고 있어 ‘검은 그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현재 캔버스에 유화로 옮겨져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혹은 보관되고 있다.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판화, 1799,


위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799년에 출판한 80점의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 중 한 점인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는 그의 이러한 대중의 불안과 불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두 팔을 베고 엎드린 화가 자신은 곧 잠자는 이성이고

그 사이에서 활개 치는 올빼미와 박쥐 떼는 광기와 무지를 상징한다.


물론 이 판화는 이성을 잠재우면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상상력, 감정이 자연스레 분출되고 심

지어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악몽 같은 무의식의 세계는 여기에서는 개인의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출현까지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프로이트조차도 사회적 무의식보다는 개인적 심연의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정신을 분석한다.

사회적 무의식이 어떻게 개인적 무의식에 침잠하게 되는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


47세에 앓은 병으로 이후 반평생을 귀머거리로 산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위치한 전원주택을 구입해 은둔생활을 했다.


이 집의 별칭은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였는데,

이 전의 주인 역시 귀머거리여서 이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 1층과 2층에 각각 7점씩 14점의 벽화를 장식하였는데,

석회벽에 직접 유화물감을 채색하여 일반적인 벽화 채색양식과 다른 방법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그림들은 검은 그림들(Black Painting)로 불리워지는데,

그 색채와 주제가 음울하고 괴이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안식일> 1820~23년, 회벽에서 캔버스로 옮김, 140x438cm, 프라도 미술관


그림을 보면 염소 머리를 한 악마가 둥그렇게 무리를 이뤄 쭈그리고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무엇인가 설교하고 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다.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닥치리라는 공포감에 저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 역시 흑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점이나 마법사들이 광기 어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점이 사티로스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고야 생존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자였던 그에게 이런 대중의 미신 숭배는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로 비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중의 무지를 사탄의 발호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마녀사냥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던 교회와 왕정의 구태의연한 중세 회귀적 행태였다. 


‘마법사의 안식일’은 곧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구세력이 자행하고 있는

또 다른 무지를 동시에 신랄히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부식동판. 1820년대 제작. 프라도 미술관


이웃나라 프랑스는 스페인과 달리 변혁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고야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민중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세운 스페인 왕조(조셉 왕)에서 궁정화가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에서 자행되었던 점령자 프랑스군의 전횡을 목격했고,

그 경험은 〈전쟁의 참화(Desastres de la Guerra)〉라는 연작 판화를 낳았다.


이 작품은 1810년에 착수하였지만 찍어 내지는 못하고,

훗날 그가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거기서 한정판으로 찍어 냈다.


<전쟁의 참화〉에서 고야는 죄 없이 학살당한 민중들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때론 이 사실적 표현이 너무나 참혹하고 혐오스러워서 초현실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지만,

그림 속 잔혹함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예하고 선착 구혼자에게 손을 내민다> 18×12.5cm.

They Say Yes and Give their Hand to the First ComerEtchingPrivate collection.


결혼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하는 당대의 악습을 풍자한 그림.
신부가 아버지인 듯한 남자에 의해 계단 위로 인도되고 뒤에는 호색적인 미소를 띤 신랑이 뒤따른다.

신부가 쓰고 있는 가면은 위선을 상징한다.

신부의 머리 위에 기만적인 결혼 현장을 냉소적으로 비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치아를 사냥하다(Out Hunting For Teeth)> 1797~1798년 제작. 판화시리즈. 18×12.5cm.


주술에 사용할 마법약을 만들기 위해서 두려움에 떨며

사형수의 시신에서 이를 뽑는 젊은 여인을 그린 작품.

<이래도 그는 그녀를 알 수 없다(Even Thus he cannot make her out)> 18×12.5cm.


단안경으로 살펴보지만 신사는 여자의 외모와 미소에 현혹되어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비틀어진 둔부와 돌려진 두 발은 당시의 마드리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매춘부의 표정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For Heaven's sake-and was her Mother)> 18×12.5cm.


어릴 때 시골에서 집을 나간 젊은 여인은 지금은 마드리드에 제일 비싼 매춘부가 되어 있다.
구걸하는 노파를 쫓아버렸지만 끝까지 뒤따라와 '누가 이리 귀찮게 구나" 싶어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아닌가.

당시 스페인 사회의 한 단면이다.


<우리를 풀어줄 사람은 없는가?(Can't Anyone untie us?)> 18×12.5cm.


한 쌍의 남녀가 한 나무 속에 묶여 안경낀 올빼미의 발톱 아래에서 서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무의 기둥은 남자의 오른 다리와 연결됨과 동시에 여자의 양 팔은 나뭇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녀는 서로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를 원하지만 율법의 화신인 올빼미가 이들의 불리를 막기 위해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혼을 금지하는 교회의 독단을 비판하고 있다.


참조 : https://blog.naver.com/rsk1227/8016120513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da1201&logNo=221373561025
http://magazine.hankyung.com/money/apps/news?popup=0&nid=02&c1=2004&nkey=2012122400091069542&mode=sub_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sk1227&logNo=80161205134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 캔버스에 회반죽, 146x83cm.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0층 한쪽에는 고야의 일명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만 모아 놓은 전시실이 있다.
그는 1819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집을 마련하여 실내 벽화를 직접 그렸다. 이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부른다.


벽화들은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에 ‘검은 그림들’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철로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는데, 철거되기 전에 벽면을 떼어 내서 캔버스에 붙이는 식으로 고야의 벽화를 보존했다.


당시 이 집의 소유주는 ‘검은 그림들’ 시리즈를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고자 했으나 루브르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프라도 미술관에 이 연작이 오게 되었다.


고야는 ‘검은 그림’ 연작을 비롯하여 유화, 판화 등을 주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예술가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

이것이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이며 이 점에서 고야는 선구자다.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작품은 바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인 것 같다.
티탄(Titan)의 왕인 사투르누스(Saturnus)는 그의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먹어치웠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인 레아(Rhea)가 한번은

아기 대신 돌을 주어 삼키게 하고 그 아기를 몰래 키운다.

이 아이가 바로 후대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 되는 유피테르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해설이 가능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말년의 고야가 자신을 스스로 사투르누스처럼 묘사했다는 점이다.


고야의 부인인 호세파 바예우는 고야와의 사이에서 여러 번 임신을 했지만,

사산된 아이도 많았고 태어나더라도 일찍 죽어서 결국 성인이 된 자식은 딱 한 명뿐이었다.


고야가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에 매독에 걸렸고,

이 때문에 아기들도 태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고야가 청력을 잃게 됐던 열병도 매독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나이가 든 고야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죽게 된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하고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 같다.


고야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확실히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훌륭한 화가가 꼭 훌륭한 인간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고야처럼 현대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화가가 아닌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가의 업적과 장점뿐만 아니라단점들까지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The Colossus 거인>, 캔버스에 유화. 120×100cm. 1808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멜랑꼴리하기도 하고,

묘하게 복잡한 느낌을 갖게 된다.


고야의 작품은 제라르 르그랑에 따르면 유럽 전체의 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지불식중이었지만, 그 역시도 18세기 말 고딕의 유행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신세계를 예언했다.


<거인>에서는 거인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과 짐승들이 산을 넘어 도망치고 있지만,

정작 거인은 달빛 속에 몽상하며 이 공황상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는 단지 나폴레옹의 침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마치 무의식의 거대한 출현에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고야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유명한 그림으로 평가되어 온 ‘거인( The Colossus)은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

문하생이었던 아센시오 훌리아가 그린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조선일보 2009.01.28)


나폴레옹 군대에 맞선 스페인의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이 작품은  미술관의 전문가들이 6개월이 넘는 연구 과정을 거쳐

캔버스 구석에 적혀 있는 AJ가 그림을 그린 이의 이름 이니셜이라는 설명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계속 전시할 것이지만 고야의 작품이라는 설명은 수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걸작’으로 평가되던 문제의 작품을 그리는 데, 고야가 참여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여전히 존재한다.

<The Witches' Sabbath> 캔버스에 유채. 43×30cm. 1789. 프라도 미술관


위의 작품은 사람들의 미신을 직접 전사한 그림으로, 야회(夜會)에서 악마는 그를 찬양하는 여성들에게 마술사로 나타난다.
살아 있는 어린이들이나 죽은 어린이들, 심지어는 태아까지도 악마를 존중하여 경의를 표한다.

 
거친 장소, 거리의 부재, 황혼녘의 빛 등이 이미지로 가득 찬 악몽에 몽환적인 사실감을 부여한다.
이 그림은 빈곤한 지성과 모호성에 근거한 모든 종교를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마술사들은 '낙태 시술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고야의 이 작품 ‘마법사의 안식일’에 잘 드러나듯이, 그 당시 대중의 미신, 특히 마법사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운 감정은

심각한 수위에 도달한 상황이었으나, 이는 전통 종교의 흔들림, 믿음의 흔들림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큰 기둥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사회의 술사들과 시정잡배들, 그리고 대중들을 등쳐먹는 그 모든 사람들은 마법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 캔버스에 유채. 138.5×436cm. 1821~1823년.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시리즈중 하나다.

이 작품을 보면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산 이시드로의 은거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광기에 어린 혹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때 이성을 믿었고, 출세를 위해 다양한 권력자들 아래서 쉼없이 일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얻기를 소원했던 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은 어둡고 비관적이다.


그가 사회에서 몰아내기를 원했던 ‘괴물’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고야의 집 벽면에 검은 잉크를 칠하고 그 위에 덧칠해 사람들의 표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재미있는 점은 고야가 젊은시절에 같은 주제를 두고 아래 <성 이시드로의 축제>처럼 밝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성 이시드로의 축제> 438 X 140 cm,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에 유채, 1819, 프라도 미술관


이 작품은 고야가 젊은 시절 위에 있는  <성 이시드로 순례 여행>과 같은 주제로 그렸던 버전이다. 
젊었을 때는 아마도 세상이 아름다워보였을 테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해 본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Judith and Holofernes)> Oil mural transferred to canvas. 1819~1823.​ 146 x 84 cm. 프라도 미술관


원래 고야가 자기 집 킨타 델 소르도에 그린 벽화였으나

1873-74년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Salvador Martínez Cubells의 감독 하에 캔버스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많이 손상되었다고.


여기에서 '유디트'라고 불리는 여성은 경외성서인 <유디트 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으로,

팔레스타인의 베투리아에 사는 과부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는 서양예술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고야, 클림트 등 많은 화가들이 그렸다.


<유디트 書>의 내용을 간추리면 아시리아 네부카드네자르 대왕 때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인 도시 베툴리아를 함락하기 직전.
물 공급이 막혀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신앙심 깊고 부유한 과부 유디트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거짓투항하여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돌아온다는 대범한 계획을

하녀 아브라와 단 둘이서 성공시켜버린다. 고야의 <유디트>는 이 설화에서 유래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 이야기가 화가들의 흥미를 끌었는지,

마드리드 왕궁에는 이 주제를 다룬 그림이 틴토레토를 비롯하여 여러 점 더 있다.
 

<말년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93 X 75cm 182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알바 공작부인과의 기이한 인연에 이은 헤어짐과 청각장애를 얻으면서부터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인 '귀머거리 집'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고 칩거하게 된다.


그 당시에 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에 있던 하얀 벽 위에 그렸는데 검은색 바탕,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형상과 얼굴, 우울한 주제의식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또한 병의 재발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당시의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침략과 전쟁에서

인간의 광기를 지켜보며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말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눈빛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대의 모습을 꿰뚫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고야의 눈빛이 잘 반영된 듯하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캔버스에 유채, 1800, 280×33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태피스트리 화가로 활동하던 고야는 초상화로 각광받으면서 왕실 화가로 등극하게 된다.
초상화는 오늘날의 인물 사진이 과감한 후 보정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모델을 실제 생김새보다 다소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뛰어난 고야 역시 왕실 화가로서,
궁정 인물들의 초상을 가능한 한 세련되고 우아하게 포장하는 일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는 왕가에 스페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품는 불만을

무조건 숨기고 있을 수 만은 없는 반골 기질도 분명히 있었다.


이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모신 카를로스 4세 왕가의 집단 초상화이다.
얼핏 보면 잠시 틈을 내 모인 왕가의 일원들이 번쩍거리는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자신들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많은 부분에서 이 무능력한 왕가를 고야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정중앙에는 왕이 차지하고 있기 마련인데 그곳에 왕비가 서 있다는 사실은

무너진 가장의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가 성하지 못했던 왕비의 합죽한 얼굴, 그 얼굴보다 더 두터운 거대한 팔뚝 등은

고야가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이상화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왕의 모습도 마치 술에 취한 듯 얼굴 가득 붉은 기운이 감돌아 어딘가 모르게 얼빠져 보인다.
도드라져 보이는 매부리코는 붓 끝만 조금 줄였어도 충분히 감출 수 있었겠지만 고야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튀어나온 배는 왕의 게으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두 부부 이외의 인물들도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곤 죄다 멍해 보이거나 야릇해 보인다.


카를로스 4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재상인 고도이와 놀아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린 채 사냥에만 몰두했다.


고도이와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는 동안 둘의 사랑은 훨훨 타올라

왕비가 낳은 두 아이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두 아이는 왕비 좌우에 서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수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결국은 아들 페르난도 7세에 의해 폐위되는 치욕까지 맞보았다.
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바로 아버지를 배반한 페르난도 7세이다.


고야는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다.


이 작품은 흔히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과 비교되곤 하는데,

왕실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 모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벨라스케스에 비해 고야는 매우 희미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존경하는 벨라스케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수가 모두 열세 명이었는데, 서양에서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기 때문에

화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추가했다고 하는 재미있는 속설도 전해진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 1799, 캔버스에 유채, 338x282cm.


이 초상화는 카를로스 4세의 부인인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 초상화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인데,

전시실 안에서도 두 작품이 마주보게 전시되어 있다.


굳이 왕이 아니라 왕비의 초상화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왕비를 그린 초상화 중에서 아마도 이런 초상화는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 초상화와 더불어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초상화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말의 자세, 풍경 등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실 기마 초상화와 꽤 닮았다.
고야는 ‘나의 스승은 자연, 벨라스케스, 렘브란트다’라고 할 정도로

벨라스케스를 존경했으며 그의 그림을 연구했다.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가 된 이후에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을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백 년이 넘는 시대 차이가 나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스페인 왕은 

지난 시절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번쩍거리는 장식을 두른 초상화를 공식 초상화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왕이 단두대에 오르는 와중에(게다가 사형당한 프랑스 왕과 스페인의 왕은 친척이었다)
왕이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벨라스케스 시대의 왕보다 훨씬 수수한 옷을 입고 있다.


마리아 루이사 왕비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자.

옛날에 여자들은 말을 탈 때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몸을 옆으로 돌려서 말을 탔다.


다리를 벌리고 말의 몸 한쪽에 한 발씩을 놓고 등자에 발을 걸친 자세는 남자들만의 자세였다.

아마도 여자들만의 말 타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서 말을 타자면 등자를 이용할 수 없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등자에 발을 걸친 채 말을 타고 있다.


게다가 등은 꼿꼿이 세우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턱을 살짝 든 자신만만한 자세다.

왕비는 이런 사람이었다.


무능하고 특별한 성격 없는 카를로스 4세에 비해 왕비는 남편을 휘어잡고,

자기의 젊은 애인을 총리 자리에 앉히는 여자였다.


카를로스 4세는 좋게 말하자면 사람 좋게, 안 좋게 말하자면 조금 ‘맹하게’ 생겼다.

기세등등해 보이는 왕비와 기싸움에서 밀리게 생긴 것이다.


고야는 이런 식으로 왕비의 성품까지 초상화에 잘 녹여 냈고,

왕비는 이 초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오수나 공작 부부와 자녀들> 캔버스에 유화. 174 x 225 cm. 1787~178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고야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의 진수는 초상화에서 잘 나타난다.


오수나 가문은 스페인 귀족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항력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고야는 왕실 사람들의 멋진 모습이 아니라 약간 겁먹은 듯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수나 공작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거물이지만,

고야가 보기에는 약한 식솔들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무능한 아버지일 뿐이다.


오수나 부인은 뛰어난 여인으로, 아이가 넷이었던 첫번째 가족을 잃은 후,

두 번째 가정에서는 좋은 어머니가 되려고 애썼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에서 여성적인 면은 전혀 보이지 않고,
꼿꼿하게 윗몸을 세운 모습에서는 도도함만이 느껴진다.


측은해 보이는 아이들은 착하게 행동하려고, 눈을 크게 뜨고 화가를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대상은 개뿐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오수나 가문의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다.


고야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아무런 주석도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친촌 백작부인〉1800, 캔버스에 유채, 216x144cm. 프라도미술관


작품 속 젊은 귀부인은 친촌 백작부인(La condesa de Chinchón)이다.
남동생이 친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작위를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왕인 카를로스 4세와는 사촌 간으로, 왕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와 결혼했다.
물론 이 결혼은 정략적인 결혼이었는데, 그래도 이 젊은 여인은 남편을 꽤 좋아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었고, 물론 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애인도 있었다.

고야가 이 여인을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닌데, 백작부인의 아버지이자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인판테 돈 루이스(Infante Don Luis) 가족의 그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3살 때의 백작부인을 단독 초상화로 그린 적도 있었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 스무 살이었던 백작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상화 모델로 앉아 있을 때 남편인 마누엘 고도이가 언제 오는지 하도 기다리는 통에

약간만 인기척이 나도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한다.


이런 상태를 표현한 고야의 방식은, 화면 왼쪽 앞을 향해 앉아 있지만

고개는 약간 오른쪽 뒤로 돌리고 있는 백작부인의 자세다.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은 부인의 손에 있는 반지에서도 보인다.

반지에 작고 둥근 미니어처 초상화가 붙어 있는데, 남편 고도이의 초상화라고 한다.


고야는 모델의 아버지인 돈 루이스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을 테고,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아이가

자라서 결혼하고 아기까지 가진 것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을 좋아하는 젊은 부인이 애처로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야는 백작부인을 청순하고 연약하게 그렸다.

어쩌면 임신한 여인들 특유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초상화에는 모델인 친촌 백작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화가인 고야의 감정도 투영되어 있다.
이것이 고야의 초상화가 가지는 특징이자 힘이다. 바로 대상의 내면까지 잘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표면으로 눈을 돌리면, 이 그림에 쓰인 색채는 단순하다.
배경의 어두운 색과 드레스의 크림색, 드레스 끝자락과 머리장식에 추가된

약간의 파란색 정도가 전부인데도 화폭은 매우 아름답게 빛난다.


드레스의 빳빳한 질감과 빛을 반사해서 빛나는 천의 느낌도 좋다.

고야가 얼마나 색을 잘 다루는 화가인지를 보여 주는 예다.


당시 아카데미풍의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다양하지만 차가워 보이는 색으로 그렸던 것에 비해

고야는 밝게 빛나는 화폭을 만들어 냈다.


고야가 동시대의 화가들과 얼마나 다른 그림을 그렸는지는

프라도 미술관 0층에 전시된 신고전주의 작품들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본다면 작품의 표면이 갈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친촌 백작 가문의 후손들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가 2000년에 프라도 미술관에 소유권을 넘겼는데,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되지 못했기 때문에 작품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백작부인의 얼굴빛이라든가 자잘하게 수놓인 빛나는 드레스 등의 아름다운 색감은 여전하다.

<파라솔> 캔버스에 유채. 104cmx152. 177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궁정화가였던 처남 바예우(Francisco Bayeu, 1734-1795)의 알선으로

1775년부터 마드리드의 산타바바라 태피스트리 공방에서 장식디자이너로 일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여 만에 고야는 엘 파르도 궁으로 보낼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었고, <파라솔>도 그때 그려진 것이다.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엘 파르도 궁의 식당 벽에 걸렸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유실되었다.


엘 파르도 궁은 카를로스 4세가 왕세자(아스투리아 공작) 시절에 거처로 사용했고

즉위한 후에는 왕비 마리아 루이자와 함께 겨울을 지내는 별궁으로 삼았다.

훗날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을 신랄한 필치로 묘사한 인상적인 그룹초상화를 그렸다.


고야의 초기작에 속하는 <파라솔>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와 경박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예쁘장한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고 소년은 녹색 양산을 펼쳐 들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다.


마치 스크린처럼 옅게 채색된 풍경이 사랑스러운 두 인물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젊은 멋쟁이들로 여성은 마하(Maja), 남성은 마호(Majo)라고 불렸다.


마하, 마호는 집시 풍의 화려한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당시 마드리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귀족들마저 이들의 유행을 따라 할 정도였다.


풍성한 노란 스커트와 몸에 꼭 맞는 하늘색 상의

그리고 흰 망토를 걸치고 풀밭에 앉아있는 마하는 인형처럼 예쁘장하다.


양산이 마하에게 작은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지만,

노란 스커트에 반사된 빛이 마하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띠고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는

마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당돌한 매력을 뿜고 있다.

마하의 무릎 위에는 검은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가 웅크리고 있다.
맑고 산뜻한 햇살 아래 바람이 부는 지 나뭇가지들이 오른쪽으로 휘어 있고 나뭇잎은 바람에 나부낀다.

한가롭고 유쾌한 정경이다.


<파라솔>은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의 무명화가가 마드리드에 입성해서

18세기 스페인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쓴 대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의 첫 단계를 보여준다.


아직 고야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소 어색한 표현도 보이는데,
아마도 장식품의 도안으로서 주제나 형식 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고야가 이때 그린 밑그림들은 사냥, 소풍, 어린아이들의 놀이, 장터 등

시골의 풍경과 풍속을 다루고 있다.


당시 왕실의 취향이 신화적 주제나 역사화 일변도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대중적인 주제로 변화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란시스코 데 고야 〈겨울-눈보라〉 캔버스에 유채. 275×293cm. 1786~178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고야가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것은 〈파라솔〉처럼 성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실 여자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인 일상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화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에 대한 왕실의 선호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8세기가 무르익으면서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 미술계는 딱딱하고 고루한 역사화보다는

귀족들의 향락적인 문화를 담는 아기자기하고 세속적인 로코코 미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가 역시 프랑스 왕가 부르봉의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소위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졌고,

로코코 역시 그런 연유에서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퇴폐적이기까지 한 귀족 놀음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이 거세지자

스페인 지식인들 역시 각성하기 시작했다. 


 〈겨울-눈보라>나  아래 그림 <부상당한 석공>은

가난하고 혹독한 삶을 겪어내고 있는 스페인 소시민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부상당한 석공〉 캔버스에 유채 / 268×110cm / 1786~178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부상당한 석공〉은 원래 술 취한 사람을 동료들이 옮기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고야는 가톨릭의 엄격함이 몸에 베어 있던 스페인 왕실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의

추태나 주사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이를 부상당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졸지에 이 작품은 소위 산업재해보험처럼, 작업 중에 부상당한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법령을

막 발표한 왕실의 업적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결혼〉 캔버스에 유채 / 267×293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결혼〉은 소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네덜란드 장르화의 전통을 일견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르화는 신화, 종교의 역사적 주제를 벗어난,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묘사한 그림을 일컫는다.

 
정중앙 검은 옷을 입고 화면 왼편을 바라보는 신부의 얼굴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설렘보다는

왠지 슬픔과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더 가득해보인다.


그런 신부의 뒤를 쫓는 붉은색 옷차림의 남자는 여자들이 애정을 느끼기 힘든 추남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돈에 의해 팔리다시피 하는 가난한 여자의 모습을 담은 슬픈 풍속사라 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꼭두각시〉 캔버스에 유채 / 267×160cm / 1791~1792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꼭두각시〉는 한편으로는 귀족 여인네들의 즐거운 놀이문화를 담은 로코코 풍의 유쾌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돈 많은 여자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살아야 하는

광대의 슬픔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포도수확> 1786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275 cm. 프라도 미술관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4XXX6600020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53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근대 미술로 이끄는 안내자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작품을 통해 불멸의 삶을 살던 거장들의 영향력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했고, 미술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거장들의 후광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유럽의 모든 화가들에게 여전히 성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루벤스라는 걸출한 화가가 바로크 미술을 열었고,
프랑스에서는 푸생이라는 매우 사색적인 화가가 고전주의 회화의 한 획을 그었다.


유럽의 미술이 르네상스라는 출발점에서 바로크라는 종착지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새로운 전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변종과 같은 것이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야였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고야가 그러한 변화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야는 극적인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18~19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이다.
주요 작품은 <전쟁의 참화>. 사라고사와 마드리드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했고,
사라고사로 돌아와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초기에는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세상을 묘사하고 풍자하는 자신만의 다양한 양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4세 때 궁정화가가 되어 스페인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공포와 비참한 결과을 담은 <전쟁의 참화> 연작 동판화를 그렸다.


마드리드의 민중봉기를 극적인 사실주의로 표현했으며,

이때의 인상주의적 양식은 후에 19세기와 20세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먹은 화가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15, 46×3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고야의 자화상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1815년에 제작된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1792년경 겨울, 고야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된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된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적막에서 오는 공포가 작품 속 화가의 표정에 잔뜩 묻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오른쪽 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적막함의 공포가 화가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든 것이다.


〈화실에서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91~1792, 42×28cm,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야와 같이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화가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특히 화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에게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의 변곡점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고야의 자화상은 약 스무 점 남짓 전해오는데,

그 중 몇몇 작품은 화가의 삶을 여러 각도로 비추는 프리즘 같은 구실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리즘을 발광시키는 작품이 바로 〈화실에서의 자화상〉이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가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젤이 화면 밖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아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화가는 그림 밖 세상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화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관람자가 화가의 모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고야는 자신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화가는 스페인 전통 의상을 멋드러지게 입고 있는데,

이는 그림 밖에 있는 수많은 모델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고야의 아내 <호사파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05 x 130cm. 1799년. 프라도 미술관.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한다.

그 후 그는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리스트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된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된다.

(그런데 위 그림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그림이라고 하는 기록도 있다.)

<1808년 5월 2일 : 맘루크의 공격> 캔버스에 유채. 266 x 345 cm. 1814년. 프라도미술관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에게 주문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먼저 〈1808년 5월 2일〉을 보자.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짧은 칼, 밧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웠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한다.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고야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다. 

프랑스 군인들은 침략자니까 영웅일 리가 없고, 그렇다면 마드리드 시민은 어떤가?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것이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자.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른다. 희번덕거리는 눈에는 광기가 보인다.
흰 점 하나, 검은 점 하나로 광기 어린 눈을 완벽하게 그린 고야의 기법은 훌륭하다.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채 / 268×347cm / 1814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0층 64실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1808년 5월 3일(EI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하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보는 사람 등.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 사이에는 불을 밝힌 초롱이 있어서
곧 죽게 될 사람을 밝게 비춘다.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응시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와 프랑스의 점령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다.
그는 또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 자신이 증오하던 반계몽적이고 중세적인 스페인의 보복이 시작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국왕의 초상화가였지만 영혼으로는 공화주의자였다.
예술가로서 완숙기에 도달한 1799년까지도 그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완전히 귀먹게 되는데,
이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고야는 1800년대 들어서는 로코코를 포기하게 된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주의,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만년의 여러 작품에서는 검은색이 강박적으로 나타난다.


검은색은 19세기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색인지도 모른다.
실존적인 불안은 두 가지로 나뉘어 나타나게 되는데,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의 감정적 동요는 고대 원시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삶의 권태"하고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실망이나, 성적인 위기 또는 전통적인 신앙의 상실 등

매우 다양한 원인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고야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작품들 속에 표현되는데,
그 은밀하고 지속적인 내면의 불안은 곧 죽음과도 밀접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제정"은 유럽 전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중세의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

그 미지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직접적으로 교감하게 된다.   


위의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의 작품에서 검은색과 갈색 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1808년 5월 2일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에 대항해 스페인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 다음날 그 보복 조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좁혀진 공간이 총살형의 공포를 더한다.
이 그림은 회화의 역사에서 인간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첫 번째 그림일 것이다.


병사들은 자동인형의 상태로 축소되어 있고, 그들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근대의 출현을 이 작품이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한편, 고야의 그로테스크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서부터 들라크루아와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고야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했다.


그의 판화집이 당시의 사회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미술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작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고야에 관해 논함』이란 책에서
"고야는 현대 회화의 전체적인 경향을 예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옷을 벗은 마하〉캔버스에 유채 / 97×190cm / 1799~180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36실


기존의 누드화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한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한량 ‘마하’가

그야말로 별 이야깃거리 없이 나체로 누어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마하(Maha)는 집시에 가까운 자유분방한 여성을 뜻한다.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여신)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다.


체모는 당연히 그리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의 머리카락마저 남성들의 경건한 마음을 들쑤신다고 여기던 옛사람들에게

차마 체모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체모는 여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야는 그 금기들을 뛰어넘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 마하.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
옷을 벗은 마하는 제대로 말하자면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Manuel Faria, 1767~1851)였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국가에 귀속되는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함께 있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된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과 외설이라는 케케묵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으로

고야는 당시 궁정화가로서의 직위마저 박탈당한다.

〈옷 입은 마하〉, 캔버스에 유채, 1805, 97×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궁정화가 직위를 박탈당한 뒤 고야는 이 작품 속 누드 모델에게 그대로 옷을 입힌 작품

〈옷 입은 마하〉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


작품 속 모델은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선정적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옷 입은 마하〉를 보면서 〈옷 벗은 마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스페인 사회에 대한 고야 특유의 통렬하고 냉소적인 항의 표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고야의 이 그림이 대체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은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수다용 먹잇감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 공작부인이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고야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 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현재 이 두 작품은 나란히 전시실 벽에 걸려 있어서
“저 옷을 벗으면 어떤 속살이 펼쳐질까?”를 상상하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후련하게 해소해주고 있다


<알바공작 부인> 캔버스에 유화. 210×149cm  1797.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알바 공작부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녀”라고 부르고,

고야는 “걸어 다니는 남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열애는 스페인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으나,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공작부인은
자신의 초상화에 또 다른 화젯거리를 남긴다.


고야는 값비싼 레이스와 반짝이는 비단의 질감을 당시 어느 화가보다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재능이 번쩍이는 공작 부인 초상화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인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다.


자존감이 가득한 고야는 그림을 통해 누구보다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연인을 지목한다.
레이스로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흙바닥에는 “나에게는 오직 고야 뿐(Solo Goya)"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요란한 화제를 제공한 두 사람의 열애는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공작 부인에게 절교를 선언 받은 고야의 그림은 더욱 더 검은 어둠 속의 그림으로 변했다.


고야의 꿈에 나타나는 공작 부인이 어느 순간 마녀가 되어 그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시간이 지속된다.
그의 작품에서도 마녀의 모습은 종종 나타난다.


알바 공작부인은 40세에 의문을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러 고야의 아들에게도 유산을 남겼다.
그녀의 다른 정부는 그 시기 스페인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재상 고도이였고,
고도이의 또다른 정부가 카를로스 4세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이러한 이유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의 실제 모델이 귀족인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추정에 대해
고야는 당시 유럽에서 악명 높던 스페인의 이단종교재판소에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고통을 치르게 된다.


공작부인과의 열애는 고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고통으로 남지만,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깊은 감정 역시 그가 스페인 민족에게 바치는 깊은 애정과 연관성 있게 다가온다.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10

http://blog.daum.net/jeongsimkim/29776




<이솝>. 캔버스에 유채. 179×94cm. 1639~1641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이솝〉은 왕실 사냥터에 세워진 별장 토레다데라파라다(Torreda de la Parada)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우리에게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은 기원전 6세기 인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벨라스케스가

그에 대한 지식과 관념으로 만들어낸 상상적 인물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벨라스케스의 이솝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Giovanni Battista della Porta, 1542?~1597)가 쓴
인상학 서적의 ‘황소머리 유형’을 참고했다.


이솝은 학식과 재능에서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지만,
노예로 태어나 델포이 신전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는 누명을 쓰고 절벽에 떠밀려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도 추남 중의 추남이었다고 하나 이솝은 그보다 더 흉했고,

심지어 곱사등이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이솝은 허름한 옷차림과 주름 가득한 큰 얼굴의 볼품없는 중년 남성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무심한 듯 던지는 시선 속에서 알 건 다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현자의 총기가 서려 있다.
짙은 어둠의 왼쪽 벽 배경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옅어져 바닥의 물건들과 함께 공간의 실제감을 높이고 있다.

<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캔버스에 유채 / 214×125cm / 1636~1637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의 경우는 벽과 바닥을 가르는 경계도 없으며,
그곳을 실제 공간처럼 느끼게 하는 어떤 것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경의 색조와 빛의 양을 미묘하게 조절한 뒤 마지막 방점처럼 찍은 그림자 때문에
인물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기막힌 배경 처리는 고야나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회화에 깊은 감동을 받은
프랑스의 19세기 화가 마네가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난쟁이>. 캔버스에 유채. 106.5×81.5cm. 1645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5실


〈바닥에 앉아 있는 난쟁이〉는 돈 세바스티안 데 모라(Don Sebastian de Morra)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거의 움직이는 장난감 수준의 취급을 받던 이들 난쟁이는 꽤 높은 보수를 받긴 했지만

때로는 심지어 어린 왕자나 공주가 받아야 할 체벌을 대신 받기도 했다.


두 발을 나란히 한 채 앉아 있는 난쟁이는 아마도 화가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뭉툭한 손과 짧은 다리는 그의 신체적 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날카롭고 강직한 눈매에는 위엄이 살아 있다.


이처럼 벨라스케스는 비단 합스부르크 왕족이나 고관대작뿐 아니라 왕실을 지키는 시종, 시녀, 그리고 광대나 난쟁이 등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아무래도 왕가의 초상화보다는 이런 인물들을 그릴 때 좀 더 자유롭고 과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레스코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7×83cm. 1643~164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광대 돈 크리스토발>. 캔버스에 유채 / 200×121cm / 1637~1640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7.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쿠스〉 캔버스에 유채. 165×225cm. 1629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19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화가 마네로부터 ‘화가 중의 화가’로 격찬받은 벨라스케스는
16세기 마지막 해에 당대 스페인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세비야의 이달고(Hidalgo)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달고’는 주로 돈을 주고 산 귀족 혹은 몰락하여 별 볼 일 없는 귀족을 의미한다.
벨라스케스가 그토록 자신의 ‘계급’에 집착한 것은 바로 이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장인이 된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파체코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인문학자로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가 왕성해서 벨라스케스에게 그림 이상의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세비야는 당시 ‘보데곤’이라고 부르는 장르의 미술이 발달했다.

원래 ‘선술집’을 의미하는 보데곤은 현재 스페인에서는 정물화를 일컫는 말로 쓰이지만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음식이나 부엌 집기, 그릇 등을 주제로 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그림을 의미했다.


초기 벨라스케스는 이 보데곤의 전통을 담은 여러 그림을 제작하곤 했으나,

곧 종교재판소의 예술 분야 자문을 담당했던 장인 파체코의 의견을 좇아 종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4세는 국사의 대부분을 올리바레스(Gaspar de Olivares, 1587~1645) 재상에게 일임했는데,
세비야 출신인 재상은 같은 고향 사람인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추천해 그의 마드리드 입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들이 참여한 회화 시합에서 승리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고,

이윽고 〈바쿠스〉를 제작해 왕의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게 된다.


이 작품은 술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가 농부들 틈에 앉아 한 사람에게 화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농부들은 비천한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지만, 벨라스케스는 그들을 힘겨운 노동을 이겨낸,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을 만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한동안 〈술꾼들〉이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이 그림은 중앙의 모자를 쓴 남자의 흥겨운 표정에서 보듯

낙천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매끈하고 환한 피부를 가진 바쿠스는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중앙의 인물은 벨라스케스가 흠모하던 스페인 화가 호세 데 리베라의 인물 유형과도 흡사하다.


화면 아래 바쿠스의 발치에 놓인 술병, 그릇, 술잔 등은 보데곤 화가로서 쌓아올린 벨라스케스의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카누스의 대장간〉 캔버스에 유채 / 223×290cm / 1630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1실


펠리페 4세의 신임을 얻게 된 벨라스케스는 당대 유럽 최고의 화가로 전성기를 맞고 있던 루벤스가

스페인에 잠시 체류하던 시절, 그와 직접 대면할 영광을 맞게 된다.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의 충고대로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게 되고,

이윽고 왕의 허락을 받아낸 뒤 제노바, 베네치아, 그리고 로마와 나폴리 등에 1년여 동안 머물게 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절 남긴 걸작이다.


화산을 연상시키는 용광로에서 일을 하느라 대장장이의 신으로 알려진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는 신화에 의하면
주피터르의 바람둥이 기질에 잔뜩 독을 품은 아내 주노(헤라)가 남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혼자 만들어 낳은 아이로,
화가 치민 주피터르의 발길질에 올림포스 산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아폴론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바로 불카누스로,
그의 몸이 비스듬한 것은 바로 그의 다리가 성치 못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비운의 불카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내는 기막힌 기술로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급기야 미의 여신 비너스와의 결혼에도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람둥이 양대 산맥’ 중 하나가 남신 주피터르라면, 여신은 단연코 비너스이다.
그녀는 마르스(아레스)와 사랑에 빠졌고, 그림은 이를 태양의 신 아폴론이 고자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 속 불카누스는 다른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대장장이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군살 없이 탄탄하고 대리석 같은 피부를 지닌 그야말로 완벽한 몸매는 ‘

인체의 이상화’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통을 벨라스케스가 습득한 결과로 보인다.


오른쪽 일꾼이 막 다듬고 있는 갑옷은 빛이 닿는 부분에 일어나는 색의 변화를

면밀하게 잡아내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아폴론이 두르고 있는 붉은 옷의 색조를 빛의 강약에 따라 미묘하게 변주시켜낸다거나
쇠를 달구는 솥, 일꾼들이 걸친 옷가지 등의 질감을 표현해내는 능력은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의 능숙함과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애초에 누군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진일보된 기량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스페인으로 돌아오자마자 펠리페 4세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팔렸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5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6





 <로케비 비너스> 캔버스에 유채. 212×147cm. 1649~1651. 런던 내셔널 갤러리.


 1647년과 1651년 사이에 그려진 <로케비 비너스>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드화들 중 하나이며,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인도되기 전까지 영국의 로케비 홀에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목이 붙었다.


후대 미술가들과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이 그림은 벌거벗은 비너스가 소파에 기대어,

그녀의 아들 큐피드가 붙잡고 있는 거울을 통해 관람자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모습을 뒤에서 본 것이다.
신기하게도,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흐릿한 얼굴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다소 늙어 보이고 크게 보인다.


이 그림은 애초에 스페인 수석장관의 아들이었던 마르케스 델 카르피오를 위해 제작된 듯하며,
카르피오는 1651년 6월에 이 그림의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유일한 벨라스케스의 여성 누드화이며,

스페인 화가가 그린 거의 최초의 누드화일 것이다.


그 당시 스페인의 종교적인 위신상 누드화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기에

이 그림은 단지 개인적으로만 전시되었을 것이다.

<브레다의 항복> 캔버스에 유채 / 307×367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9a실


〈브레다의 항복〉은 펠리페 4세의 명에 따라 여러 화가들이 부엔레티로 궁정의

‘세계의 전당’이라는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열두 점의 작품 중 하나로,

1625년 남부 네덜란드의 주요 요새 브레다 시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펠리페 4세 시절 30여 년간 끌어온 전쟁은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전투만큼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소문난 장수를 무찔렀다는 일화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적을 과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 격인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은 브레다 성의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Justinus van Nassau, 1559~1631) 장군이다.


브레다 성의 열쇠를 바치는 패장의 얼굴에는 슬픔과 체념이 가득하다.

오른쪽은 스페인의 암브로조 스피놀라(Ambrogio Spinola, 1569~1630) 장군인데

자세를 낮춘 네덜란드 장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그의 얼굴을 따사롭게 쳐다보고 있다.


그는 상대 장군이 들고 있는 열쇠에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패자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스페인은 넉 달 동안 브레다 성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성 내부로 가는 모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켜 승리를 얻어냈다.


네덜란드는 명예 항복을 요청했고, 이에 스페인은 그들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한 채

성을 떠나도록 허락함으로써 승국의 관용까지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스페인의 사기를 한층 드높였으며, 스페인 최고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Pedro Calderon de la Barca, 1600~1681)에 의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다.


벨라스케스가 이 연극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스피놀라 장군 뒤로 하늘을 향해 빽빽이 치솟은 창들의 질서정연함은 승전국 병사들의 기개를 적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덕분에 작품 제목이 〈창검〉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면 오른쪽을 압도하는 말의 뒷모습은 네덜란드 장군의 뒤편에 서 있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등장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인 초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사실감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몇몇 인물들은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었고, 개인 초상화도 이미 제작한 적이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곳곳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묘한 신비감은 색과 빛,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데 치중한 베네치아 화가들을 연상시킨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은 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후경은 격전지

혹은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하고 전경에는 중심 인물들을 배치하곤 했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줄을 맞춰 선 군인들은 어떤 과장된 몸짓도 취하지 않으며, 정복된 자와 정복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영웅적 행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소모적이고 더러운 사업일 뿐이다.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 캔버스에 유채 / 220×289cm / 1657년경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5a실


이 작품은 아라크네에 관한 고전 신화를 복잡하고 높은 지적 수준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이야기는 로마 시대의 작가,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Metamorphoses)>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디아의 염색(染色)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뛰어나

여신 아테나보다도 자기가 훨씬 낫다고 뽐냈다.


이 소문을 들은 아테나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녀를 찾아가 신을 욕보이는 언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녀는 듣지 않고 결국 아테나와 베 짜는 기술을 겨루는 시합을 열어 솜씨를 겨루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가 그녀보다 훨씬 베를 잘 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라크네가 짠 타피스트리 그림의 주제가 문제였다.


아라크네는 아테나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님프인 유로파를 납치하기 위해

황소로 변신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몄고, 아테나는 진노해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켰다.


이 그림에서는 두 개의 내용이 등장한다.

먼저 전경에는 산타 이사벨의 로열 타피스트리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의 두 단계가 묘사되어 있다.


후경에는 유로파의 납치에 대한 내용이 직조된 타피스트리가 벽에 결려 있다.

그 앞에는 갑옷을 입은 아테나가 아라크네를 응징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벌을 주고 있는 아테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라크네다.

전경의 베 짜는 풍경은 베 짜기 시합을 묘사하고 있다.


아라크네가 털실을 감을 동안 아테나는 물레를 돌리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가 회화 장르의 고귀함을 강조하면서

벨라스케스 자신이 최고라고 단언하고 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원래 궁정 사냥꾼인 페드로 데 아르스(Pedro de Arce)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작품의 가장자리 부분은 1734년 마드리드의 알카자르 궁전(Alcázar Palace)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후 수리되었다.


이후 1734년부터 1772년까지 부엔 레티로 궁전(Buen Retiro Palace)에 보관되다가
이후 1772년부터 1794년까지 마드리드의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재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것은 1891년의 일이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캔버스에 유채. 209×125cm. 1626~1627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궁정화가로서 벨라스케스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왕가 일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사진보다 더 정확해 보이는, 그야말로 사실성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왕실 초상화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가장 특별한 유산이었다.


유럽 그 어느 궁정도 벨라스케스가 있던 스페인만큼 훌륭한 초상화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타사르의 카를로스 왕자는 펠리페 4세의 아들로 16세에 요절했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 초상〉캔버스에 유채. 211.5×177cm. 1635~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것은 승마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교로,

인물의 권위를 한층 더 강조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겨우 혼자서 뛰는 것도 힘들었을 어린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마저도

이 고급 기술을 구사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왕비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34 x 132 cm. 1652~1653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펠리페 4세는 첫 아내인 이사벨과 사별한 후 누이의 딸, 즉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나와 재혼했다.
원래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아들과 ‘4촌 결혼’을 계획했으나, 전처와 사별한 삼촌과의 결혼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시녀들〉의 희미한 거울 속에 왕과 함께 등장한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역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비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옷과 머리 장식,
커튼 등에서 마치 마감이 덜 된 듯 붓 자국을 강하게 남기는 벨라스케스다운 대담함이 돋보인다.


〈시녀들〉의 공주를 그린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그린 작품인데,
그녀는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인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다.


족보상으로 남편은 그녀의 외삼촌이었다. 지속되는 근친혼의 결과 약골인 그녀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죽던 해에 그린 미완성 작품을 그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마감했다.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1×314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3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 305×320cm / 1634~1635년 제작 /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 유지하였고 왕가의 근친혼도 불사했다.
그로 인해 조산, 기형, 단명 등의 후유증 역시 극심했는데,
펠리페 4세의 경우는 대대로 이어온 부정교합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어 늘 병치레를 해야 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에서 눈에 띌 정도로 튀어나온 그의 아래턱이

바로 그 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297×309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벨라스케스는 왕가 일원의 기마상 초상도 다수 제작하였다.

펠리페 4세의 첫 왕비인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이나 그 뒤를 이를 후계자로 지명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기마상>

그리고 익명의 원작을 수정하고 크게 보완하여 조수와 함께 제작한〈펠리페 3세의 기마상〉과

그 아내이자 펠리페 4세의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마상〉 등은 올리바레스 백작의 주도에 따라 건축된

마드리드 근교의 새 궁전 부엔레티로의 접견실을 꾸미기 위해 제작되었다.


기마상은 소위 ‘야생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다룰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구에서는 최고 권력가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자주 그려졌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은 모자의 장식깃이나 갑옷의 문양, 소맷부리, 그리고 손 등에 다소 거친 붓 자국을 남김으로써
그림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잔뜩 품어낸다.


벨라스케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종으로 소문난 스페인산 말을

왕실 마구간에서 면밀히 관찰한 뒤 그 자세와 형태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의 기마상 시리즈 속 말들의 사실감 넘치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하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03×317cm. 1634~1635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 캔버스에 유채. 313×239cm. 1636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올리바레스의 기마상>은 그가 비록 왕족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위 기마 초상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주로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펠리페 4세의 기마상과 마찬가지로 올리바레스가 타고 있는 말도 두 앞발을 치켜들고 있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4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7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17세기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열두 살에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파체코로부터 문화적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그는 1618년에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 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고,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1620경)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후 평생 궁정 화가로 지냈다.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펠리페 4세 일가(시녀들)>는 많은 토론거리를 남겼다. 고야, 마네, 피카소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2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신분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화가가 여럿 있었다.
당시만 해도 화가란 하나의 기능인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빈번했다.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주도했던 뒤러 같은 화가도 예술가가 아닌 일개 화공으로 취급받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을 여러 점 남겼다.


17세기 스페인 궁정회화의 대가로 불리는 벨라스케스도 젊은 시절부터
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신분 상승의 길을 모색했다.


당시 많은 스페인 지식인들이 성공을 위해 저마다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로 모였던 것처럼
세비야 출신 벨라스케스도 마드리드로 가서 많은 권력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를 곧잘 그리는 젊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명성은 어느덧 왕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궁정화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벨라스케스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왕궁 근처에서 활동하며 궁정화가로 살았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23년경 궁정화가가 되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윤곽선이 화면의 짙은 배경에 묻혔는데 이 화법은 다빈치의 명암 대조법에서 유래한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 회화 예술의 표현 기법이 이미 스페인 등지의 서유럽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는 화가의 얼굴과 치켜 올라간 콧수염은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그림자 드리운 눈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면서 정서적으로 대립과 통일을 교묘하게 이룬다.


작품 속 화가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보인다.
화가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신분에 민감했던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근엄한 귀족처럼 보이려고 했던 의도가 담겨 있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거만하고 까다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그림만 보면 그를 영락없는 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흔 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43, 110×81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마흔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43년에 그린 것이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서 얼굴 전체의 4분의 3만 나타내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벨라스케스는 냉정하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카리스마도 발산한다.


중년에 들어서도 벨라스케스는 여전히 화가라는 신분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자기 내면을 향한 솔직한 성찰보다는 외향적인 시선에 초점을 맞춰 자화상을 완성한 인상이 짙다.


벨라스케스와 교분을 나누던 베네치아의 한 작가는 그를 가리켜

"권위가 느껴지는 인물로 위엄이 있고 고상한 신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예술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평판이다.


벨라스케스는 순수 혈통을 지닌 귀족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고,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기사단의 제복을 입게 된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러한 신분이 예술가 벨라스케스를 다르게 평가하게 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피카소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들로부터 커다한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기사라는 작위 때문이 아닌,
미술사를 통틀어 너무도 위대한 〈시녀들〉이라는 걸작 때문이다.


 <시녀들>, 캔버스에 유채, 1656, 318×27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165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최초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 (Madrid Alcàzar)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가 1724년 출간한
스페인화가들의 연대기 중 <시녀들>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팔로미노는 1678년에 마드리드를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던 궁정 인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을 작성하였다.


왼편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 자신과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데 사르미엔토(Doña Maria Augustina de Sarmiento),

마르가리타 공주 (Doña Margarita María of Austria), 다른 시녀인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Doña Isabel de Velasco),

우측 전경에 난쟁이 마리바르볼라(Maribárbola)와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Nicolasito Pertusato)가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인 도냐 마르셀라(Doña Marcela de Ulloa)와

확실치 않으나 왕비의 수행원인 돈 디에고 루이스(Don Diego Ruiz de Ascona)로 추정된다.


배경 중앙부의 좌측에는 거울에 비친 마리아나 왕비와 국왕 펠리페 4세의 모습이 보이고

그 우측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의 인물은

왕비의 시종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Don José Nieto Velàzquez)이다.


이렇게 다양한 실제 인물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시녀들>은 1666년 왕실 소장 미술품 목록에서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 몇몇 궁정 문서들은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라고 언급하였으며, 다시 그 이후의 문서들은

<가족도(El Cuadro de le Familia)> 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La familia de Felipe IV)>이라는 제목으로 기재하고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 직업 및 외형적 특성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인물간의 관계에 있어 기반이 되는 태도와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의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와 다정한 친밀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한편,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다른 장르의 그림들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녀들>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국왕 부부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두 사람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제작 중인 벨라스케스를 방문하여

화면 앞, 즉 관람자의 위치에 서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거나,
혹은 그 위치에서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이 화면 내부의 다른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보거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화면 안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반사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시각적 장치는 화면 내부의 재현된 세계와

화면 밖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자가 실질적으로 궁중 생활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관람자의 시선, 현실과 현실의 재현인 이미지, 실제와 환영의 관계가 교묘하게 얽히면서,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가지게 된다.


화면 왼쪽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화면 뒤쪽 벽에 걸린 두 점의 회화,

<팔라스와 아르크네(Pallas and Arachne)>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Contest of Pan and Apollo)>이 자주 언급된다.


벨라스케스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Juan Bautista Martínez del Mazo, 1612-1667)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그림을 본 따 그린 이 그림들은

모두 인간의 '공예'를 뛰어 넘는 뛰어난 신적 '예술'의 승리를 주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 예술의 신성화, 그 우월성과 고결함에 대한 강조는

왕과 왕실 구성원의 등장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미술사학자 조나단 브라운(Jonathan Brown)은 르네상스부터 잘 알려져 있던 고대의 뛰어난 화가

아펠레스(Apelles)와 알렉산더 대왕의 관계를 <시녀들>에 대입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펠레스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의 작업들을 칭찬하고,

그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벨라스케스 역시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유일한 화가였으며,
팔로미노의 기록에 따르면 펠리페 4세가 실제로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작업 공간을 방문한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벨라스케스는 회화가 공예 상품으로서 낮게 평가되던 17세기 스페인에서 자신과 국왕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왕의 예술적 취향을 반영하는 자신의 작품들이 가진 우월성과 고결성을 시각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녀들>에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화가로서의 영원한 명성을 보장해줄 뿐 아니라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 했던 벨라스케스의 목표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산티에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드러나는 상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림이 그려지고 3년 후인 1659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복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녀들>을 그릴 당시부터 이미 벨라스케스는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림에 의도적으로 투영했음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실제 화실이 아닌
알카사르 궁전 내의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머물던 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방은 약 40점에 달하는 루벤스 회화의 모작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벨라스케스에게 특히 의미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1631년에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루벤스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왕실의 높은 평가와 선호를 대변하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시녀들>의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결한 사화적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화면 왼쪽에서 화가는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잠시 멈춰서 모델을 관찰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 속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화판이 관람자를 등지고 세워져 있어서 화가가 그린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그림 밖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왕과 왕비이다.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그림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화면 중앙에 위치한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와

그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가 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에 숨겨진 주인공은 바로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벨라스케스만 알고 있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렇게도 열망했던 산티아고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단 본인의 모습이
비록 그림의 가운데는 아니지만 매우 비중 있게 담겨 있다.


붉은 십자가의 휘장은 그림 속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와 자신의 신분은 엄연히 다름을,

이 그림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각인시키고 있다.


당시 그림 속 인물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위대한 작품이야말로 벨라스케스가

세상에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던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시녀들>은 17세기 스페인 화단을 대표하는 냉정하고 침착한 대가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왕, 왕비, 공주, 궁녀, 귀족과 하인 심지어 궁정의 어릿광대마저 모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주와 시녀들의 레이스 달린 의상은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되었다.
공주의 금발 머리도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사실적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섬세한 묘사는 사라지고 만다.
화려한 레이스 의상도 공주의 금발머리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붓 터치가 거칠다.


그러나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보면 그림 속 섬세함이 다시 살아난다.
이 작품이 과연 17세기에 그려진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벨라스케스의 색채감과 원근감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빛을 발산한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 캔버스에 유채, 1618, 100.5×119.5cm,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


계란을 부치는 노파에서 교황까지, 계급을 뛰어넘는 작품 속 모델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가 되기 전인 1617년부터 1623년까지 고향 세비야에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보데곤'(bodegónes)을 주로 그렸다.


보데곤의 원래 의미는 싸구려 술집 또는 음식점을 말하고,

여기서는 세비야 지방 화파에서 유행하던 하층민의 삶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그가 열아홉 살에 그린 〈계란을 부치는 노파〉는 대표적인 보데곤 작품이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623

 

 마드리드로 진출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 모델의 신분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1623년, 스페인의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 1587~1645)는 그를 불러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작품을 본 왕은 매우 만족했고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펠리페 4세는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98×101.5cm. 1623~162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4세가 즉위한 해는 스페인 지배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와

12년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전쟁의 불씨가 붙던 시점이었다.


결국 1648년 펠리페 4세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해

이 지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즉위 당시 겨우 열여섯 살이었던 펠리페 4세는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에게 국사를 대부분 맡겨버리는

실정을 저지르긴 했지만,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정과 심미안이 지극한 왕이었다.


그는 스페인과 영국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교관이자 화가로 방문한 루벤스를 특별히 아껴

그의 작품을 상당수 수집했고, 벨라스케스를 기용하여 스페인 미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은 모두 펠리페 4세 시절 활동한 화가였다.


펠리페 4세의 전신상은 벨라스케스가 1625년에 완성했다가

3년이 지난 뒤 다시 수정한 것이다.


그림에는 왕의 왼발이 마치 두 개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벨라스케스가 수정하여

덧씌운 물감 일부가 깎여나가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58×44.5cm. 1628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에서, 왕은 이전 시대 고위층이 즐기던 화려한 주름이 사라진,

접시 모양의 작고 단순한 깃을 목에 두르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국운은 쇠퇴하고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빠지면서

펠리페 4세가 시행한 사치 규제법이 왕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캔버스에 유채, 1650, 140×120cm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잠시 여행하던 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 1574~1655)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교황이 입은 호화스러운 옷을 정교하게 그려낸 것은 직물 묘사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대가적인 감각을 보여주며,
교황의 뾰로통한 표정은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그의 타고난 능력을 보여준다.


교황은 자신의 초상화를 본 뒤 "이렇게 똑같을 수가!"라고 감탄했다.

사실, 교황은 이 작품을 너무 사실적이라고 말하며 처음에는 싫어했다.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20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명한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교황'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림 속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당시 일흔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강렬한 카리스마와 위엄이 넘쳐 보인다.
 신도들 역시 회당 안에 걸어둔 이 초상화를 보고 실제로 교황이 앉아 있는 줄로 알았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들이 과장을 통해 고전미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표현 양식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 캔버스에 유채, 1660, 212×147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벨라스케스가 말년에 그린 <마그리트 공주>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는 물감을 매우 두텁게 바르고 뚜렷하면서도 잦은 붓 터치로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하려 했다.


공주의 드레스는 원래의 질감까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배경에 육중하고 어두운 계열의 색을 사용한 반면
의상과 장식품에는 강렬한 보색으로 색채의 대비를 줘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17세기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벨라스케스만의 화법은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열두 살 때 세비야 미술계의 대표 인물인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에게서 사사했고 1

617년 문하생으로서의 수련이 끝나자 직업화가가 되었다.


이후 거처를 마드리드로 옮긴 뒤 1623년에 국왕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왕의 신임을 얻어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 벨라스케스에 대한 펠리페 4세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왕은 "내 모습은 벨라스케스만 그려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한편, 펠리페 4세의 신임은 궁정화가로서의 벨라스케스의 역할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는 1627년부터 궁정의 내무를 감독하는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이 일로 그의 명망은 높아졌으나 궁정의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했다고 미술사가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벨라스케스는 왕실에서 소장하는 훌륭한 예술품들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마드리드의 궁정에서 보냈다.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기도 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더 없이 영예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벨라스케스'가 주인공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왕의 화가'였다.
그래서일까? 위대한 걸작 <시녀들> 속에 서 있는 벨라스케스는 기사 작위를 받은 고명한 인물로서가 아닌,
그저 궁정의 시녀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귀족 못지 않는 신분을 얻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그를 수많은 명화를 남긴 한 사람의 화가로 기억할 뿐이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0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7349&cid=44533&categoryId=4453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





<3월 8일>

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세미나실로 이동하여 공식일정으로 회원 내부 연수회를 가졌다.

이어서 마드리드 시내 식당으로 이동하여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시내 관광을 시작한다.


Prado 미술관


 마드리드 시내


 프라도 미술관 주변 지도


 국립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정면


프라도 미술관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8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후안 데 비야누에바가 세운 건물로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신고전 양식 최고걸작으로서 유명하다.


원래는 왕가 수집품의 분산을 방지하기 위해 페르난도 7세에 의해서 1819년에 왕립미술관으로 발족했는데
1868년의 혁명 후에 국유화되어 프라도(지명으로 ‘목장’의 뜻)로 개칭되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개관하였다.


18세기에 자연사 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지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완공하지 못하다가,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개관하였다.


2007년에는 스페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1937년생)가 확장 공사를 설계하였고,

확장된 부분에는 박물관의 관리부, 보존팀, 새로운 도서관, 판화와 스케치 갤러리,

카페와 식당, 강당, 전시 공간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는 스페인 회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엘 그레코(El Greco), 고야(Francisco Goya), 벨라스케스(Diego Vel?zquez)를 비롯하여,

스페인 회화의 전성기였던 16-17세기 화가들의 귀중한 작품들은 물론,

이탈리아 화가였던 카라바조, 귀도 레니,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독일의 알브레흐트 뒤러,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그림 5,000여 점과 700여 개의 조각품, 판화 2,000여 점, 장식물및 예술품 2,000여 점,
메달과 주화 1,000 여 점 등 무려 3만 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약 3,000 점의 작품만 전하되고 있다.


스페인 회화는 물론이고 중세부터 18세기까지의 유럽 회화들이 나라별로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별 회화 스타일을 미리 공부하고 관람하면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3대 거장의 전시관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이고,
그 밖에 티치아노, 루벤스,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의 작품들도 눈여겨 볼 만하다.


2013년부터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유료로 대여할 수 있어서

오디오를 통해 주요 작품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1층은 스페인 회화, 플랑드로 회화, 이탈리아 회화, 고야의 일부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이탈리아 회화와 조각작품들, 고야의 작품을 비롯한 스페인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전시품들의 위치는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미술관 정면의 문 앞에 있는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동상


프라도 미술관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문 앞에는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의 동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궁중화가라는 점이다.


고야(Francisco Goya)의 동상


일반 관람객들이 들어가는 왼쪽 문 앞에 고야의 동상이 있다.

동상 하단에는 그가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 <옷을 벗은 마하>의 조각상이 있다.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 동상


 프라도 미술관 옆있는 산 헤로니모 왕립 성당 (성 예로니모, 성 제롬)


헤로니모 수도원의 일부분으로 1503년에 카톨릭 국왕부처에 의해 세워졌다.

1808년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이사벨 2세 때 나르시소 파르쿠알 콜로메르에 의해 신고딕 양식으로 재건 되었다.

펠리페 2세부터 이사벨 2세까지 왕위계승자의 서약식이 열린 곳으로,

스페인 왕들의 결혼식과 퇴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다.


성당 내부



프라도 미술관 정면


 측면에서 본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출입구


프라도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서 마주하는 로비풍경


 프라도 미술관 입구 로비풍경. 어린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브레다의 항복>을 관람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 입구 로비풍경. 두 노부부가 안토니오 데 페레다의 작품 <제노아의 구원>을 감상하고 있다.


 로비에 있는 조각상


 로비에 있는 조각상


참조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300040
http://cafe.daum.net/posung57/MK51/143?q=Prado%20%EB%AF%B8%EC%88%A0%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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