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 1599~1660)
17세기 회화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재능은 그의 고향 세비야에서 연마되었다.
그는 프란시스코 에레라의 공방을 거쳐, 열두 살에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작업실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쌓았다.
벨라스케스는 1617년에 독립 화가로서 일할 세비야 길드의 면허증을 얻었다.
그는 이론가와 인문주의자로서 유력한 친구들을 둔 파체코로부터 문화적 교육을 받았고 지적인 르네상스 사상들을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스승의 학술적인 동료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모임에 소개되었다.
그는 1618년에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하여 그와 파체코의 끈끈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로는 솜씨 있게 그린 종교화와 풍속화가 있다. 스페인은 풍속화의 역사가 짧았고,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1620경)와 같은 작품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불어넣으며
새롭고 정직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펠리페 4세 시절 궁정 화가가 된 후 평생 궁정 화가로 지냈다.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펠리페 4세 일가(시녀들)>는 많은 토론거리를 남겼다. 고야, 마네, 피카소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2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신분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화가가 여럿 있었다.
당시만 해도 화가란 하나의 기능인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빈번했다.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주도했던 뒤러 같은 화가도 예술가가 아닌 일개 화공으로 취급받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을 여러 점 남겼다.
17세기 스페인 궁정회화의 대가로 불리는 벨라스케스도 젊은 시절부터
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신분 상승의 길을 모색했다.
당시 많은 스페인 지식인들이 성공을 위해 저마다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로 모였던 것처럼
세비야 출신 벨라스케스도 마드리드로 가서 많은 권력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를 곧잘 그리는 젊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명성은 어느덧 왕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궁정화가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벨라스케스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왕궁 근처에서 활동하며 궁정화가로 살았다.
<스물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23년경 궁정화가가 되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윤곽선이 화면의 짙은 배경에 묻혔는데 이 화법은 다빈치의 명암 대조법에서 유래한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 회화 예술의 표현 기법이 이미 스페인 등지의 서유럽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는 화가의 얼굴과 치켜 올라간 콧수염은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그림자 드리운 눈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면서 정서적으로 대립과 통일을 교묘하게 이룬다.
작품 속 화가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보인다.
화가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신분에 민감했던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근엄한 귀족처럼 보이려고 했던 의도가 담겨 있다.
작품 속 화가의 표정은 매우 거만하고 까다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그림만 보면 그를 영락없는 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흔 네 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643, 110×81cm,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마흔네 살의 자화상>은 벨라스케스가 1643년에 그린 것이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서 얼굴 전체의 4분의 3만 나타내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벨라스케스는 냉정하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카리스마도 발산한다.
중년에 들어서도 벨라스케스는 여전히 화가라는 신분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다.
자기 내면을 향한 솔직한 성찰보다는 외향적인 시선에 초점을 맞춰 자화상을 완성한 인상이 짙다.
벨라스케스와 교분을 나누던 베네치아의 한 작가는 그를 가리켜
"권위가 느껴지는 인물로 위엄이 있고 고상한 신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예술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평판이다.
벨라스케스는 순수 혈통을 지닌 귀족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고,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기사단의 제복을 입게 된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러한 신분이 예술가 벨라스케스를 다르게 평가하게 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피카소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들로부터 커다한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기사라는 작위 때문이 아닌,
미술사를 통틀어 너무도 위대한 〈시녀들〉이라는 걸작 때문이다.
<시녀들>, 캔버스에 유채, 1656, 318×276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165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최초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 (Madrid Alcàzar)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시녀들>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Antonio Palomino, 1653–1726)가 1724년 출간한
스페인화가들의 연대기 중 <시녀들>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팔로미노는 1678년에 마드리드를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던 궁정 인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을 작성하였다.
왼편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 자신과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데 사르미엔토(Doña Maria Augustina de Sarmiento),
마르가리타 공주 (Doña Margarita María of Austria), 다른 시녀인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Doña Isabel de Velasco),
우측 전경에 난쟁이 마리바르볼라(Maribárbola)와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Nicolasito Pertusato)가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인 도냐 마르셀라(Doña Marcela de Ulloa)와
확실치 않으나 왕비의 수행원인 돈 디에고 루이스(Don Diego Ruiz de Ascona)로 추정된다.
배경 중앙부의 좌측에는 거울에 비친 마리아나 왕비와 국왕 펠리페 4세의 모습이 보이고
그 우측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의 인물은
왕비의 시종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Don José Nieto Velàzquez)이다.
이렇게 다양한 실제 인물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시녀들>은 1666년 왕실 소장 미술품 목록에서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 몇몇 궁정 문서들은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라고 언급하였으며, 다시 그 이후의 문서들은
<가족도(El Cuadro de le Familia)> 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La familia de Felipe IV)>이라는 제목으로 기재하고 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 직업 및 외형적 특성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인물간의 관계에 있어 기반이 되는 태도와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시녀 도냐 마리아 아우구스티나의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와 다정한 친밀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한편,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다른 장르의 그림들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녀들>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국왕 부부가
실제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두 사람은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제작 중인 벨라스케스를 방문하여
화면 앞, 즉 관람자의 위치에 서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거나,
혹은 그 위치에서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이 화면 내부의 다른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보거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화면 안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반사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시각적 장치는 화면 내부의 재현된 세계와
화면 밖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자가 실질적으로 궁중 생활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관람자의 시선, 현실과 현실의 재현인 이미지, 실제와 환영의 관계가 교묘하게 얽히면서,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가지게 된다.
화면 왼쪽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화면 뒤쪽 벽에 걸린 두 점의 회화,
<팔라스와 아르크네(Pallas and Arachne)>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Contest of Pan and Apollo)>이 자주 언급된다.
벨라스케스의 사위인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Juan Bautista Martínez del Mazo, 1612-1667)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그림을 본 따 그린 이 그림들은
모두 인간의 '공예'를 뛰어 넘는 뛰어난 신적 '예술'의 승리를 주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 예술의 신성화, 그 우월성과 고결함에 대한 강조는
왕과 왕실 구성원의 등장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미술사학자 조나단 브라운(Jonathan Brown)은 르네상스부터 잘 알려져 있던 고대의 뛰어난 화가
아펠레스(Apelles)와 알렉산더 대왕의 관계를 <시녀들>에 대입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펠레스의 화실을 방문하여 그의 작업들을 칭찬하고,
그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벨라스케스 역시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유일한 화가였으며,
팔로미노의 기록에 따르면 펠리페 4세가 실제로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작업 공간을 방문한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벨라스케스는 회화가 공예 상품으로서 낮게 평가되던 17세기 스페인에서 자신과 국왕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왕의 예술적 취향을 반영하는 자신의 작품들이 가진 우월성과 고결성을 시각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녀들>에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화가로서의 영원한 명성을 보장해줄 뿐 아니라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 했던 벨라스케스의 목표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산티에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드러나는 상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림이 그려지고 3년 후인 1659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복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녀들>을 그릴 당시부터 이미 벨라스케스는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그림에 의도적으로 투영했음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실제 화실이 아닌
알카사르 궁전 내의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머물던 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방은 약 40점에 달하는 루벤스 회화의 모작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벨라스케스에게 특히 의미 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1631년에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루벤스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왕실의 높은 평가와 선호를 대변하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시녀들>의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결한 사화적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화면 왼쪽에서 화가는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잠시 멈춰서 모델을 관찰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 속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화판이 관람자를 등지고 세워져 있어서 화가가 그린 왕과 왕비의 모습은 화면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그림 밖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왕과 왕비이다.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그림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화면 중앙에 위치한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와
그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가 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에 숨겨진 주인공은 바로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벨라스케스만 알고 있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렇게도 열망했던 산티아고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단 본인의 모습이
비록 그림의 가운데는 아니지만 매우 비중 있게 담겨 있다.
붉은 십자가의 휘장은 그림 속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난장이와 자신의 신분은 엄연히 다름을,
이 그림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각인시키고 있다.
당시 그림 속 인물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위대한 작품이야말로 벨라스케스가
세상에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던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시녀들>은 17세기 스페인 화단을 대표하는 냉정하고 침착한 대가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왕, 왕비, 공주, 궁녀, 귀족과 하인 심지어 궁정의 어릿광대마저 모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주와 시녀들의 레이스 달린 의상은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되었다.
공주의 금발 머리도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사실적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섬세한 묘사는 사라지고 만다.
화려한 레이스 의상도 공주의 금발머리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붓 터치가 거칠다.
그러나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보면 그림 속 섬세함이 다시 살아난다.
이 작품이 과연 17세기에 그려진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벨라스케스의 색채감과 원근감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빛을 발산한다.
<계란을 부치는 노파>, 캔버스에 유채, 1618, 100.5×119.5cm,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
계란을 부치는 노파에서 교황까지, 계급을 뛰어넘는 작품 속 모델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가 되기 전인 1617년부터 1623년까지 고향 세비야에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보데곤'(bodegónes)을 주로 그렸다.
보데곤의 원래 의미는 싸구려 술집 또는 음식점을 말하고,
여기서는 세비야 지방 화파에서 유행하던 하층민의 삶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그가 열아홉 살에 그린 〈계란을 부치는 노파〉는 대표적인 보데곤 작품이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623
마드리드로 진출하면서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 모델의 신분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1623년, 스페인의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 1587~1645)는 그를 불러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작품을 본 왕은 매우 만족했고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펠리페 4세는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198×101.5cm. 1623~1628년 제작. 프라도 미술관 1층 12실
펠리페 4세가 즉위한 해는 스페인 지배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와
12년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전쟁의 불씨가 붙던 시점이었다.
결국 1648년 펠리페 4세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해
이 지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즉위 당시 겨우 열여섯 살이었던 펠리페 4세는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에게 국사를 대부분 맡겨버리는
실정을 저지르긴 했지만,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정과 심미안이 지극한 왕이었다.
그는 스페인과 영국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외교관이자 화가로 방문한 루벤스를 특별히 아껴
그의 작품을 상당수 수집했고, 벨라스케스를 기용하여 스페인 미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은 모두 펠리페 4세 시절 활동한 화가였다.
펠리페 4세의 전신상은 벨라스케스가 1625년에 완성했다가
3년이 지난 뒤 다시 수정한 것이다.
그림에는 왕의 왼발이 마치 두 개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벨라스케스가 수정하여
덧씌운 물감 일부가 깎여나가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 캔버스에 유채. 58×44.5cm. 1628년경 제작.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갑옷을 입은 펠리페 4세〉에서, 왕은 이전 시대 고위층이 즐기던 화려한 주름이 사라진,
접시 모양의 작고 단순한 깃을 목에 두르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국운은 쇠퇴하고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빠지면서
펠리페 4세가 시행한 사치 규제법이 왕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캔버스에 유채, 1650, 140×120cm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잠시 여행하던 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 1574~1655)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교황이 입은 호화스러운 옷을 정교하게 그려낸 것은 직물 묘사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대가적인 감각을 보여주며,
교황의 뾰로통한 표정은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그의 타고난 능력을 보여준다.
교황은 자신의 초상화를 본 뒤 "이렇게 똑같을 수가!"라고 감탄했다.
사실, 교황은 이 작품을 너무 사실적이라고 말하며 처음에는 싫어했다.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20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명한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교황'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림 속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당시 일흔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강렬한 카리스마와 위엄이 넘쳐 보인다.
신도들 역시 회당 안에 걸어둔 이 초상화를 보고 실제로 교황이 앉아 있는 줄로 알았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들이 과장을 통해 고전미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표현 양식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도냐 마리아 마르가리타 공주>, 캔버스에 유채, 1660, 212×147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벨라스케스가 말년에 그린 <마그리트 공주>는 화가로서의 재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는 물감을 매우 두텁게 바르고 뚜렷하면서도 잦은 붓 터치로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하려 했다.
공주의 드레스는 원래의 질감까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배경에 육중하고 어두운 계열의 색을 사용한 반면
의상과 장식품에는 강렬한 보색으로 색채의 대비를 줘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17세기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벨라스케스만의 화법은
19세기 인상주의 회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열두 살 때 세비야 미술계의 대표 인물인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에게서 사사했고 1
617년 문하생으로서의 수련이 끝나자 직업화가가 되었다.
이후 거처를 마드리드로 옮긴 뒤 1623년에 국왕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왕의 신임을 얻어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 벨라스케스에 대한 펠리페 4세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는데,
왕은 "내 모습은 벨라스케스만 그려야 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한편, 펠리페 4세의 신임은 궁정화가로서의 벨라스케스의 역할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는 1627년부터 궁정의 내무를 감독하는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이 일로 그의 명망은 높아졌으나 궁정의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했다고 미술사가들은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벨라스케스는 왕실에서 소장하는 훌륭한 예술품들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마드리드의 궁정에서 보냈다.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기도 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더 없이 영예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벨라스케스'가 주인공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왕의 화가'였다.
그래서일까? 위대한 걸작 <시녀들> 속에 서 있는 벨라스케스는 기사 작위를 받은 고명한 인물로서가 아닌,
그저 궁정의 시녀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귀족 못지 않는 신분을 얻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그를 수많은 명화를 남긴 한 사람의 화가로 기억할 뿐이다.
참고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60000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7349&cid=44533&categoryId=4453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10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