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사르를 떠나서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수도교 앞 오리엔트 광장으로 간다.
점심식사로 꼬르데로라고 하는 수프와 빵, 새끼양고기와 생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후 2시경 버스를 타고 근교에 있는 라그란하 궁전으로 이동.


산일데폰소(San Ildefonso) - '라그란하(La Granja)'라고도 한다.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산일데폰소(San Ildefonso)는

세고비아시 바로 남동쪽, 페냘라라 산맥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1450년경 엔리케 4세가 세운 여름 휴양지에서 비롯된 이 시는

1477년에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에 의해 히에로니무스회 수사들에게 넘겨졌다.


그후 1720년에 수사들이 부르봉 왕가의 첫 스페인왕 펠리페 5세에게 이곳을 팔았으며,
펠리페 5세는 프랑스의 베르사유와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여름 궁전과 비견될 만한 궁전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예술가 테오도로 아르데만스는 16세기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의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양식을 본떠 궁전을 설계했으나
필리포 주바라와 조반 바티스타 사케티를 비롯한 프랑스·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이를 수정했다.


아름다운 원형 천장과 2개의 탑이 있는 궁전 부속 예배당에는
프란시스코 바이에우 이 수비아스가 그린 프레스코와 펠리페 5세와 그의 부인 이사벨라 파르네세의 무덤이 있다.


프랑스의 조경 설계사 에티엔 부텔루가 조경한 정원에는 분수가 많으며,

왕의 거소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들 중 어떤 것들은 플랑드르에서 만든 것들이며,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에서 따온 무늬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이 궁전은 1918년에 화재로 손상되었으나 여전히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728년 라그란하에 왕립 유리공장이 세워졌다.

라그란하는 스페인 역사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펠리페 5세의 폐위(1724), 여러 가지 협정체결(특히 1796년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맹협정),
페르난도 7세가 여성 세습자의 왕위계승을 금지했던 살리카 법전(프랑크계 살리족의 법전)을

폐지하는 국사조칙을 선포한 일(1830) 등이 있다.


라그란하 여름궁전으로 들어가기 전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으로 들어가기 전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외관 - Royal Palace of La Granja


라그란하 여름궁전 방문 인증샷


라그란하 여름궁전 조형물


라그란하 여름궁전 조형물


궁전과 마주보고 나있는 정원의 큰 길과 계단형으로 만들어진 분수들


계단형으로 만들어진 정원 분수 위에서 궁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원



라그란하 여름궁전을 출발하여 남서쪽으로 67km 떨어져 있는 아빌라(Avila)를 향한다. 50분 소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빌라(Avila) 풍경


버스는 오후 3시경 아빌라가 잘 보이는 도로변의 전망대,
로스 쿠아트로 포스테스(4개의 기둥) 전망대에서 잠시 정차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아빌라는 완벽하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다.
높은 성벽 위에 원형의 망루가 촘촘하게 성벽을 둘러싸고 있다.


주로 중세 성벽은 언덕이나 절벽 등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여 그 위에 성을 쌓았는데,
아빌라 성은 자연조건을 이용하기보다는 완전히 사람의 힘으로 높은 성벽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빌라는 마드리드 북서쪽 85km 지점에 위치한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해발 고도 1,131m로 스페인 도시 중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아빌라 구시가지는 중세에 지어진 단단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12세기 무어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다.


성벽의 둘레 2,516m, 높이 12m, 9개의 성문, 그리고 88개의 원형 망루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성벽 길을 따라서 늘어서 있다.


 성벽 안의 풍경


성벽 안의 풍경


성벽의 안쪽에도 성벽만큼이나 오래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성벽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빌라 구시가지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벽의 동쪽에 있는 16세기 건물,

카르니세리아의 집을 통해 성벽 안으로 들어간다.


카르니세리아의 집은 원래 와인 저장고와 정육점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관광 안내소로 이용하고 있다.


카르니세리아의 집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니 회색빛 건물들과

황토색 성벽이 어울려 고풍스럽고 우아한 중세 시대의 세트장으로 들어선 기분이다.


아빌라 대성당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아빌라 대성당이 나온다.
아빌라 대성당의 한쪽 벽이 성벽의 일부로 지어진 요새를 겸한 14세기 성당으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아빌라 대성당


 메르카도 치코 광장 (정면이 아빌라 시청)


중세 시대 골목길을 따라서 구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메르카도 치코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의 북쪽에는 아빌라의 시청 건물이 있으며,

1층 외벽이 아치로 이어진 중세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다.


 산타 테레사 수도원


다시 골목길을 지나서 성벽의 남쪽, 라 산타 광장에 있는 산타 테레사 수도원으로 간다.

아빌라 성벽과 함께 아빌라를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중세 가톨릭 혁신을 주도한 테레사 성녀이다.


산타 테레사는 1515년 아빌라에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귀족 집안의 12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7세 때 순교 성인전을 읽고 오빠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서 순교자가 되겠다고 가출한 일도 있다.


20세에 아빌라의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기도하며 환자 돌보는 일에 매진한다.
천사의 창으로 가슴을 찔린 환시를 체험한 테레사는

1562년 '기도와 침묵'이라는 엄격한 수도생활 규율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시작하면서 아빌라에 '성 요셉 수녀원'을 창립했다.


이후 그녀가 설립한 수도원은 총 32개였다.

1582년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는 중세 가톨릭의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테레사 성녀가 태어나고 수녀가 된 이후 27년간 사역했던 아빌라에는

그녀의 족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녀의 족적을 더듬어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아빌라를 찾고 있다.


 테레사 성녀의 동상


산타 테레사 수도원 앞 라 산타 광장에는 테레사 성녀의 동상이 서 있다.
오른 손엔 펜을 들고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레사 성녀의 동상,

마치 이 땅 위에 왜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은지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모습 같다.
테레사 성녀가 태어난 자리에 지어진 수도원은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산타 테레사 수도원 내부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 구시가지 거리 풍경


 아빌라의 마르케스 산토 도밍고 거리


 아빌라성 내부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 전경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 골목


아빌라성 골목


아빌라성(무랄라)


아빌라성(무랄라)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아빌라(Avila) 성 관광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와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공원으로.


마드리드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에스파냐의 도시 공원 중 최대 규모이다.
원래는 왕실 사냥터로 사용했던 곳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이클링, 피크닉, 산책, 일광욕, 야생동물 관찰 등 다양한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으며
편안한 휴식도 취할 수 있어 주말이면 50만 명 이상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방문한다.


공원 안에는 넓은 호수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소나무 숲에는 다람쥐와 야생 토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어 자연 학습의 장으로 많이 이용된다.


공원 내에 조성된 마드리드 동물원 및 수족관(Zoo Aquarium de Madrid)도 인기 있는 장소이다.
이 공원 안의 전망대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는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면
누구나 한 번은 이용하는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다.








카사데캄포(Casa de Campo) 공원 관람을 마치고 시내 한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로 이동하여 하루 일정을 마감한다.


참조 : https://blog.naver.com/come1747/221328229407

https://cafe.naver.com/hotellife/589432
http://cy.cyworld.com/home/40331097/post/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1391a

https://blog.naver.com/novisakkk/22034605425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70255&cid=51778&categoryId=5177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17277&cid=40942&categoryId=31922




 수도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리엔트 광장 전경


수도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고비아 진입로 방향 전경


캄포 광장에는 왼손에 칼을, 오른손엔 깃발을 들고 있는 동상이 우뚝 서있다.


  캄포 광장


산 마르틴 성당

캄포 광장 앞에 아치로 만든 회랑이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마르틴 성당이 있다.



      산 안드레스 성당

      마요르 광장에서 대성당 앞으로 이어지는 마르퀴스 델 아크로 카예를 따라가면

왼쪽으로 메르세드 공원이 있고, 그 앞에 산 안드레스 성당이 있다.


알카사르(Alcazar)


알카사르란 아랍어로 성채란 뜻.

알카사르는 로마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 13세기, 19세기에 확장, 복원되었다.


높이 80m의 망루, 궁전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움직이는 다리를 지나 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에스파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불리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른 요새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만화영화 백설공주가 살았던 성의 모델이 바로 이곳이다.
1474년 12월 13일,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즉위식을 가졌던 곳으로

스페인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사벨 여왕은 페르난도 왕과 결혼한 뒤

1492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을 다시 통합한 통치자이다.
나아가 콜럼버스를 후원하여 신대륙 발견에 큰 역할을 한 여왕이기도 하다.






 알카사르 내부



성채 내부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청색 아라베스크 벽면과 아치 형태가 매우 돋보인다.


특히 각 방의 천정 장식이 독특한데,

마치 티베트 사원을 연상하듯이 붉은색 계통의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한 방에는 백설공주의 침대가 놓여 있다.






 성채의 벽 중간 중간 뚫린 창으로는 멀리 계곡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자로 잰듯 잘 정비된 정원


 알카사르(Alcazar)를 나와서 중세부터 보존되어 온 고풍스런 골목길을 걸어 내려온다.






참조 : http://sopia888.tistory.com/319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jina84&logNo=221345609709







<2006.03.07>

아침 6시 30분 경에 일어나서 Husa Princesa 호텔을 나와 근처에 있는 에스파냐광장(스페인광장)을 찾았다.

호텔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먼동이 틀 무렵이어서 좀 어둑어둑한 편이다.


에스파냐광장은 주위보다 다소 높은 곳에 있어서 마드리드 시내가 잘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좀 늦게 일어나는 편인가 보다.


광장에 나와 운동하는 사람이 두어 명 뿐이다.

광장은 마치 공원처럼 나무도 많고 주변이 탁 틔어 있어 시원스럽다.


무엇보다 거리에 쓰레기가 전혀 없을 만큼 깨끗했다.

스페인은 어디를 가더라도 골목까지 청소가 잘 되어 있어 무척 깨끗하다.


에스파냐광장(스페인광장)


마드리드의 최고 번화가인 그란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있다.
사람들이 풀밭에 눕거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광장 중앙에는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작가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 있다.


탑 앞에는 에스파냐의 유명한 작가 세르반테스 동상과 소설 속 두 주인공인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날씬한 돈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뚱뚱한 산초판자 동상이 있다.

호텔로 돌아와 1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9시 10분 세고비아를 향해 출발한다.



세고비아(Segovia )

스페인 중북부 카스티야 주의 도시.


마드리드에서 북쪽 바야돌리드 방향으로 50km 가량 가면 나오는, 고즈넉한 인구 6만의 작은 도시이다.
마드리드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하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며,
시내에 웅장히 서 있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로마 유적이다.


수도교는 16세기에 보수 공사를 거쳐 20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외에 디즈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백설공주에 영감이 되어준 알카사르 성도 인기가 높다.



 세고비아로 들어서기 전에 버스가 잠깐 멈춘다.

 안개가 잔뜩 머금은 날씨에 멀리 백설공주의 전설이 어린 알카사르(Alcazar) 성이 참으로 신비롭게 보인다.


 백설공주


널리 알려진 백설공주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왕비가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실수로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자 피 한방울이 흑단으로된 창틀에 쌓인 흰 눈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을 본 왕비는 "이 까만 흑단같은 머리결에 흰 눈같은 피부에 이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딸을 가졌으면"하고 소망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는 아이를 가졌고 소원한 것과 같이 흑단같이 까만 머리결에
흰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딸을 낳았고 아이 이름을 백설공주라 지었다.


그러나, 왕비는 백설공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새로 맞이한 왕비는 아름다웠으나 허영심이 많았다. 특히, 욕심이 많은 마녀였다.


왕비는 마법 거울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 저러한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하였다.
이를테면 왕비가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라고 물으면,

거울은 "여왕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백설공주가 점점 아름답게 자라 일곱살이 되었을 때 왕비가 거울에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그러자 거울은 "왕비님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백설공주가 더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판본에서 거울은 그저 "백설공주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질투심에 휩싸인 왕비는 사냥꾼에게 백설공주를 숲으로 데려가 죽이고

그 증거로 심장을 가져오라 명령한다.


숲으로 백설공주를 데려간 사냥꾼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숲 속으로 도망가라 이르고는 대신에 어린 멧돼지의 심장을 가져간다.
왕비는 심장을 요리하여 먹어버린다.


숲 속에서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을 발견한다.
난쟁이들은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집을 돌봐 준다면 머물러도 좋다"고 백설공주를 받아들인다. 


세월이 흐른후 또다시 거울에게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은 왕비는

백설공주가 살아있고 여전히 자기보다 예쁘다는 답을 듣게 된다.


이후 왕비는 백설공주를 없애고자 세 번에 걸쳐 난쟁이의 오두막을 찾는다.

세 번째 찾아가 건넨 독사과를 먹고 백설공주는 쓰러진다.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있는 백설공주를 발견한 난쟁이들은 크게 슬퍼하며

유리로 된 관에 백설공주를 눕힌다.


시간이 흘러 숲을 지나던 왕자가 유리관에 놓인 백설공주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왕자는 난쟁이들에게 사정하여 유리관을 얻는다.


숲을 지나 유리관을 옮기는 동안 유리관이 덜컹거리자

목에 걸린 독사과가 빠져나오고 백설공주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왕자는 매우 기뻐하고 백설공주와 결혼한다.


한편 왕궁에 돌아온 왕비는 의기양양하게 거울에게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묻는다.
거울은 "왕비님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새로 왕비가 된 백설공주가 당신보다 천 배는 아름답습니다"하고 대답한다.


양녀가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이웃 나라의 왕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왕비는

그 길로 백설공주의 결혼식장으로 달려간다.


결혼식에 나타난 왕비는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된다.
왕비에게는 빨갛게 달구어진 쇠구두가 신겨졌고, 왕비는 죽을 때까지 춤추듯 뛰어다녔다.


백설공주는 반 신화화된 실존 인물의 설화와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독일의 신화가 결합된 것이라 한다.
이미지의 주인공은 역사상 실존하였던 마르가레테 폰 발데크(1533년–1554년)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마르가레테는 발데크의 탄광촌에 살았던 아름다운 처녀였다.


당시 탄광촌에서는 "난쟁이"처럼 작은 어린이들이 갱도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백설공주와 같이 마르가레테 역시 계모에게 시달려야 했다.


마르가레테는 16세가 되던 해 브뤼셀에 가게 되었고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몇몇 귀족들과 교제가 있었다.


펠리페 2세는 마르가레타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르가레테는 무슨 까닭에선지 독살되고 말았다.


중세에서 왕가의 결혼은 서로간의 영토문제를 해결하고 동맹을 유지하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에 모종의 음모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마르가레타는 21세가 되던 1554년 사망하였고

그녀 스스로가 기록한 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경련으로 고통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백설공주와는 달리 마르가레테가 독살되었을 당시 계모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애달픈 죽음은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고 이후 많은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독일의 전설에 의하면 구박받다가 집에서 쫓겨난 공주가

난장이들에 의해 구제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시골에 왕과 왕비가 존재하였다.

그들에게서 딸 백설공주가 태어났는데, 미모가 수려하였고

그의 아버지 왕은 그를 편애하였지만 어머니인 왕비는 딸을 오히려 미워하였다.


백설공주는 아버지 왕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매우 오만하게 행동했다.

왕비는 공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궁에서 쫓아낸다.
이때 어느 야산에서 난쟁이들에게 구제된 백설공주는 그들의 집에서 생활했다 한다.


한편 공주를 쫓아낸 왕비는 사냥꾼을 시켜서 공주를 암살하고

간을 빼서 가져오게 한 뒤 사냥꾼의 입을 막기 위해 사냥꾼을 살해한다.


사냥꾼은 공주를 죽이지 못하고 곰을 한마리 사냥한 뒤,

곰의 간을 빼서 왕비에게 증거로 갖다 바쳤던 것이다.


왕비는 딸인 백설공주를 목을 졸라 죽이려 했지만

일곱 난장이가 풀어주어 위기를 모면했다.


공주는 독이 든 사과 또는 약물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고

독이 묻은 참빗으로 머리를 빗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후 한 귀공자가 숲을 지나가다가 일곱 난장이에 의해 장례식이 치뤄지던

백설공주의 시신을 보고 그녀를 치료해서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공주의 복수를 위해 친어머니인 왕비를 무도회에 초청한 후 납치,

불에 달군 쇠몽둥이 혹은 쇠구두로 고문하여 죽게 한다.


원래의 중세 독일에서 떠돌던 전설에 의하면

친어머니가 딸의 아름다움을 질투해서 쫓아냈다고 구전되었지만
그림 형제는 이를 아이들의 정서를 생각하여

친어머니가 아니라 계모인 것처럼 각색하여 발표하였다.


백설공주는 왕비의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고 다시 되살아난 후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독이 몸에 남아있어 결국은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의 한 숲속 깊은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수도교


수도교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 때 건설되었고 1906년까지 고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체 길이 728m, 최고 높이 약 30m에 167개의 2층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잘 다듬은 화강암을 끼워 쌓아올렸다.


수도교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다리로, 지형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물을 원하는 곳까지 끌어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아치 윗단 니치 부분에는 성인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1906년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물을 공급해 오다가 지금은 수도관이 그 위를 지나고 있다고.


  수도교의 건축 원리





 세고비아 대성당


대성당은 1525∼1768년에 걸쳐 고딕양식으로 건설되었고 수십 개의 첨탑을 하늘로 뻗어 있다.
가로 50m, 세로 105m, 신랑 높이 33m의 웅장한 규모이다.

3개의 볼트식 신랑과 익랑, 돔, 중앙후진, 7개의 예배실 등이 있다.
부속 박물관에 회화, 보물과 함께 유아의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유모의 실수로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엔리케 2세 아들의 묘비이다.
왕자를 실수로 죽게 한 유모도 즉시 그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85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고 내려져 누어 있는 예수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2006.03.06>

인천공항에서11시 20분에 함께 동행하는 분들과 미팅이 있었다.  

마드리드는 직행편이 없어서 프랑스 파리를 경유하여 갈아타야 한다. 


13시 55분발 대한항공이 인천항을 이륙한 것은 14시 15분경. 20분 정도 지연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것이 한국시간으로 새벽 1시 37분,

현지시각으로는 오후 5시 37분(8시간 시차)이니 11시간 3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오래된 공항이어서인지 파리 샤를드골공항은 상당히 혼잡스러웠다. 

터미널이 4개(A,B,C,F)로 나뉘어 있다.


 파리 샤를드골공항 조감도


파리 북쪽 25km에 위치한 프랑스의 대표적 국제공항으로 유럽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이다.
1974년 3월 개항했는데, 프랑스 전 대통령인 샤를 드 골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1945년 설립된 파리공항관리공단이 운영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승객 면에서 세계 7번째로 바쁜 공항이자 런던히드로공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바쁜 공항이다.


비행 횟수로는 2010년 기준 세계에서 10번째, 유럽에서는 가장 바쁜 공항이다.

공항 면적은 32.38㎢. 여객 터미널 3개와 화물 터미널 1개를 갖추고 있다.


제1터미널은 가장 오래된 터미널로 낙지 모양의 혁신적 디자인을 취했다.

제2터미널은 7개의 부속 터미널들로 이루어진 전통적 양식의 터미널이다.


2007년부터 경전철(CDGVAL)이 운행돼 4개의 터미널과

기차역, 주차장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파리의 지하철 네트워크와 고속철도(TGV)를 통해 파리와 프랑스 전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노선의 버스가 파리까지 운행된다.


 마드리드행으로 환승하기 위해서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해서 공항 면세점을 둘러 보았다.


인천공항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난생 처음 유럽땅을 밟고 서 있다는 묘한 감정에 이끌려 아이쇼핑을 하다가 ~


프랑스 파리에 와 있다는 걸 기념하기 위해서 왼쪽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하나 샀다.


파리에서 20:00에 출발하여 22:05분 늦은 밤에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Barajas Airport)공항에 도착,

20여 분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시내 중심부에 있는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바라하스 국제공항(Barajas Airport) 마드리드 중심부에 있는 국제공항


휴사 프린세사( Husa Princesa) 호텔에서 3박을 묵었다.



마드리드 시내 ⓒ falco/Pixabay | Public Domain


마드리드(Madrid)


스페인의 수도. 이베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스페인 제1의 경제도시이다.


도시 어원에 대해서는 아랍어로  '수원(水源 물의 원천)'을 뜻하는

'마헤리트[Majerit, 알 마즈리트(المجريط)]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인구 3,255,950명. 또 다른 전설로는 딸기 나무와 곰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한 소년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열매를 따고 있었는데 한참 따다가 밑에 보니까

곰이 소년이 내려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구하겠다고 딸기 나무 쪽으로 달려오자,

소년이 어머니에게 외친 한 마디가 '마드레 이드(¡Madre, id!, '엄마, 도망가!')'였고,

여기에서 마드리드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


이 지방은 대체로 하라마 · 에나레스 · 만사나레스 강이 흐르는

과다라마 산맥(2,430m)의 남쪽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복이 별로 없는 중부 고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전형적으로 황토와

탁 트인 곡창지대인 카스티야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스페인 내란(1936~39) 동안에는 몇 차례의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산맥의 경사면에 있는 소나무 숲은 마드리드 시(마드리드 주의 주도이자 스페인의 수도)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유형의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에나레스 강과 하라마 강을 따라 관개가 되는 두 줄기의 지역에서만

집약적인 원예가 이루어지고 있고, 대(大)마드리드의 외곽에는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별장과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가금과 돼지 농장들도 군데군데 있다.


과다라마 산맥에 화강암 채석장들, 남쪽에 점토지대가 있어서

마드리드 주에는 건축자재가 충분하게 공급되고 있다.


중요한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이 지방 중앙에 있는 산악지대에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는 고개가 몇 개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북동쪽에 있는 소모산 고개(1,417m)에는 도로와 부르고스 철도가 지나며,
나바세라다 고개에는 마드리드 - 세고비아 철도가 지난다. 전국의 주요철도는 모두 이 지역을 지난다.



마드리드 근교

중북부 방향으로 세고비야 (Segovia), 북서 쪽으로 아빌라(Avila), 

남서 방향으로 톨레도(Toledo), 남쪽으로 아란후에스(Aranjuez)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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